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살로니가 전서 5장
1-11
종말에 대해서 1-11절은 또 하나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 그것은 종말의 때와 시기에 대한 것이었는데 먼저 1절에서 때라는 크로로스와 시기라고 번역된 카이로스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면 과거에는 이것을 크로로스는 달력적 시간이라 말하고 카이로스는 하나님의 구원사에 특별히 의미 있는 중요한 결정적인 기회를 말함으로 구분하려고 했는데 지금은 그렇게 믿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 이것은 단순히 동의어를 겸함으로써 강조하는 수사학적 기법일 뿐이다.
2절에 자세히 안다는 것은 무엇을 전제하는가? 아마도 바울이 이들에게 종말론에 대해서 자세하게 가르쳤음을 뜻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데살로니가 성도들은 그들의 신앙이 어려서 바울의 가르침을 다 알아듣지 못한 것 같다. 여기 2절에서 바울이 먼저 주요 명제를 주의 날이 도적같이 임한다는 것을 천명한다. 앞서 4:15절에서도 바울이 먼저 명제를 천명했던 것과 마찬가지이다. 유대 묵시문학적 종말론에 의하면 이 세상의 끝에 사단이 지배하는 이 세상의 역사를 끝내시고 종말을 고하시며 하나님이 의와 생명으로 통치하시기 위해서 새로운 세상을 여는 날이 주의 날이다.
그런데 우리 신약성경적 종말론에는 하나님의 대권자인 예수가 주로 오시는 날이다. 구약의 주의 날이 예수가 주로 오심의 예언으로 재해석된다. 그 날에 주 예수 그리스도가 오셔서 고전15:23-25에서 말하는 것처럼 모든 하나님에 대항하는 사단의 세력과 마지막 원수인 죽음까지 멸망시키고 아버지 하나님께 그의 왕권과 주권을 돌려드리며 하나님이 온 세상의 피조물을 평정을 하시고 다시 한번 창조주의 의와 생명의 통치 아래 있게 하셔서 온 세상의 구원의 완성의 이루실 것이다.
3절에서 평안하다 안전하다 말하는 저희는 누구인가? 이들은 세상 사람들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즉 이 세상 사람들이 평안하다, 안전하다 말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것은 데살로니가 컨텍스트에서 이해할 필요가 있다. 데살로니가 시민들은 친 로마적인 시민들이었다. 이들은 로마 제국의 이데올로기를 가지고 있었는데 그것은 ?팍스 로마나?였다. 즉 로마의 법과 질서 그리고 비교적 공정하고 능률적인 행정적 지배구조에 속국들이 충성을 약속하면 로마는 이들의 평화와 안전을 확보해 준다고 약속했고 이것은 어느 정도 지켜지고 있었다. 그래서 데살로니가에 있는 친 로마적 시민들은 종말을 이야기하는 기독교들을 이해할 수도, 하려고도 하지 않았다. 이러한 세상 사람들에 대해서 바울은 해산의 고통이라는 그림을 가지고 설명하고 있는데 그것은 주의 날이 종말이 예기치 않을 때 온다는 것이다. 그래서 교회 밖의 사람들은 대비할 수 없기 때문에 그들에게 임할 심판과 멸망을 그들은 '결단코 피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여러 상황은 바울은 낮과 밤의 그림으로 아주 잘 설명하고 있다. 그래서 바울은 4절에서 형제들에게 너희는 어두움에 속한 자들이 아니니까 주의 날이 도적같이 임해도 이 세상의 아무것도 모르는 무지한 사람들이나 어두움에 속한 자처럼 하나님의 계시를 받지 못하여 구원에 이르지 못하고 그리하여 그들에게 임할 심판과 멸망을 예비할 수 없는 자들과 같지 않다라고 말한다. 도리어 우리들은 밤과 어두움에 속하지 않고 이미 낮에 속한 하나님의 백성으로 하나님의 계시를 받고 구원을 받은 빛의 자녀들이기 때문에 주의 날이 우리들에게도 예기치 않게 온다 하여도 우리 빛의 자녀들, 낮의 아들들에게는 그 날이 무서운 때가 아니다는 것이다.
6절에서 앞의 4:13-18절의 잠잔다는 그림이 동일하게 나오고 있는데 이것은 그 의미가 4:13-18과는 다르게 쓰이고 있다. 즉 앞에서는 ‘잠잔다’는 의미를 죽음으로 이야기하고 있었는데 여기에서는 잠잔다는 의미를 ‘무지상태에 있는 주의 재림에 대비하지 않는 상태’에 있는 것으로 달리 쓰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주의 날이 도적같이 임하는데 ‘팍스 로마나’의 환상에 젖어서 평안하다 안전하다라고 말하는 자들은 바로 잠자는 자들인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런 세상 사람들과 달리 이미 주의 날에 속한 자들로서 계시의 말씀을 통하여 구원을 빛을 얻은 깨어 근신하는 자들이다. 이 근신한다는 말은 문자적으로 술취하지 않고 깨어있음을 말하고 있다. 맑은 정신을 갖는 것을 말한다. 이것이 우리에게 무엇을 촉구하는가? 우리가 주의 은혜로 구원을 얻은 자녀들로서 밤에 속한 자들처럼 어둠의 행태로 다시 굴러 떨어지면 안 된다고 경고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래서 깨어 정신을 바짝 차리고 맑은 정신을 계속해서 유지하고 있어야 됨을 말하는 것이다.
7절은 근신하는 자들에 반대되는 자들을 묘사하고 있다. 이들은 술 취하는 자들이고 밤에 속한 자들로서 밤에 잠자고 밤에 술취 하는데 우리는 낮에 속하였으니 맑은 정신을 가지고(근신하고) 믿음과 사랑의 흉배를 붙이고 구원의 소망의 투구를 쓰자라고 바울이 강하게 권면하고 있다. 그런데 우리가 주목해 보아야 할 것은 바울은 데살로니가인들을 권면하면서 믿음, 소망, 사랑으로 그들의 기독교적 실존을 말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들 믿음, 소망, 사랑은 대표적으로 고전13장에서 언급되어 지는 것인데 초기 편지인 데살로니가 전서에서도 바울은 이미 그리스도인의 실존을 믿음, 소망, 사랑으로 정의 내리고 있다는 것을 우리가 주목할 만하다. 그러므로 우리는 항상 이 관점으로 바울 서신을 볼 필요가 있다. 즉 믿음을 지키고 사랑을 행하고 정의를 실천하고 전도를 열심히 하고 소망을 견지하면서 살아야 하는 성도의 삶 그것이 얼마나 우리가 신중하게 싸워야 할 영적 싸움인가를 바울은 항상 인식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바울은 언제나 그리스도의 승리를 확신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성령에 힘입어 승리하는 자는 진정 사단의 유혹과 죄로부터 자유하여야 함을 말하고 있다. 이때 ‘자유함’이란 우리의 순간순간의 윤리적 도덕적 판단과 선택에서 사단을 뜻을 물리치고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의 이중계명을 지킬 것에 대한 요구, 즉 하나님을 경외하며 의지하고 이웃을 섬기고 사랑하라는 그 계명의 뜻에 따라 선택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그 순간이 바로 우리가 영적 전쟁을 하는 순간이며 그때 우리가 믿음을 견지하고 사랑을 실천하는 것이 바로 사탄을 이기는 것이다.
그 다음에 9-10을 8절과 같이 할 수 있는 근본적인 동인으로 우리가 이해해야 한다. 즉 하나님이 우리를 세우신 것은 하나님이 우리를 하나님의 진노에 이르도록 하기 위해서가 아니고 오직 우리를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예수 그리스도의 우리 죄를 대속하시는 그 대속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도록 예정하신 것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10절에서는 또 한번의 ‘잔다?는 말이 나오는데 이 단어가 여기서는 더 이상 그림이 아니고 자연적으로 잠자는 것을 말한다. 즉 자나깨나 항상 자기 함께 살게 하셨다는 말이다.
11절에서 피차 권면하고 피차 덕을 세운다고 할 때 이 말은 다른 말로 서로를 세워올린다는 말인데 이것은 교회공동체를 세워 올린다는 말과 같은 뜻이다. 여기서 바울이 전제하고 있는 것은 교회를 하나님의 성전으로 보는 것이다. 그래서 성전을 건축해 올리듯이 그리스도인의 공동체가 믿음과 성화의 과정을 통하여 든든히 세워 올려질 수 있도록 서로 권면하여 세우라는 것이다. 바울은 고후10:8 12:19 13:10등에서 스스로 고백하길 자기의 사도로서의 사명은 다른 것이 아니라 교회를 세워 올리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런데 여기 본문에서는 교회를 세워 올리는 것은 사도들이나 목사들만 하는 것이 아니고 모든 교회의 구성원들이 함께 서로 믿음을 북돋우고 사랑의 실천을 서로 권면하고 소망을 굳게 견지하도록 함으로 교회공동체를 세워 올린다고 말하고 있다.
적용점
본문의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가 재림하는 주의 날의 의식하지 못하고 평안하다 안전하다 하는 불신자들에게는 엄청난 경고의 말씀을 내포하고 있다. 그들에게는 주의 날, 심판의 날이 도둑같이 임하는 그날 파멸과 멸망과 엄습할 것이다.
그러나 반면에 그리스도인들, 낮에 속한 자들에게는 엄청난 위안과 안도를 주는 말씀이다. 바울의 데살로니가 성도들에게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이다. “너희들은 주의 날이 언제 오든지 간에 그것 때문에 벌벌 떨 것이 아니다. 그날은 성도들에게 구원의 완성의 날이지 심판의 날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성도들에게 필요한 것이 있다. 그것은 깨어 맑은 정신을 유지하는 것이다. 그런데 성도들이 깨어있다는 것, 대비한다는 것은 주의 재림의 표징이 무엇인가 두려워 떨며 때와 시기를 계산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도리어 그런 태도는 신앙과 믿음이 없는 태도로 책망 받아 마땅하다.” 바울이 우리에게 권면하며 말하는 것은 우리는 주의 날에 속한 자들로서 마땅히 성도의 안도와 기쁨과 평안을 누리라고 말하는 것이다. 주의 날은 그 날이 언제이든지 간에 우리에게는 구원의 날일 뿐이다. 우리가 할 일은 지금 깨어나 맑은 정신으로 이 세상 사람들과 같은 상태에 떨어지지 않는 것이다. 그래서 믿음 소망 사랑의 그리스도인들의 실존적 삶을 계속해서 살아가고 그것을 지키기 위해서 절제하고 이 세상의 정신을 따라 살지 말 것이 촉구되고 있다.
적용점
바울이 그의 서신서에서 항상 강조하고 있는 것은 그리스도인의 삶은 안도와 기쁨을 누리는 삶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마치 아기가 엄마 품에서 아무 근심 걱정 없이 안도하고 만족하고 기뻐하는 상태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사실 구원 얻은 성도는 마땅히 이런 안도함이 있어야 한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구원의 영역에 있는 우리는 종말에 그리스도의 속죄의 제사와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중보의 기도에 의해서 하나님의 진노로부터 해방된다는 확신 가운데서 거하며 또한 종말에 주의 날이 언제 오든지 간에 그 날은 우리에게 제일 좋고 유리한 날에 그 날이 임할터이므로 그 날에 대해서는 우리가 신경 쓸 것 없이 확신과 기쁨을 가지고 살아가야만 하는 것이다. 우리는 불안에 떠는 삶이 아닌 것이다.
만약 우리가 이 안도와 기쁨을 누리는 삶이 없으면 우리는 벌벌 떨면서 아마도 살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우리가 살아야 할 삶이 아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의 복음을 전파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죽음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의 진노에서 구원받음을 선포해야 한다. 그리고 우리 스스로 이것을 누려야 한다. 이것이 없으면 우리 믿는 사람이 더 여유가 없고 더 마음이 옹졸하고 더 가시 같아 질 수 있다. 물론 이 안도와 기쁨이 지나쳐서 방종에 흐르면 안 된다. 우리가 깨어 맑은 정신을 가져야 하는 것이다. 이 주 안에서의 안도와 기쁨을 가지고 깨어 맑은 정신으로 기도하는 것, 이것이 균형을 이룰 때에 온전한 신앙의 성숙이 있는 것이다. 이 두 가지 요소가 상호 긴장가운데 있을 때 건전한 신앙을 가질 수 있다. 본문은 바로 그것을 우리에게 가르쳐주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