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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5월 8일 주일낮예배 메시지
제목: 건강한 우리교회 시리즈(01) 교회의 DNA
마태복음 28:19~20
우리 교회 성경공부 현황
저는 주일을 제외하고 매주 11차례의 성경공부 모임과 수요예배와 금요예배를 인도합니다. 그렇게 한 사람 한 사람을 세워가고 성경을 가르칩니다. 서로의 삶을 나누고 살아가는 이야기를 들어주기도 합니다. 어떤 모임은 젊은이들이 모이고, 어떤 모임은 중년들, 그리고 장년들의 모임도 있습니다. 한 사람과 만나는 시간도 네 차례가 되며 그룹으로 모이기도 합니다. 이렇게 성경공부 모임을 인도하노라면 정말 보람을 느낍니다. 그런 보람의 대부분은 그리스도 안에서 성장해 가는 교우들의 모습을 보는 데서 옵니다. 그리고 우리가 함께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을 공유하고 있음을 느낄 수 있는 대화와 함께 음식을 먹는 데서 옵니다. 공감하고 위로하고 격려하고 조언을 구하기도 합니다. 일방적으로 가르치는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함께 배우고 함께 나눕니다. 그렇게 한 주간이 지나갑니다.
성경공부 일지를 되돌아 보니 작년 오늘 그러니까 2015년 5월 8일 장명옥 권사님, 박용문 안수집사님, 한숙자 권사님, 허난윤 집사님이 최초로 1과를 마쳤습니다. 5월 29일 이금숙 권사님이 성경공부에 합류하셨습니다. 그렇게 공부를 시작한 지 이제 1년이 되었습니다. 공부를 마치고 함께 식당에도 가고 커피숍에도 갔습니다. 공부를 하면서 갈등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안에서 우리는 서로를 위로하고 격려하면서 여기까지 왔습니다. 그리고 지난 주 금요일 오전 성경공부모임에서는 3단계 9과를 마쳤습니다. 1단계가 8과, 2단계가 12과, 3단계는 20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전체가 40과로 구성된 성경공부모임 기초반 3단계를 마치는 데는 1년 반이 조금 더 걸리는 것 같습니다.
지난 1년 동안 제가 가르친 분들은 약 30명 정도가 됩니다. 그 중에는 중간에 중단한 분들도 있지만 처음 네 사람으로 시작된 성경공부가 일년이 지나는 동안에 제법 자리를 잡아가고 있습니다.
작년 4월 30일부터 8월 20일까지 4개월 동안 이치훈 김민경 집사님은 1단계 공부를 했습니다. 화곡동에 있는 집에까지 가서 이집사님 퇴근 후에 공부를 마치고 집에 오면 자정이 넘는 시간이었습니다. 그래도 성경공부를 통해서 기뻐하고 성장하는 집사님 내외를 보면서 돌아오는 길에 내내 소망 중에 보람을 느꼈습니다. 이 부부의 에너지 넘치는 아이 태희랑 놀아주느라 사모님은 아이 방에서 별도의 육탄전(?)을 벌였습니다. 작년 여름은 그렇게 보냈습니다. 이치훈 집사님은 이 공부가 너무 좋다고 우리 교회 전체가 수련회를 가져 함께 공부하자고 권하기도 했습니다.
작년 11월 중순부터 매주 화요일 밤 10시가 훌쩍 넘은 시간부터 자정이 넘도록 이주훈 집사님과 성경공부 모임을 갖기 시작했습니다. 교회에 관한 글을 함께 읽으면서 우리 교회를 생각하고, 때로는 한국교회를 생각해보기도 합니다. 그렇게 매주 화요일 밤은 우리 두 사람에게는 불타는 화요일(?)이 되고 있습니다. 어떤 날은 1시 반이 넘어 집에 바래다 줍니다. 그럴 때마다 이주훈 집사님은 진심으로 감사의 인사를 합니다.
금년 1월부터 박웅산 군과 조찬송 청년은 매주 수요일 밤 10시에 저의 집 근처의 카페에서 성경공부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커피값이 부담되어 집으로 들어와 공부를 계속하고 있는데 이들 청년들은 이제 3단계 3과를 마쳤습니다. 신앙에 대하여 눈을 뜨기 시작한 젊은이들이 고난의 청년 시절을 주님과 더불어 살아가는 법을 배우고 있습니다.
비슷한 시기에 또 다른 청년인 박희수 군과 조찬양 청년은 매주 월요일 밤 8시에 삼청동에 있는 박웅산 군이 일하는 카페에서 성경공부를 시작하고 있습니다. 이들은 영어로 된 소책자 신앙서적을 번역하면서 모임을 시작했는데, 이제는 다른 사람을 가르칠 수 있는 지도자가 되는 성경공부 과정을 익히고 있습니다. 그렇게 밤 10시까지 공부를 하고 야식을 근처 식당에서 합니다. 그렇게 시간을 보내면서 저는 우리 교회의 미래가 자라는 것을 바라봅니다.
금년 2월 23일, 마침내 이인성 장로님과 이기백 집사님이 성경공부를 시작했습니다. 장로님의 오랜 기도와 배려 속에 시작된 이 성경공부는 어제 5월 7일 6과를 시작했습니다. 이집사님은 식당을 경영하면서 도선동 상인연합회장도 맡고 있어서 대외활동이 많은 편인데, 장로님은 세심하게 시간을 조정해 가면서 매주 성경공부를 이어오고 있습니다. 이제 장로님이 미국에 가시면 화상통화를 하면서 격려를 하시겠다고 합니다.
특히 이 성경공부를 하면서 장로님은 미국에 가서 아내가 되시는 장은화 권사님과 더불어 그 유익을 함께 하시겠다고 전체를 복사해 달라고 부탁하십니다. 때때로 성경공부를 마치고 커피숍에서 계속 대화를 나누면서 교회와 하나님 나라, 신앙에 대하여 이야기를 나눌 때 우리의 마음은 같은 뜻 같은 생각을 공유하면서 커피향과 함께 훈훈해 옴을 느낍니다. 그렇게 우리는 서로에게 좋은 동역자가 될 것을 기대하게 됩니다.
금년 3월 29일 화요일 김순금 집사님이 새로 설립한 에이스데이케어센터에서는 직원들을 대상으로 하는 성경공부 모임이 시작되었습니다. 어르신 유치원을 운영하는 회사의 직원들과 더불어 어르신을 섬기기 위한 마음가짐과 직원들의 팀워크 향상을 위해 시작된 성경공부는 8~9명이 모여 배우고 서로의 삶을 나누고 있습니다. 물론 여기에는 불자(佛者)도 있고 비기독교인도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공부를 통하여 진리의 말씀이 모든 사람에게 적용되고 공감할 수 있음을 경험하고 있습니다. 이 일도 주님이 우리 가운데서 새 일을 행하신 결과라고 믿습니다.
2주 전부터는 신현수 청년이 주간에 두 세 차례 성경공부를 배우겠다고 나서서 함께 하고 있습니다. 최순이 전도사님도 이 공부를 숙달하여야 교회 개척을 하겠다고 하십니다. 그렇게 될 줄로 확신합니다.
이렇게 성경공부를 주중에 실시하면서 몇 가지 배운 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은 언제나 역사하며 누구라도 마음을 열고 들으면 감동되고 공감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공부도 중요하지만 서로의 삶을 나누면서 대화의 시간을 갖는 것이 무척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공감하고 격려하고 자신의 마음을 열고 대할 때 우리는 더 강해지고 어려움을 쉽게 극복해 나갈 수 있음을 알았습니다.
영적인 금단 현상
지난 주간 동안 저는 감정적으로 우울한 느낌을 경험했습니다. 목회자로서 교우들을 만나고 성경공부를 하고 싶은 분들을 만나는 일은 즐겁고 기쁜 일인데 왜 이런 증상이 있을까? 너무 성경공부라는 활동을 하고 기도를 소홀히 한 것이라고 아내는 조언을 합니다. 그래서 금요 기도회에서 부르짖으며 기도를 드렸습니다. 정말 그런 것 같습니다. 주님과 친밀한 관계를 갖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요?
그러다가 문득 저는 이것이 영적인 금단현상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2012년 처음 교회를 개척할 때, 저의 기도는 “주님, 한 영혼을 세우는 일이 저의 목횝니다. 그 일에 최선을 다하겠습니다”였습니다. 그런데, 막상 한 영혼만 남을 정도로 교우들이 교회를 떠날 때, 저는 목회에 대한 자신감을 모두 잃었습니다. 그러다가 하나님의 일은 내 힘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고 복음에 대하여 새로운 인식을 하게 되었습니다. 지금 우리 교회가 배우는 은혜의 복음을 그 절망의 자리에서 발견한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이제 성경공부를 즐거움과 보람 속에서 진행하고 있는데 문득 제 마음 속에 오랫동안 도사리고 있던 큰 목회에 대한 야망, 명예와 성공에 대한 욕심이 떠나고 싶어하지 않는 몸부림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한 영혼에게 나의 생명을 바치리라는 고백이 진실이 되기 위하여 지난 일년 동안의 성경공부는 저에게 그렇게 참 목회자가 되기 위한 과정이요 주님의 훈련이었음을 다시금 생각합니다. 그렇게 보면 오랫동안 앓고 있던 부흥병, 성공병이 낫아 가는 과정이요, 영적 금단현상이라고 스스로 평가합니다. 저는 좀 더 철저하게 주님의 뒤를 따르고 싶습니다.
‘이렇게 해서 언제 교회가 부흥할 것인가?’ 이런 조급한 마음이 마음 속에 일어납니다. 그것은 사탄의 전략입니다. 사탄은 세속적 야망을 우리의 마음밭에 뿌립니다. 그러나 우리 그리스도인 안에는 성령께서 일하고 계십니다. 우리에게 새로운 DNA곧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이 있음을 늘 일깨워 주십니다. 교회인 우리는 하나님의 대리인입니다. 이 세상 어디에 가든지 이 사실은 변치 않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안에 새로운 DNA를 넣어주시고 그 생명이 나타나도록 성령을 부어주셨습니다.
제니 이야기
1970년 11월 4일, 13세 된 아주 이상한 소녀가 발견되었습니다. 나이가 아주 어려서부터 그 아이는 신체적으로 사회적으로 격리된 상태였습니다. 사람들은 그 아이의 이름을 제니라고 불렀습니다. 그 아이는 말 하는 법을 배우지 못했습니다. 사람들과 만나려고 하지도 않았습니다.
제니는 요강 같은 유아용 변기의자에 묶여 있었고 매일 앉아서 지냈습니다. 저녁에는 침낭에 묶여서 팔을 움직일 수 없게 했습니다. 무슨 소리를 내면 매를 맞았습니다.
그 결과, 그 아이의 자연적 특성은 완전히 틀어지고 말았습니다. 제니는 특이하게 토끼처럼 걸었습니다. 두 손을 마치 짐승의 앞발처럼 앞으로 뻗었습니다. 딱딱한 음식은 씹지 못했고, 거의 삼킬 수 없었습니다. 또한 계속 침을 뱉었으며 자주 코를 훌쩍였습니다. 그 아이는 4미터 이상 먼 곳을 볼 수도 없었습니다. 제니의 말은 짧고 고음의 비명으로 알아들을 수 없었습니다.
외딴 집에서 벗어나 생활한 지 수년이 지나자 제니가 뱉을 수 있는 단어는 상당히 늘었습니다. 그러나 낱말을 이어서 말이 되게 하지는 못했습니다. 왜 그렇게 된 걸까요? 어떤 과학자들은 결론을 짓기를, 영양부족과 자극을 제대로 받지 못해서 제니의 정상적인 DNA가 변형되었다고 합니다(Reimagining Church: Pursuing the Dream of Organic Church, Frank Viola, 2008).
교회의 DNA
이 이야기를 교회에 적용해 보겠습니다. 본래 교회는 하나님이 주신 생명의 DNA가 작동하고 있었습니다. 마태복음 28장 19절~20절에 의하면, 우리 주님은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예수님처럼 제자들도 사람을 만나 함께 시간을 보내고 친구가 되어주며 진리의 말씀을 통해 생명의 삶을 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처럼 제자들도 ‘대형’이나 ‘다수’를 추구하지 말고 소수의 사람들과 더불어 진실한 그리스도인의 삶을 나누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처럼 지체 높은 이들을 끌어들이는 일에 관심을 두지 말고 몇몇 사람들을 선택하는데 초점을 맞추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 땅끝까지 복음이 전파된다는 말입니다. 제자 삼는 일은 무엇을 가르치는 것이라기보다는 그들과 시간을 보내는 관계 맺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이 예수님의 DNA입니다. 우리 속에 있는 천국 백성의 DNA입니다.
본래 교회는 그렇게 했습니다. 처음 교회는 사도나 집사나 누구든지 그렇게 사람을 만나고 친구가 되고 복음을 함께 하고 서로 돕는 친교공동체로서 살았습니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그 모임은 자라났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로마제국을 넘어섰습니다. 그리고 온 세상에 퍼졌습니다. 그리고 한반도에까지 왔습니다. 그렇게 자라는 생명의 DNA가 우리 안에 있습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교회에 문제가 생겼습니다. 성경을 읽고 가르치는 일은 성직자들의 전유물이 되었고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은 가만히 앉아서 듣고만 있습니다. 성직자는 홀로 밤을 새워 성경을 연구하면서 그것이 자신의 전문분야인 듯 독점하기 시작했고 교인들은 가만히 장의자(長椅子)에 앉아 받아먹고 은혜를 받는 것이 본업인줄 알기 시작했습니다. 초대교회에는 없던 일이 교회 안에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오랜 세월이 지나자 그것이 정상인 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목회자들도 말씀을 전하는 일을 독점하고 교우들도 감히 그런 일에 나서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성경에는 빌립 집사도 사마리아 마을을 복음화하고 스데반 집사도 공회에 나가서 기독교 복음을 변증했는데 우리는 성경을 읽으면서도 그런 것을 볼 수 없을 정도로 왜곡된 교회 현실을 통하여 성경을 읽고 있습니다.
제니라는 소녀의 이야기는 이것이 우리가 속한 교회의 모습임을 일깨워줍니다. 기독교는 2,000년을 이어오는 동안에 수많은 전통이 생겼습니다. 그 중에는 좋은 것도 있지만 나쁜 것도 있습니다. 종교개혁은 ‘근본으로 돌아가자’(아드 폰테스, ad fonts=to the fountain)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을 다시 읽고 성경의 정신을 따르자는 것입니다. 우리 조상들은 온고지신(溫故知新)의 정신을 강조했습니다. 옛 것을 잘 익혀 그것을 통하여 새로운 것을 알자는 말입니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정신입니다. 새 것을 몸에 익히는 일, 익숙한 일을 벗어버리는 일은 쉽지만은 않습니다. 때로는 금단현상도 있을 것이며, 불안한 마음도 들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성경말씀에 그 기초를 두고, 성령의 조명을 받으며, 성도들의 교제 가운데서 이 일을 함께 이루어나간다면 점차 좋은 교회로 거듭날 수 있을 것입니다.
지난 2014년 추수감사절 때 여러분께 드린 고언(苦言)은 바로 우리의 마음에서 ‘부흥’이라는 단어를 지워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 때 우리는 작지만 소중한 만남을 만들어 갈 수 있으며, 그 속에서 그리스도의 DNA가 바르게 작동할 것입니다.
삼위일체 DNA
기독교의 하나님은 삼위일체의 하나님이십니다. 미로슬라브 볼프라는 신학자는, “성삼위 하나님은 기독교 신앙의 처음이자 마지막이 되신다. 그러므로 기독교 신앙의 중심을 차지한다.”고 말했습니다(God’s Life in Trinity, Miroslav Volf). 삼위일체는 성부성자성령 삼위의 하나님이 공동체로 존재하신다는 기독교 교리를 말합니다. 이 성삼위는 서로 사랑하시며, 서로 교제하시고, 서로 의존하시며, 서로를 높여주십니다. 그리고 서로에게 복종하시며, 서로 함께 거하십니다.
베드로 사도는 우리들도 이렇게 신의 성품에 참여하라고 부르심을 받았다고 합니다:
이로써 그 보배롭고 지극히 큰 약속을 우리에게 주사 이 약속으로 말미암아 너희가 정욕 때문에 세상에서 썩어질 것을 피하여 신성한 성품에 참여하는 자가 되게 하려 하셨느니라(베드로후서 1:4)
교회는 이처럼 하나님의 성품에 참여하는 하나님의 자녀요 하나님의 DNA를 받았습니다. 그래서 교회는 성령이 거하시고 성령의 열매를 맺습니다. 성령의 열매는 곧 하나님의 DNA가 겉으로 드러나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의 DNA란 무엇입니까? 삼위일체 하나님이 서로 공동체로 사랑과 순종의 관계 속에 하나 되는 것입니다.
성부가 성자보다 높은 것이 아니요 성령도 성자보다 낮은 것이 아닙니다. 성자는 성부께 복종하고, 성부는 성자를 지극히 높이며, 모든 권세를 주십니다. 그리고 성령도 스스로를 드러내지 않으시고 성자를 증거하십니다. 이것이 삼위일체 하나님, 우리가 믿는 하나님의 특징입니다. 그런 특징이 교회 안에 심어진 DNA요, 신(神)의 성품이며, 성령의 역사하심입니다.
그런데 역사가 흐르는 동안에 교회 안에 세속적인 것이 들어왔습니다. 그래서 서로 사랑의 관계 속에 있던 교회는 점차 계급사회가 되었습니다. 성직자와 평신도라는 구분이 생기고, 직분의 계급화가 생겼습니다. 본래 직분은 계급이 아니라 기능이었습니다. 장로나 목사, 또는 집사는 직분의 이름이 아니라 교회 안에서 하는 기능 또는 역할을 가리키는 말이었습니다. 그래서 사도들은 장로의 역할 또는 목자의 역할을 하기도 하고 선생의 역할을 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던 것이 직분으로 굳어졌고 더 나아가 계급처럼 여기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극도로 타락하면 돈을 주고 사는 것으로 심하게 왜곡됩니다.
예수께서도 이렇게 전통이 하나님의 말씀을 가로막을 수 있다고 지적하셨습니다: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는 어찌하여 너희의 전통으로 하나님의 계명을 범하느냐? 하나님이 이르셨으되 네 부모를 공경하라 하시고 또 아버지나 어머니를 비방하는 자는 반드시 죽임을 당하리라 하셨거늘, 너희는 이르되 누구든지 아버지에게나 어머니에게 말하기를 내가 드려 유익하게 할 것이 하나님께 드림이 되었다고 하기만 하면 그 부모를 공경할 것이 없다 하여 너희의 전통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폐하는도다 (마태복음 15:3~6).
오늘 우리가 할 일은 성경을 통해서 보여주시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모든 것을 회복하는 일입니다. 목사는 영혼들을 돌보는 일을 하는 자요, 장로도 그렇게 교우들을 사랑으로 돌보는 사람입니다. 교회는 예수님의 몸으로서 하늘에 계신 예수님을 이 세상 사람들에게 보여주는 예수님의 몸입니다. 우리가 왜곡된 전통을 벗어버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갈 때 교회가 가진 본래의 아름다움이 빛나기 시작할 것입니다. 그리고 마침내 세상은 교회를 통하여 예수님을 볼 것입니다.
교회에게는 성삼위 하나님의 DNA가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서로 사랑하고 서로 복종하고 서로 함께 할 때 진정한 아름다움이 드러나고 보람과 기쁨이 생깁니다. 우리 안에 계시는 하나님을 공감할 때 참 교회요 그리스도의 몸임을 확신하게 됩니다. 그 일은 예수님처럼 낮은 자들의 친구가 되는 일이며 그들과 더불어 함께 먹고 마시는 일부터 시작합니다. 예수님은 강의실에서 가르치신 것이 아닙니다. 길에서 또는 한적한 곳에서 제자들과 이야기를 나누셨습니다. 때로는 묻기도 하시고 때로는 질문을 받기도 하시고, 때로는 이야기도 들려주시고 그들과 시간을 보내셨습니다. 그렇게 3년을 함께 할 때 갈릴리의 어부들은 세상을 바꿀 겨자씨로 준비되어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열 두 사람에게 온 세상을 맡기신 채 예수님은 아버지께로 돌아가셨습니다.
받지만 말고 재생산하라
그렇게 해서 생긴 교회는 어떤 모습으로 이 세상에 존재하게 되었을까요? 교회에 있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DNA가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다음의 성경구절은 그 모습을 보여줍니다:
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며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 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히브리서 10:24~25)
그리스도의 말씀이 너희 속에 풍성히 거하여 모든 지혜로 피차 가르치며 권면하고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를 부르며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찬양하고(골로새서 3:16)
그런즉 형제들아 어찌할까 너희가 모일 때에 각각 찬송시도 있으며 가르치는 말씀도 있으며 계시도 있으며 방언도 있으며 통역함도 있나니 모든 것을 덕을 세우기 위하여 하라(고린도전서 14:26)
교회는 극장이 아닙니다. 누군가 공연하는 것을 보고 감상하며, 어떤 설교자에게 감흥을 받을까 하는 곳이 교회의 진면목은 아닙니다. 교회는 강의실도 아닙니다. 그저 가만히 앉아 배우기만 하는 곳이 아닙니다. 교회는 사교클럽도 아닙니다. 서로 교제하고 친한 사람들끼리 만남을 갖기 위한 곳이 아닙니다. 교회는 기업이 아닙니다. 좋은 프로그램을 많이 가진 기업의 제품이 많이 팔리는 것처럼 교회는 프로그램을 제공하는 기업 같은 곳이 아닙니다.
교회는 위의 요소들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교회의 진정한 모습은 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는 곳입니다. 피차 가르치며 권면하는 모임입니다. 그리고 그런 모임이 이루어지고 연습하는 곳이 바로 성경공부 모임입니다. 우리는 이제 이 일을 시작했습니다.
우리 안에서 나눕니다. 우리 안에 풍성해지면 밖으로 흘러 넘칠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자연스럽게 제자를 삼는 일로 나타날 것입니다. 그것은 심오한 성경지식을 필요로 하는 일도 아니며 신학교를 졸업해야 하는 것도 아닙니다. 그저 예수님과 제자들처럼 누군가에게 나의 관심과 시간을 나눌 수 있으면 족합니다. 그러나 그 일을 더 잘하려면 나눌 수 있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말씀을 나누기 위해 더 잘 듣습니다. 그리고 이미 그런 훈련을 받은 분들과 더불어 시간을 함께 합니다. 그리고 나의 도움이 필요한 분들과 더불어 그리스도의 사랑을 나눕니다. 그렇게 하는 동안에 우리 안에서 일하시는 하나님이 그 아름다운 DNA를 드러내실 것입니다.
지난 2월에 한 주간 태국에 갔을 때, 많은 지도자들이 통역을 통해 가르치는 하나님의 말씀을 적기 위해 낡은 노트와 교재에 펜으로 열심히 기록하는 것을 보고 감명을 받았습니다. 그들은 왜 그렇게 골몰하며 열심히 기록했을까요? 그것은 그들이 돌아가서 가르칠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들도 누군가를 재생산하기 위해 배우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예수님처럼 때로는 커피숍에서, 때로는 사무실에서, 아니면 가정이나 어디서든지 서로 만나 그리스도의 사랑과 진리를 공감하며, 삶의 희로애락을 함께 나누는 만남은 교회를 교회되게 합니다. 그리고 성도를 더욱 거룩하게 하며 더 건강하게 더 멀리 갈 수 있게 합니다. 그렇게 해서 교회는 이 세상의 소수지만 세상을 변화시키는 복음의 능력을 경험할 것입니다. 그렇게 본래 교회는 이 세상에서 이어져 왔습니다. 처음부터 예배당을 세웠던 것은 아닙니다. 처음부터 진리와 사랑의 힘으로 세상을 이겨왔던 것입니다. 이 아름다운 전통을 우리는 잊고 있었습니다. 불쌍한 여자아이 제니처럼 말입니다.
이렇게 해서 왜곡된 여자아이 제니가 어엿한 숙녀가 되며 그리스도의 신부로 그 영광의 면사포를 쓰고 결혼을 할 것입니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면서 많은 자녀들을 낳을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 교회가 꿈꾸는 미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