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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과 속
베르나르두스와 성 빅토르의 리처드 그리고 보나벤투라가 무아지경에서
하느님의 사랑에 대해 쓰는 동안, 당시 유럽도 사랑의 문제와 씨름하고 있었다.
속과 성은 부득이 서로에게 영향을 끼친다.
11세기 프랑스에서는 음유 旿遊시인들이 갑자기 나타나 남자들이
마치 여신처럼 떠받든 한 여성을 위한 사랑의 노래를 읊었다.
이때는 오비디우스 CMd(B.C.43~A.D.177?)의 『사랑의 기술』Ars Amatoria이 크게 유행하던 때였다.
루이스C.S. Lewis는 이른바 궁정식 애정이란 불순하고 불명예스러운 것이었다고 지적했다.
그러나 바로 이 궁정식 애정에는 유럽인들의 생활과 문학과 종교에
지대한 영향을 준 예의와 헌신이라는 아름다운 신비적 요소가 들어있다.
7 사실상 그때부터 서구 영성은 아시아에서 일어난 영성이나
그리스와 러시아 정교회의 신앙과도 다른 신비로운 차원을 점하게 되었다.
궁정식 애정이 아가의 해석에 영향을 주었다 하더라도 이는 그리 놀랄 일이 아니다.
아시시의 젊은 프란치스코가 사랑의 시를 쓰다가
하느님의 음유 시인이 되었다는 것도 그리 놀랄 일이 아니다.
기사도의 사랑은 로욜라의 이냐시우스의 삶에서 강력한 힘을 발휘했다.
십자가의 성 요한은 낭만 그 자체였다.
(12세기로 돌아가면) 엘로이즈HOloise와 아벨라르두스의 사랑이 있었다.
둘의 사랑은 널리 알려졌고 논란거리가 되었다.
그래서 질송은, “엘로이즈 와 아벨라르두스의 정열적인 드라마는
사람들이 상상하는 것보다 더 풍요로워서 사랑의 문제에 모든 사람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라고 말했다.
왜냐하면 아벨라르두스는 엘로이즈를 위한 사랑의 시를 썼고 답례로
그녀도 순수하고 사심 없는 사랑에 관한 사색이 담긴 편지를 썼기 때문이다.
이 모든 것은 하느님의 사심 없는 사랑에 대한 신학적 논쟁과,
하느님께 대한 사랑을 위해 모든 비난을 감수할 수 있는가 하는
가능성에 대한 신학적 논쟁을 야기했다.
키케로Cicero의 『우정론JDe Am/citia은 보다 합리적이고 상식적인 내용이었다.
영국의 베르나르두스라고도 알려진 시토회 수도승 엘레두스Aelredof Rievaulx(1109~1167)에게
영향을 준 우정에 관한 아름답고 고귀한 이상이 있었다.
키케로는 엘레두스를 통해 전체 시토 수도회 전통에 영향을 주었다.
당시 시대정신은 종교생활 전반에 영향을 주었다.
모두가 진정한 사랑의 의미를 찾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