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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시 우리에겐 희망입니다
25 : 27-30
27. 유다 왕 여호야긴이 사로잡혀 간지 삼십 칠년 곧 바벨론 왕 에윌므로닥의 즉위한 원년 십 이월 이십 칠일에 유다 왕 여호야긴을 옥에서 내어놓아 그 머리를 들게 하고
28. 선히 말하고 그 위를 바벨론에 저와 함께 있는 모든 왕의 위보다 높이고
29. 그 죄수의 의복을 바꾸게 하고 그 일평생에 항상 왕의 앞에서 먹게 하였고 30. 저의 쓸 것은 날마다 왕에게서 받는 정수가 있어서 종신토록 끊이지 아니하였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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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은 아름다워"(La Vita e Bella)라는 영화가 있습니다. 감독이자 남자 배우인 로베르토 베니니라는 분이 만들고 출연한 영화입니다. 영화의 배경은 무솔리니라는 독재자가 파시즘과 극우적 민족주의로 나라를 다스리던 1938년 이탈리아입니다. 조그만 도시에 약간 덜떨어진 인생을 살던 귀도라는 젊은이가 있었습니다. 그는 운명처럼 초등학교 여교사인 도라를 만나고, 약혼자가 있는 도라와 함께 마을을 도망해 결혼을 해서 아들 죠수아를 얻습니다. 하지만 독일군의 이탈리아 점령이 시작되면서 귀도의 가정에 불행이 닥칩니다.
유태인인 귀도와 아들 조슈아가 포로 수용소로 끌려가게 된 것이죠. 남편을 따라 유태인이 아니면서도 포로 수용소로 가기를 자청하는 도라, 또 수용소에 도착한 순간부터 자기 아들 조슈아에게 모든 상황을 안심시키기 위해 자신들이 처한 현실이 게임이라고 속이고, 즐거운 마음으로 아들이 포로 수용소 생활을 게임처럼 지내하게 하는 내용입니다. 마지막은 주인공 귀도가 독일군에 총에 맞아 죽게 되는 비극적인 영화이지만 비영어권에서 최초로 아카데미 남자 배우 주연상을 받은 아주 감명 깊은 영화입니다. 꼭 한 번씩 보시길 바랍니다.
인생은 행복하고 아름다운 것만으로 만들어지지 않습니다. 인생은 다양한 요소들로 이루어집니다. 이 인생이란 참으로 수많은 얼굴을 가진 존재입니다. 고통스러운 얼굴, 찡그리는 얼굴, 분노하는 얼굴, 펑펑 눈물을 흘리는 얼굴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동시에 환하게 미소짓는 얼굴, 아름다운 얼굴, 신비스런 얼굴을 가지고 있습니다. 문제는 그 수많은 얼굴들을 바라보는 내 자신의 마음 자세입니다. 고통스런 얼굴에 초점을 맞춰 바라보는가, 아니면 아름다운 얼굴에 초점을 맞춰 바라보는가의 문제입니다.
어떻게 하면 우리 자신의 아름다운 얼굴에 초점을 맞춰 바라볼 수 있는가? 대답은 우리 자신에 대한 긍정적인 생각을 많이 하는 것입니다. 자신에 대한 긍정적인 생각을 많이 하는 분들이 대체로 인생을 긍정적으로 아름답게 만들어 갑니다.
그리고 이런 생각이 현실의 씨앗이 됩니다. 곧 인생에 대한 생각이 긍정적이면 아름다운 인생을 더 많이 경험하게 됩니다. 반대로 부정적이면 고통스런 인생을 더 많이 경험하게 됩니다.
여러분은 인생을 아름다운 것으로 경험하고 싶으실 겁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자신에 대한 긍정적인 생각을 먼저 하셔야 합니다. 보통 우리 자신에 대해 내가 긍정적인 생각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시겠지만 의외로 자신에게조차 긍정적인 생각을 하지 못하는 분들이 많이 계십니다.
자신을 긍정적으로 보기 위해선 먼저 남을 긍정적으로 보는 훈련이 필요합니다. 그 훈련이란 이런 것입니다.
먼저 여러분이 나쁘게 생각하는 사람들을 머릿속에 그려보시길 바랍니다.
그 사람이 직장상사일 수도 있고, 그밖에 다른 사람일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다음단계로 그 사람의 상황이나 말, 행동, 이런 것들을 내 온 마음으로 이해해 보는 것입니다.
그 사람이 그렇게 된 데에는
"좋지 않은 환경 때문에."
"마음에 상처가 너무 깊어서"
"혹은 성장과정에서 잃어버린 것을 보상받으려는 것" 등 우리가 마음을 다해 그 사람의 입장에서 이해해 볼 수 있는 것들이 있습니다.
그런 이해들을 하면 그 사람에 대해 연민의 감정을 가질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의 장점들을 노트에 적어 봅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그 사람이 선하게 웃는 모습을 떠올리는 것입니다. 이런 마음의 작업을 해 보시길 바랍니다.
그렇게 되면 내게 미운 짓을 하는 사람은, 나의 마음 공부의 좋은 도구가 됩니다. 내 영혼의 성장을 위해 하나님께서 보내주신 선물이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다른 사람에 대한 생각이 긍정적인 생각으로 바뀌게 되면 내 자신에 대한 생각도 긍정적으로 바뀌게 되는 것입니다. 나를 긍정적으로 보지 않으면 절대로 남을 긍정적으로 보지 못합니다. 나를 긍정적으로 보아야 내 인생도 아름다운 일들이 많아지게 됩니다. 그래야 인생 속에 희망도 생기게 됩니다.
얼마 전 금요기도회 시간에는 소개해 드린 책이 하나 있습니다. '빛, 색깔, 공기'라는 책입니다. 이 책은 죽음을 맞이한 아버지와 아들의 이야기입니다. 아버지와 아들은 똑같이 목사이며 신학자입니다. 아버지와 아들, 목사와 신학자인 두 사람이 고통을 맛보며 진솔하게 그려낸 글이었습니다. 아버지인 고 김치영 목사님은 간암 선고를 받고 약 4개월 투병을 하다가 하나님의 부름을 받습니다. 김 목사님은 투병을 하면서 고통에 대한 남다른 식견을 가지고 아들에게 고통을 설명합니다.
"기독교인이나 비기독교인이나 고통을 겪는 것은 다 똑같다. 그러나 고통에 임해서 기독교인이 가져야 될 차이가 있다. 기독교인의 고통은 육체의 고통으로 끝나야 한다. 우리는 고통이 올 때, 신음할 수 있다. 고통을 호소할 수도 있고, 이는 부끄러운 것이 아니다. 그러나 그 고통이 불평과 절망이 되고, 그 고통이 허무감으로 연결된다면 그것은 불신앙이다."
우리는 늘 똑같은 상황에 놓여져 있습니다. 어느 누구도 예외일 수 없습니다. 어쩌면 우리기독교인들이 비기독교인들보다 더 힘들 수 있습니다. 우리도 육체의 한계를 지니며 삽니다. 기독교인들이라면 항상 복을 받고 항상 좋은 일이 일어날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입니다. 그러나 우리 기독교인들은 고통을 희망으로 변화시킬 수 있는 힘이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행복한 사람들입니다. 바꿀 수 있는 사람, 우리는 바꾸는 사람이라고 지난 주에도 말씀드렸습니다. 그렇게 죽음조차 희망으로 바꾸는 사람들이 우리입니다.
바울이 말하지 않았습니까? 고린도 전서 15장 55절에서 "사망아 너의 이기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너의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이어서 57절에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이김을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니"라고 합니다.
오늘 성경 본문을 두 곳을 보았습니다. 먼저 열왕기하 25장의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이스라엘의 왕 여호야긴이 바벨론으로 끌려 갔는데 아벨 마르둑이란 바벨론 왕으로부터 왕의 지위를 회복하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성경학자들은 열왕기하 25장 오늘 본문 말씀을 아주 중요한 구절로 봅니다. 구약학자들은 대개가 신명기에서부터 열왕기상 하를 예레미야가 포로기 후반에 썼다고 보는 경향들이 많아지고 있습니다. 또는 요시아 왕때 전반부를, 그리고 예레미야가 후반부를 썼다고 하는 말들을 합니다. 그 중에서 오늘 본문은 예레미야가 열왕기하를 썼다고 보는 결정적인 근거가 되는 구절입니다.
즉 이 구절들은 원래 없었던 구절인데 예레미야가 의도적으로 편집과정에서 넣었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바벨론 포로로 끌려 가 있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이스라엘의 왕이 지위가 회복됨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희망을 주기 위함이라는 것입니다. 즉 우리의 왕이 바벨론 왕으로부터 지위를 되찾았다, 그러니 곧 우리들 이스라엘도 우리의 약속된 지위 회복이 있을 것이라는 희망을 전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여호야긴은 다윗의 후손입니다. 다윗 왕가가 다시 왕의 지위를 찾았다는 말을 통해 이스라엘의 주권회복과 가나안으로 돌아갈 희망을 보여주는 구절인데 이 희망이 필요했던 시대가 바벨론 포로시대였기 때문에 바벨론 포로 시절 예언자였던 예레미야가 썼다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어쨌든 그것이 누가 썼느냐 보다 이 말씀은 열왕기하 말씀을 희망으로 끝내기 위한 하나님의 의도가 숨겨져 있는 말씀입니다. 아무리 찢기고 넘어져도 다시 회복시켜 줄 하나님이 우리 곁에 있다는 희망을 보여주는 말씀입니다. 이 희망, 우리에게 필요한 희망입니다. 우리 인생이 왜 아름답습니까? 희망이 있기 때문입니다. 변화에 대한 희망, 이 희망이 우리의 인생을 아름답게 만듭니다.
위르겐 몰트만이라는 신학자는 그의 책 "희망의 신학"에서 예수 믿는 우리들은 그 날 그 날을 그대로 사는 사람이 아니고, 그 날을 넘어서 무로부터 세상을 창조하시고 죽은 자를 살려 내시는 분의 약속을 따라서 앞으로 올 것의 기대하는 사람이다라고 했습니다.
또 다음으로 우리가 살핀 말씀은 마태복음 22장입니다.
오늘 말씀을 율법사가 예수님에게 질문을 함으로 시작됩니다. 그래서 37절 말씀에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라고 하시고 38절에서 이것이 제일 크고 중요한 계명이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이어서 39절에서 "둘째는 그와 같으니"라고 하시고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두 번째 중요한 계명을 선포하십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 말씀을 이렇게 이해합니다. 크고 첫째되는 계명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고, 그 다음으로 크고 두 번째 계명이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는 것이라고 말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39절 말씀 시작이 "그와 같으니"라는 말은 영어로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The second is like it" 즉 두 번째 계명도 첫 번째 계명처럼 크고 중요한 계명이다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나, 이웃을 사랑하는 것 모두가 다 으뜸가는 계명이다라는 말씀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들이 하나님만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이웃도 마음과 목숨, 그리고 뜻을 다해 사랑해야 한다는 결론을 얻을 수 있습니다. 이웃을 마음과 목숨, 뜻을 다해 사랑한다면 우리는 이웃에 대해서는 내가 아닌 다른 분에게도 늘 호감을 가질 수 있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 사랑은 도대체 왜 희망이라는 주제와 연결이 됩니까?
단테의 신곡을 보면 지옥문에 이런 말이 걸려 있답니다. "이곳에 들어가는 자는 모든 희망을 버리시오" 우리는 희망을 가져야 합니다. 이 희망은 하나님 없이는 가능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동행해야 희망을 가질 수 있습니다. 하나님 없는 희망은 희망이 아니라 자기 욕심일 뿐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과 동행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라는 질문을 할 수 있습니다. 그 대답이 바로 마태복음 22장 말씀입니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길이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이요, 하나님과 함께 해야 우리에게는 희망이 있습니다.
곧 희망은 사랑 없이는 가능하지 않는 일입니다. 다른 사람을 미워하면서 희망을 갖는다 어불성설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지도 않으면서 희망을 갖는다? 바늘을 귀에 묶어서 옷을 꿰매겠다는 발상입니다. 하나님 없이 희망은 없습니다. 사랑 없이 하나님과 함께 할 수 없습니다.
그 희망이 우리를 다른 사람들도 긍정적으로 보게 하고 그 희망이 어떤 상황도 바꿀 수 있습니다. 고통스러운 가정형편, 믿지 않는 식구들로 인해 당하는 핍박, 예수 믿는다는 이유로 직장에서 당하는 불이익, 얼마든지 우리의 신앙생활을 절망적으로 만들 것들이 도처에 널려 있습니다.
우리 신앙을 절망적으로 만드는 것들을 만날 때마다 여러분 절망하시겠습니까? 아니면 극복하시겠습니까?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는 며느리가 있었습니다. 신앙이 없는 가정에 시집을 와서, 혼자만 교회에 열심히 다녔습니다. 시댁식구들은 하나같이 며느리가 교회에 나가는 것을 달가와하지 않았습니다.
하루는 시아버지가 "아가야, 이 번 일요일에는 교회 가지 마라. 바쁜 일이 있다. 고추밭에 가서 고추대를 다 뽑아야 한다. 하루종일 일을 해야 하니까, 이 번 일요일에는 교회 가지 마라." 라고 하시는 겁니다.
며느리는 고민을 했습니다.
그러다 좋은 방법을 생각해 냈습니다. 며느리는 토요일 밤에 가족들은 다 잠을 자는데, 혼자 조용히 일어나서 고추밭으로 나갔습니다. 그리고는 그 넓은 고추밭의 고추를 밤새도록 다 뽑아서 묶어 놓았습니다. 그리고 다음 날 주일이 되어, "아버님, 저 교회 다녀오겠습니다." 라고 말하였습니다. 시아버지가 조금 역정을 내며 말합니다. "아가야, 오늘 고추밭에 고추대 뽑아야 하니까, 교회 가지 말라고 하지 않았느냐!" 아버님, 고추대 다 뽑아놨습니다.
"언제 다 뽑았다는 거냐?" "어제 밤새도록 다 뽑아놓았습니다."
시아버지가 깜짝 놀라 가보니, 고추대가 다 뽑혀 묶어져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 사건에 감동을 받은 가족들이, 그 후 모두 교회를 다니게 되었다고 합니다. 시댁의 가족들이 모두 교회에 나가게 되었을 때, 며느리는 얼마나 기뻤겠습니까? 며느리에게 이보다 더 기쁜 일이 있었을까요?
이 며느리는 바로 마음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었습니다. 마음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바로 이런 모습입니다. 마음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에게, 하나님은 이런 축복을 주십니다. 가족에 대한 원망이 아니라 사랑이 있었기에 그 며느리는 시아버지와 시어머니에 대한 희망을 저버지리 않았고 사랑의 신앙행동으로 모두를 구원했습니다.
사랑은 희망의 역사가 시작되도록 해 줍니다. 사랑은 희망이 하나님의 약속 안으로 들어가게 해 줍니다. 사랑이 없으면 희망도 없습니다. 희망이 있어야 고통스러운 현재도 받아들일 수 있고, 희망이 있어야 절망 가운데 행복을 찾을 수 있는 힘이 생깁니다.
한 해를 마감하고 새해를 맞았습니다.
지난 한 해 동안 고달팠던 일, 슬펐던 일, 힘들었던 일들이 많았을 겁니다.
그러나 그 모든 일들을 돌아보며, "지나온 발자국마다 하나님의 은혜 아닌 것이 없었다"는 고백을 갖고 지난해를 마치셨습니까?
그런 분에겐 이어서 이런 고백도 가능할 것입니다.
"앞으로 밟을 발자국마다 하나님의 은혜 아닐 것이 없다" 라는 고백입니다.
이런 고백, 이런 믿음으로 올해를 살아가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러자면 마음을 다해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삶을 사셔야 합니다. 누군가에 대해 짜증나는 마음, 미운 마음이 올라오면, 즉시 앞에서 소개해 드린 훈련으로 들어가십시오. 그리고 그 분을 축복하십시오. 그리고 우리에겐 언제나 아름다운 미래가 있다는 사실을 놀라워하시길 바랍니다.
고통스러웠던 일도 모두 하나님이 내 영혼을 성장시키시기 위해 주신 선물이었다. 그러니 지나온 발자국마다 은혜 아닌 것이 없었다. 따라서 앞으로 내가 밟을 발자국마다 은혜 아닐 것이 없다. 라는 인생에 대한 긍정적인 이미지를 안고 새해를 시작하십시오. 역시 희망이 우리의 고통스러운 십자가를 질 수 있게 해 줍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두 계명을 잘 지켜, 하나님의 크신 축복의 주인공이 되는 여러분이 되기를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