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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향 10호 수필 신인상 후보 / 홍기분 님
1. 병든 “대추 방망이”를 위한 기도 (수필 응모작)
오늘따라 짙푸른 측백나무 담장 너머로 붉게 타오르는 대추나무를 가슴에 담아봅니다. 대추 한 알이 익기까지 수많은 시간과 바람과 따스한 볕 한 줌과 그리고 목마름을 채워줄 수 있는 한줄기 비까지 얼마나 많이 찾아왔을까요.
작은 병실에도 가을볕이 창가에 내려옵니다. 마른기침으로 인사를 대신하는 당신의 얼굴이 어제와 다르게 더 핼쑥해 보이네요. 병마도 당신의 나이만큼 긴 여정을 떠나려 하나 봅니다. 다음 해 돌아올 가을을 맞이하실지 잘 익은 벼 이삭을 수확하며, 가을걷이를 다시 하실 수 있을지 모르는 당신의 투병이 못내 이 아이의 속을 새카맣게 태우고 맙니다.
숱한 세월을 꼼꼼히 들판에 새겨 두었던 당신을 향하여 단 한 번도 잘해 드리지 못함에 대한 죄스러움을 담아 이렇게 기도하려 합니다. 이 짧은 기도가 당신이 제게 주었던 깊고 무딘, 그러나 진국이었던 사랑을 모두 담을 수 없겠지만 지금 하지 않으면 평생 가슴에 후회로 남기에 작은 손놀림에 연필을 꾹꾹 눌러씁니다.
유난스레 탄탄하고 야무지다 하여 붙여 드린 ‘대추 방망이’라는 별명이 어이 오늘은 이 아이에게 그리도 마음을 미어지게 합니다. 잘 견뎌내시고 참아주셔서 그래도 감사해요. 눈바람을 맞은 겨울 나목처럼 덩그러니 당신의 모습은 무척이나 야위어 보입니다. 고통으로 일그러진 삶의 일부를 당신에게서 덜어 드리고 싶습니다. 하지만 어찌할 수 없어 우두커니 서서 예전의 당신만을 기억할 따름입니다. 팔순을 넘긴 나이에도 작은 체구는 늘 너른 들판에 남아 해질녘까지 한 점으로 남아계시던 당신이 아니셨는지요.
언제나 날이 채 밝기도 전에 앞마당 바깥마당을 투박한 빗질로 새벽을 깨우시던 당신!
이 땅에서 태어나 땅을 지키며 땅의 풍요와 절망을 벗 삼아 삶의 길을 잠시도 쉬지 않고 걸어왔던 당신. 어느 여름날 밤엔 대죽 같은 장마 빗속을 뚫고 논두렁 물꼬를 보러 가셨다가 실족하신 일 가을날엔 여러 번의 태풍이 찾아와 황금 들녘의 벼 이삭은 마치 카펫을 깔아 놓은 것처럼 누워버렸죠.
아버지는 밤새 달빛 아래 누워버린 볏단을 세우고 또 세우고 그렇게 아침엔 또 볏단을 세웠잖아요. 그렇게 사나흘을 쉬지 않고 논에서 일하신 적도 기억나네요. 이제 조금 쉬셔도 됩니다. 아니 많이 쉬셔도 되어요. 아흔을 바라보는 이 가을을 모처럼 한산하고 편안하게 느껴 보세요. 길가에 굴러다니는 돌멩이 하나도 이름 모를 들꽃도 그냥 스쳐가는 일이 없고 꼭 그 쓰임새로 남겨두라며 일러주시고, 작은 미소를 챙기시던 구릿빛 당신의 얼굴! 겉만 번지르르한 빈 강정보다 속이 꽉 찬 못난 강정이 되라 하신 말씀. 나를 낮추는 겸손이 몸에 배어야 하고 부지런함이 손발이 되어야 한다는 평범했지만, 가슴에 오래도록 기억되는 필부의 그 목소리가 작은 가슴에 메아리칩니다.
이런 날도 기억이 납니다. 아버지 손톱은 늘 닳아있어서 손톱 깎기가 필요 없었어요. 집 안팎으로 풀 한 포기 없이 늘 눈만 뜨시면 맨손으로 그리 풀 뽑기를 하시니 손톱이 자랄 틈이 없었죠. 가을걷이가 끝난 후엔 커다란 가마솥에 팥죽을 쑤고 동네 어르신들을 모셔다 끼니를 대접하고, 아기가 태어나면 무탈 없이 잘 크라고 이름을 지어주고, 우리 집 옆집 뒷집이 다 한 식구들이라고 잘 챙기셨잖아요.
왜냐하면 아버지가 그 집을 손수 지으셔서요. 어쩐지 옆집 뒷집 구조가 너무나 똑같아서 신기하기도 했었지요. 지금도 여름엔 시원하고 겨울엔 따뜻한 호둣한 집이지요. 그리고 또 기억이 아직도 생생해요. 그땐 털북숭이 거지도 많았던 때! 커다란 대문 앞에 서 있던 거지에게 개다리소반에 밥상을 차려 주었는데 그분이 다 드시고 큰절을 해서 어머니도 당황해하시면서 반절을 하셨다지요. 평생 큰 은혜를 입었다고요. 따뜻한 밥공기에 눈물이 흠뻑 고였더랍니다.
훌쩍 지나가 버린 세월들이네요. 세월이 그리 가버렸는데 아버지는 아직도 그 키시네요. 작은 체구는 더 삶의 무게가 힘겨워 보여요. 당신 얼굴만 뵈면 억장이 무너지듯 가슴이 아파옵니다. 언제가 될지 모를 남아 있는 시간 내내 맘속 깊이 평화가 찾아오길 기도합니다. 당신이 보고플 땐 고향 집으로 달려갑니다. 손가락은 휘어지고 지문은 엷어지고 자꾸만 기억들은 잊힐까 여기저기 집안 곳곳에 아버지가 적어놓은 글씨의 흔적이 남아 있답니다.
아버지!
부르기만 해도 눈물부터 나는 이름.
나에게 강물 같은 고요함과 들판에 부는 바람 같은 자유로움과 달빛 같은 따뜻함을 전해 주신 아버지. 방안에 들어서면 언제나 반겨주는 당신 빛바랜 사진 속에 웃고 있네요. 아버지도 웃고 저도 웃습니다. 웃고 있는데 자꾸 눈물이 나네요. 대추 방망이 같던 당신은 늘 제게 큰 산입니다.
2. 초록 의자와 할아버지
녹음이 발목까지 푹푹 빠진다. 시원한 매미 울음 속에 갇혀버린 솔향기가 코끝에 한창이다. 이 작은 오솔길에 사연이 수북하게 쌓여있다. 걷고 있노라면 솔숲에서 나 자신이 얼마나 작고 보잘것없는 존재인지를 겸허하게 깨닫게 하는 큰 힘을 가지고 있다. 솔나무가 키 재기를 자랑하듯 들쑥날쑥 날숨을 쉬던 어느 여름날 우연히 길을 지나가다 나지막한 의자에 혼자 덩그러니 앉아있는 노인이 눈에 들어왔다.
발길이 적지 않은 오솔길이었지만 동무 하나 없이 혼자였다. 왕따를 당한 것일까? 바로 옆에는 삼삼오오 시끌벅적 어르신들의 웃음소리가 끊이지 않는데 혼자 빼꼼히 하늘을 담는 눈빛이 젖어있다. 자제분은 없는 걸까? 할머니는 안 계시는 걸까? 이 동네에 처음 이사 오신 분일까?
호기심이 일기 시작하면서 그분과 말 없는 인연이 여름으로 치달았다. 여름이면 유난히 극성을 부리는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그중에 무척이나 귀찮고 불편한 것이 바로 눈병이다. 유행이라는 것이 한 번쯤 맞아야 할 예방주사처럼 그렇게 따라가게 마련인 모양이다. 아무리 조심하고 챙겼건만 눈병 때문에 눈물이 마를 날이 없었다. 힘겨운 날들이 이어지면서 퇴근 시간도 일정치 않은 날들이 계속되었다. 일 마치는 대로 늘 상 무언가 쫓기듯 허우적대지만 이 솔 숲길에 접어들면 늘 마음이 편안해지고 마치 고향 시골길을 걷는 것처럼 푸근해진다.
몇 번의 눈인사치레만 하던 어느 날 눈 빠지게 기다렸다는 노인은 퇴근 시간을 몰라 무작정 아침부터 나와 있었다고 했다. 속내를 잘 드러내는 분이 아니라서 무언가 일이 생겼구나 싶어 얼굴부터 살펴보았다. 안색이 편치 않아 보인다. 눈도 짐짐하다. 눈병에 걸렸다 하신다. 발품을 삼아 여기저기 병원을 다녔지만 도통 낫지 않는다고 투정부터 앞서신다.
어젠 시간을 내어 약국에 들렀다. 그렇잖아도 눈이 불편해 보여서 안약을 구했었다. “제가요. 미리 알고 안약 하나 구했어요. 여기요!” 어떻게 당신 눈이 불편한 걸 용케 알았냐며 기뻐하신다. 짐짐한 눈가에 몇 방울 떨어뜨리고 한 손에 챙겨드리며 잊지 말고 꼬박꼬박 수시로 눈에 넣으시라고 신신당부를 했다. 받느니 마느니 옥신각신 끝에 노친네 모양새가 우스워진다며
쑥쓰럼 반 고마움 반 바지저고리에 챙기신다.
따끔거리는 내 눈이 며칠째 빨갛게 토끼 눈이 되어서 구했던 안약이었다. 유행이라는 것이 소란스레 왔다가도 소리 없이 사라지는 특성이 있다. 바쁜 일상에서 불편하고 쓰렸던 눈병이 조금씩 나아가고 있을 무렵 내 키만큼 자라버린 싸리 꽃대를 헤집고 오솔길에 들어섰다. 며칠 전 흩뿌린 여름비가 나뭇잎들을 온통 초록 잎으로 물들어 버렸다.
책 한 권을 펼쳐 읽으면서 더딘 발자국을 옮기는데 “이보게 그냥 지나가려고?” 서운함이 담긴 목소리가 내 발을 묶어버렸다. 푸르게 칠이 벗겨진 초록 나무의자에 우두커니 앉아있다. 슬그머니 웃음을 건네며 다가가 곁에 앉았다.
잠시 머뭇거리시더니 꼬깃꼬깃하게 접힌 만 원 한 장을 내 손에 쥐어준다. 며칠 전부터 기다렸다. 고마운 안약 때문에 깨끗하게 나았다는 눈병 아마도 정서의 부재에 다가간 나의 존재감에 더욱 마음이 따뜻해진 까닭인지 약값을 내겠다고 고집을 피우신다.
솔가지 나무에 걸친 오후 햇살이 청량하다. 끝내 사양하지 못하고 산을 내려왔다. 마침 퇴근길에 시골 부모님을 찾아가는 길인데 주머니에 동전 몇 개가 달랑거린다. 서산 너머 하늘은 해거름인데 더위는 아직도 한창이다. 성글 성글 맺힌 땀방울에 숨소리마저 허덕인다. 마음은 벌써 동구 밖인데 걸음은 더위에 자꾸만 늘어진다. 깊이 파인 노인의 주름만큼이나 꼬깃꼬깃한 지폐가 걸을 때마다 주머니에서 서걱거린다.
지나는 길에 점방에 들려 수박 한 덩이를 구했다. 시큼한 푸른 잎들이 일렁거리는 과수원 밭엔 지나는 바람도 멈춰있다. 잠시 흔들어 깨우는 소리에 새 한 마리가 포르르 날갯짓을 한다. 듬성듬성 수박 한 덩이를 쪼개어 놓았다. 빨갛게 잘 익어 냄새가 달콤하다. 지쳐가던 입맛에 생기가 돈다. 입안에 살살 녹은 아이스크림 같다. 문득 베어 문 수박 한 조각에서 노인의 보이지 않는 뭉근한 인정이 배어난다. 아흔 평생 이렇게 따뜻한 가슴 설렘은 처음이라 하던 그분의 묵묵함이 그리워진다.
아침부터 나는 손 빠른 채비를 서두른다. 손에 들린 보자기엔 밤새 쑨 도토리묵을 담겨있다. 언제 나타날지 모를 나를 오늘도 그는 산 너머 모퉁이 초록 의자에 앉아 나를 기다리고 있다. 나도 그를 찾아 나서는 길이다.
3. 14명의 여인들
우리는 세상에 태어나면서 많은 관계 속에서 살아가게 된다. 가까이로는 나를 세상에 소중한 존재로 만들어 준 부모님 그리고 형제자매 그리고 사촌 형제들 또한 어릴 적 함께 보낸 유년시절의 골목 친구들 처음으로 만난 초등학교 1학년 선생님. 선생님보다 더 친절했던 학교 소사 아저씨 아저씨는 동화 속에 나오는 키다리 아저씨처럼 우리들이 필요로 하던 준비물을 홍길동처럼 여기저기에 나타나셔서 챙겨주셨고 학교의 책상이나 걸상이 고장이 나면 맥가이버처럼 뚝딱 고쳐 놓곤 사라지곤 하셨다.
학교 화단에 있던 책 읽는 소녀상처럼 늘 우리에게 동상처럼 학교의 붙박이셨다. 그리고 기억을 더듬어보면 큰 운동장 가장자리에 하늘로 솟아오르며 큰 키를 자랑하던 플라타너스 나무 우리는 나무의 동그란 열매가 너무 커서 왕방울 나무라고 부르기도 했다. 해질 무렵이면 길게 굽은 신작로 길에 마른 먼지가 날리고 소달구지에는 타고 있던 아이들 성근 웃음소리와 키 큰 아이 키 작은 아이들의 검정 고무신만 대롱대롱 매달려 춤추고 있었다.
그때가 유년기 전성시대였다. 그 어릴 적 추억이 흑백텔레비전에 위에 놓인 울퉁불퉁 노란 모과향이 숭숭 날아갈 무렵 나는 중년의 줌마렐라가 되어 있었다. 어른들은 늘 나를 만나면 좋을 때다 한창 때라고 말씀하셨다. 그땐 그 말뜻을 잘 모르고 지냈다. 요즘 나는 그 중년의 나이들을 만나면 그냥 좋을 때다. 그냥 한창때라고 말하는 주인공이 되었다. 그 한창 좋을 때 만난 사람들이 바로 14명의 여인들이다
으뜸으로 꼽히는 넘버원의 1도 아니고 빨강 파랑 노랑의 삼원색의 3도 아니고 엄지 검지 장지 약지 소지의 5도 아니고 빨주노초파남보의 일곱 색깔 무지개의 7도 아니고 다섯 손가락 양손을 합한 10도 아니다. 지금부터 각자 다른 고유한 색깔을 가지고 살아가는 14명의 여인들 이야기를 시작하려 한다.
나는 사람을 만날 때 쉽게 친해지는 성격은 아니다. 성격이라 함은 개인을 특징짓는 지속적이며 일관된 행동양식을 말한다. 사람 개인마다 성격도 다르고 성정 또한 많이 다르다. 양은 냄비의 쉽게 끓는 물처럼 친해지기보다는 뭉근한 불에서 오래도록 데워지는 가마솥 물처럼 오랫동안 시간이 지나야 친숙해 지는 성격이다.
또한 사람들은 이렇게 말한다. 끼리끼리 뭉치거나 몰려다닌다고 한마디로 끼리끼리 논다는 표현을 많이 쓴다. 맞는 말이다. 기실 끼리끼리는 공통되는 부분들이 많다. 서로 공유할 수 있는 공통분모가 많다는 소리이다. 서로 공유할 수 있다는 것은 함께 나눌 이야기가 있고, 함께 관심을 가질 꺼리가 있고, 함께 무언가 행동으로 옮길 충분한 이유가 있기 때문이다. 여기 서로 색깔은 다르지만 하나의 추구하는 삶이 같은 사람들이 모여 산다. 그들의 살아가는 모습을 잠시 들여다보자.
14명의 맏언니 윤남이 언니. 일단 착하다 그리고 초 긍정적인 마인드의 주인공이다. 말소리는 작지만 그 힘은 가랑비에 옷이 젖듯 잘 스며든다. 우산 같은 언니 두 번째 언니 호남이 언니 체구는 작고 자꾸 여기저기 앓는 소리를 내며 걸어 다니는 종합병원이다. 그래도 병원을 집삼아 들강 달강해서 그런지 나름 건강관리를 잘한다.
똑똑하고 야무지고 다른 사람들의 말을 잘 경청해 주는 우리들의 심리 상담가 겨울밤 군고구마 같은 언니 두 번째 나이가 같은 재남이 언니 자고로 사업을 잘하려면 가족들의 외조가 가장 중요한데 외조를 잘해주시는 형부 덕분에 늘 웃음이 잦다. 상냥하고 자기 관리에 충실하다.
시린 손을 녹여주는 장갑 같은 언니 세 번째는 세상에서 가장 바쁜 백 말띠 언니들이다. 이 모임에 무려 5명의 말띠들이 바쁘게 살아가고 있다. 별명이 쌍계남 특별한 인연이다. 이름은 같고 성만 다른 계남이다.
먼저 이계남은 온유하며 남에게 친절하고 가급적 성냄을 자제하고 주위에 사람들을 좋아하며 가급 산책길에 나서며 소녀적 감성을 여유를 즐기는 꽃사슴 같은 언니 반면 송계남은 보기엔 꼼꼼하지만 나름 털털한 면도 있어 처음엔 다가서기 어렵지만 알고 나니 인간미가 넘친다. 요즘 발견했는데 무엇이든 열심히 최선을 다하는 모습에 반해 버릴 지경이다. 톡 쏘는 레몬의 향기가 느껴진다.
그리고 누구보다 살뜰하게 살아가는 정계남인 벗이 있다. 화장기 없는 얼굴이지만 마음은 바다처럼 넓고 깊어 늘 마음을 따뜻하게 만들어 주는 아랫목 같다. 갈증을 풀어주는 식혜처럼 또한 황경남이라는 벗은 위기를 잘 지혜롭게 극복하는 기질이 있다. 이곳저곳 홍길동처럼 활동하는 재주꾼 사거리 교차로가 생각나네. 어디로 튈지 몰라서 그리고 말띠의 마지막 나 아버지의 DNA의 받아 늘 바지런하고 꾸준하게 오래도록 지치지 않게 살아간다. 하루가 마치 마지막 날인 것처럼 열정적으로도 살아봤으나 힘겨웠다. 그래서 조금씩 비우는 중이다. 나는 영락없는 말인가 보다.
그리고 나이를 가늠하기 어려운 황은남 내 기준으로 위에 선배들은 대강 나이를 추측하는데 아래로는 기억하려 해도 잘 기억이 재생되지 않아 고민이다. 황은남은 노력파 남이 알아주든 알지 못하든 간에 나름 혼자 티 내지 않고 애를 많이 쓴다. 시어머니 같기도 하고 친정어머니 같기도 하다 멋쩍어 보이는 웃음이 나를 미소 짓게 한다.
아련한 설렘을 주는 단풍 같은 친구 그리고 송용남 인정이 많고 울음도 많다. 가족 바라기의 대표적인 예이다. 검소하기도 효자 덕분에 더 즐거운 일이 많은 친구 정직한 신호등 같은 동생이다.
이번에는 김남인 친구이다. 여리여리 한 체구가 늘 부러움의 대상이며 다정다감하며 선배 후배를 잘 아우를 줄 아는 누구에게나 다 퍼 줄줄 아는 따뜻한 밥 한 끼의 힘을 가진 동생 그리고 몇 남지 않은 박선남 그리고 김해남 이 두 친구는 동갑내기이다. 성격과 취미는 다르지만 늘 움직이며 산다. 가장 아닌 가장의 역할을 그리고 전문 셰프의 길을 꿈꾸는 두 친구 박선남은 통통배가 떠오른다.
언제 어디든 마음만 먹으면 즐거움을 찾아 떠날 친구. 김해남은 365일 다이어트 중 그렇지만 맛있게 먹으면 스트레스는 제로 칼로리도 제로 마지막으로 우리 열네 명의 막내 이윤남은 막내인 듯 아닌 듯 헷갈릴 때가 있다. 열세명의 언니들 뒷바라지가 오죽하겠냐 만은 별 불평 없이 잘 따라와 준 기특한 막내이다. 성격은 불같은데 정의는 살아있고 우리 열세 명의 성격을 다 안아주고 사는 꽤 매력적인 동생이다. 마치 시소처럼 평형을 잘 맞춘다.
이렇게 어릴 적 친구들처럼 우리들은 나이 육십이 되어 가는데 골목 친구처럼 살아간다. 함께 사는 가족도 마음이 다 같지 않을진대 각기 다른 삶을 살아온 이들이 어찌 대동 단결하기가 쉽겠는가 싶지만 우리는 늘 기적을 만들어 간다.
어려울 땐 함께 모여 힘이 되어 주고 아플 땐 서로 위로가 되어 주고 기쁠 땐 내 가족처럼 더욱 즐거움이 되어 주는 살아가는 모습이나 성격들은 다 다르지만 우리는 한 가족처럼 늘 같은 목표를 가지고 같은 방향을 향하여 걸어왔다. 우리가 이렇게 한 울타리를 만들 수 있었던 건 오래도록 서로 버팀목이 되어주고 그저 곁에서 멀리서 묵묵히 지켜봐 준 우정이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오늘도 기상 시간은 다 다르지만 바쁜 아침을 맞이할 내게 소중한 열네 명의 벗들이 있기에 힘차게 말할 수 있다. 꿀 모닝~~~
<홍기분 님 등단 심사평>
- 大地의 작가 펄벅과 견주어 보면서 -
수필은 자신과의 대화의 글이다. 너무 잘 쓰려고 애쓰거나 남에게 잘 보이려고 하기보다 순수한 마음으로 친구에게 이야기하듯 써야 한다. 그리움에 사무치거나 외로움이 깊어 견딜 수 없을 때, 인생의 의미를 발견해 보고 그것을 낙서하듯 써 보는 습관도 좋은 방법의 하나가 될 것이다. 자기가 체험한 사실에다 상상과 느낌을 보태고 재구성하면서 의미를 부여하면 훌륭한 수필의 경지에 들어가게 된다.
홍기분 님의 수필 응모 작품을 대하면서 작품에 투영되는 임도 함께 만났다. 임은 이미 수필가의 삶을 영위해온 건 아닌가. 임의 수필을 읽으면서 수필에 대하여 섣부른 조언을 한다는 것이 자칫 사족(蛇足)을 다는 것이 아닌가 조심스럽다.
<병든 “대추 방망이”를 위한 기도>
‘대추 방망이’는 탄탄하고 야무지다 하여 붙인 아버지의 별명이다. 임의 글을 통해 가을볕이 창가에 내려오는 작은 병실에서 마른기침으로 인사를 대신하는 아버지의 얼굴이 전과 다르게 더 핼쑥해 보이는 모습이 안타깝게 다가온다.
언제나 날이 채 밝기도 전에 앞마당 바깥마당을 쓸어 투박한 빗질로 새벽을 깨우던 아버지를 임은 오롯이 마음에 품고 있으리라. 그 아버지는 이 땅에서 태어나 이 땅을 지켜낸 천하지대본의 대명사다. 여름밤 죽창 같은 비가 내리는 장마철 논두렁 물꼬를 살피고 태풍이 쓸고 간 벼 이삭이 납작 엎드린 황금 들녘을 자식처럼 보듬어 안았던 임의 아버지는 우리들의 아버지이다.
그 아버지의 손톱은 자랄 틈이 없어 손톱 깎기가 필요 없으나 우리의 가슴에 등대가 되어 빛으로 길을 안내하고 든든하게 지켜주고 있다. 아버지의 이름을 부르기 전에 눈물이 먼저 그렁그렁 맺힌다.
<초록 의자와 할아버지>
두 번째 작품은 임과 어느 노인과 만남이다. 소나무가 키 재기하듯 들쑥날쑥 날숨을 쉬던 어느 여름날 우연히 길을 지나가다 나지막한 의자에 혼자 덩그러니 앉아있는 노인이 눈에 들어왔다.
임과 노인의 만남에서 소설 <어린 왕자>의 주인공과 여우를 연상했다. 그저 스쳐가는 인연이 아니라 서로 길들이면서 조금씩 친숙해진 어린 왕자와 여우처럼 작가와 초록 의자에 앉아있는 노인은 서로 길들이고 있는 듯했다.
“만약 네가 오후 네 시에 온다면, 나는 세 시부터 행복해지기 시작할 거야. 시간이 가면 갈수록 그만큼 나는 더 행복해질 거야.” 어린 왕자 소설 속의 대사처럼 초록 의자에 앉아있는 노인은 임의 발걸음 소리가 들리면 마냥 행복할 것이다.
<14명의 여인들>
줌마렐라 전성시대! 작가와 공통분모를 가지고 있는 대한민국의 위대한 열네 명의 여성이 있다.
임은 어려울 땐 함께 모여 힘이 되어 주고 아플 땐 서로 위로가 되어 주고 기쁠 땐 내 가족처럼 더욱 즐거움이 되어 주는 살아가는 모습이나 성격들은 다 다르지만 우리는 한 가족처럼 늘 같은 목표를 가지고 같은 방향을 향하여 걸어왔다. 우리가 이렇게 한 울타리를 만들 수 있었던 건 오래도록 서로 버팀목이 되어주고 그저 곁에서 멀리서 묵묵히 지켜봐 준 우정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당당하게 고백하고 있다.
수필이 신변잡기가 아닌 문학이 되기 위해서는 그 무엇이 요청되는데 그것은 지성이요, 감성이라는 지적과 같이 본래 수필은 ‘만인의 문학’이었으면서도 지식인의 문학이라 할 수 있다. 수필은 독자에게 관능적이고 통속적인 즐거움을 주는 문학이 아니라, 정서적 공감을 주는 사고할 수 있는 문학이어야 한다. 임은 이미 수준 높은 작품을 통하여 수필이 요구하는 필요충분조건을 모두 갖추었다.
임은 등단 소감문에서 <大地>를 쓴 여류작가 펄벅을 소환한다. 임은 자신의 아버지가 <大地>의 주인공 왕룽과 판박이라고 말한다. 임의 작품을 심사하면서 이미 안정적인 글쓰기의 경지에 오른 작가를 미래의 여류작가 펄벅에 견주어 본다. 임의 내면에 저장된 언어들을 끊임없이 조탁하여 문학사에 영롱하게 빛나는 샛별이 되기를 기원한다. - 심사위원 記 -
<등단 소감>
고독은 내게 친절하다
‘내 안에는 나 혼자 살고 있는 고독의 장소가 있다. 그곳은 말라붙은 당신의 마음을 소생시키는 단 하나의 장소다.’ 미국의 소설가인 펄벅의 말이다.
중국을 배경으로 하는 이 소설 대지는 가난한 농부에서 부자가 되는 왕룽이라는 인물의 일대기를 그린 소설이다. 빈농의 자식으로 태어난 왕룽과 그 일가의 생애를 통해 격동하는 근대 중국의 역사를 배경으로 척박하고 광대한 땅에서 생활하는 중국 농민의 잡초와 같이 끈질긴 모습을 담아내고 있다. 또한 그 당시로서는 드물게 중국과 독특한 중국 역사를 배경으로 중국인들과 그들의 삶을 다룬 소설로 평가되고 있다. 발표되자마자 높은 인기를 얻어 1932년 퓰리처상을 받았으며 1938년 12월 10일 노벨 문학상을 받았다.
이 소설의 배경은 흡사 나의 아버지와 판박이다. 가난했지만 마음은 늘 풍요로운 농부였다. 비와 바람과 무더위의 날씨 속에서도 아랑곳하지 않고 불철주야 오롯한 농사일에만 매진하셨다. 볍씨 한 알 고르는 일부터 싹 틔우는 일 그리고 모내기를 위해 파종을 하고 육묘기를 거쳐 기간이 짧은 활착기를 지나 분얼기 등등 손수 손을 거치지 않으면 잘 여문 볍씨 한 알을 얻어내기 힘들다. 벼의 일생은 영양 생장기와 생식 생장기 두 개의 과정을 거쳐 일생을 마감하는데 영양 생장기는 벼의 몸체를 만드는 시기이며, 생식 생장기는 2세를 위한 볍씨를 만드는 과정이다.
벼의 일생은 아버지의 일생이기도 하다. 땅에서 태어나 땅에서 자라고 생활하며, 평생을 흙을 일구며 살아오셨다. 흙을 통해 삶을 배우고, 좌절을 경험하며 다시 겸허해지고 굴곡진 인생의 쓴 맛과 단 맛을 만들어 가셨다.
언젠가는 장대비가 머리를 뚫을 기세로 내리던 여름밤! 달빛 한 조각 없는 암흑천지의 논두렁길을 따라 물꼬를 내고 돌아오셨다. 일 년 내내 애써 키운 벼이삭이 쓰러질까 물에 잠길까 노심초사 담배만 물고 계시더니 새벽닭이 울 무렵 다시 성근 기침소리를 내며 논으로 나가셨다.
억척같이 하지 않으면 되는 게 없다. 남들처럼 놀고먹고 쉬고 나서 일하면 손에 쥐어지는 소득이 없다 하셨다. 투박한 손톱은 늘 닳아서 없어지고, 대문 밖 텃밭은 잘 빗질을 한 마당처럼 곱고 간결했다. 풀 한 포기 자라지 않도록 늘 바지런한 검소함. 노을이 지나간 어둠 속에선 아버지의 허리 휜 산자락이 끙끙 앓고 있었다.
나는 아버지를 통해 농부를 알았고 농부를 통해 진정한 아버지를 알게 되었다. 그 모습을 통해 함께 버티며 함께 빗속을 뚫고 바람에 날려 넘어지며, 아버지가 가난한 고독과 끊임없이 줄다리기를 하고 있다는 것을. 한 참 어른이 되고서야 알 수 있었다.
누구나 다시 한번쯤 꿈꿔왔을 유년시절! 이른 아침 창가에 머무르는 햇살 한 줌! 처마 끝에 매달려 있던 시린 조각달 긴 한숨소리로 새벽을 깨우시던 아버지 멈춰 있는 듯한 세상에서 아버지의 고독이 얼마나 내게 친절했는지 사각거리는 어머니의 발자국 소리마저 삼켜버렸다.
고독은 나를 깊이 안고 방황하며, 때로는 울부짖으며, 때로는 나를 넘어지게도 하고 다시 일으켜 세우기도 하며, 친절하게 또는 대담하게 달려왔다. 떼어 놓을 수 없는 고독은 내게 몸과 마음을 지탱해주는 글이 되었다. 글은 상처를 낫게 하는 약손이었고 세상과 소통하는 창문이 되었다.
하루하루 소소한 것들을 마주하고 경험하고, 기억으로 저장되면, 저장된 언어들로 지어진 집에 늘 나를 새롭게 태어나게 했다. 세상의 깊은 조각들의 흐름을 모아 하나하나 조각보를 꿰매어 보니 나를 감싸주는 실루엣이 만들어졌다.
빈약한 실력으로 시작해서 어느새 등단의 자리에 오른다는 귀한 소식을 접했을 때 아버지의 빈자리가 더욱 그리워진다. 기억의 저 편에 서 계신 우리 엄마에게도 기쁜 소식을 전해야겠다.
항상 묵묵하게 지켜봐 주고 응원해 준 가족들과 늘 관심과 배려로 함께 한 지인들과 바쁜 일상 속에서도 오래도록 아주 오랫동안 포기하지 않고, 누구보다 진솔하게 삶의 이야기를 풀어 준 나 자신에게도 따뜻한 마음을 전해 본다.
앞으로 더욱더 매진하겠습니다. 심사에 협조해주신 선생님들과 많은 격려와 희망을 안겨주신
최 기복 회장님께 진심으로 감사의 마음을 전한다.
홍기분 약력
1966년생 충남당진 출생
호서대학교 아동교육학과 졸업
현)아이꿈터 대표
현)전문MC / 천안시 자원봉사센터 교육 강사
어울림 놀이문화 센터 교육 강사 (전래놀이, 레크노래교실)
<홍기분 님 등단 심사평> 수필은 자신과의 대화의 글이다. 너무 잘 쓰려고 애쓰거나 남에게 잘 보이려고 하기보다 순수한 마음으로 친구에게 이야기하듯 써야 한다. 그리움에 사무치거나 외로움이 깊어 견딜 수 없을 때, 인생의 의미를 발견해 보고 그것을 낙서하듯 써 보는 습관도 좋은 방법의 하나가 될 것이다. 자기가 체험한 사실에다 상상과 느낌을 보태고 재구성하면서 의미를 부여하면 훌륭한 수필의 경지에 들어가게 된다. 홍기분 님의 수필 응모 작품을 대하면서 작품에 투영되는 임도 함께 만났다. 임은 이미 수필가의 삶을 영위해온 건 아닌가. 임의 수필을 읽으면서 수필에 대하여 섣부른 조언을 한다는 것이 자칫 사족(蛇足)을 다는 것이 아닌가 조심스럽다. <병든 “대추 방망이”를 위한 기도> ‘대추 방망이’는 탄탄하고 야무지다 하여 붙인 아버지의 별명이다. 임의 글을 통해 가을볕이 창가에 내려오는 작은 병실에서 마른기침으로 인사를 대신하는 아버지의 얼굴이 전과 다르게 더 핼쑥해 보이는 모습이 안타깝게 다가온다. 언제나 날이 채 밝기도 전에 앞마당 바깥마당을 쓸어 투박한 빗질로 새벽을 깨우던 아버지를 임은 오롯이 마음에 품고 있으리라. 그 아버지는 이 땅에서 태어나 이 땅을 지켜낸 천하지대본의 대명사다. 여름밤 죽창 같은 비가 내리는 장마철 논두렁 물꼬를 살피고 태풍이 쓸고 간 벼 이삭이 납작 엎드린 황금 들녘을 자식처럼 보듬어 안았던 임의 아버지는 우리들의 아버지이다. 그 아버지의 손톱은 자랄 틈이 없어 손톱 깎기가 필요 없으나 우리의 가슴에 등대가 되어 빛으로 길을 안내하고 든든하게 지켜주고 있다. 아버지의 이름을 부르기 전에 눈물이 먼저 그렁그렁 맺힌다. <초록 의자와 할아버지> 두 번째 작품은 임과 어느 노인과 만남이다. 소나무가 키 재기하듯 들쑥날쑥 날숨을 쉬던 어느 여름날 우연히 길을 지나가다 나지막한 의자에 혼자 덩그러니 앉아있는 노인이 눈에 들어왔다. 임과 노인의 만남에서 소설 <어린 왕자>의 주인공과 여우를 연상했다. 그저 스쳐가는 인연이 아니라 서로 길들이면서 조금씩 친숙해진 어린 왕자와 여우처럼 작가와 초록 의자에 앉아있는 노인은 서로 길들이고 있는 듯했다. “만약 네가 오후 네 시에 온다면, 나는 세 시부터 행복해지기 시작할 거야. 시간이 가면 갈수록 그만큼 나는 더 행복해질 거야.” 어린 왕자 소설 속의 대사처럼 초록 의자에 앉아있는 노인은 임의 발걸음 소리가 들리면 마냥 행복할 것이다. <14명의 여인들> 줌마렐라 전성시대! 작가와 공통분모를 가지고 있는 대한민국의 위대한 열네 명의 여성이 있다. 임은 어려울 땐 함께 모여 힘이 되어 주고 아플 땐 서로 위로가 되어 주고 기쁠 땐 내 가족처럼 더욱 즐거움이 되어 주는 살아가는 모습이나 성격들은 다 다르지만 우리는 한 가족처럼 늘 같은 목표를 가지고 같은 방향을 향하여 걸어왔다. 우리가 이렇게 한 울타리를 만들 수 있었던 건 오래도록 서로 버팀목이 되어주고 그저 곁에서 멀리서 묵묵히 지켜봐 준 우정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당당하게 고백하고 있다. 수필이 신변잡기가 아닌 문학이 되기 위해서는 그 무엇이 요청되는데 그것은 지성이요, 감성이라는 지적과 같이 본래 수필은 ‘만인의 문학’이었으면서도 지식인의 문학이라 할 수 있다. 수필은 독자에게 관능적이고 통속적인 즐거움을 주는 문학이 아니라, 정서적 공감을 주는 사고할 수 있는 문학이어야 한다. 임은 이미 수준 높은 작품을 통하여 수필이 요구하는 필요충분조건을 모두 갖추었다. 임은 등단 소감문에서 <大地>를 쓴 여류작가 펄벅을 소환한다. 임은 자신의 아버지가 <大地>의 주인공 왕룽과 판박이라고 말한다. 임의 작품을 심사하면서 이미 안정적인 글쓰기의 경지에 오른 작가를 미래의 여류작가 펄벅에 견주어 본다. 임의 내면에 저장된 언어들을 끊임없이 조탁하여 문학사에 영롱하게 빛나는 샛별이 되기를 기원한다. - 심사위원 記 - |
첫댓글 홍기분 수필가님~~!!
덕향문학 10호로 등단하시고
위풍당당 기성작가의 반열에 올랐습니다.
팔방미인 작가님의 아름다운 방을 마련했으니
좋은 글로 역사를 써 가시기를 빕니다.
정진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