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1월6일(금)맑음
새해로 들어선 지 벌써 엿새, 시간은 미끄러지듯이 흘러간다. 마치 설사가 난 것처럼 쏟아진다. 시간은 귀신처럼 왔다가 귀신처럼 사라진다. 그러나 귀신의 정체는 ‘본래 없음’, ‘덧없음’이다. ‘본래 없는 것’이 왜 이렇게 실체처럼 느껴지는가? 그게 문제다. 시간의 흐름 속에 뛰어들면 시간이란 관념에 사로잡힌다. 그러면 내가 시간을 쓰는 게 아니라 시간이 나를 부린다. 시간이 나의 삶을 관리하고 통제한다. 시간은 내 삶에 두루 침투하여 삶을 끌고 다니는 세상의 힘이다. 그러나 시간은 너무도 위장에 능하여 세상의 밀명을 받고 내 삶에 침투했다는 의심이 전혀 들지 않는다. 마치 태어나기 전부터 나를 기다리고 있다가 나를 만나 일생동안 함께 하고 죽을 때 나를 버리고 저 혼자 가버리는 얼굴 없는 친구 같다고나 할까. 그래서 시간의 정체를 찾아보면 그 주소도 알 수 없고, 소재를 밝힐 수도 없어 언제나 오리무중이다. 어떤 사람은 시간은 마음에 있다거나, 4차원 시공간에 있다고도 한다. 그러나 이 역시 지어낸 말이라 실감이 나질 않는다.
시간은 경험이며 관계이다. 너를 기다리는 동안 시간이 흐르다가 너와 친밀한 대화에 빠지면 시간이 사라진다. 너와 나 사이에 관계가 맺어지면 기억이 생긴다. 기억은 시간을 만든다. 그리고 그 관계가 끝나면 너와의 시간도 끝난다. 이렇게 시간은 경험되는 것이지 실체로서 존재하는 건 아니다. 지루하면 시간이 길게 느껴지고, 신나는 일에 몰두하면 시간은 빨리 가거나 정지한다. 삼매에 들면 시간은 흐르지 않는다. 광속으로 달리는 운동체는 시간이 정지한다. 이 말은 중력이 무한대인 공간(가령 블랙홀)에서는 시간은 흐르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시간은 관계에서 말미암은 주체의 경험이다. 이것으로 시간에 대한 해석을 끝낸다면 한가한 사색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시간의 무상성과 유한성! 매 순간이 새로운 삶의 기회가 주어지는, 반면 매 순간 우리는 죽음을 향해 달린다. 인간의 수명은 한계가 있다. 인간이 살 수 있는 시간은 무한정한 게 아니다. 그러므로 한정된 수명을 사는 시간 동안 가장 의미 있고 유익한 일을 해야 한다는 각성이 일어난다. 자신에게 허용된 시간을 낭비할 게 아니라 최고로 효용 있게 사용하고 싶은 거다. 무엇을 하면서 시간을 보내느냐가 그 사람의 삶의 질을 좌우한다. 시간이 곧 육화(embodied)되어 삶이 된다. 내가 시간을 삶으로 써 시간이 생명을 얻는다. 어떻게 시간을 보내? 라는 물음은 어떻게 살고 있느냐? 는 질문과 같다. 매 순간이 눈이 반짝이고 맥이 뛴다. 순간은 살아있다. 그러나 순간은 머물지 아니하여 곧 지나간다. 당신은 순간을 잡아둘 수 없다. 그래서 순간은 때가 묻지 않는다. 순간순간 새로워진다. 時間走無住, 無住卽恒新. 시간주무주, 무주즉항신. 시간은 머무르지 않고 달려가니, 머무르지 않음은 늘 새로워진다는 것이다. 구일신, 일일신, 우일신(苟日新, 日日新, 又日新). 진실로 어느 날에 새로워졌으면, 나날이 새롭게 하고, 또 날로 새롭게 한다. 은나라 탕왕이 자신의 세숫대야에 새겨 놓은 말이다. 그러나 새로운 나날을 산다 해도 불멸(죽지 않고 장수하는 것)과 행복(최고의 풍요와 쾌락을 즐기는 일), 신성(인간이 몸을 개조하여 신처럼 사는 일)을 꿈꾸지는 않으리라. 이 세 가지는 유발 하라리가 호모데우스에서 밝힌 인간의 미래에 대한 예측이다. 순간순간 새롭고 나날이 새로운 삶이란 차라리 손바닥에 떨어진 눈송이가 이내 눈물로 변하듯 반짝이며 사라지는 순간을 산다는 것이다. 찬란하게 핀 봄꽃이 아침 바람에 떨어질 때도 전혀 망설임 없이 춤추듯 떨어지듯 그런 삶을 산다면, 매 순간 살고 매 순간 죽으며, 매 순간이 영원이면서 종말이다. 매 순간이 참신하면서 동시에 영겁회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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