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 온 회중이 림몬 바위에 있는 베냐민 자손에게 사람을 보내어 평화를 공포하게 하였더니 14 그 때에 베냐민이 돌아온지라 이에 이스라엘 사람이 야베스 길르앗 여자들 중에서 살려 둔 여자들을 그들에게 주었으나 아직도 부족하므로 15 백성들이 베냐민을 위하여 뉘우쳤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지파들 중에 한 지파가 빠지게 하셨음이었더라 16 회중의 장로들이 이르되 베냐민의 여인이 다 멸절되었으니 이제 그 남은 자들에게 어떻게 하여야 아내를 얻게 할까 하고 17 또 이르되 베냐민 중 도망하여 살아남은 자에게 마땅히 기업이 있어야 하리니 그리하면 이스라엘 중에 한 지파가 사라짐이 없으리라 18 그러나 우리가 우리의 딸을 그들의 아내로 주지 못하리니 이는 이스라엘 자손이 맹세하여 이르기를 딸을 베냐민에게 아내로 주는 자는 저주를 받으리라 하였음이로다 하니라 19 또 이르되 보라 벧엘 북쪽 르보나 남쪽 벧엘에서 세겜으로 올라가는 큰 길 동쪽 실로에 매년 여호와의 명절이 있도다 하고 20 베냐민 자손에게 명령하여 이르되 가서 포도원에 숨어 21 보다가 실로의 여자들이 춤을 추러 나오거든 너희는 포도원에서 나와서 실로의 딸 중에서 각각 하나를 붙들어 가지고 자기의 아내로 삼아 베냐민 땅으로 돌아가라 22 만일 그의 아버지나 형제가 와서 우리에게 시비하면 우리가 그에게 말하기를 청하건대 너희는 우리에게 은혜를 베풀어 그들을 우리에게 줄지니라 이는 우리가 전쟁할 때에 각 사람을 위하여 그의 아내를 얻어 주지 못하였고 너희가 자의로 그들에게 준 것이 아니니 너희에게 죄가 없을 것임이니라 하겠노라 하매 23 베냐민 자손이 그같이 행하여 춤추는 여자들 중에서 자기들의 숫자대로 붙들어 아내로 삼아 자기 기업에 돌아가서 성읍들을 건축하고 거기에 거주하였더라 24 그 때에 이스라엘 자손이 그 곳에서 각기 자기의 지파, 자기의 가족에게로 돌아갔으니 곧 각기 그 곳에서 나와서 자기의 기업으로 돌아갔더라 25 그 때에 이스라엘에 왕이 없으므로 사람이 각기 자기의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
오늘도 "내전"이라는 제목으로 사사기 마지막 시간입니다. 우리가 항상 깨어 기도해야 할 이유가 사탄의 시험이 들려면 예상할 수 없는 방법으로 시험이 찾아오기 때문입니다. 그동안 살펴보았듯이 레위인 한 사람의 개인적인 부도덕함으로 인해 발생한 범죄는, 베냐민 지파의 추악한 범죄를 유발하였고, 그것은 계속해서 이스라엘의 내전과 길르앗 거민의 학살 및 오늘 본문에 나오듯 베냐민 지파 멸절을 극복하기 위한 여인 납치극으로까지 발전하는 등 시험이란 인간의 상상을 초월해서 다가온다는 사실입니다. 이스라엘의 절기 때 허용한 납치극이니 거룩한 하나님의 성전과 절기까지 모독하는데까지 이르게 되었습니다.
이 상황에서 그 책임이 누구에게 있다고 원인을 지목할 수 있겠지만 영적으로 보면 하나님 앞에 바로 살지 않고 기도하지 않은 모두의 잘못입니다. 누군가 몇 사람이라도 깨어 기도했다면 이런 일이 발생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소돔 성도 의인 열이 없어서 멸망했습니다. 세분해 보면 영적인 문제는 여러 가지 원인으로 터질 수 있습니다.
계속하여 영적 문제가 어떤 때에 발생할까요?
30. 상황윤리 때문입니다.
20-21절만 읽어 드리면 “베냐민 자손에게 명령하여 이르되 가서 포도원에 숨어 보다가 실로의 여자들이 춤을 추러 나오거든 너희는 포도원에서 나와서 실로의 딸 중에서 각각 하나를 붙들어 가지고 자기의 아내로 삼아 베냐민 땅으로 돌아가라”
이스라엘이 평화를 공포하자 숨었던 베냐민의 남은 자손들은 자기들이 기업으로 돌아갑니다, 그런데 돌아와 보니 가족이라고는 모두 죽임을 당하고 보이지않습니다. 친구도 이웃도 아이들도 보이지 않고 한 마을에 남자들만 불과 두세 명이 될까 말까 참으로 적막하기 그지없었습니다. 그대로 두면 베냐민 지파는 사라집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베냐민 지파를 위하여 사로잡아온 400명의 길르앗 야베스 여인들을 나누어 주었는데 아직도 200명이 부족했습니다. 그러나 딸을 베냐민에게 주는 자는 저주를 받으리라고 맹세했기 때문에 그럴 수도 없고, 그래서 생각해 낸 것이 매년 실로에서 여호와의 절기가 있을 때 포도원에 숨어 있다가 처녀들이 춤을 출 때 납치해 가라는 것입니다.
학자들에 의하면 유대인 처녀들이 춤을 출 수 있는 유일한 절기는 장막절이었다고 합니다. 이때가 약 7~8일 이상의 기간이기 때문에 기회는 충분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합법의 이름으로 행해진 불법입니다. 이스라엘이 생긴 이래 처음 있던 일입니다.
이런 본문의 배경에서 주시는 메시지는 상황윤리는 잘못된 것이라는 교훈입니다. 상황윤리란 일정한 원칙 없이 처한 상황이나 형편에 따라 그에 맞게 성립되는 가변적인 도덕이나 규범을 말합니다. 잠시 윤리학 공부 좀 합시다. 성경에 없는 말이 아니라 넓은 의미에서 성경도 윤리입니다. 하나님을 공경하고 부모를 공경하고 십계명도 그렇고 신앙윤리 목회윤리라는 것도 있습니다. 세상을 살다보면 이런 상황이 자주 발생하고, 본문의 배경이 지금 상황윤리를 설명해야 하는 상황입니다.
상황윤리를 처음 말한 조셉 플레처는 그의 책에서 “상황윤리의 원리는 사랑이다. 사랑 때문에 행한다면 어떤 것도 정당화 될 수 있다.” 그러면서 그가 예로 든 것이 있는데, 먼저 제2차 세계대전 중에 포로수용소에서 석방되기 위해 다른 남자와 관계를 갖고 임신을 하고 석방된 독일의 베르크마이어 이야기, 또 강간을 당한 어느 여인이 임신한 후 낙태한 이야기 등, 그런 상황에서 그들의 행동은 정당화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럴듯하지만 반대도 만만치 않습니다. 왜냐하면 윤리적 원리와 판단기준으로 삼는 사랑이라는 용어가 매우 애매하게 적용되고 있을 뿐 아니라, 극단적인 한계상황 속에서 일어날 수 있는 경우들을 가지고 보편적 윤리기준을 삼는 것은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가령 내가 살기 위해 남을 죽여야 하는 건 용납하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누구든지 상황을 전혀 고려하지 않고 판단을 내릴 수는 없지만 그렇다고 원칙을 무시하면 도덕적 무질서 사회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사회적 윤리에서도 이런데 우리 신앙에서는 용납할 수 없는 것이 상황윤리입니다. 그것은 오늘 본문의 이스라엘처럼 문제를 잘못 처리했더니 그 문제가 문제를 낳고 그 문제가 또 다른 문제를 낳기도 하지만, 그것이 범죄이기 때문이고, 또 하나님께 역사하실 기회를 드리지 않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면 핍박이 두려워서 거짓말을 합니다. 하나님 안 믿겠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는 그것은 거짓말이 아니라 하나님을 부인하는 것입니다. 마10:32-33에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시인할 것이요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부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부인하리라” 하셨습니다.
어려운 상황을 만났을 때 상황윤리로 쏙쏙 빠져 나오면 얼마나 쉬운 일입니까? 예수님께서 거짓말을 하셨다면 십자가에 달리지 않으셨을 것이고, 사도들도 그랬다면 역시 핍박을 받지 않았을 것입니다. 거짓말이라도 해라 그러면 죽이지 않겠다고 회유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거짓말을 못해서 순교한 것 아닙니까?
혹은 불신자들을 전도하기 위해 교회에서 찬양하지 말고 가요를 부르자? 찬양축제에도 세상 가수들을 초청하자? 그런데 문제는 교인들이 거기에 맛이 들기 시작한다는 것입니다. 얻은 것보다 잃은 것이 더 많습니다. 그건 전도가 아니라 죽는 것입니다. 그것은 다른 불을 드리는 큰 죄입니다. 카토릭과 연합하자? 그것도 죽는 것입니다. 우리만 손해입니다.
경제를 살리기 위해 중동자본을 끌어들이자? 그러기 위해서 이슬람을 허용하고 그들이 원하는 것을 들어주자? 하나님께서 노하셔서 국민들이 고통을 당하든지 전쟁이 나게 하실지도 모릅니다. 교회가 거기에 미온적이거나 바라만 보고 있다면 하나님께서 교회를 멸망시키실지 모릅니다. 625 때 경남 부산쪽만 남기고 다 점령 당했는데 그들은 신사참배를 반대하던 지역입니다. 하나님이 그 지역을 때리실 수 있겠습니까?
우리나라 아이들의 교과서에 이슬람에 대한 홍보는 18페이지가 되고, 불교는 3페이지, 기독교는 1페이지도 되지 않는 답니다. 그러면서 이슬람교는 평화의 종교라고 교육하고 있으니 우리들의 기도가 많이 필요합니다. 그래도 아이들이 책을 학교에다 두고 오기 때문에 부모들이 모릅니다. 정치와 타협하지 말고 정상이 되도록 기도해 주시기 바랍니다.
솔로몬도 그랬고 이스라엘의 많은 왕들이 상황윤리에 빠져 이방과 협정을 맺고 혼인하고 이방신을 불러오고 그래서 망한 것 아닙니까? 세상정치인은 물론 기독교정치인들도 이걸 모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범하면 안 된다는 걸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나라 망치고 교회 망칩니다. 애국심의 발로라 해도 상황윤리는 허용될 수 없는 일입니다.
31. 영적 문제는 주의 종들을 위해 기도하지 않을 때입니다.
25절 “그 때에 이스라엘에 왕이 없으므로 사람이 각기 자기의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 문자적으로만 보면 이스라엘에 왕이 없어서였구나 하겠지만, 이것은 성경의 다른 부분과 충돌되는 내용입니다. 그 이후의 역사인 사무엘서에도 나오듯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 왕 세우는 것도 기뻐하지 않으셨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친히 그들의 왕이 되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무엘이 얼마나 반대했습니까? 그리고 나중에 왕을 세우자 이 문제가 해결됐나요? 더 집단적으로 잘못된 길로 갔습니다.
그래서 주석에서는 이스라엘이 그들의 참 통치자이신 여호와에게서 떠난 것을 말한다고 해석합니다. 또한 비느하스 같은 지도자는 있었지만 사사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사사는 회개하고 부르짖어야 나타납니다. 이스라엘의 문제점은 침략을 당하여 고통이 심해지면 부르짖는데 그렇지 않으면 회개하지도 않고 부르짖지도 않았습니다. 사사란 일반 지도자와는 달리 나라를 구할 만큼 특별한 성령의 기름부음을 받은 자입니다. 그러기 전에는 일반인과 다름이 없습니다.
이처럼 주의 종들을 위해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주의 종이 약해지면 모두가 손해입니다. 어쩌면 모든 것이 주의 종에게 달렸다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러나 성막의 일곱 등불처럼 빛을 발하려면 그 아래 이파리도 받쳐줘야 합니다. 눅10:2에 “추수할 것은 많되 일꾼이 적으니 그러므로 추수하는 주인에게 청하여 추수할 일꾼들을 보내 주소서 하라” 하셨습니다. 기도하라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협력하시기 바랍니다. 말로도 도와주시고 기도 살려 주시고 높여주시기 바랍니다. 목회자가 항상 지고 사는 것이 미덕인 것 같아도 축복의 물결은 항상 위에서 아래로 흐릅니다. 창14:18-19에 살렘 왕 멜기세덱이 아브람을 축복했는데 여기에 대해 히7:6-7에 “멜기세덱은 아브라함에게서 십분의 일을 취하고 약속을 받은 그를 위하여 복을 빌었나니 논란의 여지 없이 낮은 자가 높은 자에게서 축복을 받느니라” 했습니다. 이걸 볼 때 아브라함이 얼마나 무릎을 꿇고 겸손함으로 축복을 받았는지 알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하셨듯이 원인이 있기에 결과도 있습니다. 그래서 계2:5에 “그러므로 어디서 떨어졌는지를 생각하고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영적 문제든 육신의 문제든 인간의 관계이든 문제가 있을 때는 항상 그 원인이 무엇인지 기도하며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우리 모두 원인을 해결하여 문제를 해결 받는 가장 지혜롭고 복된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한국강해설교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