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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욘4:10,11) 코로나 사태에 신자가 행해야할 첫째 의무 : 박신 목사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네가 수고도 아니 하였고 재배도 아니 하였고 하룻밤에 났다가 하룻밤에 말라 버린 이 박 넝쿨을 아꼈거든 하물며 이 큰 성읍 니느웨에는 좌우를 분변하지 못하는 자가 십이만여 명이요 가축도 많이 있나니 내가 어찌 아끼지 아니하겠느냐 하시니라.”(욘4:10,11)
코로나로 인해 전 세계가 사회활동과 인간관계에 단절 내지 거리를 두는 상황이 새로운 일상(New Normal)이 되었습니다. 우리 모두 실제로 겪어서 잘 알고 있기에 구체적인 설명은 생략하겠습니다. 현미경으로 봐야 겨우 확인할 수 있는 병균 하나에 지금껏 인류가 쌓아온 모든 문명과 기술이 거의 힘을 쓰지 못하고 있습니다. 가장 강력한 보호 장비가 기껏 천으로 만든 마스크라는 것이 아이러니하게도 우리를 더 무력하게 또 더 화나게 만듭니다.
반년 이상 지속된 격리로 인해서 많은 사람들이 경제적으로 크게 궁핍해진데다 삶의 단조로움을 견디다 못해 우울증으로 발전하고 폭발 일보 직전까지 이르렀습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지금 미국서부에선 십 수만 번의 번개로 자연발화된 엄청난 규모의 산불로 마치 지구의 종말을 보는 듯합니다. 세계 도처에서 이상 자연현상이 빈번히 발생하고 이전보다 훨씬 피해가 커졌습니다. 이번 사태가 끝나도 더 심한 바이러스나 자연재앙이 인류를 괴롭힐 것입니다.
그런데도 정치 지도자들은 지구온난화라는 인류가 직면한 최대의 문제에 대해 해결책을 강구할 생각이 없습니다. 서로 양보하며 더불어 잘 살려하기 보다는 자기 나라만 번창시키려고 합니다. 그런 경쟁이 격화되다 못해 강대국들은 다시 군비경쟁에 힘을 쏟고 신 냉전으로 치닫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인류가 겪었던 재앙들은 일시적 국지적이었습니다. 이번처럼 장기간에 전 지구적으로 동시에 겪는 적은 역사상 처음이라 다들 종말론적 현상 같다고 말합니다. 자신과 가족은 물론 인간사회의 미래가 너무 암울하게 여겨져 큰 두려움에 휩싸여 있습니다. 이런 미증유의 사태에 신자들마저 큰 딜레마에 빠졌습니다. 하나님이 왜 이런 사태를 허락했는지, 과연 신자가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성경적으로 분별하기 힘듭니다. 이번 주부터 요나서를 통해 이런 상황에서 신자가 어떻게 해야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지 그 답을 찾아보려 합니다.
요나서에 대해 잘못된 두 가지 시각
본격적으로 알아보기 전에 많은 신자들이 요나서에 대해 가장 흔히 갖고 있는 두 가지 잘못된 시각부터 제거할 필요가 있습니다. 첫째는 기록된 내용이 실제로 일어난 사실이 아닐 것이므로 영적인 의미만 찾아서 신앙에 적용하면 된다는 것입니다. 사람이 큰 고기 아마도 고래일 텐데 배 속에 들어가서 삼일 간이나 죽지 않고 버틸 수 없고, 니느웨의 그 악독한 사람들이 요나의 메시지를 듣고 그렇게 쉽게 회개할 리도 없다는 것입니다.
요나는 기원전 8세기 여로보암 2세 때에 이스라엘의 북 왕국에서 실제로 활동했던 선지자입니다.(왕하14:25) 성인 남성을 삼킬 큰 물고기가 없다고 의심하지만 오래 전 해외토픽에 실제로 고래 배속에서 사람이 통째로 발견된 적이 있었습니다. 굶주린 사자들이 우글거리는 굴에 떨어진 다니엘을, 극렬히 타는 풀무 불에서 다니엘의 세 친구들을 머리털 하나 손상되지 않게 보호하시는 하나님입니다. 능치 못할 일이 없는 하나님이 그를 보호하는 것은 얼마든지 가능합니다.
요나가 ‘삼일삼야’(三日三夜)를 고래 배속에 있었다고 말하나(욘1:17) 이를 꼭 72시간이라고 볼 필요는 없습니다. 요나가 고래 배속에 있었던 것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시고 무덤 속에 있었던 일을 예표합니다. 예수님은 만 72시간이 아니라 날짜로 따져 삼일 째에 부활했으며 요나도 그랬을 것입니다. 그 시간이 얼마가 되었던 사실 상관없습니다. 예수님은 죽은 지 나흘이나 되는 나사로도 말씀 한마디로 무덤에서 스스로 걸어 나오게 했습니다.
나아가 요나서 전체의 기록이 아주 사실적이고 구체적입니다. 실제로 체험한 요나 본인이 아니고는 어느 누구도 지어낼 수 없는 이야기입니다. 물고기 배속에서 삼일 지나서 살아났다고 하면 황당무계하다고 아무도 믿지 않을 것입니다. 나중에 살펴보겠지만 책에 기록된 내용과 역사적 정황도 맞아 떨어집니다. 무엇보다 책에 계시된 진리가 종교적 인식과 개념이 아주 발달된 현대인들도 쉽게 추론해낼 수 없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요컨대 요나서 기록은 분명히 있었던 사실이자 하나님의 절대적 진리입니다.
둘째는 첫째와는 정반대로 고래 배속에서 삼일이나 지났어도 살아나는 기적에만 초점을 맞추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요나가 큰 풍랑 속으로 떨어지는 그 순간에 하나님은 미리 고래를 예비해 놓으셨고 고래 배속에서 요나가 믿음을 잃지 않고 기도했더니 하나님이 구해주었다고 강조합니다. 그래서 신자도 하나님의 큰 기적을 소망하며 어떤 환난에도 간절히 기도하면 하나님은 반드시 구원해준다고 가르칩니다. 원론적으로 틀린 것은 없습니다.
그러나 기적은 요나서의 부차적인 주제도 아닙니다. 어쨌든 기적 하나만 따져도 많은 신자들이 하나님이 기적을 일으켜주시는 근본 이유조차 모르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제자들 앞에서 이 책에 기록되지 아니한 다른 표적도 많이 행하셨으나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요20:30,31)
하나님이 기적을 일으키시는 이유는 당신의 당신 되심을 스스로 증명하고 신약시대에는 예수님이 그리스도임을 믿어서 새 생명의 구원을 받게 하려는 뜻입니다. 역으로 말해 예수님이 그리스도임을 이미 믿는 신자에겐 기적은 아주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필요 없다는 뜻입니다. 마치 도깨비 방망이 두드리듯 기도만 하면 고난에서 구해주는 그런 역사는 일어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능히 하지 못할 일이 없다는 진리가 단순히 전지전능하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분의 의지를 막을 존재는 세상에 단 하나도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자신이 마음먹은 대로 완전히 자유롭게 행할 수 있는 유일한 존재입니다. 따라서 신자의 기도가 당신의 뜻에 맞지 않는 다면 당연히 응답하지 않습니다. 요컨대 요나서를 신자를 기적적으로 보호하시는 하나님이라는 관점에서 해석적용해선 너무나 귀한 진리의 말씀을 수박 겉핥듯이 읽은 꼴입니다. 수박껍데기는 아무리 핥아도 수박 맛을 못 느낍니다.
공예배를 강요하면?
그런데 요나서 강해의 첫 시간에 첫 구절이 아니라 마지막 구절부터 보는 이유가 궁금할 것입니다. 본문이 말하는 가장 기본적인 뜻이 바로 요나서가 말하고자 하는바 근본적인 진리이기 때문입니다. 또 그 진리가 코로나 사태로 신자들이 가장 크게 곤혹스러워 하는 문제에 대한 해답도 되기 때문입니다.
신자라면 코로나로 인해 지금 가장 힌든 일이 교회에 함께 모여서 예배를 드리지 못하는 것이라고 공감할 것입니다. 이 사태를 하루 속히 종식시켜달라고 합심해서 하나님께 기도해야 하니까 더더욱 그렇습니다.
그래서 일부 목사님들이 예배는 하나님에 대한 신자와 교회의 첫째 의무이므로 당장 대면 예배로 모여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헌법에 규정된 종교의 자유는 보장되어야 하며 교회는 사람보다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해야 한다고 대면 예배를 강행하고 있습니다. 심지어 그렇게 하는 신자들을 하나님이 기쁘게 여기시고 코로나에 걸리지 않게 해준다고 대놓고 장담합니다. 신자들도 설령 감염된다고 해도 하나님이 낫게 해주시거나 그렇지 않으면 순교이므로 기꺼이 감당하겠다고 말합니다.
지금 공예배 대신에 인터넷으로 예배드리는 것은 한시적인 조치일 뿐입니다. 사태가 해결되면 당연히 함께 모여서 대면예배를 드려야 합니다. 그런데도 당장 공예배로 모이라고 강조하면 엄밀히 말해서 살인을 교사 내지 방조하는 엄청난 죄를 범하는 것입니다.
아무리 마스크를 쓰고 거리를 띠우고 예배 보더라도 찬송과 기도할 때에 마스크를 벗는 사람이 나옵니다. 시설이 좋지 않은 중소형 교회들은 소음이 나서 예배에 방해될까봐 완벽한 환기도 할 수도 없습니다. 실내에 모여 예배를 보는 것은 언제든 누구라도 감염될 가능성이 있습니다. 지하철과 비교해 불공평하다고 반발하지만 지하철에선 찬양 기도하지 않고 식사 교제도 없으며 철저하게 환기를 합니다. 단순히 서로 비교할 대상이 아닙니다.
공예배로 모이려는 동기는 아주 선하고 이해해 줄 수 있습니다. 인간 생각에 옳다고 하나님 안에서 다 그런 것이 아니며 반대로 하나님의 옳은 것이 인간의 눈에 그렇지 않게 보일 수 있습니다. 지금 공예배를 고집하는 것은 바울이 신자들을 핍박한 것처럼 하나님을 위한다는 잘못된 열심 때문에 순진한 신자들을 죽음으로 내모는 죄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바울은 나사렛 예수가 이단이라는 자기 확신이라도 있었지만 지금은 죽음의 가능성이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짐짓 무시하니까 더 나쁩니다.
코로나에 비대면 예배를 드려야 한다는 것은 엄연히 과학적 진리입니다. 그리고 과학에서 확정된 진리는 절대로 신앙과 상충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시면서 피조세계에 부여해 놓으신 질서와 체계를 역으로 추적하여 발견하는 것이 과학입니다. 그래서 과학에서 입증된 진리는 바로 하나님의 뜻이라고 말할 수 있으며 그것을 거역하면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는 것과 같습니다. 병균이 신자를 피해간다는 법은 결코 없습니다. 단 한 명이라도 죽음으로 내몰 수 있다면 인간에 불과한 목사가 공예배에 출석하라고 절대로 강요 주장 권면해선 안 됩니다. 생명은 오직 하나님만이 주관하십니다.
그렇게 해서 죽게 되는 것은 순교도 아닙니다. 생명을 위협하며 직접적으로 신앙을 핍박하는 세력에 맞선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온라인 예배라는 대체방안이 있습니다. 다른 모임은 통제하지 않고 교회만 문제 삼으니 종교적 박해라고 반박할 필요도 없습니다. 모든 사람이 잘못한다고 신자가 따라할 수는 결코 없습니다. 오히려 앞장서서 사회적 격리운동에 적극 참여하는 본을 보여야 합니다.
하나님이 다니엘이나 그 세 친구를 구해준 이유는 차원이 다릅니다. 그들은 신앙의 직접적인 박해를 받았고 기적이 아니고는 그들의 생명을 구해줄 방안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대면예배금지는 기독교에 대한 박해가 아닌데도 기독교 쪽에서 종교적 명분을 내세워 억지를 부리는 것입니다. 불신 세상으로 하여금 기독교만 유독 특권의식과 우월의식을 내세운다는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습니다. 가뜩이나 기독교가 이런저런 이유로 신망을 잃고 있는 상황애선 더더욱 조심을 해야 합니다.
신앙으로 행할 첫째 의무
터키의 갑바도기아 지역에 엄청나게 큰 지하 동굴 지역이 있습니다. 예배당 학교 방앗간 등 모든 시설을 갖춘 하나의 거대한 도시입니다. 사방팔방으로 좁은 미로가 거미줄처럼 뻗어져 있고 아직도 조사 발굴이 진행 중입니다. 초대교회 신자들이 로마 제국의 박해를 피해 숨어서 살았던 곳입니다. 햇빛도 들어오지 않는 곳에서 언제부터 언제까지 얼마나 오래 살았는지 아무도 모릅니다. 네로 황제의 박해가 본격적으로 시작한 해가 AD 64 년경이고 컨스탄틴 황제가 밀라노 칙령으로 기독교를 공인한 것이 313년이므로 박해는 250년이나 지속되었습니다. 최소한 그곳에서 몇 세대들이 바깥세상과 절연한 채 살았을 것입니다.
몇 주 전에 TV에서 그곳을 다시 보는데 작금의 코로나 사태와 비교가 되면서 그들의 비참했었을 상황이 추측되어서 가슴이 미어졌습니다. 그들은 박해하는 세상 세력과 맞서려고 공개적으로 떳떳하게 예배 보지 않았습니다. 숨어서 신앙만 지켰는데도 그 믿음은 더 성숙해졌을 것이며 매우 경건한 삶을 유지했을 것입니다.
그렇게 숨어버린 이유는 오직 하나로 하나님이 주신 생명을 지키기 위해서였습니다. 예배 때문에 목숨을 희생하지 않았습니다. 순교도 도저히 어쩔 수 없는 상황에서 하나님이 시키는 자만 행하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는 짧으면 몇 개월 길어야 1-2년을 죄송하지만 더 안락하게 예배를 드릴 수 있는데도 그것을 못 참고 마치 순교하는 믿음인양 공예배로 모이길 고집합니다. 교회가 아무 의미 없는 죽음을 강요하는 것입니다.
바울의 신앙생활의 원칙이 무엇이었습니까? “내가 모든 사람에게서 자유로우나 스스로 모든 사람에게 종이 된 것은 더 많은 사람을 얻고자 함이라 유대인들에게 내가 유대인과 같이 된 것은 유대인들을 얻고자 함이요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에게는 내가 율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나 율법 아래에 있는 자 같이 된 것은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을 얻고자 함이요.”(고전9:19,20)
오직 한 명이라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은혜를 알게 해주려는 것이 바울의 인생목표였습니다. 그래서 사람과 상황에 따라 자신이 갖고 있는 종교적 원칙의 실행을 바꾸었다고 합니다. 반면에 지금 우리는 헬라인 앞에서도 유대인 행세를 하면서 헬라인들을 교회로부터 멀어지게 만듭니다. 막상 자기 삶은 유대인이 아니라 헬라인처럼 살고 있으면서 그러니까 더더욱 멀어지게 만듭니다.
요나서 전체의 주제는 모든 사람이 반드시 하나님께로 돌아가야만 참 생명을 얻는다는 것입니다. 본문 또한 그런 뜻이나 더 기본적으로는 하나님이 니느웨의 이방 족속은 물론 그들의 가축과 박넝쿨의 육신적 생명도 아주 귀하게 여기시고 사랑하신다는 것입니다. 너무나 당연하게도 그 모두를 당신께서 만드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자식을 사랑하지 않는 부모는 없으며 아무리 골치만 썩이는 불효자식이라도 사랑하며 더 애틋하고 안타깝게 여깁니다.
신자로서 가장 먼저 행해야 할 바는 하나님께 받은 자신의 생명은 물론 이웃들의 생명과 피조세계 전부를 소중하게 가꾸고 보존해야 합니다. 그것이 인간을 창조하신 그분의 목적이고 인간에게 주신 첫째 소명입니다. 이 땅을 하나님을 대신해서 거룩하고 아름답고 활기가 넘치게 다스려야 합니다.(창1:28)
불행하게도 인간이 하나님보다 자신을 더 높이는 바람에 세상은 탐욕에 젖은 인간들끼리의 무한경쟁 터가 되어서 함께 왜곡 타락 파괴되어져 갔습니다. 서로 자기들 집단과 나라만 잘 먹고 잘 살려고 덤벼서 온갖 부조리 모순 다툼 저주 등이 생겨났습니다. 이번 코로나 사태 같이 전 세계인의 생명을 위협하는 재앙도 궁극적으로는 인간의 탐욕과 죄악에 기인하고 또 그로 인한 지구의 황폐화가 그 위협을 일층 악화시켰지 않습니까?
지구온난화로 인한 기후변화가 생각보다 심각해서 생태계의 위기가 과학자들의 예측보다 더 급속히 다가오고 있는 것 같습니다. 벌써부터 인간의 생존자체가 위협 받고 있다고 누구나 실감할 정도입니다. 저는 약 이십년 전부터 지구온난화에 따른 폐해를 신자들이 앞장서서 고쳐나가야 한다고 강조해왔습니다. 현세대를 살아가는 신자의 첫째 책임은 국가 인종 종교를 뛰어넘어 더 이상 환경오염을 시키지 않고 청정 지구로 되돌리는 일에 앞장서는 것입니다. 그러지 않으면 백세 시대인지라 우리 후손이 아니라 당장 우리부터 큰 고통을 당할 것입니다.
교회가 가르쳐야 할 유일한 진리
신자는 무엇보다 생명을 귀하게 가꾸어야 한다는 맥락에서 따져볼 또 다른 문제가 하나 있습니다. 일부 진보적인 목회자들이 친일파를 척결하자는 정치적 움직임에 적극 동참하고 교회에서도 그것이 성경적 진리인양 가르치고 있다는 것입니다. 오해는 마셔야 합니다. 그런 정치적 운동과 그 뜻이 나쁘다고 말하려는 의도는 전혀 없습니다. 교회가 다룰 주제가 아니며 정 가르치려면 성경에 부합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알기 쉽게 요셉은 애굽의 총리로 다니엘은 바벨론의 총리로 그 나라를 위해서 적극 협력 충성했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합니다. 지금으로 치면 그들도 친일파로 정죄 매도되어야만 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들을 모든 신자가 본받아야 할 믿음의 위인으로 제시하고 있습니다. .
그 이유는 한 가지 뿐으로 요나서 결론이 말하는 바와 같습니다. 하나님에겐 니느웨, 애굽, 바벨론 사람들 모두 당신이 지으신 당신의 사랑을 받아 마땅한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요나에게 고래를 예비해 놓으신 것이나, 그 배속에서 기도를 듣고 구해준 것도 일차적으로는 그의 생명을 하나님이 아끼신 것입니다. 더 중요하게는 그에게 시킬 일이 아직 남았기 때문에 당신을 거역했음에도 벌을 주지 않고 살려준 것입니다.
베드로는 예수님과 삼 년간 동고동락하며 수제자로 직접 가르침을 받았습니다. 사역의 현장에도 참여했고 그분의 기적을 맛보았고 스스로 귀신을 쫒아내는 이적도 일으켰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그는 자기 목숨이 날아갈 판국에 이르자 세 번이나 저주하면서까지 주님을 부인하고 배반했습니다. 바로 몇 시간 전에 목숨 걸고 스승을 지키겠다는 맹세를 헌신짝처럼 버렸습니다. 오늘날 교회에서마저 친일파를 배척하겠다면 베드로부터 배척해야 합니다.
제가 드리고 싶은 말씀은 이것입니다. 제가 일제 강점기에 있었다면 친일파 명단에서 빠졌을 확률이 없다는 것입니다. 너무 겁이 많고 생명에 대한 애착이 강해서 베드로처럼 재판장에까지 따라가지 못하고 겟세마네 동산에서부터 도망갔을 것입니다. 아니 그전에 주님의 제자로 택함도 받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분명히 말씀드릴 수 있는 것이 하나 더 있습니다. 예수님은 너무나도 비겁하고 치사하며 죄 많은 나 같은 자마저 사랑하시고 나를 대신해 십자가에 죽으셨기에 그 크신 은혜 앞에 전심으로 항복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앞으로 생명을 위협 받는 순간이 닥치면 부끄럽지만 목사인데도 순교할 수 있을지는 여전히 장담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작금 기독교 보수 쪽은 코로나 와중에 공예배로 모여야 한다고 합니다. 생명의 귀중함보다도 종교적 계명을 더 중요하게 여겼습니다. 예수님은 예배드리러 오다가 형제에게 욕을 들을만한 일이 있으면 먼저 가서 화해하고 오라고 했습니다.(마5:23,24) 예배보다 형제간의 화목이 더 중요하다고 했다면 예배보다 생명은 훨씬 더 중요합니다.
기독교 진보 쪽은 베드로, 다니엘, 요셉은 무시하고 해방 된지 75년이 지났는데도 친일파의 후손까지 척결해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생명을 가장 우선하는 하나님의 뜻보다도 세상의 윤리적 기준을 더 중요시 여겼습니다. 결국 보수는 종교를 진보는 윤리를 하나님보다 우위에 둔 것입니다. 둘 다 예수님이 머리가 되시며 성령으로 역사해야 할 교회를 담임 목사의 종교적 정치적 견해에 따라 운영하는 꼴입니다.
교회가 가장 먼저 가르쳐야 할 진리는 도덕과 종교가 아닙니다. 그 두 가지에 가장 능통했던 베드로는 스승을 배반했고 바울은 살인죄를 저질렀습니다. 도덕과 종교로 따지면 가장 질이 나쁜 죄인이었습니다. 교회는 거꾸로 도덕과 종교로는 인간의 문제를 결코 해결할 수 없다고 가르쳐야 합니다.
그래서 가장 먼저 천지를 지으시고 지금도 살아 통치하고 있는 하나님은 민족과 국가를 초월해서 세상 모든 사람을, 그것도 과거에 어떤 잘못을 저질렀던 전혀 묻지 않고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모든 사람들로 알게 해주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랑이 필요치 않는 사람이 단 한 명도 없고 오직 그 사랑만이 인간의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갑바도기아 신자들의 믿음의 본질이 무엇이었겠습니까? 예수는 부활하신 그리스도이시다. 그분을 믿어야만 영생을 얻는다는 것 오직 하나였을 것입니다. 성경도 제대로 없고 체계적인 기독교 계명도 없었을 것입니다. 어쩌다가 외부에서 사도들의 복음서나 서신서 하나를 구해오면 모든 사람들이 단어 하나 빠트리지 않고 달달 외웠을 것입니다. 그들에겐 정말로 예수님만이 알파요 오메가였을 것입니다.
이웃 사랑의 첫 걸음
코로나 사태에서 교회는 공예배로 모이는 것은 잠시 보류하셔야 합니다. 신자들은 가장 손쉽게 마스크부터 항상 착용해야 합니다. 자신의 생명을 보존하는 위에 다른 이의 생명을 존중하는 가장 기본적인 이웃 사랑입니다. 이것이 바로 믿음으로 살아가는 삶의 첫 걸음입니다. 예수님 말씀대로 작은 자에게 충성하는 하나님의 작은 일입니다.
무엇보다 까닭모를 두려움에 휩싸인 세상 사람들 앞에 신자는 평강과 자유와 활력을 잃지 않고 믿음으로 살아가는 모습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어려운 사람들을 찾아가거나 전화로 위로하고 기도해 주어야 합니다. 교회사를 되돌아보면 역병이 돌 때, 큰 재앙이 생겼을 때, 종말론적인 현상이 생겼을 때에 오히려 복음으로 돌아오는 일이 많았습니다. 미국의 911 테러 때가 그랬습니다. 지금이 신자들이 신자답게 바로 서있으면 또 다른 부흥이 일어날 수 있는 하나님이 주신 기회입니다.
실제로 미국에 있었던 일입니다. 코로나가 한창 기승을 부릴 때에 어떤 사람이 슈퍼마켓에 가서 온갖 음식과 손세정제와 휴지들을 필요한 만큼 카트에 담았습니다. 계산을 마치고 지불하려고 지갑을 봤더니 수십 불이 모자랐습니다. 어쩔 줄 몰라 당황해 하고 있는데 마침 캐셔 할머니가 자기 돈으로 부족분을 메꾸어주었습니다. 생판 모르는 남인데 어떻게 이럴 수 있느냐고 물었더니 그녀의 대답은 필수품이기(essential) 때문이라는 한마디였습니다. 코로나를 이겨나가는 일을 넘어 생존하는데 당장 없으면 안 되는 물건들이라는 것입니다.
신자가 코로나 사태에 행할 일이 바로 이런 것입니다. 예컨대 교회에 쌓아둔 헌금 보따리를 과감히 풀어서 궁핍한 자들을 구제해야 합니다. 작금 빨리 교회로 모이려는 중요한 이유 중의 하나가 솔직히 교인들과 헌금이 줄까봐 염려되는 것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교회재산으로 지역사회를 섬기면 오히려 교인들이 늘고 세상 사람들로부터 재정후원까지 받을 것입니다. 틀림없이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와 권능이 성도들 개인의 삶에도 크게 임할 것입니다.
구약에서 십일조를 제정한 뜻도 구제를 위한 것입니다. 구제를 하는 목적은 생명의 보존입니다. 지금 보수 쪽에선 십일조 하지 않으면 교인으로 받아들여선 안 된다고 하고 진보 쪽에선 신약시대에 더 이상 지킬 필요 없다고 교리 싸움만 하고 있습니다. 보수는 계명을 잘 지키고 있다는 종교적인 의를 자랑하고 진보는 성경적 지식을, 정확히 알지도 못하면서, 자랑하고 있습니다. 그런 논쟁이 예수님의 참 생명으로 죄인을 살려내는 일에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하나님이 보시기에 너무나 안타깝고 한탄스러울 것입니다. 하나님이 십일조 제도를 제정한 정신은 영원히 살아있으며 지금도 그대로 시행하는 신자는 누가 뭐래도 영적인 유익을 풍성히 누립니다.
하나님이 시키신 순교를 빼고는 생명을 아름답게 유지 보존하는 것이 신앙으로 행할 첫째 사명입니다. 실제로 창조 시에 인간에게 주신 첫째 명령이기도 합니다. 간단하게 말해 우리가 살아있어야만 복음을 전할 수 있을 것 아닙니까? 또 그러니까 죽기 직전까지 귀에다 대고 복음을 전하지 않습니까?
생명이 없이는 하나님도 구원도 없습니다. 우리의 신앙생활도 없습니다. 기독교 구원은 절대로 나 혼자만의 구원이 아니며, 신자가 된 후의 형통과 안일을 보장해주는 구원은 더더욱 아닙니다. 한 알의 땅에 떨어져 죽는 밀알이 되어서 수십 배 수만 배의 생명을 살려내는 구원입니다.
하나님은 신자가 단순히 공예배를 드렸다고 보호해주지 않습니다. 요나에게 시킬 일이 있어서 구해주었듯이 신자도 다른 이의 생명을 구하는 일을 해야 합니다. 교회와 신자가 행할 구제는 단순히 돈으로 도와주는 것에 국한되지 않습니다. 돈이 없어도 얼마든지 구제할 수 있습니다. 자기가 처한 위치에서 자기가 행할 수 있는 최선의 모습으로 시간, 기도, 격려, 위로, 믿음 등을 베풀어주면 됩니다. 무엇보다 죽어가는 생명을 살리는 예수님의 십자가 복음을 불신 이웃에게 아낌없이 나눠주어야 합니다. 코로나 사태에 요나서가 신자에게 주는 첫째 가르침입니다.
출처 : 자기부인 글쓴이 : 바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