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재영장로는 울산시 울주군 두동면 은편리에 위치한 은편교회를 설립하여 초대 영수를 지낸 분으로, 왕길지선교사, 예원배 선교사 등과 동역하면서 울산의 여러 교회를 순회 목회하는 일에도 크게 협력하였으며, 본 교회인 은편교회 외에도 울산수정교회를 비롯하여 언양 지역, 즉 울산 서부지역에 있는 여러 교회를 설립하고 돌보신 분이다. 그야말로 울산 서부지역의 ‘믿음의 아버지’라고 불려도 손색이 없는 인물이다
1. 출생과 과정
그는 주후 1871년 울주군 두동(斗東)면 율림(栗林)리에서 김인곤의 장남으로 출생하여 당 28세인 1898년에 정동석의 장녀 상우(常友)와 결혼하여 단란한 가정을 이루었다. 슬하에 4남 1녀를 두었으며, 남손(男孫) 13명과 여손(女孫) 11명의 손자녀(孫子女)들을 보았다. 그의 자녀들중에서도 귀한 복음의 일군들이 나왔는데, 3남 성관(聖寬)은 목사가 되어 경주 구정교회에서 1954년에서 1972년 3월 30일까지 18년간 담임목사로 봉직하였고, 4남 성근(聖根)은 부산진교회 집사가 되어 청년회와 주일학교 등에서 큰 역할을 감당했으며 삼정교회를 세우기까지 했다. 김재영 장로에 대한 약사를 기록한 울산노회(통합) 제 7대 노회장으로 봉직했던 전원태목사의 글에 의하면, 그 외 모든 자손들도 부친의 유지를 받들어서 지역사회 복음화에 힘쓴 것으로 보인다. 이는 김재영장로의 신앙적 감화력과 가정교육의 결실이라고 보여진다.
2. 그의 회심과 사역
그는 원래 율림(栗林)마을에서 철을 굽는 사람이었는데, 평소에 인생의 허무와 무상에 대하여 깊이 생각하던 중에, 1899년 대구에 쇠부리 장사를 하러 올라갔다가 마침 대구에 와서 선교하고 있던 안의와(James Edwards Adams, 1867~1929)를 만나서 복음에 대해 처음으로 듣게 되었는데, 자신의 고민에 대한 해결책을 얻기 위해 그는 안선교사를 직접 방문하여 복음을 자세히 듣고 마침내 예수를 영접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때 나이가 29세였다. 이리하여 인생의 고민을 해결한 그는 큰 기쁨과 확신을 얻게 되었고, 곧바로 구령의 열정마저 불타서 그 후에 고향 율림에 돌아와서는 전 가족과 친구들에게 전도하여 수십 명의 신자를 얻어 율림장로교회를 세우고, 근처에 있는 여러 이웃을 전도하여 남은 생애를 복음 전파에 힘썼던 것이다. 실로 놀라운 사건이요, 극적인 변화가 아닐 수 없었다.
김재영장로의 회심이 매우 고무적인 이유는, 울산 지역에 선교사가 직접 들어와서 복음을 전해준 것이 아니라, 그가 외지(外地)로 나가서 복음을 듣고 회심하였고, 그 후에는 오히려 복음을 고향 마을에 들어와서 전해주었다는 데 있다. 이는 실로 모든 종류의 만남을 통해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놀라운 섭리를 느끼게 해주는 부분이 아닐 수 없다. 쇠부리 장사꾼이라는 직업조차도 하나님께서 복음의 통로로 사용하셨으니, 실로 우리의 삶의 모든 부분이 하나님께 쓰임 받을 수 있다는 사실을 김재영장로를 통해서 여실히 볼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우리가 어떤 직업을 가졌고 어디에서 누구를 만나서 일을 하게 되더라도, 그 직업과 만남의 현장이 복음 전파와 영혼 구원의 현장이 될 수 있다는 증거가 되는 것이다.
김재영은 울산군 내에서 약 4년 동안 매서인(賣暑人) 사역을 하였는데, 매서인이란 소책자나 성경 또는 쪽복음서165)를 사람들에게 나눠주거나 팔면서 복음을 전하는 자를 가리킨다. 그 후 울산 지방의 ‘순회전도자’로 임명을 받아 또 4년간 열심히 전도에 매진하였고, 1929년 12월 23일에는 본 교회 초대 장로로 장립을 받았다. 이후 평생을 교회 사역과 전도에 매진하다가 주후 1941년 8월 15일(음력)에 71세의 나이로 하나님의 부르심을 입어 소천(所天)하였다. 김재영! 이 한사람으로 인해서 울산 지역에 여러 교회들이 세워지고,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복음을 듣게 되었는지는 오직 하나님만이 아실 것이다. 그의 이름은 하늘에서도 영원히 빛을 발하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