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
- 글쓰기의 최전선을 읽고-
백란주
글을 쓰고 싶다는 이유가 무엇인지 묻게 된다. 아마도 이야기를 하고 싶다는 상처일지도 모른다. 무엇에 대한이야기? 그냥이라고 말하지만 뱉는 순간 그냥이 아님을 안다. 가보지 않은 길에 대한 두려움과 허영일 수도 있고 가본 길에 대한 정의일 수도 있다. 글쓰기는 여러 갈래 길 중에서 나는 어떤 길을 보았고, 갔고, 걸었는지를 말하며 그 길에서 내가 느끼고 얻은 것, 잃은 것은 무엇인지를 들여다보는 진솔한 고백이 되어야 한다. 그런데 가끔 나는 길을 나서자 길을 잃어버릴 때가 있다. 내 길에 대한 확신보다 곁에 있는 길이 더 궁금해지기 때문에 내가 걷던 이 길에 대한 마무리를 짓지도 못하고 다른 길로 방향 전환을 할 때가 있다. 결국 내가 걷고자 했던 길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갈림길에서 허상을 향해 진실을 추구하는 모양새가 된다.
첫 길은 초등학교 시절 ‘백일장’이라는 길이었다. 시골 길은 풀들이 그대로 자랄 수 있는 환경이었던 것처럼 풀에 대한 관심과 사랑은 중요하지 않았던 시간의 첫 태엽이었다. 그 들풀 같은 느낌은 그냥 글쓰기를 한다는 이유만으로도 행복했기 때문이다. 점차 풀은 주변을 의식하며 나무를 보고 들꽃들을 보며 시샘했던 것일까. 풀 본연의 색과 향을 잃어가는 듯 했다. 점차 글은 미사여구가 포함되어야 멋진 글 같은 착각의 길로 들어섬을 인정하게 되는 시간이 왔다. 풀은 역시 그냥 풀인데 하는 자위와 함께 그늘에 있고 싶었다. 큰 나무그늘이거나 예쁜 들꽃 밑에 있고 싶었다. 그렇게 시골길에서 들풀이 되고자 했던 마음은 스스로 소멸되었다.
시간이 주는 경험을 겸허히 받아들이는 시기. 엄마라는 자리, 아내라는 자리, 가족이 되는 자리는 첫 경험들이 들려주는 서툶으로 하나씩 배우고 느끼게 했다. 어느 날 다시 유년의 그 길을 찾고 싶어졌다. 나는 큰 나무가 아니어도 되고 예쁜 들꽃이 아니어도 되었다. 나는 그냥 풀꽃이면 충분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냥 내 이야기를 다시 하고 싶었다. 내게 보이는 느낌대로, 내게 전해지는 투박하고 어스러진 모습 그대로 말하고 싶었다.
글쓰기의 최전선. 어느 날 나도 그렇게 최전선에 서고 싶은 시간들과 마주하게 되었다. 글쓰기에 관련된 책들도 몇 권 읽은 후유증일까 처음 책을 읽기 시작할 때의 흥미나 감흥은 그렇게 와 닿지 않았다. 그런데 책을 읽으면 읽을수록 가속도가 붙었다. 분명 알고 있는 명제이고 알고 있는 진리인데, 익숙함인데 전혀 지루하지 않았다. 오히려 무중력 속의 상황처럼 여겨졌다. 그간 내가 알고 있다고 생각했던 무게들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느낌이 들었다.
글쓰기는 둥그스럼한 돌에서 모난 돌로 자신을 깎고 벼리는 일이다. 더 섬세하고 더 고유하게 감각을 다듬어야 한다. 하늘 아래 새로운 것은 없다. 단지 해묵은 것을 새롭게 보는 시각이 있을 뿐이다. 이 세상에 컵 자체는 없다. 노란 컵, 플라스틱 컵, 종이컵, 깨진 컵만 있을 뿐이다. 사실은 없다. 해석된 사실만이 존재한다. 내가 만약 어떤 괴로움에서 벗어날 수 있다면, 괴롭히는 대상이 없어져서가 아니라 그것을 받아 들이는 나의 태도가 달라졌기 때문이다. 그렇게 작가는 보편적 관점을 변화시키고, 알고 있는 것의 지평을 변화 시키고, 약간 옆으로 비켜서 보는 사람이어야 한다. 어떤 경험을 했을 때 다른 시각으로 생각하고 내 진짜 느낌에 집중하려는 노력이 글을 참신하게 한다. 어떤 글이 읽힌다면, 독자의 눈길을 붙들었다면 그것은 진부하지 않다는 뜻이다.
또 흔히 나는 글재주가 없다, 개성이 없다고 말하는데 많이 써보지 않아서 그럴 수 있다. 나의 삶을 숙고하고 나의 경험을 나의 언어로 말하는 훈련을 반복하기 전에는 ‘글재주’와 ‘고유성’은 드러나지 않고 드러날 수도 없다.
내 조카 허친이 집을 짓고서는 통곡헌(慟哭軒)이란 이름의 편액을 내다 걸었다. 그러자 사람들이 크게 비웃으며 물었다.
“세상에는 즐길 일들이 정말 많거늘 무엇 때문에 곡(哭)이란 이름을 내세워 집에 편액을 건단 말이냐? 게다가 곡이란 상(喪)을 당한 자식이나 버림받은 여인이 하는 행위다. 세상 사람들은 그런 자들의 곡소리를 몹시 듣기 싫어한다. 남들은 기필코 꺼리는 것을 자네는 일부러 가져다가 집에 걸어두는 이유가 대체 무엇인가?”
그러자 허친이 이렇게 대꾸했다.
“저는 이 시대가 즐기는 것은 등지고, 세상이 좋아하는 것은 거부합니다. 이 시대가 환락을 즐기므로 저는 비애를 좋아하며, 이 세상이 우쭐대고 기분 내기를 좋아하므로 저는 울적하게 지내렵니다. 세상에서 부귀나 영예를 저는 더러운 물건인 양 버립니다. 오직 비천함과 가난, 곤궁함과 궁핍이 존재하는 곳을 찾아가 살고 싶고 하는 일마다 반드시 이 세상과 배치되고자 합니다. 세상에서 제일 미워하는 것은 언제나 곡하는 행위입니다. 이것을 능가하는 일은 없습니다. 그래서 저는 곡이란 이름을 내세워 제 집의 이름을 삼았습니다.”
- 《문장의 품격》 허균, 통곡의 집중에서 -
현실의 지배적인 힘과 흐름을 거역하며 살겠다는 의지를 이렇게 거침없이 표명한 용기가 글쓰기에는 필요하다. 조선의 문장가들은 지금 우리보다 훨씬 치밀하고 섬세하게 일상을 풀어 썼다. 현대를 살고 있는 우리는 바쁘다는 이유가 글속에도 고스란히 묻어난다. 줄여 쓰고, 생략하고, 읽는 사람의 몫으로 돌리기에는 난해한 글마저도 ‘작품’으로 품격화 된다.
글쓰기의 최전선에서 말하는 글재주와 고유성은 결국 삼다(三多)인 것이다. 많이 읽고, 많이 쓰고, 많이 생각하라. 몰랐던 사실이 아님에도 또 한 번 경각심의 끝에 서게 된다. 삶에서는 가능하면 모남을 없애고자 한다. 날선 감정에서 비켜서고자 한다. 물 흐르듯 흘러가는 삶이어야 한다고 위로 한다. 그러나 글을 대하는 자세에서는 달라져야 함을 인정하고 나니 이렇게 후련할 수가 없다.
하늘이 내게 아무 말 걸지 않았고, 봄비가 내리면서 꽃잎에게 동반을 원했을 때 나와는 상관없는 일이었다. 그런데 나는 그 일들에 대해 간섭하고 싶었다. 왜 넌 잿빛이어야 했는지. 왜 넌 파란하늘이었어야 했는지. 왜 넌 굳이 꽃비로 내렸어야 하는지…… 실컷 따져 묻고 나면 느낌이 들어온다. 왜 그랬는지 주변이 보인다. 물음표는 앞만 보고 내달았다면 느낌표는 주변을 보게 한다. 물음은 집요하게 물고 들어가는 사색의 발로가 된다. 느낌은 그에 대한 벗으로 대변자가 되어 준다. 그럴 수밖에 없음에 대한 동의를 구하기도 한다. 때로는 물음에 대한 또 다른 잣대를 드리우며 다시 물음에 대한 꼬리표를 이어가는 역할도 한다. ‘왜’라고 묻고 ‘느낌’이 쓰게 하라! 책을 덮고 난 후 나는 그 느낌과 마주한다.
타인 지향적 헌신의 정체는 알고 보면 자기로부터의 도피가 아니냐고 니체가 묻는다. 그렇다고 니체가 이웃을 사랑하지 말라고 한 게 아니다. 보다 먼 이웃을 사랑하라고 말한다. 자기 생활의 저장권에만 맴돌지 말고 조금씩 시야와 관심을 넓혀가라는 충고다. 장소적으로 먼 곳에 있는 사람들, 시간적으로 앞으로 태어날 사람들에 대한 사랑을 실천하는 일. 끊임없는 물음표와 느낌표가 있어야 가능할 수 있다.
동정은 이 세상의 고통을 증대 시킨다는 니체의 발언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동정에는 무엇인가 고양하고 우월감을 주는 점이 있다. 상대적 박탈감을 느낄 수도 있다는 생각을 했던 적이 있다. 동정. 남의 어려운 처지를 자기 일처럼 딱하고 가엾게 여김. 과연 나는 누군가를 동정할 수 있을 만큼의 자리에 있는 것일까. 타인으로부터 나의 물욕을 스스로 인정하고 싶은 가식적임은 없었을까. 내가 비교 대상을 선정함에서 기준은 무엇이었을까. 욕심이었다. 동정이란 자기애에 충실한 나의 또 다른 모습이었는지 모른다. 니체의 말대로 동정의 수혜자는 불쌍한 사람이 아니라 동정하는 자, 자신이다는 말에 강한 긍정을 나는 느낀다.
저마다 봉사에 임하는 자세는 다르겠지만 동정이 우월감을 준다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다. “봉사를 하고 오면 그래도 나는 행복하다는 생각이 든다.” 때로는 타인의 시간이나 공간에 비추어 우리는 행복한 위로가 될 때가 있다. 아흔아홉 칸을 지닌 자가 한 칸을 채우기 위한 욕심을 볼 때 차라리 한 칸 밖에 없음이 위로가 된다. 무념무상이 누릴 수 있는 행복감이다. 바쁜 아이돌의 삶을 보면서 끼니 거르지 않고 평범한 학생 신분을 유지하고 있는 두 딸의 지평선다운 시간이 감사하게 여겨진다. 누군가의 불행을 원하지는 않지만 그럼에도 그 아픈 시간들을 두고 나는 감히 행복카드를 꺼낼 수 있기 때문이다.
니체는 추락할 것이 두려워 경직된 듯 서 있을 게 아니라 도덕을 넘어 떠다니며 유희할 수 있어야 한다고 했다. ‘기본’이라는 잣대를 무의식 속에 넣고 있는 듯하다. 글쓰기도 마찬가지였던 것은 아닐까. 시는 이런 형식이어야 하고 수필은, 소설은…… 묻기(?) 보다 느끼기(!) 보다 정의(.)를 내리고자 했던 것 같다.
최전선에 나가고자 하는 자의 자세는 철모도 없이 군화·군복도 없이 나의 시간과 공간이 날 것 그대로이면 되고 상대적 눈치가 없어도 될 듯하다. 다만 내 안에 익숙한 모양의 틀을 자연스럽게 수용해서는 안 될 것이다. 끊임없는 질문과 느낌으로 나를, 너를, 우리를 사유하는 시간이 되어야 한다. 부끄럼 없이 나는 글쓰기 최전선에 나가고 싶다. 물음표와 느낌표의 총탄만으로.
글쓰기의 최전선을 읽고.hw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