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화.보조.고문단 15:20
위기를 통하여 당신의 뜻을 이루시는 하느님아버지, 참으로 감사합니다!
【 ▶ [ 위기의 시대, 신앙의 길을 찾다 1부 l 토마시 할리크 신부가 전하는 현대시대의 영성(39:49)
11:17 민주화로 전환하는 과정은 시간과 노력을 필요로 합니다.
만약 북한의 공산 독재정권이 무너진다면 병든 사회가 치유되기까지 오랜 시간이 필요할 것입니다. 독재정권이 무너지면 화해가 꼭 필요합니다.
12:37 화해의 길은 머나먼 길일 수 있습니다. 정치적일뿐만 아니라 영적이고 윤리 도덕적인 길이기 때문입니다.
때문에 교회의 역할이 정말 큽니다. 그리스도인과 교회는 <화해의 전문가>가 되어야 합니다. ]
▶ [ 위기의 시대, 신앙의 길을 찾다 2부 | 팬데믹, 시대의 징표 | 치명자산성지 평화의 전당 | 토마시 할리크 몬시뇰(45:56)
# 함께한다는 것
8:47 끊임없이 성장하는 거대 도시들이 사막이 되고 있습니다. 특히 젊은이들은 '군중 속에 외로움'에 시달립니다.
저는 한국 젊은이들의 자살률이 매우 높은 것을 알고 있습니다.
자살은 외로움에 대한 절망의 표현으로도 볼 수 있습니다. 인터넷상에 가짜 친구는 실제 친구를 대신할 수 없습니다
철학자 마르틴 하이데거는 "과학기술은 모든 거리를 극복했지만 어떤 친밀함도 만들어 내지 못했다.".라고 쌌습니다.
그리스도인의 과제는 <친밀함의 문화>를 만드는 것, 즉 <소통 존중 그리고 협력의 과정으로 세계화를 만들어 가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그리스도교가 이 위대한 역사적 과업을 성취할 수 있을 것 이라고 굳게 믿습니다.
이를 위해서는 먼저 교회가 쇄신되어야 합니다.
저는 이 쇄신이 프란치스코 교황님이 <시노달리타스>를 제안하면서 시작됐다고 믿습니다.
<함께 걷는 길의 교회>, 즉 <시노드적인 교회>만이 세상을 치유할 수 있습니다.
# 그리스도교의 오후
24:31 저는 제가 쓴 < 그리스도교의 오후 >를 통해 우리 시대를 교회의 역사적 맥락에서 이해하려고 했습니다.
그리고 심층심리학의 창시자 칼 구스타프 융이 삶의 변화를 설명하기 위해 사용했던 은유를 교회사에 적용했습니다.
융은 어린 시절과 청년기를 아침에 비유하고 중년기를 정오의 위기에 비유합니다.
<정오의 위기를 통과한 사람들은 영적인 세계의 진입할 준비가 된 것> 입니다.
<삶의 지혜를 얻을 수 있는 성숙의 시간> 즉 <인생의 오후를 맞이할 단계>에 와 있습니다.
저는 그리스도교 역사에 있어서 제도와 교리를 만들고 있던 시대를 아침에 비유했습니다.
그리고 교회 안에서 근대화와 세속화가 대립하고, <전통적으로 믿어온 종교적 확실성이 혼란을 겪는 시대가 바로 '정오의 위기'>입니다.
최근 교회 내에서 성적, 심리적, 그리고 영적 학대 사례가 폭로되었습니다.
교회를 향한 신뢰가 흔들리고 있다는 사실이 <'위기'>를 증명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지금 새로운 <'그리스도교의 오후'의 문턱>에서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리스도교의 지혜와 성숙의 시간은 저절로 오지 않을 것입니다.
교회는 변화, 개혁, 그리고 영적 심화를 요구받을 것입니다.
저는 프란치스코 교황님이 시작한 시노드적 교회 쇄신이 우리를 성숙한 교회, 즉 '오후의 시간'으로 안내할 것이라고 봅니다.
32:27 Q "그리스도교의 오후"라는 개념을 통해서 신부님께서 설명하시고자 하는 내용을 좀 더 자세히 알려주신다면?
저는 우리가 지금 갈림길에 서있고 그리스도교의 오후에 접어들면서 성숙의 시간이 올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융은 오후에 접어든 삶이 좋지 않을 수도 있다고 말합니다.
사람들이 계속해서 재산, 직업 등에만 관심을 둔다면, 성숙한 오후로 접어들 수 없다고요.
교회 또한 <나쁜 오후>를 맞이할 수 있어요. 오로지 과거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에만 머물러 있다면 성숙한 오후는 멀기만 한 이야기입니다.
과거를 향한 집착은 위험합니다. 우리는 앞을 봐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훗날 제자가 될 어부들을 만난 때는 이른 아침이었습니다.
아마 어부들이 아주 지쳐서 대화하기 좋은 시간은 아니었을 겁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들에게 깊은 곳에 가서 다시 그물을 던지라고 하십니다.
어부들은 아무것도 잡지 못했고, 그물이 비었다고 하지만, 그분은 깊은 곳으로 가서 다시 그물을 던지라고 하십니다.
오늘날에도 사람을 낚는 어부들이 많습니다. 일부 사제들과 주교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도 어부들과 상황이 다르지 않아요. 가진 게 없고 그물이 비었어요. 신학교도 비어있고 신자수는 절반으로 줄었어요."
하지만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실 겁니다. "깊은 곳으로 가서 그물을 얹어라, "라고요.
지역 교회와 사제들의 지쳐있으면, 저 역시 이렇게 말할 겁니다.
"더 깊숙이 나가서 다시 한번 해 봅시다."
다시 하는 건 예전의 실수를 반복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래서 우리 교회에 오고 있는 이 오후는 <전환점>이라고 생각합니다.
더 깊은 곳으로 가서 믿음을 새롭게 다지고, 신앙인으로서의 삶을 돌아볼 수 있는 계기라고요.
바로 그렇게 할 때 우리는 심오한 영적인 삶을 살게 될 겁니다.
물론 신학을 더 깊게 이해하고 시민사회에서 활동도 열심히 해야겠지요. ]
▶ [ 위기의 시대, 신앙의 길을 찾다 3부 | 변화하는 시대, 성숙한 신앙의 길 | 치명자산성지 평화의 전당 | 토마시 할리크 몬시뇰(47:25)
33:03 저는 이번에 한국어로 출간된 '그리스도교회 오후'에서 <신앙의 성숙>에 관해 썼습니다.
신앙의 역사와 교회의 역사는 단순하고 일방적인 진보가 아닙니다
그 안에 빛과 어둠 거룩함과 죄가 섞여 있기 때문입니다.
- '인생의 아침'은 인간의 기본적인 특징을 키워나가고, 자기 자리를 찾아가는 청소년기와 초기 성인기입니다.
- 그리고 '정오의 위기'인 중년의 위기가 옵니다. 피로, 졸음, 에너지 손실 또는, 소진증후군의 시기입니다.
우리의 건강, 직업, 협력관계, 신앙, 그리고 영적인 삶의 영향을 미치는 위기가 오는 것입니다.
<성숙기와 노년기인 '인생의 오후'는 평생이 걸린 성숙함을 완성할 수 있는 기회>인데요,
<우리의 내면적 영적 삶을 발전시키는 시기>입니다.
하지만 인간은 이 기회를 놓칠 수도 있습니다. 경력과 부를 쌓는 것과 같은 '아침 활동'만 계속하면 말입니다.
완고해지고 불안해하고 우울해 '나쁜 노화'가 일어날 수 있습니다.
근대 이전의 시대는 '아침'인데 교회가 제도적이고 교리적인 구조를 구축한 시기입니다,
그리고 '정오의 위기'가 왔는데 종교개혁에서 계명주의에 이르기까지의 시간입니다.
근데 무신론부터 종교적 무관심에 이르기까지 기존의 구조가 흔들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회 문화적인 세속화는 그리스도교를 끊는 게 아니라 변화시켰을 뿐입니다.
오늘날 그리스도교는 '오후'에 문턱에서 있습니다. 갈림길에서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에게는 더 성숙한 그리스도교로 깊이 나아갈 수 있는 기회가 왔습니다.
<그리스도인으로 살 수 있는 새로운 길이 다양하게 열리고 있습니다.> 지금은 <그리스도의 역동적인 특성을 되살리고 심화시킬 때>입니다.
하지만 진정한 의미의 '새로운 복음화'는 현재 어려운 과제를 안고 있습니다.
그 과제는 바로 변모하셨고 부활하셨고 살아계시는 보편적인 그리스도를 찾는 것입니다.
종종 우리 시야의 한계, 좁은 관점과 지적 한계는 그분을 위대하심을 가려 버립니다.
결국 우리가 개념적으로 가지고 있는 생각과 기대는 사라져야 합니다. 많은 형태의 신, 교회와 신학도 사라져야 합니다.
너무 제한적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신앙은 알지 못하는 미래로의 모험을 떠나기 위해 두려움과 용기 부족 때문에 생긴 벽을 넘어야 합니다.
우리는 변화와 위기 속에서 도전의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모든 위기는 기회이자 가능성입니다.
신앙이 성숙해지는 것은 위기를 통해서이며 성숙한 신앙만이 이 시대에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습니다 . ] 】
토마시 할리크 신부님의 <위기를 맞은 현대시대의 영성의 나아갈 길>에 관한 강의를 시청하며
참으로 놀라운 건 저같은 사람이 이 강의를 공감하며 맞장구를 쳤다는 사실! 또 부족한 제가 그 정답을 살아간다는 사실입니다.
특히 공산권을 경험한 신부님이시기에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생각됩니다.
남의 일이 아니라 당장 눈앞에 닥친 우리의 일인데 <화해의 전문가>라는 단어가 갖는 의미를 깊이 묵상하게 됩니다.
또, 과학기술이 모든 거리를 극복한 반면 그 시대에 맞는 영성은 아직도 제자리를 걸으니 젊은이들에게 공감을 얻을 수 없는 것은 자명한 일입니다.
강의 말씀대로 그리스도교의 지혜와 성숙의 시간은 저절로 오지 않겠지요.
위무위 신부님의 <내맡긴 영혼은 - 역사는 흘러가며 성장합니다.>에서의 말씀대로 현대인에게 맞는 영성이 대두되어야 함은 너무나 당연한 것이지요.
교회가 프란치스코 교황님이 말씀하신 세상을 치유할 방책으로 <함께 걷는 길의 교회>, <시노드적인 교회>는 하느님 뜻대로 사는 것만이 열쇠임을 깨닫고
내가 하지 말고 하느님께서 하시도록 하느님 뜻대로 사는 영성 <거내영>을 통하여
모든 이들이 우리 교회에 닥친 이 위기의 오후를 획기적인 <전환점>으로 삼아
전통적으로 믿어온 종교적 확실성이 혼란을 겪는 이 시대의 이 정오의 위기가 나쁜 오후가 아니라
<삶의 지혜를 얻을 수 있는 성숙의 시간>이 되어 영적인 삶을 살게 되는 것,
그것이 아이에서 어른으로 성숙한 신앙인으로 거듭나는 위기를 기회롤 삼는 가장 탁월한 길이라 생각합니다.
사랑하는 아버지, 베풀어 주신 모든 은혜에 감사드립니다. <거내영>을 통하여 당신의 인간 창조 질서를 회복하소서.
아버지의 완전한 사랑과 완전한 영광을 위하여!
[ ♣ 聖父영성운동 ♣ 聖父 영성운동이라고 들어보셨나요?
moowee 17.03.28 14:32
우리 가톨릭 내에서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의 제3위이신 성령에 의한 교회쇄신운동이 일어난지도 어언 반세기가 되었습니다.
'성령 쇄신운동' 이 있다면, '성부 영성운동' 이 있으면 안 되나요? '성령쇄신운동' 이 교회 초기부터 있어왔나요?
혹시 '聖父영성' 이라고 못 들어보셨나요?
성부 하느님이 자신의 '주인' 이심을 지식으로써가 아니라 진실로 마음으로 인정하고 받아들여,
★성부 하느님께 자신의 모든 것을 내맡겨 드리고 끊임없이 하느님 아버지의 이름을 부르는 삶을 통하여
'성부께서 변화시켜주신 새삶' 을 살아가게 하여, 이땅에 '하느님아버지의 영광' 을 드러내는 '영성운동'★
이 있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 아무리 훌륭한 신심운동이라 해도 운동은 운동 즉 움직이는 것입니다, 시대에 걸맞게! ]
성부영성운동은 그 목적이 직접적으로 <이 세상에 아버지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게 하는 것>이 목적이니,
사실은 하나의 <신심운동>이라 말할 수 없고 단지 <하느님 신앙>일 뿐입니다. ] moowee 17.03.28 15:32
[ ♣ 聖父영성운동 ♣ ★하느님의 뜻을 구하는 기도★가 최선
moowee18.09.24 13:11
“아버지, 아버지께서는 하시고자만 하시면 무엇이든지 다 하실 수 있으시니 이 잔을 저에게서 거두어 주소서. 그러나 제 뜻대로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소서”
주 예수님은 아버지 하느님의 뜻을 행하고 이루는 것이 당신의 음식이라고까지 하셨다.
그만큼 ★아버지의 뜻을 앞세우신 것★이다.
- 전달수 신부(안동교구 다인본당) - ]
[ ╂ 오늘의 복음 Re:Re:Re:Re: 성령 / 새로운 성령운동, 성부영성운동 / 거룩한 내맡김 영성
위무위 20.04.22 23:57
(,,,) <성령의 은사>를 뛰어넘어야 합니다. 은사를 베푸시는 성부와 성자 하느님의 사랑의 영이신 <성령 하느님>을 찾아얻어야 합니다!
"내가 아이였을 때에는 아이처럼 말하고 아이처럼 생각하고 아이처럼 헤아렸습니다.
그러나 어른이 되어서는 아이 적의 것들을 그만두었습니다."(1코린 13,11)
이제 ★영적인 어른★이 되어야 합니다, 영적인 어른!
"여러분은 더 큰 은사를 열심히 구하십시오. 내가 이제 여러분에게 더욱 뛰어난 길을 보여 주겠습니다." (1코린 12,31) ]
[ ▣ 주일강론 신앙의 해, 성령 강림 대축일(2013, 05,19)
moowee 13.05.19 08:55
< 신앙의해, 성령강림대축일 > 2013, 05, 19
(,,,) 마지막 견진교리 시간에 들었던 강의 내용 그대로 앞으로는 모두가 "성숙한 신앙인의 삶" 을 살아가야 하는 것이다.
성숙한 신앙인의 삶이란 무엇을 말하는가?
견진성사를 받았다고 누구나 다 성숙한 신앙인의 삶을 살아갈 수 있는가?
"그렇지 않다" 는 사실을 누구보다도 여러분 자신이 더 잘 아실 것이다.
견진성사 받은 이들이 모두 "성숙된" 신앙인의 삶을 살아가고 있다면
아마도 이 세상엔 벌써 "하느님의 나라" 가 완성되고도 남았을 것이다.
누구나 견진성사를 받았다고, 견진성사를 통하여 "성령" 을 받았다고 성숙된 신앙인의 삶이 저절로 살아지는 것이 절대 아니다.
성숙한 신앙인으로서 성숙된 신앙인의 삶을 살아가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견진성사 때 받은 성령의 "이끄심" 에 충실히 이끌려 드려야 하는 것>이다.
성령의 이끄심에 충실히 이끌려 사는 사람이 바로 "하느님의 자녀" 인 것이다.
하느님의 영의 인도, 성령의 이끄심에 따라 살아야 한다, 견진자는 말이다.
견진성사를 통하여 성령을 받고도 성령의 이끄심 대로 살아가지 못하는 사람은 하느님의 자녀라기 보다 "하느님의 불효자" 일뿐이다.
그러면 "어떻게 사는 것" 이 성령의 이끄심에 충실히 이끌려 드리는 삶인가?
두 말할 것도 없이 그것은 ★"하느님 뜻대로 사는 삶"★ 이다.
하느님 뜻대로 사는 삶이란 "어떤 삶" 을 말하는것인가? 하느님 뜻대로 사는 삶이란 "거룩하게 사는 것" 을 말하는 것이다.
왜? 하느님은 거룩하신 분이시며, 그 거룩하신 분이 인간을 창조하신 뜻, 그 목적이 우리 인간들도 당신처럼 거룩하게 살라고 창조하셨기 때문이다.
하느님의 아들 그리스도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것도
당신이 창조하신 인간이 창조하신 뜻대로 거룩히 살지 못했기 때문이다.
오늘 당신의 협조자 빠라끌리도 성령을 이 세상에 보내 주신 뜻, 그 이유도 <성령의 인도하심에 따라 거룩히 살도록 이끌어 주시기 위함>이시다.
따라서, "거룩히 살지 않는 것" 은 성령을 거스르는 것이며,
성령을 거스르는 것은 이 세상에 오신 예수님을 거스르는 것이며,
예수님을 거스르는 것은 그분의 거룩하신 아버지 하느님을 거스르는 것이며,
아버지 하느님을 거스르는 것은 "천지창조의 목적" 을 전적으로 거스르는 것이다.
오늘 제2독서 코린토 1서의 말씀에서 바오로 사도는 "성령에 힘입지 않고서는 아무도 '예수님은 주님이시다.' 할 수 없다." 하셨다.
이 말씀은 곧 성령을 받은 사람은 누구나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자신의 모든 것의 주인" 이라고 ★증언★해야 한다는 말씀이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다른 사람이 말하는 예수님" 이 아니라, ★"자신이 직접 체험한 예수님"을 주님으로 증언★해야 하는 것이다.
★예수님을 다른 이에게 증언할 줄 아는 사람★이 바로, <성숙한 신앙인>이며 그것이 곧 "성숙된 신앙인으로서의 삶" 인 것이다.
신앙의 해에 맞이한 오늘 성령강림 대축일에 이미 견진성사를 받은 모든 교우와 오늘 견진성사를 받게 될 새 견진자들은
"하느님께서 변화시켜 주신 새 삶을 증언하자" 촉구하신 전 교황님 베네딕도 16세의 말씀을 다시 한 번 가슴에 깊이 새겨보는 오늘 성령강림 대축일이 되기를 바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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