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0년 3월 15일 대선 앞두고 폭풍전야
이승만 독재 항거 전국 첫 고교생 시국 벽보
대학생 혈서는 집단 혈서로 확산
선거 날 낮 12시 45분 부정선거 첫 저항
데모노래 없던 시절, 군가 부르며 哭聲
‘4ㆍ19혁명의 시원지는 광주’라는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있는가?
이야기는 1960년 3월15일로 거슬러 올라간다.
광주의 ‘민주주의 장송데모’는 15일 오후 12시 45분경에 시작되었다. 선거를 포기한 민주당참관인 70여명과 100여명의 당원이 장장을 두르고 백건을 쓰고서 민주주의와 자유를 외치는 가운데 천여 명의 군중이 이들을 따랐다. 도청으로 향하는 도중 YMCA앞에서는 다급히 출동한 무장경찰대 300여명과 시위대간의 유혈이 낭자한 충돌이 벌어졌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 4월 11일, 그 동안 행방불명이 된 마산상고생 김주열이 눈에 최류탄이 박힌 채 무참하게 살해된 시체로 바다에서 발견되자 저항은 전국적으로 확대되기에 이른다. 이처럼 3.15의거는 4.19혁명의 실질적 도화선이었으며, 전국적 봉기의 출발점이었다. 자유와 민주주의에 대한 전 국민의 저항이었기에 수많은 희생 또한 수반되었다. 광주의 ‘민주주의 장송데모’에 참여한 시민들의 피도 이러한 희생 속에 함께 흐르고 있다.
광주의 ‘민주주의 장송데모’ 역시 민주당이 앞장을 섰고, 시민들이 이에 동참하여 일어난 역사적 사실이다. 정치인들이 앞장섰다고 해서 폄하되거나 묻혀서는 안 된다. 3.15의거의 역사 속에 온전히 함께 기록되어야 한다.
정·부통령선거일인 3월 15일 낮 12시45분, 장기집권을 획책하며 부정선거를 자행한 자유당 정권에 대한 첫 저항이 광주 금남로에서 일어났다.‘곡(哭) 민주주의 장송’데모다.
앞서 이날 오전 9시40분께 상무대 화학학교 사병이 조직적인 부정선거에 참을 수 없어 이를 폭로하는 기자회견을 했다.‘화학학교 사병들이 투표용지는 손에 쥐어보았으나 기표는 교장과 부교장이 하고 투표함 앞에 참모장이 앉아 투표용지를 받아서 접어 넣었다. 이 사병의 눈물의 폭로는 참관인과 민주당원, 시민들의 분노를 일깨웠다. 선거사무실에 속속들이 모인 민주당원 200여명은 백지를 사다가 백두건을 만들어 쓰고‘哭 民主主義 葬送’이라는 플래카드를 2개 만들어 장송 데모를 시작했다. 이때가 낮 12시 45분께였다. 민주당원들이 선두에 서고 그 뒤로 자동차가 천천히 따르며‘아이고! 아이고∼ 민주주의 죽었네.’라고 외치며 곡을 시작했다. 대열은 전남도청 경찰국을 향했다. 순식간에 1200여명이 합류,‘민주주의 죽었네!’‘자유당 정부는 물러가라!’고 외치며 곡을 해 거리는 온통 초상집처럼 울음바다로 변했고, 시민들의 아우성은 하늘을 찔렀다. 45분가량 지난 오후 1시30분께 검은 제복의 무장경찰관이 몰려와 충돌이 시작됐다. 무장경찰은 무작정 두들겨 팼다.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았다. 10여명이 부상했고, 30여명이 연행됐다.
당시 전남일보(현 광주일보, 1960년 3월17일자 3면)는 이렇게 보도했다.
“정ㆍ부통령선거일인 15일 민주당 전남도당부에서는 각종 부정사실을 지적 투표소 참관인의 철수를 지시한 후 이날 12시 50분경‘곡(哭) 민주주의’라는 만장을 선두로 흰 두건을 쓴 약 50여 당원들이 짚 차와 트럭 그리고 일부는 도보로 이필호 의원이 앞장서서 금남로 소재 동당 부통령선거사무소를 출발, 도청 쪽으로 데모하였다.‘민주주의는 죽었다!’고 소리 높이 외치며 눈물을 흘리면서 곡성을 올린 이들이 법원 앞을 조금 지나자 경찰관과 백차가 출동 제지하였으나, 이들은 억세게 데모를 계속 경찰국장 관사 앞에 이르렀다.
…이날 금남로 거리에는 구경군중들이 즐비하게 줄을 이어 있다가 물세례를 받기도 했다.…
광주 3ㆍ15 민주주의 장송 데모는 자유당 정권의 3ㆍ15 부정선거에 항거해 선거 무효를 선언한 전국 최초의 시위로, 광주 4ㆍ19민주혁명의 출발점이었다. 또 3시간 뒤 오후 3시 43분께 마산상고 김주열 군의 주검으로 확대된 마산 시민봉기로 이어졌고, 4ㆍ18 고려대생들의 유혈사태를 불러 4ㆍ19민주혁명의 도화선이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