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의 봄을 보셨나요?
실화를 바탕으로 한 것이고, 결말을 아는 내용이어서, 보기를 미뤘었다.
중학생인 막내에게 요즘에 뭐가 가장 인기있는지 물어보며, 같이 보자니까
서울의봄이 가장 인기있고, 자기도 봤는데 재미있다고 권했습니다.
자기 친구들 중에 안본 친구가 없을 것이라고.
그래서 화날 것을 감수하며 친구와 봤습니다.
재미있게 잘 만들었네요.
박진감도 있고, …….
(우리나라의 일이 아니라면, 그냥 재미있게 볼만한 영화)
영화를 보고 달라진 생각.
어쩔수없이 군부독재를 경험할 수밖에 없었다 생각했었는데,
당시 권력자들에 의해서 바로잡힐수있는 기회가 많았다는 내용입니다.
국방장관 등 몇몇이 제대로만 대처했어도, 서울의 봄이 왔을수도 있겠다는 것입니다.
저는 군대를 가지 않았습니다.
부선망 독자로 6개월 방위가 정해졌었지만, 중이염 때문에 방위도 안했습니다.
그런데, 저는 군인에게 개머리판으로 여러 번 맞았습니다.
고등학교 졸업하자마자 농사 짓겠다고, 농사일을 시작했는데
우르과이라운드가 발효되면서 농산물가격(특히 잣값)이 폭락하는 모습을 보면서 농사를 포기하고 1980년초 서울로 왔습니다.
취직이 안돼서 빈둥빈둥 하던 때,
친구들과 탁구를 치고 나오는데, 군인들이 쫙 깔려서 검문.
신분증 있던 친구들은 보내고, 없는 나는 경찰서로 연행.
친구들에게 나의 신분을 묻지도 않고, 그냥 연행한다.
이후 경찰서에서 2박을 하며, 총 개머리판으로, 주멱으로, 발길질로 …..
심지어 잡아들인 나 같은 사람들에게 도시락 장사까지 했었다.
경찰서 안에 학교교실 정도크기의 수많은 방들이 있었고,
방마다 1백여명씩 분리 수용.
교실크기의 반 정도는 검거된 사람들을 한쪽 벽을 향해서 쪼그려 앉히고, 군인들이 뒤에서 감시하는 형태.
도시락 값이 2,500원이라며, 사먹을 사람 손 들라고 했다.
내게는 5000원이 있어서, 손을 들었다.
손을 든 사람들에게 도시락을 나눠주고,
손 안든 사람들에게도 도시락을 줬다.
차이는
꽁보리밥과 50:50 쌀보리 혼식.
반찬은 단무지 똑같다.
미리 말했으면, 돈주고 사먹을 사람 없었을 것인데,
돈이 있어야 식사할 수 있는 것처럼 해서, 도시락을 2,500원에 팔았다.
(수요를 강제로 창출해서, 장사하는 기막힌 수완. 이후에는 모두에게 꽁보리밥을 그냥 줬다.
사먹을 사람이 없을테니까)
2박3일 동안
쪼그려 앉아서 보내고,
잠은 쪼그려 앉은 상태로, 1:1 등대게 하고, 머리를 등댄사람의 왼쪽어께에 얹은 상태에서 잠을 자란다.
수시로 1명씩 불러서, 이것저것 살피며 구타.
냐도 개머리판으로 여러 대 맞았다.
선 상태에서 가슴을 맞으면, 쓰러진다. 일어나 ‘퍽’,
일어나 ‘퍽’……
2일을 보내고
경찰이 와서 조서를 쓴다.
경찰 2명이 의자에 앉고, 경찰의 무릎 앞에, 나는 무릎꿇고 앉은 상태.
경찰이 조서를 쓴다.
‘불량한 복장에, 유흥가를 배회….’
“유흥가 배회가 아니고, 친구형이 운영하는 탁구장…” 퍽퍽퍽
불러주는대로 인정하지 않으면, 손과 발이 날라온다.
잡혀온 사람들은 모두 삼청교육대로 간다는 소리를 들었기 때문에,
수없이 맞으면서
‘친구 형이 운영하는 탁구장에서 탁구치고, 집으로 가던 중’
이라는 내용의 조서를 꾸몄다.
조서 꾸민 후 두어시간 지나서, 훈방.
억울한 마음에 불법감금에 대해서, 어찌해볼 방법을 알아봤지만, 방법이 없단다.
1212 당시 조금만 운이 좋았어도
내가 개머리판으로 맞지 않았을 것을
조금만 운이 좋았어도
대학생일 때, 최루탄 가루를 마시지 않았을 것이라는 아쉬움.
서울의봄 영화를 본 이후의 생각입니다.
군대를 전혀 경험하지 못한 내가 개머리판에 맞아서 넘어진 경험이 있습니다.
특히
군인들을 동원해서 사람들 잡아다가
5:5 보리밥, 단무지반찬을 2,500원에 장사하는
기막힌 장사수완을 경험했습니다.
(참고로 1986년 학생식당에서
돈까스 500원, 국수 250원이었습니다.
500원짜리보다 못한 도시락을 2,500원에 사먹었습니다.)
이것은 제가 1980년에 경험한 내용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