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딛 3: 15 문안하라 - 나와 함께 있는 자가 다 네게 문안하니 믿음 안에서 우리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너도 문안하라. 은혜가 너희 무리에게 있을지어다. ( 나와 함께 있는 자가 다 네게 문안하니 믿음 안에서 우리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너도 문안하라. 은혜가 너희 무리에게 있을찌어다. )
1] 나와 함께 있는 자가 다 네게 문안하니 믿음 안에서 우리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너도 문안하라.
'나와 함께 있는 자'는 특별히 어느 누구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바울 사도와 함께 하는 모든 동역자들을 지칭한다.
믿음 안에서 그리스도인들은 문안으로 서로 격려하고 위로하며 섬겨야 한다.
'문안'은 하나님 안에서 형제를 사랑하게 하며 서로의 믿음을 돈독케 하는 계기가 된다.
성도들의 상호 문안은 아름다운 일이다. 바울과 함께한 자들은 그와 함께 디도에게 문안하였다. 바울은 또 디도도 바울과 함께한 자들에게 문안하라고 말한다.
바울은 자기와 함께한 자들을 ‘믿음 안에서 우리를 사랑하는 자들’이라고 말하였다. 바울은 연약한 사람이었지만, 그가 받은 사도의 직분과 그가 전하는 하나님의 복음 진리 때문에 성도들은 그를 사랑했다. 오늘날에도 진실한 성도들은 진실한 전도자들과 하나님의 종들을 사랑할 것이다.
2] 은혜가 너희 무리에게 있을지어다.
다른 서신들과 마찬가지로 바울은 본서를 마치면서 디도와 그레데 교인들을 위해 축도를 한다.
'공인 본문'(Textus Receptus)에는 '아'(*)이 첨가되어 있으나(Hervey), 초기 사본들에는 빠져 있다(Hiebert).
3] 교회의 위기를 극복하자 ( 딛 3: 8-15 ) : 박조준 목사
오늘 그 동안 생각해 온 디도서 강해의 마지막 시간을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정말 훌륭한 목회자요 위대한 학자요 소중한 하나님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나서 온전히 변하여 새사람이 되었고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전하는 일을 위해서 심혈을 기울였습니다. 주변에서는 너무 열심히 복음을 전하니까 바울을 가리켜 “그의 많은 학문이 저를 미치게 했다.”고 말할 정도 였습니다.
사도 바울은 선교하고 교회를 설립하는 것으로 끝난 것이 아닙니다. 그가 이미 받은 복음의 횃불을 물려주기 위해서 믿음의 아들들에게 하나님의 교회를 돌보는 일을 맡기기 위해서 훈련시켰습니다. 그래서 쓴 것이 디모데전후서와 디도서였습니다. 이 편지들을 흔히 목회서신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바울의 선교 행적을 보면 그는 가는 곳마다 동역자들이 함께 했습니다. 그는 자기 주변에 항상 신뢰할 만한 동역자를 두고 함께 하나님의 일을 했습니다. 디모데를 위시해서 바나바, 마가, 디도 같은 사람들이 바울을 도와서 하나님의 일을 한 것입니다.
제 경우를 보아도 지금까지 목회를 하는 동안 저 혼자는 할 수가 없었습니다. 여러 교역자의 도움을 받아가면서 일했습니다. 감사한 것은 지금까지 저를 도와 하나님의 일을 한 교역자들이 성실하게 도와주셔서 목회를 하는 데 얼마나 큰 힘이 되었는지 모릅니다. 하나님의 축복인 줄 믿고 감사할 뿐입니다. 그리고 함께 일하시던 분들이 독립해서 교회를 잘 해나가고 있는 모습을 볼 때 그렇게 고맙고 흐뭇할 수가 없습니다. 이따금 저를 도와서 사역하시던 목사님의 교회에 초청을 받아 가 보면 감격스럽기까지 합니다. 이것은 선배가 후배의 성장을 보면서 느끼는 흐뭇함이라고 생각합니다.
바울은 그 당시 알려진 전세계를 그리스도 앞으로 인도하고자 하는 큰 비전과 꿈이 있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맡기신 새로운 사역지를 향해서 떠나게 되었습니다. 떠나가면서 그는 함께 일하던 디도를 그레데 섬에 남겨 놓게 되었습니다. 그 이유는 바울과 디도를 통해서 복음을 듣고 예수님을 믿게 된 사람들을 계속적으로 양육시키기 위해서는 새로운 지도자를 세우는 것보다는 이미 익숙해진 지도자를 통해서 계속 양육받는 것이 효과적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단순히 개인의 신앙만 자라는 데서 그치지 않고 이제 갓세워진 그 레데 교회를 좀더 견고하게 세우는 일을 감당하게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러니까 말하자면 바울의 후임 목회자로 디도를 그레데에 남겨 두게 된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중요한 사실을 배우게 됩니다. 사람이 세상에 살면서 누릴 수 있는 무엇보다 소중한 보람 중에 하나는 내가 누구에게 복음을 전해서 그 사람이 예수를 믿고 계속해서 주 안에서 자라가는 모습을 보는 때라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세상에서 많은 것을 성취하고 많은 것을 남긴다고 해도 우리의 삶이 끝이 나는 그 순간에 무엇이 이 세상에서 남길 수 있었던 가장 중요한 것이었다고 생각할 수 있겠습니까? 가령 우리에게도 디모데가 있습니까, 디도가 있습니까? 정말 우리의 생애를 통해서 한두사람이라도 신앙적으로 깊은 영향을 끼쳐서 복음을 가지고 또다른 사람들에게 그 영향을 줄 수 있는 그런 사람들을 키웠습니까?
디도서를 통해서 사도 바울은 디도로 하여금 복음을 전할 사람들을 계속해서 잘 돌보아 주도록 격려한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그레데 섬에서 처음으로 예수 믿기 시작한 사람들이 세운 이 어린 교회가 든든히 세워지기를 원하는 바울의 애타는 심정을 디도서 전체를 읽으면서 짙게 느낄 수가 있습니다
한 사람을 예수 믿게 해서 신앙이 자랄 수 있게만 하면 되지 그 다음 누가 어느 교회에서 신앙생활 하든 상관할 것이 무엇인가라고 말하는 사람도 없지 않습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의 생각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을 뿐만 아니라 교회 안에서 뿌리를 내리고 교회가 든든히 세워지기를 바울은 그렇게 소원했습니다. 왜냐 하면 바울은 교회가 많은 문제를 안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하나님이 기대하시는 세계복음화의 역할을 감당할 수 있다고 확신했기 때문입니다.
중국 선교를 위해서 평생을 바친 선교사 허드슨 테일러를 여러분이 기억하실 것입니다. 그는 중국에서 의사로 한동안 일하다가 중간에 영국으로 돌아가 몇 년을 보내고 다시 중국으로 돌아왔습니다. 영국으로 돌아가기 전의 그의 사역과 몇 해 후에 중국으로 다시 돌아와서 그 곳에서 그의 생을 마칠 때까지의 사역에는 큰 차이가 있습니다. 처음에 허드슨 테일러는 복음만 전하면 된다는 생각을 가지고 중국에 들어갔습니다. 그래서 그는 병원에서 의사로 환자를 치료하면서 자기와 접촉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열심히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러나 영국으로 돌아가서 지난날의 사역을 결산할 때 그의 마음 속에 좀더 조직적으로 중국 전체에 영향을 끼칠 수 있는 사역이 자라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에 대한 깊은 고민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다가 성경을 다시 읽으면서 교회가 얼마나 중요한가 하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교회생활을 통해서 기쁨과 만족과 보람을 얻지 못할 때 어떤 일을 해도 마음 속에 참된 기쁨과 보람이 없게 됩니다. 더구나 나의 신앙이 주변의 사람들에게 아무런 영향을 끼치지 못하고 나에게만 머물러 있을 때 사실 그것은 신앙생활의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내가 주님을 알고 복음을 맛본 후 그것을 다른 사람에게 전하고 양육한 사람들이 자라서 주님의 교회를 충성스럽게 섬기고 세계복음화를 위해 한 몫을 담당하는 모습을 볼 때 그보다 더 큰 보람과 기쁨은 없으리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이 떠나간 후 그레데 섬의 이 어린 교회는 위기에 직면하게 되었습니다. 물론 이것은 일종의 ‘성장의 고통(growing pain)’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어쨌든 사도 바울이 생각하고 기대했던 대로 교회가 자라지를 못했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바울의 마음은 교회의 안정을 바라고 안타까운 심정으로 디도에게 편지를 쓰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면 그레데 교회에 어떤 위기가 닥쳤습니까? 개인에게 신앙의 위기가 찾아오는 것처럼 교회도 신앙의 위기를 겪을 수가 있습니다. 이것은 어렵고 힘든 것이지만 어떤 의미로는 필요하기도 합니다. 이것을 교회의 겨울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한 교회가 순탄하게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하면서 영광스럽게 부흥하고 성장하는 그런 때가 있는가 하면, 어느 순간 갑자기 영적으로 어두워지는 위기를 맞을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 위기, 겨울을 잘 넘기면 아름다운 꽃을 피우는 봄을 맞이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오늘 생각하게 되는 디도서 마지막 부분을 통해서 그레데 교회가 경험했던 어려움의 원인이 무엇이었나 하는 것을 살펴볼 수가 있습니다. 그레데 교회의 위기는 한 마디로 말하면 교회 안에서 논쟁의 분위기가 조성이 되고 이단이 침투한 것입니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면 외부에서 이단이 침투한 것이 아니라 교인 가운데서 이단이 일어난 것 같습니다. 사실 밖에서 침투하는 이단은 막는 것이 그렇게 어렵지 않습니다. 그러나 성도 가운데서 한 사람의 신앙이 변질되어 잘못된 복음을 퍼뜨리기 시작하면 문제는 훨씬 심각해지는 것입니다.
그러면 구체적으로 그레데 교회에서는 어떤 문제가 있었습니까? 어리석은 변론이 있었습니다. 이 변론이란 말이 주는 느낌은 강하지만 원문대로 하면 ‘무엇을 찾는다’, ‘무엇을 추구한다’는 의미로 사용되고 있는 말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사도 바울이 ‘어리석은 변론’이라고 말한 이유는 그레데 교회 사람들이 분명한 하나님의 계시에 근거하지 않고,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하지 않은 채 무슨 진리를 추구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말씀과 계시에 근거하지 않은 진리 추구는 어리석은 변론에 지나지 않는다고 바울은 선언했습니다.
그리고 족보 이야기를 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족보는 우리 조상들의 족보와 같은 것이 아닙니다. 구약시대의 여러 인물들에 관해서 옛날 히브리 사람들은 성경이 말씀하지 않은 이야기들을 많이 꾸며서 말했습니다. 그러니까 일종의 신화와도 같고 전설과도 같은 것들이었습니다. 가령 아브라함에 대해서도, 이삭에 대해서도, 야곱에 대해서도, 요셉에 대해서도, 모세에 대해서도 성경에 없는 이야기들을 많이 만들어 냈습니다. 그리고 그것으로 파벌이 생기게 되었습니다. “나는 아브라함에게 속한 사람이다.”, “나는 모세에게 속한 사람이다.” 해 가면서 구약 성경에 나타난 인물들을 우상화시켜 만들어 낸 이야기를 가지고 자기 나름대로의 신앙적인 전통을 정당화하려고 했습니다. 사실 이것은 진리를 추구하는 것하고는 별로 상관이 없는 것입니다. 결국 이것은 허황된 이야기를 근거로 해서 자기의 주장을 고집하는 모습으로 발전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그들은 분쟁하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본격적으로 사람들이 서로 나누어지기 시작한 것을 말합니다. 왜 이런 분쟁이 생기게 되었습니까? 어리석은 변론과 자기 주장 만이 옳다고 생각하는 고집 때문이었습니다. 잠언 17장 14절에 보면 “다투는 시작은 방축에서 물이 새는 것 같은즉 싸움이 일어나기 전에 시비를 그칠 것이니라” 했습니다. 그래서 디모데후서 2장 23절에 보면 “어리석은 무식한 변론을 버리라 이에서 다툼이 나는 줄 앎이라” 했습니다. 야고보서 4장 1절에 뭐랬어요. “너희 중에 싸움이 어디로 다툼이 어디로 좇아 나느뇨 너희 지체 중에서 싸우는 정욕으로 좇아 난 것이 아니냐” 했습니다. 성경 어디를 보아도 ‘다투지 말라’ 했지 ‘다투라’고 한 곳은 어디도 없습니다. 다투지 말아야 합니다.
그런데 그레데 교인들에게는 율법에 대한 다툼이 있었습니다. 언제나 그렇습니다만 율법에는 두 가지 이단이 있었습니다. 하나는, 바울이 갈라디아서에는 언급한 것처럼 소위 율법주의가 있었습니다. 한 마디로 말하면 율법주의는 율법 중에 어떤 조항은 반드시 지켜야 구원을 받는다고 강조했습니다. 예수만 믿어서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율법도 지녀야 구원받는다고 주장했습니다. 이것이 율법주의입니다.
다른 하나는, 무율법주의였습니다. 이것은 율법주의와 정반대 되는 이단입니다. 율법을 시켜서 구원받지 못하니까 율법이나 계명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그러니 아무렇게나 살아도 상관없다고 주장함으로 도덕적인 방탕을 정당화하려는 그런 사상이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 두 가지를 다 이단이라고 정죄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율법주의도 이단이고 무율법주의도 이단입니다. 그러면 율법에 대한 가장 복음적이고 성경적인 접근은 어떤 것입니까? 율법을 지켜서 구원받지 못한다면 어떻게 해야 구원을 받습니까? 오직 믿음으로만 구원을 받습니다.
그러면 믿음으로 구원받은 사람의 율법과의 관계는 어떻습니까? 구원을 받았기 때문에 율법을 지켜야 합니다. 우리는 율법을 지킴으로 구원받을 수는 없습니다. 이미 율법을 깸으로 하나님의 정죄를 피할 수 없던 우리가 믿음으로,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받았기 때문에 이제는 구원받은 사람으로서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고자 하는 삶을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기독교는 율법주의도 무율법주의도 아닙니다. 율법을 지키는 동기가 다릅니다. 율법을 지킴으로 다시 말하면 구원받기 위해서 율법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구원받았으므로 감사한 마음으로 사랑하는 사람으로 율법을 지키는 것입니다. 이렇게 생각할 때 그레데 교회 안에 있었던 위기의 원인은 변론과 허황된 이야기로 분쟁함으로 성도의 교제가 실패됐고, 우리가 정말 믿어야 할 교리가 무엇인가 하는 교리적인 교육이 실패했었던 것입니다. 그러면 사도 바울이 그레데 교회의 위기를 어떻게 극복해야 한다고 가르쳤습니까?
첫째로, 무익한 논쟁을 그치고 서로의 유익을 위하여 나눌 수 있는 나눔의 공동체를 만들어야 합니다.
8절과 9절 말씀을 보십시다. “이 말이 미쁘도다 원컨대 네가 이 여러 것에 대하여 굳세게 말하라 이는 하나님을 믿는 자들로 하여금 조심하여 선한 일을 힘쓰게 하려 함이라 이것은 아름다우며 사람들에게 유익하니라 그러나 어리석은 변론과 족보 이야기와 분쟁과 율법에 대한 다툼을 피하라 이것은 무익한 것이요 헛된 것이니라” 했습니다. 여기 보면 대조적으로 나타나는 두 낱말이 있습니다. 8절 마지막에 “사람들에게 유익하다”는 말이 있고 9절에는 그 반대로 “이것은 무익한 것이요”라는 말이 있습니다. 우리는 무익한 것에 대해서 길게 생각할 필요가 없다고 봅니다. 무익한 것 가지고 매달리면 교회에 분열이 생길 수가 있고 교제가 깨어지기 쉽습니다.
그러면 무엇이 유익한 것입니까? 바울은 정말 유익한 것은 사람들을 구원받게 해서 그들이 새로워져서 주님의 인격을 닮아가도록, 다시 말하면 지난 시간 말씀드린 대로 하나님의 후사가 될 만한 자격을 갖출 수 있도록 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의 영적인 성화야말로 무엇보다도 추구해야 할 가장 중요한 것입니다.
가령, 성경 공부가 중요합니다. 그러나 단순히 지식만을 얻기 위해서 하는 공부는 우리를 타락시킵니다. 우리에게 왜 지식이 필요합니까? 그 말씀을 우리 삶 속에 적용해서 어떻게 해야 정말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사람이 될 수 있을까, 하나님의 기업을 받기에 합당한 후사가 될 수 있는가를 알기 위해서 입니다. 그런 것을 알게 하는 선한 일을 북돋우는 데 우리의 모든 일의 초점이 맞추어져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유익을 만드는 데 힘써야 합니다.
그런데 그레데 교회 성도들은 근거도 없는 이야기를 가지고 자기의 의견을 고집하고 성경적인 분명한 해석을 떠나서 왜곡된 가르침을 주장하고 있었습니다. 이런 것을 주장하고 고집하다 보니까 교회 안에 분열과 다툼이 생기기 시작한 것입니다.
이것은 그레데 교회에만 있었던 일은 아니고 오늘의 교회 안에서도 얼마든지 있을 수 있는 일이라고 봅니다. 어거스틴은 일찍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 “본질적인 것에 관해서는 언제나 일치를 비본질적인 것에 관해서는 언제나 관용을‧‧‧‧‧‧.”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는 데 가장 중요한 것은 “사람이 어떻게 구원받느냐?” 또는 “예수님이 누구시냐?” 하는 문제입니다. 이것은 신앙에서 절대적인 문제입니다. 아주 본질적인 문제입니다. 이것은 타협할 수도 없고 바꿔져서도 안됩니다. 이것을 바꾸면 이단이 됩니다. 그러나 본질적이 아닌 것 소위 절대적이지 않는 일에 관해서는 의견이 달라질 수도 있습니다. 성경이 분명히 계시하지 않아서 해석의 차이가 있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 것에 관해서는 서로를 존경하고 다른 생각을 용납할 수 있는 넓은 마음이 필요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스스로 한번 물어 봅시다. “나는 정말 구원을 받았는가? 구원받고 변하고 있는가? 주님을 닮아가고 있는가? 나는 어떠한 사람이 되어야 하나?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이 어떤 것인가?” 이런 것들은 정말 중요한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를 유익하게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에게 유익하게 하는 것에 대해서 우리가 같이 관심을 가지고 힘쓰게 될 때 우리 교회는 그만큼 건강해질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중요하지 않은 것에 관심이 집중되고 의견이 갈라지면 결국 불행한 공동체가 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바울의 기대와 간절한 소원은 서로를 유익하게 만들기 위해서 서로의 마음을 나눌 수 있는 교회가 되는 것이었습니다.
둘째로, 순결한 교리를 지킬 수 있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여기에 대해서 바울은 단호했습니다. 오늘 주신 말씀 10절을 보세요. “이단에 속한 사람을 한두 번 훈계한 후에 멀리하라” 여기 자세히 보세요. 이단하고 토론하라는 말씀이 있습니까? 없습니다. 이단에 대해서는 ‘훈계하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이단하고는 내가 옳다 네가 틀렸다 하면서 토론하려고 하지 마세요. 똑바로 믿으라고 훈계해야 합니다. 그레데 교회의 경우에도 이단이 영향을 받게 되었는데 밖에서 침투한 것이 아니라 안에서 일어났습니다. 어느 날 갑자기 잘못된 교리에 영향을 받아 변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럴 때 교회는 단호하게 대처해야 합니다. 그렇게 하려고 할 때 언제나 이론을 제기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교회가 사랑으로 대하지 않는다.”고 비난합니다. 그러나 모든 면에서 사랑을 강조하던 사도 바울이 그 교리적인 순결면에 대해서는 아주 단호한 태도를 보이고 있습니다.
사랑이 무엇입니까? 계명을 지키는 것입니다. 참된 사람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사람이 되도록 하는 것입니다. 진리에서 이탈한 사람, 진리를 흐리게 하는 사람에게 어떻게 해야 합니까? 잘라내는 것밖에 없습니다. 썩는 지체는 빨리 자를수록 다른 지체에 손해를 덜 끼칩니다. 교회의 순결을 지키기 위한 유일한 방편입니다.
우리가 잘못해서 이단이 영향을 받게 되면 이미 우리가 구원을 받았으니까 구원을 잃어버릴 것은 아니지만 정말 주님을 위해서 순결한 삶을 살지 못합니다. 그렇게 되면 나중에 상을 잃어버리게 될 것입니다. 사도 요한의 단호한 경고를 다시 들어보세요. 요한 2서 9-11절 말씀입니다. “지내쳐 그리스도 교훈 안에 거하지 아니하는 자마다 하나님을 모시지 못하되 교훈 안에 거하는 이 사람이 아버지와 아들을 모시느니라 누구든지 이 교훈을 가지지 않고 너희에게 나아가거든 그를 집에 들이지도 말고 인사도 말라 그에게 인사하는 자는 그 악한 일에 참예하는 자임이니라”
이처럼 교리적인 순결이라는 것이 대단히 중요한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단에 빠진 사람들을 대하는 데는 그것을 포기하든가 아니면 그들을 떠나야 합니다. 잘못된 영향에 미치기 시작하면 교회는 하나님이 쓰실 수 없게 되어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여기 오늘 주신 말씀 11절에 보면 그들의 모습을 봅니다. “이러한 사람들은 네가 아는 바와 같이 부패하여서 스스로 정죄한 자로 죄를 짓느니라” 무엇이 진리인가를 알면서도 그것을 거절하고 이탈하는 것은 어쩔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그런 사람을 멀리하라고 했습니다. 왜요? 그들에게 교회가 영향을 받아서는 안되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신앙의 순결을 지켜야 합니다.
셋째로, 서로가 서로를 격려하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바울은 그레데 교회를 수습하기 위하여 아데마나 두기고를 보내고 교법사 세나와 아볼로를 보냈습니다. 그러면서 14절에 보면 “우리 사람들도 열매 없는 자가 되지 않게 하기 위하여 필요한 것을 예비하는 좋은 일에 힘쓰기를 배우게 하라” 했습니다. 이러한 지도자를 잘 섬기면서 우리는 정말 열매를 가지고 주님 앞에 설 수 있어야 합니다.
바울은 그레데 교회 하나를 바로 세우기 위하여 얼마나 애썼습니까? 어떻게 해서든지 한 사람 한 사람의 믿음이 세워지기 위해서 애쓰고 있는 바울의 뜨거운 심정을 느낄 수가 있습니다. 정말 우리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교회가 되기 위해서, 흔들림이 없이 복음 위에 든든히 서가는 교회가 되기 위해서 우리는 힘써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이단에 속지 말고 서로서로 뜨겁게 격려하고, 복음 안에서 뭉쳐야 합니다
이 목회서신을 생각하는 첫 시간에 말씀드렸습니다만 디모데전후서와 디도서는 바울 사도의 마지막 편지입니다. 바울은 인생의 겨울이 오기 전에 자기가 세운 교회들이 복음 안에서 든든히 세워져가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그래서 하나님의 역사를 감당할 수 있게 하기 위해서 뜨거운 마음으로, 간절한 심정으로 말씀하신 것입니다. 서로의 유익을 위해서 나누는 교회, 교리적인 순결을 지키는 교회, 한 사람 한 사람의 믿음을 세워주기 위해서 격려하는, 뜨거운 사랑으로 뭉쳐진 교회가 되기를 축원합니다.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 우리는 선한 일을 힘써야 한다.
구원의 목표는 선한 사람이 되고 선한 열매를 많이 맺는 것이다. 그래야 하나님께 영광이 돌아가고 하나님의 뜻하신 세계복음화가 이루어질 것이다.
전도는 모든 성도가 행해야 할 가장 귀하고 중요하고 선한 일이다. 우리가 하나님과 내세를 바르게 이해하고 구원받은 자라면, 우리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죄와 허무 가운데 방황하는 많은 사람들을 불쌍히 여기고 그들을 구원하는 전도 사업에 동참해야 한다.
둘째, 우리는 이단과 교리적, 윤리적 오류를 회개치 않고 고집하는 자들을 멀리하고 거절해야 한다.
그것은 교회의 순결성 때문이다.
교회는 죄와 멸망으로부터 구원을 받아 죄 사함과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들의 모임이다.
이단과 교리적, 윤리적 오류에 빠진 자들과의 계속적 교제는 개인과 교회를 부패시키는 요인이다. 이단자나 오류에 빠진 자를 한두 번 훈계한 후에 멀리하고 교제를 끊는 것은 결코 소극주의적 태도가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명령하시는 유일한 바른 방법이다. 우리가 그렇게 해야 우리 자신과 교회의 순결성을 지킬 수 있다.
이것은 다른 말로 하면 교회가 권징을 성실히 시행하는 일이다. 우리가 이렇게 하지 않으면 교회는 서서히 해이해지고 부패해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