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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남문학단맥 02.. 문학산에서 봉재산까지 걷기..
1. 답 사 지 : 한남문학단맥 걷기..
2. 산행일시 : 을사년 (乙巳年, 25년) 잎새달(4월) 닷새(5일) 흙날(토요일)
3. 만나는곳 : 07:00분, 문학경기장역 2번 출구
4. 답사 예정 아래 자료로..
문학경기장역-인천향교-문학산(217m)-연경산(176m)-노적봉-송도초-청량산(172)
봉재산(104m)-배수지-동막역
( 오후에 일이 있어 일찍 시작하는 점 양해 바랍니다 )
계속 걸어야 할 길.. 다음지도..
문학단맥은..
5. 답사시간 : 초급
6. 준비물 : 편한 복장에 간단한 간식..
(산행 마치고 동막역 주위에서 중식겸 뒤풀이 후 헤어집니다)
7. 회 비 : 발전기금 1,000원
8. 안내 연락처 : ☎ 초보산꾼 010 -3650 -0895
초보산꾼
** 답사 참고 자료.. *******************
문학사거리 승학산 갈림길..
문학동文鶴洞 인천시 미추홀구
문학동은 성촌(城村), 남산(南山) 마을로 불렸다. 1903년 8월에 서촌산성리(西村山城里), 남산리(南山里)로 구분되었다가, 1906년 5월에 산성리(山城里), 학산리(鶴山里)로 각각 개칭되었다. 옛 문학동의 지명인 성촌은 성[문학산성]이 있는 마을이라는 뜻이며, 남산은 문학산의 옛 이름인 남산에서 유래하였다. 또한 서촌산성리란 서쪽 산성 부락을 뜻하며 학산리와 문학리는 문학산에서 유래하였다.
문학산은 비류 백제의 발상지이며, 인천도호부 관아가 있고, 인천 향교를 비롯하여 지방 지정 기념물인 문학산성, 학산 서원 터, 하늘에 제를 올리던 수천현 고개, 능허대를 거쳐 중국으로 떠나는 사신 일행을 전송하던 고개로 전송객이 이별을 아쉬워하며 사신 일행을 크게 세 번 불렀다는 곳인 삼호현(三呼峴)이 있다. 또한 수령(樹齡)이 600년인 은행나무가 보호수로 지정되어 있기도 하다.
[네이버 지식백과] 문학동 [文鶴洞]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인천도호부관아 仁川都護府官衙 인천광역시 유형문화재. 미추홀구 매소홀로 553 (문학초 內)
건축 연대는 확실치 않으나 조선 초기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되며 현재의 건물은 객사 지붕에서 발견된 명문(銘文)에 의해 1677년(숙종 3)에 중수된 것으로 추정된다. 《인천부읍지(仁川府邑誌)》에 의하면 객사(客舍) 20칸, 동헌(東軒) 10칸과 내동헌·삼문(三門) 외에 공수(公須)·삼문·사령청(使令廳)·향청(鄕廳)·군관청(軍官廳)·훈무당(訓武堂)·작청(作廳)·옥사·사창(司倉)·좌기청(坐起廳)·어용청(御用廳)·수미고(需米庫)·군기고(軍器庫) 등이 있었다고 한다.
군관청은 광복 전까지 파출소로 사용되다가 불타 없어졌고, 내동헌은 1955년까지 인천시 문학출장소로 사용되다가 헐렸다. 현재의 동헌은 옮겨지을 때 축소 건축한 내동헌으로 추정된다. 1950년에 지금의 위치로 이전 개축하여 당시의 배치와 형태를 알 수 없게 되었다. 현재는 객사 일부와 동헌, 훨씬 후대에 지은 창고만이 남아 있다. 객사는 3칸 2면만 남아 있는데 맞배지붕에 주심포(柱心包) 집이다. 동헌은 전면 6칸, 측면 3칸의 팔작지붕 굴도리집으로 관청건물로는 드물게 부연을 달지 않은 홑처마지붕이며 기둥도 네모기둥을 사용하였다. 2019년 10월 인천시는 인천도호부청사에서 인천도호부관아로 명칭을 변경하였다.
[네이버 지식백과] 인천도호부관아 [仁川都護府官衙] (두산백과 두피디아, 두산백과)
문학동은행나무 미추홀구 매소홀로 553 (문학초 內)
문학 초등학교에 있는 보호수이며 시 나무이다. 나무의 높이는 약 25m이고, 둘레는 약 7m, 수관 직경은 20m에 달한다.
문학동 은행나무는 모든 방향으로 골고루 펼쳐진 줄기들을 가지고 있으며, 이는 나무가 자라나는 기세나 상태인 수세(樹勢) 유지에 충분한 도움을 주고 있다. 아울러 학교라는 소재지 특성상 큰 변동 없이 현재의 형태와 수세를 유지할 수 있을 것이다. 열매를 달고 있는 흔적이 없는 것으로 보아 수컷나무로 보이며 이것이 오히려 장수목으로 잔류하게 하는 데 큰 도움을 준 것으로 추정된다.
[네이버 지식백과] 문학동 은행나무 [文鶴洞銀杏-]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승학산昇鶴山] 122m 미추홀구 관교동, 문학동, 주안동에 걸쳐 있는 산
북망산이라고도 하며, 조선시대에는 읍주산이라고도 불렀다. 남쪽으로는 인천 미추홀구의 진산(鎭山)으로 통하는 문학산(文鶴山, 높이 213m)과 마주보고 있으며, 남동쪽으로는 승기천(承基川, 길이 10.33㎞)이 흘러 서해로 빠져나간다. 승학산과 문학산 사이에 형성되어 있는 남북 너비 1.2㎞, 동서 길이 1.7㎞에 이르는 분지는 지리적으로 천혜의 방어환경을 이루고 있어 예로부터 사람들의 주요 거주공간이자 인천의 역사·문화 중심지가 되었다.
산기슭에는 조선시대 인천도호부의 관아였던 인천도호부관아(인천광역시 유형문화유산)와 조선시대 교육기관이었던 인천향교(인천광역시 유형문화유산) 등의 유적이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승학산 [昇鶴山] (두산백과 두피디아, 두산백과)
관교동 토성 터[ 官校洞土城址 ] 미추홀구 문학동 273
1949년 인천시립 박물관에서 조사한 문학 방면 고적 조사에서 처음 확인된 유적으로 당시의 자료를 인용하면 “주안 중앙 도자기 회사 채토장 위 산턱 일대는 ‘마근대미’라고 불리고 있다. 이것은 조선 시대 토성이었던 곳으로 이곳이 북방 요새였던 것이다. 지금은 토벽이 붕괴되어 옛 모습을 찾아볼 수 없다.”라고 하였다. 인천 시립 박물관에서 1956년에 간행한 『향토 인천의 안내』에서는 그 말미에 “또한 이 토성의 축조 연대에 있어서도 상고할 바 없으나 광주의 풍납리 토성과 같이 좀 더 오랜 역사를 가졌는지도 모른다.”라고 하여 그 축조 연대를 삼국 시대 백제 초기까지 추정하고 있다. 1990년에 서울 대학교 박물관에서 제2 경인 고속도로 건설에 따른 지표 조사를 실시하면서 유희강(柳熙綱)의 설을 바탕으로 조금 더 나아가 ‘마근대미’라는 전래 지명을 ‘막은대미’의 음역이라 하며 말 그대로 승기천을 막아 관개하던 보(洑)가 있던 곳이고, 비류의 유적일 가능성까지 제기하였다.
1980년대 인천광역시 미추홀구 관교동 토성 터 주변으로 주안 쌍용 아파트를 비롯한 아파트 단지와 주거지가 조성되면서 지금은 흔적을 찾아볼 수 없다.
[네이버 지식백과] 관교동 토성 터 [官校洞土城址]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인천향교仁川鄕校 문학동 349-2 인천광역시 유형문화재
유교를 보급하고 인재를 키우기 위해 국가에서 정책적으로 만든 향교는 이미 고려시대부터 있었으나, 조선시대에 들어와 유교사상이 건국이념이 되자 항교가 더욱 장려되었다. 이곳 인천향교가 처음 지어진 연대와 장소에 대해서는 정확한 자료가 남아 있지 않다. 다만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나오는 최항(崔恒)의 중수기(重修記)로 미루어볼 때 1398년(태조 7) 경 창건된 것으로 추정된다. 지금 남아 있는 향교 건물은 전란으로 불탄 것을 숙종 대에 다시 중건한 것이라 한다.
[네이버 지식백과] 미추홀구(인천광역시) [彌鄒忽區(仁川廣域市)]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조선 후기의 건축물로 1955년과 1964년에 중수되었으며 1967년 삼문과 대성전·명륜당을 보수하였다. 창건연대는 알 수 없으며 조선시대 국가로부터 토지와 전적·노비 등을 지급받아 교관 1명이 30명의 교생을 가르치다가 갑오개혁 이후 교육적 기능을 상실하였다. 봄·가을에 석전(釋奠)을 봉행하며 초하루·보름에 분향하고 있다. (생략)
[네이버 지식백과] 인천향교 [仁川鄕校] (두산백과 두피디아, 두산백과)
인천향교비석군 仁川鄕校-碑石群 향토문화유산
인천광역시 미추홀구 문학동에 위치한 인천 향교 홍살문 좌측에 위치한 석비군은 조선 인조 때 인천 부사를 지냈던 이후천(李後天) 등 17인의 선정비가 세워져 있다. 1876년에 세워진 경기도 관찰사 민태호(閔台鎬)를 제외한 16개의 선정비는 모두 인천 부사의 것이며, 그 중 정조 때 인천 부사를 역임했던 황운조(黃運祚)의 경우 두 개의 선정비가 세워져 있어 비석은 18개이나 인물은 모두 17인이다. 이 석비들은 인천도호부 곳곳에 산재하고 있던 것들로 1930년대에 인천도호부 관아였던 지금의 문학 초등학교 앞에 5기의 선정비만이 있었으나 1949년 10개의 선정비를 이곳으로 모아왔다. 그 뒤로도 3개의 선정비를 더하여 1970년대 지금의 자리로 이전하였다.
한편 황운조의 선정비는 삼호현 초입 커다란 바위에 암각된 것이 하나 더 있어 모두 3개가 남아 있다. 이 암각 선정비는 인천광역시 연수구 청학동 문학 터널 상단에 있었으나, 공사로 인해 인근 청학사 입구로 이전한 상태이다.
[네이버 지식백과] 인천 향교 앞 비석군 [仁川鄕校-碑石群]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 박제순의 선정비 을사오적의 한 사람으로 인천부사를 지낸.. 단죄문 비석..
박제순 선정비를 옆으로 눕히고 비석 옆에 을사오적이었던 박제순의 친일행적을 설명하는 안내판을 설치할 예정이다. 지역사회에서 박제순 선정비 철거 문제가 제기된 것은 2005년이다. 당시 시민단체는 인천향교에 있는 인천도호부사(인천시장)를 지낸 15명의 선정비 중에 한일합방조약에 서명한 친일파인 박제순의 선정비가 있는 것을 확인하고 철거를 요구한 바 있다. 그러던 중 올 초 선정비가 여전히 인천향교 담장에 방치돼 있다는 사실이 드러나면서 시민단체는 다시 한 번 행정기관의 대처를 비판하고 나섰다. 선정비를 시민들이 밟고 다닐 수 있게 눕혀야 한다는 주장을 펼치기도 했다.
출처 : 인천일보(https://www.incheonilbo.com)
인천도호부관아 仁川都護府官衙 향교 옆 문학동 349-3
문학고개 다음지도
제2경인고속국도
고마리길 식물이름
문학산文鶴山 학익동과 청학동 경계 시작 인천광역시 미추홀구와 인천광역시 연수구의 경계
문학산(文鶴山)은 학산(鶴山) 또는 남산(南山)이라고도 한다. 예전엔 배꼽산이란 이름으로 더 잘 알려져 있었다. 산봉우리가 마치 사람이 배꼽을 내놓고 누워 있는 모양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지금은 배꼽 모양이 없어졌을 뿐 아니라 옛날 산 형태를 기억하는 이들도 줄어 문학산으로 통칭되고 있다.
문학산은 미추홀 왕국의 발상지로서 유서 깊은 역사의 장소다. 또한 문학산에는 인천도호부 관아와 인천 향교를 비롯해 지방 지정 기념물인 문학산성, 학산 서원 터가 있는 것으로도 유명하다. 하늘에 제를 올리던 도천현, 능허대를 거쳐 중국으로 떠나는 사신 일행을 전송하던 고개로 전송객이 이별을 아쉬워하며 사신 일행을 크게 세 번 불렀다는 삼호현(三呼峴)의 이야기도 전한다. 이와 함께 600년생 은행나무가 보호수로 지정되어 있다.
문학산에는 삼국 시대의 유적인 문학산성, 고려 시대의 문학사(文鶴寺) 터, 조선 전기 건물인 문학 문묘(文廟)와 인천도호부 관아의 일부가 남아 있다. 그 밖에도 학산 서원 터, 안관당(安官堂) 터 등이 있다.
그리고 산꼭대기에는 조선 시대에 만든 높이 3m 의 고분형의 봉수대가 있어 마치 배꼽처럼 보여 문학산을 ‘배꼽산’ 또는 ‘봉화둑산’이라 부르기도 하였는데, 현재는 봉수를 허물어 버려 이 흔적을 찾아볼 수 없다. 낮에는 연기, 밤에는 횃불로 통신하는 봉수는 고려 시대에도 이미 실시하고 있었으며, 문학산의 봉수는 남으로 안산의 정왕산, 북으로 부평의 축곶 봉수에 응하였다.
[네이버 지식백과] 문학산 [文鶴山]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문학산 봉수 터[ 文鶴山烽燧址 ] 문학산 봉수 터 (naver.com)
인천 미추왕릉[ 仁川 傳 彌鄒王陵 ] 인천광역시 남구 문학동 문학산성 내에 위치한 왕릉이다.
군부대 내에 위치해 있어 확인해 볼 수 없다.
[네이버 지식백과] 인천 미추왕릉 [仁川 傳 彌鄒王陵] (문화원형백과 백제금동대향로, 2005., 문화원형 디지털콘텐츠)
안관당 터[ 安官堂址 ] 문학산 문학산성 내
안관당(安官堂)은 임진왜란 때 전사한 인천도호부 도호부사 김민선(金敏善)[1542~1592]의 위패를 모시던 사당이다. 김민선은 부평도호부 출신으로, 조선 중기의 문신이다. 본관은 광산(光山)이며 자는 달부(達夫)로 1572년(선조 5)에 생원시에 합격하였다. 이어서 별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집의(執義)가 되었다. 1581년에 경성(鏡城) 판관(判官)의 직책을 고의로 버리고 돌아와 사간원의 탄핵을 받아 파직되었다. 헌납으로 있을 때 사간원과 사헌부가 함께 정철(鄭澈)을 탄핵하는 데에 참여하여 정철·백유함(白惟咸)·유공진(柳拱辰)·이춘영(李春英) 등을 유배시켰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인천도호부의 도호부사로서 문학산성을 수리하여 지키면서 여러 차례 왜적을 무찌르다 전사하였다.
[네이버 지식백과] 안관당 터 [安官堂址]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수리봉 왜성 터[ -峯倭城- ] 미추홀구 문학동 산 21-1
18세기 중엽 간행된 『여지 도서(輿地圖書)』에 “동문[문학산성]밖 100여 보에 봉우리가 솟아 있는데 기 위에 왜성(倭城)의 터가 남아 있다. 왜군이 성을 공격할 때 머물렀던 곳이다.”라는 것이 처음 나타나는 기록이다. 임진왜란 당시 인천 부사 김민선과 왜군 사이에 전투가 있었음이 분명하기 때문에 문학산 인근에 왜군의 주둔처가 있었을 것이고, 그 흔적이 남은 것으로 볼 수도 있다. 수리봉에서 산성의 동문 쪽으로 통하는 산 능선이 문학산성을 공략하기에 가장 수월한 루트임을 감안한다면 원래 산성의 일부로 수축된 것을 왜군이 장악하고 이용한 것으로 추정할 수도 있다.
문학산성의 동문지에서 산 능선을 따라 동쪽으로 100m 가량 떨어진 곳에 수리봉이 있다.수리봉을 선유봉이라고도 부른다. 왜성지는 이 봉우리를 둘러싸고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수리봉 왜성은 문학산 안관당 터와 함께 임진왜란 당시 문학산이 조선군과 왜군의 격전지였음을 알게 해 주는 유적이다.
[네이버 지식백과] 수리봉 왜성 터 [-峯倭城-]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청학동靑鶴洞 인천시 연수구
구한말 인천부 먼우금면에 속했으며 청릉마을 · 뒷골 · 안골 등의 마을이 있었다고 한다. 청릉이란 '청량산 기슭에 있는 무덤'이라는 뜻으로 『여지도서』에 기록된 '비류 백제의 미추왕 묘'를 지칭할 것이라 전한다. 뒷골이란 '문학산 뒤쪽에 있는 마을'이라는 뜻이며 한자화되어 산후동(山後洞)이라고도 불리었다. 지명은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처음 등장한 이름이다. 청릉마을의 '청'과 문학산의 '학'을 합쳐서 만든 지명이라 전한다. 1981년 직할시 승격으로 인천직할시 남구 청학동이 되었으며, 1995년에는 행정구역 개편과 함께 남구로부터 분리되어 인천광역시 연수구 청학동으로 개편되었다.
[네이버 지식백과] 청학동 [靑鶴洞, Cheonghak-dong] (한국지명유래집 중부편 지명)
삼호현 三呼峴 사모지고개 참조
사모지 고개 인천광 미추홀구 문학동과 학익동에서 인천광역시 연수구 청학동 고개.
사모지 고개는 백제 시대에는 중국으로 가는 사신들도 이 고개를 넘어 능허대(凌虛臺) 한나루에서 배를 탔다고 전해지는 만큼 인천 일대에서 주요한 교통로였다.
사모지 고개는 삼호현(三呼峴)에서 비롯한 것이다. 4세기경 전성기를 이룬 백제(百濟)의 근초고왕(近肖古王)은 영토 전쟁 중에 고구려(高句麗)의 고국원왕(故國原王)을 죽이는 바람에 고구려와 원수지간이 된다. 따라서 중국과 교역하는 육지 길이 막히게 되어 바닷길로 중국으로 가곤 했다. 임금의 명으로 중국으로 가게 된 사신은 이별 고개[성현(星峴)]’에서 따라온 가족들과 마지막으로 작별을 하고 홀로 길을 재촉하여 사모지 고개에 이른다. 이때 뒤를 돌아 아직도 이별 고개를 떠나지 못한 가족들을 향해 “잘 있으라.”라고 크게 세 번 외치고 고개를 넘었다고 하여 삼호현(三呼峴)이라 했다고 한다. 한나루[능허대]로 가는 주요 교통로였던 고개이며, 후에 사모지 고개로 이름이 바뀌었다고 한다.
[네이버 지식백과] 사모지 고개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사모지 고개는 8·15 해방 전후에도 지금의 인천광역시 송도 앞바다에서 채취한 해산물을 팔러 가는 주민들이 이용한 고개다. 예전에는 문학 터널로 진입하는 사거리쯤에 고개로 올라가는 산길이 있었겠지만 지금은 터널 옆으로 난 산길을 이용해야 한다. 산길은 군부대가 위치해 있어서 한때는 대형 자동차도 다닐 만큼 포장이 되어 있었다.
[네이버 지식백과] 사모지 고개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 삼해주현
『여지 도서(輿地圖書)』에는 이 고개가 삼해주현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삼해주현은 고개에 위치한 큰 바위에서 유래한 것이다. 그 바위 꼭지에는 마치 동이와 같이 생긴 구멍이 뚫려있다. 그 구멍에 삼해주가 가득 차 있어서 고개를 넘어가는 사람들이 고개를 오르다가 숨이 차고 목이 마르면, 그 술을 떠서 마셨다. 그 술은 한 잔만 마셔도 갈증이 풀리는 술이라서, 욕심을 부리면 안되는데 어떤 파계승 한 사람이 욕심을 부리고 술을 한 잔 이상 먹어 그만 술이 말라 없어졌다고 한다. 이로부터 유래한 고개 이름이 삼해주현이다.
[네이버 지식백과] 사모지 고개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연경산(衍慶山) 연경정
학익산(鶴翼山) 혹은 청명산이라고도 한다. 학익산이라고도 불리는 것은 멀리서 보면 ‘학이 날개를 편 모양’이라 해서 붙은 이름이라는 이야기가 있다. 문학산은 이전 이름이 학산(鶴山)이었는데, 학익산과 문학산 주봉(主峰)이 두 날개처럼 펼쳐져 동네를 감싸고 있는 모습이라 한다. 그래서 동네 이름도 학골, 핵굴 등으로 불렸다 한다. 그러나 본 명칭인 연경산에 대한 구체적인 지명 유래는 전하지 않는다. 연경산의 높이는 175.86m이며 문학산의 서쪽에 있는 봉우리이다. 그 서편에는 노적봉이 있다. 정상 부근에 연경정이라는 이름의 정자가 1980년대에 세워졌다.
[네이버 지식백과] 연경산 [衍慶山]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노적봉 삼거리 창학동과 옥련동 경계 시작..
옥련동 이천시 연수구
비류대로
비류왕(沸流王)
미추홀구彌鄒忽區는 인천 지역 중 처음으로 사서(史書)에 기록된 인물의 흔적이 남아있는 곳이다. 『삼국사기』 백제본기에 나오는 비류왕(沸流王)이 바로 그 인물이다. 아버지는 고구려를 세운 주몽이고, 동생은 백제를 세운 온조왕(溫祚王)이다. 비류는 미추홀(彌趨忽)로 내려와 기원전 18년 나라를 세웠다고 하는데, 미추홀이 어디인가에 대해서는 여전히 이론이 있지만, 대체로 지금의 인천을 가리킨다는 것이 학계의 정설이다. 현재 문학산에 있는 문학산성은 비류가 처음 인천에 자리를 잡고 도읍을 만들기 위해 쌓은 성으로 알려져 있으며 미추홀 고성 또는 남산 고성으로도 불린다.
『여지도서』에는 “문학산이 곧 미추왕의 고도(古都)”라는 표현이 나오며 『동사강목』에도 “전하는 바로는 문학산 위에 비류성 터가 있고 성 안에 비류 우물이 있다.”는 기록이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미추홀구(인천광역시) [彌鄒忽區(仁川廣域市)]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인천외국인묘지仁川外國人墓地 청량산 입구 연수구 비류대로232번길
1883년 인천이 개항된 뒤 우리나라에 들어와 활동하다 사망한 외교관·통역관·선교사·선원·의사 등 외국인들이 안장된 공동묘지이다. 묘지 면적 1만 362㎡를 포함하여 총 면적은 1만 9008㎡이다. 인천의 외국인 묘지는 1883년 중구 북성동에 설치된 뒤 1887년 7월 첫 매장이 이루어졌고, 이후 북성동을 비롯하여 중구 율목동과 남구 도화동 등지에 외국인 무덤이 조성되었다. 1965년 5월 25일 지역 개발에 따라 여러 곳에 산재한 외국인 묘를 현재의 장소로 이장하였다. 미국인 묘 17기와 독일인 묘 11기, 영국인 묘 9기, 러시아인 묘 5기, 이탈리아인 묘 3기, 오스트레일리아인·네덜란드인 묘 각 2기, 프랑스인·캐나다인·스페인인·폴란드인·체코인·중국인 묘 각 1기와 국적 불명의 11기 등 모두 66기가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인천외국인묘지 [仁川外國人墓地] (두산백과 두피디아, 두산백과)
청룡공원
청령산淸凉山 인천 연수구 옥련동 · 동춘동 · 청학동의 경계 지점에 위치한 산이다(고도:173m). 『신증동국여지승람』과 「인천부읍지」에 "인천부 남쪽 7리 되는 곳에 있다."는 기록이 있다. 『대동지지』와 『대동여지도』, 『조선지지자료』에 기록되어 있다. 『1872년지방지도』 인천부에도 청량산이 묘사되어 있다. 산세가 아름다워서 송도의 금강(金剛)이라고도 부른다. 산이 전체적으로 화강암으로 이루어져 있어 경사가 급하고 바위가 많이 보인다. 원래 이름은 '척량산(尺量山)'이었다고 하며 이것이 잘못 한자화되어 청량산이 되었다고 전한다. '척량'이란 풍수지리적으로 '금자로 땅을 재는 형국(금척량지형 金尺量地形)'의 준말로 이 일대가 풍수지리적 길지로 인식되어 왔음을 보여준다. 산 사면에는 인천상륙작전기념관 · 인천시립박물관 · 한국유리시험소 같은 주요 시설들이 있다. 호불사 · 홍륜사 · 법림사 · 법용사 · 청량암 등 다수의 사찰이 분포해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청량산 [淸凉山, Cheongnyangsan] (한국지명유래집 중부편 지명)
흥륭사 갈림길 동춘동 시작
동춘동東春洞 인천시 연수구
인천광역시 연수구의 남쪽에 위치하는 법정동이자 행정동이다. 북쪽으로 청량산이 소재한다. 구한말 인천부 먼우금면 동막(東幕) 마을과 자앞마을에 해당했던 지역이다. '간석지를 개간할 때나 논에 물을 대기 위해 둑을 막아 물을 담아 놓는 시설'을 '동막이'라 한다는 점에서 동막이라는 지명은 '동막이'에서 왔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자앞마을이란 청량산(淸凉山)의 원래 이름이 척량산(尺量山)이었을 것으로 추정하면서 '척량산 앞에 위치한 마을'을 한글로 표현된 것이라 전한다. 자앞마을은 구한말 한자화되면서 척전리(尺前里)로 되었다. 지명은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처음 출현하였고 광복 이후 동춘동이 되었다. 1981년 직할시 승격으로 인천직할시 남구 동춘동이 되었으며, 1995년에는 행정구역 개편과 함께 남구로부터 분리되어 인천광역시 연수구 동춘동으로 개편되었다.
[네이버 지식백과] 동춘동 [東春洞, Dongchun-dong] (한국지명유래집 중부편 지명)
청암터널 갈림길 청학도 이별.. 동춘동 속살로..
청봉교(앵고개로) 청령산 봉재산?
동춘터널
봉재산 인천광역시의 연수구 동춘동에 위치한 산이다(고도:104m).
봉재산의 산줄기는 북쪽으로 청량산(173m)에 이어진다. 청량산으로부터 봉재산으로 이어지는 이 산줄기는 풍수지리적으로 청룡(靑龍)의 형국을 가진 것으로 전하는 길지(吉地)로서 인식되어 왔다. 남쪽에 일명 똥섬이라 불리는 '외암도'라는 섬이 있는데, 그 유래는 '청룡이 싼 똥'이라는 뜻에서 나왔다고 한다. 다른 이름은 봉제산인데 이것은 조선 시대 하늘에 기우제(祈雨祭)를 드렸던 산이라는 뜻에서 유래한다.
[네이버 지식백과] 봉재산 [Bongjaesan] (한국지명유래집 중부편 지명)
앙마대로
동막역
첫댓글 초보산꾼의 열정에 박수 보냅니다^^
초보산꾼님, 멋진산행공지에 감사드립니다. 산우님들과 안산즐산 하세요.
초보산꾼님^^
화이팅 입니다
화이팅입니다~~^^~~
초보산꾼님 산행공지 감사드립니다 앞으로 자주 공지 부탁드립니다
고맙습니다
초보산꾼님
꽃피는 봄날 좋은 공지 올려주셔서
감사합니다.
많은 분들이 함께 하시길 바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