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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몬느 베이유 simone Weil는 1909년 파리에서 유다인 부모 사이에서 태어났다.
몀문 고등 사범학교에서 철학 교수 자격 학위를 받았지만 가난한 이들과 함께하기 위해 스스로
노동자가 되었다. 스페인 내전에 참전하고 제2차 세계대전 중 레지스탕스에 참여하는 등
사상을 삶으로 실천하기 위해 자신을 불살랐다. 폐결핵과 과로로 악화된 건강을 회복하지 못하고
1943년 서른넷의 짧은 생애를 마쳤다.
시몬느 베이유
눈부신 지성, 견고한 사랑
그 짧지만 고결한 삶에 관하여
시몬느 베이유는 20세기 종교 사상가 중에서도 매우 특색 있는 인물이다. 프랑스 철학자이며
노동운동가, 신비주의자로서 그는 노동자와 가난한 이들을 향한 길을 일생 동안 찾으며 그들과
함께했다. 신비주의적 체험을 통해 가톨릭교회의 문턱에까지 이르렀지만 끝내 교회 안으로
들어서지는 않았다.
에릭 스프링스티드 교수의 서설과 베이유의 글들을 선밸해 놓은 이 책은 베이유의 생애와 사상을
이해하는 데 탁월한 안내서가 될 것이다.
시몬느 베이유의 가장 중요한 후기 작품을 잘 선별하여 내 놓았다.
베이유의 혜안은 우리의 자기기만성을 통렬하게 꿰뚫고 있다.
독창적인 영적 지침서로 자리매김할 책이다.
- 샐리 커닌 In Search of Mary 의 저자
들어가는 말
20세기를 진지함이 결여된 시대라고 할 수는 없다. 물론 그
진지함이 항상 우리 인간의 정신과 육체에 깃들어 온 것은
아니다. 우리는 지금 도덕적 . 사회적 . 종교적 갈등이 몰아
치는 폭풍우 한복판에 놓여 있다. 구원의 도구들로 인해 외
려 파멸할 지경이다. 영혼의 참된 양식이 무엇인지 이따금
궁금했다. 하지만 빵 대신 돌멩이나 독사를 움켜 잡을 따름
이었다. 결국 저마다의 몽상 속에 웅크린 채, 우리를 한데
끌어당기는 그 무언가를 의심하고 두려워하며 지내 온 것
이다.
그런데 이 시대는 순수한 영성을 지닌 위대한 스승들을
배출하기도 했다. 타인에 대한 진정한 연민, 빛과 은총의 삶
을 증거하는 인물들이 없었다면 우리는 존재하지 못했을 것
이다.
시몬느 베이유도 이러한 증인들 가운데 한 사람이다. 유
례를 찾기 힘들 만큼 순수한 영성, 비범한 헌신, 명석한 지
성의 혼합체인 그녀는, 영성을 통해 빛을 추구하고 인간사
에서 정의를 찾는 이들을 향해 분명한 목소리를 낸 사람이
었다. 도덕적 헌신과 영적 이상이 상충하는 이 시대에 베이
유는 폭풍 속의 등댓불이라기보다는 양극과 음극 모두를 끌
어당기는 피뢰침의 역할을 맡았다.
그녀의 방식은 매우 독특하다. 삶과 저서를 살펴보면 그녀
는 종교적인 것과 비종교적인 것, 진보와 보수 사이의 경
계선을 의식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삶과 사상 안에 긍정
과 부정이 공존한다. 그녀는 교회 밖의 많은 이로부터 깊은
공감을 끌어냈고, 교회 안의 이들에게 다소 적대감을 안겨
주었다. T.S. 엘리엇은 시몬느 베이유를 두고, "스스로를 보
수주의자로 칭하는 대다수 사람보다 더 위계질서를 존중하는
한편 사회주의자를 자처하는 사람들보다 더 인민을 사랑한
사람"으로 모샤했다.(NR viii).
시몬느 베이유로부터 감화받은 사람들은 극히 상호 모순
적인 그녀의 특징을 순수한 영혼의 표현으로 받아들였지만,
이러한 특징은 또한 혼돈스럽고 갈피를 잡기 힘든 것이기도
했다. 하지만 나는 이 모순성을 그리 대단하게 생각하지 않
는다. 말년에 베이유는 자기 사상의 여러 갈래가 일목요연
한 데 놀라워했던 것 같다. 부모에게 쓴 편지에서 그녀는 자
산에게서 황금처럼 아주 조밀하고 단단한 어떤 속성을 발견
했다고 밝히고 있다. 그러면서 이 속성이 그다지 뚜렷하게
드러나지 않으리라는 데 깊은 우려를 표명했다. 사람들이
그 황금은 보지 못한 채 베이유 자신만을 보려 할 것이라는
생각에서다. 아우구스티누스가 손으로 하늘을 가리키는데
제자들이 하늘은 보지 않고 자신의 손가락만 바라본다고 불
평한 것과 같은 내용이다.
베이유가 맞다면 (점점 더 그녀가 옳다는 쪽으로 기울고 있는데)
그녀가 끌어당긴 양극과 음극은 아마도 우리가 겪는 혼돈의
반영이었을 것이다. 그녀 스스로 피뢰침이 됨으로써, 도덕
적이고 영적인 진지함을 폭풍 속에 처하게 했던 우리의 양극
의 균형을 잡고자 했던 것이다. 불균형을 복구하기 위해 그
피뢰침을 내리친 것은 바로 우리 자신이다. 시몬느 베이유
라는 인물 자체에만 몰두한 나머지 우리는 그녀의 진면목을
보지 못할 수도 있다. 시몬느 베이유를 거의 성인 반열에
올리려는 사람들도 있으나 베이유 자신은 아마도 반기지 않
을 것 같다.
그녀의 주요 사상과, 이 시대의 정통 사조에 반한다는 이
유로 논란을 불러일으킨 내용들에 대해 말하고자 한다.
나는 베이유가 도덕적 존재에 대해 알고 있었다고 믿는다
우리가 우리 자신을 도덕적이고 영적인 존재로 당연시 하는
것은 마치 물고기가 물을 대하는 것과도 같다. 하지만
그것은 어떤 대척점에 이를 때까지만 그러하다. 종종 놀라
며 날카롭게 반응하는 지접이자 위험에 처하기도 하는 바로
그 지점이다.
종교와 사회 그리고 도덕적 사상에 있어 시몬느 베이유의
특기할 만한 공헌은, 우리가 스스로를 인식함에 있어 파생
되는 혼란과 맹목성과 한계를 대하는 그녀의 예리한 직관이
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녀의 대안은 또 다른 공헌이다.
우선 그녀의 삶을 좀 더 자세히 들여다보면 모든 것은 보다
분명해질 것이다. 그녀의 삶에는 우리의 관심을 끌 만한
점과 반발을 불러일으킬 만한 점이 함께하고 있다.
시몬느 베이유는 1909년 2월 3일에 태어났다. 그녀에게
는 훗날 세계적 수학자가 된 오빠 앙드레가 있었다. 아버지
베르나르는 내과 의사였다. 아버지 직업 덕분에 그녀는 안
락하면서도 존경받는 중류계급 가정에서 성장할 수 있었다.
어머니 셀마는 자녀 양육에 헌신적인 사람이었다.
베이유의 가족은 유다인 혈통이었다. 드레퓌스 사건과 제
2차 세게대전의 유다인 대학살 사이에 살았던 유다인 대다
수가 그렇듯이 그녀의 가족은 자신들이 유다인이라는 사실
에 대해 크게 신경 쓰지 않으면서 프랑스 사회의 일원으로
동화되어 살고 있었다. 베이유는 조상에 대해 특별한 애착
을 느낀 적이 없었다. 오히려 일종의 반감을 가지고 있었는
데 특히 창세기, 이사야서, 욥기를 제외한 구약과 유다이즘
을 이야기할 때는 매우 비판적이었다. 결코 자신을 유다인
으로 내세우지 않았고 그 점에 대해 날카롭게 반응했다. 시
몬느 베이유가 누구인지 말할 수 있는 사람은 그녀 자신 말
고는 아무도 없었다.
오빠 앙드레 못지않게 명석했지만 그녀에게는 분명 다른
점이 있었다. 수학자로서 앙드레의 지성은 대단히 뛰어났고
일찍이 두드려졌기 때문에 그의 미래는 정해져 있었다. 지
적 능력이 중시되는 집안 분위기에서 시몬느 베이유는 적지
않은 조바심을 느꼈다. '열등감'은 그녀 자신의 능력을 찾아
가는 중요한 단서였다. 한 편지에서 그녀는 (스스로에 대해 진솔
하게 표현한 드문 경우인데) 자신을 괴롭힌 것은 가시적 성공의
결여가 아니라면서, "진정으로 나를 슬프게 만드는 것은 명
징한 왕국에서 내가 배제되어 있다는 느낌이다. 참된 위대
함만이 들어갈 수 있는 그곳은 진실이 머무는 장소다"(WG
64)라고 밝힌 바 있다. 사춘기에 심각한 정체성 위기를 겪으
며 그녀가 도달한 결론은, 그 왕국은 순수한 지성으로만 들
어갈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진리를 열망하고 온전히 거기에
투신한다면 누구라도 입성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진리의
이름 아래 "아름다움과 미덕, 모든 선행이 포함된다. 내게
있어 진리는 은총과 열망의 관계에 대한 궁금증이다. 굶주
림에 시달리며 빵을 구하는 이들에게 돌멩이가 주어지지는
않는다는 것이 나의 신념이다" (WG 64)라고 그녀는 덧붙였다.
도덕적 응축, 즉 '집중'은 시몬느 베이유의 재능의 핵심이
다. 그것은 단순한 재능과는 구별되는 것으로, 그녀는 자신
의 저술 전체에 걸쳐 이 사상을 진지하게 드러내고 있다. 종
교적 비유에 의존하지 않았지만 (신의 문제는 해결할 수 없는 것이
었다고 한다) 이를 통해 그녀의 종교적 사상은 꽃피게 된다.
그렇다고 해서 베이유가 지적인 면으로 가시적 성공을 거
두지 못한 것은 아니다. 그녀는 프랑스 최고 수준인 앙리 4
세 고등학교에서 알랭 교수로부터 철학을 배웠다. 인간 행
동을 중시한 알랭 교수는 그녀를 이해하고 인정해 준 사람
으로, 일찍이 그녀의 사상을 형성하는 데 큰 영향을 끼쳤다.
시몬느 베이유는 저 유명한 고등사범학교를 최초로 졸업한
몇 안 되는 여성 중 한 사람이었다. 그녀는 소수 정예 학생
들에게만 가능했던 철학 교수 자격 학위를 받고 졸업했다.
학교 다닐 때는 물론 졸업 후 프랑스 교육 체제 안에서
교직에 종사할 때 조차 시몬느 베이유는 도덕적이고 헌신적
인 인물로 기억되었다. 도덕적 열망을 지닌 좌파 운동가였던
그녀는 '붉은 처녀' 혹은 '치마 입은 돌격대장'이라는 별명으로
불리기도 했다. 대학 시절 그녀아 만난 적이 있는 시몬느 드
보부아르가 기억하기를, 그 당시 시몬느 베이유는 이미 도전적
태도로 명성을 얻고 있었ㄷ고 한다. 어느 날 소르본 교정에서,
인민을 먹이기 위해 혁명이 필요하다는 내용으로 베이유가
연설을 하고 있었다. 그때 보부아르는 인민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은 의미 있는 삶이라는 식의 철학적 의견을 내놓았다.
그러자 베이유는 보부아르를 일별하며 차갑게 응수하기를, 이제
껏 한 번도 굶주려 보지 않은 것이 분명하다며 보부아르의 철학을
프티부르주아적 산물로 단정했다(보부아르는 베이유의 솔직하고
엄격한 도덕성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고 한다. 중국의 지진 소식에
그녀가 드러내 놓고 울었다는 데서도 이런 특성은 잘 드러난다.
시몬느 베이유의 뜨거운 가슴은 전 세계 어디에나 똑 같이 적용되
었다).
베이유는 자신의 논문 지도 교수이며 저명한 파스칼 학자 인 레옹
브룬스비그 교수나 학과장같이 권위를 가진 사람들과는 거리를
두면서 그들의 권위에 도전하는 듯한 태도를 보이기도 했다.
결과적으로 그녀는 레옹 교수와 좋은 관계를 유지하지 못했고,
교수 역시 데카르트에 관한 그녀의 학위논문을 제대로 인정하지
않았다. 그녀가 파스칼을 좋아하지 않았다는 점도(비록 철학적
공통점은 있었지만) 적대적 관계의 한 원인이었다.
베이유가 교직을 시작할 무렵, 교육계 고위층은 그녀의
활발한 노동운동을 우려해 지방의 작은 도시로 발령을 냈
다. 물론 그곳에서도 그녀는 조용히 지내지 않았다. 최대한
검소하게 살면서 노동운동에 돈을 쏟아 부었다. 수업이 없
을 때는 야학에서 노동자들을 가르치며 그들과 자연스럽게
교유했다. 이러한 태도는 중산층 학부모들, 즉 자녀들을 '진
리의 왕국'에 입성시키기보다는 출세시키는 것이 목표인
부모들에게 문제가 되었다. 베이유가 르페 시에서 실업자들을
위한 파업을 지휘하자 학부모들은 이를 문제 삼고 나섰다.
그러나 불합리한 반발에 그녀는 결코 동요하지 않았다.
이러한 일화는 빙산의 일각에 불과하다. 그녀가 파리에
있는 세 군데 공장에서 일하던 1934~1935 년 무렵을 아는
것이 중요하다. 당시 그녀는 「자유의 원인과 사회적 억압에
대한 고찰」이라는 글을 막 끝낸 참이었다. 당당하고 비판적
인 어조로, 인간이 노동을 통해 존엄성을 지킬 수 있음을 일
깨우는 글이었다. 마르크스가 인간의 사상과 존엄성과 거대
기업 사이의 관계를 분석한 데 대해 그녀는 비판적이었다.
개인의 사고를 장악하기가 거대 기업을 통제하기보다 어렵
다는 것이 그녀의 생각이었던 것이다. 마르크스의 주장은
반대였다. 인간의 사상은 '존재의 물적 토대'에 의해 규정된
다는 것이다. 이런 관범에서 본다면 인간의 사상은 자유롭
지 못하며, 인간 존재는 거대 산업에 속한 작은 톱니바퀴 하
나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베이유는 이러한 관점을 현
대 과학 기술에까지 확대시켜, 경제를 운영하는 것은 더 이
상 자본주의가 아니라 기술 관료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그
들조차도 완전히 책임지고 있는 것은 아니다. 그들 역시 조
직의 일부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6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지속되고 있는 논제다.
물적 토대에 의해 인간이 규정된다면 그 안에 인간의 존
엄성은 존재할 수 있을까? 인간은 스스로의 운명을 책임질
수 있을까? 마르크스만으로는 충분한 답이 되지 못했다. 너
무나 완벽한 이론에 마르크스 자신의 해결책마저 모순되어
보였다. 인간의 노동은 항상 필연성에 종속된다는 점을 인
정하는 데서 해결책을 찾을 수 있다고 베이유는 생각했다.
필연성이라는 한계를 지니고 있다 해도 인간의 존엄성은 완
성될 수 있다. 인간의 마음이 이 필연성을 인식하고 그것을
단순히 외적인 그 무엇이 아닌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 자유
롭게 통제함으로써 가능해지는 것이다.
실제로 이것은 노동자들이 공장이나 사회에서 보다 큰 계
획을 실현하고 자신들의 존재와 노동 조건을 강인시키는 것
을 의미한다. 그래야만 비로소 그 계획은 도덕적으로 노동
자 자신의 것이 될 수 있다고 그녀는 글에서 주장한다. 대단
히 성숙한 사고와 성찰의 산물이었다. 하지만 베이유는 자
기 글에 온전히 만족하지 못했고 이것이 그녀다운 모습이었
다. 결과적으로는 알랭 교수의 가르침대로 그녀는 이론을
현실과 접목시킴으로써 자신의 사상을 완성하려 애썼다. 공
장에서 일하는 동안 그녀는 말뿐만이 아닌 자기 나름의 방
식으로 깨달음을 얻어 갔다.
베이유는 결코 관찰을 통해서만 경험을 쌓는 사람이 아니
었다. 안온한 가정환경에도 불구하고 그년느 노동자들이 사
는 파리의 작은 아파트에서 얼마 안 되는 급료로 생활했다.
쉽지 않은 길임을 그녀 자신도 잘 알고 있었다. 1930년대 공
황기의 노동 현실은 비참했다. 처음에 베이유는 인내심과
동료애를 가지고 동료 노동자들에게서 존엄한 인간의 모습
을 발견하려 애썼던 것 같다. 그러나 기대는 무참히 무너졌
다. 누구보다도 베이유로서는 견디기 힘든 체험이었다. 일
이 서툰 그녀에게 작업량은 버겁기만 했다. 고질적인 편투
통도 문제가 되었다. 이 모든 것이 그녀에게는 뼈아픈 인식
이었다. 악조건하에서의 노동이란 대개 굴욕적일 수밖에 없
으며 인간의 존엄성을 파괴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공장 시스템에 속한 노동자는 아무것도 아닌 존재였다. 그
녀도 이미 알고 있었지만 정작 노라운 것은 노동자들 자신
이 이러한 문제를 대수롭지 않게 여긴다는 사실이었다.
영혼에 침윤해 있는 굴욕, 거기서 베이유는 고통을 발견
했다. 인간성이 품위를 지킬 수 없게 만드는, 결코 동의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고통이란 인간을 인간이게 하는 힘을
말살하는 것이다. 인간의 권리와 주체성, 존엄성 등을 몽땅
파괴한다. 그녀가 애초에 가졌던 낙관주의는 산산이 부서지
고 말았다.
1935년 말에 베이유는 공장을 떠난다. 육신은 비록 기진
맥진해졌지만 현장을 통해 배우려는 마음은 여전했다. 그녀
는 멀찌감치 떨어져 관망하는 것으로 만족할 사람이 아니었
다. 가르치는 일과 건강 때문에 이후 삼 년 동안은 간헐적으
로 농장에서 일했다. 평화주의자로, 또 무정부주의 노조원
으로 스페인 내전에 참여하기도 했다. 이 당시 그녀는 선을
위한다는 명분으로 자행되는 악의 현장을 목도한다. 파시스
트뿐만 아니라 자신의 동료들조차도 사제를 살해하거나 자
신들에게 종조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열다섯 살 소년을 죽이
기도 했다.
어느 날 베이유는 끓는 기름솥에 걸려 넘어져 화상을 입
는 바람에 집으로 돌아와야 했다. 이 사건으로 그녀는 화를
모면한 셈이 되었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의 부대원 모
두가 전투에서 사망한 것이다. 조르주 베르나노스에게 보낸
편지에서 그녀는 스페인 내전의 체험에 관해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자기희생의 이상을 품고 달려간 전자에서, 무
한한 잔혹함과 최소한의 인정만을 지닌 채 마치 용병처럼
서 있는 자신을 발견합니다" (SL 109).
베이유의 삶에서 영적으로 심오한 변화가 일어난 때가 바
로 이 시기였다. 그녀를 이해하는 데 있어 이 전환점은 특히
중요하다. 그녀가 과거에 배운 것들과 완전히 동떨어진 것
은 아니고 모두 그 안에서 이루어진 변화다.
편지 글로 이루어진 『영적 자서전』에서 베이유는 그리스
도교와의 '참으로 의미심장한' 세 번의 '만남'을 서술하고 있
다. 첫 만남은 공장 체험 직후였다. 그녀의 요양을 위해 부
모와 함께 포르투갈에 머물던 어느 날 밤이었다. 작고 가난
한 어촌 마을 사람들이 마을의 수호성인을 기념하는 모습을
베이유 혼자서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는 비참함을 느꼈다.
이마에 낙인이 찍히는 노예처럼 고통이 그녀 자신을 태우는
것만 같았다.
보름달 빛이 밤바다에 흘러 넘치고 있었어요. 어부의 아내
들이 행령을 지어 차례로 배에 올라 기도를 드렸지요. 저마
다 촛불을 들고는 저 아득한 고대로부터 전해 내려온 듯한
구슬픈 곡조를 흥얼거리고 있었습니다. 나는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어요. 그러다 문득 그리스도교는 과거에 노예들
의 종교였음에 틀림없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노예들은
이 종교를 따를 수밖에 없었으리라는 ..... . 그런데 나는 거기
에 속하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WG 67)
두 번째 경험은 1937 년 아시시에서였다. "평생 처음으로 무
릎을 꿇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세 번째 체험은 더욱 강렬했는데, 그리스도교 영성에 대
한 자신의 체험을 분명하게 그리고 있다. 1938 년 성주간에
그녀는 어머니와 솔렘 수도원의 전례에 참석했다. 아름다운
찬송으로 유명한 수도원이었다. 그곳에서 머무는 동안 베이
유는 젊은 영국인 사제 한 사람을 만나게 되었다(당시 그는 미
국 로즈 장학생이었다). 그는 베이유에게 영국 형이상파 시인 조
지 허버트를 소개해 주었다. 그녀는 허버트의 시 「사랑」을
금세 외워 그 후로도 종종 암송했다. 특히 두통이 심할 때마
다 이 시를 외웠다. "이 시를 외우고 있을 때면 하느님께서
내 존재를 감싸 안고 계시는 듯하다" (WG 69).
베이유에 대해 얘기할 때 우리는 그녀가 남긴 말의 이면
을 통해 그녀의 삶을 엿보려는 경향이 있다. 마치 암호를 해
독하려는 듯 애를 쓰기도 하는데 사실 베이유는 그만큼 어
렵게 말하지 않았다. 그리스도교와의 만남에 대해 남긴 글
들을 통해 그녀의 영성을 두 가지 관점에서 이해할 수 있다.
첫째, 신앙의 본성과 베이유 자신의 생각을 통해 초자연
적인 무엇에 관해 이야기하고 있다. 자신의 이성으로는 신
앙을 납득할 수 없다는 점을 그녀는 분명히 하고 있다. 훗날
"나는 여전히 반쯤은 거부하고 있다. 사랑이 아닌 이성으로"
라고 말한 바 있지만, 그녀는 결코 신앙을 부정한 것이 아니
다. 고통 한가운데서도 "사랑하는 이의 얼굴에 피어나는 미
소를 읽듯이" 사랑(신)의 현존을 느끼는 사람이었다. 그녀에
게 신앙은 지적 영격에 속한 것이 아니었다. 비록 지적으로
심오한 결론을 내리고 있을지라도 지성은 그저 스텨 지나가
는 희미한 빛일 뿐이다. 우리는 지성을 이용하는 것디다. 본
디 신의 소유였던 것이 은총을 통해, 선과 사랑을 발견하고
그것에 화답하며 사랑하는 이의 얼굴에서 미소를 읽어 내는
능력으로 우리에게주어진 것이다.
둘째, 고통은 또 다른 빛으로 등장한다. 선과 사랑은 고통
에 패배하지 않는다는 사실은 그녀는 문득 깨달았다. 영혼
이 파괴되는 가운데서도 고통받는 신은 현존할 수 있으리라
는 인식이기도 하다. 그녀는 「신의 사랑과 고통」이라는 글에
서, 십자가에 매달린 예수처럼 신은 고통 안에서 온전히 현
존한다고 말한다. 인간이 필연성의 구조를 이해함으로써 그
리스도를 체험할 수 있고, 그 체험으로부터 성화될 수 있다
는 믿음이 고통을 통해 사라진다는 통찰을 통해, 고통에 대
한 베이유의 생각은 변화하게 된다. 사랑을 고대하는 이들
을 결코 외면하지 않는 신을 향해 인간이 완전하게 다가갈
수 있는 방식이 바로 고통이다. 고통은 자아의 장막을 걷어
낼 것이다. 신과 우리 사이를 가로막는 자아, 우리 힘만으로
는 어찌할 수 없는 자아를 걷어 내게 할 것이다. 베이유는
"그리스도교 정신의 초자연적 위해함은 고통을 치유하기 위
함이 아니라 고통 자체를 위해 초자연적 힘을 이용한다는
데 있다" (GG 132)
솔렘 수도원에서의 체험은 베이유의 사상에 일대 전환을
가져왔다. 그때부터 그녀는 정치. 사회적인 글뿐만 아니라,
신을 염두에 둔 영적이고 철학적인 글들을 쏟아 내기 시작
했다. 그녀의 사상과 인격은 어떤 면으로 더욱 반항적인 색
채를 띠게 되었다. 직접적이고 조직적인 정치 활동에서 물
러나는 데서부터 회심은 이미 시작되었다. 동시에 그녀가
세상에 실제로 투신하는 방식은 더욱 과격해졌기 때문에 우
리는 종종 혼란스럽기도 하다.
히틀러가 파라하를 침공했을 때, 수십 년간 당시의 지식
인들이 고수해 오던 평화주의를 베이유는 포기한다. 나치가
파리를 향해 진격해 오자 그녀는 파리를 지키지 못한 데 대
해 크게 낙심하고는 부모를 따라 미지못해 마르세유로 피신
해 간다. 마르세유에서 새로운 활동에 온전히 자신을 투신
한다. 그녀는 동료들과 함께 반나치 운동을 시작한다. 체포
나 구금에 대한 두려움 없이 그녀는 전단을 돌리고 수용소
를 방문했는데, 체포당해도 별다른 증거가 없었기에 곧 풀
려났다. 철학자 구스타프 티봉의 농장에서 다시 일하게 된
것도 이즈음이었다. 그의 집에서 편안하게 지낼 수 있었음
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일부러 낡은 헛간에 머물렀다.
이즈음 베이유가 최전선에서 활동할 간호 부대를 조직하
기 시작한 일은 매우 중요하다. 독일 전설에서 영감을 받은
듯한 이 계획은 젊은 처녀들이 최전선에서 간호 활동을 벌
임으로써 병사들로 하여금 자신들이 조국과 인민을 위해 싸
우고 있다는 사실을 상기시켜 주는 역할을 하도록 하려는
의도였다. 베이유는 젊은 여성들로 구성된 낙하산 간호 부
대를 만들고 싶어 했다. 최전선으로 낙하산을 타고 들어가
전장 한가운데서 군인들을 치료하겠다는 계획이었다. 죽음
을 각오해야 할 만큼 위험한 일이지만 자유의사와 연민으로
실천함으로써 연합군의 명분의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으로
믿었다. 제아무리 선한 동기로 참여한다 해도 전쟁은 인간
의 영혼을 파괴하기 마련이다. 이러한 동참을 통해 명분과
정신을 되살리고자 베이유 스스로 앞장서 걸어 나가려 한
것이다.
그녀는 계획을 실현하기 위해 마르세유를 떠나 부모를 따
라 뉴욕으로 향했다. 거기서 프랑스의 전장으로 떠날 생각
이었다. 뉴욕에서 잠시 머문 뒤 런던으로 가서 '자유 프랑
스' 정부와 접촉한 그녀는 그곳에서 여러 편의 글을 쓰기 시
작한다. 전쟁이 끝난 뒤 정부가 프랑스로 복귀한 후 다루어
야 할 문제들을 분석한 보고서도 있었다. 방대한 양의 저술
이었다. 그 가운데는 정치. 사회적 문제에 대한 새롭고도
뛰어난 접근을 다룬 『뿌리내리기』도 포함되어 있다. 이 접근
은 두 가지 면에서 주목할 만하다.
첫째, 사회적 활동은 프랑스 혁명 이후 줄곧 그래 왔던 것
처럼 권리보다는 의무의 도덕적 범주에 근접해 있다는 것이
베이유의 주장이다. 둘째는 사회적 활동이 과거, 즉 필연성
이 재배하는 자연 세계 그 자체에 노동을 통해서 생생하게
뿌리내리고 있다는 사상이다. 이러한 사상을 통해 이제 초
기에 그녀를 사로잡았던 주제로 되돌아옴으로써 완전한 하
나의 원을 이루게 되었다. 그런데 이제 여기에 신앙의 빛이
더해졌다. 비록 조용한 움직임이기는 했지만 간호 부대 창
설 없이는 이 모든 사상과 저술 활동이 그녀에게는 아무 의
미 없는 것이었다.
계획은 끝내 실현되지 못했다. 드골은 그녀의 계획을 미
친 짓으로 여겼다. 1943 년 봄, 베이유의 육체는 마침내 무너
지고 만다. 결핵을 앓고 있는 데다가 과로한 탓에 상태가 악
화된 것이다. 페니실린이 없던 그 당시 폐결핵 치료에는 휴
식과 섭생이 중요했다. 그런데 베이유는 매우 골치 아픈 환
자였다. 그녀는 음식을 계급적 산물로 여겨 항상 의식적으
로 절제했다. 점령당한 조국 프랑스의 인민을 생각하며 그
들만큼만 먹었던 것이다(어떤 의미로 이것은 단식이었다.
그녀는 쓰러지기 전부터 이렇게 살고 있었다. 런던에 도착
하기 전에 이미 자신의 병을 알고 있었던 것 같다). 병은
점점 악화되었고, 결국 그녀는 1943 년 8 월 24 일 잉글랜드
켄트 지방의 애쉬포드에서 숨을 거두었다.
우리는 지금 매혹과 거부감을 동시에 불러일으키는 어느
괴짜의 삶(우리에게 익숙한 세상 밖에 살았던)을 보고 있다.
회심 후 그녀의 개인적. 종교적 삶에서 그 별남은 더욱 두드
러진다. 그러나 한편으로 집중과 명징성이라는 측면에서 볼
때 그녀의 생은 대단히 아름답고 매력적이다. 그녀의 글에서
뿐 만 아니라 실제 삶에서 이런 아름다움을 발견하기란 어렵
지 않다. 구스타프 티봉의 농장에서 일할 당시 베이유는 매
일 아침마다 「주님의 기도」를 '극도로 집중하여' 그리스어로
암송했다고 한다. "인식은 두 번째 혹은 세 번째에 이르러 무
한대까지 확장된다. 동시에 이 무한대의 무한대 부분을 채
우면 거기에는 침묵이 있다. 이 침묵은 소리 없음이 아니라
긍정적 인식의 객체다. 그것은 소리보다 더 긍정적이다. 게
다가 이런 암송의 순간이나 또 다른 어떤 순간에 신은 참으
로 내개 친밀하게 현존한다" (WG 72).
뉴욕에 있을 때 그녀는 미사에 정기적으로 참석했는데 할
렘 가에서 흑인들과 함께 미사를 드리기도 했다. 힘은 비록
없어도 그녀만큼 자유에 대한 열망이 큰 사람들이 그곳에
있었다.
그녀에게 신앙은 기쁨과 승리 이상의 의미는 아니었던 것
같다. 임종을 앞두고 부제였던 친구가 대세를 주려 했으나
그녀는 한사코 거부했다. 그토록 침잠하여 숙고했던 가톨릭
교회의 성체성사를 직접 받아들인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교
회 안으로 들어가지 않은 이유를 그녀는 『영적 자서전』에서
밝히고 있다.
『영적 자서전』은 베이유가 페렝 신부에게 보내는 일련의
편지 글로 구성되어 있다. 도미니코회 사제인 페렝은 마르
세유에서 가까워진 사람인데 맹인이었다. 그는 베이유가 우
주의 놀라운 은총을 받아들이는 모습에 큰 감동을 받았다.
베이유가 자기 사상의 중심인 고대 그리스에 관해 글을 쓰
게 된 것도 페렝 신부의 권유 때문이었다. 그녀는 페렝 신부
에게 자신은 교회의 '사회적 특성'을 특히 우려한다고 밝히
고 있다. 신에게 집중해야 할 교회의 진정성이 그 거대한 조
직 형태에 의해 훼손된다고 보았다. 그 점에 있어 그녀는 더
욱 게세게 맞서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한 교회로 들어간
다면 그녀 자신조차 변하게 될 것이라 여겼다.
가톡릭 신자가 되기를 거부하는 또 다른 이유도 있었다.
만약 교회로 들어간다면 교회 밖의 것들을 배신하는 셈이
된다는 것이 이유였다. 교회 밖의 것들이란 고대 그리스 사
상뿐만 아니라 다른 영적 전통들도 포함하고 있다. 그녀의
글과 사상은, 그리스도교는 물론이고 『바가바드기타』나
『우파나샤드』같은 동양 사상들을 아울러 형성되었다. 그
녀는 이것들을 결코 포기할 수 없었고, 이러한 외부 사상들을
거부하는 교회를 전체주의라고 비판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그녀가 ㄱ회를 거부한 결정적 이유는, 신이 그녀를 교회 안
에서 원하지 않는다는 믿음에 있었다. 신에 대한 순중은 그
녀의 모든 문제의 핵심이었다. 심지어 구원이 자기 발치에
놓여 있더라도 신의명령이 없다면 결코 집어 들지 않을 것
이라고 그녀는 『영적 자서전』에 적고 있다.
이런 점에서 그녀의 불안정한 심서의 한 부분이 분명히
드러난다. 한때 이것은 자부심이었다. 크나큰 망설임인 동
시에 위대함으로 나아가려는 욕망이었다. 자아를 추구하는
일종의 만용이었다. 십자가에서 고통받는 예수를 생각할 때
그녀 스스로 인정하기를, 그것은 '질투'였다(이것이 죄라는
것을 그녀도 알고 있었다). 자신을 위해서 베이유는 어떤 일
도 하지 않았다. 이런 점은 많은 독자로 하여금 그녀를 신뢰
하게 하기보다는 오히려 그 반대의 위험으로 이끈다. 신과
이웃을 완전하게 사랑하기 위해서 우리 자신이 '탈창조' 되
어야 한다는 베이유의 주장은 9일부의 주장에 따르면) 위험
할 뿐만 아니라 마니교적이며 비인간적이기까지 하다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어떻게 말할 수 있을까? 베이유가 불순했
다고 여기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얕은 관점으로
는 베이유의 진정성을 놓칠 수 있다. 교회 안으로 들어오기를 거부
한 것은 단순한 갈등의 결과가 아니다. 그녀 스스로 부름
받았다고 느낀 것은 사실이었고 그것은 거부할 수 없는 소명
이었다. 『영적 자서전』에서 베이유는 '나'라는 표현을 거의
사용하지 않았다. 영적으로 '나'는 아무 위치도 차지하지 않
지만 그녀에게 도움이 되는 위치를 일깨우는 실마리가 된다.
자신을 돌보지 않았다고는 하나 그녀는 언제나 진리에 관심을
두고 있었다. 그녀에게 진리는 추상적인 것이 아니라 삶 안에
존재하는 그 무엇이라는 확신이 있었다. '신의 문제'는 냉철
하게 멀찍이 떨어져 관망하는 것만으로는 풀릴 수 없고,
오로지 자신을 신에게 내던짐으로써 해결할 수 있다는 사실을
그녀는 깨달았던 것이다.
공장에서 사람들가 접축함으로써 공장 생활의 진면목을
발견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삶의 진리와 신에 대한 진리도
오직 접촉을 통해서만 얻을 수 있는 것이었다. 그 접촉이 우
리에게 도움이 되는지 아닌지를 따지며 자신의 안위를 걱정
하지 않을 때라야 비로소 진실한 접촉은 가능해진다. 그렇
게 맞닥뜨리는 진리에로 우리는 기꺼이 회심할 수 있어야
한다. 자신의 목적을 위해 진리를 통재할 수 있는 방법을 우
리는 알지 못한다. 그러나 베이유는 호된 내적 투쟁을 통해
이 진리의 중ㅇ성을 발견한 것이다.
이것이 그녀가 인간에 대한 모든 관념을 끌어당기는 피뢰
침이 되는 까닭이다. 그녀의 관심은 생의 진리에 있었다. 우
리는 이 점을 좀 다르게 볼 것이다. 자아에 대한 현대적 관
점은 권리와 개인적 발전의 개념으로 대체되었다. 우리는
종종 타인이 우리에게 기대하는 바에 부응하여 우리가 무엇
을 할 수 있고 또 무엇을 해야 하는가 하는 관점에서 자신을
바라본다. 더 나쁜 것은 자기 확신이라는 우상숭배적 관점
이다. 이것은 아주 뻔하고 천박한 관점이다. 그런데 우리는
이것을 인간 정의에 대한 인식의 성장이라는 그럴싸한 비유
로 해석하려는 경향이 있다. 그렇게 우리 스스로 힘을 키우
고 그 힘을 나눔으로써 인류의 선을 발견하게 된다고 믿는
것이다. 자본주의 경제체제가 도덕적이고 영적인 자아를 위
해 만들어졌다고 믿으려 한다. 생산과 경쟁을 증진시킴으로
써 가난한 이들을 도울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과 마찬가지
로, 우리 모두가 저마다의 힘을 증진시킴으로써 도덕적으로
융성해질 수 있다고 믿는 것이다.
힘 있는 자아는 자유와 자율성을 지닌 존재다. 그것이 바
로 우리가 완전한 인간임을 의미하는 것으로 편협한 이기심
과는 분명 다르다. 정의는 보편적 권한 분산과 자기 결단이
있을 때 성취되는 것이다.
베이유가 자유와 자율성을 유지하는 데 자신의 힘과 재능
을 사용하지 않고 그 힘을 발전시키기를 거부했다는 점에서
우리는 그녀가 스스로를 파괴했다고 여긴다. 그녀의 죽음이
크나큰 상실로 느껴진다. 그녀 자신에게는 물론이고 그녀로
인해 도덕적 혜택을 제공받을 수 있었을 그 누군가를 위해
서도 그렇다.
하지만 고통이 그녀에게 보여 준 것이 무엇인지 잘 살펴
본다면 우리는 그녀를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은 그저
단순한 시스템의 문제가 아니다. 물론 그 당시 공장을 비롯
한 많은 조직이 고통을 양산해 낸 것은 사실이다. 인간의 영
혼은 연약하여 부서지기 쉬운 것이다. 그러나 억압(자기 역량
의 억제)과 부정 가운데서도 우리는 온전하고 고결하게 남을
수 있다. 문제는 (베이유가 초기 글에서 밝힌 바와 같이) 체
제를 개혁하는 것이다. 고통은 영혼을 쥐락펴락할 수 있다.
베이유가 「신의 사랑과 고통」에서 분명히 밝히고 있듯이,
육체적 고통을 포함해서 고통이란 대개 사회적 모욕의 문제
다. 자신을 포함한 누군가로부터 더 이상 주목받지 못한다
는 사실을 인식하는 것이다. 여기서 약자들은 힘을 가질 수
없다. 인간 사이에서 인간적 힘을 휘두르는 사람은 살아남
을 수 없다.
힘은 그 자체로 영혼을 불태워 버린다. 힘은 더 이상 인간
을 스스로의 주인이 아닌 타인의 대상으로 만들어 버린다.
우리 자신은 타인들 사이에서 행동하는 자아, 타인들이 우
리의 행동을 존중하도록 요구하는 자아다. 그런데 고통받는
이들은 더 이상 자신의 행동을 통제하지 못한다. 그들은 더
이상 일관된 계획으로 인간적 힘을 집중시킬 수 없다. 더 이
상 효율적으로 누군가에게 영향을 끼치지도 못한다. 고통은
불시에 닥쳐오는 것이기에 고통받는 이들은 그 까닭을 알
수 없다. 마음으로 이해할 수 없고 이 상황을 받아들일 방법
을 찾을 길이 없다. 세상은 혼돈스럽고 의미 없고 위험한 곳
으로 느껴진다. 희만은 사라지고 고통당하는 이들은 스스로
를 증오하는 것이 불가피해진다.
아무리 좋은 의미라도'자력화'라는 말은 문제를 더 악화
시킬 뿐이다. 고통당하는 이들은 우리의 동정과 우리 자신
의 이미지, 우리 자신의 도덕적 자력화의 수단이 되며 그들
도 그것을 인식하고 있다. 영혼을 파멸로부터 구하는 한 방
도로써 고통의 가능성과 '자력화'의 불가능성을 거론하는 것
은 베이유에게 인간과 정의를 현대적으로 어떻게 해석할 수
있을 것인가 하는 현실적 문제를 제기했다. 또한 우리가 자
력화로부터 취하곤 하는 행복감과 충만감은 완벽한 덕성과
는 개념적으로 다른 것이다. 그것은 거짓 왕국이다. 베이유
에게 필연성과 선은 별개의 것으로 필연성이 선을 만들어
낼 수는 없다. 만약 고통이 없다면 지금 있는 곳을 천국으로
여길 것이라고 그녀는 말했다. 그것은 끔찍한 가정이다. 우
리의 고뇌를 해결해 줄 수단에 불과한 하나의 가능성에 매
달려 선을 추구하며 살아간다는 것, 그렇다면 대안은 어디
있는가? 어디에 완전한 사랑과 정의가 있는가?
그것은 예수의 십자가를 통한 신의 사랑이다. 그 사랑과
고통에서 우리는 진리의 순교자 혹은 질시 때문에 처형당하
는 영광의 왕이 아니라,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 그리스도 자
체를 보아야 한다고 베이유는 주장한다. 그녀에게 예수는
순수하게 고통받는 존재다. 예수는 고통 가득한 세상과 아
버지에 대한 사랑에 자신의 운명을 맡겼다. 비록 버림받았
지만 예수는 이것을 아버지의 뜻으로 받아들였고 결코 사랑
할 수 없을 것 같은 상황에서조차 사랑하기를 멈추지 않았
다. 마음에 분노를 담아 두지도 않았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
와 지상에 버려진 아들 사이에, 그리고 충만과 공허 사이에
궁극적으로 완전한 사랑의 끈이 이어져 있다고 베이유는 말
한다.
예수의 사랑은 세상에 대한 신의 사랑의 현존이다. 고통
이 궁극의 악은 아니라는 사실을 증명하는 것이기도 하다.
예수는 우리가 고통을 어떻게 극복해 가야 하는가를 보여
주는 단순한 본보기가 아니다. 공허를 받아들임으로써 예수
는 고통을 극복했다. 보잘것없는 인간 존재를 받아들임으로
써 세상에 생명을 준 것이다. 이제 필연성은 적대적인 그 무
엇이 아니다. 플라톤의 표현대로 '선에 의해 설복당한' 예수
의 자아 비움은 생명을 위한 것이다. 자기가 아니라 다른 이
의 생명을 위한 것이다. 사랑이 권력을 누르고 사심 없는 마
음이 자율성을 누를 때 그것이 우리 안에 있는 예수의 사랑
이며 우리 영혼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이 완전한 사랑과 정의의 패
러다임을 제공함으로써 인간 생명이 신적 생명의 모든 단계
에서 살아갈 수 있게 되는 것, 이것이야말로 베이유를 이해
하는 단 하나의 열쇠가 된다. 필연성의 밀고 당김으로 생성
된 자아가 완전히 탈창조될 때 고통 안에서 완벽한 사랑을
진술하는 것이 가능해진다. 신과 인간 사이를 그 무엇도 가
로막지 않을 때 신의 사랑은 온전히 현존할 수 있다. 더구나
베이유는 그 패러다임을 창조에 적용한다. 신은 세상을 창
조함에 있어 힘을 사용하지 않는다. 신은 세상의 질서 안에
서 모든 존재를 포기한다.
예수의 자기 비움과 자신을 내주는 사랑은 충만한 기쁨에
서 비우의 고통에 이르기까지 삶의 모든 단계에 함께하고
있다는 사실을 이해하는 것은 중요하다. 우리가 완전히 탈
창조될 때만 신을 사랑하는 것은 아니다. 베이유는 '신의 사
랑의 함축 형태'를 제시한다.
"너의 주님을 사랑하라"는 계명이 우리에게 내려온 이래
리어진 신이 미래의 신부의 손을 잡기 위해 다가올 때 받
아들이거나 거절할 수 있는 사랑, 만남을 지속시키는 사랑
을 생각하게 된다. 여기에 영원한 의무가 함축되어 있다.
이러한 사랑은 그 자체로 신을 가지지 못한다. 신은 영혼
안에 현존하지 않으며 이제껏 그랬던 적이 없다. 그러므로
다른 대상이 있어야 신의 사랑의 운명이 결정된다. 이것은
간접적이고 비유적인 신의 사랑이다(WG 137).
신의 사랑에 대한 비유(이웃에 대한 사랑, 세상의 아름다움에
대한 사랑, 종교 의식에 대한 사랑) 안에서 신은 비밀스레 현
존한다. 신의 사랑을 만드는 것은 인간의 행동으로써 자신을
지키거나 보존하는 것이 아니다. 타인, 친구, 자연, 그리고 성
체 안에 현존하는 신에 이르기까지 자신을 여는 행위에 의해서
가능해질 뿐이다.
예를 들어 우리가 타인에게 집중할 때, 자신의 이익과
계획이 제 스스로 발현할 때까지 놓아둘때 신의 사랑은
우리 안에서 강생한다. 이것이 바로 고통받는 이들에게
삶을 되돌려 주는 유일한 방법이다. 자율성을 포기함으로
써 그 안에 생명이 다시 살아나게 하는 것이다.
선이 지배하는 세상의 질서에 따르는 과학이 기계문명을
대체하게 될 때, 그리고 과학이 권력에 맹종하지 않으며 세
상의 아름다움에 대해 숙고할 때 이 세상의 아름다움은 드
러난다. 이런 무조건적 사랑은 충일한 영혼과 성체의 덕성
을 지닌다고 베이유는 말한다. 신이 영혼 안에 완전히 현존
할 때 사랑은 사라지지 않는다. "사랑은 무한히 강해지고 모
든 사랑은 단 하나의 사랑으로 결합한다" (WG 138).
이 패러다임은 베이유 후기의 정치 사상에서도 드러난다.
권리 개념이 의무 개념의 정치적 정의로 대체됨에 따라 베
이유는 정치적 정의를 이성적으로 균형 잡힌 권력(사적이든 공
적이든 간에) 집중의 문제로뿐만 아니라 직접적 인간 개입에
의해 균형 잡힌 정치적 정의의 문제로 만들고자 고심했다.
이 개입은 타인의 동의를 구하려는 것일 뿐 위협은 결코 아
니었다. 그녀는 이것을 일종의 배개인적 정의라고 불렀는데
추상적 의미에서가 아니라 우리가 흔히 개인적이라고 칭하
는 의미에서다. 타인을 진지하게 대하기 위해서는 비개인적
이어랴 할 필요가 있다. 그녀는 우리에게 개개인을 진지하
게 대하는 것의 의미를 전하고 있는 것이다.
콜로새서에서 사도 바오로는 '낡은 자아를 벗는 것'과 '새
로운 자아를 입는 것, 즉 창조주의 이미지에 따른 지식으로
새롭게 되는 것'에 대해서 말하고 잇다. 새로운 자아는 '신
안에, 예수 안에 숨어 있는 자아'로서 궁극적으로 묵은 자아
를 벗어 낸 결과물이다. 유사한 의미에서 베이유의 탈창조
역시 자아 파괴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새것을 받아들이
기 위해 낡은 것을 벗어 버리는 것이다. 인간 행동의 새로운
중심을 발견하는 것이다. 여기서 베이유는 토마스 머튼 같
은 20세기의 다른 영적 지도자와 궤로를 같이한다. 물론 그
녀가 낡은 자아를 대하는 방식이 훨씬 덜 너그럽기는 하다.
우리의 자기기만과 낡은 것을 은근슬쩍 '새것'이라 부르려는
시도를 베이유만큼 잘 꿰뚫어 본 사람은 없었다.
자기가만의 유혹은 아마도 크나큰 우려의 뿌리가 되었을
것이다. 바오로 같은 이들과 마찬가지로 베이유에게도 창조
주의 이미지 안에 있는 새로운 자아는 대단히 중요한 것이
었다. 그녀에게 그 이미지는 다른 이들의 생명을 위해 자신
의 힘을 포기한 예수의 이미지였다.
● ● ●
베이유 전집이 출판됨으로써 그녀의 작품은 총 열다섯 권이
되었다. 그토록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난 데 비추어 볼 때
방대한 양이라 할 수 있다. 여기 소개된 것은 그중 극히 일
부에 불과하다. 독자들에게 글의 선별 원칙을 분명히 해야
할 것 같다. 모두 베이유의 말년 작품들에서 취한 글로 마르
세유에서 지내던 당시의 에세이들이다. 연대기순으로 엮은
것이 아니므로 어떤 순서로 읽어도 좋다. 다만 그녀의 사상
에서 중요한 논점들을 발전시켜 나가는 순서로 배열했음을
밝힌다. 순서대로 읽어 나간다면 베이유 사상의 발전 방향
을 (개념에서 시작해 그 적용에 이르기까지) 엿보는 데 도움
이 될 것이다. 따라서 1장은 '신의 사랑'으로 시작한다. 그녀
의 영성을 보여 주는 단 한 편의 글을 고르라면 「신의 사랑
과 고통」을 택할 것이다. 다른 짧은 글들과 조에 부스케에게
보낸 편지는 이 글의 노점을 확장시킨 것이다. 베이유의 노
트에서 나온 글들은 이 에세이에서 드러나는 주제에 관해
약간 부연한 내용들이다. '필연성'과 '선'의 관계에 대해 간략
하게 그 개념을 제공하는 글들이다.
2장에서는 종교의 본성에 대한 베이유의 주요 사상을 집
중적으로 보여 준다. 초자연의 본성과 신비, 신앙의 본성을
다루면서 그녀가 수행한 개념적 논증을 정리하여 모은 글들
이다. 그녀는 사회적 삶과 정의의 문제에 관한 우려의 고삐
를 결코 늦추지 않았다.
3장에는 정의에 대한 그녀의 감성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글들을 포함시켰다. 바람직한 사회 지도자를 위해 그녀가
제안하려 했던 '신조'도 담겨 있다. 문화적 집합체로서의 인
간 본성과, 정의에는 실증이 필요하다고 여긴 맥락들을 이
해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여러 글이 모여 완성된 이 책을 통해 베이유가 '어떻게' 생
각하고 글을 썼는지 독자들이 포괄적으로 바라보게 되기를
희망한다. 그녀는 '나'라는 말을 거의 쓰지 않았다. 그녀
사상의 성격을 드러내 주는 일면이라 하겠다.
프롤로그
이 글은 두 개의 판본이 있다. 하나는 '책을 시작하며', 다른 하나는
'서문'이라는 제목을 달고 있다. 이 글이 베이유의 실제 경험인지 아
닌지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다. 허버트의 시, 「사랑」과 매우 유사
한 내용이다.
내 방에 들어온 그가 말했다.
"너 가련한 존재여, 아무것도 모르고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
하는 그대여, 나와 함께 가자꾸나, 너는 상상조차 못한 것들
을 가르쳐 주마."
나는 그를 따라갔다. 그는 나를 교회로 데려갔다. 낯설고
이상한 곳이었다. 제단 앞으로 나를 데려간 그는 말했다.
"무릎을 꿇어라."
"저는 세례를 받지 않았습니다."
"이 자리에서 사랑의 마음으로 엎드려라. 진리를 발견한
장소에서 그랬던 것처럼."
나는 그의 말대로 했다.
밖으로 나온 우리는 창문이 열린 어느 다락으로 올라갔
다. 창밖으로 시내 전체와 공사장 외벽 사닥다리가 보였다.
강가에서 배들이 짐을 부리고 있었다.
다락 안에는 책상 하나와 의자 두개가 있었다. 그는 나를
앉혔다.
우리 둘뿐이었다. 그가 입을 열었다. 잠시 누군가 들어왔
다가 대화에 끼어들기도 했지만 이내 그들은 떠나갔다.
겨울은 아니었다. 그러나 봄이 벌써 온 것도 아니었다. 나
뭇가지에는 아직 움이 트지 않았고 밖은 추웠고 태양이 비
추고 있었다.
햇빛이 지붕 꼭대기에 머물다가 옅어지곤 했다. 그거고는
달빛이, 또 별빛이 창문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다시 아침 해
가 솟아올랐다.
그는 가끔 조용히 선반에서 빵을 꺼내 왔다. 우리는 빵을
나눠 먹었다. 진실로 빵다운 맛을 가진 빵이었다. 그 후로는
그런 빵을 맛보지 못했다.
우리는 함께 포도주를 마셨다. 포도주에서는 태양의 맛과 도시를
일군 대지의 맛이 났다.
때때로 우리는 다락 바닥에 드러눕곤 했다. 달콤한 잠에
빠져 들었다가는 다시 일어나 햇빛을 받아 마셨다.
내게 가르쳐 주마고 했던 것을 그는 아무것도 가르쳐 주
지 않았다. 우리는 오랜 친구처럼 덤덤한 마음으로 모든 것
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어느 날 그가 말했다. "이제 가거라."
나는 무릎을 꿇었다. 두 팔을 그의 다리에 감고 나를 쫓아
내지 말아 달라고 애원했다. 그러나 그는 나를 계단 밑으로
떼밀었고 놀란 나는 가슴이 찢어지는 것만 같았다. 거리를
헤맸지만 그 집이 어디 있는지조차 알 수 없었다.
다시는 그를 만나려는 시도조차 하지 않았다. 그가 나를
찾아온 것은 실수였다고 생각한다. 내가 있을 곳은 그 다락
이 아니었다. 나는 아무 곳에나 있을 수 있었다. 감옥, 부자
들의 호화로운 거실, 기차역 대합실 ... 어디든 상관없었다.
다만 그 다락은 아니었다.
그가 내게 한 말들을 한동안 두려움과 떨림으로 되뇌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데 내가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다고 과
연 확신할 수 있을까? 그는 이제 내 옆에 없다.
나는 그가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어
떻게 나를 사랑할 수 있겠는가? 하지만 여전히 내 안의 저
깊은 곳에서 내 존재의 작은 조각이, 내내 두려움에 떨면서
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쩌면 그는
나를 사랑하고 잇을 것이라고(CS 9-10).
I
신의 사랑
사랑이 나에게 어서 오라 말하나
내 영혼은 뒷걸음치니
내 죄와 허물 탓이라네
하지만 명민한 사랑은
시작부터 꾸물거리는 나를 내려다보며
가까이 다가와 다정한 목소리로
무엇을 바라는지 묻고 있네
내가 대답하네
여기에 손님으로 어울리지 않아요
사랑이 말하네
네가 곧 그리 되리니
나, 아무 가치도 없는 내가?
오, 사랑하는 이시여
나는 감히 당신을 쳐다볼 수 없어요
사랑은 내 손을 잡고 미소로 답하네
나 아닌 누가 그 눈을 만들어 주었지?
진리이신 주님,
내가 두 눈을 망쳤어요
내 부끄러움이 마땅히 가야 할 곳으로 가게 내버려 두세요
사랑이 말하네
그 죄를 누가 지고 갔는지 너는 알고 있단다
내 사랑, 그렇다면 복종하지요
사랑이 말하네
이리 앉아 내 살을 먹어라
나는 자리에 앉아 받아먹었다
- 「사랑」, 조지 허버트(1593~1633)
조에 부스케에게
조에 부스케는 제1차 세계대전에서 척추를 다쳐 하반신이 마비되었
다. 런던에 살면서 늘 침대 생활을 해야 하는 그를 베이유는 1942년
에 알게 되었다. 베이유가 그에게 느낀 깊은 우정이 편지에 잘 드러
나 있다. 그녀가 드물게 자신의 체험에 대해 말하는 글이다.
1942년 5월 12일 마르세유
친애하는 벗에게
무엇보다 먼저, 나를 위로해 주신 데 대해 감사드립니다. 과
연 당신의 편지가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비단 나뿐만 아니
라 나를 통해서 다른 이들도 위로를 받으리라 생각합니다.
당신의 어린 형제들에게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당신에게
더할 나위 없이 소중한 존재들임에 분명한 그들에게도 당신
과 같은 운명이 닥쳤으니까요. 죽음을 앞둔 이들에게도 당
신은 분명 위안이 될 것입니다.
이러한 현실 속에서 당신은 특별한 은혜를 입은 사람입니
다. 지금 이 순간도 서로 상처 입히고 죽이고 죽어 가는 사
람들보다 당신은 행복합니다. 그들은 모르고 있습니다. 자
기가 어디에 있는지,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그리
고 지금 상황에 적절한 생각을 그들은 하지 못합니다.
예를 하나 들어 볼까요. 소수의 어떤 이에게는 처한 상황
이 혼란스런 악몽이지요. 그리고 다수의 사람에게 그것은
희미한 장막 같은 것입니다. 극장 무대에 드리운 장막 말입
니다. 양쪽 모두 비현실적인 경우이지요.
지난 이십 년간 당신은, 수많은 사람을 들었다 놓았다 하
는, 그리고 당신을 단단히 붙잡고 있는 운명에 대해 생각해
왔지요. 그 운명이 이제 수백만 사람에게 덮쳐 오고 있습니
다. 다시 말하면 당신은 이제 그것에 대해 제대로 생갈할 때
가 되었습니다. 혹시 당신이 아직 준비가 되지 않았더라도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만) 당신은 아주 얇은 껍질이나마
가지고 있습니다. 어두운 알 속에서 진리의 빛을 만나기 위
해 깨야 하는 얇은 껍질 말입니다.
그것은 아주 오래전부터 전해 내려온 이미지입니다. 알은
우리가 보는 세상입니다. 그 안에 있는 새는 사랑이지요. 신
그 자체인 사랑, 그리고 모든 사람의 마음 깊숙한 곳에 거하
시는 사랑입니다. 껍질이 깨지고 존재가 놓여나는 순간에도
알은 변함없이 세상 가운데 있습니다. 그러나 존재는 더 이
상 그 안에 없습니다. 한구석에 가련한 육체를 남겨 놓은 채
영혼은 바깥 어느 한곳으로 옮겨 갔습니다. 거리에는 어떤
관점이나 전망도 없습니다. 그러나 바로 그 시점에서부터
세상은 있는 그대로 보이면서 혼돈스럽지 않게 되지요. 알
속에 있던 때와 비교해 보건대 공간은 무한대로 보이지요.
그 순간은 고요하게 정지되어 있습니다. 공간 전체를 가득
채운 아주 농밀한 고요입니다. 그것은 소리의 부재가 아니
라 감성의 긍정적 충만이자 비밀의 언어입니다. 태초부터
팔에 우리를 안고 있는 그분, 사랑이신 그분의 말입니다.
당신은 껍질에서 나오면서 전쟁의 현실을 알게 되었습니
다. 그것은 중대한 현실이지요. 전쟁은 비현실 그 자체니까
요. 전쟁의 현실은 안다는 것은 피타고라스의 조화이고 양
극의 일치입니다. 현실의 다층적 지식입니다. 이 점이 바로
당신이 특은을 입고 있는 이유입니다. 당신의 육체는 전쟁
을 당신 안에 가두고 있습니다. 스스로 무르익어 알게 될 때
까지 충실한 인내 속에 오랜 세월 기다리고 있습니다.
지금 쓰러져 가는 사람들은 보잘것없는 방황 속에서 생각
을 주워 담을 시간이 없었습니다. 자신들의 운명에 대해 생
각해 볼 시간도 없었습니다. 전쟁터에서 무사히 돌아온 사
람들조차도 과거를 망각 속에 가두어 버렸습니다. 언뜻 기
억하고 있는 것처럼 보여도 그들은 사실 잊었습니다. 전쟁
은 고통이니까요. 누군가의 생각을 자발적으로 고통으로 향
하도록 하는 것은, 길들이지 않은 개를 불길 속으로 몰아넣
어 타 죽게 하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는 육신을 지닌 채 그
안에서 고통을 품고 있어야 합니다. 오랜 시간을 두고 깊은
못을 들여다보듯이 고통을 충분히 주시해야 합니다. 고통을
피상적으로 바라보는 것은 육체와 영혼을 방치하는 것입니
다. 육체와 영혼은 하나로 관통되며 한 점에 고정되어 있어
야 합니다.
첫댓글 좋아하는 책을 올려 봤어 ^^ 치매 예방용 시간 내서 해 봄직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