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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물명칭 - 금동미륵보살반가사유상(金銅彌勒菩薩半跏思惟像)
국적/시대 - 한국(韓國) / 삼국(三國) 재질 - 금속(金屬) / 금동제(金銅製) 크기 - 전체높이(전체높이) : 80 cm / 불신높이(佛身높이) : 50 cm / 대좌너비(臺座너비) : 30 cm 지정구분 - 국보(國寶) 78호 용도기능 - 종교신앙(宗敎信仰) / 불교(佛敎) / 예배(禮拜) / 불상(佛像) 참고문헌 - 명품도감, 국립중앙박물관 편, 삼화출판사, 1985, 도87 소장기관 - 국립1(國立1) / 중앙(中央) 유물번호 - 본관(本館) 2789 상세설명 국보 제83호 《금동보살반가사유상》과 더불어 우리나라 금동 반가상의 최대 걸작 가운데 하나이다. 전체 형식은 국보 제83호 반가상과 비슷하다. 머리에는 보탑이 장식된 삼면관(三面冠)을 썼다. 이 관에는 머리띠와 머리칼이 양옆으로 길게 늘어져 어깨까지 닿아 있다. 얼굴은 풍만하나 약간 모가 났다. 눈을 반쯤 내린 채 미소를 띠고 있으며 코와 입이 단아하게 조각되어 있다. 전체적으로 미소를 띠고 있으나 깊은 생각에 잠긴 근엄한 표정을 하고 있다. 목에는 목걸이를 하였고 손과 발에도 각각 팔찌를 착용하였다. 천의(天衣)는 두 어깨를 걸쳐 내려와 무릎에서 교차되고 있다. 상의(裳衣)는 허리에서 매듭을 짓고 있다. 하반신을 덮고 있는 법의(法衣)는 얇아서 두 다리의 윤곽이 나타나 있고 평행 U자 모양 주름이 나 있다. 옷주름은 둥근 대좌 위에도 덮여 있는데 Ω형의 고식(古式) 주름이 잡혀 있다. 이렇게 하단에 길게 내려진 옷주름들은 상 전체에 안정감을 부여하고 있다. 발견지를 알 수 없으나 삼국시대 불상의 형식을 보여주고 있다. 따라서 조성 연대는 6세기 후반에서 7세기 전반으로 추정되고 있다. 이 반가상은 우리나라의 국보일 뿐 아니라 세계적인 명품으로 주목받고 있다. 은은한 ‘한국의 미소’ 띤 불상 - 한겨레
불상은 쉽게 접할 수 있는 대표적인 문화재 중 하나이다. 우리가 가장 쉽게 떠올리는 불상의 모습은 금동반가사유상이다. 머리에 장식을 한 관을 쓰고, 한쪽 다리를 다른 쪽 무릎 위에 올려 놓은 채, 손가락을 볼에 대고 생각에 잠겨 있는 반가사유상은 중학교나 고등학교 국사 교과서에서 쉽게 볼 수 있으며, 한국의 문화를 소개하는 책자에도 표지 그림으로 자주 사용되고 있다.
금동반가사유상은 삼국시대에 상당히 많이 만들어져, 현재 전해지고 있는 것만도 수십 개에 이른다. 이들 가운데 가장 뛰어나다고 평가받는 작품이 국보 78호와 국보 83호로 지정되어 있는 금동반가사유상이다. ‘한국 불교 미술의 기념비적 양대 걸작’, ‘국보 중의 국보’라는 이름이 따라다닐 정도이다. ‘한국의 미소’를 이들 불상의 얼굴에서 찾기도 한다. 머리에 해와 달의 장식이 있는 높은 관을 쓰고 있는 것이 국보 78호, 연꽃잎 모양의 낮은 관을 쓰고 있는 것이 국보 83호이다. 둘 중 국보 83호가 바로 일본 국보 1호인 교토 고류지(광륭사)의 목조반가사유상과 똑같은 모습을 하고 있어서, 고대 한국 문화가 일본에 전해졌음을 잘 보여주는 증거로 책에 나란히 실리는 경우도 많다. 금동반가사유상은 흔히 미륵불로 알려져 있다. 미륵불은 석가모니가 돌아가시고 56억7천만년 뒤에 이 땅에 내려와서 중생을 구제한다고 알려진 미래의 부처이다. 이 때문에 사람들은 어려움에 처하거나 간절한 소원이 있으면 미륵불에게 빌곤 했다. 미륵불이 자신을 지켜주고, 소원을 들어 줄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때로는 미륵불의 힘에 의지해서 불평등한 현실사회를 바꾸겠다며 봉기를 일으켰다. 궁예의 사례에서 볼 수 있듯이, 통치자들은 자신이 바로 그 미륵불이라고 주장함으로써 민중의 지지를 이끌어내려고 하기도 했다. 국보 78호와 83호의 금동반가사유상이 동시에 진열되는 전시회가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열려 관심을 끌고 있다. 이처럼 두 불상이 함께 전시되는 것은 16년 전인 1986년 국립중앙박물관을 경복궁 터로 옮기면서 연 전시회 이후 처음이다. 그래서 두 불상이 ‘16년 만에 맞붙는다’는 표현을 쓰는 언론도 있다. 두 불상의 모습에서 어느 편이 더 뛰어난 작품인지를 찾기보다는, 한국을 대표하는 두 불상이 이 땅의 어려움을 해결하기 위해 함께 어떤 고민을 하고 있는지 진지하게 찾아 보는 것은 어떨까 생각해 본다.
참고 - 일본의 국보 1호인 광륭사 목조반가사유상
반가사유상은 불상의 한 종류로서 돌, 청동, 나무 등의 재료로 만들어 진다. 우리나라는 수많은 전란을 겪는 동안 나무로 만들어진 불상은 거의 없어져 버렸다. 그러나 일본에는 나무 불상이 많이 남아있다. 이 중에서 특히 광륭사(廣隆寺)에 있는?목조(木造)반가사유상‘은 아름다운 모습과 독특한 제작기법으로 우리에게도 잘 알려져 있다. 불상의 얼굴과 전체적인 모습이 우리의 금동미륵반가사유상(국보83호)과 너무 닮아있다. 재료, 제조기법, 역사적인 기록 등으로 미루어 보아서도 우리나라와의 깊은 관련을 짐작할 수 있다. 당연히 한일 미술사학자들 사이에 제작 장소에 관한 두 가지 논란이 있다. 즉 우리나라에서 만들어 일본으로 가져갔다는 주장과 양식은 우리나라의 영향을 받았으나 만든 장소는 일본이라는 것이다.
제작 장소의 논란 황수영 전 동국대 교수는 ‘일본 목조불상은 대부분의 재료가 녹나무(樟, クスノキ) 혹은 편백나무(檜, ヒノキ)인 것과는 달리 소나무로 만들었다. 또 일본 목조불상은 조각을 할 때 대체로 밖에서 안으로 깎아 들어가는 데 비하여 이 불상은 안에서 밖으로 깎아 나온 점, 또 일본 불상은 신체의 여러 부분을 따로 만들어 조립한 것과는 달리 이것은 하나의 통나무를 깎아서 만들었기에 일본양식과 다르다’고 하였다. 기록으로도 ‘일본서기’에 ‘신라 사신이 불상1구와 금탑 사리 등을 광륭사에 가져왔다’는 내용이 있다한다.
반면에 재질과 제작방법이 일본의 보통 양식과 다르다는 사실만으로 우리나라에서 만들었다고 보는 것은 무리가 있다. 일본서기에 기술된 불상이 바로 이 반가사유상이라는 주장도 지나친 추론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제작지 논쟁에 엉뚱하게 나무의 재질이 소나무란 사실이 마치 한반도제작의 증거처럼 인용되는 경우가 흔하다. 잘 알려진 대로 소나무는 우리나라와 일본에 모두 자라는 수종이다. 따라서 재질이 소나무라는 사실만으로 한반도 제작설의 근거로 삼을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미술사학자들 사이에는 광범위하게 받아들여지고 있다.
광륭사 반가사유상의 재질은? 우선 반가사유상의 재질에 관하여 지금까지 알려지고 있는 내용을 정리해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일본인 임학자 소원이랑(小原二郞)씨는 반가사유상은 ‘소나무로 만들었다‘, 혹은 ’조선소나무로 만들었다’는 논문을 발표하였다는 것이다. 둘째 ‘소나무는 신라에 많았고 일본에는 드물다’, ‘소나무는 일본에는 없다’는 것이다. 셋째 조선소나무로 만들었다는 것을 기정사실화하고 한 걸음 나아가 ‘양백지방(울진, 봉화, 삼척)에 자라는 소나무(춘양목)로 만들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들의 대부분은 잘못 알려져 있으므로 보다 상세한 내용을 알아보자. 첫째로 소원이랑씨가 1951년에 발표하였다는 논문을 둘러볼 필요가 있다. 그의 논문은 ‘上代彫刻の材料史的考察‘이라는 이름으로 일본의 전문잡지 ’불교예술(佛敎藝術)‘ 13호에 실려 있다. 다음은 관련부분을 발췌하여 번역한 것이다.
‘광륭사에는 유명한 보발미륵상(寶髮彌勒像)이 있고 또 이것과 비슷한 보관미륵상(?冠?勒像, 반가사유상)이 안치되어있다. 보발미륵은 녹나무이었으며 보관미륵은 소나무속인 것을 확인하였다. 소나무속은 단유관속아속(Haploxylon)과 복유관속아속(Diploxylon)으로 구분할 수 있는데, 보관미륵은 복유관속아속의 나무이었다. 그러므로 보관미륵은 5개의 잎을 가진 섬잣나무나 잣나무가 아니고 2개의 잎을 가진 소나무(赤松, アカマツ)* 혹은 곰솔(黑松, クロマツ) 중의 어느 하나로 만들어진 것을 알 수 있었다. 일본의 수많은 불상 중에서 소나무나 곰솔로 만든 불상은 거의 없다.
그런데 보발미륵상은 보관미륵상의 원형이라고 생각되므로, 보관미륵상과 비슷한 금동불상이 조선에 있다는 사실에서 조선으로부터 가져온 것으로 알려지고 있었다. 그래서 보관미륵을 일본에서 만든 것인가 아니면 조선에서 가져온 것인가에 대하여 미술사학자들 사이에도 의견이 달랐다.
보관미륵의 재료는 소나무 혹은 곰솔이라는 것은 두 수종 모두 조선에도 자라므로 만든 재료를 가지고 제작지를 추정할 수는 없다. 그러나 보발미륵이 일본에서 만들어졌을 가능성이 높으므로 보관미륵 또한 일본에서 만들어졌다고 생각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소나무 분포와 반가사유상 이상에서 알 수 있듯이 소원이랑이라는 일본인 학자는 반가사유상(?冠?勒像)의 재질이 소나무 혹은 곰솔로 만들었다고 하였다. 더욱이 ‘조선소나무’라는 구절은 어디에도 없으며 오히려 일본에서 만들었을 것이라고 하였다. 그가 재질을 조사한 방법은 반가사유상에서 떨어져 나온 작은 조각의 세포모양을 현미경으로 관찰하여 나무의 종류를 알아내는 목재조직학적인 기법이다. 이 방법은 비슷한 나무를 구분하는 데는 한계가 있다. 식물학적으로 분명히 종(種)이 다른 소나무와 곰솔도 따로 찾아낼 수가 없어서 그는 ‘소나무 혹은 곰솔’이라 하였을 정도이다. 하물며 재질이 한반도소나무인지 일본소나무인지를 나무의 재질을 분석하여 알아내는 방법은 전혀 없다. 오늘날의 최첨단 기술이라는 DNA의 분석법으로도 가능하지 않다. 앞으로 과학기술이 좀더 발전하는 날을 기대할 수밖에 없는 현실이다.
둘째로는 소나무의 분포지역 문제이다. 미로브(N.T. Mirov)는 ‘Genus PINUS'라는 책에서 소나무는 우리나라와 일본 및 중국의 산동반도 일부에 자란다고 하였다. 또 한일 소나무분포를 연구한 박용구 경북대 교수는 ’지금부터 약 5천년 전 일본열도에 들어온 이주민들이 농경문화를 정착시킬 때 차츰 소나무가 많아진 것으로 추정한다. 농경지 확장목적으로 화전을 만들면 그 주변에는 소나무가 침입하여 왕성하게 자라기 시작한 것이다. 화분화석에서도 약 3천5백년에서 4천년 전에 소나무 빈도가 급격하게 높아진 사실이 이를 뒷받침하고 있다‘고 하였다. 한마디로 소나무는 차이점을 전혀 찾을 수 없는 꼭 같은 나무가 우리나라에도 자라고 일본에도 자란다.
다만 현재의 소나무는 일본열도에 비하여 한반도에 훨씬 많이 분포한다. 남한의 산에서 약 40%가 소나무일 만큼 압도적이다. 그러나 소나무가 우리의 산을 점령해 버린 것은 대체로 조선조 이후이며 그 전의 산림, 특히 삼국시대에는 참나무와 같이 잎이 넓은 활엽수가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었으며 소나무는 그렇게 왕성하지 못하였다고 추정한다. 이런 증거로는 각종 유적지에서 발굴되는 자연목이나 가공한 나무에 소나무가 차지하는 빈도는 극히 낮다. 이유는 소나무의 자람 특성에서 찾을 수 있다. 햇빛을 좋아하는 소나무는 숲이 우거진 산 속에서는 다른 나무와의 경쟁에 뒤져서 잘 자라지 못한다. 인구가 급격히 증가하거나 오랜 전쟁으로 숲이 크게 파괴되어 햇빛이 많이 들어오는 공간이 많이 생기면 소나무는 무성해 진다. 따라서 반가사유상이 만들어 진 시기에 해당하는 삼국시대에 일본보다 우리나라에 질 좋은 소나무가 더 많이 자랐다는 아무런 증거가 없다.
셋째, 반가사유상이 우리나라 소나무, 그것도 특정지역인 양백지방소나무로 만들었을 것이라는 추정은 설득력이 없다. 이 추정의 근거는 ‘일본인 학자가 한국산 소나무로 만들었을 것이라고 하였으며 질이 좋은 소나무는 당시에도 춘양, 봉화, 울진으로 대표되는 양백지방에 많았다’는 데 있다. 앞에서 지적한 대로 그 일본인 학자는 조선 소나무로 만들었다고 주장한 바가 없으며 소나무로 만든 것인지 곰솔로 만든 것인지 조차도 명확하지 않다. 특히 당시의 산림구성이 지금과 같아서 반가사유상을 새길 만큼의 우량 소나무는 양백지방 소나무(춘양목)일 것이라는 추정은 어디까지나 가정일 따름이다.
에필로그 일본 광륭사 목조반가사유상은 제작 장소에 대한 논란은 여러 방면으로 검토해 볼 수가 있다. 그러나 50여 년 전에 발표한 논문 한편에서 소나무일 수도 있다는 간단한 내용을 근거로 제작지 추정의 근거로 삼는 것은 합당하지 않다고 생각된다. 또 일부학자들의 주장대로 우리나라 보다 일본에는 소나무의 분포가 적었다는 점을 받아 드리더라도 불상 하나 만들 정도의 재료는 일본에서도 손쉽게 구할 수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반가사유상의 재질이 소나무라는 사실은 반가사유상의 제작지가 한반도일 가능성을 제시하였을 따름이지 ‘한반도 제작설‘을 뒷받침하는 근거가 될 수는 없다.
* 적송(赤松, アカマツ) - 흔히 우리가 소나무를 적송이라고 부르는 것은 소나무의 일본 이름이다. 우리의 옛 문헌에 나타나는 소나무의 한자이름은 松, 혹은 松木이었으며 적송이란 이름은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기 때문이다. 적송이라는 이름이 처음 쓰여 지기 시작한 것은 대한제국 융희4년(1910년)부터이다. 한일합방 직전인 이 때 농상공부대신 조중용이 농상공부 고시9호로 공시한 화한한명(和韓漢名)대조표에서 소나무란 이름을 쓰지 말고 적송(赤松)을 쓰라고 한 이후 비판 없이 그대로 쓰고 있다. 비슷하게 쓰이는 육송(陸松)이란 말이 있다. 소나무의 또 다른 이름으로서 소나무가 주로 내륙지방에 많이 자란다는 뜻으로 육송이라 한다. 이 이름은 바닷가에 주로 자라는 곰솔에 대비하여 만든 이름으로 생각되며 근세에 만들어진 말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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