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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 13: 21 자기 뜻을 행하게 하시고 - 히 13: 25 모든 사람에게
히 13: 21 자기 뜻을 행하게 하시고 - 모든 선한 일에 너희를 온전하게 하사 자기 뜻을 행하게 하시고 그 앞에 즐거운 것을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 가운데서 이루시기를 원하노라. 영광이 그에게 세세무궁토록 있을지어다. 아멘. ( 모든 선한 일에 너희를 온전케 하사 자기 뜻을 행하게 하시고 그 앞에 즐거운 것을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 속에 이루시기를 원하노라. 영광이 그에게 세세무궁토록 있을찌어다. 아멘. )
1] 모든 선한 일에 너희를 온전하게(온전케) 하사 자기 뜻을 행하게 하시고
'모든 선한 일에'(엔 판티아가도)에 대한 해석은 세 가지이다.
Ⓐ '윤리적인 선한 행위'를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하여 선한 윤리적인 행위가 하나님의 뜻을 성취하는 것이다(Spicq).
Ⓑ 선한 일을 하나님 자신에 의해서 주어지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해석한다(Michel).
* 살후 2: 17 - 너희 마음을 위로하시고 모든 선한 일과 말에 굳건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 선한 일을 '하나님의 선한 선물'로 해석한다(Lane, Morris).
* 마 7: 11 - 너희가 악한 자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
* 눅 1: 53 - 주리는 자를 좋은 것으로 배불리셨으며 부자는 빈손으로 보내셨도다.
* 갈 6: 6 - 가르침을 받는 자는 말씀을 가르치는 자와 모든 좋은 것을 함께 하라.
* 약 1: 17 - 온갖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이 다 위로부터 빛들의 아버지께로부터 내려오나니 그는 변함도 없으시고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으시니라.
세 견해 중 마지막 견해가 타당하다. 왜냐하면 본문의 주체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저자는 본문에서 하나님께서 수신자 공동체가 필요로 하는 모든 것을 은혜로 공급하여 주셔서 온전하게 함으로 하나님 자신의 뜻을 행할 수 있도록 하시기를 기도하고 있다.
2] 그 앞에 즐거운 것을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 가운데서(속에) 이루시기를 원하노라.
본문은 앞서 언급된 '모든 선한 일에 너희를 온전케 하사 자기 뜻을 행하게 하시고'와 상호 보완적이다.
'즐거운 것'은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섬기며(12: 28)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제사를 드리도록(15,16 절) 부름을 받은 존재임을 시사한다.
이렇게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의 중재자이시며 새 언약 공동체 내에서 하나님의 능력을 중재해 주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이루어진다(Lane, Morris).
3] 영광이 그에게 세세무궁토록 있을지어다. 아멘.
'그에게'에 대해서 혹자는 문법적으로 '하나님'이나 '예수'와 모두 연결될 수 있기 때문에 둘 다를 가리킬 수 있다고 주장하나(Morris) '하나님'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는 것이 더 타당한 듯하다(Bruce).
왜냐하면 본문의 송영은 죽은 자로부터 이끌어 내신 평강의 하나님에 대한 그리스도인의 응답이기 때문이다(Lane).
히브리서 저자의 기원은 예수님에 관해 세 가지를 증거 한다.
첫째, 예수님은 양의 큰 목자이시다.
예수님은 자신을 ‘선한 목자’라고 부르셨다.
요한복음 10: 11,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
사도 베드로는 예수님을 ‘목자장’이라고 불렀다(벧전 5: 4).
우리 주 예수께서는 하나님의 교회의 크시고 참되신 목자이시며, 인간 목사들은 교회의 작은 목자들에 불과하다.
둘째, 예수님은 영원한 언약의 피를 흘리셨다.
이것은 히브리서의 대주제이기도 하다.
히브리서 9: 12,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아니하고 오직 자기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 가셨느니라.”
구약 제도는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사역의 그림자였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 증거하신 새 언약은 수정될 수 없는 영원한 언약이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언약의 피로 구원을 얻었다.
셋째,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을 죽은 자들 가운데서 이끌어내셨다.
예수님의 부활은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들 가운데서 이끌어내신 역사적 사실이다.
그가 죽고 마셨다면 그에 대한 우리의 믿음은 크게 손상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의 부활은 그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확실히 증언하였다. 그러므로 사도행전 17: 31은, “이에 저를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것으로 모든 사람에게 믿을 만한 증거를 주셨음이니라”고 말했다.
본문은 또 하나님을 ‘평안의 하나님’이라고 말한다. 세상에서 평안은 죄로 인하여 상실되었다.
* 사 57: 21 - 내 하나님의 말씀에 악인에게는 평강이 없다 하셨느니라.
* 롬 3: 17 - 평강의 길을 알지 못하였고
그러나 주 예수의 영원한 언약의 피로 죄 사함 받은 심령들 속에 평안이 임했다. 하나님께서는 구원받은 우리에게 평안을 주신 평안의 하나님이시다.
본문은 하나님께서 성도들의 선행과 순종을 온전케 하시기를 소원하는 기도 내용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성도들의 선행과 순종의 생활이 하나님의 은혜로 되는 것임을 깨닫게 된다.
선행과 순종은 단지 우리의 힘과 노력으로 되는 것이 아니고 오직 하나님의 주시는 힘으로 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일을 위해 기도해야 한다.
여기에 우리의 기도의 이유가 있다. 우리는 무슨 일이든지 일하기 전에 먼저 하나님께서 모든 선한 일에 우리를 온전케 하시고 하나님의 뜻을 다 행하게 하시기를 기도해야 한다.
21 절에 '영광이 그에게 세세토록 있을지어다.'라는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께 돌려진 말씀이라고 본다.
본문은 예수 그리스도의 신적인 영광을 증언한다. 이것은 요한계시록 5: 12의 말씀과 같다: '[천사들이] 큰 음성으로 가로되 죽임을 당하신 어린양이 능력과 부와 지혜와 힘과 존귀와 영광과 찬송을 받으시기에 합당하도다. 하더라.'
히 13: 22 권면의 말을 용납하라. - 형제들아!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권면의 말을 용납하라. 내가 간단히 너희에게 썼느니라. ( 형제들아.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권면의 말을 용납하라. 내가 간단히 너희에게 썼느니라. )
히브리서 저자는 이 서신을 받는 자들에게 그의 권면을 용납하라고 말한다.
이것은 겸손한 태도이다. 그는 본 서신을 '간단히 쓴' 서신이라고 말한다.
우리가 보기에 이 서신은 길지만, 이것을 간단히 쓴 서신이라고 표현한 것은 저자가 그 교인들에게 가르치고 권면하고자 한 내용은 이것보다 훨씬 더 많았음을 보인다.
우리는 성경책을 읽을 때 너무 긴 내용, 너무 많은 내용이라고 생각하지 말고 많은 내용들을 간추린 내용이라고 생각하고 읽어야 한다.
1] 형제들아!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권면의 말을 용납하라.
'형제들아'와 '용납하라'는 말은 저자가 앞서 기술한 배교나 비 그리스도인에 대한 격한 하나님의 진노에 대한 진술, 그리고 지도자와 수신자들 사이의 갈등에 대한 훈계와 비교되어 부드럽고 애정이 서려 있다.
본문에서 저자는 이제까지 진술한 내용을 '권면의 말'이라고 정의함으로 자신이 이제까지 진술한 것이 책망보다는 격려차 위로에 기인한 것이었음을 밝히고 다시 한번 본서의 내용에 주목해 줄 것을 암시하고 있다.
'권면의 말'(투로구 테스 파라클레세오스)는 행 13: 15에 나오는 표현과 유사한 것으로 '설교를' 지칭한다(Bruce, Morris, Lane).
* 행 13: 15 - 율법과 선지자의 글을 읽은 후에 회당장들이 사람을 보내어 물어 이르되, 형제들아 만일 백성을 권할 말이 있거든 말하라. 하니
2] 내가 간단히 너희에게 썼느니라.
'간단히...썼느니라'가 가리키는 부분에 대해 세 가지 견해가 있다.
Ⓐ 13: 18-25을 가리킨다(Knox).
Ⓑ 13장만을 가리킨다(R. Anderson).
Ⓒ 본서 전체를 가리킨다(Morris, bruce, Hewitt, Lane).
세 견해 중 마지막 견해가 타당하다. 왜냐하면 '썼느니라'(에페스테일라)는 '편지를 썼다'라는 의미로 본 서신 전체를 가리키며, '간단히 썼다'는 것은 유대 문서나 초기 그리스도인 문서에서 공손함을 나타내는 문학적인 표현이기 때문이다(Hewitt, Lane).
히 13: 23 그가 속히 오면 - 우리 형제 디모데가 놓인 것을 너희가 알라. 그가 속히 오면 내가 그와 함께 가서 너희를 보리라. ( 우리 형제 디모데가 놓인 것을 너희가 알라. 그가 속히 오면 내가 저와 함께 가서 너희를 보리라. )
저자가 바울의 동역자였던 디모데를 '우리 형제'라고 부른 것은 디모데가 수신자들에게 매우 잘 알려져 서로 교제가 있었음을 암시한다.
사도 바울은 데살로니가전서 3: 2에서 디모데를 ‘우리 형제’라고 표현했다.
그 저자는 디모데와 매우 친근한 사이임에 틀림없다.
또 본 절은 디모데가 옥에 갇혔다가 놓인 것을 증거 한다. 그 저자는 디모데가 속히 오면 그와 함께 그들에게 가서 만나보겠다고 말한다.
1] 우리 형제 디모데가 놓인 것을 너희가 알라.
'놓인 것을'(아폴렐뤼메논)은 완료시상으로 이에 대한 견해는 두 가지이다.
Ⓐ 사역의 임무를 부여받고 보냄을 받은 것을 가리킨다(E. D. Jones).
Ⓑ 감옥에서 풀려난 것을 가리킨다(Hewitt, Lane, Morris).
두 견해 중 후자가 더 타당하다. 왜냐하면 '아폴렐뤼메논'이 전자의 견해처럼 사용되었을 경우는 목적어를 동반하나 본 절에서는 목적어를 동반하고 있지 않으며, 더욱이 '아폴렐뤼메논'이라는 단어는 흔히 감옥에서 풀려나는 경우에 사용되었기 때문이다(Brice, Morris).
그러나 디모데가 언제 어디에 있는 감옥에 갇혔었는지는 분명하게 나타나지 않는다.
2] 그가 속히 오면 내가 그(저)와 함께 가서 너희를 보리라.
저자는 수신자들에게 디모데가 감옥에서 풀려난 사실을 먼저 알고 전하면서 디모데가 속히 올 경우 함께 방문할 것을 밝히고 있다.
히 13: 24 모든 성도들에게 문안하라. - 너희를 인도하는 자들과 및 모든 성도들에게 문안하라. 이달리야에서 온 자들도 너희에게 문안하느니라. ( 너희를 인도하는 자와 및 모든 성도에게 문안하라. 이달리야에서 온 자들도 너희에게 문안하느니라. )
저자는 본문에서 앞서 언급한 것과 마찬가지로 '인도하는 자'와의 문안을 통해서 갈등 관계가 아니라 선한 관계를 형성하여 그들에게 순복(順服)할 것을 암시한다(7, 17절).
이탈리아에서 온 자들이라는 말은 로마 제국의 수도인 로마에도 복음이 증거 되었음을 보인다.
본 서신은 사도 바울이 기록했을 것이다.
여러 면에서 볼 때 사도 시대에 이런 유의 서신을 쓰기에 가장 적합한 인물은 사도 바울이었다.
또 초대교회의 증거는 매우 강력하다. 특히 신약성경의 정경을 선언한 칼타고 회의는 본 서신을 바울 서신으로 보았다. 그가 다른 서신들과 달리 이 서신 초두에서 자신의 이름을 밝히지 않은 것은 어떤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1] 너희를 인도하는 자들과(자와) 및 모든 성도(들)에게 문안하라.
'모든 성도'에 대해서 두 가지 해석이 가능하다.
Ⓐ 본서의 수신자들이 속해 있는 도시 전체의 성도를 가리킨다(Lane).
Ⓑ 본서의 수신자들이 모이는 가정 교회의 성도들을 가리킨다(Bruce).
두 해석은 나름대로 타당성을 지닌다.
저자는 수신자들에게 모든 성도들에게 문안하여 화평의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화평을 이름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것을 암시적으로 권면하고 있다.
2] 이달리야에서 온 자들도 너희에게 문안하느니라.
'이달리야에서 온 자들'(호이 아포테스 이탈리아스)는 두 가지 해석이 가능하다.
Ⓐ 당시 이탈리아에 흩어져 사는 자들이 이탈리아 내에 있는 사람들에게 문안한 것을 가리킨다(Spicq).
Ⓑ 이탈리아 밖에 있는 사람이 이탈리아에 있는 사람들에게 문안하거나 이탈리아가 고향인 자들이 이탈리아에 있는 사람들에게 문안한 것을 가리킨다(Bruce).
'호이 아포 테스 이탈리아스'는 이 두 가지 해석이 모두 가능하기 때문에 어느 하나를 선택하기가 어렵다(Morris, Bruce, Hewitt).
히 13: 25 모든 사람에게 - 은혜가 너희 모든 사람에게 있을지어다. ( 은혜가 너희 모든 사람에게 있을찌어다. )
'은혜'(카리스)는 비록 흔히 사용되던 인사법이라 할지라도 본서를 마감하는 종결 인사로서 매우 적절한 것이다.
왜냐하면 저자가 본서에서 계속적으로 하나님께서 구속하시고 인도하시며 도와주시는 은혜에 대해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9 절. 2: 9. 4: 16. 12: 15).
저자는 마지막 인사로 수신자들에게 하나님의 은혜를 상기시킴으로 배교(背敎)의 위험에 처해 있는 수신자들과 하나님과의 개인적인 관계는 물론 지도자와 수신자들 간의 갈등관계를 하나님의 은혜로 해결할 것을 암시하고 있다(Lane).
본문은 몇 가지 교훈을 준다.
첫째, 성도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항상 찬미의 제사를 하나님께 드려야 한다.
하나님을 찬송하는 것은 그가 자기 백성을 창조하신 목적이며 또 그들을 구원하신 목적이다.
찬송은 우리의 입술이 맺을 수 있는 가장 선한 열매이다.
둘째, 성도는 선행과 구제를 힘써야 한다.
그것도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시는 제사이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신 것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이 세상에서 선한 일들을 많이 하도록 하시기 위함이다.
선행과 구제는 구원받은 자들이 맺어야 할 아름다운 열매들이다.
셋째, 성도들은 그들의 인도자들을 위해 기도하고 그들에게 순종하고 복종해야 한다.
물론 회중의 인도자들, 즉 목사들과 장로들은 교인들을 위해 마치 자신이 결산할 자인 것처럼 깨어 있어야 하며 성실히 그 직무를 다해야 한다.
교인들은 그 인도자들이 즐거움으로 그 일을 하고 근심으로 하지 않도록 그들에게 순종하고 복종해야 한다.
넷째, 성도는 이 모든 선한 일을 온전케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하며 간구해야 한다.
선행과 순종이 단지 우리의 노력으로 되지 않고 하나님의 은혜로 되므로 우리는 이 일을 위해 기도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