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벧전 5: 12 이 은혜에 굳게 서라. - 벧전 5: 14 사랑의 입맞춤으로 서로 문안하라.
3. 문안과 축복 ( 5: 12 – 14 )
⑫ 내가 신실한 형제로 아는 실루아노로 말미암아 너희에게 간단히 써서 권하고 이것이 하나님의 참된 은혜임을 증언하노니 너희는 이 은혜에 굳게 서라. ⑬ 택하심을 함께 받은 바벨론에 있는 교회가 너희에게 문안하고 내 아들 마가도 그리하느니라. ⑭ 너희는 사랑의 입맞춤으로 서로 문안하라. 그리스도 안에 있는 너희 모든 이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벧전 5: 12 이 은혜에 굳게 서라. - 내가 신실한 형제로 아는 실루아노로 말미암아 너희에게 간단히 써서 권하고 이것이 하나님의 참된 은혜임을 증언하노니 너희는 이 은혜에 굳게 서라. ( 내가 신실한 형제로 아는 실루아노로 말미암아 너희에게 간단히 써서 권하고 이것이 하나님의 참된 은혜임을 증거하노니 너희는 이 은혜에 굳게 서라. )
실루아노는 바울의 협력 전도자였던 실라를 가리키는 것으로 본다.
* 행 15: 22 - 이에 사도와 장로와 온 교회가 그 중에서 사람들을 택하여 바울과 바나바와 함께 안디옥으로 보내기를 결정하니 곧 형제 중에 인도자인 바사바라 하는 유다와 실라더라.
* 고후 1: 19 - 우리 곧 나와 실루아노와 디모데로 말미암아 너희 가운데 전파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는 예 하고 아니라 함이 되지 아니하셨으니 그에게는 예만 되었느니라.
* 살전 1: 1 - 바울과 실루아노와 디모데는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데살로니가인의 교회에 편지하노니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지어다.
* 살후 1: 1 - 바울과 실루아노와 디모데는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데살로니가인의 교회에 편지하노니
실루아노는 베드로전서가 보내졌던 본도, 갈라디아, 갑바도기아, 아시아, 비두니아 등의 성도들에게 신실한 형제로 인정받았고 베드로도 그렇게 알고 있었다.
* 벧전 1: 1 -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 베드로는 본도, 갈라디아, 갑바도기아, 아시아와 비두니아에 흩어진 나그네
그는 지금 베드로를 위해 이 서신을 대필(代筆)하고 있다. 실루아노가 실라라면, 그는 바울의 협력자인 동시에 베드로의 협력자가 되었다. 그는 바울이 전한 복음과 베드로가 전한 복음이 동일한 복음이라는 것을 잘 증언하는 인물이 된 셈이다.
베드로는 자신이 증거하고 권면한 내용이 하나님의 참된 은혜임을 증언했다. 헬라어 전통 사본에는 '너희는 이 은혜에 굳게 서라'는 구절이 '너희가 그 안에 굳게 선'이라는 말로 하나님의 참된 은혜를 수식하고 있다.
즉 베드로는 자신이 편지를 보내고 있는 성도들이 이미 하나님의 은혜 안에 굳게 서 있음을 확신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런 확신 가운데서도 그는 또 그 은혜의 말씀으로 그들을 권면하고 격려한 것이다. 우리는 이미 아는 하나님의 말씀들을 또 듣고 또 음미하고 기억할 필요가 있다.
1] 내가 신실한 형제로 아는 실루아노로 말미암아 너희에게 간단히 써서 권하고
'실루아노'를 언급한 것으로 보아서 12절에서 14절까지는 사도 베드로의 친필인 것을 말해준다.
'실루아노로 말미암아'의 표현으로 실루아노가 본 서신의 대필자임을 분명히 해준다. 그는 '실라'라고도 하며 바울의 제 2차 전도 여행 때 동행했던 자이다.
* 행 15: 22-33, 40 - (22) 이에 사도와 장로와 온 교회가 그 중에서 사람들을 택하여 바울과 바나바와 함께 안디옥으로 보내기를 결정하니 곧 형제 중에 인도자인 바사바라 하는 유다와 실라더라. (23) 그 편에 편지를 부쳐 이르되, 사도와 장로 된 형제들은 안디옥과 수리아와 길리기아에 있는 이방인 형제들에게 문안하노라. (24) 들은즉 우리 가운데서 어떤 사람들이 우리의 지시도 없이 나가서 말로 너희를 괴롭게 하고 마음을 혼란하게 한다. 하기로 (25-26) 사람을 택하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위하여 생명을 아끼지 아니하는 자인 우리가 사랑하는 바나바와 바울과 함께 너희에게 보내기를 만장일치로 결정하였노라. (27) 그리하여 유다와 실라를 보내니 그들도 이 일을 말로 전하리라. (28) 성령과 우리는 이 요긴한 것들 외에는 아무 짐도 너희에게 지우지 아니하는 것이 옳은 줄 알았노니 (29) 우상의 제물과 피와 목매어 죽인 것과 음행을 멀리할지니라. 이에 스스로 삼가면 잘되리라. 평안함을 원하노라 하였더라. (30) 그들이 작별하고 안디옥에 내려가 무리를 모은 후에 편지를 전하니 (31) 읽고 그 위로한 말을 기뻐하더라. (32) 유다와 실라도 선지자라. 여러 말로 형제를 권면하여 굳게 하고 (33) 얼마 있다가 평안히 가라는 전송을 형제들에게 받고 자기를 보내던 사람들에게로 돌아가되 (40) 바울은 실라를 택한 후에 형제들에게 주의 은혜에 부탁함을 받고 떠나
* 행 18: 5 - 실라와 디모데가 마게도냐로부터 내려오매 바울이 하나님의 말씀에 붙잡혀 유대인들에게 예수는 그리스도라 밝히 증언하니
그리고 바울의 서신에서도 '실루아노'라고 불리었다(Selwyn). 실루아노가 베드로에게 어떠한 도움을 주었는지는 자세히 나오지 않으나 베드로 전 후서를 기록하는데 큰 공헌자였을 것이다.
베드로는 '실루아노'를 '신실한 형제'라고 부른다. '신실한 형제'(투 피스투 아델푸)는 정관사로 연결되어서 수신자들이 실루아노에 대해 잘 알고 있음을 시사한다(Stibbs).
2] 이것이 하나님의 참된 은혜임을 증언하노니 너희는 이 은혜에 굳게 서라.
본서의 주요한 특징은 권면이다. 베드로는 지금까지 권면한 모든 것이 '은혜'라고 말하고 있다.
이것은 베드로가 이제까지 권면한 그리스도인들의 모든 삶 속에 하나님께서 개입하시며 보호하시고 인도하심을 시사한다.
따라서 그리스도인들이 살아가는 삶 자체가 하나님의 은혜이며, 그리스도인들은 그 은혜 안에서 뿌리를 내려야 흔들림이 없이 굳게 설 수 있는 것이다.
벧전 5: 13 택하심을 함께 받은 - 택하심을 함께 받은 바벨론에 있는 교회가 너희에게 문안하고 내 아들 마가도 그리하느니라. ( 함께 택하심을 받은 바벨론에 있는 교회가 너희에게 문안하고 내 아들 마가도 그리하느니라. )
바벨론에 있는 교회는 문자 그대로 바벨론[앗수르 - 바벨론 지역]에 있는 교회를 가리키는 것 같다. 복음이 널리 바벨론에까지 퍼져 교회가 세워졌던 것 같다. 이것은 하나님의 은혜이었다.
또 마가에 대한 언급도 앞 절에 실로아노에 대한 언급과 같이 초대교회의 같은 신앙과 같은 사랑의 교제를 나타낸다. 마가는 사도 바울에게도 협력자였고 사도 베드로에게도 그러하였다.
본 절에서는 나의 아들이라고 불렀다. 진정한 기독교는 일치된 진리와 일치된 신앙을 가지고 있다.
우리는 이 진리와 신앙을 확인하고 확신하고 이 진리와 신앙 안에서 일치된 기독교를 확증하고 혹은 회복시키고 그것을 널리 전파하고 후대에 전수시키도록 힘써야 할 것이다.
1] 택하심을 함께 받은 바벨론에 있는 교회가 너희에게 문안하고
'함께 택하심을 받은 바벨론에 있는 교회'(헤 엔 바뷜로니 쉬네클레크테)는 문자적으로 '함께 택하심을 받은 바벨론에 있는 그 여자'라는 의미이다.
여기서 '그 여자'란 누구인가? 에 대한 견해는 두 가지이다.
Ⓐ 베드로의 아내이다(Stibbs).
왜냐하면 베드로는 전도여행에 아내를 데리고 다녔었기 때문이다(Clement).
* 고전 9: 5 - 우리가 다른 사도들과 주의 형제들과 게바와 같이 믿음의 자매 된 아내를 데리고 다닐 권리가 없겠느냐?
Ⓑ '바벨론에 있는 교회'를 가리킨다(Lenski, Kelly, Blum).
두 견해 중 후자가 타당하다. 왜냐하면 헬라어로 교회는 여성 명사이기 때문이다. 만약 베드로의 부인이었다면 구체적으로 이름을 열거하였을 것이다. 또한 고대의 사본에는 교회라고 직접 표현하였기 때문이다.
'바벨론'에 대한 견해는 세 가지 이다.
Ⓐ 베드로가 가서 전도한 메소포타미아 지방에 있는 실제 '바벨론'이다(Calvin).
그러나 베드로가 그곳에서 전도를 했다는 정확한 근거가 없고 초대 교회의 전승에 의하면 베드로가 로마에 있었음이 확실하기 때문에 타당성이 없다.
Ⓑ '애굽의 한 도시'이다(Strabo, Josephus).
그러나 베드로가 이곳을 방문했다는 확실한 근거가 희박하고 기독교가 초기에 이곳에서 발전했다는 자료도 없다.
Ⓒ '로마'를 가리킨다(Lenski, Stibbs, Kelly, Blum).
바벨론은 세상을 상징하는 은유적 표현으로서 로마로 보는 것이 가장 타당하다.
로마의 물질적 부요함과 도덕적인 타락 때문에 당시의 묵시문학에서 로마는 그리스도인과 유대인 작가들에게 뿐만 아니라 로마 문학에서도 통상 바벨론으로 불려졌다.
한편 본절은 베드로 사도가 당시 로마에 머물러 있었음을 보여 준다.
2] 내 아들 마가도 그리하느니라.
베드로는 마가를 '아들'이라 부르고 있다. 초대 전승에 의하면 마가는 바울과 바나바가 떠난 후에 베드로의 동역자가 되었다고 한다.
따라서 베드로가 마가를 내 아들 이라고 한 것은 바울이 디모데를 아들이라고 부른 것과 마찬가지로 친아들이 아니라 영적인 아들이라는 의미이다.
* 딤전 1: 2 - 믿음 안에서 참 아들 된 디모데에게 편지하노니 하나님 아버지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께로부터 은혜와 긍휼과 평강이 네게 있을지어다.
* 딤후 1: 2 - 사랑하는 아들 디모데에게 편지하노니 하나님 아버지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께로부터 은혜와 긍휼과 평강이 네게 있을지어다.
베드로의 영적 아들인 마가는 바나바의 조카로서 본명은 마가 요한이다.
* 골 4: 10 - 나와 함께 갇힌 아리스다고와 바나바의 생질 마가와 (이 마가에 대하여 너희가 명을 받았으매 그가 이르거든 영접하라)
* 행 12: 12, 25 - ⑫ 깨닫고 마가라 하는 요한의 어머니 마리아의 집에 가니 여러 사람이 거기에 모여 기도하고 있더라. (25) 바나바와 사울이 부조하는 일을 마치고 마가라 하는 요한을 데리고 예루살렘에서 돌아오니라.
그는 바울의 제 1차 전도 여행 때 동행했으나 제 2차 전도 여행 때는 동행하지 않았다.
* 행 13: 5 - 살라미에 이르러 하나님의 말씀을 유대인의 여러 회당에서 전할새 요한을 수행원으로 두었더라.
* 행 15: 37-39 - (37) 바나바는 마가라 하는 요한도 데리고 가고자 하나 (38) 바울은 밤빌리아에서 자기들을 떠나 함께 일하러 가지 아니한 자를 데리고 가는 것이 옳지 않다 하여 (39) 서로 심히 다투어 피차 갈라서니 바나바는 마가를 데리고 배 타고 구브로로 가고
그러나 후에 바울이 투옥되자 시중을 들었었다.
* 골 4: 10 - 나와 함께 갇힌 아리스다고와 바나바의 생질 마가와 (이 마가에 대하여 너희가 명을 받았으매 그가 이르거든 영접하라)
* 몬 1: 24 - 또한 나의 동역자 마가, 아리스다고, 데마, 누가가 문안하느니라.
벧전 5: 14 사랑의 입맞춤으로 서로 문안하라. - 너희는 사랑의 입맞춤으로 서로 문안하라. 그리스도 안에 있는 너희 모든 이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 너희는 사랑의 입맞춤으로 피차 문안하라. 그리스도 안에 있는 너희 모든 이에게 평강이 있을찌어다. )
베드로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에게 평강이 있기를 기도함으로 서신을 끝맺는다.
1] 너희는 사랑의 입맞춤으로 서로(피차) 문안하라.
이러한 표현은 바울 사도가 주로 사용한 표현이다.
* 롬 16: 16 - 너희가 거룩하게 입맞춤으로 서로 문안하라 그리스도의 모든 교회가 다 너희에게 문안하느니라.
* 고전 16: 20 - 모든 형제도 너희에게 문안하니 너희는 거룩하게 입맞춤으로 서로 문안하라.
* 고후 13: 11 - 마지막으로 말하노니 형제들아 기뻐하라. 온전하게 되며 위로를 받으며 마음을 같이하며 평안할지어다. 또 사랑과 평강의 하나님이 너희와 함께 계시리라. 거룩하게 입맞춤으로 서로 문안하라.
* 살전 5: 26 - 거룩하게 입맞춤으로 모든 형제에게 문안하라.
바울의 편지 말미에 권면했던 거룩한 입맞춤과 같은 말이다.
중근동 문화에서 입맞춤은 인사나 우정, 친교나 경의의 표시였다. 유대인 회당에서 행하여지던 습관으로 성도들이 자연스럽게 교회 안으로 도입했다.
바울 시대에 유대 회당에서 입맞춤은 존경과 반가움의 표시였다. 분명 초기 성도들도 이 같은 관습을 따라 했는데 특별히 성도 상호간의 사랑 뿐 아니라 주님께 대한 사랑의 표시라는 점에서 거룩한 입맞춤으로 간주 되었다.
'입맞춤'은 초대교회에서 사용되었던 인사법으로(Justin, Tertullian, Chrysostom) 2 세기경까지 지속되었다.
* 눅 7: 45 - 너는 내게 입 맞추지 아니하였으되 그는 내가 들어올 때로부터 내 발에 입 맞추기를 그치지 아니하였으며
3세기 이후에는 남녀가 구분되어 행해졌으나(TDNT) 그것이 언제까지 지속되었는지는 정확하지 않다.
2] 그리스도 안에 있는 너희 모든 이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평강'(에이레네)은 히브리인의 인사말로서 '샬롬'과 같은 것으로 본 서신은 '평강'으로 시작해서(1: 2), '평강'으로 끝을 맺는다.
이 '평강'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과 관련된 것으로 그리스도 안에 거할 때 소유할 수 있음을 암시한다.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 성도들은 하나님의 돌보심을 믿고 모든 염려를 그에게 맡기자.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삶의 주인이시다. 또 그는 우리의 생사화복(生死禍福)을 주관하시는 자이시다.
우리가 우리의 생사화복을 주관하지 못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모든 짐을 그에게, 오직 그에게만 맡겨야 한다.
어려운 일을 당할 때 염려하기보다는 범사에 감사함으로 기도 제목을 하나님께 아뢰어야 한다.
둘째, 성도는 근신하고 깨어 우리를 넘어뜨리려는 마귀를 대적해야 한다.
마귀는 하나님과 온 교회의 대적자이며 우는 사자와 같이 세상을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고 있다.
우리는 믿음을 굳게 하여 그를 대적해야 한다.
우리는 오직 말씀과 기도로 마귀를 대적해야 한다.
셋째, 은혜로 구원하신 하나님께서는 끝까지 우리를 보호하실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구원을 계획하시고 이루시는 분이시다.
그는 우리를 자기의 영원한 영광에 들어가게 하실 것을 작정하셨다.
그 계획은 실패하지 않고 그대로 이루어질 것이다.
그는 세상의 복잡한 현실에서도 우리를 지키실 것이다.
우리를 온전케 하시고 굳게 하시고 강하게 하시고 우리의 믿음과 소망의 터를 견고케 하실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