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 오월이 오나 보다
가현 /김미남
일상은 무미건조해도
눈길 머무는 곳은 화사하다.
반란의 꽃들이 뜨락에서 웃고
스산한 계절의 윤회는 서럽다.
여물어 가는 시간의 한켠에 서서
빛바랜 목련의 변신을 서러워한다.
사월아!
서러워 마라
다시 만나는 날에
잎이 꽃이 되고
꽃이 잎이 되어
다시 만나자.
2. 허기진 일상(日常)
가현 / 김미남
의식주 문제의 노예가 된다는 것은
허기진 일상의 의자에 앉아
헛기침을 하는 것이다.
詩를 논하고
隨筆을 논해도
나의 오늘은 온통 허기로
동여매어진다.
개와 늑대의 시간이 올 때까지
천변을 거닐며
허기를 쫓는다.
새날이 와도 매양
그러그러한 일상에 오늘은
詩로 허기진 마음을
달래 본다.
3. 실버센터의 하루
가현 / 김미남
우리 센터의 어르신들
그들이 나를 天使라고 부른다.
염치없지만 듣다 보니
내가 천사인 것 같기도 하다.
맡긴 돈이 없어도 무얼 사 달라하고
어린아이 엄마 찾듯 내 바짓가랑이를 붙든다.
사랑받기 위해 태어나
사랑을 구걸하는
사랑의 浪人이 되어버린 歲月
연민과 수고로
내 일상은 땀으로 찌들고
억지 천사가 된다.
멀리서 들려오는 젖은 목소리
너도, 내가 될 날이 멀지 않았다.
4. 행복의 조건
가현 / 김미남
자전거 뒷자리에 도시락 싣고
출근하는 남편이 있고
工夫 못해도 밥상 앞에서
씩씩한 아들 녀석 있다.
목욕탕에서 휜 허리 등을 내미는 시어머니
이태리타월에 비누 거품 묻혀
벅벅 문지르다 보면
이 나이에 뭐 하나 하다가도
"섬집아이" 동요가 허밍 되어 나온다.
돈 많아서 걱정, 살쪄서 걱정하는
세상에 얻은 해탈
이승이 행복인데
더 무얼 바라랴
하나님 부처님
이만큼 사는 걸 감사합니다.
5. 화해의 저녁
가현 / 김미남
활기찬 어느 아침
그녀가 사직서를 내밀었다
괜히 웃음이 나온다
대표가 아침부터 무슨 좋은 일 있냐고 묻는다
저녁밥을 먹자 한다
수육에 칼국수로
하루의 시름을 잊는다
시답잖은 이야기가
응어리진 마음을 녹이고
미움이 관용이 되는 순간이다
문 닫은 카페 의자에 앉아
그동안 보지 못했던
미나릿길을 본다
사람이 보인다
그녀마저 이뻐 보인다
미칸
트라이앵글
파키라···
물꽂이 이야기로
공통분모를 찾고
시시비비는 가리지 않아도
어느새 마음은 하나
까만 비닐에 모시떡 하나 담아
그녀에게 주고 나도 담는다
아픈 배를 안고
마음은 벌써 집이다
해는 서산에 비스듬히 누워
하품하면서도
나를 보고 웃는다
【김미남 시인 등단 심사평】
[메타포로 만들어진 정(情)과 한(恨)!]
시는 생명 언어다. 시어(詩語)를 향한 시인의 구애(救愛)란 절절한 기도 같은 것이다. 매너리즘에 빠저 쓰다만 원고지를 북북 찢어 쓰레기통을 채우고 그래도 남아서 불쏘시개로 써야 했던 시절을 반추하며 컴퓨터 자판 위를 유영하는 현실 속에서 꿩의 깃털로 장식된 펜대를 잉크병 속에 담아 원고지를 채우던 낭만은 사라졌어도 고치고 또 고치며 시간과 경비를 절약하기도 하고 시제를 AI AI에게 맡겨 창작 문학의 틀을 짜내는 시대의 변천에 적응해야 할 종래의 창작 기법이 위기에 몰려 있기도 하다. 시 창작(詩 創作)의 포스트 모더니즘으로 인간의 지성과 감성이 함몰되기 시작하는 것이나 아닌지 두렵기만 하다.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시심(詩心)이 인간지능을 탑재했다는 기계의 기능으로 유린될 수만은 없다. 시(詩)는 사람과 사람, 사람과 미물, 피조물과 인간 사이의 정情(과) 한(恨)의 노래다. 시인 김미남은 절제된 삶의 도구로의 전락을 단연코 거절한다. 약속은 이행해야 하는 것이지만 깨질 수도 있고 어길 수도 있다. 우리네 삶은 우연과 필연이 교차된다. 명분과 실리 사이에서 겪는 갈등구조가 인간구조라고 본다면 시학은 감성과 감정의 갈등 속에 선(善) 지향적 정화작업을 말로 옮겨 적어 놓는 작업이다. 때로는 과장과 대비의 기법으로 쓰는 문학의 장르이기도 하다. 시인 김미남은 언어를 조탁하며 시어의 뉘앙스와 프로파간다적 의미에 혼절한다. 길들여지지 않은 단어의 의미를 천착하며 두려울 정도의 감동에 젖는다. 조금 일찍 시작하였으면 그 열정과 감동의 진폭은 대한민국을 대표할만한 시인으로 성장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늦지 않았다. 100세 여류시인 시바타도요 여사는 지순한 감성으로 고장 난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음악과 아나운서먼트의 대화 속에서 발견한 시어가 세상에 시집으로 출판되면서 100만 부가 팔렸다는 사실은 작가 등용에 나이는 관계가 없다는 것을 입증시켜 준 것이다. 데스크에 올라온 습작을 겸한 그녀의 작품에서 5편을 천료 한다.
첫 번째 <5월이 오나 보다>는 그 시제부터 평범 속에 비범이 보인다. 툭 던지는 말이 중얼 거림처럼 여겨질 수 있지만 시구를 만나면서 시인이 열병처럼 앓고 있는 봄이 여름으로 넘어가는 길목을 지키는 파수꾼이 아닌가 하는 착각에 빠져 있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잎이 꽃이 되고 꽃이 잎이 되는 날 다시 만나자는 표현은 메타포의 극치다. 어림하여 반란의 꽃 들이란 봄에 피는 꽃들을 그렇게 부른다. 식물은 꽃보다 잎이 먼저 나온다. 봄꽃들은 거의 모두가 잎보다 꽃이 먼저 나온다. 이를 시인은 반란의 꽃이라는 은유로 미화한 것이다. 호소력 짙은 수작이다.
두 번째 <허기진 일상>을 천료 한다. 타는 목마름으로 일상을 구가한 시인의 절규다. 시인은 시를 노래하고 사랑과 고독을 음미하고 싶어 한다. 배부른 돼지나 돈키호테의 막장드라마 같은 일상에서 상대적 결핍감으로 삶을 서러워한다. 매일 매사를 후회 없는 감동의 삶으로 채색하고 그 감동으로 시공을 채우고 싶어 한다. 지적 탐구욕, 시어를 찾아 유랑하는 나그네, 꿈을 씹으며 살고 싶어 하는 간절함에 허기져 있다. 영육 간의 허기를 면하게 해주고 싶다.
세 번째 <실버센터의 하루>를 천료 한다. 오랫동안 데스크에 올라오는 많은 작품을 대하면서 환자의 목소리에 스스로 통곡하는 간병사나 요양보호사를 별로 보질 못했다. 치매 환자의 억지소리에 웃고 때로 짜증이 나겠지만 이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역지사지의 입장으로 변환. 내가 저 환자가 되었을 때를 돌이켜 생각하다 눈물을 꾹 삼키는 모습이 눈에 선하다. 시인의 참한 심성이 너무 예쁘다.
네 번째 <행복의 조건>을 천료 한다. 시란 절제된 감정을 객관화할 때 작품이 빛이 난다. 코미디언이 관객은 웃기되 자신은 웃으면 안 되는 이치다. 행복은 누가 가져다주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만들어 내는 것이다. 시인은 스스로에게 암시를 건다. 일종의 최면이다. 나는 행복하게 살고 있어! 나는 행복해! 나는 이 행복을 지켜 낼 거야! 그러나 결론은 시인의 시심이다. 감사할 줄 알고 모두에게 은혜를 공유하게 한다. 가치관의 혼재 속에 욕심으로 인간이기를 거절하는 세태를 아름다운 언어 잘 지적해 주었다.
다섯 번째 <화해(和解)의 저녁>으로 신인상 후보로 등단을 천료 한다. 오해는 화해의 조건이 되고 화해는 어떤 방법이든 제스처나 언행을 통하여 이해를 공유하고 갈등이 풀어져야 한다. 저녁식사를 같이 하는 행위는 원인 행위에 대한 상대의 이해를 구하는 시간인데 때로 이해보다 더 진한 오해를 통하여 사태를 더 꼬이게도 한다. 시인은 이미 상대의 의도를 읽었지만 화해를 한 것이 아니라 화해의 의미를 모르는 상대를 용서로 체념한 것이리라. 모시떡 하나 검정 비닐에 넣고 빨리 그 장소를 떠나 집으로 향하고 돌아오는 길에 본 저녁놀은 비스듬히 누워있다고 읊조린다. 이름하여 관조의 미학이다.
학부에서 국문학을 전공한 사람들 중 글을 쓰거나 전업 작가로 데뷔하는 확률은 10% 미만이라고 합니다. 전공으로서 문학을 했으면서 글을 쓰지 않거나 붓을 놓은 사람들의 감성은 더 드라이합니다. 인생은 고해라고 했나요? 아닙니다. 시를 만나면 바람과 햇빛을 받으며 물과 구름을 벗 삼아 낭만과 서정을 노래하는 삶입니다. 남의 작품에 감동받고 내 작품에 짜증이 날 때도 있지만 시(詩) 다운 인생은 아름답습니다. 총체적으로 시어 구사능력이 좋습니다. 때로 보이는 시적 구성은 독자들로 하여금 허탈과 해학 그리고 여유를 안겨 줍니다. 한(恨)과 정(情)이 메타포로 엮여 있습니다. 수고하셨습니다. 축하드립니다.
<심사위원 김구부, 김인희, 신상성, 최기복(記), 최태호>
[김미남 시인 프로필]
- 서울산
- 아호 가현(佳泫)
- 대교 눈높이에서 러닝 센터장으로 근무
- 현재 영성실베센테에서 시설장으로 근부
- 아름다운 詩를 쓰고 싶은 생각
【김미남 시인 등단 소감】
[가슴 벅찬 미소가~]
2024년의 봄은 나에게 뜨거운 변화를 주었다. 그것은 시(詩)를 쓰게 되었기 때문이다. 원성 천이 좋다는 이야기는 익히 들어왔지만 그 천(川)이 그 천(川)이려니 생각했다. 천안(天安)에 십 년 넘도록 살면서 24년 봄에만 원성천을 다섯 번 다녀왔다. 그 다섯 번째의 이야기를 ‘수상 소감’이라는 제목으로 써 보려고 한다.
어느 일요일 아침, 약속 시간이 되려면 15분 정도 여유가 있어서 가던 길을 멈추고 천변으로 내려갔다. 난 그저 흐르는 물을 보고 싶었고 벚꽃이 지나간 자리에 어떤 꽃이 있는지 궁금하기도 했기 때문이다. 시(詩)였다. 원성천변 시화전! 어머나 여기에 이런 시(詩)들이.
휘날리는 시(詩)를 보면서 존재하지 않아야 할 곳에 시(詩)가 있는 것에 무한관심이 갔다. 천변에 횡대로 줄 서 있는 시(詩)를 읽으며 아찔한 감동에 젖을 수밖에 없었다. 실로 오랜만에 느껴보는 카타르시스였다. 시(詩)에서 느껴진 건 온통 메타포였다. 숱한 의미가 응축된 메타포가 다가와 그저 황홀하기만 했다. 희살, 허밍, 한(恨), 윤색, 폐부, 그리움, 유영, 편린, 혼절, 윤슬···. 아, 시어(詩語)들이여~
살아가는 것에 급급하여 기억 저편에 편린으로 남겨 두었던 단어들이 내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이 단어들이 누군가의 손에서 춤추고 있을 때 나는 삶과 씨름하느라 지쳐 詩 한 편 읽어 내지 못했던 게으름의 결과로 오랫동안 퇴보와 친구 했다는 사실을 인정하였다. 순간순간, 읽었던 글자들이 머릿속을 헤집고 들어와 괜스레 미소가 지어졌다.
학창 시절 나에게 문학(文學)이란 수학을 잘하지 못해 국어(國語)로 치환된 게 아닌가 생각해 본다. 국어(國語)가 좋았으나 뛰어난 문장력을 장착해 감상문을 썼던 기억도 없다. 그래도 국어 성적은 뛰어났었고 앞줄에 앉아 수업시간 선생님의 말씀을 잘 경청하고 유난히 국어를 좋아했던 바른생활 학생이었다.
대학에서 국문학을 전공하며 한때 고전문학에 심취하여 동아리 활동을 하기도 했지만 학점에 전전긍긍하며 학위를 받았어도 딱히 나의 글쓰기가 나아지지는 않았다. 때때로 어떤 글과 마주했을 때 쓰고 싶은 욕구나 잘 쓰고 싶은 강한 의지를 느꼈던 건 사실이다. 그래서 가끔 이런저런 데를 기웃거려 보기도 했지만 지속성은 없었다. 그래도 슬플 때나 기쁠 때나 오랫동안 일기를 쓴 것은 참 잘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결혼하여 두 아들의 한글 선생을 자처했을 때도 엄마의 일기(日記)를 보여 주며 본보기가 되려 했고 꽤나 열심히 일기(日記) 쓰기 지도를 했었다. 일기(日記)가 모든 글의 바탕이 된다고 확신했기 때문이다.
나는 내면의 갈등과 인간관계에서의 갈등, 일터와 삶의 여정에서 고단함이 있을 때, 누군가에게 폭발하는 분노와 불만족을 느낄 때 붓 가는 대로 글을 쓰고 읽으면서 감정을 정리하고 약간의 카타르시스를 느끼기도 했다. 그랬을 때 내 글은 미사여구도 없고 화려하지도 않으며 오히려 딱딱한 문체라고 자기평가를 하면서도 쓰고 싶은 욕구와 제대로 쓰지 못하는 열등이 교집합을 이루기도 했었다. 늘 글을 잘 쓰고 싶은 갈구가 있었지만 노력은 없으면서 누군가를 부러워하기도 하고 독서가 바탕이 된다는 것을 알면서도『사피엔스』를 몇 달째 완독하지 못하고 덮어둔 상태이기도 하다.
일상이 한여름의 오후처럼 나른하고 무미건조해질 무렵이면 무엇인가 새로운 것에 도전하고 싶어질 때가 많다. 그럴 때마다 나를 바로잡아 일으키고 더 나은 내가 되려고 마음이 요동칠 때 무엇인가를 배우고 결과를 만들어 왔었다. 이제 그동안의 게으름과 이별하고 ‘나를 채찍질할 그 무엇을 찾아야지’ 하고 생각할 무렵 때맞춰 천변의 시(詩)를 만난 것이다.
집으로 돌아와 현수막 속 전화번호를 무심한 듯 띠 띠 띠 하고 누르는데 심장박동이 요란하다. 역시 무반응이 돌아왔다. 그것도 잠시, 다시 울리는 휴대폰 소리에 가슴을 진정하고 최기복 원장님과의 통화는 내게 강한 이끌림으로 다가왔다.
“시 공부(詩 工夫) 하러 오겠느냐?"
“네, 월요일에 갈게요.”
최기복 원장님의 배려와 도움으로 감사하게도 시작(詩作)을 시작(始作)하게 되었지만 헝클어지고 흩어진 어휘와 단어를 정리하고 멋들어지게 나열하는 게 쉬운 일이 아니었다. 당연한 일인 것이다. 60이라는 나이에 내 생애(生涯) 새로운 주기에 詩가 내게 왔고, 인고의 피나는 노력으로 얻어질 시를 쓰지만 그 시가 우스워 어떤 농부의 과원 휴지로 변한다 해도 시(詩)를 써야 할 것이다. 이제 그 이유를 알았으니까.
덕향문학과 인연이 된 것에 너무나 감사하고 요즘 내 삶의 질이 달라졌다고 생각될 만큼 설레고 활기차다. 이제 또 다른 장르인 시문학(詩文學)에 도전하니 내가 나를 시인(詩人)으로서의 김미남을 기대해 볼 요량이다. 나 스스로를 응원하면서 말이다. 모두에게 감사한 마음 가득하다.
그게 시냐고 하던 남편,
아들 준범, 준영아 엄마가 시인(詩人)이 되었단다. 엄마의 시작을 축하해 주렴.
앞으로 함께 할 덕향문학의 문우님들 시와 수필을 공유함에 진정한 도반이 되어 주세요. 나까지 책을 내는 행위가 나무한테도 햇빛한테도 미안한 생각이 들지만. 그러나 잠시 모두의 ‘안녕’을 빌어 봅니다. 감사합니다.
첫댓글
가현 김미남 시인 님!
시인 님의 소중한 방입니다.
삶의 여정에서 좋은 글을 많이 쓰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