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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정증보판 [백일법문]출간에 붙여
어느 해 불필스님이 "나도 이제 칠십이 다 되어 갑니다. 제방선원에서 참선하는
수좌스님들이 큰스님들의 법문 테이프를 청취하며 열심히 정진한다고 들었습니다.
성철 큰스님 백일법문을 잘 정리해 수좌스님들에게 법보시하고 싶습니다. 스님이
정리해 주셨으면 합니다."고 말씀하시기에, "그렇게 하겠습니다."는 대답을 드리곤
새삼 저의 게으름을 뉘우쳤습니다. 큰스님께서 해인총림海印叢林 초대 방장 方丈에
취임한 1967년, 그해 동안거를 맞아 백일 동안 법문하셨고, '백일법문'당시의 녹음
테이프를 정리해 상.하 2권으로 된 [백일법문]을 4반세기가 지난 1992년 출판한 뒤
"이만하면 큰스님 일을 다 했다."는 생각에 무심히 세월을 보내고 있었기에, 불필스님의
말씀을 듣는 순간 '미처 세밀히 살피지 못한 아쉬움'이 갑자기 물밀듯이 밀려왔기 때문
입니다.
백련암에 돌아와 법문 녹음테이프를 찾아보니 모두 100여 개 남짓 되었습니다. 꼼꼼하게
다시 들어본 결과, 1992년 4월 30일 발행한 [백일법문]에 법문 내용이 상당히 누락되어
있음을 발견했습니다. 순간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으며 '왜 이런 일이 일어났는지'
차근차근 짚어보았습니다. 시간을 되돌려 백련암 원주스님으로부터 백일법문 테이프를
처음 받았던 때를 회상해 보았습니다. 1972년 봄 백련암에 출가한 이래 성철 큰스님께서
말씀하신대로 참선하다 몇 년 만에 상기병을 얻어 화두를 제대로 챙기지 못하고, 답답한
세월만 보내고 있었습니다. 그러다 원주스님으로부터 큰스님 백일법문 이야기를 듣게
되었고, 사형인 원명스님이 백일법문 당시 릴 테이프에 녹음됐던 것을 누구나 쉽게 들을
수 있도록 카세트테이프에 복사한 사실도 알게 되었습니다. 상기병도 다스릴 겸 해서
큰스님 모르게 원주스님에게 백일법문 테이프를 한 개씩 받아 다 듣고는 되돌려주는 식으로
백일법문을 접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법문을 들을 때 뿐, 지나고 나면 무슨 법문을 들었는지 기억에 남아 있질 않았습니다.
원주스님에게 말씀드리고 테이프를 들을 때마다 녹취록을 만들기로 결심했습니다.
물론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큰스님께 들키지 않으려고 작은 카세트 녹음기에 한 쪽짜리 이어폰을 꽂고 테이프를 수없이
돌리며 들었는데, 어찌나 말씀이 빠르고 사투리를 섞어 쓰시는지 받아 적기도 힘들고 양도
많았습니다. 그렇게 녹취한 것이 초판본 [백일법문] 출간의 토대가 되었습니다. 열심히
했다고 생각했는데, 내용이 많아 누락된 것을 확인하는 순간 당시에 잘못이 있었음을
깨달은 것입니다. 백일법문 자료를 완벽히 갖추어 놓고 차례 차례 녹취록을 만들어야
했었는데, 테이프를 한 개씩 받아 녹취하다 보니 본의 아니게 빠진 부분이 생기고 말았던
것입니다.
2004년 3월 25일, 100여 개 넘는 테이프를 정리해 MP3용 CD 세 장 (CD1: 불교의 본질,
원시불교사상의 중도, 현대과학과 불교, CD2: 불교와 현대 물리학, 유식, 중관, 천태, 화엄
사상의 중도, CD3: 선종사상과 중도, 신심명 강석, 돈오점수 비판)과 강설에 인용된 원문을
담은 [성철스님 백일법문 노트]라는 작은 책을 발행해 전국 선원에 법보시로 배포했습니다.
당시 작업을 맡았던 성철 선사상연구원의 최원섭 연구원이 "스님, 제가 큰스님 법문이
좋아서 여러 번 들었는데, 지금 유통되는 [백일법문]은 큰스님 뜻을 제대로 전하고 있다고
보기에는 뭔가 부족합니다. 백일법문 CD 세 장을 새로 제작하였으니, 녹음테이프를 다시
정리해 법문집을 새롭게 만들었으면 좋겠습니다."고 여러 번 저에게 건의했습니다.
눈앞에 놓인 성철큰스님기념사업 등으로 시간을 내지 못하고 차일피일 미루다 2007년경
'성철스님 탄신 100주년 기념법회' (2012년)에 맞춰 [백일법문]을 다시 발간하기로 결정
했습니다. 상권은 재출간을 재안한 최원섭 연구원이 녹취.정리하고, 하권은 제가 맡았
습니다. 저도 출가 후 15,6년 동안 백련암 밖으로 거의 나가지 않는 동구불출洞口不出의
생활을 했기에, [백일법문] 초고와 큰스님 법문집 원고 대부분을 혼자서 정리하다시피
했었습니다. 그때를 생각하며 하권 녹취를 시작했으나 백련암 초기 수행시절 만큼의
집중력이 생길 리 만무했습니다.
주변에 일을 할 수 있는 분을 수소문해 3여 년 만에 하권 녹취를 완성했습니다. 몇 번의
윤문을 거쳐 하권의 초고가 제 손에 왔을 때는 이미 '성철스님 탄신 100주년 기념법회'가
지난 뒤였습니다. 상권의 원고도 늦어져, '성철스님 열반 20주기 기념법회' (2013년)도
자나가 버렸습니다. 이런 저런 어려운 과정을 거쳐 올해 5~6월경 원고가 와성되었는데,
1992년 초판본과는 달리 3권의 [백일법문]으로 내야 할 정도로 분량이 늘어났습니다.
저는 [백일법문] 3권의 가제본을 받아들고 큰스님께 얼마나 참회를 올렸는지 모릅니다.
지난날 그렇게 서툰 [백일법문]을 받으시고 아무말 없이 묵묵히 계셨던 큰스님의 마음이
어땠을까를 생각하니, 너무나 송구스럽고 죄스럽고 부끄러운 마음을 감당할 수 없었습니다.
서둘러 책을 내려고 하는데, 원고 윤문을 맡은 스님들이 저에게 간곡한 부탁을 해 왔습니다.
"스님, 이번에 [백일법문]을 다시 내면 또 누가 이 일을 하겠습니까? 너무 서두르지 마셨으면
좋겠습니다. 큰스님 말씀을 그대로 살리려고 하다 보니, 문투가 너무 구어체로 풀어져
있고, 게다가 강설에서 강조하기 위해 반복해서 하신 말씀들이 육성으로 들으면 문제가
없지만 그대로 문장으로 옮겨 놓아서 큰스님의 간결하며 극명한 어법을 오히려 훼손하고
있습니다. 이대로 책을 내면 자칫 독자들로 하여금 흥미를 잃고 책을 놓게 만들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듭니다. 큰스님의 [백일법문]은 우리불교 역사상 전무후무한 법문입니다. 그
어느 불교학자도 할 수 없는 일을 큰스님께서 하신 것입니다. 이 백일법문은 성철스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큰선물입니다. 마치 캄캄한 밤에 환한 등불이 비춰지는 것과 같습니다.
저희들은 [백일법문]을 윤문하고 교정보는 것만으로도 환희심이 나고 출가자로서의 자긍심이 느껴집니다. 그러니 큰스님의 강설에 맞춰 번역문과 한문 토를 수정하고 정리할 수
있도록 시간을 주십시오."
윤문하는 스님들의 "문투가 너무 구어체로 풀어져 있다."는 말을 듣는 순간 저는 마른 하늘
에서 천둥번개가 치는 듯한 충격을 받았습니다. "지금 원고 수준이, 큰스님으로 꾸중을
들었던 그 옛날의 '덕산탁발화'수준과 같구나."하는 생각이 섬광처럼 스치고 지나갔습니다.
제가 백련암 뒷방에서 원주스님에게 받은 백일법문 테이프를 들으며 녹취록을 만들고
있을 때 일입니다. 어느 날, 마침내 큰스님께 들키고 말았습니다.
"뭐 하노, 이놈아!"
"스님, 백일법문을 녹취하고 있습니다. 지금은 상당법어를 하고 있습니다."
"네 놈이 뭘 안다고 상당법어를 듣고 있어? 뭘 알긴 알겠느냐?"
"아닙니다. 무슨 말씀인지 한 말씀도 못알아듣겠습니다."
"그러면 그렇지! 내일 새벽예불 마치고 '덕산탁발화德山托鉢話'를 가지고 와 봐라."
갑자기 큰스님께서 훗날 출간된 [본지풍광]의 제 1칙인 '덕산탁발화'법문을 녹취해 오라고
하시니 눈앞이 캄캄했습니다. 밤늦도록 녹음을 듣고 또 듣고 원고를 몇 번이나 고치면서
녹음기에서 들리는 다 한 자도 빠지지 않았는지 검토하여 다음날 새벽예불을 마치고
큰스님께 보여드렸습니다. 잠시 침묵이 흐르고 나서 불호령이 떨어졌습니다.
"누가 이렇게 번역했노? 글은 간단 분명하게 뜻을 전해야지 이렇게 늘어지게 구어투로
하면 누가 보겠느냐? 나는 법상에서 이런 법문 안했다. 이놈아! 뭘 듣고 이렇게 늘어터진
글을 가지고 왔노. 나가라, 이놈아! 내일 새벽에 다시 가지고 와라."
말하자면, 글 번역이 문어투가 아니라 구어투여서 불호령이 떨어졌던 것입니다. 그러나
저로서는 녹음기를 통해 들리는 말씀과 다르게 문장을 만든다는 것은 생각할 수도 없는
일이어서 몇 번이나 반복해 들어 봤지만 한 자도 더 고칠 것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다음날
새벽에도 똑 같은 글을 갖다 드릴 수밖에 없었고, 그 다음날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마침내
큰스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안 되겠다. 내일 새벽부터 내가 직접 구술하겠다."
큰스님께서 문어투로 직접 해석을 하신다는 말씀이었습니다.
시간이 지난 뒤, 스님들이 윤문한 가제본 [백일법문]을 읽어보았습니다.
원고 전체 분량의 반쯤에 이르러 "오늘까지 인도불교인 근본불교, 중관.유식에 대한
설명을 마칩니다. 내일부터는 중국불교인 천태, 화엄, 법상, 선종의 중도를 설명합니다."는
구절이 나옵니다. 이에 근거해 이번 [백일법문]은 3권으로 나누었습니다.
상권에는 불교의 본질, 중도사상, 근본불교, 인도 대승경론의 중도, 중관.유식을 정리해
인도불교편을 담았습니다. 중도사상 이후는 절節과 항項에서 제목은 같으나 순서가
전보다 많이 바뀌어 있습니다. 중권에 들어간 화엄종, 심론종의 중도사상 순서에는 변화가
거의 없고, 본래 법상종의 중도사상에 있던 인도의 유식사상은 상군으로 옮겼습니다.
그러나 천태종의 중도사상은 절의 제목, 순서가 많이 바뀌어 있습니다.
하권에는 선종의 중도사상, 선종의 본질, 보조국사의 돈오점수 사상등이 들어 있는데,
내용상 증보가 많으나 순서상에는 차이는 거의 없습니다. 그러므로 1992년에 발간된
[백일법문]과 비교해 보면, 증보된 내용 외에 절의 순서들이 바뀌고 구어체를 되도록이면
문어체로 바꾼 것이 큰 특징입니다. 또 이전 발간본은 교리발달 순서로 편집됐고, 이번
책은 되도록이면 큰스님께서 법문하신 순서에 따라 원음原音을 최대한 복원復元하기로
했습니다. 이것이 이번 개정증보판 [백일법문]의 큰특징입니다.
성철스님은 상권에서 부처님의 근본불교사상에는 이미 천태.화엄.유식의 모든 사상이
다 포함되어 있다는 점을 특히 강조하시는데, 이전의 [백일법문]에는 이 부분이 상당히
생략되어 있습니다. 천태종.화엄종.법상종의 중도사상을 강설한 중권의 내용은 이전보다
자세하고 폭이 넓어졌습니다. 하권에는 중국 선사들이 밝힌 중도의 뜻과 어록이 실려
있으며, 특히 대주혜해 선사의 [돈오입도요문론]의 법문이 많이 실려 있습니다.
흔히들, 성철스님은 [선문정로禪門正路]에서 보조국사의 돈오점수를 강하게 비판하고
았다고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보조국사 말년의 [간화결의론看話決疑論]에 드러난
돈오돈수 사상을 살피지 않고, 20대 중반에 저술한 [수심결修心訣]과 [정혜결사문定慧
結社文], 그리고 규봉종밀의 돈오점수론에 빠져 보조국사의 진의眞意를 제대로 모른다고
생각되는 선방수좌들에게 큰 경책警策을 내리시는 모습이, 이번 [백일법문]에는 분명히
드러나 있습니다. "이런 내용들이 [선문정로]출판 이전에 알려졌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생각을 해 봅니다.
1967년 동안거 때 하신 법문을 25년 만에 정리해 1992년 [백일법문] 상하2권으로 출간했고
이제 다시 법문을 정밀 녹취해 "개정증보판 백일법문이다."는 마음으로 47년 만에 세상에
내놓은 지금, 감개무량함에 앞서 큰스님께 크게 죄송스럽고 부끄러울 따름입니다.
보조국사가 열반에 드신 지 6년만에 제자인 진각국사가 유고遺稿를 정리해 [간화결의론]
을 출간, 보조사상을 총결지었습니다. 그러나 저희는 큰스님이 법문하신 지 50여년 만에야
겨우 형태를 갖춘 [백일법문]을 출간하게 됐으니 큰스님께 어떤 참회를 올려야 할 지
모르겠습니다. 게다가 큰스님께서 "부처님께 밥값 했다."고 표현하신 [본지풍광].[선문정로]의 사상을 세상에 올바르게 알리고 전해야 하는 일은 여전히 남아 있으니, 그저 황송할
따름입니다.
한 말씀 더 드리고 싶은 것은, 1992년 [백일법문]이 발행되어 지금까지 20만권 넘게 판매
되었습니다. 이미[백일법문]을 읽은 독자들이 이렇게 많은데, 새 책이 나오면 "우리들이
읽은 [백일법문]은 무엇이란 말인가?"하는 의심이 들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새 책은
큰스님의 이전 서술방식을 따르는 동시에 누락된 내용을 보충.증보增補한 책이라는
말씀을 드립니다. 다시 말해, 앞서 발행된 [백일법문]의 내용이 틀렸다는 것이 아니고,
빠진 내용을 보충하고 되도록이면 문어체로 출간한 책이라는 것입니다.
1992년 처음 [백일법문]을 출간할 당시엔 한국불교에 금자탑을 쌓는다는 마음이었는데,
지금 돌이켜보니 부끄럽고 부끄러운 마음입니다.
감히 다시 금자탑을 쌓는 마음으로 개정증보판 [백일법문]을 세상에 내놓습니다. 큰스님께서 이 책 개정증보판 [백일법문]에서 밝히신 사상을 이어받은 훌륭한 후생後生들이 속출해
더 높고 찬란한 금자탑을 쌓아주시고, 더불어 [본지풍광].[선문정로]연구에도 더욱 관심을
갖고 깊이 있게 연찬해 주시기를 기대합니다.
이 책이 발간되기까지 애쓰신 모든 불들에게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하권의 녹취를 맡아 3년 이상 고생하신 환성喚醒 진주하 거사님과 연여蓮如 이종복 보살님
내외의 노고에 감사드리고, 지금은 고인이 된 연여 보살님의 극락왕생을 기원합니다.
상권의 녹취와 정리 미 각주脚註를 세심히 달아주고 이 책의 발간에 이르게 한 최원섭 박사
에게는 무슨 말로 감사를 전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염천에 시작해 100여 일 동안 마지막
정리를 하느라 고생했음에도 이름을 드러내기 싫어하고, 큰스님께 저 대신 몽둥이를 맞은
두 분 스님께도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알게 모르게 앞뒤에서 애써준 모든 인연 있는
분들에게도 고마운 마음을 전합니다. 책의 편집과 제작을 맡아 마지막까지 애쓴 도서출판
선연 문종남 님께는 많은 빚을 지게 되었습니다.
그럼에도, 개정증보판 [백일법문]에 혹 오류가 있다면 그것은 전적으로 책임편집자인 저의
정리 잘못임을 밝혀 둡니다.
제가 출가(1972년)하기 5년 전인 1967년 백일동안 큰스님께서 사자후를 하셨고, 산문에
들어선 지 40여 년이 지나 어느덧 고희를 맞는 해에 개정증보판 [백일법문]을 세상에
내어놓게 되니 감회가 특별합니다. 그동안 [백일법문]을 열심히 읽어 주신 모든 분들에게
감사드리며 더 큰격려를 부탁드립니다. 앞으로 개정증보판 [백일법문](상.중.하)이 더욱
많은 불들에게 진리를 알려주는 '마르지 않는 법문'이 되고, 무명을 밝혀 깨달음으로
인도하는 '꺼지지 않는 횃불'이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성철대종사 열반21주기에
불기 2558(2014)년 10월 15일
해인사 백련암 원 택 화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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