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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는 휜다
김동원 시인·평론가
프롤로그– 언어는 몸이다
그에게 몸은 이미지이다. 욕망을 통과한 화인火印이다. ‘여기’와 ‘너머’를 질주한 언어다. 대상과 대상을 전복顚覆한다. 그의 언어는 연대기적 시공간의 휨이다. 이미지는 풍경의 상처다. 사라졌다 나타나는 비극의 징조이다. 그의 시적 창조는 타자의 복화술이다. 실존을 관통한 피안이다. 하여, 발화는 전격적이다. 주체는 사물의 타자화이다. 그의 시는 미완이다. 감정의 은폐이자 서사다. 굴절된 현재에 비친 거울이다. 주체 혹은, 타자와의 불확정성이다. 존재의 부재이자 역설의 직진이다. 주체의 유령이자 현대성의 불안이다. 다성多聲의 시적 내러티브는 환유적이다. 그로테스크한 원초적 관능은 압권이다. 그의 사건은 불연속적이자 알레고리다. 언어의해체는 표현 추상이다. 행은 환幻이자 연은 비약이다. 대상과 대상 간은 떨림과 울림이다. 비시非詩적 언어이자 불가능의 통로다. 모호와 난해의 포즈다. 그의 언어는 ‘보다’와 ‘죽음’ 사이의 틈이다. 언어의 살점은 고통의 절규다. 시어와 시어 사이의 밀도는임계점이다. 하여, 그의 시의 표정은 불편하면서도 새롭다. 묘사는 인디indie적이다. 탁월한 부조浮彫의 언어는 전면적 균열이다. 시단의 원폭 실험이자 통념을 무화 시킨다. 타자의 시선을 관통한 언어의 유희다. 닫힌 언어의 추상이자 열림의 가능태이다. 그의 시법은 영화의 장면 분할이자 클로즈업이다.
최백규(대구 출생. 1992~)의 리듬은 힙합적이다.성대 결절이 오기 전까지, 그는 아이돌 그룹의 멤버를 꿈꾼 가수 지망생이었다. 그가 사랑한래퍼들이 힙합신에 화려하게 등장한 것처럼, 그의 문단 출현은 파격적이다. 초기 시적 자아는 다겹의 메타포이다. 언어의 소실점에서 화자는 까무룩 지워진다. 어떤 진술은 현대 사회의 로그인에 접속된다. 난해성은 그가 추구한 시대성의 반역이다. 일상의 착란이자 표징이다. 에고ego는 세계와의 불협화음이다.전도된 주체이자 순수의 파편이다. 그의 언어는 소리를 만진다. 은유된 기성 체제의 억압을 비튼다. 로그화된 사회를 비판한다. 그의 언어는 ‘다름’과 ‘차이’의 발견이자 부조리의 해체다. ‘안’과 ‘밖’의 경계이다. 그는 자크 데리다(프랑스 철학자 1930~2004)의 해체에 경도된다. 의미와 무의미의 중첩된 예술의 모호성을 흡수한다. 해체는 서구 형이상학의 일종의 자기비판이다. 전체성, 사물과 언어, 존재와 표상, 중심과 주변의 이원론을 부정하며 다원론을 지향한다. 작품 바깥에서 작품 내부의 의미를 규정하는 경직되고 획일화된 사고에 반대한다.
그런 측면에서 최백규의 시는 언어의 해체와 실험의 경계 지점을 찌른다. 이 장은 그의 첫시집 『네가 울어서 꽃은 진다』(2022, 창비)와 2014년『문학사상』등단작「얼룩의 반대」외 몇 편을 중심으로 전개 된다.「얼룩의 반대」는 횡단보도(얼룩)의 안쪽(반대)을 보여주면서 삶과 사회의 단절된 뒷면을 부조리의 눈으로 응시한 낯선 시이다.「나의 세상에 온 걸 환영해」는, 이별의 역설이 나의 시작임을 제시한다. 고양이의 소리를 연결고리로 과거(거리에 남겨진 나), 현재(여행을 회상하는 나), 미래(집 밖으로 나가지 않는 나)는 유기적으로 결합한다.「아담이 뱀의 혀를 물었대」는, 아담과 뱀을 통해 인간의 원초적 본능의 이면을 폭로한다.「비의 바깥」은 ‘밖’의 사유를 통해 ‘안’을 검열한다. 개인과 사회의 위험 신호를 판타지로 구조화한다.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을 배경으로 깔았다. 지금 내가 지나가는 길을 바라보던 ‘과거의 나’가 ‘현재의 나’를 바라보는 장면과 겹침으로써 시간에 대해 깊이 사유한다.「레드 파라다이스」는 순간의 영원성을 동반자살의 시선으로 패러독스한 시다. 실화를 바탕으로 소설적 스토리로 엮은 이 시는, 개인의 고립과 불완전성을 어둡게 묘사한 작품이다.「로그아웃 로그아웃」은, 현대 사회의 인터넷의 부작용을 시화하였다. 황폐해진 개인들과 그로 인한 사회적 문제(대인기피증/후천적 자폐) 진단을, 분열의 시선으로 바라본 사유는 진행형이다.
음화陰畫
조용, 나는 아직 아무도 통과하지 않은 곳을 통과하려고 합니다. 조용! 먼저 들어가시죠. 사랑스런 언어여! ―앙드레 브르통(프랑스 초현실주의 시인, 1892~1966)
새로운 언어는 그 자체가 전위적이다. 실험적이자 즉흥적이다. 기존 언어 체계를 부정한다. 언어와 이미지를 충돌시켜 파열한다. 발상의 전환은 전복적이다. 행과 연은 좌충우돌이자 비약적이다. 신기한 상상과 참신한 감각은 놀랍다. 끊임없이 언어의 반역을 꿈꾼다. 하여, 시는 독창적 아우라를 가질 때 강자다. 언어는 유기체이다. 파장을 가진 물질이다. 시향詩香은 끊임없이 공간 속에 흘러 다닌다. 현대시의 의미는 절벽과 절벽 사이다. 판독 불가는 제목을 통해 유추된다. 제목은 텍스트의 현관玄關이자 내용을 규정한다. 미래시의 첫인상은 난해와 비약이다. 형식과 문체는 파격과 각자의 스타일을 가진다. 미래시는 쉬르레알리즘적이자, 표현추상주의적이다. 제목은 심플하고 유니크unique하다. 인상적 시어는 카피적이다. 미래시는 포노사피엔스phonosapiens의 언어다. 시어의 신경망은 양자역학적이다. 느닷없이 나타났다, 홀연히 사라지는 디지털 기호다. 느낌과 감성은 몽환적이자 수다적이다. 다 읽고 난 뒤에도, 시의 뒤태는 오리무중이다. 최백규의「얼룩의 반대」는 시니컬하다. 아니, 사적 상징이다. 낯선 어법은 다분히 개성적이다.
나는 횡단보도를 보면 자꾸만 연주하고 싶어진다
#1이 신호등을 기다리면 반대의 횡단보도는 피아니시모
누구 하나 다 건넌 길의 뒤를 돌아보지 않아
솟아오르는 표지판의 뒷면이 항상 궁금했다
하얀 건반만 밟아나갈 때
초록 머리의 소녀가 뒷모습만 남기고 사라질 때
뒷면이 흘리고 간 무지개를 먹고
그녀의 얼룩무늬 원피스를 연주하고 싶은 충동이 들었다
지금, 태양의 14시는 발기된 혓바닥으로 중앙선을 핥고 간다
얼마나 많은 것들이 벌겋게 달아오른 돌기에 닿았을까
새의 심장을 관통하는 무수한 2차원들
나의 등뼈 위로 질질 흘리는 은근한 체크무늬
처음으로 알게 된 폐부의 간지러운 감각
새의 목을 잡아 비틀면
쏟아지는 내핵
자기장을 잃은 지구는 참 울퉁불퉁하구나
네가 마모되는 동안 나는 멀리 떨어져 앉아 구경을 했지
너 참 재미있는 아이구나
푸른색을 달라는 친구의 부탁을 거절할 수는 없지
10층에서 1층으로 가기 위해서는 뛰어내려야 해
푸른색도없다니쓸모없는새끼죽어버려!죽어버려!죽어버려!
손목이 비틀어지고 새의 등뼈가 부러지는 소리가 또렷이 들렸다.
해바라기의 고개가 꺾이는 장면을
어느 영화에선가 본 적 있지
무언가 시작되기도 전에 올라가는 엔딩 크레딧
아무도 없나 봐, 저기 새가 날고 있잖아
어디? 스크린 뒷면 오른쪽 위에 보이잖아! 눈을 감아야지 이 바보……
너의 눈알이 해체되는 사이─ 그 속에서 태양계 너머의 영화를 볼 텐데
멋지지 않니?
횡단보도 밑 아스팔트가 카펫처럼 일어나 둘둘 말리기 시작하고
늘 바닥의 반대편이 궁금했었는데 얼룩말의 등껍질이다
―최백규,「얼룩의 반대」전문
「얼룩의 반대」는 현대 사회의 음화陰畫이다. 얼룩은 “표지판의 뒷면”이다. ‘얼룩’을 통해 그 ‘반대’의 몰개성을 비판한다. 새로운 종種의 이 시는, 현실을 낯선 시점으로 해석한 언어도단이다. 다중의 초점으로 사회를 새롭게 명명한다. 미래시의 이미지는 섬세하고 예민하다.「얼룩의 반대」는 언어의 재료가 복합적이다. 기존 서정시의 체계를 뒤집는다. 시각 이미지를 통한 연과 연의 공간 분할 사용은 특이하다. “그녀의 얼룩무늬 원피스를 연주하고 싶은 충동”은 관음적이다.이 시는 세계의 불평등과 부조리함을 기저에 깔았다. 첫 행은 촉각적이다. 횡단보도를 피아노 건반으로 본 음표적 시각 유희는 독보적이다. 리듬은 공감각적이다. 익숙한 일상의 풍경을 낯설게 비튼다. 이런 비판적 전개 방식은, 약자의 세계를 ‘새’의 목을 비틈으로써 은유된다. “푸른색도없다니쓸모없는새끼죽어버려!죽어버려!죽어버려!”행간 무시야말로, 이 시대 꿈을 잃은 타자화된 주체를 모조리 까발린다. 친구의 부탁(학연, 지연)을 거절하지 못한 채 10층에서 뛰어내려야만 하는 폐습의 알레고리는,「얼룩의 반대」가 함의하는 그늘이다. 이 시는 수미쌍관으로, 첫 연엔 대중들의 ‘꿈같은 현실’을, 마지막 연엔 ‘현실 같은 꿈’을 횡단보도와 중첩 시킨다. 이런 내적 의미의 심화는 연과 연 사이 리듬을 가능케 한다. 성적 메타포인 “초록 머리의 소녀”는, 가장 원초적인 것들(대중매체)에만 이끌려 다니는 대중의 어리석음을 투영한다. 횡단보도야말로 과거-현재-미래를 잇는 시의 알레고리다.
화자는 끊임없이 확정되지 않은 존재와의 대화를 통해 불안정한 사회를 묘사한다. 불안은 “푸른색” 에 의해 희망으로 바뀐다. 결국 색체 이미지는 순결과 순수함의 상징이자 소망의 확장이다. 지구가 “자기장을 잃”고 분해되어 가는 시적 과정은, 타자적 관점의 수용이다.「얼룩의 반대」에서 주목해야 할 점은 영화적 연출의 묘妙이다. 슬로비디오처럼 전개되면서, 급박한 장면 이동을 통해 중간 과정을 차단해 버린다. 영화관(빛없이 갇힌 공간 = 죽음)은 급박한 허무, 혹은 죽음의 또 다른 장소이다. 자유를 스크린에 은유한 것, 영상매체를 인간이 쫓는 허상에 비유한 점은 극적이다. 지구가 천천히 해체되어가는 사이, 느린 시선이 갑자기 횡단보도로 빠르게 옮겨가는 의식의 순간 이동은, 초현실의 극치다. 결국「얼룩의 반대」는 횡단보도(얼룩)의 안쪽(반대)을 보여주면서, 삶과 사회의 단절된 뒷면을 부조리의 눈으로 응시한 패러독스이다.
사이, 혹은 틈
시(詩)는 세상의 모든 것, 즉 추한 것, 아름다운 것, 그리고 심지어는 혐오스러운 것에서도 존재한다. 문제는 우리 영혼의 깊은 늪 속에 잠들어 있는 그것을 찾아서 깨울 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의 정신이 지닌 가장 놀라운 면은 마음속에 떠오르는 어떤 감정도 다양한 방법으로―저마다 다 다르게, 또 때로는 아주 모순된 방식으로―이해할 수 있다는 점이다. ―페데리코 가르시아 로르카(스페인 시인, 1898~1936)
미래시는 쉽게 다가오지도, 다가설 수도 없는 질문이다. 집중하면 할수록 행간은 심하게 굴절된다. 상상의 자동기술은 어디로 튈지 모르는 럭비공 같다. 날것의 감각은 비언어에 갇혀있다. 미래시는 무방향성이다. 행간의 시간은 초현실적이다. 문장은 대담하며, 심리적 거리는 주체적이다. 서정시가 감동의 대상이라며, 미래시는 느낌의 깊이다. 묘사적 터치는 난삽하다. 언어의 이질적 거미줄은 미로 같다. 행과 연의 관계망은 아슬아슬한 외줄 타기다. 하여‘사이, 혹은 틈새’의 시학으로 명명된다. 최백규의「나의 세상에 온 걸 환영해」는 ‘같으면서도 다른’ ‘다르면서도 같은’ 이 시대 젊은 세대의 사랑앓이법이다.“나”는 “너”의 틈이자 비밀이다. 보이지 않는 공중에서 무언가를 엿듣게 한다. 말의 감촉, 그 느낌, 그 향기를 맡는다. 이별하는 것은 모두 엇각이다. 시간만이 언어의 눈물을 말릴 수 있다. 사랑은 언제나 떨림과 울림으로 반응한다. 하여, 이 시는 ‘나’의떨림이 ‘너’의 울림으로 사라지는 방식이다.
나는 숨을 쉬는 것을 그만두기로 했다
빗나간 입술
비어있는 공간을 굳이 채워 넣을 필요는 없다
거리의 밀도가 나를 막다른 골목으로 몰아넣었다
뒤돌아서는 그때의 너를 오후의 크기에 더했다
너와 처음 여행을 다녀오던 날에도 나는 쓰레기였다
그저 네 고양이의 단면이 얼마나 흘러내리는 모양인지 알려주고 싶은 것
떠나간 자리에서 남아 있는 날개의 흔적에 글자를 그렸다
니야옹, 니야옹
우리가 아직도 한 우주 안에 존재한다는 사실에 확신을 가질 수 없다
이곳에서 볼 수 있는 별의 최소 유통기한은 4년
너는 달의 공전 주기를 뒤적이고 나는 지구의 나이를 달력에 표시했다
4월의 꽃잎들을 잘게 찢어 한입에 털어 넣었다
구부러진 햇살 ㄷ자로 웅크린 거실의 오후 4시
공중을 떠다니던 먼지들도 소파의 안으로 점점 파고들 것이다
이곳은 내가 없어져야 모든 것이 완벽하다
매일 거울 앞에서 이빨을 하나씩 뽑아 선반에 얹었다
면도를 할 때마다 창가의 꽃병들은 어째서 죽어가야만 하는지 궁금했다
의사가 먼지보다 많은 이곳인데!
아직 마르지 않은 세면대의 상처에 물기로 뒤덮인 심장을 가만히 맞춰본다
핏줄을 타는 붉은 것 너무 뜨거워 나의 마음은 언제나 4도 화상
너는 숨 쉬는 대신에 휘파람 부는 법을 마지막 가르쳐 주었고
내가 노래를 완성했을 때 너의 모든 것은 나의 세상이 되었다
머리 위로 기차가 지나갈 때, 한껏 벌린 가랑이 사이를 기어나갈 때
여름의 한복판을 거니는 고양이의 소리로 실컷 울었던 것도 같다
막다른 골목의 담벼락에 천천히 ‘굿바이, 로맨스’라고 긁는다.
―최백규,「나의 세상에 온 걸 환영해」전문
시의 첫 행은 비밀의 화원이다. “나는 숨을 쉬는 것을 그만두기로 했다” 이별의 끝을 지나고 나서야 열린 나의 세상은 역설이다. “빗나간 입술”은 비극의 전주곡이자 환유이다. 상실의 사랑법이자 충격의 마침표이다. “막다른 골목”에서 “뒤돌아서는 그때의 너를 오후의 크기에 더”한 절망은, 참으로 아름다운 은유이다. 이런 시법은 제목에서 첫 행까지 이어지던 긴장감을 빗겨나가게 한다. 심리적 굴곡은 시선을 대범하게 확장 시킨다. 나, 너, 우주로의 연상 시법은 비약적이다. 인파 사이로 사라진 ‘너’와 거리 한가운데 남겨진 ‘나’의 대비를 통해 ‘홀로 남겨졌다’는 아픔을 부각한다. 과거 회상(여행)을 보여주며 이별까지 올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추측케 한다. 고양이의 소리를 연결고리로 과거(거리에 남겨진 나), 현재(여행을 회상하는 나), 미래(집 밖으로 나가지 않는 나)는 통시적으로 연결된다. “4”를 의도적으로 반복함으로써 운율을 형성하고, ‘죽음’을 연상케 한다. “봄꽃”, “구부러진 햇살” 등의 교차는, 인생의 순간성과 리힐리즘을 극대화한다. 이것은 욕실(개인적 공간)이라는 특수한 공간에서의 자해(이빨을 뽑거나 몸에 상처 내는 것)를 통해, 망가져 가는 개인의 고립을 크로즈업 시킨다. “휘파람”이란 명사는 “고양이의 소리”에 연결되어, 시 전반의 무대 효과음으로 작용한다. “머리 위로 지나가는 기차”와 “한껏 벌린 가랑이 사이”는 메타포이자, “나”와 “너”의 애증의 블랙홀이다. 하여, 타자화된 주체는 “담벼락”에 ‘굿바이, 로맨스’를 긁음으로써, 이별의 감옥에 갇혀있는 ‘나’를 해방 시킨다.
혀와 풍자
최백규의 발칙한 “이브(뱀)”의 혀는 누설이다. 그에게 에덴동산은 최초의 스캔들이자 폭로의 장소이다. 관음의 창窓이자 소문의 꼬리다. 하여, ‘혀(말)’는 바람의 귀를 잡고 은밀한 세계를 까발린다. 번뜩이는 사물의 눈으로 혀를 굴린다. 그는 언어 뒤에서 쉴 새 없이 ‘그 무엇’을 흘린다. 볼 수도 없고 들리지도 않는 비밀을 캔다. 최백규의 ‘혀’는 춘화春畫의 교응을, 언어의 몸속에 교묘히 감춘다. 어둠에 숲이 수런거리듯, 아담은 이브의 ‘혀’에 놀아난다. 그에게 ‘혀’는 유혹의 상징이자 사기의 은유다. 이브의 이미지를 뭉개 아담의 기교로 행간을 속인다. 하여, 최백규의 ‘혀’는 의미를 차버리고 무의미로 치닫는다. 그는 피상적 관념을 구체적 현실로 방기放棄한다. 마치, 겨울이 봄의 ‘혀끝’에 꽃피듯, 이브(음)와 아담(양)을 통해 영원히 속이고 속는다. 하여, 그의 시「아담이 뱀의 혀를 물었대」는 제목부터 스캔들의 냄새를 풍긴다.
마른 표정은 언제나 흠뻑 젖은 혀를 감추고 있어
아담이 벗어놓은 옷가지를
몰래 가져와 보는 건 어떨까?
아담은 당연히 아니라고 하겠지만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 안 할 걸
누구나 깊은 곳에 무언가를 숨겨놓기 마련이니까
축축한 침대 같은 거!
(느낌표로써 비밀은 비밀의 의미를 상실해 버렸다)
판타지 속에 숨어 살던 아담은
젖은 혀들이 바싹 마를 때까지
버티고 버티다, 쓰러지겠지
누가 아담에게 뱀을 선물한 거야?
뱀의 혀보다는 지극히 평범한 것들이 넘쳐날 텐데
너도 나를 믿지 못한다는 걸 알고 있어
봄은 노랑을 가장 먼저 뱉어낸다는 사실을 처음 알았던
그날도 너는 나를 의심했었지
피노키오가 이브를 먹은 사실은 알고 있니?
아담에게 집중하자 넌 항상 그런 식이야
이제 하루 끝에 서서히 아담의 치마가 흘러내리면
쌓아가던 모래성은 젖어가고, 무너질 테니까
바싹 마른 혀들은 늘 그렇듯 젖은 표정으로 사그라지고,
―최백규,「아담이 뱀의 혀를 물었대」전문
「아담이 뱀의 혀를 물었대」의 시적단상은 어떤 가수의 스캔들에서 얻었다고 한다. 시인은 대담에서 “아담과 뱀(이브)을 통해 인간의 원초적 본능을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싶었다”라고 밝혔다. “마른 표정(겉모습) ” 안에 숨긴 “흠뻑 젖은 혀(뒷모습)”의 감춤은, 욕망의 페르소나이다. 언론의 야비한 폭로야말로 “아담”과 “사람들”(대중) 간의 갈등을 부추기며 진실을 왜곡한다. 현대인은 “누구나 깊은 곳에 무언가를 숨겨놓기 마련”이다. “축축한 침대”는 은밀한 사적 공간을 함의한다. “느낌표”는 발설의 장소로 대중매체를 지목한다. “뱀”이야말로 함정과 쾌락의 양면성이자 본능의 똬리다. 아담의 음흉과 이브의 교활은 무죄이다. “너도 나를 믿지 못한다는 걸 알고” 있으며, 물고 물린 현대 사회의 불신을 투영한다. “피노키오”의 코는 거짓말로 뒤엉킨 인간들의 음화이자 풍자이다. 하여, 최백규의 “바싹 마른 혀”는 소문의 표상을 지시하며, 금방 타오르다 빠르게 식어가는 대중들의 냄비 근성을 희화화하였다.
페이소스phthos
블랑쇼(프랑스 소설가, 평론가. 1907~2003)는 ‘바깥’의 사유자이다. 그의 특유의 ‘바깥’의 사유는 예술뿐 아니라 시에 대해서 이야기할 때도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그는 시를 기본적으로 추방이라 생각한다. 추방이라는 것은 경계 밖으로 던져지는 것이다. 시인은 안에 머물지 않으며 밖으로 추방된 자이다. 그는 자신의 바깥에, 고향 바깥에, 이방인에 속하는 존재이며, 시가 시인을 떠도는 자, 길 잃은 자, 현전과 거주를 빼앗긴 자로 만든다. (…) 이 세계에서 추방되었다는 것은 치명적인 진리가 지배하는 이 세계에 속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진리의 바깥에 즉 비진리에, 시가 있고 시인이 있다. ―이수명,『표면의 시학』p 36
최백규 시의 중요한 테제는 ‘바깥’의 사유다. 그의 “비”는 세계의 밖이자, 불안의 밖이다. 치열한 자기 인식의 밖이다. 비상을 꿈꾸는 자의 욕망의 밖이자, 떠돎의 시학이다. 그의 바람은 은폐된 은유의 밖이다. 빗물이 닿지 않는 침묵은 말의 밖이다. 시적 뒤집기를 통한 응시의 밖이다. 정교한 이미지와 이미지의 인상을 겹친, 흐름의 밖이다. 그의 “벚꽃”은 봄의 밖이다. 눈에 보이지 않을 뿐, 모든 사물은 사라지는 밖을 키운다.최백규는 ‘비의 밖’을 통해 연민을 말한 셈이다. 불가사의한 현실의 밖은 끝없이 변한다. 밖의 풍경은 같으면서도, 매 순간 다름의 반복 운동을 한다. “멋대로 하늘의 심장을 / 가르고 찢긴 틈 사이에 물감”을 “휘갈기는 것은 정말이지 짜릿한 일이다” 표현추상주의 화가 잭슨 폴록(미국 1912~1964)이 그랬던 것처럼, 우주 역시 시공간의 캔버스 위에 제멋대로 별들을 드리핑하는 지도 모른다. 하여, 최백규의 우연은 필연의 밖이다. 마치, “이어폰을 귀에 찌른 채 도로를” 질주하는 화자처럼, 카오스는 코스모스의 밖이다.
멋대로 하늘의 심장을
가르고 찢긴 틈 사이에 물감을
휘갈기는 것은 정말이지 짜릿한 일이다
아무 소리도 나오지 않는 이어폰을 귀에 찌른 채 도로를 달렸다
벚꽃의 수동성
비행운은 소리의 탄생
꽃피는 못과 끊어진 오케스트라의 차이
혀의 작은 움직임으로 만들어내는 긴 약속들
거스름돈 받으며 손끝 스치는 순간의 어린 감정
고장 난 라디오의 반복 재생
어제의 내가 바라보던 길 너머를
지나가고 있다 귓속으로 내일이 터뜨려졌다
거리의 사람들도 음을 따라 흔들렸다
펼친 우산은 계속해서 하늘로 오르고 싶어 한다
나는 뒤집히지 않는 우산을 갖고 싶다
떨어지는 빗방울들을 깨문 다음 나누어 삼키고
너와 함께 비가 오지 않는 곳들로 떠나고 싶었다
너는 멀리서 비의 바깥으로만 손을 내저었다
빗방울의 색깔을 씹은 것 같아 혓바닥이 자꾸만 따끔거렸다
흐트러지는 시야에 우산을 접는 너의 익숙한 손짓
귀에 얹은 이어폰에서는 처음이자 마지막 곡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나는 그냥 하늘에서 내리는 물감처럼 웃었다
―최백규,「비의 바깥」전문
이 시는 ‘밖’을 통해 ‘안’을 찌른다. 현대시에서 한 번도 생각해보지 않은 ‘바깥’을 사유함으로써, 어디까지가 시是인지 비非인지를 가늠치 못하게 한다. 1인칭 화자의 시선 전개를 통해 밖의 모호성은 증폭된다. “벚꽃”은 봄에 번지고, 개인은 사회에 스민다.「비의 바깥」은 관계의 시학이자 대상 간의 번짐의 미학이다. “꽃피는 못과 끊어진 오케스트라의 차이”는 동일한 양면성이다. 이루어질 수 없는 행위의 판타지적 진술을 통해, 실제 행하지 못한 억압된 시적 자아를 표출한다.「비의 바깥」은,단절(아무 소리도 나오지 않는 이어폰)된 사회 속에서 목적 없이 불안한 개인(도로를 달리는 것)을 암시한다. 그의 시는 뮤직비디오나 영화 기법을 종종 활용한다. ‘너’와 ‘나’와는 상관없이 움직이는 세상을 “고장 난 라디오의 반복 재생”으로 희화화한다. 놀랍게도 그는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을 끌어온다. “어제의 내가 바라보던 길 너머를 / 지나가고 있다 귓속으로 내일이 터뜨려졌다” 이 시구는 중력이 시공간을 왜곡하는 4차원적 세계를 보여준다. 지금 내가 지나가는 길을 바라보던 ‘과거의 나’가, ‘현재의 나’를 바라보는 장면을 중첩 시킨다. “아무 소리도 나오지 않”던 이어폰에서 내일이 터뜨려지고, 거리의 사람들은 흔들리고, 현재보다 미래의 사람들을 미리 목격한다. “펼친 우산”은 인간의 욕망이며, “나는 뒤집히지 않는 우산을 갖고 싶”어 한다. 객관적 상관물 “빗방울”을 통해 “너와 함께 비가 오지 않는 곳들로 떠나고 싶”어하지만, 역설적이게도 ‘나’는 무용하다. 하여, 끝내 너는 비의 바깥(나의 세상 바깥)으로 사라져 더이상 우산이 필요 없게 되지만, 인간은 “처음이자 마지막 곡”인 죽음을 맞는다. 하여 “나는 그냥 하늘에서 내리는 물감처럼 웃”을 수밖에 없다. 궁극적으로「비의 바깥」은, 개인과 사회의 위험 신호를 판타지로 구조화한 페이소스의 시로 읽힌다.
노랑과 빨강
일찍이 내 모든 행복이 그러했듯, 내 모든 슬픔의 근원 역시 내 마음속 깊은 곳에 있다는 걸 안다네. 넘쳐흐르는 감정의 소용돌이 속에서 발걸음을 한 발짝 내디딜 때마다 천국이 뒤따라 열리고, 온 세상을 사랑스럽게 껴안으리라 작정했던 과거의 나와 지금의 나는 같은 사람이 아닌가?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중에서
“나는 체험하지 않은 것은 한 줄도 쓰지 않았다. 그러나 단 한 줄의 문장도 체험한 것 그대로 쓰지는 않았다.”『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이 세상에 나온 후, 요한 볼프강 괴테(독일, 1748~1832)가 한 유명한 말이다. 스물다섯의 괴테는 동료 케스트너의 약혼녀 샤를 로테 부프와 삼각관계에 빠진다. 이 실연의 사건은 젊은 괴테에게 슬픔과 비탄에 잠기게 하였다. 잠시 고향에 머무는 동안, 유부녀를 사랑하다 권총 자살한 친구 예루살렘의 비극을 목격한다. 하여『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은 괴테 자신의 실연과 친구의 자살을 배경 이야기로 4주 만에 단숨에 씌여 졌다. 로테와의 순수한 사랑을 지키기 위해 ‘젊은 베르테르’는 권총 자살로 생을 마감한다. 이후 ‘베르테르 효과’는 유럽 젊은이들 사이에 폭발적으로 자살을 유행시켰다. 자살은 전염성이 강하다. 하여, 20대의 자살률이 가장 많다. 이 시기의 감성은 삶과 죽음, 사랑과 이별에 눈뜰 시기다. 불안, 초조, 동경은 질풍노도기의 성장통이다. 이런 갈등과 극단, 도취와 열광은 우울과 리힐리즘에 뿌리 박고 있다. 죽음을 동경하지 않은 젊음은 없다. 최백규의「레드 파라다이스」는 동반자살을 시화한 실화다.
커튼을 치고 음악 소리는 나머지 틈 정도만 키워줘
너의 손톱은 왜 그렇게 파란 걸까
모든 것이 저물어갈 즈음 우리는 서로 다른 노을 앞에 서 있어
일기예보에서 비가 올 거라 했었지만 모두 다 거짓말이야
시계 초침은 태양이 각도를 뒤집을 동안 겨우 제자리를 움찔거렸지
고장 난 시간만 바라보다 둥근 어제를 떠올렸어
네가 나의 반대편으로 허리를 구부릴 때
피어나는 동그라미의 안쪽
손목 위를 맴돌던 햇볕의 흔적이 지워지면 너의 따뜻함도 잊혀질까
얼어붙은 구름 떼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을 모양인가 봐
우리는 그저 내일 아침이 올 때까지 우리만의 모닥불을 간직하자
시든 봄마저 꽃을 틔우기 시작했으니까
계절들이 조도를 낮출 때마다 방 안 온도를 체크해야 할 것만 같아
따뜻한 노랑과 뜨거운 빨강의 차이를 알고 있니?
문득, 오후가 너무도 커다랗다는 사실을 이해하는 순간
길 건너 차들도 하루의 끝으로 이어진 주파수를 맞추고 있잖아
오늘의 라디오 기상캐스터는 날짜변경선 근처 어딘가에 영원히 머무르지
이제 머지않아 천장에서 비가 쏟아져 내릴 거야
타오르는 계절이 창틈으로 새어나가는 걸 바라보면서
나는 너의 옆자리에 나란히 누워 붉은 달로 떠올랐어.
―최백규,「레드 파라다이스」전문
「레드 파라다이스」는 부산 모텔에서 실제 일어난 여대생 동반자살 기도를 모티브로 하였다. ‘레드 파라다이스’는 방화로 죽은 자들의 천국이다. 존재의 의미를 죽음까지 밀어부침으로서, 실존을 성찰케 한다. 이런 유니크한 제목이야말로 얼마나 역설적인가. 둘은 “커튼을 치고 음악”을 들으며 나란히 누워 지상의 마지막 대화를 나누고 있다. “너의 손톱은 왜 파란 걸까” 멜랑콜리의 극치다. 머지않아 죽어 “서로 다른 노을 앞에 서 있”을 것이다. 세상 밖은 “비가 올 거라 했었지만 모두 다 거짓말이야” 어쩌면 이별은 순간의 영원성일지 모른다. 하여 나는 “고장 난 시간만 바라보다” 너의 “손목 위를 맴돌던 햇볕의 흔적”에서 자해의 흔적을 발견한다. 삶은 매 순간 각자의 허들을 넘다 실패하는 작업이다. 이런 소설적 묘사와 스토리는 동성애의 이미지로 포개진다. 죽도록 사랑하여도 그들에게 “내일 아침이 올”까. “일기예보(세상)”에서도 암시하였지만, 결코 “비(구원)”는 오지 않는다. 현대야말로 ‘실종’의 다른 이름이다. 그저 둘은 “계절들이 조도를 낮출 때마다 방 안 온도를 체크”하다, 각자 떠나야 한다. 아무리 “반대편” “허리를 구부”리며 껴안아도, “따뜻한 노랑과 뜨거운 빨강의 차이를” 알지 못한다. 노랑과 빨강은 세상의 시선이 그들을 바라보는 극단적 색채이다.「레드 파라다이스」는 밖과 안의 불가능한 소통을 통해, 고립된 개인들의 절규를 ‘붉은 천국’으로 패러독스하였다. 이런 세계에 대한 연민이야말로 최백규 시의 놀라운 발견이다. “나는 너의 옆자리에 나란히 누워 붉은 달로 떠”오름으로써, 죽음의 미학(파라다이스)은 끝이 난다.
접속
모바일은 정체성을 표현하는 사물이자 오브제이다. 이 사물은 우주로 향하며, 인간의 살갗에 내장되어 있다. 의식 속에, 무의식 속에, 일상 속에, 영혼 속에, 더불어 산다. 이것은 시공간을 표현하는 예술 도구이자 현대적인 가상 오브제이다. 표현의 도구이자 존재 증명의 증거이자 또 다른 존재을 생성하는 거울이다. ―금은돌『예술 산책』(청색종이, p 203)
접속의 세계는 다중 인격의 장이다. 천 개의 나와 너가 존재한다. 사적 공간은 은폐의 지형이다. 환상의 무대이자 늪의 공간이다. 작용과 반작용의 운동이자, 광기와 혼돈의 확장이다. 가상은 무맹목적이자 배반적이다. 흔들린 불안이자 이미지의 범람이다. 하여 가상은 균열적이자 페르소나적이다. 현실과 가상의 모순 형용은 끝없는 절망과 부활을 꿈꾸게 한다. 하여 욕은 그 시대의 음화다. 인간의 배설이자 오물이다. 욕은 존재의 질병이다. 욕은 어두운 사회의 카타르시스다. 독재의 해방구이자 자유다. 욕은 선이자 악이다. 욕은 억압의 폭발이다. 욕은 현실 도피이다. 욕은 칼이자 창이다. “욕은 비유법, 과장법, 대조법, 대구법, 기지의 극치다.”(김열규,『욕―그 카타르시스의 미학』. 1997, 사계절) 하여, 최백규의「로그아웃 로그아웃」속의 ‘욕’은 시대의 구조신호이자, 익명의 가면이다.
주의사항!
내 몸을 마신 벽의 혈관은 너무 축축해서 발이 빠지기 쉽다.
우선 이 방 안에서 가장 어두운 한쪽 벽을 무너뜨렸다.
알 수 있는 사실은 그 너머에 사는 도트 벽지까지 절대 숨이 닿을 수 없다는 것.
흘러내리는 잠도 고개를 끄덕이고,
딱딱한 시선이 살갗에 닿았을 때 뒤쪽 벽에 부딪히면서 귀를 때리는 뇌파.
목으로 앵무새를 만들어내는 것보다 손으로 피스톤 하는 것이 낫겠다.
온종일 콘크리트에 귀를 비비면 선명해지는 핏덩어리의 펌프질과 아이들의 비명.
뒤집어진 손톱이 덜덜 떨린다.
커피로 알약을 마신다.
생쥐, 기생충, 벌레, 개새끼,
바닥을 기어 다니며 타자를 친다.
ㅅㅏㄹㄹㅕㅈㅜㅓ.
오른쪽 스피커 안에서 온종일 소리만 지르는 외국인 아가씨.
‘백색소음’이라는 말을 라디오에서 들어본 적 있었지만 굳이 말하지 않았다.
나는 왼손이 필요하고 너는 12월 달력만을 넘기길 바랐으니까.
테이블은 사람과 사람 사이를 갈라놓기 위한 도구일 뿐.
어쩐지 이 장면을 어디선가 본 적 있는 것 같은데 아무래도 상관없지.
말 못할 생각들을 곱게 접어서 입속에 구겨 넣었다.
벽은 손목을 긋는다.
분수가 쏟아지면서 연주를 멈추는 바람과 어색한 숲.
카페의 천장에서는 이상한 수채화가 무반주로 춤을 추고,
외팔이 화가도 남은 한쪽 팔을 마저 테이블에 못질한다.
―최백규,「로그아웃 로그아웃」전문
모니터는 인간 내면을 비춘 창窓이다. 리비도이자 황폐해진 개인과 사회의 민낯이다. ‘로그 아웃log-out’은 단절이자 자폐의 상징이다. 자기 소외이자 사회의 벽이다. “벽의 혈관”은 통신선의 은유이자 ‘안’과 ‘밖’의 교신이다. “절대 숨이 닿을 수 없”는 벽 “너머”의 세계는 소통하지 않는 현대인의 비유다. 왜 “딱딱한 시선이 살갗에 닿았을 때 뒤쪽 벽에 부딪히면서” “뇌파”가 “귀를 때”린 걸까. 이 행간 이미지는 영화「매트릭스」의 오마주로 읽힌다. 마치, 인공지능이 메트릭스(통제시스템)를 통해 인간을 부품화하는 과정과 비견된다. 모니터는 세계에 갇힌 비현실적 인간과 동일하다. “온종일 콘크리트에 귀를 비비면 선명해지는 핏덩어리의 펌프질과 아이들의 비명.”은 가상현실이 얼마나 공포스런가를 청각화 했다. 하여 중독자는 “뒤집어진 손톱이 덜덜 떨”리고, “커피로 알약을 마”시고, “생쥐, 기생충, 벌레, 개새끼,”처럼 “바닥을 기어 다”닌다. 정신착란과 환각 속에서 ‘살려줘’라고 외치지만, 사방은 온통 막힌 벽뿐이다. “ㅅㅏㄹㄹㅕㅈㅜㅓ.” 이 언어 해체야말로 정신 분열의 시각적 알레고리다. “오른쪽 스피커”와 “왼손”은 인터넷상에서 벌어지는 좌우 논쟁을 이념의 “도구”로 이미지화했다. 백색소음은 우리 사회의 분열된 파열음이다. 궁극으로「로그아웃 로그아웃」은, 가상과 현실 사이에서 분열된 자아를 극복하지 못하고, 스스로 “손목을 긋는” 비극적 시다.
서정抒情과 추상抽象
사막이 나타난다고 하였다. 바르트는 ‘확실히’ 글쓰기와 작품 사이에는 모순이 존재하고, 내가 시 쪽으로 향할수록, 그 시 쓰기로 내려갈수록, 견딜 수 없는 밑바닥으로 내려갈수록, 그곳에 사막이 나타난다고 하였다. 시를 써 본 누구나가 경험하는 사막. 전갈처럼 사막에 무릎을 끓고, 불은 석양을 향해 메마른 입술로 노래하는 트라피스트 수도회 수사의 모습으로 나에게 표상되는 그런 사막. 모든 것이 길인, 그러나 어디에도 길은 없는 시詩의 사막. ―노태맹 시집『이팝나무 가지마다 흰 새들이』‘시인의 산문’ 중에서(p 75)
최백규의 첫시집『네가 울어서 꽃은 진다』의 두 가지 주제는 복고적 시풍의 현대적 재해석과 죽음의 깊은 사색이다. 시「입하」는 시간의 무늬를 잘라 공간의 심리로 채색한다. “목련 그늘 옆에서 네가 허묘를 파고 있다” 이 놀라운 첫 행은 서정抒情 언어에추상抽象을 입혔다. 풀에 묻혀 폐허가 된 무덤을 파고 있는 너는‘꽃귀신(아이가 죽어서 된 귀신)’이다.「입하」는 태양의 황경 45도 때의 일이다. 귀鬼의 음지령陰之靈이, 신神의 양지령陽之靈으로 바뀔 때의 사건이다. 대상을 향해 무의식적 충동으로 돌진한다. 아무도 파 내려가지 못한 시의 밑바닥을 향한 그의 진검은, 서늘한 심리적 촉감을 낳았다.
목련 그늘 옆에서 네가 허묘를 파고 있다
착한 아이야 여기 몸을 가지런하게 벗어두고 떠났구나
어린 가지에 걸린 낮달이 해지듯
나는 시름없이 누워 피가 도는 입술을 문 채 앞으로 식어갈 바람 따위를 헤아려본다
슬하의 산등성이가 뼈와 살을 털고 흰 영혼을 몰아쉴 때까지
백지를 넘기며 시푸른 목탄 냄새나 맡고 싶다
좋은 날마저 하품하듯 마르고
툭 하니 돌을 골라내는 손을 보면 헛웃음이 샌다 새끼를 치는 고라니가 처서 즈음을 건너다보고
그 깊은 눈동자 뒤에서 무언가
무너지고 있다
돌아가자 목이 잠기고 안색이 흐릿하니까 정말로 목련나무가 마냥 져버렸으니까 우리 이제 그만 모두가 기다리는
집으로 가자
이곳은 내륙인데 여러 물새가 새의 모양을 하고 해안선 너머로 터뜨려진다
숨이 따뜻한 너와 지상에서 만나 아름다웠다
―최백규,「입하」전문
최백규의「입하」 속에는 ‘분리 불안’과 ‘내면 아이’가 비친다. “착한 아이야 여기 몸을 가지런하게 벗어두고 떠났구나” 이 시행은,대상과 언어 사이에서, 나와 아버지 사이에서, 삶과 죽음 사이에서, 떨어지지 않으려는 불안이다. 시는 시인의 온몸을 관통한 통점이다. 하여 “허묘(墟墓)”를 파 내려가는 아이의 공포는 극도로 행간을 긴장시킨다. 최백규의 이번 시집의 특징은 병든 ‘아버지’의 죽음을 놓지 않으려는 몸부림이 아프다. 그는 “시름없이 누워 피가 도는 입술을 문 채 앞으로 식어갈 바람 따위를 헤아려”보는 것이다. “슬하의 산등성이가 뼈와 살을 털고 흰 영혼을 몰아쉴 때까지” 백지 위를 서성이며 아버지 무덤을 떠나지 못한다. “새끼를 치는 고라니”는 홀로된 슬픈 어머니의 암유다. 그녀는 “깊은 눈동자 뒤에서 무언가 // 무너지고 있”는 주체가 된다. “목련”꽃처럼 아버지도 “져버렸으니까”, 시인은 이제 아비의 혼령을 놓아주자고 한다. “집으로 가자” 이 청류형은 압권이다. ‘산 자의 집은 모두 무덤’이란 역설의 시법이다. “숨이 따뜻한 너와 지상에서 만나 아름다웠다”란 시구는「입하」의 명구다. 최백규는 외로운 기억과 슬픈 흔적을 교직하여 서정의 새로운 아름다움을 찾아냈다.
확장, 혹은 우주
최백규 시인은 21세기에 새롭게 쓴『난장이가 쏘아올린 공』의 가족이었다가『나쁜 피』의 사랑이었다가『입 속의 검은 잎』의 죽음의 수사였다가 드디어 ‘네가 울어서 꽃은 진다’의 한여름이 되는, 그런 통과제의를 온몸으로 통과해내느라 그리 기다란 시인이 되었나보다. 뜨겁고 눅눅한 한여름의 장마와 열사를 군더더기 없이 감각해내기에 최적화된 자세였을 것이다. ―최백규 시집『네가 울어서 꽃은 진다』(2022, 창비) , 정끝별 시인의 추천사 중에서
우선, 시「지구 6번째 신 대멸종」은 스펙터클하다. 지상의 언어를 통해 환경 파괴의 주범을 이야기한 셈이다. 보이는 세계가 실재가 아님을 갈파한다. 진실한 “죽음”은 사실의 “봄”보다 더 신비롭다. 우주는 멸종을 통해 멸종을 막는 방식의 모순형용oxymoron이다. 양립할 수 없는 두 변을 관통한다. “꽃의 추락”은 시의 블랙홀이다. “새”는 상승하고 “창밖엔 하얀 유령”들만 떠돈다. 어쩌면 이 시는 이미지를 통해 이미지를 버려야 함을 지시한지도 모른다.
봄이 와도 죽음은 유행이었다
꽃이 추락하는 날마다 새들은 치솟는다는 소문이 떠돌고
창밖엔 하얀 유령들만 날렸다
네 평 남짓한 공간은 개의 시차를 앓고
핏줄도 쓰다듬지 못한 채 눈을 감으면 손목은 파도의 주파수가 된다 그럴 때마다 불타는 별들만 멍하니 바라보았다
누구나 살아 있는 동안 심장 끝에서 은하가 자전한다는 사실을 안다 늙은 항성보다 천천히 무너져가는 지구라면 사각의 무덤 속에는 더러운 시가 있을까
흙에서 비가 차오르면 일 초마다 꽃이 지는 순간 육십 초는 다음 해 꽃나무
퍼지는 담배 향을 골목에 앉아 있는 무거운 돌이라 생각해보자
얼어붙은 명왕성을 암흑에 번지는 먼 블랙홀이라 해보자
천국은 두 번 다시 공전하지 못할 숨이라 하자
이것을 혁명이자 당신들의 멸망이라 적어놓겠다 몇백억 년을 돌아서 우주가 녹아내릴 때 최초의 중력으로 짖을 수 있도록, 모두의 종교와 역사를 대표하도록
두 발이 서야 할 대지가 떠오르면 세계 너머의 하늘이 가라앉고 나는 그 영원에서 기다릴 것이다
돌아가고 싶은 세상이 있었다
―최백규,「지구 6번째 신 대멸종」전문
1,500년 후의「지구 6번째 신 대멸종」은, 지구를 괴롭힌 인간의 원죄 의식이 깔렸다. 시간과 공간이 사라진, 시의 빅뱅을 누설한 셈이다. 의미와 무의미의 비밀을 캐낸 셈이다. 이런 유무有無의 확신은, “손목”이 “파도의 주파수가 된다”는 ‘환幻’을 믿을 때 가능하다.외부와 내부의 경계가 없다는 지혜를 터득할 때, “불타는 별들”이 보인다. “누구나 살아 있는 동안 심장 끝에서 은하가 자전한다는 사실을” 자각해야만, ‘우주가 한 편의 명시’임을 알게 된다. 표면적으론「지구 6번째 신 대멸종」은 멸망을 이야기하지만, 심층은 별들의 하모니를 들려준다. 빛이 휘고 운석이 부딪치는 모든 행위는 시인의 상상력 속에서 떨림과 울림으로 승화된다. 하여 “천국은 두 번 다시 공전하지 못할 숨”이 된다. “두 발이 서야 할 대지가 떠오르면 세계 너머의 하늘이 가라앉고 나는 그 영원에서 기다릴 것이다” 모호함이 오히려 더 멋진 시적 표현이 되었다. 그렇다. 두 발을 디딘 지상이야말로, 궁극에 시인이 “돌아가고 싶은 세상”임을 증거 한다.
에필로그 ― 너머, 혹은 호기심
누구나 삶의 주인공이었던 시절이 있다. 세상이 나를 중심으로 돌아가고 있다며 착각하는 순간이 있다. 나에게도 힙합에 잘못 물들어가던 청소년기가 있었다. 왜 분노해야 하는지도 모른 채 주변을 욕하고 때리는 것만이 인생 전부였던 중학생에게 힙합은 주관적 면죄부이자 방향계가 되어줬다. 그러니까 고백하자면 나는 교실에서 문제집보다 시 습작을, 거리에서 시 습작보다 가사집을 훨씬 많이 채웠다. 고등학생 때는 담임이 라임 노트를 빼앗아 들고 혹시 자살할 생각이 있는지 물어본 걸 보면 답이 없는 시기였던 것 같다. 하지만 그 모든 과정이 어둠 속에서 걸어나올 수 있게 해준 한줄기 빛이었다. // 힙합을 시작으로 아이돌에 빠지고, 음악학원에 다니고, 시인이 될 때까지 끝없는 뒷골목을 헤매는 기분이었다. 수많은 학생들은 저마다의 방식으로 미래를 그려나가고 있었지만 나는 홀로 해체시-인디밴드-SMP(SM엔터테인먼트에서 선보인 Performance 중심형 음악의 줄임말) 사이에서 인생의 연결 지점을 찾으며 학창 시절을 다 보내버렸다. 가끔 동료 시인들이 내 시를 읽고 음악적인 요소가 느껴진다고 하는 걸 보면 아마 그때 새겨진 박자와 멜로디가 행갈이나 시어의 색깔로 이어져온 것도 같다. // 이렇듯 힙합을 비롯한 음악은 어이없게도 나를 시인으로 만들어줬다. ―최백규의 산문,「시, 록, 아이돌」중에서
최백규의 첫시집『네가 울어서 꽃은 진다』(2022, 창비)의 중요한 테제는 죽음에 대한 강렬한 질문이다. ‘왜 신은 인간을 죽음으로 모는가?’란 반문이다. 죽음밖에 줄 수 없는 신을 대신해, 시로써 만물을 살리겠다는 어처구니없는 역발상이다. 이런 반발은 ‘결국 신을 대신해 삼라만상을 살려 놓겠다’는 광기에 이른다. 한편 그의 시는 복고풍의 낯선 시선이다. 미래파의 “많은 젊은 시인들이 어떻게 하면 자기 언어의 감각을 현대적이고 낯설게, 그리고 세련되게 선보일까를 고민하는 데 비해 최백규의 언어는 이를 거스르고 상당한 폭의 시차를 발생시킨다는 점에서 예상치 못한 새로운 느낌을 준다.”(박상수 해설, p105) 하여, 최백규가 시집에서 집요하게 물고 놓지 않은 이미지는 ‘청춘, 사랑, 죽음’이다. 그는 삶을 가장 명징하게 드러내는 유일한 기제를 리힐리즘에 두었다. 무無를 빌려 인간사의 비극을 발설한 셈이다. 시「향」은 “아무리 씻어도 빈손에” 죽은 아버지의 “향냄새가” 지워지지 않는 스물의 고뇌이다. 꽃은 피어 난리인데, “재가 된 아버지를 들고 이제 안 아파서 다행이라 속삭”인다.(「아프지 않았다」) 그에게는 “세계가 망가지더라도 시를 쓰자 아름답게 살자”(「애프터글로우」) 는 각오가 보인다. ‘연민과 향수’로 가득 찬 그의 시. “오래 죽어 있어서 어쩌면 돌아오지 못할 뻔”(「유사인간」) 한 귀鬼의 이야기이다. 소년의 “활주로 끝에”(「불시착」) 서서, 너무 일찍 죽음을 목격한 ‘내면 아이’의 불안한 그림자가 일렁인다.
최백규의 첫시집은 ‘근대와 현대’의 경계선에 맞물려 있다. 시는 시대마다 다르게 읽힌다. 그는 바람의 말을 은유로 재빨리 나꿔챌 줄 알아야 한다. 사물, 그 ‘너머, 혹은 호기심’을 직관해야 한다. 현대 사회의 허虛와 실實을 몸속 깊숙이 삽입해야 한다. 행과 연은 채움보다 비움을 선택해야 한다. 곡선보다 직진의 언어 리듬을 타야 한다. 설명적 묘사가 아니라, 암유와 비약의 놀라운 상상력을 흡수해야 한다. 사물의 절규를 들춰야 한다. 췌사는 버리고 예리한 시검詩劍으로 단련해야 한다. 기성 언어의 전복顚覆과 전면적 균열을 시도해야 한다. 밤낮으로 현대성을 질문해야 한다. 그것만이 불가능의 시학을 뚫을 수 있다.고정된 상징체계를 버리고시의 부조리를 뛰어넘어야 한다. 하여, 최백규는 초심으로 돌아가 해체와 실험의 틈을 찔러야 한다. 혹독하게 검열해야 한다. 아니, 끊임없이 자신의 시를 타살해야 한다. 언어를 통해 언어를 죽여야만 시가 산다. 유형의 세계를 통해 무형을 시어로 꺼내야 한다. 현대는 그 자체가 ‘낯선’ 풍경이다. 언어의 밖을 빌려 언어의 안을 파내야 한다. 시는 기교가 아니라 전율이다. 시는 사물의 심연이자 거울이다. 현대시는 알레고리이며 모니터다. 무한한 상상력이자 주체와 객체가 복제된 이미지다. 지금까지 최백규의 등단작과 첫시집『네가 울어서 꽃은 진다』를 통해 시의 안창을 들춰 보았다. 어쩜 그는‘전통과 현대 사이’에 끼었는지도 모른다. 하여, 그가 펼칠 미래시는 아픈 것들의 울음과 썩은 것들의 풍자를 체화하길 소망한다. 현대인들의 외론 실존을 내면화하여 그만의 언어로 독보적 경지를 열기를 희망한다. 단순한 부정이나 모호함이 아니라, 부정(不定)과 모순의 세계를 한데 뒤섞어 시의 원융을 이루길 고대한다. 시는 시간의 주름이자, 사물의 말을 빌려 인간에게 전하는 예언이다. 시의 요체를 ‘지금 여기’에 두고 치열하게 밀어부치길 바란다. 매순간절박한 심정으로 자신을 향해 ‘왜 시인가?’를 묻고 또 물어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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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선생님께서
감상과 해설을 더해 주시니
시집 속
보이지않는 심연까지 세밀하게 들여다보게 되는것 같습니다.
감사합니다.
귀한말씀 잘 들었습니다.
"시는 시간의 주름이자, 사물의 말을 빌려 인간에게 전하는 예언이다." 평론의 단맛을 만끽하며 많이 배우고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