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진군을 광주목으로, 필문 이선제
광주에 도로명 필문로가 있다. 남광주역에서 조선대학교 정문의 대로를 지나 서방 사거리까지다. 1988년 지정된 필문로는 필문 이선제(1389~1453)를 기리기 위한 도로명인데, 충장로나 금남로의 도로명에 비해 생소하다. 생소하기는 필문로의 주인공인 이선제도 마찬가지다.
광주읍지의 성씨조를 보면 탁씨, 이씨, 김씨, 채씨, 노씨 등 13개 성씨가 광산(광주)을 본관으로 삼고 있다. 그 중 가장 돋보이는 가문 중 하나가 필문 이선제부터 6대에 걸쳐 과거 합격자를 배출한 광주이씨다. 그러나 지금 필문이 태어난 남구 원산동에는 더 이상 광주이씨 가문의 영광은 남아있지 않다. 필문의 5대손인 이발과 이길 형제가 정여립 모반사건이라 불리는 기축옥사에 관련되어 죽임을 당하면서, 필문 가문이 멸문의 화를 당했기 때문이다. 30년이 넘게 중앙에서 주요 관직을 역임했던 인물임에도 불구하고, 필문은 최근까지 생몰연대마저 알 수 없는 잊혀진 인물이 된다. 그러다가 1998년 청자에 새겨진 필문의 묘지가 일본에 밀반출되기 직전 김해공항에서 문화재 감정관이던 양맹준에 의해 필사됨으로써, 극적으로 정확한 생몰연대가 알려진다. 김해공항에서의 반출 시도가 불발된 필문의 일생을 담은 분청사기상감묘지명은 딱하게도 김포공항을 통해끝내 일본 고미술상에게 팔려나가고 만다.
필문 이선제는 사복경을 지낸 일영을 아버지로, 개성윤상호군을 지낸 홍길을 할아버지로 하여 1389년 남구 원산동에서 태어난다. 세종 원년(1419) 문과에 급제한 후 생을 마감한 1453년까지 30년이 넘는 기간 동안 경창부윤 등의 주요 관직을 역임한다. 특히 그는 급제 후 20년 이상을 집현전에서만 근무한다. 집현전 수찬, 집현전 부교리, 집현전 직제학 등의 집현전 관직은 필문에 대한 세종의 신임이 얼마나 두터웠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이 기간 동안 필문은 주로 사관이 되어 태종실록의 편찬이나 고려사 개찬에 참여한다. 고려사 개찬에 참여한 필문에게 문종은 안장을 갖춘 말 1필을 하사하기도 한다.
집현전 근무 이후 필문은 형조참의, 첨지중추원사, 병조참의, 강원도관찰사, 예조참의, 호조참판, 공조참판, 예문관제학, 세자우부빈객, 동지춘추관사, 경창부윤 등을 제수 받는다. 이 시기 필문은 관직생활에서 직접 체험한 경험과, 집현전 재직 당시 살펴 본 옛 제도를 바탕으로 한 각종 정책 상소를 올린다. 당시 필문이 올렸던 정책 상소로는 세종 29년(1447) 예조참의 시절 올린 이재소(理財疏)를 비롯하여 군재소(軍財疏), 단군신전건립소와 시의소(試醫疏) 등이 있다. 이재소를 제외하고, 군재소와 시의소 그리고 단군신전건립소 등은 모두 필문이 죽기 전 3년 이내, 즉 관직에 나아간 지 30년이 지난 이후에 올려 진 것들이다. 이는 필문이 죽을 때까지 얼마나 국가와 민생의 안정을 위해 골몰했는지를 잘 보여준다. 특히 예조참의 재직시에 올린 이재소에는 그의 경제관이 잘 나타나 있다. 필문은 상소에서 중국 역대 제왕들의 국가 재정 확보책으로 네 가지를 들고 있다. 토지세인 전조와 술, 소금과 차의 전매가 그것이다. 그 중 술과 차의 전매는 선왕의 옛 제도가 아니므로 논할 필요가 없다면서, “소금이 토지세인 전조와 함께 국가 재정의 중심이 되어야 함”을 역설하고 있다. 필문은 그 근거로 “토지세인 전조는 반드시 그 해의 풍흉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므로 믿고서 만족하게 쓸 수 없으나, 소금의 수입은 홍수나 가뭄 그리고 흉년이 들 걱정이 없기 때문에 무한정 취하여 이용할 수가 있다.”는 이점을 들었다. 더욱이 삼면이 바다로 둘러싸고 있는 우리나라로서는 보다 현실적인 정책이라는 것이다.
필문은 고향 광주와 관련된 활동에서도 두드러진다. 필문이 중앙에서 근무하던 당시 광주는 광주목에서 무진군으로 강등되어 있었다. 세종 12년(1430) 광주 사람 노흥준이 그의 애첩을 가로챈 목사 신보안을 구타한 사건 때문이었다. 변란을 일으키거나 강상윤리를 해친 고을의 강등은 당시 법이었다. 문종 원년(1451) 당시 예문관 제학이던 필문은 광주의 원로들과 함께 임금에게 상소하여 무진군을 광주목으로 복귀시킨다. 지금의 광주우체국 자리에 희경루를 짓는데도 큰 역할을 하였으며, 광주의 젊은 선비 30인을 뽑아 강학의 학풍을 일으키기도 하였다. 칠석동의 김문발에 의해 시작된 광주향약을 계승, 본격적으로 시행한 이도 그였다. 이는 “태종대에 김문발의 주도로 향약이 입조돼 시행되었으나 널리 퍼지지 못한 것을 뒤에 이선제가 다시 주도해 향적을 작성하고 향약을 시행하기 시작했다.”는 그의 문집 수암원지의 기록을 통해서도 확인된다.
중앙에서 활발한 활동을 펼치던 필문 이선제의 죽음은 다소 갑작스럽다. 죽기 바로 전해까지 시의소 및 단군신전건립소를 올리고 있었고, 심지어는 중국 사신을 호송하는 관리인 반송사로 임명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단종 즉위년(1452)에 올린 상소에 “천식으로 고생하고 있다.”는 내용이 실려 있어, 지병이 있음을 알게 해준다. 그러나 그보다는 집현전 학자들의 정치 세력화로 인한 수양대군 측의 정치적 박해가 그의 죽음을 앞당긴 한 요인일 가능성이 높다. 그가 박해받았을 가능성은 30년 넘게 주요 관직에 종사했음에도 왕조실록에 졸기가 남아있지 못함을 통해서도 확인된다. 필문은 단종 원년(1453) 겨울 서울에서 죽은 후 이듬해 봄 상여로 광주 만산동으로 옮겨져 그의 부조묘 뒤에 있는 할아버지 무덤 옆에 묻힌다.
집현전에서만 20년 넘게 근무한 필문 이선제, 그의 저술은 매우 많았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오늘 그에 관한 자료를 찾기는 결코 쉽지 않다. 후대에 만들어진 그의 문집인 수암원지와 조선왕조실록에 산견되는 자료만이 남아 있을 뿐이다. 필문은 죽은 지 360여 년이 지난 순조 20년(1820)에야 강진의 수암서원에 배향될 수 있었다. 이 후 화순군 도곡면 죽청리의 죽산사와 화순읍 앵남리의 오현당에도 배향된다. 기축옥사의 원통함이 그가 죽은 한참 후까지도 여전히 묻어 있었던 셈이다.
광주의 도로명 필문로가 무진군을 광주목으로 복귀시킨 그에게 조금이라도 위안이 되었으면 싶다.
왕버들나무, 괘고정수
임진왜란 의병장 고경명 장군을 모신 포충사 오른쪽의 논길을 따라 가면 나타나는 마을이 필문이 태어나고 자란 원산동이다. 이곳에는 그의 신주를 모신 부조묘가 있고, 뒷산 언덕에 그의 무덤이 있다. 부조묘란 불천위를 모시는 사당이다. 불천위는 나라에 큰 공훈을 세운 사람이 죽으면 그 신위를 사당에 영구히 모셔도 좋다고 임금이 허락한 신위를 말한다.
마을 입구에는 필문이 가문의 번영을 희구하면서 심은 17미터 크기의 대단한 왕버들 나무가 있다. 필문은 왕버들 나무를 심으면서 “이 나무가 무성하면 가문이 왕성할 것이고 죽으면 가문이 쇠락할 것이니, 관리를 잘하라.”고 특별히 당부했다고 한다. 이후 필문의 후손들은 과거에 급제를 하면, 이 나무에 급제자의 이름과 북을 걸어놓고 두드리면서 잔치를 벌였다. 그래서 이 왕버들 나무는 정자의 이름을 가진 괘고정(掛鼓亭)으로 불렸다.
이선제를 필두로 그의 두 아들인 이시원과 이형원이 과거에 합격했고, 이형원의 아들 이달손, 이달손의 아들 이공인, 이공인의 아들 이중호, 이중호의 아들 이발과 이길이 대를 이어 합격하면서 가문의 영광을 알리는 북소리가 연이어 울리게 된다. “이 나무가 죽으면 가문이 쇠락할 것” 이라는 필문의 예견대로 5대손인 이발이 정여립 모반사건에 연루되어 멸문의 화를 당하자, 왕버들 나무도 말라죽기 시작한다. 그런데 300년이 지난 후 이발의 억울함이 밝혀지자 새 잎이 다시 돋아나 살아났다고 한다.
괘고정이라는 정자 명칭을 가진 왕버들 나무는 광주광역시 기념물 제 34호로 지정되면서 뒤에 나무 ‘수’자를 넣어 괘고정이 정자가 아닌 나무임을 표시한다. 현재 괘고정수의 수명은 550~600년 정도로 추정된다. 필자가 최근 방문했을 때 광산이씨의 자제분이 사법고시에 합격했다는 플래카드가 왕버들 나무에 걸려 있었다. 현대판 괘고정 잔치인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