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은 대 역사의 해다. 광주학생독립운동 90주년, 3·1만세운동과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 안중근 하얼빈 의거 110주년을 맞는다. 일제의 남한 대토벌에 맞선 남도 의병항쟁 110주년이기도 하다. 일제 강점기 항일은 시대정신이었고, 그 어떤 과업보다 우선했다. 그래서 항일은 정의였다. 역사의 정의는 두갈래, 청산과 기억이다.
1909년 안중근 의거는 독립투쟁의 첫 총성이다. 안 의사가 죽임을 당한 그 해, 나라를 빼앗겼고, 의거 10주년이 되는 1919년 3·1만세 투쟁을 전개했다. 다시 10년 후 1929년, 이번에는 광주 학생들이 횃불을 들었다.
안중근, 그는 의열 투사만은 아니다. 공동 화폐와 평화유지군 등 동양 3국의 공동 번영을 꿈꾼 글로벌 비전의 설계자였다. 정의의 민족혼과 선각자적 비전은 시간을 관통해 격동하게 한다.
안중근은 남북 역사 잇기의 첫머리다. 한 결의 민족사가 이념과 냉전, 분단의 굴레에 갇힌 오늘, 안중근은 분절의 역사를 치유할 화해의 자원이다. 남, 북은 한뜻으로 그를 기린다.
안중근은 민족사 정의, 동양 평화의 설계자, 남북 하나되기의 소중한 디딤돌이다. 그는 결코 만주, 연해주에만 있지 않다. 장흥, 장성, 함평, 광주 등 남도 곳곳에 살아 호흡한다. / 편집자
안중근 항일루트 1 : 단지, 러시아 크라스키노
기유년, 1909년 2월26일(음력2.7)이었다. 엔치야(연추) 하리마을 김씨 집에 12명이 모였다. “우리들이 전후에 전혀 아무 일도 이루지 못했으니, 남의 비웃음을 면하기 어려울 것이요. 뿐만 아니라 만일 특별한 단체가 없으면 어떤 일이고 간에 목적을 달성하기 어려울 것인즉, 오늘 우리들은 손가락을 끊어 맹서를 같이 지어 증거를 보인 다음에 마음과 몸을 하나로 묶어 나라를 위해 몸을 바쳐 기어이 목적을 달성하는 것이 어떻소”
“그대로 따르겠소” 망설임도 없었다. 태극기를 펼쳤다. 각자 왼손 무명지 첫 관절을 잘랐다. 외마디 신음조차 음소거로 차단됐다. 붉은 피로 ‘大韓獨立'(대한독립) 네 글자를 새겼다. “대한독립 만세” “대한독립 만세” “대한독립 만세” (안응철 역사 중에서)
러시아 프리모리(연해주) 하산스키 크라스키노. 인구래야 3000명 고작의 작은 도시다. 버스로 30여분을 달리면 중국 훈춘이며, 두만강 북한은 50km 남짓이란다. 크라스키노의 옛 이름은 노보키옙스크(1936년 크라스키노 개칭)로 1867년 항구가 열리고, 마을 남북으로 러시아 군대가 주둔했다. 지신허에 머물던 한인들도 하나 둘 찾아들었다.
한인들은 이 땅을 연추라 불렀다. 발해 5경(京)의 하나인 동경 용원부 염주성에서 연유했다. 기다란 산자락을 따라 마을을 만들고, 상연추, 하연추(추가노프)라 했다. 상-하연추는 30여리였고, 하연추에서 노보키옙스크까지 25리에 달했다.
블라디보스토크에서 크라스키노까지 꼬박 4시간이 걸렸다. 길찾기로는 230km 정도인데, 2차선에 움푹 패 인 낡은 도로 탓이다. 라즈톨노예를 거쳐 바라바쉬에 잠시 머물다, 다시 차를 다그쳐 포시에트 항구를 스쳤다. 크라스키노 시내에서 10여분을 달렸을까.
불꽃 형상의 기념비에, 우뚝 선 사각의 검은 돌, 바닥에 네모진 15개의 돌이 줄을 맞춰 있다. 검은 돌에 손도장이 선명하다. 왼손 넷째 손가락 마디가 잘린 바로, 그 손이다.
안중근 단지동맹-. 원동의 러시아 땅에 안중근 단지결사대의 기념비가 서 있다니…. 기념공간은 단지동맹 유지비와 15개의 바닥 돌, 검은 사각기둥의 기념조형물로 이루어 있다. 단지동맹 유지비부터 찾았다.
1909년 2월7일 안중근 의사를 비롯한 결사동지 김기용, 백규삼, 황병길, 조응순, 강순기, 강창두, 정원주, 박봉석, 유치홍, 김백춘, 기천화 등 12인은 이 곳 크라스키노(연추하리) 마을에서 조국의 독립과 동양 평화를 위하여 단지 동맹하다. 이들은 태극기를 펼쳐 놓고 각기 왼손 무명지를 잘라 생동하는 선혈로 대한독립이라 쓰고 대한국 만세를 삼창하다. 광복회와 고려학술문화재단은 2001년 10월18일 러시아 정부의 협조를 얻어 이 비를 세우다.
단지동맹비는 불꽃 모양의 화강암에 동판 비문이 부착돼 있다. 크기는 높이 3m에 너비 1.5m로, 이곳이 안 의사 단지동맹 기념공간임을 알리고 있다. 현장에서 유니베라(옛 남양알로에) 러시아 법인장 장민석 씨를 만났다.
“안중근 의사의 단지 동맹비는 2000년 10월 연추 하리인 추카노프 다리 옆에 세워졌으나, 침수 피해와 훼손으로 2006년 유니베라 농장 앞으로 이전했습니다. 하지만 이전 장소가 국경지대로 편입된 바람에 한국인들이 방문할 수가 없어 2011년 8월 유니베라의 농장 사무실이 있는 현재의 장소로 옮기고 동시에 검은 사각 돌로 상징 조형물을 세워 안 의사를 기리고 있습니다.”
그는 “안의사와 11명의 동지들이 단지한 장소는 동맹비가 서 있는 이곳이 아니라, 12km 이상 떨어진 연추하리 지역으로 당시 의병 훈련장과 한인마을이 있었으나 지금은 아무런 흔적도 없다”고 덧붙였다.
검은 사각 돌 기둥에는 안 의사 수인이 찍혀 있다. 수인 돌 앞으로 1910년부터 90년까지 연대를 새긴 돌 판을 지나면 1m 높이의 두툼한 사각 돌에 또 다른 수인이 찍혀 있다. 작은 돌에 손을 얹는다. 시간을 뛰어 넘어 안 의사와 교감한다. 역사의 소통이랄까. 단지동맹유지비 앞 15개의 돌은 안 의사가 이토 히로부미를 단죄한 15가지 이유를 형상화한 것이다. 근데, 안중근과 11명의 동지들은 왜 단지를 결행했을까.
1907년 9월 안중근은 북간도로 망명했다. 연길에서 조금 떨어진 명동촌 등 용정 일대에 머물며 의병투쟁을 계획했으나 녹록치 않았다. 일본 조선통감부 파출소가 들어서 조선인들을 감시했다. 명동촌 전 촌장으로 문학청년 송몽규의 후손인 송길연 씨는 “안중근 의사가 우리 마을에 머물렀으며, 마을 입구에 있는 선바위에서 사격 훈련을 했다”고 들려주었다.
안중근은 11월 북간도를 떠나 연해주로 향했다. 최재형을 비롯, 이범윤, 이위종 등 러시아에 기반을 둔 인사들이 연추에서 창립한 동의회에 1908년 5월 평의원으로 참여했다. 이어 7월에 이범윤을 축으로 창의회가 조직되고, 최재형과 이범윤은 3000~4000명 규모의 연합의병 부대를 창설했다. 연추 의병부대로 ‘대한국 의군’ (총독 김두성, 대장 이범윤) 이었다.
안중근은 이 의병부대의 우영장, 참모중장 특파독립대장으로 국내 진공 작전을 전개했다. 그는 200명을 이끌고 두만강을 건너 함경도 경흥에서 일군과 교전, 50명을 사살하고 10명을 포로로 잡았다. 회령으로 진격해 인근의 영산에서 일본군 수비대와 격돌했다. 13일 동안 30여 차례 교전을 벌였다. 하지만 일본군의 기습을 받아 영산에서 쓰라린 패배를 맛보고 말았다.
안중근 부대는 식량이 떨어져 나무껍질로 연명하며 한 달 만에 연추에 귀환했다. 11월 기력을 회복한 안중근은 원동지역의 한인 마을을 순회하면서 의병투쟁을 독려했지만, 반응은 싸늘했다. 뭔가 일대 투쟁의 전기가 요구됐다.
우리 동포는 다만 말로만 애국이니 일심단체이니 하고 실지로 뜨거운 마음과 간절한 단체가 없으므로 특별히 한 회를 조직하니 그 이름은 동의단지회라. 우리 일반 회우가 손가락 하나씩 끊음은 비록 조그마한 일이나, 첫째는 국가를 위해 몸을 받치는 빙거요… (동의단지회 취지서 중에서)
안증근은 의거 후 공술에서 “단지한 당시는 민심이 산란하고, 또 나를 믿는 자가 없으므로 나는 국가를 위해 진력하는 열심을 타인에게 보이어 민심을 수습하기 위해 단지한 것이다”라고 말했다.
그는 1909년 초 의병 투쟁의 침체기에 12인 결사대를 조직, 투쟁의 봉화를 다시 들고자 했다. 결사 투쟁의 상징과 결의는 바로 단지였고, 동지들과의 결사체는 동의단지회였다. 박환 수원대 교수는 “안중근이 12인 동지로 결사조직을 만든 것은 의병전쟁의 분위기가 점차 식어가는 가운데 이루어진 투쟁 방략이었다”고 강조했다.
원동의 러시아 땅, 크라스키노. 그곳에 자신의 손가락을 잘라 독립 투쟁의 횃불이 되고자 했던 12명 결사대 항일 혼이 격발하고 있다. 지천이던 노란 들꽃이 시베리아 삭풍에 진저리친다 해도, 안중근 단지동지들은 거기 그대로 우뚝 서 있으리라.
■동의단지회 12인은
1909년 연추에서 항일의 불꽃이 되고자 했던 12명 가운데 실명이 확인된 인물은 8명에 불과하다. 일제는 안중근 의사를 신문하면서 끊임없이 단지회 면면을 밝혀내려 했다. 안 의사는 아직도 만주와 연해주에서 활동하고 있는 단지회원들을 보호하기 위해 매번 기억이 없다고 진술을 회피했다.
그가 단지동맹원이 12명이라고 밝힌 것은 1909년 12월 3일이었고, 12월20일 미조부치 검찰관의 신문 때 보다 구체적으로 신원을 공개했다.
△강기순 40세 전후 의병 경성 △정원식 30여세 의병 △박봉석 34 농부 함경도 △유치홍 40세 전후 농업 함경도 △김해춘 25~6세 사냥꾼 함경도 △김기룡 30세 이발직 평안도 △백남규 27세 농업 함경도 △황병길 27~8세 농업 함경도 △조순응 25~6세 의병 함경도 △김천엽 25~6세 의병 △강계찬 25~6세 노동자 평안도. 안중근은 이날 이후로도 계속해서 동맹원의 신원에 대해 다른 이름을 둘러댔다
동의단지회 12명 중 실명이 확인된 인물은 안중근, 김기룡, 강순기, 조응순, 황병길, 백규삼, 김천화 강창두 등 8명이다.
<출처 전남일보 이건상 기자>
첫댓글 몇년전 방문했던 기억이 납니다.
안의사의 단지동맹 정신을 기억하겠습니다 .
내년 (2025년)에는 가볼 수 있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