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몬 1: 23 나와 함께 갇힌 자 - 몬 1: 25 너희 심령과 함께
4. 끝인사 ( 1: 23 - 25 )
23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나와 함께 갇힌 자 에바브라와 24 또한 나의 동역자 마가, 아리스다고, 데마, 누가가 문안하느니라. 25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너희 심령과 함께 있을지어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나와 함께 갇힌 자’라는 표현과 ‘나의 동역자[동역자들]’이라는 표현은 주 안에서 귀한 말들이다.
주의 피로 구원받은 우리는 주의 일을 위해 동역자가 되기 원하며, 또 필요하다면 그리스도 예수 때문에 옥에 갇히기도 하기를 원한다.
이것은 주를 믿는 자들에게 영광이다.
몬 1: 23 나와 함께 갇힌 자 -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나와 함께 갇힌 자 에바브라와 (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나와 함께 갇힌 자 에바브라와 )
1]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나와 함께 갇힌 자라는 표현과 나의 동역자들이라는 표현은 주 안에서 귀한 말들이다.
주의 피로 구속(救贖)받은 우리는 주의 일을 위해 함께 일하는 동역자가 되기 원하며, 또 필요하다면 그리스도 예수 때문에 옥에 함께 갇히기도 원한다.
이런 고난과 핍박을 당하는 것은 주를 믿는 자들에게 참으로 영광이다.
2] 나와 함께 갇힌 자 에바브라와
본 절에서 에바브라에게 사용된 '나와 함께 갇힌 자'라는 호칭은 골로새의 '아리스다고'에게도 적용된다.
* 골 4: 10 - 나와 함께 갇힌 아리스다고와 바나바의 생질 마가와 (이 마가에 대하여 너희가 명을 받았으매 그가 이르거든 영접하라.)
이 호칭이 '그리스도에 의해 사로잡힌 자로서의 동역자'라는 비유적 의미로 사용될 수도 있겠지만(Robertson) 본 절에서는 '에바브라'가 바울과 함께 실제로 감옥에 갇혔음을 시사한다(Lohse, Martin, O' Brien).
더욱이 본 절의 '쉬나이크말로토스'(*, '함께 갇힌 자')는 다음 절에 언급될 '쉬네르고이'(*,'동역자들')와 분명히 구별되기 때문에 굳이 비유적인 의미로 이해할 필요는 없다.
'에바브라'는 골로새에 파송(派送)된 바울의 대표자로서(Vincent) 골로새의 복음 전도자이며(Lightfoot), 골로새 교회의 설립자였다.
* 골 1: 7 - 이와 같이 우리와 함께 종 된 사랑하는 에바브라에게 너희가 배웠나니 그는 너희를 위한 그리스도의 신실한 일꾼이요
* 골 4: 12 - 그리스도 예수의 종인 너희에게서 온 에바브라가 너희에게 문안하느니라. 그가 항상 너희를 위하여 애써 기도하여 너희로 하나님의 모든 뜻 가운데서 완전하고 확신 있게 서기를 구하나니
몬 1: 24 나의 동역자 - 또한 나의 동역자 마가, 아리스다고, 데마, 누가가 문안하느니라. ( 또한 나의 동역자 마가, 아리스다고, 데마, 누가가 문안하느니라. )
1] 또한 나의 동역자 마가, 아리스다고, 데마, 누가가 문안하느니라.
바울은 동역자로서 '마가', '아리스다고', '데마', '누가'를 언급하는데, 이들은 골로새서에서도 문안 대상으로 나타난다.
* 골 4: 10, 14 - 10 나와 함께 갇힌 아리스다고와 바나바의 생질 마가와 (이 마가에 대하여 너희가 명을 받았으매 그가 이르거든 영접하라.) 14 사랑을 받는 의사 누가와 또 데마가 너희에게 문안하느니라.
이것은 빌레몬의 가족이 골로새 교회와 깊은 관계를 맺고 있음을 나타낸다.
바울은 동역자들의 문안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동역자들간에 관심을 가질 것을 강조한다(Lohse).
몬 1: 25 너희 심령과 함께 -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너희 심령과 함께 있을지어다. (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너희 심령과 함께 할찌어다. )
1]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너희 심령과 함께 있을지어다.
'너희'에 해당하는 헬라어 '휘몬'(*)은 복수로서 빌레몬은 물론 그의 가족과 섬기는 교회 전체를 가리킨다.
본 절에서 '심령'으로 번역된 '프뉴마토스'(*)는 본 절의 '너희'와 같은 의미이다(Lohse, O' Brien).
바울은 본 절에서 서신을 끝맺기 전에 빌레몬과 그의 가족 그리고 교회에 축복하고 있다.
2] 용서의 방법 : 출처 은헤와 목회정보 글쓴이 : 성경벨레
하루는 어떤 청년이 목사님을 찾아왔습니다. 그리고는 대뜸 목사님에게 이런 질문을 던졌습니다. "목사님, 도대체 예수님과 마귀와의 거리는 얼마나 됩니까?" 목사님은 그 질문의 의도를 얼른 알아차리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되물었습니다. "그것이 무슨 말이요?"
청년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목사님, 예수님이 저의 마음 속에 찾아오시는 시간은 얼마나 걸립니까? 반대로 악한 마귀가 저의 마음을 비집고 들어오는데는 또 얼마나 많은 시간이 걸립니까?" 그 청년은 평소에 자기가 신앙 위에 굳게 서 있다고 자부했습니다. 그러나 어느 순간에는 어이없게도 죄의 유혹에 쉽게 빠져버리는 자기 스스로를 바라보면서 너무나도 한심한 생각에 목사님을 찾아와서 그러한 질문을 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제야 목사님은 그 질문의 의도를 알아차렸습니다. 그리고 빙긋이 웃으면서 청년에게 알기 쉽게 예를 들어 설명해 주었습니다. "형제여, 캄캄한 방에 불을 한 번 켜 보십시오. 그러면 방안이 환하게 밝아지면서 어두움은 물러가 버리고 말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 어두움이 영원히 사라져 버립니까? 아니지요. 또 다시 불을 꺼버리면 다시금 방안에는 어두움이 찾아오는 것입니다.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예수님이 우리의 마음을 다스리시면 그 순간에 악한 마귀는 우리 마음에서 달아나고 말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우리의 마음을 다스리지 않으시면 마귀는 또 다시 우리의 마음을 지배하기 위해서 금방 찾아올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예수님과 마귀 사이는 순식간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면서 마지막으로 목사님은 청년에게 이렇게 당부를 했습니다. "그러니 형제여, 언제나 예수님을 마음 보좌에 모시고 예수님이 형제의 마음을 다스리게 하세요. 그리고 형제의 마음에 성령의 불꽃이 꺼지지 않고 늘 타오를 수 있도록 항상 깨어서 조심하기를 바랍니다. 이것이 형제로 하여금 승리로운 삶을 살게 하는 비결이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성령 충만한 사람이 따로 있습니까? 마귀와 죄의 유혹에 쉽게 빠지는 사람이 따로 있던가요? 아닐 것입니다. 우리가 평소에는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으면서 산다고 생각하지만, 방심해 버리면 "아차!"하는 순간에 죄의 유혹에 빠져버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늘 우리가 깨어 경성하면서 우리 마음을 잘 지켜야 할 것입니다.
여러분, 혹시 비행기의 조종실을 구경해 보신 적이 있습니까? 비행기를 타기 위해서 입구에 들어가다 보면 왼쪽편에 조종실이 있습니다. 이따금씩 조종실 문이 열려 있을 때가 있습니다. 흘깃 그 안을 들여다봅니다. 아주 좁은 공간입니다. 조그마한 유리창이 있고, 의자가 몇 개 놓여있을 뿐입니다. 그곳은 복잡한 기계들로 가득차 있습니다. 비록 조종실은 좁지만 엄청나게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비행기 전체를 책임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조종실 안에 조종사들이 앉아 있으면 아무런 문제가 없습니다. 그러나 작은 공간이지만 테러범들이 그곳을 장악했다고 한 번 생각해 보세요. 문제가 심각해지는 것입니다. 이번에 일어났던 동시다발 테러사건처럼 비행기가 가다가 정상궤도에서 이탈해 버립니다. 대형빌딩에 가서 내려 꼽히게 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누가 우리의 마음을 지배하고 다스리느냐에 따라서 우리의 삶 자체가 달라질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이 우리의 마음 속에 계시면서 우리의 마음을 다스리시면 우리의 마음은 주님이 계신 나라 천국이 되는 것입니다. 빛과 사랑이 넘치는 나라가 될 것입니다. 그러나 악한 마귀가 우리의 마음을 지배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미움과 증오에 불타오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 늘 우리가 우리의 마음을 지켜야 합니다. 악한 마귀가 우리의 마음을 틈타지 못하도록 우리의 마음을 잘 지켜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이 언제나 우리의 마음을 지배하고 우리의 마음을 다스리도록 우리의 마음을 예수님께 내어드려야 할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빌레몬서의 마지막 부분에 이르렀습니다. 사도 바울은 오늘 말씀을 통해서 우리가 어떻게 하면 우리의 오네시모를 용서할 수 있는지 우리에게 용서의 방법을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이 시간 하나님께서 우리 모두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시기를 바랍니다. 아직도 내 마음 속에 미움의 찌꺼기가 남아있지는 않습니까? 아직도 용서하지 못한 오네시모가 도사리고 있지는 않습니까? 하나님이 우리 모두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셔서 해묵은 미움의 찌꺼기를 완전히 씻어버리고, 우리의 마음 속에 도사리고 있는 오네시모를 깨끗이 용서하고, 우리 마음에 빛과 사랑이 넘치는 천국을 소유할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편의상 오늘 말씀을 세 대지로 나누어서 우리가 간단하게 생각해 보겠습니다.
첫째로, 우리는 종말론적인 신앙을 가져야 합니다.
우리는 이 땅에서 영원토록 사는 것이 아닙니다. 잠시 잠깐입니다. 우리 모두는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야 합니다. 우리 모두는 죽어가는 존재입니다.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설 때 풀 것은 풀고 가야 할 것입니다. 맺힌 채 하나님 앞에 서시겠습니까? 그러면 부끄러움을 당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책망을 받을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도 바울을 통해서 계속 우리에게 "너의 오네시모를 용서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에 순종해서 용서할 것은 용서하고, 맺힌 것은 다 풀고 하나님 앞에 서야 합니다. 그것이 22절 말씀입니다.
"오직 너는 나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라 너희 기도로 내가 너희에게 나아가게 하여 주시기를 바라노라.“
지금 사도 바울은 로마의 감옥에 갇혀 있습니다. 하나님이 은혜를 베풀어주시면 그는 자유의 몸이 될 것입니다. 그러면 골로새를 방문할 것이라고 바울은 그의 계획을 밝히고 있습니다. 바울이 골로새를 방문하게 될 때 빌레몬의 집에 머물겠다고 그를 위해서 처소를 예비하라고 부탁하고 있습니다. 바울의 의도가 무엇이겠습니까? 지금 바울에게 머물 곳이 없어서 그런 부탁을 하는 것입니까? 바울의 의도는 다른데 있습니다. 바울이 골로새를 방문해서 빌레몬의 집에 머물게 되면 자동적으로 무엇을 알게 됩니까? 빌레몬이 바울의 부탁대로 오네시모를 용서했는지 용서하지 않았는지가 자동적으로 알려지게 될 것입니다. 말하자면 지금 사도 바울은 빌레몬에게 적당한 부담을 주고 있습니다. 그렇게 함으로서 빌레몬으로 하여금 그의 종 오네시모를 용서할 수 있도록 돕는 것입니다. 바울 자신이 직접 가서 확인해 보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바울은 빌레몬에게 기도의 부탁을 하고 있습니다.
"너희 기도로 내가 너희에게 나아가게 하여 주시기를 바라노라.“
한 번 생각해 봅시다. 만일 빌레몬이 그의 종 오네시모를 용서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이런 기도를 할 수 있겠습니까? 약 5: 16의 말씀입니다. "의인의 간구는 역사하는 힘이 많으니라.“
빌레몬과 그의 가족들, 또 그의 집에서 모이고 있는 골로새 교회 모든 성도들이 사도 바울을 위해서 간절히 기도할 때 하나님은 그 기도를 들으시고 응답하실 것입니다. 바울은 자유케 될 것입니다. 그러면 골로새를 방문하고 또 빌레몬의 집에 유하게 될 것입니다. 빌레몬이 그의 종 오네시모를 용서했는지 안했는지 바울은 저절로 알게 될 것입니다. 그러니 빌레몬이 그의 종 오네시모를 용서하지 않고 어떻게 바울을 위해서 기도할 수 있겠습니까? 먼저 그것이 선결되어야지 그의 마음 속에서 우러나오는 진심 어린 기도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진실로 속히 오리라." 예수님은 속히 우리를 찾아오셔서 우리가 맺힌 것을 다 풀었는지, 우리의 오네시모를 용서했는지 하지 않았는지 확인해 보실 것입니다. 이 땅에서 나와 너와의 관계가 화목한 사람은 기꺼이 이렇게 기도할 수 있을 것입니다.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그러나 아직도 맺힌 채로 살아가는 사람, 자기의 오네시모를 용서하지 못한 사람은 아무래도 그러한 기도를 드리는데 주저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우리는 이 땅에서 영원히 사는 존재가 아닙니다. 곧 우리는 예수님 앞에 서야 합니다. 우리가 이런 종말론적인 신앙을 늘 유지하면 우리는 좀 더 용이하게 우리의 오네시모를 용서할 수 있을 것입니다.
어느 교회에 할아버지 할머니 부부가 계셨습니다. 연세가 80세에 가까운 분들이었습니다. 두 분은 사이가 안좋으셨습니다. 매일 싸우셨습니다. 하루는 대판 싸웠습니다. 할머니가 울면서 목사님을 찾아왔습니다. "목사님! 그 영감쟁이와 더 이상 못살겠습니다. 이제는 갈라서야겠습니다!" 목사님이 깜짝 놀랐습니다. 그래서 할머니를 달래었습니다. "할머니, 이제 할아버지와 함께 사시더라도 얼마나 더 사시겠습니까? 그냥 참고 사세요." 그러나 할머니는 완고했습니다. "그러니까 지금이라도 갈라서야 되겠습니다. 다만 몇 일이라도 사람답게 살아야 되겠습니다." 하도 완고하시니까 목사님도 두 손을 드셨습니다. "알겠습니다. 할머니. 그러나 제가 할머니에게 한 가지 묻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만일 할아버지가 병원에서 이제 앞으로 한 달밖에 살지 못할 것이라고 진단을 내린다면 그때는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할머니가 곰곰이 생각하더니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그렇다면 불쌍해서라도 한 달은 같이 살아주어야 되겠지요." 목사님이 결론을 내리셨습니다. "그래요. 그러면 앞으로 한 달 동안은 할아버지를 불쌍히 여기시는 마음으로 아껴주세요. 그리고 나서 한 달이 지나면 할머니 마음대로 하세요." 할머니가 돌아갔습니다.
잠시 뒤에 할아버지가 찾아와서 역시 볼멘소리로 원망하기 시작했습니다. "목사님! 그 못된 할망구와 이제 더 이상 못살겠습니다!" 목사님은 또 물었습니다. "할아버지, 싫던 좋던 간에 지금까지 수십 년을 함께 살아오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할머니가 이제 앞으로 한 달밖에 못산다면 그때는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할아버지도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그렇다면 한 달은 참고 살아주어야 되겠지요." 목사님은 똑같은 결론을 내렸습니다. "그래요. 할아버지, 할머니가 한 달밖에 더 못산다는 생각을 가지고 그 한 달만큼은 앞으로 할머니를 아껴주시고 사랑해 주세요. 그리고 나서 한 달이 지나면 할아버지 하시고 싶은대로 하세요." 할아버지도 돌아갔습니다.
한 달이 지났습니다. 두 사람이 이혼을 했겠습니까? 안했겠습니까? 할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두 사람이 한 달 뒤에 죽는다고 생각하니까 불쌍해서 어떻게 헤어질 수 있겠습니까? 그러니 서로 다툴 일이 없어져 버리고 만 것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여기 있는 우리 모두는 죽어가는 존재에 불과합니다. 우리도 죽어가고 있습니다. 우리의 오네시모도 역시 죽어가는 불쌍한 존재에 지나지 않습니다. 종말론적인 신앙, 내가 곧 하나님 앞에 서야한다는 생각을 가진다면 우리는 좀 더 따뜻하고 넓고 여유로운 마음으로 우리의 오네시모를 용서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무한정 사는 존재가 아닙니다. 잠시 잠깐 뒤에, 곧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야한다는 사실을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둘째로, 우리 주변의 증인들이 우리를 지켜보고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신앙 생활은 혼자 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주변에 형제 자매들이 함께 더불어서 신앙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우리의 오네시모를 용서하면 주변에 있는 사람들이 함께 더불어서 기뻐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미워하고 복수하는 심정으로 우리의 오네시모를 헐뜯고 비난하고 욕하게 되면, 우리를 지켜보는 사람들의 마음에 고통이 찾아오는 것입니다. 그것이 23∼24절 말씀입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나와 함께 갇힌 자 에바브라와 또한 나의 동역자 마가, 아리스다고, 데마, 누가가 문안하느니라."
지금 여기에 다섯 사람의 이름이 나옵니다. 그들은 빌레몬을 잘 아는 사람들입니다. 또 빌레몬도 그 다섯 사람을 잘 알고 있습니다. 바울은 빌레몬이 잘 아는 다섯 사람의 이름으로 그에게 문안하고 있습니다. 바울의 의도가 무엇이겠습니까? 그 다섯 사람도 바울과 똑같은 소원과 기대를 가지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들의 소원이 무엇입니까? 기도의 제목이 무엇입니까? 빌레몬이 그의 종 오네시모를 용서하는 것입니다. 빌레몬이 그의 종 오네시모를 용서하면 이 다섯 사람은 그 소식을 듣고 바울과 함께 기뻐할 것입니다. 그러나 빌레몬이 오네시모를 용서하지 못하면 바울 뿐만 아니라 그들도 함께 마음의 상처를 입고 괴로워하고 고통스러워할 것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우리의 오네시모를 용서하면 우리는 다른 사람들에게 믿음의 감화를 끼치게 됩니다. 그러나 우리가 우리의 오네시모를 용서하지 못하고 가혹하게 다루고 미워하고 비방하고 복수하고자 하는 모습을 보이게 되면, 우리를 보는 사람들의 마음이 평안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미국의 어떤 기독실업인이 죽었습니다. 그의 장례식을 거행하게 되었습니다. 성대한 장례식이었습니다. 사업을 하던 사람이니까 얼마나 많은 친구들이 모였겠습니까? 그런데 그 기독실업인은 죽기 얼마 전에 자기 장례식장에서 읽어달라고 장례식의 답사를 손수 기록해 두었습니다. 그래서 유족의 부탁에 따라 친한 친구 한 명이 그 답사를 읽기 시작했습니다. 그 내용은 이러했습니다. "지금은 나의 장례식이 거행되는 시간입니다. 하지만 나는 나의 마지막 가는 이 시간을 내 친한 친구들을 위한 부탁의 시간으로 쓰고자 합니다.
John! 자네도 지금 내 관을 바라보는 사람들 가운데 있겠지! 친구여, 우리가 함께 골프를 칠 때마다 나는 자네가 복음을 받아들일 것을 얼마나 간절히 권면했던가? 하지만 그대는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았다네. 내가 이 시간 마지막으로 자네에게 간곡히 부탁하네. 더 이상 고집 피우지 말고 이제는 마음 문 열고 받아들이게나. 다 자네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부탁하는 걸세.
George! 그대는 지금도 내가 전하는 예수 그리스도를 거부하겠는가? 그 분은 그대를 위하여 죽으셨고, 지금도 그 분은 그대에게 영생을 주시기 원하신다네.
Ed 그리고 Peter! 이제는 그만들 싸우고 화해하게나. 인생은 이처럼 유한하지 않은가? 짧은 인생길 걸어가면서, 다투지 말고 이제는 서로 돕고 격려하면서 사는 것이 좋지 않겠나." 여기까지 읽어 내려갔을 때 그곳에 있는 사람들이 술렁거리기 시작했습니다. 왜 그렇겠습니까? 자기의 이름이 거기에 나올까 싶어 염려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금 우리는 다른 사람들의 눈에 어떻게 비추이고 있습니까? "그 사람 참 훌륭한 사람이야. 정말 따뜻한 마음을 가진 사람이야. 그 사람 곁에만 가면 절로 엔돌핀이 솟아나! 마음이 평안해져." 이와 같은 평을 받는 우리가 되어야 마땅할 것입니다. "그 사람은 고집만 세고 도무지 남을 배려할 줄 몰라. 그 사람 때문에 마음에 상처를 받는 사람이 어디 한 두 사람이야?" 이와 같은 평가를 받아서는 안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금 우리 주변에 하다한 증인들이 우리를 지켜보고 있습니다. 우리의 행동은 알게 모르게 다른 사람들의 삶에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좀 더 따뜻하고 열린 마음, 여유로운 마음, 포근한 마음을 가지고 남을 배려해 줄 수 있는 우리의 삶이 되기를 바랍니다.
셋째로,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야 합니다.
내가 아무리 애써 나의 오네시모를 용서하려고 해도 내 의지, 내 힘, 내 인격, 내 성품을 가지고는 되지 않습니다. 은혜만이 그것을 가능케 합니다. 그것이 25절 말씀입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너희 심령과 함께 할찌어다."
지금 사도 바울은 빌레몬과 그의 가족들 또 그의 집에서 모이고 있는 골로새 교회 성도들에게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함께 하기를 기원하고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은혜만이 오네시모를 용서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육신의 힘으로는 오네시모를 용서할 수 없습니다. 육신은 본능적으로 복수를 요구하기 때문입니다. 법으로도 용서할 수 없습니다. 법은 본질적으로 공의와 정의를 요구하기 때문입니다. 오직 은혜만이 오네시모를 용서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이야기입니다. 하루는 성 프랜시스의 제자 가운데 한 사람이 비몽사몽간에 하늘나라를 구경하게 되었습니다. 거기에 보니까 보좌가 여러 개 놓여 있는데 그 가운데 한 보좌는 특별했습니다. 크기도 더 크고 높이도 더 높았습니다. 그래서 그 제자는 천사에게 물었습니다. "저 보좌는 누구를 위한 것입니까?" 천사가 대답을 했습니다. "그 보좌는 세상에서 가장 겸손한 사람인 성 프랜시스를 위한 것입니다." 그 소리를 듣고 제자는 성 프랜시스가 자신의 스승이지만 마음에 질투심이 생겼습니다. '야! 천국에서까지 이렇게 높아진다니…' 그는 골똘히 생각하는 가운데 하루는 기회를 봐서 성 프랜시스에게 이렇게 물었습니다.
"선생님, 선생님은 스스로를 가리켜서 어떠한 인물이라고 생각하십니까?" 그러자 성 프랜시스가 조금도 스스럼없이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나야말로 세상에서 가장 악한 사람이지." 그 제자는 "이때다!"하면서 성 프랜시스에게 가시 돋친 말을 했습니다. "선생님, 그 말씀은 너무나도 위선적인 말씀이 아닐까요? 세상 사람들은 선생님을 성자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 세상에는 정말로 악한 사람들이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살인자도 있고, 강도도 있습니다. 그런데도 어떻게 선생님은 스스로를 가리켜서 세상에서 악한 사람이라고 생각하십니까? 그것은 겸손을 가장한 위선적인 말이 아닐까요?"
그러자 성 프랜시스는 껄껄 웃으면서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아니야. 그것은 자네가 나를 몰라서 하는 소리야. 나는 정말로 세상에서 제일 악한 사람이야. 단지 하나님께서 내게 큰 은혜를 베풀어주셔서 지금의 내가 있을 뿐이야. 만일 하나님이 내게 베풀어주신 똑같은 은혜를 다른 사람에게 베풀어주셨다면, 그 사람은 지금의 나보다 훨씬 더 훌륭한 사람이 되었을거야!" 그 소리를 듣고 그 제자는 마음에 감동을 받았습니다. 스승 앞에서 마음의 무릎을 꿇었습니다. 그때부터 그는 진정으로 성 프랜시스를 존경하게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내가 나 된 것도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우리는 나 자신의 인격, 힘, 의지, 교양으로서는 결코 오네시모를 진정으로 용서할 수 없습니다. 은혜를 받아야 되는 것입니다. 이 시간 우리 모두의 심령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함께 하기를 바랍니다. 사도 바울은 오늘 본문의 말씀을 통해서 용서의 방법을 우리에게 세 가지로 일깨워주었습니다.
첫째로, 종말론적인 신앙을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잠시 잠깐입니다. 이 땅에서 영원히 살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곧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야 합니다. 맺힌 것은 이 땅에서 다 풀고 가야합니다.
둘째로, 우리 주변에는 허다한 증인들이 우리를 지켜보고 있습니다.
우리가 우리의 오네시모를 용서하면 그들도 함께 더불어서 기뻐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오네시모를 용서하지 못하면 그들도 마음 아파할 것입니다. 고통을 받게 될 것입니다.
셋째로,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야 합니다.
내 힘으로 용서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늘 목마른 사슴이 시냇물을 찾아 갈급함 같이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할 수 있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바랍니다. 이제 빌레몬서를 마감하면서 우리 예수님이 용서와 관련해서 친히 우리에게 주신 말씀으로 몇 말씀을 인용하고자 합니다. 마 6: 14∼15의 말씀입니다.
"너희가 사람의 과실을 용서하면 너희 천부께서도 너희 과실을 용서하시려니와 너희가 사람의 과실을 용서하지 아니하면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과실을 용서하지 아니하시리라.“
마18:35의 말씀입니다.
"너희가 각각 중심으로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내 천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시리라.“
요13:34∼35의 말씀입니다.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줄 알리라.“
하나님은 빌레몬서를 통해서 계속해서 우리들에게 우리의 오네시모를 용서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할 수 있는 우리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아직도 수십 년 동안 용서하지 못한 미움의 찌꺼기가 남아 있습니까? 하나님이 우리 모두에게 은혜를 베풀어주셔서 깨끗하게 다 풀어버리고 마음의 천국, 빛과 사랑이 넘치는 주님의 나라를 우리 마음에 소유할 수 있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바랍니다.
본문의 교훈을 정리해보자.
첫째, 오네시모는 죄인이었고 무익한 종이었으나 바울을 통해 구원을 받고 변화되었다.
우리는 죄인이었을 때 무익한 자이었으나 구원받아 하나님의 선한 일을 위해 유익한 자가 되었다.
구원은 죄인을 유익한 자가 되게 한다. 우리는 이제 세상에서 무익한 자가 되지 말고 선한 일에 쓰이는 유익한 자가 되어야 한다.
둘째, 바울은 빌레몬에게 오네시모를 받으라고 권하였다.
그것은 그의 잘못을 용서하고 그의 빚진 것을 탕감하며 사랑으로 용납하는 것을 포함한다.
주 안에서는 주인도 종도 형제자매이다. 우리는 주 안에서 형제자매로서 서로 용서하며 용납하며 사랑하며 교제해야 한다.
셋째, 바울은 빌레몬의 선행이 억지가 아니고 자발적이게 되기를 원하였다.
구원의 목표는 선한 삶이고 선행은 자발적이어야 한다.
신앙생활은 성령의 감동 가운데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사랑하고 자발적으로 헌신하고 순종하며 섬기는 것이다.
우리는 무슨 선한 일이든지 억지로 하지 말고 자발적으로, 기쁨과 즐거움으로 해야 한다. 예배도 찬양도 헌금도 봉사도 그러해야 한다.
* 고후 9: 7 - 각각 그 마음에 정한 대로 할 것이요 인색함으로나 억지로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즐겨 내는 자를 사랑하시느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