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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명학술원
 
 
 
카페 게시글
영양 스크랩 동래정씨 연당리 태화당고택 이야기
혜명 추천 0 조회 34 13.06.20 11:39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명 칭 :  태화당고택(太華堂古宅)
소 재 지 :  경북 영양군 입암면 연당리 371
건 축 주 :  정익세(鄭翼世, 1842-1923)
건축시기 :  1800년대 말엽
중건시기 :  2006년(보수)
소 유 자 :  정종철
문 화 재 :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477호, 2005.01.10 지정


건축 이야기
태화당고택은 19세기 말엽에 건축된 고택이다. 이 집은 동래정씨의 집성촌인 연당리에 입향했던 정영방의 후손인 정익세의 고택이다. 살림채인 정침(正寢)과 대문채, 마당 좌측에 있는 고방채로 구성되어 있는 전형적인 양반가옥이다.


건축 특징
태화당고택은 기와를 얹은 토석담으로 둘러싸인 집이다. 그 안으로 대문채와 고방채, 살림채인 정침이 배치되어 있다. 이러한 형태는 양반가옥의 일반적인 특징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 건물은 거기에다 약간의 변화를 추구하였는데, 바로 정침의 전면 좌측칸의 사랑마루와 우측칸의 새방 1칸을 좌,우로 1칸씩 돌출시켜 양날개집의 형상을 한 점이 돋보인다.


건축 구성
태화당고택은 살림채인 정침(正寢)과 마당 좌측에 있는 고방채 외에 대문채를 별도로 두고 있다. 대문채는 정면 5칸, 측면 1칸 규모의 일자형 건물로, 가운데 칸에 대문을 두고 대문의 좌우로 온돌방을 두어 행랑사람들이 지낼 수 있도록 하였다. 대문을 들어서면 마당의 좌측에 3칸 규모의 고방채를, 정면에 정면 6칸, 측면 5칸 반 규모의 ㅁ자형의 정침을 두었다.
정침은 기단을 쌓고 출입문을 중심으로 우측에는 2칸 규모의 방을 두고 좌측에는 사랑을 두었다. 사랑은 온돌방 2칸과 마루방 1칸으로 구성하였고, 전면에는 반 칸 규모의 퇴칸을 두었으며, 퇴칸의 전면에는 평난간을 세운 헌함을 설치하였다.

 

문중 이야기
- 연당(蓮塘)의 주인, 동래정씨(東萊鄭氏)
우리나라의 정씨는 대부분 신라시대 6부촌 중 하나인 진지촌장(珍支村長) 지백호(智白虎)의 후손이다. 서기 32년(유리왕9) 봄에 지백호가 정씨로 성을 받은 것에서 시작되었다. 처음에 정씨는 경주가 본관이었으나 뒤에 여러 개의 본관으로 갈라졌다. 이 과정에서 동래정씨도 경주정씨에서 분적(分籍)되었다.

동래정씨의 시조는 고려시대에 안일호장(安逸戶長)을 지낸 정회문(鄭繪文)이다. 1세조는 역시 고려시대에 호장을 지낸 정지원(鄭之遠)인데, 그 뒤 후손들이 동래에 터를 잡으면서 동래를 본관으로 삼았다.

동래정씨로 연당마을에 처음 입향한 정영방(鄭榮邦)은 본래 지금의 예천군(醴泉郡) 용궁면(龍宮面) 포내리(浦內里)에서 세거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14살 때 종숙부 정조(鄭?)의 양자로 입적하여 지금의 안동시 송천동으로 이거하게 되었다. 후에 1592년(선조25)에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예천 용궁으로 피난을 가서 친형인 정영후(鄭榮後)와 행동을 같이하였다. 처음에는 청부현(淸鳧縣: 지금의 청송군) 진성(眞城)으로 피난했다가, 1596년경에 다시 용궁으로 돌아온다. 이후 1636년(인조14)에 영양(榮陽)의 임천(臨川)으로 거처를 옮기니, 동래정씨가 연당에 살게 된 계기가 되었다.

 

관련인물
- 정혼(鄭?, 1602~1656)
자는 여회(如晦), 호는 익재(益齋)이다. 정영방의 첫째 아들로 이찬(李燦), 이환(李煥)에게 글을 배웠다. 향시에 여러 번 합격하였으나 회시(會試)에 급제하지 못하자 과거의 뜻을 버리고 은거하면서 신집(申鏶), 류직(柳稷) 등과 교유하였다. 저서로는 시문집인 『익재유고(益齋遺稿)』가 있다.
- 정요천(鄭堯天, 1639~1700)
자가 성칙(聖則), 호는 눌재(訥齋)이다. 부친은 정영방의 넷째 아들인 정제(鄭悌)이며, 12살 때 류직에게 가르침을 받았다. 1660년(현종1)에 진사가 되었으나 문과에는 여러 번 낙방하다가 1693년(숙종19)에 급제하였다. 그 후 전적 겸 중학교수(中學敎授)에 임명되었으나 곧 사퇴하였다. 필법이 정밀하고 아름다워 일가를 이루었으며 저서로는 『눌재유고(訥齋遺稿)』가 있다.
- 정요성(鄭堯性, 1650~1724)
자는 성지(聖至), 호는 수와(睡窩)이다. 정요천의 동생이다. 향시에는 여러 번 합격하였으나 회시에는 낙방하자 은거하여 학문을 닦았다. 시문에 능하였고, 천문과 산수 등에도 박식하였다고 한다. 이재(李栽), 권두경(權斗經), 김태중(金台重) 등과 교유하였고, 저서로는 『수와유고(睡窩遺稿)』가 있다.
- 정도건(鄭道鍵, 1668~1740)
자는 개중(開仲), 호는 천연대(天然臺)이다. 정요천의 아들로 태어났으나 정요성에게 입양되었다. 과거에 낙방하자 은거하여 학문에만 전념하였고, 저서로는 『천연대유고(天然臺遺稿)』가 있다.
- 정인목(鄭仁睦, 1792~1868)
자는 원장(原長)이며 호는 석정(石汀)이다. 부친은 정영방의 6대손인 정진희(鄭晉熙)로 월오(月梧) 김현(金俔)에게 글을 배우다가 사위가 되었다. 선생은 매사에 절도가 있었을 뿐만 아니라 재물을 불리어 세금을 내고 친족들의 흉한 일에 도와주는 등 가문의 어려운 사정을 아낌없이 도왔다. 뒤에동래정씨 시문집인 『임장세고(林庄世稿)』를 그의 아들 정탄관(鄭歎寬)과 편집하는 공을 세웠다.
- 정익세(鄭翼世, 1842~1923)
호는 동파(桐坡)로, 동래정씨 연당리 입향조인 정영방의 후손이다. 평소에 너그러운 인품을 지녀 많은 이들의 신임을 얻었고, 조상을 위하는 일에 독실하였다. 늘 어려운 이들을 구제하는 일을 다른 일보다 급히 하였으니, 사람들 사이에 ‘온고군자(溫故君子)’라고 불렸다.

 

영양 > 석보입암권 > 입암면 연당리
- 서석지(瑞石池)로 인해 이름이 바뀐 마을 연당리(蓮塘里)
연당리의 마을 입구에는 가늘고 길게 솟아있는 바위가 있는데, 입암이라고 불린다. 본래는 진보군 북면에 속한 지역이나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 때 생부동(生剖洞)과 주역동(駐易洞), 입암동(立岩洞)을 합쳐 연당리라고 하였다.

연당리는 입암에서 청기로 넘어가는 길목에 위치한 마을로 동래정씨(東萊鄭氏) 세거지이다. 마을은 산을 등지고 물이 앞에 흘러가는 지형을 가지고 있고, 가옥들은 주로 마을을 서쪽에서 동쪽으로 끼고 도는 청기천 쪽의 둔덕에 밀집되어 있다.

연당리는 돌배기 , 석백(石百), 선바위 , 선바우 , 입암(立岩), 연당(蓮塘), 임천(臨泉), 주역(駐易) 등의 자연부락으로 구성되어 있다.

돌배기는 마을과 뒷산에 흰 돌이 많이 박혀있다는 뜻에서 유래되었고, 석백은 돌배기를 한자로 적은 것으로 보이는데 석(石)은 한자의 뜻을 백(百)은 소리를 빌려다 적은 것으로 보인다. 선바위는 연당의 남동쪽에 있는 마을로서 마을 입구에 가늘고 길게 솟은 바위가 있어서 선바위라고 한다. 또한, 선바위 인근에 조선시대 남이장군이 대천에 살고 있던 용들이 반란을 일으키자 진압을 하고는 반란이 일어나지 않게 하기 위하여 산줄기를 끊었는데, 그 형상이 석문 같다 하여 석문이라고 부르는 곳이 있다.

연당은 조선 초기에는 생부동(生剖洞)이라 하여 연당 , 임천 , 선바위 , 주역(駐易) 일대를 가리켰다. 이후 광해군 5년(1613)에 정영방이 이곳에 은거한 후 임천(臨泉)이라 하였고, 또 경정을 짓고 서석지를 만들어서 연당이라고 불리게 되었다고 한다.

임천은 조선초기까지 생부동이었는데, 지금은 연당에 속한 자연부락이다. 마을 앞으로 내가 흐르고 수풀이 울창하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그리고 주역은 선바위 북동쪽에 있는 마을로 옛날에 이곳에 역이 있었다고 전하나 근거는 희박하다. 다만, 200여년전 경상감사가 쉬어간 곳이라는 설과 옛날 장사치들이 물건을 바꾸던 곳이었다는 말에서 주역이 되었다고 한다.

태화당고택 주변으로는 중요민속자료 108호로 지정된 서석지(瑞石池)와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111호인 영양연당리석불좌상(榮陽蓮塘里石佛座像)이 있으다. 또한, 마을에 진입하기 전 도로의 우측에는 정익세(鄭翼世)의 행적을 기리고 묘소를 수호하기 위해 후손인 정휘봉(鄭輝鳳)이 세운 동파재(桐坡齋)가 있다. 그리고 마을에서 나와 911번 지방도를 타고 청기방면으로 약 500m 정도 가다보면, 도로 좌측에 재사(齋舍)가 보이는데, 정영방(鄭榮邦)의 넷째 아들인 정제(鄭悌)의 묘소를 수호하기 위해 후손인 정건모(鄭建模)의 주장으로 건립된 망구재사(輞邱齋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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