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木馬와 淑女의 시인, 박인환(朴寅煥)!
덕향문학 편집국
박인환 시인 / 해방 이후 「살아 있는 것이 있다면」, 「밤의 미매장」, 「목마와 숙녀」 등을 저술한 시인. 본관은 밀양(密陽). 강원도 인제 출신. 아버지 박광선(朴光善)과 어머니 함숙형(咸淑亨)의 4남 2녀 중 장남이다.
1939년서울 덕수공립소학교를 졸업하고 경기공립중학교에 입학하였으나 1941년 자퇴하고, 한성학교를 거쳐 1944년 황해도 재령의 명신중학교를 졸업하였다. 그 해 평양의학전문학교에 입학하였으나 8·15광복으로 학업을 중단하였다.
그 뒤 상경하여 마리서사(茉莉書肆)라는 서점을 경영하면서 김광균(金光均)·이한직(李漢稷)·김수영(金洙暎)·김경린(金璟麟)·오장환(吳章煥) 등과 친교를 맺기도 하였다. 1948년 서점을 그만두면서 이정숙(李丁淑)과 혼인하였다. 그 해에 자유신문사, 이듬해에 경향신문사에 입사하여 기자로 근무하기도 하였다.
1948년에는 김병욱(金秉旭)·김경린 등과 동인지 『신시론(新詩論)』을 발간하였으며, 1950년에는 김차영(金次榮)·김규동(金奎東)·이봉래(李奉來) 등과 피난지 부산에서 동인 ‘후반기(後半紀)’를 결성하여 모더니즘운동을 전개하기도 하였다. 1951년에는 육군소속 종군작가단에 참여한 바 있고, 1955년에는 직장인 대한해운공사의 일 관계로 남해호(南海號) 사무장의 임무를 띠고 미국에 다녀오기도 하였다. 1955년 첫 시집 『박인환선시집(朴寅煥選詩集)』을 낸 뒤 이듬해에 심장마비로 죽었다.
그의 시작 활동은 1946년에 시 「거리」를 『국제신보(國際新報)』에 발표하면서부터 시작되었다. 이어 1947년에는 시 「남풍」, 영화평론 「아메리카 영화시론」을 『신천지(新天地)』에, 1948년에는 시 「지하실(地下室)」을 『민성(民聲)』에 발표하면서부터 본격적인 시작 활동이 전개되었다.
특히, 1949년 김수영·김경린·양병식(梁秉植)·임호권(林虎權) 등과 함께 낸 합동시집 『새로운 도시와 시민들의 합창』은 광복 후 본격적인 시인들의 등장을 알려주는 신호가 되었다. 1950년 후반기 동인으로 활동하면서 「살아 있는 것이 있다면」·「밤의 미매장(未埋藏)」·「목마와 숙녀」 등을 발표하였는데, 이런 작품들은 도시문명의 우울과 불안을 감상적인 시풍으로 노래하여 주목을 끌었다.
1955년에 발간된 『박인환선시집』에 그의 시작품이 망라되어 있으며 특히 「목마와 숙녀」는 대표작으로 꼽히는 작품으로서 우울과 고독 등 도시적 서정과 시대적 고뇌를 노래하고 있다. 1956년 작고 1주일 전에 쓰여진 「세월이 가면」은 노래로 만들어져 널리 불리기도 하였다. 1976년 그의 20주기를 맞아 장남 박세형(朴世馨)이 『목마와 숙녀』를 간행하였다.
[네이버 지식백과] 박인환 [朴寅煥]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 박인환 시인의 의 삶 (1926 ~ 1945) ◈
1926년(1세)
8월 15일, 강원도 인제군 인제면 상동리 159번지에서 출생父 박광선(朴光善)과 母 함숙형(咸淑亨)의 4남 2녀 중 장남으로 태어 남.
1933년(8세)
인제공립보통학교 입학.
1936년(11세)
서울 종로구 내수동으로 이사, 얼마 후 종로구 원서동 134번지로 옮김.덕수공립보통학교 4학년 편입.
1939년(14세)
덕수공립보통학교 졸업. 석차는 66명 중 7등, 교장 소견은 최적(最適)이었음. 경기공립중학교 (5년제) 입학. 학업보다 영화, 문학, 독서 등에 심취 함.
1941년(16세)
경기공립중학교 자퇴. 한성중학교 야간부 전학.
1942년(17세)
아버지의 친지가 있는 황해도 재령으로 이주, 기독교 재단의 명신중학교 4학년 편입.
1944년(19세)
명신중학교 졸업. 관립 평양의학전문학교(3년제) 입학.
1945년(20세)
8. 15 광복을 맞아 학교를 중퇴하고 상경. 종로 3가 2번지 낙원동 입구에 서점 ‘마리서사(茉莉書舍)’개업.
1945년(20세)
8. 15 광복을 맞아 학교를 중퇴하고 상경.
종로 3가 2번지 낙원동 입구에 서점 ‘마리서사(茉莉書舍)’개업.
1946년(21세)
12월, 『국제신보』 주간 송지영의 추천으로 시 「거리」 발표하며 등단.
1948년(23세)
마리서사(茉莉書舍)’ 폐업.
4월, 덕수궁에서 한 살 연하의 문학소녀 이정숙(李丁淑)과 결혼.
『자유신문사』 입사, 문화부 기자.
12월 8일, 장남 세형(世馨) 태어 남.
1949년(24세)
1월,『경향신문』 입사.
1950년(25세)
6월 25일, 한국전쟁 일어 남. 피난 가지 못하고 9·28 수복 때까지 지하생활.
9월 25일, 딸 세화(世華) 출생.
12월 8일, 가족과 함께 열차편으로 대구로 피난.
1951년(26세)
5월, 육군 소속 종군 작가단에 참여, 종군기자로 활동.
부산 광복동 골목에서 두 평짜리 방을 얻어 피난 생활.
1952년(27세)
『경향신문사』 퇴직하고 대한해운공사 입사.
1953년(28세)
5월 31일, 차남 세곤(世崑) 출생.
7월, 휴전협정이 타결되자 서울 옛집으로 돌아오다.
1955년(30세)
3월 5일, 대한해운공사의 상선 ‘남해호’ 사무장으로 미국 여행.
4월 10일, 귀국 후 『조선일보』에 기행문「19일 간의 아메리카」 기고.
대한해운공사 퇴사.
1956년(31세)
3월 20일, 오후 9시 자택에서 심장마비로 사망.
3월 22일, 망우리 공동묘지에 안장.
9월 19일, 추석에 문우들이 망우리 공동묘지에‘박인환 시비’ 건립.
◈ 박인환 시인의 작품 연보 ◈
1946년(21세)
12월, 『국제신보』 주간 송지영의 추천으로 시 「거리」 발표하며 등단.
1947년(22세)
『신천지』 에 시 「남풍」 발표.
1948년(23세)
4월 20일, 양병식, 김차영, 김규동, 김수영, 김병욱 등과 동인지『신시론』 제1집 발간.
『세계일보』에 「나의 생애에 흐르는 시간들」, 『민성』에 「지하실」, 『신천지』5월호에 산문「아메리카의 영화시론」,
『신천지』10월호 「사르트르와 실존주의」 등 발표.
1949년(24세)
4월 5일, 김경린, 김수영, 임호권, 양병식과 5인 합동시집『새로운 도시와 시민들의 합창』발간.
시 「장미의 온도」「열차」 「지하실」등 발표.
4월, 『민성』 지에 시 「정신의 행방을 찾아」 발표.
7월 16일,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내무부 치안국에 체포되었다가 석방.
김경린, 김규동, 김차영, 이봉래, 조향 등과 ‘후반기’ 동인 결성.
1950년(25세)
1월 8일, 명동 시공관에서 국민보도연맹이 주최하는 ‘제1회 국민예술제전’에서 시낭송.
1951년(26세)
시 「신호탄」「고향에 가서」「문제되는 것」「벽」등 발표.
1952년(27세)
5월 15일, 존 스타인벡의 기행문 『소련의 내막』 번역해서 간행.
6월 16일, 『주간국제』의 ‘후반기 문예 특집’에
평론 「현대시의 불행한 단면」 발표.
시「살아 있는 것이 있다면」「어떠한 날까지」「부드러운 목소리로 이야기 할 때」발표.
1953년(28세)
3월, ‘후반기’ 동인과 함께 ‘이상(李箱) 추모의 밤’ 개최 부산에서 ‘후반기’ 동인 해체.
1954년(29세)
1월, 이진섭, 오종식, 유두연, 이봉래, 허백년, 김규동과 ‘한국영화평론가협회’ 발족.
대동신문 문화부장 역임.
1955년(30세)
3월 5일, 대한해운공사의 상선 ‘남해호’ 사무장으로 미국 여행.
4월 10일, 귀국 후 『조선일보』에 기행문「19일 간의 아메리카」기고.
10월 1일, 시「목마와 숙녀」를 『시작』에 발표.
10월 9일, 『시작』지에서 주최하는 ‘제1회 시낭독회’에 「목마와 숙녀」낭독.
10월 15일, 시집『박인환 선시집』(산호장) 발간.
아시아문화재단에서 주관하는 ‘자유문학상’ 후보에 오름
미국의 극작가 테네시 윌리엄스(Tennessee Williams, 1911~1983)의 희곡「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를 번역하여 시공관에서 신협(新協)의 의해 공연.
1956년(31세)
1월 27일, 명동 동방문화회관에서『박인환 선시집』출판기념회 개최.
3월 17일, ‘이상 추모의 밤’ 개최
시「세월이 가면」「옛날의 사람들에게」「죽은 아포롱」발표.
3월 20일, 오후 9시 자택에서 심장마비로 사망.
1959년(3주기)
10월 10일, 미국의 윌러 캐더(Willa Cather)의 장편소설『이별』번역, 간행.
1976년 (20주기)
장남 박세형이 시집 『목마와 숙녀』(근역서재) 출간.
1982년 (26주기)
박인환의 문우 김규동, 김경린, 이봉구, 이봉래 시인 등이 추모 문집 『세월이 가면』 (근역서재) 출간.
1983년 (27주기)
윤석산, 『박인환평전』(영학) 출간.
강계순, 평전『아! 박인환』(문학예술사) 출간.
1986년 (30주기)
『박인환전집』(문학세계사) 출간.
2000년 (44주기)
인제 내린문학회에서 제1회 ‘박인환문학제’ 개최
-이후 제4회(2003년)부터 한국문인협회 인제군지부에서 개최
‘박인환문학상’제정 (인제군, 내린문학회, 계간 『시현실』공동)
(제1회 수상자 김지향 시인) -이후 제9회(2008년)까지 공동주관 하다가 제10회(2009년)부터 계간 『시현실』 단독으로 주관.
김영철, 『한국 전후 문학의 기수-박인환』(건국대 출판부) 출간.
2005년(49주기)
『한국대표시인 101인 선집-박인환』(문학사상사) 출간.
2006년(50주기)
문승묵, 『박인환전집-사랑은 가고 과거는 남는 것』(도서출판 예옥) 출간.
맹문재, 『박인환 깊이 읽기』(서정시학) 출간.
2009년 (53주기)
맹문재, 『박인환전집』(실천문학사) 발간.
2014년 (58주기)
7월 25일, 부인 이정숙 여사 별세.
2019년 (63주기)
맹문재, 『박인환번역전집』(푸른사상) 출간.
2020년 (64주기)
인제군, 인제군문화재단, 박인환시인기념사업추진위원회, 경향신문사 공동으로 ‘박인환상’ 제정(시부문, 학술부문)
◈ 박인환 시인의 작품세계 ◈
[박인환 시인의 시 세계]
박인환 시인의 시 세계는 한국전쟁을 분기점으로 두 가지 양상을 띤다. 김경린, 김경희, 김병욱, 임호권과 ‘신시론’ 동인을 결성한 뒤 양병식, 김수영 등과 함께 모더니즘 운동을 추구하면서 진정한 민족 국가 건설을 지향한 해방기의 시 세계와, 전쟁이 가져온 폭력의 참상을 고발하면서 상실감과 비애감을 노래한 한국전쟁 이후의 시 세계로 구성되는 것이다. 해방기에는 「인도네시아 인민에게 주는 시」, 「남풍」 등의 작품에서 볼 수 있듯이 약소국가의 민중들이 제국주의 국가들의 식민지 지배에 적극적으로 항전해 민족 해방을 이루기를 응원했다. “밤이 가까울수록 / 성조기가 퍼덕이는”(「인천항」) 해방기의 인천항 모습이 제국주의 국가들의 지배를 받아온 홍콩의 상황과 다르지 않다고 경계한 것도 같은 인식으로 볼 수 있다. 박인환 시인은 1955년 『선시집』(산호장)을 간행했는데, 시집의 후기에서 “내가 이 세상에 태어나고 성장해 온 그 어떠한 시대보다 혼란하였으며 정신적으로 고통을 준 것이었다.”라고 토로했듯이 한국전쟁에 큰 충격을 받았다. 그렇지만 그는 전쟁의 아픔과 슬픔에 매몰되지 않고 극복 의지를 가지고 시를 썼다. 시를 쓴다는 것은 자신이 사회적 존재로서 의지할 수 있는 처음이자 마지막 행동이라는 신념으로 동시대의 시인들 중에서 가장 전위적인 위치에 섰던 것이다. 그의 불후의 명작인 「목마와 숙녀」, 「검은 강」, 「세월이 가면」 등이 그 산물이다.
[박인환 시인과 인제]
1926년 8월 15일 강원도 인제군 인제면 상동리 159번지에서 태어나 인제공립보통학교를 3학년까지 다니다가 서울로 이사한 박인환은 “어질고 가난한 내 고향 사람”들의 “근성을 나는 배반 할 수가 없다”(「원시림에 새소리, 금강은 국토의 자랑」)라고 밝혔듯이 뿌리 의식이 강했다. 1년에 한두 번 씩 마을에 순회 공연극단, 학교운동회, 전근 가는 담임 선생님을 20리 길까지 전송한 일, 애국가를 가르쳐준 목사님 등 많은 추억을 품고 있었는데, 그 중심에는 가난하지만 순박하고 인정 많은 고향 사람들이 있었다. “나는 가난한 고장/인제/봄이여/빨리 오거라.”(「인제」)라고 노래한데서도 여실히 볼 수 있다. 박인환 시인의 ‘가난’인식은 주목된다. 많은 독자들은 박인환 시인을 명동의 거리를 주름잡은 멋쟁이라고 떠올리지만, 실제로는 끼니를 거를 정도로 가난했다. 그렇지만 그는 가난에 주눅 들지 않고 멋있는 시인으로 살았다. 그가 추구한 멋있는 삶이란 대단한 일이 아니라 가난하지만 순박하고 인정 많은 고향 사람들처럼 살아가는 것이었다. 그는 가난 때문에 31세에 세상을 떠났지만, 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가난에 주눅 들지 않았다. 그리하여 그의 시는 오늘날까지 가난하지 않은 것이다.
[영화평론가 박인환]
박인환 시인은 1954년 오종식, 허백년, 유듀연, 이봉래, 김규동 등과 함께 한국영화평론가협회를 발족한 뒤 30편 이상의 영화평론을 발표했다. 국내 영화뿐만 아니라 미국, 영국, 프랑스, 이탈리아 등에서 제작되고 상연된 수백 편의 영화를 소개했고, 한국 영화계에 다양한 의견을 개진했다. 그가 영화평론을 열정적으로 쓴 것은 영화를 새로운 시대를 이끄는 모더니즘 예술의 거울로 인식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그는 영화감독의 역량이 부족하고 촬영장 하나 없고 촬영 시설이 그지없이 열악한 국내 영화계의 현실을 직시하면서도 감싸 안았다. 영화인들의 열정적인 헌신과 재능을 응원하면서 발전 가능성을 전망한 것이다.
[번역가 박인환]
박인환 시인은 새로운 세계인식으로 현대사회를 반영하고자 외국 작품들을 번역했다. 미국의 소설가인 존 스타인벡이 소련을 방문한 뒤 발표한 『소련의 내막』 등 전쟁에 반대하는 작품들, 음악인의 열정적인 삶을 그린 윌러 캐더의 장편소설인 『이별』 등 예술 세계를 추구하는 작품들, 어니스트 헤밍웨이의 「바다의 살인」을 비롯한 추리 소설 등을 감각적인 문체로 옮긴 것이다. 뿐만 아니라 그는 모더니즘 문학을 탐구하기 위해 토머스 스턴 엘리엇, 스티븐 스펜더, 위스턴 휴 오든 등의 시론을 적극적으로 수용했고, 장 폴 스르트르의 실존주의, 버지니아 울프의 작품 세계에도 깊은 관심을 가졌다.
목마와 숙녀
박인환
한 잔의 술을 마시고
우리는 버지니아 울프의 생애와
목마를 타고 떠난 숙녀의 옷자락을 이야기한다
목마는 주인을 버리고 거저 방울 소리만 울리며
가을 속으로 떠났다 술병에서 별이 떨어진다
상심한 별은 내 가슴에 가벼웁게 부쉬진다
그러한 잠시 내가 알던 소녀는
정원의 초목 옆에서 자라고
문학이 죽고 인생이 죽고
사랑의 진리마저 애증의 그림자를 버릴 때
목마를 탄 사랑의 사람은 보이지 앉는다
세월은 가고 오는 것
한때는 고립을 피하여 시들어 가고
이제 우리는 작별을 하여야 한다
술병이 바람에 쓰러지는 소리를 들으며
늙은 여류 작가의 눈을 바라다보아야 한다
등대에
불이 보이지 않아도
그저 간직한 페시미즘의 미래를 위하여
우리는 처량한 목마 소리를 기억하여야 한다
모든 것이 떠나든 죽든
그저 가슴에 남은 희미한 의식을 붙잡고
우리는 버지니아 울프의 서러운 이야기를 들어야 한다
두 개의 바위틈을 지나 청춘을 찾는 뱀과 같이
눈을 뜨고 한잔의 술을 마셔야 한다
인생은 외롭지도 않고
그저 잡지의 표지처럼 통속하거늘
한탄할 그 무엇이 무서워서 우리는 떠나는 것일까
목마는 하늘에 있고
방울 소리는 귓전에 철렁거리는데
가을바람 소리는
내 쓰러진 술병 속에서 목메어 우는데
세월이 가면
박인환
지금 그 사람의 이름은 잊었지만
그의 눈동자 입술은
내 가슴에 있어.
바람이 불고
비가 올 때도
나는 저 유리창 밖
가로등 그늘의 밤을 잊지 못하지
사랑은 가고
과거는 남는 것
여름날의 호숫가
가을의 공원
그 벤치 위에
나뭇잎은 떨어지고
나뭇잎은 흙이 되고
나뭇잎에 덮여서
우리들 사랑이 사라진다 해도
지금 그 사람 이름은 잊었지만
그의 눈동자 입술은
내 가슴에 있어
내 서늘한 가슴에 있건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