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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8/14 11:58 http://pjmng.blog.me/40989829 에서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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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자료> 밀성대군 후손 분파 12중조(密城大君 後孫 分派 12中祖)
1> 박언부(朴彦孚) 태사공파(太師公派) 파조(派祖)
고려문종(文宗)때에최충(崔沖)과 더불어 태사(太師)․중서령(中書令)이 되고 문하시중(門下侍中)을 거쳐 도평의사(都評議事)에 이르다. 또 밀성부원군(密城府院君)에 봉(封)해졌다. 유지(遺址)는 풍각화산(豊角花山)이라 하는데 전해지지 않는다. 효신(孝臣)․의신(義臣)두 아들을 두었다. 충북 옥천군 이원면 용방리에 있는 원덕사(遠德祠)에 배향(配享) 되었다. 향사일은 음력 3월 1일이다.
2> 박언상(朴彦祥) 도평의사공파(都評議事公派) 파조(派祖)
상(詳)을 상(商)으로도 썼다. 고려 때 벼슬이 도평의사사(都評議使事)에 올라 밀직군(密直君)에 봉(封)해졌다. 유지(遺址)는 풍각화산(豊角花山)이라 하는데 전해지지 않 는다. 충북 옥천군 이원면 용방리에 있는 원덕사(遠德祠)에 배향(配享) 되었다,
3> 박언인(朴彦仁) : 좌복야공파(左僕射公派) 파조(派祖)
고려조에서 벼슬이 벽상삼중대광(壁上三重大匡) 문하평장사(門下平章事)와 상서성(尙書省)의 좌복야(左僕射)에 이르렀으며 밀직군(密直君)에 봉(封)해졌다. 충북 옥천의 원덕사에 배향되었고 1979년에 후손들의 첨의(僉議)가 모아져서 충북 영동군 심천면 고당리에 세덕사(世德祠)를 세우고 봉향(奉享)한다. 향사일은 음력10월1일이다
> 박양언(朴良彦) : 밀직부사공파(密直副使公派) 파조(派祖)
고려 때에 벼슬이 봉익대부(奉翊大夫) 밀직부사(密直副使)에 이르렀으나 문헌들이 없어서 벼슬 이 외에는 알려진 것이 없고 유지(遺址)조차 전하지 않는다. 충북 옥천의 원덕사에 배향되어 있다.
5> 박천익(朴天翊) : 판도판각공파(版圖判閣公派) 파조(派祖)
고려 선종(宣宗)때에 벼슬이 판도판각(版圖判閣)에 까지 이르렀다. 유지(遺址)는 전해지지 않고 충북 옥천의 원덕사에 배향되었으며 또 밀양시 삼랑 진읍 검세리에 설단(設壇)하고 음력 9월20일에 향사를 올린다.
6> 박을재(朴乙材) : 삼사좌윤공파(三司左尹公派) 파조(派祖)
호(號)는 아천(雅川). 고려의 명종(明宗) 1197년에 문과에 급제하고 벼슬이 판삼사좌윤(判三四左尹)과 밀직사(密直司 : 고려초기의 중추원) 부사(副使)에 올랐다. 충북 옥천의 원덕사와 신남서원(莘南書院)에 배향되었고 또 밀양시 청도면 고법리에 있는 수덕재(修德齋)의 경현사(景賢祠)에 봉안(奉安)하고 음력 3월15일과 음력9월15일 제사를 올린다.
7> 박원(朴元) : 사문진사공파(四門進士公派) 파조(派祖)
고려조의 인종(仁宗)때에 사문진사(四門進士)에 합격했다. 사문진사를 국자진사(國子進仕)라고도 했다. 조선조에 성균생원(成均生員:국립대학 학생과 같음)과 같은 것이다. 벼슬은 공부상서(工部尙書)에 이르고 학문에 조예가 깊고 문장(文章)에 이름이 높았다. 유지(遺址)는 밀양시 하남읍 귀명동이라고 하나 전해오지 않는다. 충북 옥천의 원덕사에 배향되었으며 전북 김제시 상동동 삼수리에 설단(設壇)하고 삼송재(三松齋)를 지어 제향하고 있다.
8> 박 척(朴 陟) : 충헌공파(忠憲公派) 파조(派祖)
고려의 충선왕조(忠宣王朝)에서 벼슬이 내부시(內部寺) 승(丞)이었고 순충동덕찬화공신(純忠同德贊化功臣)의 칭호를 받았고 최고의 품계인 삼중대광(三重大匡)에 올랐으며 밀성군에 봉해지고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에 더해졌다. 시호(諡號)는 충헌(忠憲)이라 내리고 사패지(賜牌地)를 하사하여 후손으로 하여금 대대로 조세를 받을 수 있게 하였다. 묘지는 밀주 수산현(守山縣)에 있다 하였다. 유지(遺址)는 풍각화산(豊角花山)에 있다 하였으나 전해지지 않는다. 밀양시 하남읍 귀명리에 경모재(景慕齋)를 지어놓고 매년 음력 10월3일에 향사하고 있다.
> 박중미(朴中美) : 밀직부원군파(密直府院君派) 파조(派祖
중미(中美)를 중미(仲美)라고도 했다. 고려의 충목왕(忠穆王)때에 과거에 급제하고 공민왕때에 벼슬이 평장사(平章事)에 이르렀다. 오래 동안 중서문하성 (中書門下省)에서 벼슬을 하였는데 1359년(己亥)에 홍건적(紅巾賊)이 서경(西京:평양)을 함락하자 공안우(安祐)․이방실(李芳實)과 함께 이들을 무찔러 국경 밖으로 내몰았다. 1361(辛丑)년에는 10여만의 병력으로 또 쳐들어 와서 개경(開京:개성)이 함락되자 왕은 태후(太后 : 왕의 어머니)를 모시고 복주(福州 :지금의 안동)로 피난을 떠나자 공은 홍언박(洪彦博) 등 수십명과 함께 왕을 호종(扈從:왕을 모시고 따라감)하였다. 1362(壬寅)년에 공은 안우(安祐)․정세운 (鄭世雲)과 함께 홍건적을 토평하고 왕을 개성으로 모시고 왔다. 1365(乙巳)년에 좌사의대부(左司議大夫) 전교시(典校寺) 판사(判事)와 보문각제학(寶文閣提 學)에 임명되고 순성보리공신(純誠輔理功臣)에 책훈(策勳)되었다. 또 대광보국숭록대부(大匡輔國崇祿大夫)의 품계에 오르고 밀직부원군(密直府院君)에 봉해 졌다. 고려가 망하고 조선조가 개국되자 태조(太祖)가 세 번이나 벼슬에 나오기를 청했으나 응하지 않고 돌아가시니 태조는 예장(禮葬)을 하도록 하고 시호를 문숙(文肅)이라 내렸다. 묘지는 풍각 묘봉리 유좌에 있고 묘갈(墓碣)이 있다. 청도군 풍각면 묘봉리의 묘지 아래에 묘봉재(墓峰齋)가 있는데 이 곳에서 매년 음력 10월7일에 향사하고 있다.
> 박 현(朴 鉉) : 규정공파(糾正公派) 파조(派祖)
고려 중엽에 문과에 급제하고 사헌부(司憲府) 규정(糾正)으로서 3품에 이르러 물러나서 고향으로 돌아가 87세의 수를 누렸다.도학(道學)으로 세상에서 이름이 높았는데 충절록(忠節錄)에서 보면 고려 대사간(大司諫)으로 있던 박상충(朴尙衷)이 왕에게 아뢰기를 「규정 박현은 인의(仁義)를 체득(體得)하여 충효(忠孝)의 행적이 뚜렷하니 우리나라 도학의 조종(祖宗)이라 할 수 있다.」하였다. 이색(李穡)이 왕에게 아뢰어 숭의전(崇義殿)에 배향하고 제사를 지내게 하였으며 또 위토를 하사하였다. 1859년에 전북 임실(任實)의 중주서원(中洲書院), 세덕사(世德祠)에서 향사하고 있으며 충북 옥천의 원덕사에 배향 되었다. 묘소는 장단군 장도면 두매리 성주동에 있었다고 하는데 전해지지 않는다. 고양시 주교동 두응촌에 설단하고 제사를 올리고 있다. 전주 봉서동에 설단하고 제사를 올리고 있다. 장흥의 세덕사와 경산 진량의 율산 서원(栗山書院)에 배향되었다.
>박원광(朴元光) : 영동정공파(令同正公派) 파조(派祖) 고려조에서 벼슬이 영동정(令同正)으로 있다가 문하성(門下省)의 중서령(中書令)을 지냈다. 공민왕 때에는 홍건적들이 서경(西京 : 평양)을 함락시켰을 때 안우(安祐)․이방실(李芳實)과 함께 격퇴하였다. 1361(辛丑)년에 홍건적이 다시 쳐들어와 수도까지 다다르자 홍언박(洪彦博)등과 함께 임금을 모시고 복주(福州)까지 따라가는 등 충성을 다하여 보리공신(輔理功臣)에 책훈되고 보국숭록대부(輔國崇祿大夫)의 품계까지 오르고 밀직부원군(密直府院君)에 봉해졌다. 유지(遺址)는 전하지 아니하고 충북 옥천의 원덕사에 배향되었다.
>박 위(朴葳) : 정국군파(靖國君派) 파조(派祖)
고려 공민왕 때 김해부사(金海府使)로 있으면서 분산성(盆山城)을 쌓았고 1376(丙辰)년에는 진주목사, 1384년에는 계림부윤(鷄林府尹), 1385년에는 경상 도절제사(慶尙道節制使)로 있으면서 1387년에는 동래성(東萊城)과 울산의 학성(鶴城)을 쌓았다. 1388년에 상원수(上元帥)로 있으면서 요동(搖動)에 출정 하였다. 1389년(己巳)에 경상도절제사로 있으면서 대마도를 정벌하였고 그해 11월에는 판자혜부사(判慈惠副使), 1390년에는 지문하부사(知門下府事)가 되고 충의군(忠義君)에 봉해졌으며 얼마 후에 문하부의 평리겸대사헌(評理兼大司憲), 1392년에 조선조가 개국되자 정국군(靖國君)에 봉해지고 1398년에는 문하부참찬도제조(門下府參贊鍍提調)가 되었으며 8월26일에는 도진무(都鎭撫)로 있다가 돌아가셨다. 밀양시 무안면 정곡리에 있는 신남서원과 충북 옥천의 원덕사에 배향되었으며 밀양시 청도면 고법리에 있는 수덕재의 경현사에 봉안하고 봄에는 음력3월15일과 가을에는 9월15일 두차례 제사를 올린다. 공의 유적지는 창원시의 용지공원에 신도비(神道碑)가 있고 김해시의 분산성 정상에 충의각(忠義閣)이 있으며 산성의 성안에는 축성기념비(築城紀念碑)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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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세손 (世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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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세손 (世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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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세손 (世孫) 선계(先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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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부(彦孚)의 1자(子) 효신(孝臣) 시호(諡號)는 문익(文翼) 고려때 문과(文科)에 급제 문하시중(門下侍中)을 지냈고 문장(文章)과 충절(忠節)이 뛰어나서 평장사(平章事)를 지냄. 배(配)의 기록은 없다. | |
언부(彦孚)의 2자(子) 의신(義臣) 학문(學文)에 증진(增進)하고 문장력(文章力)이 뛰어 났다. 인종조(仁宗朝)에 등제(登第)하여 공부상서 (工部尙書)를 하였다. 배(配)의 기록은 미상(未詳) | ||||
39세손 (世孫) |
10세손 (世孫) |
3세손 (世孫) 선계(先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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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신(孝臣)의 1자(외동) 공필(公弼) 시호(諡號)는 충렬공(忠烈公)으로 평장사(平章事)와 대장군(大將軍), 도검사(都檢事)를 지내고 병부상서 (兵部尙書)에 올랐으며 문무(文武)를 겸비(兼備)하여 윤 관(尹瓘) 등과 함께 여진국(女眞國)을 평정한 공(功)으로 진국공신(鎭國功臣)에 기록되어 있다. 배(配)의 기록은 없다. | |
40세손 (世孫) |
11세손 (世孫) |
4세손 (世孫) 선계(先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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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필(公弼)의 1자(子) 육경(育慶) 병부상서(兵部尙書) 고려 인종(仁宗)때 대장군(大將軍)과 병부상서(兵部尙書)를 지내고 김부식(金富軾)과 함께 도적 조광(粗鑛) 등을 쳐서 평정하고 왕에게 상소하여 *양현고[(養賢庫 : 고려 시대에 둔 국학(國學)의 장학 재단. 예종 14년(1119)에 두었다. 조선 시대에는 호조(戶曹)에 속하여 성균관 유생에게 주는 식량에 대한 일을 맡아보던 관아. 태조 원년(1392)에 두었다가 고종 31년(1894)에 폐하였다.)]를 세워 많은 선비를 기르게 하였다. 배(配)의 기록은 없다. | |
공필(公弼)의 2자(子) 육화(育和) 장상(將相)에 재목(材木)이였다. 동북면병마부사(東北面兵馬副使)를 거쳐 의종조때 병부상서(兵部尙書)와 형부상서(刑部尙書)를 지내고 수사공좌복야(守司空左僕射) 역임. 배(配)의 기록은 없다. | ||||
공필(公弼)의 3자(子) 육권(育權) 무법정랑(無法正郞) 배(配)의 기록은 없다. | ||||
41세손 (世孫) |
12세손 (世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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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세손 (世孫) 선계(先系) |
육경(育慶)의 1자(子)(외동) 대화(大和) 고려 때 대호군(大護軍)과 병부상서(兵部尙書)를 역임하였다. 배(配)는 미상(未詳) | |
42세손 (世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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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세손 (世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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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세손 (世孫) 선계(先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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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화(大和)의 1자(子) 간(幹) 시호(諡號)는 양효공(良孝公). 고려조(高麗朝)에서 문과(文科) 급제하여 병부참정(兵部參政)을 지내고 이상(貳相)을 역임. 배(配)의 기록은 없다. | |
대화(大和)의 2자(子) 한(翰) 초휘(初諱) 진원(珍原). 진원 박씨(珍原朴氏)의 시조(始祖), 대장군(大將軍)역임. 배(配)의 기록은 없다. | ||||
43세손 (世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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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세손 (世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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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세손 (世孫) 선계(先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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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幹)의 1자(子) 영균(永均) 은산부원군파(銀山府院派) 중시조(中始祖)
시호(諡號)는 문헌공(文憲公). 이부상서(吏部尙書) 고려조(高麗朝)에서 익대공신(翊戴功臣)으로 판도판서(版圖判書)와 3재상(三宰相)을 역임하였고 응천군(凝川君)에 봉(封)해졌다가 뒤에 은산부원군(銀山府院君)으로 추봉(推捧)되었다. 배(配)는 능주(綾州) 구씨(具氏) 배(配) 재녕(載寧) 이씨(李氏) | |
간(幹)의 2자(子) 세균(世均) 행산공파(杏山公派) 중시조(中始祖)
호(號)는 행산(杏山), 시호(諡號)는 충정공(忠靖公), 또는 양효공(良孝公) 중국에서 과거(科擧)하여 벼슬을 한림(翰林)에서 당백(唐伯)에 이르다. 역사를 편찬(編纂)하여 세상에 알렸고 형 영균(永均)과 양균(兩均)으로 일켰다. 고려조에서 평장사(平章事)로 밀성부원군(密城府院君)에 봉(封)해졌으며 전문형(典文衡)을 역임하였다. 배(配)는 안주(安州) 이씨(李氏) | ||||
44세손 (世孫) |
15세손 (世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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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세손 (世孫) 선계(先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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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균(永均)의 1자(子) 익(翊) 송은공파(松隱公派) 파조(派朝)
고려 말의 충신 8은(隱)의 한 분. 휘(諱)는 익(翊) 일명 천익(天翊), 자(字)는 태시(太始). 호는 송은(松隱). 시호(諡號)는 충숙공(忠肅公). 고려 말, 1332년에 밀양시 부북면 사포리에서 태어났다. 공민왕(恭愍王)때 벼슬에 올라 동경판관(東京判官) 예부시랑 세자이부(禮部侍郞世子貳傅) 겸 중서령(中書令)에 올라 공양왕(恭讓王)까지 3대를 섬겼고 충성을 다해서 나라를 도왔다. 공양왕(恭讓王) 때는 상장(上將)으로 아장(亞將) 강회중(姜淮中)과 함께 남정북벌(南征北伐)에 공(功)이 컸고 이성계와 더불어 왜놈과 변경 호적을 여러 번 정벌하여 싸울 때마다 공을 세우니 사람들이 장상(將相)의 재목이라 지칭(指稱) 하였다. 고려(高麗)의 국운이 기울어져 국정이 날로 어지러워 지자, 선생은 마음에 강개(慷慨)함을 품고 벼슬을 버렸으며, 이성계(李成桂)가 혁명(革命)을 하자, 72현과 같이 두문동(杜門洞)에 은거해 계시다가 시를 지으며 아우 밀성군 천경(天卿)과 더불어 밀양 송계(松溪)에 내려와 임금과 송도를 회포(懷抱)하며 후학에 힘썼다. 포은, 야은, 도은과 더불어 도의로서 사귀었는데 고려가 망하자, 부조현에서 서로 손을 잡고 통곡하며 하늘에 두 해가 없고, 신하에게는 두 임금이 없다는 송죽같은 충절을 시와 글로써 읊조리며 이씨조선(李氏朝鮮))의 곡식(녹)을 먹지 않겠다고 충의로서 맹세하였다. 1395년 이태조(李太祖)가 도읍을 한양으로 옮긴 뒤 4년 동안 출사(出仕)를 기다리다 선생을 공조판서로 불렀으나 일어나지 않고, 또 이어 형조판서, 예조판서, 이조판서로 불렀으나 일어나지 않았으며, 2년 후에 좌의정으로 다시 불렀으나 일어나지 아니하고 충신의 도리를 다했다. 29세에 입지잠(立志箴)을 저술하여 학문을 배우는 바른태도를 논하였으며, 지신잠(持身箴)을 저술하여 사람의 마음과 몸가짐의 지표를 세웠다. 하도낙서(河圖洛書)와 성리학(性理學)에 대한 학문을 깊이 탐구하였다. 배(配)는 성산(星山) 배씨(裵氏) 배(配)는 고흥(高興) 류씨(柳氏) | |
영균(永均)의 2자(子) 천경(天卿) 전객령파(典客令派) 파조(派朝)
초휘(初諱)는 천상(天翔) 자(子)는 자시(子始) 호(號)는 송와(松窩) 시호(諡號)는 충의공(忠毅公) 조선 정종(定宗) 때에 중정대부전객령(中靖大夫典客令)을 지냄. 배(配)는 창원(昌原) 공씨(孔氏) | ||||
45세손 (世孫) |
16세손 (世孫) |
9세손 (世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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졸당공파 (拙堂公派) 파조(派祖)
선계(先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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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翊) 의 1자(子) 융(融) 우당공파(憂堂公派) 파조(派朝)
자(字)는 유명(惟明)이면 호(號)는 우당(憂堂)이다. 포은(圃隱) 정 몽주(鄭夢周)의 문하(門下)에서 수학(修學)하였고 1408년 생원시를 거쳐 식년 문과(文科)에 급제 1411년 정언(正言)을 거쳐 전한(典翰)이 되었다. 1423년 이조정랑(吏曹正郞)으로 강원도경차관(江原道敬差官)을 지낸 후 금산(金山), 함안군수(咸安郡守)를 엮임하여 청백리(淸白吏)하다고 이름을 떨쳤다. 또한 여러 고을 향교(鄕校)와 제기(祭器)를 수선(修繕)했는데 탁영(濯纓) 김 선생(金先生)이 지은 학궁기(學宮記)에『박 선생(朴先生) 융(融)이 도(道)에 도사(都事)로 있으면서 크게 힘썼다.』라고 적혀 있다. 문집(文集)으로는 《우당집(憂堂集)》이 있다.
※ 우당(憂堂) 박융(朴融)선생의 제영시(題詠詩) <진주(晋州) 촉석루(矗石樓)>
진산[晉山]은 좋은 경치 남녘에 으뜸이라. 하물며 강가에다 이 다락 세웠으니 짙은 숲 울울한 대밭 맑은 흐름 결하였다. 백조는 거울 속에 떠오르 듯 귀하여라 지신[地神]이 인재 낸 줄 이미 알았건만 성조[盛朝]는 벽거주[壁居州]를 서로서로 이어왔네. |
익(翊) 의 2자(子) 소(昭) 인당공파(忍堂公派) 파조(派朝)
자(字)는 회옹(晦翁) 이요, 호(號)는 인당(忍堂)이다. 우당(憂堂) 융(融)과는 쌍둥이 형제(兄弟)가 된다. 역시, 포은(圃隱) 정 몽주(鄭夢周)의 문하(門下)에서 수학(修學)하였다. 생원시(生員試)에 합격하여 안음현감(安陰縣監)을 지내시고 청백비(淸白碑)가 세웠져 있다. 특히, 예학(禮學)을 깊이 연구하셨고 스승에게 배움이 독실(篤實)하였고 야은(冶隱) 길 재(吉再), 도은(陶隱) 이 숭인(李崇仁) 등 여러 현인(賢人)과 더불어 도리(道理)로 사귐에 긴밀(緊密)하셨다. 계사년(癸巳年), 덕남서원(德南書院)에 배향(配享) 되었다. | ||||
익(翊) 의 3자(子) 조(調) 아당공파(啞堂公派) 파조(派朝)
자(字)는 신옹(愼翁)이면 호(號)는 아당(啞堂)이다. 포은(圃隱) 정 몽주(鄭夢周)의 문하(門下)에서 수학(修學)하였다. 진사시(進士試)에 합격하고 이학(理學)을 깊이 연구하여기에 정미(精微)한데까지 도통(道通)하였다. 효성(孝誠)이 지극하여 나라에 천거(薦擧)되어 예조정랑(禮曹正郞) 벼슬까지 하셨다. 또한, 부친(父親)의 유언장(遺言狀)에 적혀있는 글을 읽어보면 『일계삼연 이국쟁흠(一桂三蓮 二國爭欽)』라는 뜻은 “태조 이성계(太祖 李成桂)로부터 세 번에 임금도 바뀌었고 이제는 이씨조선(李氏朝鮮)을 거부(拒否)할 수 없는 하늘에 뜻으로 받아 드리라.”라고 글을 남겨 씀을 보아, 세종대왕(世宗大王) 때는 동방급제(同榜及第)를 하신 분으로 되어 있다. 이 후, 기해년(己亥年), 신계서원(新溪書院)에 배향(配享) 되었다. | ||||
익(翊) 의 4자(子)
총(聰) 졸당공파(拙堂公派) 파조(派朝)
어릴적 집안에서 부른 이름(아명 : 兒名)은 명옹(冥翁) 이요, 자(字)는 총(聰) 이고 졸당공 (拙堂公)은 1353. 06. 24일 고려 공민왕 2년(高麗 恭愍王2年) 계사생(癸巳生)으로 현재, 경상남도 밀양시 부북면 삽포리에서 출생(出生)하시였다. 호(號)는 졸당(拙堂)이면 어려서부터 남달리 재주가 많고 두뇌가 총명 하였다. 고려 말(末) 충신(忠臣) 포은(圃隱) 정 몽주(鄭夢周)의 문인(文人)에서 학문(學文)을 수학 (學)하면서 스승께 크게 사문(師門)을 칭찬을 받으니 당시, 향교(鄕校)에서 사봉(四鳳 : 네 마리용)이라는 일켜어 졌다. 춘당(春堂) 변중량과 독곡(獨谷) 성석린과 벗하고 지내서나 유일하게도 번갈아, 벼슬에 천거되여 *정랑[(正郞 : 고려 시대에 육조(六曹)와 고공사(考功 司) 따위에 둔 정5품 벼슬. 관아의 개변(改變)에 따라 낭중(郎中)직랑(直郞) 따위로 고쳤 다가 조선 시대에는 육조(六曹)에 둔 정5품 벼슬)]벼슬을 받았으나 졸당공께서는 벼슬보 다는 학문탐구에 열중하여 벼슬에는 오래 머무르지는 않았다. 벗으로는 모두들 당대(當代)의 현인(賢人)들로서 도은(陶隱) 이숭인(李崇仁 1349~1392), 야은(冶隱) 길 재(吉再 1353~1419),독곡(獨谷) 성 석린(成石璘 1338~1423),춘당(春堂) 변중랑(卞仲良 ?~1398), 송당(松堂) 조준 (趙浚 1346~1405) 등과 정의(正義)가 돈둑(敦 篤)했고 서로 도리(道理)를 다하면 학문을 논의(論議)하고 시문(詩文)을 주고 받으면 면 학(勉學)에 더욱 증진(增進) 하는데 힘썼다. 특히, 행실(行實)이 심비(深秘)되어 부모님을 섬김에 있어서는 말 소리는 부드럽게 하고 얼굴빛은 밝은 미소를 지어면 부모님의 뜻을 항상 새겨 받들고 기쁨을 만들어 주었다. 스승이신 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가 태종(太 宗) 이 방원(李芳遠)에게 살해(殺害) 당하자, 거상(居喪)을 지내면 통곡하고 제자(弟子)가 스승을 위하여 죽지 못한 도리(道理)는 본인의 부덕(不德)이 졸(拙)함 이라, 하시면 87세 에 이르기까지 영전(靈前)에 문상(問喪)하듯이 슬퍼하셨다. 스승님의 깊은 학덕(學德)에 대한 그리움을 수척한 몸으로 예절(禮節)을 다하여 표의(表意)하시고 살아가셔서니 어찌, 대단한 도인(道)人)이라 하지 않을 수 있을까? 나는 고려왕실(高麗王室) 유노(遺老)들에 정충탁절(貞忠卓節)과 송죽(松竹)같은 마음의 충절(忠節)을 보아서니 과히, 벼슬보다는 인(仁)과 의(義)의 도리(道理)에 중요(重要)함을 알았다고전(傳) 한다. 이렇게 졸당공(拙堂公)께서는 자기 자신(自身)을 독려(督勵)하면서 학문에만 깊이 심취(心 醉)하였다. 그리고 87세생존(生存)한 날까지도 부형(父兄)의 훈계(訓戒)는 절대적으로 지켰다. 졸당선생(拙堂先生)께서 말씀하시기를 “모든 사람들은 아리따움과 권력(權力)을 차지하고자 하는 욕심(慾心)을 가지고 있듯이, 나 라고 어찌 그런 욕심(慾心)이 없겠느냐, 그러나 나는 스스로 고려의 큰 군신(君臣)들의 충직(忠直)을 보고 깨달은바가 매우 크다.”하시면 “아! 절개(節槪)를 어찌,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겠느냐. 이제부터 나 홀로라도 이씨 조선(李氏朝鮮)의 졸(拙)함을 보면 모든 역경(逆境)과 시련(試鍊)을 극복(克服)하면 살아갈것”이라고 굳은 마음의 정조(貞操)를 가지고 사셨다. 이는 언젠가 는 역사와 후손들이 기억하여 이 와 같은 여명(黎明)을 알아주리라고 생각한 사실들이 밣혀지고 있다 1439년2월2일 *기미년[(己未年 : 조선 세종대왕21년(朝鮮 世宗大王21年)]에 운명(運命)하시여 합천군 용주면 봉기리 미금동 *유좌원[(酉坐原) 유(酉 : 십이지간의 열번째) 위치]자리예장(禮葬)하였다. 이 후에 졸당공(拙堂公)께서는 기해년(己亥年)에 신계서원(新溪書院)으로 배향(配享)되었다. 벼슬은 *호조정랑[(戶曹正郞 : 고려 시대때부터 육조(六曹) 중 호구(戶口), 공부(貢賦) 전곡(錢穀), 식화(食貨)에 관한 일을 맡아보던 관아 (官衙)고려 공양왕 원년(1389)에 판도사(判圖司)를 고친 것, 조선 말기 고종 31년에는 탁지아문(度支衙門)으로 고쳤다.)]을 거쳐 차후, 이조참판(史曹參判 : 종 2)으로증직(贈職) 되었다. 또한, *삼기현[(三岐縣 : 지금의 합천군 용주면, 대병면과 봉산면의 일부, 거창군 일부지역.)]에서 엄청난 갑부(甲富)였다. 배(配)는 동래 정씨(東來鄭氏)인데, 묘(墓)는 실전(失傳)되었고 후배(后配)는 강양 이씨 (江陽李氏)로서 태자첨사공실(太子詹事公實)의 딸님이면 강양군(江陽君) 약(若)의 손녀 (孫女)가 되신다. 장남(長男) 승문(承文)은 *음직[(蔭職 : 과거를 거치지 아니하고 조상의 공덕에 의하여 맡은 벼슬)]으로 정랑(正郞), 품계(品階)로 *가선대부동지중추부사[(嘉善大夫同知中樞府事 : 조선시대에 종2품 문무관(文武官)의 품계. 가의대부(嘉義大夫)의 아래 급으로 태조 1년(1392)에 설치하였으며 고종 2년(1865)부터는 문무관(文武官), 종친(宗親), 의빈(儀賓)의 품계로도 썼다.)]를 지내서면 두촌공파(杜村公派)의 파조(派祖)가 된다. 승문(承文)의 장자(長子) 사림(士林)의 벼슬은 음직(蔭職)으로 *찰방[(察訪 : 조선시대에 관역사(館驛使)로 각 도(道)의 역참(驛站) 일을 맡아보던 종 6품 외직(外職) 문관의 벼슬. 공문서(公文書)를 전달하거나 공무로 여행하는 사람의 편리를 도모)]이요. 차자(次子), 서림(書林)은 *주부[(主簿 : 조선 시대에 각 아문(亞門)의 문서와 부적(符籍)을 주관하던 종 6품 벼슬.)]였고 숙자(叔子:셋째), 유림(儒林)은 *습독[(習讀 : 조선 시대에, 훈련원에 속한 종 9품 무관(武官) 벼슬.)]이였다. 졸당공(拙堂公)의 차남(次男) 희문(熙文)은 태인현감(泰仁懸監) *현감[(縣監: 조선 시대에 둔 직책으로 작은 현(縣)의 으뜸 벼슬. 품계는 종 6품으로 고려 시대의 감무(監務)를 고친 것인데 감무 보다는 권한이 강하였다.]을 지냈고 태인공파(泰仁公派)의 파조(派祖)가 된다. 희문(熙文)의 자식의 장자(長子), 세림(世林)은 현감(縣監)이였고 차자(次子),언림(彦林)은 *판사[(判事 : 조선 시대에 동령부(東寧府) 의금부(義禁府) 따위에 둔 종1품 벼슬. 돈령부 (敦寧府)와 중추부(中樞府) 의금부의 버금 벼슬이다. 조선 후기(後期) 법 부(法部)에 속한 관직)]를 숙자(叔子:셋째), 계림(係林)은 통찬(通贊)을 지냈다. 또한, 장자(長子) 세림(世 林)은 현감공파(縣公派)의 파조(派祖)가 되고 차남(次男) 언림(彦林)은 판사공파(判事公 派)의 파조(派祖)가 되었다. 졸당공(拙堂公), 맏 딸의 남편(여서 : 女壻)은 강위성(姜渭成)이였고 둘째 딸의 남편은 이석주(李碩柱)는 *훈도[(訓導 : 한양(漢陽)에 사학(四學)지방에는 향교 (鄕校)에서 교육을 맡아보던 교관. 사학의 훈도는 성균관의 관원들 겸임하였다.)]였다. 계림(係林)의 딸, 졸당공(拙堂公)의 친 손녀(孫女), 남편(손서 : 孫壻)은 의성(義城) 김씨 (金氏)로서 예문관(藝文館) 봉교(奉敎)를 거쳐 대제학(大提學)을 지내신 김헌(金獻)으로 1519년(중종14年) 정암(靜庵) 조광조(趙光祖) 난(亂)에 연루(連累)되어 졸당공(拙堂公) 에게로 낙향(落鄕)하여 평생을 의탁생활(依託生活)을 하면(지금의 용주면 고품마을 주위) 에서 여생(餘生)을 마쳤다. 졸당공(拙堂公) 박 총(朴聰)에 시문(詩文)은 부친(父親)인 박익공(朴翊公)의 문장력(文章 力)솜씨와도 비교 될 만큼 손색(遜色)이 없을 정도로 칭송(稱頌)을 받은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졸당공(拙堂公)께서 "신심신관장(愼心愼官章)"에 철학(哲學)을 남긴 뜻은 “항상, 사람은 선비의 절개(節槪)와 위용(威容)을 갖추어 근신(勤愼)으로 벼슬길을 대비(對備)하여 분골쇄신(粉骨碎身)학문(學文)을 닦고 습득(習得)해 두어야 차후, 벼슬길에 나서면 백성들 을 위하여 모범(模範)적 선례(先例)가 된다"는 단편적(斷片的)인 마음 수련을 후손들에게 전(傳)하고 있다. 이와 같은 내용으로 보아 졸당공(拙堂公)께서는 이씨조선(李氏朝鮮)의 벼슬보다는 후학(後學)을 위하여 학문 증진과 시문 등에 매우 열중(熱中)한 것으로 느껴 볼 수가 있다. 그러므로 여러 문헌(文獻) 곳곳에서도 항상 졸당공(拙堂公) 문중(門中)에 대하여 논의(論議)한 것을보면 인본사상(人本思想)을 중요시하고 정의(正義)와 도리(道理)를 근본 (根本)으로 삼는다는 대단한 예찬(禮讚)들을 한다. 모든 사물(事物)을 대함에 있어, 비굴(卑屈)함이 없다는 청백리혈통(淸白吏血統) 으로서 국가(國家)에 맡은 바, 임무(任務)에 최선(最先)을 다하는 충직(忠直)한 정신(情神) 으로 무장(武將)되어있는 훌륭한 가문(家門)으로 전(傳)해 내려오고 있다. 향사(享祀)는 1833년 순조(純祖 : 33년) 옛, 덕남 서원(德南書院) 밀양시 초돈면 신호리 220번지, 모선정(慕先亭)뒤 송은공(松隱公) 박익(朴翊), 우당공(憂堂公) 박 융(朴融), 인 당공(忍堂公)박소(朴召), 아당공(啞堂公) 박조(朴調), 졸당(拙堂公)박 총(朴聰)을 봉안(奉 安), 제향(祭享)하고 영각(影閣)에 이안봉향(移安奉享)하여 진심으로 예관치제(禮官致祭) 한다. 경남 산청군 신안면 문대리 진태 마을에 있는 신계 서원(新溪書院)은1839년(헌종5년)에 지방유림(儒林)의 공의(公義)로 박익선생(朴翊先生)의 학문(學文)과 덕행(德行)을 추모(追 募)하기 위하여 창건(創建)하여 위패(位牌)를 모시고 있으며 창건과 함께“신계(新溪)”라 는 사액(賜額)을 받았으며 선현배향(先賢配享)과 지방교육(地方敎育)의 일익(日益)을 담당 (擔當)하여 왔다. 신계 서원(新溪書院)의 시제일(時祭日)은 매년, 음력 3월17일 날 모시고 있다. 또한 합천군 대병면 용주면의 악견산(嶽堅山)을 비롯하여 인접에 금성산(金城山), 허굴산 (虛屈山), 황매산(黃梅山) 등과 인근 서부 경남(西部 慶南)주위로 졸당공(拙堂公)의 후손이 많이 형성(形成)되어 있다. 밀양 박씨(密陽 朴氏) 졸당공(拙堂公) 합천 “봉양제” 향사일은 매년, 음력 10월10일 경남 합천군 대병면 성리에서 지내고 있다. 이밖에 졸당공(拙堂公)의 장자(長子) 두촌공(杜村公) 승문(承文)은 합천 대병면 “봉산재”를 모시고 차남(次男) 태인공(泰仁公) 희문(熙文)은 합천군 대병면 “산천재”를 음력10월11 일 지내고 있다. | ||||
46세손 (世孫) |
17세손 (世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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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세손 (世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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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세손 (世孫) 선계(先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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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聰)의1자(子) 승문(承文) 두촌공파(杜村公派)의 파조(派祖)
자(字)는 형지(亨之) 호(號)는 두촌(杜村). 음직(蔭職)으로 참봉병조좌랑(參奉兵曹佐郞), 품자(品資)로 가선대부동지중추부사(嘉善大夫同知中樞府事) 묘소(墓所) : 합천군 대병면 성리 악견산, 그늘이 있는 마을 정면에서 묘(卯 : 십이지간의 넷째)방향 평지에 있음, 배(配)는 강양(江陽) 이씨(李氏) |
총(聰)의 2자(子) 희문(熙文) 태인공파(泰仁公派)의 파조(派祖)
자(字)는 리지(利之) 호(號)는 송재(松齋). 선조(宣祖) 때에 태인현감(泰仁懸監) 묘소(墓所) : 합천군 삼가면 대평리 우뚝 솟은 바위에서 묘(卯 : 십이지 넷째)방향 사이에 붙어 있다. 배(配)는 고령(高靈) 박씨(朴氏) | ||||
총(聰)의 1녀(女) 강위성(姜渭成)과 혼인(婚姻) | ||||
총(聰)의 2녀(女) 훈도(訓導)를 하신 이석주(李碩柱)와 혼인(婚姻)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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