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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신론 대 기독교 맞짱 뜨기
서울 현장 중계
등장인물
김씨
이씨
박씨
최씨
고도
소년
배달원
서울의 오솔길. 가로등 하나. 저녁 무렵.
바위에 걸터앉아 있는 김씨, 우두커니 시가지를 바라보고 있다. 그 옆에 쇼핑백이 놓여 있다. 이씨가 등장한다.
이 : (멈추어 서서) 오늘도 고도가 올 기미는 안 보인다, 와야 하는데. 어이없게도 한편으론 잘됐다는 생각이 든다. 고도가 오지 않는 것에 길들여진 지 이미 오래이고, 기다리며 시간 때우기가 습관이 돼버렸기 때문인 거 같다. (김씨에게 다가가서) 고도 안 왔지?
김 : 응.
이 : (김씨 옆에 앉는다.)
김 : 심심풀이가 될 만한 얘깃거리가 하나 생겨서 기억해 뒀는데, 잊어버리기 전에 얘기해줄게.
이 : 시간 때우기가 너도 습관이 돼버렸구나. 얘기해봐라.
김 : 내가 엊저녁에 (의기양양하게) 한 방 얻어맞았거든.
이 : 신나게 얻어맞았니? 얻어맞고 얼빠져서 헛소리하는 사람처럼 말한다.
김 : 신나는 게 없으니까 얻어맞은 거라도 신나게 말하고 싶었나 보다, 나도 모르게.
이 : 왜 누구한테 얻어맞았는데?
김 : 어제 늦은 저녁 무렵 길가 벤치에 누워 있었는데......
이 : 노숙했단 말이냐?
김 : 피로가 몰려와서 한숨 자고 가려고...... 그런데 웬 덩치 큰 놈이 술 냄새를 풍기며 다가오더니 다짜고짜 내 멱살을 잡아 일으키고는 아구통을 후려치는 거야. 난 정신을 잃고 길바닥에 쓰러졌고, 바로 의식이 회복돼서, ‘아하, 권투 선수가 이래서 다운 당하는구나.’ 하는 생각이 드는데, 그놈이 이러잖아. ‘여긴 내 자리야, 이놈아!’
이 : 그래서......?
김 : 뭐가 그래서야. ‘앉으세요.’하고 얼른 자리를 피했지. 그런데 길바닥에 쓰러졌을 때, 상대 선수의 한 방에 다운 당하는 권투 선수가 퍼뜩 떠오르면서 그의 몸에 어떤 이상 현상이 나타나서 다운되는지 손바닥 들여다보듯 훤히 알 수 있었지 뭐야. 그가 얻어맞는 순간, 깜빡 정신을 잃어버림과 동시에 다리의 힘이 완전히 풀려서 무생물체처럼 매트에 풀썩 쓰러지는...... 맞아서 쓰러져본 생생한 경험을 내가 직접 했거든. 권투 경기를 이제껏 봐왔어도 난 언제나 선수들의 승패에만 관심이 쏠려 있었는데......
이 : 그래, 겪어봐야만 알 수 있지. 진화를 그렇게 했거든.
김 : 하지만 그런 걸 알아봤자 무슨 소용이 있나 싶다, 고도가 안 오니까. 구세주는 벌써 왔는데.
이 : 누가 벌써 왔다고?
김 : 구세주.
이 : 너도 성서 읽어봤니?
김 : 한 번 훑어보긴 했다. 그런데 선입견 때문인지 몰라도 떠도는 소문 그대로 원시적인 전설을 모아놓은 책 같더라. 그래서 건성으로 읽어봤어.
이 : 성서는 원시적인 전설을 모아놓은 책 맞아.
김 : 잠 안 올 때 읽으면 잠은 잘 올 거다. 읽는 동안 내내 졸음이 몰려오던데. 부작용 없는 천연 수면제더라.
이 : 부작용 없는 천연 수면제라. 그거야말로 성서가 만들어낸 기적이다. 현대 의학으로도 부작용 없는 수면제는 아직 못 만들고 있거든. 성서에 나오는 도둑들 이야기 알고 있지?
김 : 도둑들 이야기는 성서가 아니라 천일야화에 나오잖아.
이 : 네가 읽은 게 성서가 아니라 천일야화였나 보다. 디디가 고고한테 얘기해줬잖아, 구세주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던 도둑들.
김 : 아, 그들이 도둑이었나? 내가 그 얘길 듣다가 지적하고 싶은 게 있었는데.
이 : 누구라도 그럴 거다, 맹신자가 아닌 다음에야.
김 : 그 도둑들이 뭐라고 했더라?
이 : 다시 들려줄 테니까 잘 들어봐. 도둑 둘 중 한 명이 구원을 받았다는데, 괜찮은 비율이지?
김 : 괜찮고 말고. 50%의 비율로 구원 받는다면 도둑도 할 만하겠는데.
이 : 구세주가 말 그대로 실제로 세상을 구원하는 이였다면 이 세상도 살아볼 만할 텐데. 아무튼 네 명의 복음서 저자 중 한 명만이 도둑 하나가 구원을 받았다고 기록했단 말야, 네 명 모두 거기 있었거나 그 근처에 있었을 텐데. 나머지 셋 중에서 한 명은 구원이나 욕에 관해서는 숫제 언급도 없었고, 두 명은 도둑 둘이 구세주에게 욕을 했다고 기록했거든.
김 : 왜 욕을 했다지?
이 : 자기들을 구원해주려 하지 않았으니까.
김 : 구세주는 구원해주려 했지만 그들이 구원 받길 거부했을 거다. 내가 그걸 지적하고 싶었어.
이 : 아마 반어적 풍자적 표현이었을 거다. 아무튼 디디가 문제삼은 건 도대체 어떻게 된 게 복음서 저자 넷 중 한 명만이 도둑 하나가 구원 받았다고 기록했느냐는 거야.
김 : 과반수에 미달돼서 동의할 수 없단 말인가?
이 : 오류가 없다고 주장되는 성서의 기록들이 그렇게 모순이 있다는 걸 지적한 거다.
김 : 그 사건은 지금부터 2000년 전에 일어났어. 게다가 구전되다가 수십여 년이 지나고 나서야 비로소 기록됐고 시기와 관점도 각기 다르다던데, 그런 기록들에 모순이 있다는 건 이해해줄 만하지 않아?
이 : 모순이 그뿐만이 아니라 상당히 많아. 성서는 그렇게 모순투성이 허구적 이야기책이라는 주장도 이해해줄 만하지?
김 : 한데 그 도둑은 어떻게 해서 구원 받았지?
이 : 회개했겠지, 이 세상에 태어난 것을. (냉소를 짓는다.)
김 : 그거 어디서 많이 듣던 소리 아니냐?
이 : 회개하라는 구세주의 말을 통쾌하게 반박한 고고의 촌철살인의 한마디였잖아.
김 : 왜 나를 이 세상에 태어나게 했냐고, 철없는 자식이 부모에게 내뱉는 원망의 말 같잖아. 철없는 소리 하기엔 우린 나이가 너무 많다.
이 : 그래서 넌 뭘 회개해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김 : 글쎄, 구세주 믿지 않는 걸 회개하라는 거 같은데, 나도 그 말은 납득하기 어렵지만, 구세주의 말을 인간이 어찌 다 헤아릴 수 있겠는가, 부모 마음도 부모가 된 뒤에서야 알 수 있다는데. 그런데 고고는 자세히 알아보기도 전에 일방적으로 구세주의 말을 비아냥거린 거 같아.
이 : (면박하는 투로) 일방적인 건 오히려 ‘회개하라’는 구세주의 밑도 끝도 없는 명령조 말이었어. 사실은 구세주도 아니지만. 고고는 그 말을 풍자했을 뿐야. (누그러진 목소리로) 이러다 말싸움 나겠다. 이놈의 세상은 싸움을 부추긴단 말야.
이씨, 자리에서 일어나 무대 왼쪽 끝으로 간다. 멈춰 서서 먼 곳을 응시한다. 그는 무대 오른쪽 끝으로 가서 먼 곳을 응시한다. 그러고는 돌아온다.
김 : (일어서며) 고도 안 오지?
이 : 응.
김 : 가자.
이 : 고도를 기다려야지.
김 : 고도를 찾아가보자. 이대로 기다리기만 하다가는 우리도 고고와 디디처럼 기다리다가 끝나버릴 거 같다.
이 : 고도가 어디 있는 줄 알고......?
김 : 어디라도 찾아다녀보자.
이 : 그러다 길을 잃은 채 헤매게 될 게 뻔한데......? 우리한텐 고도를 찾아가 만날 수 있는 그 어떤 방법도 능력도 없어. 그래서 우린 고도를 기다려야만 해.
김 : 하긴 찾아가 만날 수 있었다면 그들이 먼저 찾아갔겠지. (이리저리 둘러보며) 디디는 주변 풍경 속에 고도가 오는 날짜가 새겨져 있기라도 한듯 두리번거리던데. 마치 어릿광대의 우스꽝스런 몸짓 같았어.
이 : 고도가 오지 않는 상황이 인간을 그런 어릿광대로 만들고 있다.
김 : 고고로 하여금 낮잠을 자게끔 만들기도 했고. 잠자는 동안만은 현실에서 도피할 수도 있거든. 그는 자리에 앉자마자 그대로 스르르 잠들어버리던데, 그런 낮잠이 방해를 받곤 했지만. (바위에 웅크리고 앉아 새우잠을 청한다.)
이 : 네가 지금 태아처럼 웅크린 자세를 취하고 있다는 걸 알고 있지?
김 : 네 말을 듣고 보니 그렇구나.
이 : 고고는 의도적으로 그런 자세를 취한 거 같았어, 태아 시절에 고도가 왔었다는 듯이.
김씨, 잠이 든다. 이씨, 무대를 이리저리 거닐다가 김씨 옆에서 발을 멈춘다.
이 : 이봐.
김 : (놀라 깨어 엉겁결에 벌떡 일어서서) 난 그놈한테 또 한 방 얻어맞는 줄 알았네. 날 깨운 거냐? 디디가 고고 잠 못 자게 깨운 걸 따라했구나.
이 : 난 네가 아직 잠이 안 든 줄 알고, 언제 깨워주나 물어보려고 했는데......
김 : (볼멘소리로) 안 물어봐도 되겠다, 잠이 깼으니까.
이 : 잘된 건가? 네가 금세 잠든다는 걸 깜박했다. 더 자라.
김 : 잠이 확 달아나버려서 자장가를 불러줘도 못 자겠다. (사이) 내가 꿈을 꿨는데......
이 : 고고를 따라 낮잠 자더니 악몽까지 따라 꾸었구나.
김 : 악몽이 아니라 고도 꿈을 꿨어. (침묵)
이 : 허구한 날 고도를 기다리며 고도 얘기나 하니까 꿈에 나타났구나. 무의식적 소망 충족이라고 하나?
김 : 단지 그 때문만은 아닌 거 같은데. 어쩌면 고도가 실제로 꿈에 나타난 것인지도......
이 : (어이없는 웃음을 지으며) 원시 부족들이 그렇게 받아들였지. 그래, 고도가 어떤 모습이더냐?
김 : 멀리 떨어져 있어서 자세히 볼 수는 없었어.
이 : 한데 그가 고도란 걸 어떻게 알았어?
김 : 어떻게 알았는지는 모르겠는데, 내가 외쳤어. ‘고도다!’
이 : 난 못 들었는데.
김 : 어떻게 된 게 큰소리로 외쳤는데도 못 듣냐?
이 : 아마 네가 고도로 착각했을 거다, 꿈에서까지.
김 : 하긴 현실적으로 고도가 와도 걱정이다, 우리가 그를 못 알아볼까봐. 유대인들이 그랬거든. 그들은 구세주를 못 알아봤잖아.
이 : 못 알아본 게 아니라 알아본 거다, 구세주가 아니란 걸. 네가 외치니까 고도가 대답하더냐?
김 : 네가 깨우지만 않았어도 고도가 대답하거나 가까이 다가왔을지도 모를 텐데. 그럼 고도 여부를 확실히 알 수 있었을 텐데. 내가 외친 순간 네가 날 깨웠어.
이 : 고도 여부를 알았어도 달라지는 건 없을 테니까 서운해할 거까진 없어.
김 : 고도가 와봤자 아무 소용없단 말 같다.
이 : 그렇다기보다 꿈은 꿈일 뿐이란 말이다. (긴 침묵)
김 : 디디가 불렀던 노래 가사를 좀 비틀어봤는데, 한번 들어봐라. (노래한다.)
원숭이 한 마리가 살금살금 주방으로 들어와서
도마 위에 남아 있는 빵 한 조각을 슬쩍했다네
국자 들고 쫓아온 주방장의 일격에 나동그라진
그 원숭이 빵을 떨어트린 채 겨우 달아났다네
인간이 되기를 꿈꾼 것은 바로 그때부터였다네
인간 흉내를 내며 인간 생활을 배운 그 원숭이
마침내 인간으로 진화했고 주방장이 되었다네
셰프복을 차려입고 당당히 주방에 들어온 그는
다음과 같은 글귀를 주방 벽에다 써 붙였다네
(노래를 멈추고,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노래를 잇는다.)
신이시여 우리를 긍휼히 여기시옵소서
이 : 진화론으로 잘 나가다가 마지막에 창조론으로 급반전하는구나, 삼천포로 빠지듯이.
김 : 진화론이 진화하면 창조론이 되는가 보다. 진화론자도 급하면 신을 찾더라. 고고와 디디도 그랬잖아. 그들은 고도를 기다리면서도 신을 찾았어. 신과 고도를 혼동하는 거 같았어.
이 : 신과 고도의 존재에 대해 회의하는 거 같았다.
김 : 그들은 고도한테 기도했지?
이 : 기도 같은 탄원을 했지. 그런데도 고도는 응답이 없단 말야. 응답하기 전에 상의해야 될 사람들도 많더군. 가족들.
김 : 친구들.
이 : 중개인들.
김 : 거래상들.
이 : 회계 장부도 확인해야 하고.
김 : 은행 계좌도.
이 : 무직자가 은행 대출 받는 거만큼이나 응답 절차도 까다롭다.
김 : 고고와 디디 너와 나 모두가 무직자들이니까 뭔들 안 그렇겠니.
이 : 그 까다로운 절차들이 무응답의 핑곗거리지.
김 : 우리가 한 발짝도 더 나아가지 못한 거 같다.
이 : 뭘 못 나갔다는 거야?
김 : 고고와 디디가 처했던 상황에서......
이 : 그래, 우리가 그들을 따라 고도를 기다리기 시작했을 때만 해도 우린 그들과 달리 퍽 쉽게 고도를 만나는 happy ending을 맞이할 거 같기도 했었는데.
김 : 처음엔 그런 기대에 부풀어 있었는데...... 하지만 그런 happy ending은 맞이하지 못하고 있어도 Happy New Year는 매년 어김없이 맞이하니까. (관객들을 바라보며) Merry Christmas and a Happy New Year!
이 : 뜬금없이 웬 Merry Christmas에 Happy New Year를 찾아대냐?
김 : 할 말 없으니까.
이 : 그럼 나도 할 말 없으니까. (관객들을 향하여) Happy Birthday! (침묵)
김 : 뭐 얘깃거리 없어?
이 : 나도 얘깃거리를 기억해뒀는데...... 생각이 날 듯한데 안 난다. (긴 침묵)
김 : 진짜 할 말 없네. 너나 나나 말밑천이 다 떨어졌나 보다, 더 이상 떠오르지 않는 걸 보니. 어떡하지?
이 : 뭘 어떡해. 꼭 말을 해야만 돼? 할 말 없으면 아무 말도 안 하고 있으면 되지.
김 : 그래도 되나?
이 : 아무 말도 안 하면 안 된다는 법이라도 있니?
김 : 아무 말도 안 해도 되는구나. 난 그런 줄도 모르고, 법이 있는 것보다 더 잘 지켜왔네. 나 같은 사람만 있으면 국회의원들이나 법조인들은 실직자가 돼버리겠는데.
이 : 실직자가 될까봐 걱정되니?
김 : 그럼 걱정되지 안 되냐?
이 : 걱정 안 해도 돼. 국회의원들은 쓸데없는 법들을 잘 만들고 법조인들은 그런 법들을 잘 적용하니까.
김 : 다행이다.
둘이는 한동안 멍하니 시가지를 바라본다.
김 : 아무 말 안 하고 있어도 되지?
이 : 그래. (긴 침묵)
김 : 확실해?
이 : (짜증스러운 목소리로) 그래.
김 : 그런데 왠지 말을 해야만 할 거 같다, 국회의원들이 그런 법을 새로 만들기라도 했다는 듯이. 아무래도 한번 확인해봐야겠는데.
이 : 아무 말도 안 하고 있으니까 세상이 우릴 무시하고 왕따시킨 채 돌아가는 거 같다, 우린 이 세상에 있으나마나한 존재란 듯이.
김 : 그래, 우린 아무것도 아니란 듯이.
이 : 고도도 우리에게 아무 관심도 없는 거 같다.
김 : 관심뿐만 아니라 무관심도 없는 거 같다.
이 : 고도가 온다는 건 단지 우리의 바람일 뿐인 거 같다.
김 : 단지 우리만의 바람일 뿐인 거 같다.
이 : 고도가 올 때까지 기다릴 걸 생각하니 순간 기가 질린다.
김 : 기가 질려 잠시도 기다릴 수 없을 것만 같다.
이 : 안 되겠는데, 아무 말이라도 해봐야지. 그래야만 고도가 우리에게 소년을 보내서 빈말이라도 전해줄 거 같다.
김 : 그래야만 고도가 우리에게 오는 시늉이라도 낼 거 같다. (사이) 그런데 말밑천이 다 떨어져버렸으니...... 그래서인지 시간이 느려진 거 같잖아?
이 : 갓 입대한 신병 시절엔 시간이 지금보다 훨씬 더 느렸지.
김 : 국방부 시계가 멈춰버린 줄 알았다.
이 : 제대 날짜는 만유인력이 작용하지도 못하는 너무 먼 곳에 있어서 절대 돌아오지 못할 거 같아 순간 절망했었는데.
김 : 그랬었는데, 제대한 날이 어느새 옛날 같아 보인다.
이 : 그 때의 절망은 기억조차 흐릿하고.
김 : 상황에 따라 시간은 느렸다가 멈췄다가 빨랐다가 불규칙적으로 간다.
이 : 상대성 이론이 증명됐다.
김 : 상대성 이론이 쉽게 증명된다.
이 : 요새 군대는 편하고 좋아졌으니까 시간이 잘 갈 거다.
김 : 병역 면제 받으려고 하는 사람들이 여전히 많은 걸 보면 국방부 시계는 아직도 잘 안 돌아가는 게 틀림없어. (침묵)
김씨, 무대 왼쪽 끝으로 가서 멈춰 서더니 먼 곳을 바라본다. 무대 오른쪽 끝으로 가서도 먼 곳을 바라본다. 이씨 곁으로 돌아온다.
이 : 고도 안 오지?
김 : 응.
이 : 생각났다, 처녀 시절 내 아내 이야기. 당시 우리는 같은 사무실에서 근무했는데, 사무실 남직원들 모두가 내 아내에게 눈독들이고 있었다. 그럴 만큼 내 아내가 처녀 시절에 예뻤단 말이다, 넌 이런 내 말이 실감나지 않겠지만.
김 : 왜 실감 안 나, 나도 훤히 알고 있는데.
이 : 내 아내를 언제 어디서 어떻게 왜 만났는데?
김 : 육하원칙에 의거하여 진술하란 말이냐? 취재 기자가 폭풍 질문 세례를 퍼붓는 거 같다. 미인 아내를 얻은 자한테서 나타나는 전형적인 의처증이구나.
이 : 의처증이 아니라 습관일 뿐야.
김 : 의처증이 습관성이 되었구나. 만나지 않았어도 다 안단 말이다, 처녀들은 다 예쁘니까. 젊음에 메이크업에 성형 수술까지, 꽃놀이패를 쥐고 있거든.
이 : 이봐, 내 아내를 처음 본 사내놈은 침 흘리는 바보가 돼버릴 정도였어, 한눈에 반하여 너무 설레어 당황해버리는 바람에.
김 : 내가 네 아내를 못 봐서 다행이다. 적어도 난 바보가 되고 싶진 않거든.
이 : 그런데 요즘엔 아내의 치열을 보고서야 처녀 시절의 얼굴을 어렴풋이나마 떠올릴 수 있게 돼버렸다. 가지런한 치열만은 아직까지 처녀 시절 그대로거든.
김 : 요즘 못 본 것도 다행이다. 난 실망하고 싶지도 않으니까. 그런데 주름 잡히며 쭈그러져가는 네 얼굴에서도 젊음은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렸다.
이 : 너 역시 마찬가지야. 하긴 세월을 거스를 수 있는 사람은 이 세상에 아무도 없으니까.
김 : 왜 없어, 보톡스 맞고 성형 수술한 사람들.
이 : 많이 있구나. 세월을 거스를 수 있는 능력이라면 고도가 안 와도 되겠는데. 역시나 과학이다. 과학은 신뿐만 아니라 고도까지 불필요한 것으로 만들고 있으니까. 우리도 그만 고도를 기다리고 보톡스나 맞으러 가자.
김 : 그러자. (사이) 안 가?
이 : 그저 한번 해본 말이야.
김 : 나 역시 그래. 우리한텐 보톡스보다는 고도가 더 가깝다, 시술 비용이 부담돼서 그런지.
부르릉거리며 오토바이를 탄 배달원이 등장한다.
김 : 고도다! 오토바이 소리가 팡파르처럼 울려 퍼지며 고도가 왔다.
이 : 배달원이야.
배달원 : 치킨 시키신 분?
이 : 여기요.
김 : 저, 혹시 고도 아니세요?
배달원 : (치킨 봉투를 이씨에게 건네며) 아닌데요.
김 : 신분을 숨기고 나타난 고도요.
배달원 : 저는 신분을 숨기지 않습니다.
김 : 신분을 숨기지 않는다고 박박 우기는 고도요.
배달원 : (대꾸 없이 오토바이를 타고 퇴장한다.)
이 : (바위에 앉아 봉투를 열고) 네 착각은 아무래도 편집증적인 거 같다.
김 : 고도가 전혀 예상치 못한 모습으로 나타날 가능성이 커서 그래. 구세주가 그랬잖아.
이 : (치킨의 튀김옷을 벗겨내며) 너도 뭐 시켰니?
김 : 난 밥 먹고 왔어.
이 : (치킨 한 조각을 집어주면서) 한 조각 먹어봐라.
김 : (손사래를 치며) 튀김옷은 맨 나중에 먹으려고?
이 : 버리려고.
김 : 가장 맛있는 부위인데.
이 : 기름기가 많고 첨가물도 들어 있어서 건강에 좋지 않으니까.
김 : 그럼 내가 먹어야겠다. (튀김옷을 집어먹는다.) 바삭바삭하고 매콤 달콤한 게 진짜 맛있는데.
이 : 맛있는 게 기름기와 첨가물 때문일 거다.
김 : 그렇겠지.
이 : 천연 첨가물은 비싸니까 화학 첨가물을 넣었을 거야.
김 : 그래, 싸게 맛을 낼 수 있으니까. (사이) 구세주 당시 유대인들은 이스라엘을 로마 제국의 압제로부터 벗어나게 해주고 옛 다윗 왕국의 영광을 재현시켜주는 구세주가 오기를 기대했잖아. 그런데 예수는 그런 유대인들의 기대를 송두리째 무너뜨리고 전혀 예상치 못한 모습으로 나타났단 말야, 아무런 부와 권력도 없는 일반 백성 신분으로. 그러고는 병자들이나 치료해주고 소외 계층과 가까이하며 기득권층의 악을 날카롭게 지적하고 비난했으니, 이 세상 어디나 그렇듯이 사회 경제적 지위나 학벌 위주의 사회에서 구세주로 인정 받지도 못하고 멸시 당하며 배척 당할 수밖에 없었지. 그런데 돌이켜보면 그 로마제국이 예수를 구세주로 공인했잖아. 게다가 현재는 전 세계 인구의 약 1/3인 20여억 명 정도가 예수를 구세주로 인정하고 있고, 기독교를 비롯하여 전 세계 인류 역사와 사상과 문화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인물로 예수가 평가되고 있으니, 이는 당시 유대인들이 원하던 구세주의 조건인 중동 지역의 다윗 왕국의 영광을 재현시키는 것을 훌쩍 뛰어넘어 세계적인 위업까지 이룩한 거잖아. 유대인들이 기다리는 구세주가 예수라는 것이 입증됐잖아? 예수보다 더 큰 영향력을 지닌 구세주가 이스라엘에서 나오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니까 예수가 기독교인들뿐만 아니라 유대인들의 구세주라는 것이 확정된 거잖아.
이 : 전 세계 2/3는 예수가 구세주라는 걸 부정하고 있어. 지식인층에서는 그 비율이 훨씬 더 높아질 거다.
김 : 난 전 세계나 지식인층이나 우리의 구세주가 아니라 기독교인들과 유대인들의 구세주에 대하여 말하는 거다. 이 모든 것은 고도도 우리의 기대와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나타날 가능성이 높다는 걸 의미해.
이 : 그렇다고 치킨 배달원의 모습으로 고도가 나타날 리는 없겠지?
김 : ‘너희 모든 배고픈 자들아, 내게로 나아오라. 내가 너희에게 치킨을 주리라!’ 구세주는 배고픈 사람들에게 물고기와 빵을 나누어주었는데, 오늘날 고도는 우리한테 치킨을 배달해줄 거다.
이 : 이런 데까지 배달해주는 치킨집은 아마 세계에서 우리나라밖에 없을 거다.
김 : 모르긴 해도 달리는 차 안에서 주문해도 배달될 거다. Kpop, K드라마, K뷰티, 뭐든지 한국인들이 앞에다 K만 덧붙이면 유니크해지거든. 고도도 앞에 K를 붙여 K고도라고 했더라면 벌써 옛날에 왔을 거다. 그렇다면 우리나라에는 고도가 왔겠는데. 혹시 그런 소문 못 들었어?
이 : K고도는 고도가 아냐. 나한테 당근하고 무가 있는데, 먹을래?
김 : 당근 하나 줘봐라.
이 : (윗도리 주머니를 뒤적거리며) 디디가 당근과 무를 주머니에 넣어가지고 다니는 걸 보는 순간, 착상이 번뜩 떠오르더라. 그래, 나도 저렇게 해야겠다.
김 : 참 독창적이고 참신한 착상이 번뜩 떠올랐군. 디디 말이다. 그러니 우린 그들을 따라 할 수밖에 없지. 나도 고고가 당근 달라고 한 걸 무심코 따라한 거니까.
이 : 채소엔 항암 성분이 들어 있거든.
김 : 면역력도 높여주지.
이 : 시력도 좋아지게 하고.
김 : 소화도 잘되게 해주고.
이 : 난 식후에 특히 육류나 인스탄트 음식을 먹은 후엔 반드시 먹는다. 아주 인이 박혔어.
김 : 우리가 건강 상식을 너무 잘 알아서 병원들 문 닫고 의사들 일자리 없어지는 거 아닌지 모르겠다.
이 : 의사들 일자리 없어질까봐 걱정되니?
김 : 그럼 걱정되지 안 되냐?
이 : 넌 세상에서 가장 쓸데없는 걱정을 한다. 국회의원들 법조인들 걱정에다 의사들 걱정까지. (비닐 봉지 속의 당근 한 조각을 꺼내어 김씨에게 건네며) 옜다, 쓸데없는 걱정을 하더라도 당근이나 먹고 해라.
김 : 그러자, 당근이나 먹고 쓸데없는 걱정하자. (당근 조각을 받아 입에 넣고 우물거리며) 난 나 자신의 실업 빈곤 상황에 대해선 면역이 돼서 걱정이 별로 안 되는데, TV에 나오는 상류층 걱정이 된다. 아마 내가 백신을 맞았기 때문인 거 같아.
이 : 어떤 백신을 맞았는데?
김 : 코로나 19.
이 : 지금 코로나 19로 농담할 때가 아냐.
김 : 농담 아냐. 나 진짜로 코로나 19 백신 맞았어.
이 : 그 백신의 새로운 부작용 사례구나.
김 : 부작용도 아냐. 백신 부작용은 정부에서 인정하지 않거든.
이 : 그렇다면 코로나 19 백신의 쓸데없는 효과라고 해야겠구나. (침묵)
김 : 당근은 말이 좋아하더라. 식성이 사람이랑 닮았어.
이 : 원숭이는 바나나를 좋아하지.
김 : 원숭이 식성도 사람이랑 닮았고.
이 : 개는 돼지고기 보다 소고기를 더 좋아한다더라.
김 : 거참, 개 식성은 사람이랑 똑 닮았네. 인간은 대단한 존재가 아니라 유인원에서 조금 더 진화한 동물일 뿐이라는 것이 실감난다.
이 : 상대성 이론에 진화론까지 증명됐다.
김 : 우리도 과학 법칙 하나 만들어야겠다. 김&이의 법칙: 상대성 이론과 진화론의 이론은 어렵지만 증명은 쉽다.
이 : 먹고 자고 배설하는 동물. 그렇게 살다가 늙고 병들어 죽는 동물. 그런 수많은 동물들 가운데 인간한테만 고도가 올 거라는 기대는 인간의 자만인 거 같다. 그래도 고도가 와야 하는데......
김 : 빨리 와야 하는데......
외마디 고함 소리가 가까이서 들려온다.
김 : (놀라서) 이번엔 진짜 고도인 거 같다!
이 : 고도 아냐. 포조와 럭키가 나타났을 때 났던 소리와 같잖아.
이씨, 음료수를 단숨에 들이켜고, 당근 조각을 입에 넣고는, 남은 치킨을 봉투에 싸서 윗도리 주머니에 쑤셔 넣는다. 김씨는 쇼핑백을 집어 든다. 둘이는 가로등 뒤로 피한다. 그러고는 소리 난 쪽을 지켜본다. 박씨가 들어온다. 허리가 줄로 묶인 그는 트렁크를 들고 있다. 그가 무대를 가로질러 가고, 최씨가 들어온다. 한 손으로 줄을 잡고 있는 그의 허리도 묶여 있다. 최씨가 두 사람을 보더니 걸음을 멈추고 바위에 앉는다. 줄이 팽팽해진다. 박씨가 몇 걸음 뒤로 물러나 트렁크를 내려놓고 그 위에 걸터앉는다. 두 사람, 최씨에게 다가간다.
이 : 말 좀 묻겠는데요. 포조를 따라 이곳까지 온 거죠? (침묵)
김 : 그럴 텐데요, 개를 데리고 다니듯이 줄로 묶어서 사람을 데리고 다니는 사람은 포조와 형씨밖에 없으니까. (침묵)
이 : 거들먹거리며 지껄여댔던 포조와 차별화하겠다는 겁니까? (침묵)
김 : 포조를 차별하는 겁니까? (사이) 우리도 차별하는 건가요? (사이. 이씨에게) 왜 반응이 없지?
이 : 반응이 없을 땐 한 대 쥐어박으면 반응을 하는데, 문제는 상대가 맞받아치는 반응을 할 지도 모른다는 거다.
김 : 그럼 한 대 얻어맞겠구나. 그러니 네가 쥐어박아야겠다.
이 : 나보고 얻어맞으라고?
김 : 내가 얻어맞는 것보다는 나으니까.
이 : 나한텐 네가 얻어맞는 게 나은데.
김 : 네가 무거우니까 얻어맞아도 뼈는 덜 아플 거다. 난 말라서 뼈까지 아프거든.
이 : 우린 체중을 안 재어봤잖아.
김 : 겉보기에 그렇단 말이다. 이 세상은 외모로 판단하는 세상이니까 맞다고 봐야 되잖아?
이 : 그런 세상이니까 맞다고 봐야겠다. 그렇다면 얻어맞지 않고 쥐어박을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겠는데.
김 : 한 대 쥐어박고 재빨리 피하면 되는데.
이 : 그건 이론은 쉽지만 증명이 어려워서, 나이 탓에.
김 : 어쩐지 너무 말이 없더라 했지. 침을 흘린다. 젊은 시절 네 아내를 보고 바보가 돼버렸나 보다.
이 : 난 과장법을 사용한 거야.
김 : 미투라고 속으로 말하는 거 같다. (최씨에게) 이봐요, 이 친구 아내와 만난 적 있죠? (사이) 침 흘리고 있는 증거도 이미 확보했어요. 언제 어디서 어떻게 왜 만났습니까? (침묵)
이 : 한 가지 빠진 게 있다. (최씨에게) 내 아내와 만나서 무슨 짓을 한 겁니까? (사이) 침묵이 진짜 금이라도 되는 줄 알고 있는 거 같다, 침묵은 금이라는 속담이 있다고.
김 : 그게 어느 나라 속담이지? 당장 그 나라로 전화해서 속담 고치라고 해야겠다, 침묵은 금이 아니라 돌덩이라고. (최씨에게) 이봐요, 금을 너무 좋아하는 거 같은데, 침묵은 금이 아니라 돌덩이예요. 우리가 증인입니다. 침묵을 하면 할수록 점점 무거워지는 돌덩이 같아 혼쭐났단 말예요.
박 : (세 사람에게 다가가며, 역정스레) 사람을 함부로 놀리지 말아요. 이 친구가 말이 없고 바보 같아 보여도 속이 깊어요, 사람들은 속은 못 보고 겉만 볼 수 있기 때문에 그걸 모르지만. (트렁크를 내려놓고 최씨 옆에 앉아서, 혼잣말로) ‘외모는 속임수다.’ 누가 그런 말을 했더라?
김 : 성형외과 의사가 그런 말을 했을 거 같은데요. 전문가이니까요.
박 : 속임수 전문가라고요?
김 : 아뇨, 외모 전문가요.
박 : 아, 예.
이 : 포조라고 아시죠?
박 : 성형외과 의사 포조가 그런 말을 했다고요?
이 : 줄에 묶어서 럭키를 데리고 가던 사람 포조를 아느냐고요.
박 : 아, 그 포조는 잘 알죠. 내가 그들에게 관심이 많거든요.
이 : 그럴 줄 알았습니다.
김 : 혹시 고도 아니신가요?
박 : 난 박씨입니다.
김 : 박씨라고 하는 고도요.
박 : 알아듣기 쉽도록 가장 간단하게 성만 알려줬는데도 왜 그렇게 못 알아듣죠?
김 : 알아들어요. 박씨라고 했잖아요.
박 : 그렇게 잘 알아들으면서......
김 : 방금 두 분의 관계가 우리의 예상과는 전혀 다르게 뒤바뀐 거 같았을 때, 혹시 형씨가 박씨 성을 가진 고도로 나타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서......
이 : 이 친구에게 편집증이 있다고 편하게 생각하세요, 이 친구가 착각하는 거 자초지종을 설명한다면 듣는 사람도 짜증날 테니까요.
박 : 그럽시다, 나도 고도 문제로 짜증내고 싶진 않으니까.
최씨, 트렁크를 들고 일어나 박씨가 있던 곳으로 가서 트렁크를 내려놓고 그 위에 앉는다.
김 : (쇼핑백을 바위 옆에 놓아두고) 짜증은 저 사람이 내는 거 같은데요.
이 : 우리의 농담을 서운하게 여기는 거 같은데요.
박 : (일어서며) 저 친구가 나를 피하는 겁니다. 아직도 나에 대한 선입견이 남아 있어서 나를 부담스러워하거든요.
김 : 누가 묶고, 누가 묶인 겁니까?
박 : 내가 저 친구를 묶고 나 자신도 묶었죠, 저 친구만 묶을 수는 없어서. 그런데 고도가 미남인가 본데요.
김 : 뜬금없이 고도가 미남이라뇨? 벌써 할 말이 없어졌나요?
박 : 형씨가 나를 고도로 착각하는 걸 보니 고도가 미남이겠죠, 내가 미남이니까. 안 그렇습니까?
김 : 그렇습니다, 착각은 자유니까.
박 : 난 외모가 아니라 마음을 말한 겁니다, 고도는 사람의 외모는 안 보고 마음을 본다고 하기에.
김 : 난 외모도 마음도 안 보고 돈을 보는데요. 동전보다는 지폐를 그것도 고액권 지폐를. 그런데 볼 수가 없어요.
박 : 은행에 가서 앉아 있다 보면 실컷 볼 수 있잖아요.
김 : 그게 옛날 호랑이 담배 피우던 시절에 유행했던 농담이었죠?
박 : 옛날엔 호랑이도 담배 피웠나요? (사이) 이것도 웃기지 않는가 본데......
김 : 그래도 웃기는 농담으로 칩시다, 나도 돈 문제로 짜증내고 싶진 않으니까.
박 : 형씨 덕분에 처음으로 웃기는 농담을 해봤네요. 이번엔 진담으로...... 쓸데없이 고액권 지폐를 뭐하러 보려고 합니까?
김 : 내 돈 좀 많았으면 좋겠다는 말입니다.
박 : 돈으로는 정작 진리 같이 소중한 것은 살 수 없으니까 돈에 연연하지 마세요.
김 : 나한테 소중한 건 진리가 아니라 돈으로 살 수 있는 것들입니다. 그래서 궁금한데, 고도의 총 재산이 얼마나 될까요? 그중에 현금 및 현금성 자산은요? 부채는 어느 정도 되나요? 혹시라도 부채가 자산을 초과해서 부도가 나지 않을까봐 걱정되는데요.
이 : 하다 하다 못해 고도 걱정까지 하네.
박 : 고도는 부자보다는 가난한 사람을 더 소중히 여긴답니다.
이 : 그 무슨 옛날얘길 하는 겁니까? 고도가 얼마나 경제 관념이 확실한데요. 무슨 일을 하든 우선 자신의 회계 장부와 은행 계좌부터 꼼꼼히 챙겨요. 그것만 봐도 고도가 돈을 소중히 여긴다는 걸 알 수 있잖아요.
박 : 고도에 대한 억측으로 그런 낭설이 퍼진 겁니다.
이 : 증인들도 있어요. 고고와 디디요.
박 : 회계 장부나 은행 계좌라는 말은 말잇기 놀이를 하듯이 나왔잖아요.
이 : 그게 그들의 일상적 말투입니다.
김 : (최씨를 가리키며) 저 사람 우는 거 같은데요.
박 : 내가 저 친구를 처음 만났을 때도 저렇게 혼자 울고 있었답니다, 주위 사람들로부터 왕따 당하고서. 그 때문에 나와 함께 있게 되긴 했지만. 내가 함께 있어줘도 눈물을 그치게 할 수는 없군요. 저 친구는 그들로부터 위로를 받고 싶어하거든요.
김 : (이씨에게) 우리가 눈물을 닦아주고 위로해주자. 그럼 왕따 당한다는 생각이 덜 들겠지.
이 : 그러다가 한 대 얻어맞는 수가 있어. 고고가 럭키의 눈물을 닦아주려다가 걷어차이고는 울고불고 소란 피우던 거 못 봤어?
김 : 걷어차였던 거로구나, 다리를 절룩거리며 소란 피웠던 것이. 그럼 너 혼자 가서 눈물을 닦아주면 되겠다, 아니면 몇 발짝 뒤에서 우리 둘이 위로의 말이나 해주던가.
박 : 저 친구는 걷어차지 않을 겁니다. 오히려 형씨들이 위로해주기를 바라고 있어요. 그래서 여기에 앉았던 겁니다. 하지만 눈물을 닦아주지도 위로의 말을 해주지도 마세요.
이 : 난폭했던 포조도 럭키의 눈물은 닦아주게 했습니다.
박 : 형식적 위로는 결국은 참고 견뎌내는 데에 방해가 됩니다.
이 : 춤이나 춰보라고 하시죠. 포조도 럭키한테 춤추게 했잖아요. 느린 손동작이 쿵푸 춤과 비슷한 면이 있더라고요.
김 : 취권 춤의 한 장면 같기도 했어요.
박 : 재미있었나 보군요.
이 : 재미는 없었지만 기분 전환은 됐어요.
김 : 심심풀이가 됐죠.
박 : 저 친구는 재미있는 걸 보여줄 겁니다.
김 : 뭔데요?
박 : 미리 말하면 재미없으니까......
이 : 독백을 하게 할 건가요? 럭키의 독백은 재미있었거든요.
박 : 뭐가 그리 재미있던가요?
이 : 인격신을 비롯한 이 세상 모든 것들의 허망함과 무의미함에 대한 은유이자 신랄한 풍자였거든요.
김 : 무슨 말인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더군요. 그야말로 횡설수설이었어요.
이 : 인간의 생각과 지식과 언어가 해체되어버리는 거 같았어요.
김 : 해체되어버리는 것에 대하여 넋두리를 늘어놓는 거 같았어요.
박 : 인격신의 실체부터 밝혀야겠군요.
이 : 그럼 실체는 밝혀지지 않고 독백의 은유와 풍자만 사라져버릴 텐데요.
김 : 증거 없는 주장만이 끝없이 이어질 테니까 지루하고 짜증만 날 겁니다.
박 : 그렇다면 그 문제는 뒤로 미루고......
이 : 재미있는 거나 보여주라고 하시죠.
박 : 이따 가기 전에 보여줄게요.
이 : 맛보기로 조금만 미리 보여주세요.
박 : 맛보기로 보여줄 만큼 길지 않아요.
이 : 뭐 다른 거 없나요, 잠시나마 기분 전환이 될 만한?
박 : 글쎄요, 내 농담은 웃기지 않으니까, 웃기는 농담으로 쳐준다면야 또 웃길 수는 있지만. 억지로라도 형씨 스스로 웃어보세요.
이 : 그럼 오히려 더 지루하잖아요.
박 : 억지로 웃다 보면 진짜 웃음도 나올 거 같은데요.
이 : 그럼 혹시나 하고 웃어보겠습니다. (과장된 웃음을 웃는다. 정색하며) 역시나 진짜 웃음은 안 나오는데요. 여보세요, 이럴 땐 따라 웃어주는 게 매너입니다.
박 : 그런 매너도 있나요?
김 : 없는 매너도 지키죠, 나는 없는 법도 지켰는데.
박 : 그럽시다, 있든 없든 매너를 지킵시다, 이미 버스는 떠났지만.
김 : 다음 버스가 또 오니까요.
박 : 서울이니까 금방 오겠군요. 빨리 웃읍시다.
세 사람, 과장된 웃음을 웃는다.
이 : (시가지를 바라보며) 어느새 서울의 빌딩들에도 저녁 어스름이 내리고 있는데요. 보세요, 빌딩 창문에서 희미한 불빛이 하나둘씩 내비치고 있잖아요. 이제 곧 남산 타워를 비롯한 고층 빌딩들에서 발산하는 불빛들이 서울의 밤 거리거리에서 현란한 향연을 펼칠 겁니다, 고도가 그 불빛들의 각광을 받으며 짠! 하고 등장이라도 할 것처럼. 하지만 늘 그렇듯이 고도는 등장하지 않고 불빛들은 자취도 없이 꺼져버리고 말죠. 그 화려한 불빛들은 단지 잠시의 즐거움과 희망과 환상에 들뜨게 해주는 것밖에 할 수 없거든요. (볼멘소리로) 이놈의 세상에선 모든 게 결국 그런 모양으로 끝나버리고 만다니까요.
박 : 그런데 사람들은 그런 이 세상에서의 성공을 부러워하고 바라며 추구합니다, 성공이 고도라는 듯이.
김 : 고도가 오면 사실이 밝혀지겠죠.
박 : 고도는 이미 왔습니다, 사람들이 몰라봐서 그렇지.
김 : 고도가 왔다뇨?
이 : 그걸 웃기지 않는 농담이라고 하는 겁니까?
박 : 농담이라뇨?
김 : 왔다면...... 서울 사람들 하면, 일 많이 하고, 술 많이 마시며, 성격 급해서 빨리빨리 문화가 있다 보니......
이 : 그거 한국 사람들 특징이잖아.
김 : 서울 사람들이 한국 사람들이지 외국 사람들이니? (박씨에게) 고도도 서울에 와보니 덩달아 성격이 급해져서 서울 사람들만 빨리빨리 만나고 갔나 보죠?
박 : 농담은 형씨가 하는군요.
이 : 이 친구는 진담으로 하는 겁니다.
김 : 그게 아니라면 고도가 우릴 만나러 왔다가 서울 관광만 하고 갔나요?
박 : 토끼가 세수하러 왔다가 물만 먹고 가듯이요?
김 : 그것도 아니라면 고도가 부와 권세를 누리는 상류층만을 만나고 갔나 보죠? 이따금 밀려드는 그런 의혹을 떨쳐버리지 못하고 있는데요.
박 : 2000년 전 신이 이 세상에 보낸 구세주가 고도라는 말입니다.
이 : 구세주는 고도가 아닙니다. 이 세상 돌아가는 꼴이 구세주는 고도가 아니란 걸 단적으로 증명하고 있잖습니까.
박 : 그렇게 몰라본다니까요. 구세주가 말했습니다......
이 : 회개하고 구원 받으라고요? 그런 얘긴 하지 맙시다. 그러잖아도 지루한 데다가 우리한테 그런 얘긴 진부하고 뻔한 옛날얘기가 돼버린 지 이미 오래이거든요. 이 친구는 성서를 부작용 없는 천연 수면제로 여기고 있을 정도입니다.
박 : 재미있는 것을 앞당겨서 보여줘야겠군요. (최씨를 바라보며) 저 친구가 노래하며 춤추는 것이 재미있습니다. 보여줄 사람을 오랫동안 찾았는데, 잘됐네요, 형씨들한테 보여줄게요.
이 : 보여줄 사람을 오랫동안 못 찾은 걸 보니 재미없나 본데요.
박 : 신나는 댄스곡입니다. 반주에 맞춰 노래하고 춤추면 얼마나 재미있는데요, 사람들이 몰라줘서 그렇지.
이 : 춤까지 춘다면 빠른 리듬이라서 금방 헉헉거릴 텐데요.
김 : 립싱크로 하면 되니까.
박 : 우린 라이브만 해요.
이 : 무슨 노래인데요?
박 : 강남스타일.
이 : 그건 젊은이들한테나 어울리는 노랜데......
김 : 기왕이면 최근에 유행하는 트로트라든가......
박 : 저 친구가 할 수 있는 노래가 그거밖에 없어서...... 나이가 들어서 엄청나게 유행하지 않으면 잘 모르거든요.
김 : 그러니까 보여줄 사람을 못 찾았죠. 사람들이 몰라준 게 아니라 알아본 거예요, 재미없다는 걸.
이 : 그러니 그 노래와 춤은 김 빠진 맥주 같겠는데요.
김 : 구경하는 건 김 빠진 맥주를 마시는 기분이겠는데요.
박 : 우선 구경부터 해보세요. (최씨에게) 여보게, 노래하며 춤 좀 춰봐.
김 : 김 빠진 맥주 주문하는 거 같은데요.
강남스타일 반주가 흘러나온다. 최씨가 트렁크에서 일어나 무대 중앙 전면으로 걸어 나와 리듬에 맞춰 춤춘다. 춤 동작이 어설프다. 그가 박자를 놓치는 바람에 음악과 춤이 엇박자로 간다.
김 : 내가 저럴 줄 알았다니까. 보여줄 사람을 못 찾은 이유를 즉시로 알려주는 거 하나는 잘하네요.
박 : (반색하며) 아무튼 잘하죠?
이 : 잠깐만 중단하세요.
반주가 멈추자 최씨도 동작을 멈춘다.
박 : 우여곡절 끝에 보여주는데, 왜 중단시키죠?
이 : 저건 춤이 아니라 제자리걸음이에요.
박 : 저 친구의 성의를 봐서라도 춤이라고 쳐줍시다.
이 : 성의가 아니라 무성의 아닌가요?
박 : 그래요, 저 친구의 무성의를 봐서라도 춤이라고 쳐줍시다.
김 : 그럽시다, 춤이라고 칩시다, 말밑천도 떨어졌는데. 그런다면 무슨 춤이라고 하죠, 엉거주춤한 자세로 제자리걸음만 하는데? 제자리걸음춤이라고 할까요?
박 : 말이 나온 김에 엉거주춤이라고 합시다.
김 : 엉거주춤. 분명히 춤이죠.
이 : 재미있다더니 어떻게 된 게 럭키보다도 춤을 못 춥니까.
김 : 차라리 럭키의 춤 동작을 따라 했더라면 중간은 갔을 텐데요.
박 : 내가 보기엔 럭키의 춤보다는 재미있는데요. 꼭 잘해야만 재미있는 건 아니니까요.
이 : 그러니 형씨한텐 세상에 재미없는 게 없겠는데요.
김 : 김 빠진 맥주도 맛있다고 마시겠는데요.
박 : 무료잖습니까.
이 : 마치 엉거주춤거리는 제자리걸음을 보여주고 관람료라도 받으려고 했다는 듯이 말하는군요.
박 : 관람료는 전혀 생각지도 않았는데, 얘기가 나와서 말인데, 관람료를 받아도 됩니까?
이 : 되죠, 우리가 관람료를 받고 보는 제자리걸음이라면.
김 : 그렇게만 된다면 난 김 빠진 맥주도 맛있게 마십니다, 돈맛 때문에.
박 : 조금만 더 참고 견디세요, 바로 끝나니까.
이 : 극기 훈련을 시키는 훈련소 조교가 그런 말을 잘하죠.
김 : 극기 훈련은 군대에서도 잘 안 시켜요.
박 : 군대에서도 잘 안 시키니까 이 기회에 민간 극기 훈련이라도 한번 받는 셈 치고 구경하시죠.
이 : 살다 살다 극기 훈련 받듯이 구경하기는 처음이군요.
김 : 랩도 해요?
박 : 랩은 냅둡시다. 랩이란 것이 혼자 중얼거리는 거 같아서, 저 친구도 랩 가사는 외우기는커녕 무슨 말인지 여태 알아듣지도 못하고 있답니다.
이 : 그러니 랩까지 구경한다면 특전사 극기 훈련을 받는 기분이겠는데요.
김 : 김 빠진 맥주 병나발을 불고 원샷하는 기분이겠는데요.
박 : 자, 김 빠진 맥주, 아니지, 춤과 노래 이어집니다.
반주가 이어지고, 최씨는 똑같은 동작을 반복한다. 보컬 파트가 시작되자 최씨가 노래를 부른다. 목소리는 갈라지고 음정 박자를 무시하며 마구잡이로 소리를 질러댄다, 목소리 크기 시합이라도 하듯이.
최 : (노래한다.)
아름다워 사랑스러워 그래 너 hey 그래 바로 너 hey
아름다워 사랑스러워 그래 너 hey 그래 바로 너 hey
지금부터 갈 데까지 가볼까~~~~~ 오빤 강남스타일
반주와 춤과 노래가 중단된다. 최씨는 가쁜 숨을 몰아쉬고, 김씨와 이씨는 웃음을 터뜨린다. 최씨는 트렁크에 걸터앉는다.
박 : (득의만만하여) 재미있죠?
이 : 재미있어서 웃은 게 아니라 어이없어서......
김 : 완전 어이 상실이라서......
이 : 이놈의 세상이 노래마저 이 꼬락서니네 해서......
김 : 저렇게 노래를 불러도 됩니까?
박 : 되죠, 노래 부르기는 자유니까요.
김 : 아, 그렇죠. 내가 그걸 잊고 있었네요.
이 : 여보세요, 이럴 땐 립싱크가 매너입니다.
김 : 라이브는 민폐이고요.
이 : 소리를 크게 질러야 노래 잘하는 거라고 알고 있는 거 같은데요.
김 : 도대체 소음인지 노래인지 구분할 수가 없네요.
이 : 목소리 크기로만 따진다면 세계적 수준인 거 같긴 했어요.
김 : 목소리 크기로 갈 데까지 가본 거 같긴 했어요.
박 : (김씨의 말이 끝나자마자) 어쨌든 기분 전환을 시켰으니까 화제를 돌려봅시다. 신과 구세주와 성경을 풍자했던 고고와 디디, 포조와 럭키뿐만 아니라 형씨들까지 신에 대한 견해가 일치하는 거 같은데요. 어떻게 해서 그렇게 무신론적 입장을 취하게 됐는지 궁금한데요.
김 : 김 빠진 맥주에 취했기 때문이죠, 뭐.
이 : 흔히 그러더라고요, 무신론자는 합리적이고 분별 있다고.
박 : 나도 그런 말 많이 들었어요, 무신론자들로부터.
이 : 춤과 노래가 신과 구세주 이야기를 이어가기 위한 미끼였군요.
박 : 미끼라기보다 곰돌이 인형입니다.
이 : 곰돌이 인형이라뇨?
박 : 병원 가기 싫어하는 아이에게 안겨주는 곰돌이 인형.
이 : 그게 그거잖아요.
박 : 다르죠. 미끼는 나만을 위한 것이지만 곰돌이 인형은 나보다 아이를 위한 것이니까요.
이 : 멀쩡한 사람을 환자 취급 아이 취급하는 걸 보니 돌팔이 의사로군요.
김 : 진료비를 받을 겁니까?
박 : 아니요.
김 : 양심적인 돌팔이 의사로군요.
박 : 형씨들이 나를 의사라고 불렀으니, 잘됐네요, 진료해봅시다.
이 : 돌팔이 의사라고 불렀죠.
김 : 돌팔이 의사도 진료는 할 수 있으니까.
박 : 무신론 지식인들이 통찰한 부조리, 무의미, 단절, 공허, 불안, 고독 등은 신의 존재를 부정하거나 신을 떠난 사람들한테서 나타나는 전형적인 문제들입니다. 그 문제들을 근본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길은 신에게 돌아가는 것 다시 말해 회개하는 것 달리 말해 자신의 실체를 깨닫는 것입니다. 집착에서 벗어나고, 자신의 삶을 살아야 한다는 등의 다른 모든 길들은 대증 요법에 불과하거든요. ‘나’라는 존재는 신의 피조물이기 때문입니다.
이 : 아, 주사 맞고 약 먹어야 된다고요?
박 : 예?
이 : 알겠습니다, 의사 선생님.
박 : (과장된 어투로) 그러세요. 의사로서 나는 어떤 종류의 주사와 약인지는 모르니까 환자님이 알아서 처방하시죠.
이 : 돌팔이 의사 선생님다운 진료와 처방이군요, 신이 존재한다면, 그 문제들의 근본 원인은 신에게 있는데.
김 : (권투 경기 심판의 경기 중단 제스처를 흉내내며) 그만 중지하세요. 신에 대한 설전이 흔히 그러듯이 감정싸움으로 번지겠어요.
박 : 꿀팁 하나만 알려줄게요. 신이 보낸 구세주의 실체를 확인할 수 있는 방법. 구세주의 실체만 확인된다면 서로 긴밀하게 연관되어 있는 신과 고도와 성경의 실체도 자연히 확인되겠죠? 인간에 대한 신의 사랑과 구원을 구세주 예수는 십자가 희생으로 구체적으로 나타냈습니다만 자신의 존재를......
이 : 인간이 들어갈 지옥을 만들어 놓은 신한테 인간에 대한 사랑이라뇨? 원시적인 전설이라면 그만하면 잘 만들어낸 이야기이긴 합니다만.
김 : 그건 나도 묻고 싶었던 건데요.
이 : 인류의 대다수가 영겁의 형벌을 받게 된다는 것을 미리 분명히 알고서도 지옥을 만들어 놓았단 말입니다, 소위 인간을 사랑한다는 신이.
김 : 그러게 중지했어야죠.
박 : 속은 모르고 겉만 알고 있군요.
이 : 인간을 사랑한다는 신이 지옥을 만들어 놓았다는 것은 성경에 씌어 있잖습니까.
박 : (주위를 둘러보며, 혼잣말로) 어, 내가 의자와 채찍을 어쨌더라? (당황하여 둘러보다가) 의자와 채찍을 잃어버렸으니, 이를 어쩌지? (두 사람에게) 혹시 내 의자와 채찍이 어디 있는지 못 봤나요?
김 : 못 봤는데요. 안 갖고 온 거 같은데요.
이 : 반박할 수 없으니까 얼렁뚱땅 넘어가려고 하는군요.
박 : 반박하려고요, 지루하지 않게 극적 흥미를 더하면서. 지옥에 관한 이야기도 지루해할 거 같아서요. 그러자면 의자와 채찍이 있어야 하는데, 함께 찾아봐주겠어요? (생각에 잠긴 듯한 자세로 바위에 걸터앉아서) 어디 있더라?
이 : 어디서 많이 본 자세 같은데, 어디서 봤더라? 아, 로뎅의 ‘생각하는 사람’ 자세를 취하고 있는 거죠?
김 : 취하고 있는 건 우리다, 김 빠진 맥주맛에.
이 : 너 김 빠진 맥주에 중독된 거 같다, 자꾸 찾아대는 걸 보니까.
박 : 김 빠진 맥주는 그만 찾고......
이 : 형씨도 얼떨결에 중독되겠는데요.
박 : 의자와 채찍을 찾아봐달라고요.
이 : (박씨 옆에 앉아서) 의자와 채찍이 어디 있더라?
김 : (이씨를 따라 앉으며) 누가 먼저 찾는지 내기하는 거 같은데.
세 사람, 의자와 채찍의 행방에 주의를 집중시킨다.
김 : (환호하며) 당선!
이 : 선거에 당선되는 꿈꿨어?
박 : 앉자마자 잠자고 꿈까지 꿨어요?
이 : 꿈까지 꾸고 깼잖아요, 이 친구 워낙 잠도 잘 자고 꿈도 잘 꾸거든요.
김 : 당선이 아니라 당첨인가?
이 : 로또 당첨 꿈?
김 : 의자와 채찍을 찾았어요.
박 : (조급하게) 어디 있어요?
김 : 채찍은 포조가, 의자는 럭키가 갖고 있었잖아요.
박 : 아, 그렇지!
이 : 하지만 그걸 어떻게 찾아?
박 : (최씨를 바라보고) 저 트렁크가 럭키가 들고 있던 겁니다. 저 속에 의자와 채찍이 들어 있고요. 그런데도 오래전 일인데다 트렁크를 의자 대용으로만 사용해서 까맣게 잊어버리고 있었네요. 그래서 그런지 공돈이 생긴 거 같은데요.
김 : 형씨도 돈을 좋아하는군요. 은행에 우리 같이 갑시다.
박 : 은행은 나중에...... 내가 포조와 럭키의 발자취를 더듬어보다가 그들이 떨어트린 트렁크와 의자와 채찍을 발견했거든요. 그래서 트렁크 속에 들어 있던 고장난 모래시계를 수리하고, 의자와 채찍도 트렁크 속에 넣어 두었습니다. 좀 갖다주겠습니까?
이 : 직접 가져오면 되잖아요.
박 : 상대가 의자와 채찍을 갖다주는 것이 반박과 매치되기 때문에 그래요.
이 : (최씨를 가리키며) 저 사람에게 심부름을 시키던가요.
박 : 그래도 되겠구나. (최씨를 향하여) 여보게, 트렁크에 있는 의자와 채찍 좀 가져와봐.
최씨, 트렁크에서 의자와 채찍을 꺼내어 박씨에게 갖다주고 자리로 돌아간다. 박씨, 의자를 펴고 앉는다. 이후부터 채찍을 최씨에게 넘겨줄 때까지 박씨의 말투는 명령조로 변한다.
박 : (채찍을 휘두르며) 물러서시오!
그가 채찍으로 바닥을 내리치자 요란한 소리가 무대에 울려 퍼진다. 놀라 가로등 뒤로 달아나는 두 사람, 박씨를 주시한다.
박 : (일어서서 두 사람을 향해) 내가 의자에 앉으려고 하는데 당신들이 시중들어야 하오.
이 : 그냥 앉으세요, 방금 시중 받지 않고 앉았던 것처럼.
김 : 혼자서도 잘 앉던데요. 하긴 엉금엉금 기어다니는 아기도 혼자서 앉을 수 있지만요.
박 : 그렇소, 나는 엉금엉금 기어다니는 아기보다 더 잘 혼자서 앉을 수 있소. 그래도 당신들이 시중들어야 하오.
김 : 왜 우리가 시중들어야 합니까?
박 : (채찍을 휘두르며) 채찍으로 얻어맞고 싶지 않으면 시키는 대로 하란 말이오.
김 : 우린 구경꾼예요.
박 : 구경꾼이고 나발이고 무차별적으로 채찍으로 얻어맞는단 말이오.
김 : 어떻게 시중들으란 말입니까?
박 : 앉아달라고 나한테 부탁하시오.
김 : 우리한테 하인 노릇을 하란 말인가요?
박 : 요샛말로 을이라고 합시다.
김 : 갑질하고 있네...... 요. (국어책 읽듯이) 앉으세요.
박 : 기계적으로 대답하는 거 같잖소. 감정을 넣어 부탁해봐요.
김 : (신파조로) 앉으세요, 나으리!
박 : 진정성이 없잖소.
이 : 진정성이 있다고 치면 되겠네요.
박 : (혼잣말로) 그러면 되겠구나, 아옹다옹하느니. 그럼 진정성이 있는 셈 치고...... (의자에 앉는다.) 의자에 한번 앉기 되게 힘드네. 아, 의자에 두 번째 앉기 되게 힘드네.
박씨가 줄을 잡아당기자 최씨가 트렁크에서 굴러떨어진다.
이 : 멀리서 봤을 땐 희극이었는데 가까이서 보니까 비극이다.
김 : 고도가 오면 가까이서 봐도 희극일 텐데.
박 : 일어나, 이 개돼지 같은 놈아!
이 : 답변을 빙자한 학대 같다.
김 : 학대 같기도 하고 늑대 같기도 하다, 개돼지를 찾는 걸 보니까.
박 : 일어나라니까, 이 바보 같은 놈아!
최 : (일어나 트렁크에 앉는다.)
박 : 저놈이 저렇게 개돼지처럼 찍소리도 못한 채 복종하고 있지만 내가 저놈을 철저히 묶어놓고 감시하며 억압해서 개돼지로 만들어버렸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저러고 있을 뿐이오. 조금이라도 풀어주면 사나운 호랑이로 돌변하여 소송을 제기하고 자유와 권리를 되찾겠다며 난리를 쳐댑니다. 내 채찍과 의자도 쉽게 뺏어버리는 행실 나쁜 놈이니 당신들도 저놈을 조심하시오. (최씨에게 다가가서 채찍으로 휘갈긴다.)
김 : 채찍질에도 아무런 반응이 없네.
이 : 얻어맞는 거나 채찍질하는 거나 초등학생 국어책 읽는 것보다 더 서투르다.
김 : 엉거주춤이나 갈 데까지 가본 노래보다 더 서투르다.
박 : (채찍질을 멈추고) 이렇게 채찍을 휘두르듯이 무차별적으로 공권력을 악용하는 놈들과 재림주 행세를 하는 놈들을 비롯하여 각종 힘을 악용하는 놈들을 싸잡아 혼쭐내주려고 지옥을 만들어 놓은 거요. 그리하여 신의 직접 통치로 정의가 실현된 천국이 펼쳐진단 말이오. 그런 천국을 비유적으로 표현한다면 구세주의 양떼에 최적화된 풍요로운 초원이라서 육식 동물들은 사라지고 구세주의 양떼를 비롯한 초식 동물들이 마음놓고 뛰어노는 곳이오. 그렇다고 잔인해 보이는 약육강식의 이 세상을, 선과 악이 공존하는 이 세상을 원망하지는 맙시다. 그런 이 세상이었기에 인류가 탄생할 수 있었으니까.
이 : 형씨는 지옥에 대해서 잘 모르는 것 같은데요. 예수를 믿지 않으면 누구나 지옥에 들어갑니다. 기독교인들이 그렇게 주장한단 말입니다.
박 : 천국에 들어갈 수 없는 사람도 신은 들어가게 할 수 있다고 예수가 말했잖소. 신의 공의뿐만 아니라 사랑과 용서까지 적용한다면 불가능했던 천국 들어가기도 가능해지고, 지옥에 들어가는 것도 막을 수 있단 말이오, 인간에 대한 신의 뜻은 심판이 아니라 구원이니까. 그러므로 방금 내가 말한 지옥이 맞는 말이오. 그런 지옥이라면 무신론자들도 납득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사이) 왜 대답이 없소?
김 : 신이 지옥 만들어 놓길 잘했습니다. 그런 놈들은 지옥에 떨어져 혼쭐나봐야 돼요. 권력을 휘두르는 놈들을 보면 신이 없거나 그놈들한테 무기력하게 굴복한 거 같았는데요.
이 : 연기가 초등학생 국어책 읽는 것보다 더 서투른데요.
박 : 요즘엔 초등학생들이 워낙 국어책을 잘 읽어요, 과외를 해서 그런지. 난 과외를 안 받았소, 연기하는 것도. 그러니 그런 점을 참작하시오.
김 : 채찍으로 바닥을 내리칠 땐 쪽집게 고액 과외를 받은 거 같았어요. 흠칫 놀랄 정도로 실감났거든요.
박 : 의자에 앉아 채찍만 들면 나도 모르게 돌변한단 말이오.
이 : 점잖던 사람이 술만 마시면 주정을 부리듯이요? 술을 마시면 세상이 만만해 보이거든요. 술 깨면 세상이 술 깬 사람을 만만히 봅니다만.
박 : (채찍을 최씨에게 건네고, 본래의 말투로) 서툴렀지만 그런대로 반박이 된 거 같은데요.
이 : 잘됐습니다.
김 : 아주 잘됐습니다.
김씨와 이씨, 가로등 뒤에서 나온다.
박 : (웃으며) 시시콜콜 계속 따질 줄 알았는데 의외로 선뜻 후하게 평가해주니까 저절로 웃음이 나오는데요.
이 : 유치한 전설을 유치한 연기로 유치하게 잘 반박했다고요.
박 : 어쩐지 너무 과하게 후하다 싶더라니...... 괜히 웃었군요.
이 : 괜히 웃다뇨, 억지로도 웃는데요.
박 : 하긴 형씨는 나보다 더 잘하는데요. 유치라는 단어를 많이 넣어 매우 유치하게 평가를 잘한다고요. 이만 가봐야겠네요.
김 : 어디로 가시나요?
박 : 땅끝에 이르기까지 어디에나 가려고요.
박씨, 의자를 집어 들고 최씨에게 가서 채찍을 넘겨받는다. 그러고는 트렁크에 의자와 채찍을 집어넣고, 트렁크를 든다.
박 : 아, 못다 한 이야기를 마저 해야겠군요, 구세주 예수의 실체를 확인할 수 있는 방법. 예수는 자신의 존재를 회의하는 사람들에게 믿음을 줄 수 있는 방법의 하나로 예언을 주목했습니다, 관련 예언 세 가지만 예를 들어 볼게요. 십자가 형틀에 매달려 처형 당하기 하루 전날 예수가 예언했습니다,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고. 당시 사람들은 그런 예언을 헛된 망언으로 여겼을 겁니다, 예수가 지금처럼 세계적으로 구세주로 인정 받으리라고는 전혀 상상조차 못하고. 그러나 ‘내가 미리 이 일을 일러주는 것은 그 일이 일어날 때 너희로 하여금 내가 누구라는 것을 믿게 하려는 것이다’라고 예수가 제자들에게 말했듯이, 예언의 실현이 자신이 구세주라는 것을 증명할 것으로 예상했기 때문에 그런 예언을 했을 겁니다. 그리고 그 예언이 실현됐단 말예요.
김 : (맞장구치듯) 실현되고도 남았죠.
박 : 다음의 성경 구절은 지구 멸망의 날에 나타나게 될 현상에 대한 예수의 예언입니다. ‘그 날에는, 해는 어두워지고, 달은 빛을 내지 않고, 별들은 하늘에서 떨어지고, 하늘의 세력들은 흔들릴 것이다.’ 그런데 현대의 천문학자들 역시 예수와 같은 예측을 합니다, 태양은 에너지가 소진되어 빛을 잃어버리고 태양계는 붕괴될 것이라고. 끝으로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언하는 것이니라’라고 예수가 말했듯이 구약 성경에는 구세주에 관한 예언들이 곳곳에 기록되어 있습니다만 그중의 한 구절만 소개해볼게요. 인간 구원의 희생양이 되어주는 구세주에 관한 선지자 이사야의 예언입니다. ‘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뿌리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가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 그는 멸시를 받아 사람들에게 버림 받았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이 그에게서 얼굴을 가리는 것 같이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 하나님께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최씨에게) 가세.
김 : 좀 더 머물다 가시죠, 그새 정이 든 거 같은데요.
박 : (웃으며) 땅끝에 이르기까지 가려면 서둘러야겠는데요.
박씨와 최씨, 퇴장한다. 김씨는 무대 끝까지 따라가서 그들이 사라지는 것을 지켜보다가 돌아온다.
김 : 저 사람들도 갔으니 우리도 가자.
이 : 고도를 기다려야지.
김 : 아무래도 구세주 예수가 고도인 것 같은데.
이 : 그가 고도가 아니란 것은 이 세상 돌아가는 꼴이 단적으로 반증하고 있다니까 그러네.
김 : 예언들이 맞잖아?
이 : 이 세상의 고통과 혼돈 앞에선 예언이든 그 무엇이든 구차한 변명에 불과할 뿐야. (침묵)
김 : 오라는 고도는 안 오고 졸음만 온다.
김씨, 바위에 쪼그려 앉아 잠든다. 이씨가 지루한 듯이 무대를 서성거리다가 무대 왼쪽 끝에 가서 걸음을 멈추고 먼 곳을 바라보는데, 무대 오른쪽에서 소년이 등장한다.
소년 : (걸음을 멈추고) 아저씨.
김 : (잠에서 깨어나 일어선다.)
이 : (소년에게 다가가며) 고도의 심부름으로 온 거냐?
소년 : 네.
이 : 너 나를 모르겠니?
소년 : 알아요.
이 : 알아?
소년 : 네.
이 : 너 어제도 왔었니?
소년 : 네.
이 : 오늘따라 네 기억이 분명하고 사실대로만 말하는데, 어떻게 된 거냐?
소년 : (단숨에) 구세주 예수를 믿으면 고도를 분명히 알 수 있다고 말씀하셨어요.
이 : 옳아, 오늘은 고도가 아니라 박씨가 널 보냈구나.
소년 : 저는 박씨가 누군지 모르는데요.
이 : 그렇다면 고도가 오늘은 못 오고 내일은 꼭 오겠다는 말을 전하더라고 했어야지, 늘 그랬듯이.
소년 : 아저씨들이 그런 말을 강요했기 때문이라고 하셨어요.
이 : 우리가 강요하다니?
소년 : 아저씨들이 그런 말만 인정하며 받아들였고 지금 제가 전한 말은 극구 거부할 것이 뻔했기 때문이라고 하셨어요.
이 : 그런 말은 우리의 처지를 표현한 말이지만, 구세주 예수는 산타와 같은 인물이기 때문이다. 너도 산타가 없다는 걸 알 만한 나이가 된 거 같은데.
소년 : 아저씨들이 과학적 시각으로 바라보기 때문에 그렇다고 하던데요.
이 : 과학적 시각이 얼마나 정확한데.
소년 : 창조주께서 구세주를 보내셨는데 과학은 창조주와 구세주에 대해서는 깜깜무식이래요.
김 : 과학이 단순 무식도 아니고 깜깜무식이라고? 고도도 웃기지 않는 농담을 하는구나.
이 : 얘야, 신이나 구세주를 믿는 거야말로 나약한 인간의 맹신이란다.
소년 : 그에 관해서는 고도께서 직접 답변하실 거예요. (객석을 향하여) 주님.
객석 너머에서 한 줄기 빛이 무대를 내리비추고, 목소리가 들려온다.
고도 : 내가 고도입니다.
김 : 고도다!
이 : (핀잔하며) 고도 아냐. (고도에게) 고도라면서 뭐가 켕기는 게 있기에 당당히 나타나지 못합니까, 지각한 학생이 교실 뒷문으로 슬그머니 들어오듯이? 그건 고도에게 결코 어울리는 행동이 아닙니다.
고도 : 온갖 억측이 난무하고 있는 고도의 실체를 직접 설명해주려고 온 것입니다. 많은 참고 자료들이 나왔기 때문에 그 자료들을 활용하여 설명하면 보다 쉽게 고도의 실체를 헤아릴 수 있거든요. 그런데 고도가 신과 구세주와 긴밀하게 연관되어 있어서 신의 존재 문제부터 풀어나가야겠습니다.
이 : 신의 존재 문제는 설명으로는 풀리지 않을 텐데요, 기적을 보여준다면 모를까.
고도 : 기적은 믿음, 진심, 전심 같은 조건들이 갖춰져야만 하는데 세상 사람들은 그것을 갖추지 못해서...... 더구나 신은 자연법칙을 초월하지만 존중합니다, 인간의 자유 의지를 존중하듯이. 그래서 기적을 일으키더라도......
이 : 핑계 없는 무덤 없다더니......
김 : 고도가 맞군요.
고도 : 예, 맞습니다, 고도! 어떻게 그렇게 금방 쉽게 알아맞혔죠?
김 : 고도는 핑계를 잘 대더라고요, 응답하기 전에 상의해야 될 사람도 많다고 하고, 가족들, 친구들......
고도 : 그게 바로 고도에 대한 억측의 하나인데요. 하지만 어쨌든 알아맞혔으니까, 이를 어쩌나? 모로 가도 서울만 가면 된다는 속담도 있잖아요. 게다가 여기가 서울이고. 그러니까 이씨만 동의한다면 내가 고도임이 밝혀진 것으로 결론짓고 그다음 설명을 하고 싶은데요.
이 : 아무렇게나 함부로 결론짓는 걸 보니 사이비 고도가 분명하군요.
고도 : 고도의 실체가 단순명료해서 파고들수록 밝히기가 어려워져서 그래요.
이 : 선생이 진짜 고도라면 우리가 바라는 것들을 들어줘야 하지 않겠어요?
김 : 아참, 그렇지. 저는 서울 시내에 아파트 한 채만 그것도 작은 평수의 아파트 한 채만 현찰로 구입할 수 있다면 더 바랄 게 없는데요.
고도 : 신에 관하여 토론해봅시다. 그럼 아파트 문제도 풀릴 것입니다.
이 : 아파트 문제가 신에 관한 토론으로 풀린다니, 공염불에 불과한 토론이 돼버리겠는데요. 신의 비존재 문제는 토론으로 풀릴 수 있을 거 같은데요. 기왕 토론하는 김에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라는 성서의 첫 구절부터 본격적으로 토론을 벌여봅시다, 맞짱 뜨기 하듯이. 세계적 물리학자 스티븐 호킹이 그 구절을 다음과 같이 반박했습니다. ‘우주들이 창조되기 위해 어떤 초자연적인 존재 혹은 신의 개입은 필요하지 않다. 오히려 그 다수의 우주들은 물리법칙에서 자연적으로 발생한다. 중력의 법칙과 같은 물리법칙이 존재하므로 우주는 무로부터 스스로 창조될 수 있으며, 창조될 것이다.’
고도 : 물리법칙을 비롯한 과학만으로는 무로부터 먼지 한 점 창조할 수 없습니다. 무에서의 물질이나 에너지 발생은 과학 너머의 영역이기 때문입니다. ‘물리법칙이 내재되어 있는 우주가 신의 초자연적 힘에 의해 무로부터 창조됐다.’ 어떻습니까?
이 : ‘무언가를 설계할 정도로 충분한 복잡성을 지닌 창조적 지성은 오직 확장되는 점진적 진화 과정의 최종 산물로 출현한 것이다. 진화된 존재인 창조적 지성은 우주에서 나중에 출현할 수밖에 없으므로 우주를 설계하는 일을 맡을 수 없다. 이 정의에 따르면, 신은 망상이다.’ 진화생물학자 리처드 도킨스의 주장입니다.
고도 : 물리법칙이 내재된 우주를 창조한 존재라면 그야말로 창조적 지성이잖습니까, 그가 우주 자체이든 신이든. 이에 따르면 창조적 지성은 오직 확장되는 점진적 진화 과정의 최종 산물로 출현한 것이라고 주장한 리처드 도킨스는 망상가입니다.
이 : 도킨스가 말했습니다, 만약 물리적으로 우주를 신이 창조했다면 그 신은 누가 창조했는가 하는 함정에 빠진다고. 신을 창조한 존재는 신의 신? 그런 식으로 올라가면 그 존재의 복잡성은 무한히 증가하고 그 존재가 없을 확률도 무한히 100%에 가까워진답니다.
고도 : 리처드 도킨스의 문제 제기를 미리 예측했다는 듯이 아주 먼 옛날에 신은 자신에 대하여 분명히 밝혔습니다, 신은 스스로 존재한다고. 신의 이름 여호와도 스스로 존재하는 자를 뜻합니다. 다른 누가 신을 창조한 것이 아니고 신의 신도 없다는 것을 분명히 한 것입니다.
이 : 호킹 박사가 말하기를 ‘빅뱅 이전에는 시간이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에 신이 우주를 만들 시간도 존재하지 않았다. 따라서 신이 존재할 시간 자체가 없다.’ 했습니다.
고도 : 우주를 컴퓨터에 비유해봅시다. 그러면 컴퓨터 제조자가 컴퓨터의 본체나 OS의 지배를 받지 않는 것처럼 우주의 창조자인 신은 우주나 시공간이나 물리법칙들의 지배를 받지 않는다는 것을 유추할 수 있잖아요?
이 : 우주 탄생은 빅뱅 이론만으로도 설명되잖아요, 신을 끌어들이지 않더라도.
고도 : 빅뱅을 일으킨 작은 한 점의 기원에 대하여 인간이 과학적으로 아는 것이 있습니까? 중력의 법칙을 비롯한 많은 과학 법칙들의 발생 원인에 대해서도 과학적으로 뭐 하나 아는 것이 있나요? (사이) 빅뱅 이론만으로는 온전한 설명이 못되잖아요. 해가 거듭할수록 과학의 다른 분야는 눈부시게 발전하는데도 존재의 궁극적 기원에 대해서는 원시시대 이래로 단 한 발짝도 내딛지 못하고 있고 내딛을 가능성도 전혀 보이지 않잖아요. 그야말로 완전 먹통입니다.
김 : 쉽게 말해 깜깜무식이라는 말이군요.
고도 : 그렇습니다. 과학 너머의 영역이고 과학의 한계 때문입니다. 신의 존재 여부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존재의 궁극적 기원 한가운데에 그 문제가 있기 때문입니다.
이 : 세상의 온갖 신화와 전설과 종교의 신들과 구세주들이 인간의 상상력의 산물이라는 것은 사실상 일반 상식이잖아요.
고도 : 실제적 신 창조주 하나님과 구세주 예수가 지구라면 그 밖의 모든 신화와 전설과 종교의 신들과 구세주들은 수많은 불모의 별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 수많은 불모의 별들이 무의미해 보이지만 그런 별들이 있었기에 그 가운데서 지구가 탄생될 수 있었듯이, 상상력의 산물인 신들과 구세주들을 믿는 신앙인들이 있었기에 그 가운데서 실제적 신 창조주 하나님과 구세주 예수를 찾고 만나는 신앙인들이 탄생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 : 창조주 하나님과 구세주 예수 역시 인간이 상상으로 만든 허구적 신과 구세주입니다.
고도 : 그런 단정은, 우주 밖의 누군가가 우주의 무수한 불모의 별들을 보았지만 지구를 못 보거나 못 알아보고서 우주에는 지적 생명체가 존재하는 행성이 없다고 결론을 내리는 것과 같습니다.
김 : 비유를 즐겨 사용하여 설명하는 고도 같은데요, 구세주가 그랬던 것처럼.
고도 : 또다시 알아맞혔군요.
이 : 알아맞힌 게 아니라 착각입니다. 이 친구는 착각을 잘하거든요, 치킨 배달원까지도 고도인 줄 알았을 정도로. 편집증이 있다 싶을 정도라니까요.
고도 : 그런데 지금은 착각이 아닙니다.
김 : (주먹 쥔 손을 흔들며 연호한다.) 고도! 고도! 고도!
이 : (혼잣말로) 참 나, 증상들이 심하네. (고도에게) 선생의 편집증은 이 친구보다 훨씬 더 심해서 말기적 증상이 나타나는 거 같은데요.
김 : 말기적 증상이라는데 구급차 부를까요?
고도 : 놔두세요, 필요하면 구급차를 내가 직접 부를 수 있으니까.
이 : (비아냥거리며) 참 능력 많으신 고도이십니다, 구급차도 직접 부를 수 있고, 기적을 일으키고 아파트 사줄 능력은 없지만. (평소 목소리로) 신이라는 단어는 인간의 나약함이 낳은 산물이자 표현이고, 대중들로부터 존중 받는 성경은 매우 원시적인 전설 모음집이다. 아무리 치밀한 해석을 덧붙이더라도 그 견해를 바꿔놓을 수는 없다고 천재 물리학자 아인슈타인이 자신의 견해를 밝혔습니다.
고도 : 과학 영역 너머의 신에 관한 기록이 성경입니다. 그런 신과 성경을 과학적 시각으로만 판단하니까 신은 인간의 상상이나 나약함이 낳은 산물 같아 보이고 만들어진 신 같아 보이며 성경은 원시적인 전설 모음집 같아 보이는 것입니다, 그림 문외한에게 세계적 명화가 공짜로 줘도 받고 싶지 않은 낙서 같아 보이고 자신도 세계적 명화를 얼마든지 그릴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 것처럼. 그러나 과학 너머에 열린 시각으로 바라본다면, 성경은 주변 여러 나라의 전설, 신화, 종교의 교리 등을 차용하여 초월적 신 창조주의 존재와 뜻을 표현한 책이라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과학적 시각만으로도 물리상수나 DNA 등에서 신의 개입을 유추할 수 있을 텐데요. 그리고 지적 생명체 인간의 탄생에 최적화된 환경이 지구에만 집중적 연속적으로 조성되어진 것에서도 신의 개입을 유추할 수 있을 것입니다, 바로 옆의 달이나 화성이나 금성에서는 단 하나의 조성된 흔적도 찾기 어려운데.
이 : 분명한 것은 성경은 전설 모음집일 뿐만 아니라 모순투성이라는 것입니다.
고도 : 모순투성이기는 합니다만......
이 : 기독교인들은 성서무오설을 주장하는데요.
고도 : 성서무오설은 엄밀히 말해 창조주 신의 뜻에 오류가 없다는 것입니다, 다른 그 어떤 모순 속에서도.
이 : 신의 뜻도 모순된다니까요.
고도 : 이 세상에서의 궁극적인 신의 뜻은 하나입니다. 모순된다는 신의 뜻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인간 구원, 즉 신의 자녀들을 탄생시키는 것. 이 세상 어느 부모나 같을 것입니다, 제 자식보다 더 소중한 존재는 없다는 것은. 우주? 그보다 더한 것? 어림도 없잖아요. 기독교인들은 그런 신의 뜻을 알기 때문에 모순도 새겨듣습니다.
이 : 신의 뜻 이전에 신의 존재부터가 인간의 상상입니다. 그렇게 만들어진 신의 능력은 인간의 상상력과 비례하고요. 그런 상상력의 최대치가 신의 우주 창조입니다. 차라리 한 단계 줄여, 우주가 스스로 창조됐다고 하면 어떻겠습니까?
고도 : 우주를 창조할 만한 능력이라면 전지전능하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요, 그 창조자가 우주 자체이든 신이든? 극한 환경인 우주 속 무수히 많은 불모의 별들 가운데서 생명체가 살아갈 수 있는 행성 지구와 그 속의 지적 생명체 인간의 탄생은 화룡점정과도 같은 것이잖아요, 설령 외계인이 존재한다고 하더라도. 그렇다면 그 전지전능한 창조자는 지적 생명체인 인간과 소통할 능력이 당연히 있으며 만나 소통하지 않겠습니까? 법칙에 따라 우주 운행만 하고 아무런 반응도 없이 끝없이 침묵만 지킨다는 것 자체가 창조자도 아니고 전지전능하지도 않음을 방증하는 것이 아닌가요? 창조자라면 부모의 원형인데요. 그런 관계가 아니더라도 인간은 존재 여부도 확인되지 않은 외계인들과도 만나 소통하기를 바라며 인류 소개 메시지를 우주 탐사선 보이저호에 실어 보내기도 했습니다. 창조자 역시 굳이 소통을 차단하거나 거부할 이유는 전혀 없고 오히려 소통을 열망하지 않을까요, 어렵게 아이를 낳은 부모가 아이와의 소통을 열망하듯이? 그렇게 창조자 신은 계시 즉 성경을 통하여 게다가 구세주가 직접 찾아와 자기 희생적인 사랑을 베풀며 적극적으로 인간과 만나 소통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이 신은 인간과의 만남과 소통을 인류의 큰 덕목인 사랑, 다시 말해 부모의 자식에 대한 내리사랑, 즉 구세주 예수의 희생적 내리사랑을 통하여 하고 있습니다. 신의 존재는 그렇게 만남과 소통으로 증명됩니다.
이 : 신이나 구세주와의 만남과 소통도 증명이 아니라 상상이나 착각입니다.
고도 : 존재의 궁극적 기원, 그중에 신의 존재에 대하여 과학은 전혀 모릅니다. 그에 따라 신의 존재 여부나 신과의 만남과 소통에 대하여 과학적으로는 모른다고 해야 과학적으로 올바른 주장이잖아요?
이 : 반증이나 방증을 통해 추정하는 겁니다, 신은 없고 우주는 스스로 존재한다는 것을. 신의 자녀들을 탄생시킨다는 지구도 불모의 행성 중의 하나로 되돌아가잖습니까. 그렇게 우주의 모든 현상은 의미나 이유나 목적 없이 일어납니다.
고도 : 다음 문장들을 조합해봅시다.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창조하신 때부터 창조물을 통하여 당신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과 같은 보이지 않는 특성을 나타내 보이셔서 인간이 보고 깨달을 수 있게 하셨습니다.’라고 성경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아무 목적 없이 존재한다고 주장되는 우주입니다만 그 속의 한 행성인 지구에 살고 있는 동식물을 망라한 모든 생명체들의 궁극적 목적은 생존이자 번식입니다. 신이 이 세상에 보낸 구세주가 제자들에게 가르쳐준 기도인 주기도문의 첫 구절은 신을 ‘우리 아버지’라고 부르면서 시작됩니다. 글이나 연설도 첫 구절이 중요하고 어려우며 신경 쓰인다고 하잖아요. 제 새끼에 대한 어미의 사랑과 희생은 생물계에 다반사입니다. 자신의 몸을 갓 태어난 새끼들의 먹이로 제공하는 거미들도 있습니다. 그런 과학적 사실이 밝혀지기 훨씬 이전에 기록된 성경 구절이 있습니다. 구세주가 신의 자녀들 탄생을 위한 자신의 희생을 비유적으로 표현한 말.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영생을 얻는다.’ 조합해보면 지구에서 자녀들을 탄생시키는 창조주 신의 뜻을 유추해 볼 수 있잖아요?
이 : 신의 자녀들이라는 기독교인들을 보세요, 그중에서도 믿음이 깊다는 기독교 지도자들을. 구약 시대부터 있었던 부패가 신약 시대에도 ‘면죄부’를 비롯하여 역사와 전통을 면면히 이어오고 있잖아요. 신과 구세주가 허구적 존재라는 것을 반증하고 있잖습니까.
고도 : 그 부패한 지도자들이 믿음이 깊어 보이지만 실은 부패하는 것은 믿음이 깊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만큼 지도자가 신에 대한 믿음을 지키기가 어렵습니다. 그들에게는 쉽게 세상 사람들의 관심이 집중되지만 정작 믿음이 깊은 사람들은 세상 사람들의 관심 밖에 있습니다.
이 :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에피쿠로스가 말했습니다. ‘신이 악을 막을 의지는 있지만 능력이 없는가? 그렇다면 신은 전능하지 않다. 신이 악을 막을 능력은 있는데 의지가 없는가? 그렇다면 신은 선하지 않다. 신이 악을 막을 능력도 있고 의지도 있는가? 그렇다면 이 세상의 악은 어디에서 기인한 것인가? 신이 악을 막을 능력도 없고 의지도 없는가? 그렇다면 왜 우리가 그를 신으로 불러야 하는가?’
고도 : 악에 관한 대표적인 예를 하나 들어볼게요. 신이 인간 구원을 위하여 이 세상에 보낸 구세주 예수 당시의 악은 구세주를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 그런 악이 있었기에 구세주는 희생양이 되어 인간 구원을 할 수 있었습니다. 그 구세주 예수를 주목하세요. 그가 바로 세상 사람들이 기다리는 고도입니다. 인간 구원에 대한 능력도 의지도 모두 갖고 있고 구원으로 이끌고 있는 존재는 구세주밖에 없거든요. 온갖 억측이 난무하고 있는 고도의 실체가 실은 그렇게 단순명료합니다.
이 : 신이 있고 구세주가 왔다지만, 그 결과가 뭡니까? 종교적 분쟁만 증가했잖습니까. 그렇게 이 세상은 더욱 혼돈스러워지고, 신과 구세주를 믿는 사람들을 포함해서 누구나 어떤 형태로든 여전히 고통을 당하고 있는 것도 분명하고요. 그것이 구원인가요? 아니라면 예수가 구세주도 고도도 아니란 것이 분명하잖습니까.
고도 : 구원은 신의 자녀로 태어나는 것입니다. 신의 자녀들의 최종 귀착지는 이 세상이 아니라 천국입니다. 비유적으로 말한다면, 이 세상은 신의 자녀들이 태어나는 분만실 같은 곳이며, 신의 자녀 적격성을 심사하는 험난한 시험장 같은 곳입니다.
이 : 인생은 고통의 바다라고 석가도 밝혔듯이 고통은 인간의 핵심 문제입니다. 우주를 창조한 전지전능한 신이 존재하고 그 신이 구세주를 이 세상에 보냈다고 칩시다. 그렇다면 고통에 대한 문제부터 해결하는 것이 신과 구세주로서의 책무가 아닌가요? 천국이란 말이 내겐 핑곗거리란 말로밖에 안 들립니다.
고도 : 석가는 인생은 고통의 바다라고 밝혔지만, 예수는 인생의 고통은 인간 구원 다시 말해 신의 자녀로 태어나는 과정에 겪는 진통이라는 것을 극한적인 고통을 자진해서 온몸으로 겪으며 밝혔습니다. 고통에 관한 대표적인 예로도 누구보다 더 큰 고통을 당한 구세주의 십자가 희생을 들 수 있을 것입니다. 신은 대리 희생을 시킬 수도 있었습니다, 희생양을 만들어서. 그런데도 신은 굳이 스스로 희생양이 되었습니다. 삼위일체 하나님이라고 여러분도 익히 들어 알고 있을 것입니다만 구세주가 신 자신이거든요. 구세주 자신과 제자들의 증언을 제외하고도,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불리는 한 아이가 태어날 것이며 그는 우리를 구원하기 위하여 우리의 죄악을 친히 담당하고 고통 당하며 희생 당할 것’이라는 이사야의 예언이, 그리고 구세주의 희생의 피는 신 자신의 피라고 증언한 사도행전 중의 바울의 설교가 구세주의 희생이 신 자신의 희생이라는 것을 증언하고 있습니다. 그런 신의 뜻은 자식을 위해서라면 희생이든 무엇이든 다 한다는 부모 마음 그 자체이며, 자신의 몸을 갓 태어난 새끼들의 먹이로 제공하는 염낭거미와도 일맥상통합니다. ‘고난이 있을 때마다 그것이 참된 인간이 되어 가는 과정임을 기억해야 한다.’-괴테, ‘괴로움은 인간의 위대한 교사이다.’-에센바흐 등의 격언에서도 볼 수 있듯이 고통을 겪고서 태어나는 신의 자녀들에게는 이를 겪어본 사람만이 깨달을 수 있는 진정한 사랑과 자유와 평화의 실체와 소중함을 깨닫고 구세주의 십자가 희생을 기리며 겸허의 자세가 배어 있는 사람 특유의 내면의 아름다움이 있습니다, 다이아몬드처럼 빛나는. 여러분의 고통은 흑연이 다이아몬드로 탄생될 때 받는 매우 높은 온도와 압력과도 같은 것이며 자기 십자가를 지는 것입니다. 어려움에 처했을 때 진정한 친구를 찾을 수 있다는 격언도 있듯이 신은 삶의 고통 가운데서 신의 진정한 자녀들을 찾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일부러 고통이나 고행을 택하라는 것은 아닙니다만. 뜻하지 않은 고통을 당하는 사람들이여, 여러분의 고통은 신이 없기 때문도 아니고 신이 악하기 때문도 아니며 신이 버렸기 때문도 아니라 역설적이게도 신의 부르심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익살스럽게 말해서 여러분은 천국으로 강제 소환을 당한 것입니다. 여러분을 천국으로 이끌어가기 위하여 구세주가 당한 고통이 이를 증명하고 있습니다.
이 : 천국이 있다는 말은 우리 집에 금송아지가 있다는 말과 어떻게 다른가요?
고도 :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는 구세주의 헛된 망언 같았던 예언을 믿듯이 구세주가 말한 핑곗거리 같은 천국을 믿어보세요. 그러면 구세주의 예언이 실현되듯이 구세주가 말한 천국도 실현될 것입니다.
이 : 구세주는 당시의 세대가 지나가기 전에 재림할 거라고 예언했고, 계시록에도 구세주가 속히 재림할 거라고 예언했는데, 200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재림할 기미는 보이지 않습니다. 구세주가 실제가 아닌 가상 인물이기 때문이잖아요.
고도 : ‘일월성신에는 징조가 있겠고 땅에서는 민족들이 바다와 파도의 성난 소리로 인하여 혼란한 중에 곤고하리라 그 때에 사람들이 인자가 구름을 타고 능력과 큰 영광으로 오는 것을 보리라’라는 구세주의 예언처럼 지구적 차원의 재난으로 인류가 멸망할 때 구세주는 재림할 것입니다. 그런데 구세주는 시대순에 따라서가 아니라 고대 이집트의 그림들처럼 각기 독립적으로 미래사를 예언했습니다.
이 : 구세주가 구름을 타고 재림하는 것과 소설 속 등장인물이나 신화 속 신들이 구름을 타고 다니는 것과는 어떻게 다릅니까?
고도 : 구세주가 타는 구름은 비유입니다. 인류가 멸망하는 먼 미래에 구세주가 재림하니까 기다리지 말고 이 세상의 안락함과 만족을 추구하고 즐기며 살라고 할 수는 없잖아요. 그렇게 사는 사람들에게는 신은 부담스러운 존재일 뿐이며 이 세상은 천국으로 여겨집니다. 그러나 이 세상 모든 것이 헛되게 끝나버린다는 것을 새삼 느꼈잖습니까. 인간은 누구나 자신의 생을 마감하는 때가 사실상 구세주가 재림하는 때입니다. 그러므로 어느 세대 사람이든 자신의 세대가 지나가기 전에 구세주의 재림에 만반의 대비를 해야 합니다. 그렇게 해서 단 한 사람도 탈락하지 않고 모두 다 천국에서 큰 축복 받기를 염원하는 부모 심정으로 ‘이 세대가 지나가기 전에’와 ‘속히’라는 말로 구세주의 재림을 표현하기도 했습니다, 매년 수능일마다 추위도 아랑곳하지 않고 교문 밖에서 발을 동동거리는 극성스러운 한국 학부모들의 염원하는 심정과도 같이. 신이 자기 형상대로 인간을 창조했다고 성경에 기록되어 있듯이 신과 인간의 마음이나 염원이 닮은 점이 있는데 가장 닮은 점이 부모 마음입니다. (사이) 인간의 탄생과 죽음까지의 생의 시간은 우주의 시간에 비하면 찰나와 같고 영원에 비한다면 없는 것과도 같습니다. 삶의 고통을 무신론자들은 인생의 관점에서 바라봅니다만 신은 영원의 관점에서 바라봅니다. 다른 생명체들과 달리 지적 생명체 인간은 신과 소통할 수 있는 능력을 갖게 됨으로써 신의 자녀 탄생 영역에 들어섰고, 그에 따라 신의 자녀가 되는 선택권과 함께 내세가 주어졌기 때문입니다. 선택과 결정은 전적으로 인간 각자의 몫입니다만.
이 : 호킹 박사는 사람의 뇌를 부속품이 고장나면 작동을 멈추는 컴퓨터에 비유하면서, 고장난 컴퓨터에는 천국이나 지옥 같은 내세가 있을 수 없고 사람이 마지막 순간 뇌가 깜빡거림을 멈추면 그 이후엔 아무것도 없다고 했습니다.
고도 : 컴퓨터 자체만 놓고 보면 맞는 비유입니다만, 그 박사는 컴퓨터만 봤군요, 컴퓨터의 제조자나 주인에게도 주의를 기울였어야 하는데요. 그것은 마치 나무만 보고 숲은 못 보는 것과 같습니다. 창조주인 신을 컴퓨터의 주인에 비유해봅시다. 그러면 주인은 컴퓨터 고장 대책을 세워놨겠죠?
이 : 고칠 수도 없게끔 완전히 고장나서 컴퓨터를 폐기시키게 됐단 말입니다. 그렇게 죽음으로 인체는 분해되어버리고 영혼은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립니다. 호킹 박사 말마따나 아무것도 없어요. 설령 전지전능한 신이 있다 하더라도 그 신조차 원상으로 되돌릴 수 없을 것입니다. 호킹 박사가 말했잖아요, 천국이나 내세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는 믿음은 죽음을 두려워하는 사람들이 만들어낸 동화일 뿐이라고.
고도 : 양자 역학을 배경으로 한 평행 우주 이론에서 또 다른 세계의 존재 가능성이 과학적으로 제시되고 있잖습니까. 그 또 다른 세계를 통해 천국과 그 속의 인간을 유추해볼 수 있지 않을까요? 단지 일면의 관련성만 갖고 있기는 합니다만.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으로 기뻐하라.’고 예수가 말했는데, 이름뿐만 아니라 부활에 필요한 요소들도 천국에 복제된다는 것을 유추할 수 있잖아요? 다른 관점에서 유추해봅시다. 우주를 창조한 전지전능한 신이, 모든 것을 다 가진 신이, 자신이 가진 것들 중에서도 가장 좋은 것만을 자녀들에게 나눠주기를 원하는 신이, 구세주의 목숨까지 내주고 얻은 소중한 자녀들에게 왜 한시적이고 덧없는 이 세상 복만을 주고 이 세상만을 살다 가게 하겠습니까? 그러느니 차라리 자녀들을 탄생시키지 않았을 것입니다. 세상의 그 어느 부모나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자신이 가진 능력을 사랑하는 자녀들을 위해서 발휘하기를 원하는 마음은. 천국은 그렇게 자녀들에게 영원한 축복을 주고 싶어하는 신이 만들어낸 것입니다. 우주를 창조한 전지전능한 능력이니까 천국도 능히 만들어낼 수 있잖겠어요?
이 : 양자 역학을 언급했는데 빅뱅 이론과 진화론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합니까?
고도 : 당연히 인정하죠, 과학은 신이 창조한 우주의 구성 요소이니까요.
이 : 빅뱅과 진화론을 인정함으로써 신이 6일 만에 천지를 창조했다는 성서 이야기가 거짓이라는 것을 자연히 인정해버렸습니다.
고도 : 그 성서 이야기는 비유입니다. 성서에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잖아요. ‘구세주께서 이 모든 것을 무리에게 비유로 말씀하시고 비유가 아니면 아무것도 말씀하지 아니하셨으니 이는 선지자를 통하여 말씀하신 바 ‘내가 입을 열어 비유로 말하고 창세부터 감추어진 것들을 드러내리라’ 함을 이루려 하심이라’ 이와 같이 창세부터라는 말 그대로 신에 의한 6일 만의 천지 창조 이야기부터가 비유입니다. 그렇게 비유는, 신의 뜻을 표현하는 도구의 하나이며, 과학 지식을 앞세워 신과 구세주와 성경과 기독교인들을 비판하는 무신론 지식인들에 대한 신과 구세주의 선제적 대응입니다. 그러니까 비유적 해석은 무신론자들의 눈높이에 맞춘 해석입니다. 구세주가 구름을 타고 재림하는 것을 비롯한 성경 속의 모든 전설들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무신론자들에게 그것들은 비유입니다.
이 : 기독교인들에게는 실제라는 말인가요?
고도 : 실제보다 더 확실한 신의 뜻입니다. 이 세상의 실제는 변하고 없어지지만 신의 뜻은 변함없이 영원하거든요. 그리고 기독교인들은 창조주인 신을 믿는 시각으로 성경을 읽기 때문에 그들이 문자적 비유적 어떤 해석을 하더라도 신은 새겨듣습니다. 그렇게 신과 기독교인들은 서로 새겨듣는 사이입니다. 서로를 알기 때문이죠. (사이) 이제는 신의 존재와 뜻을 깨달을 때입니다. 그리고 신에게 돌아올 때입니다. 구약 시대의 말로 한다면 무너진 신의 제단을 다시 쌓을 때이고, 구세주의 비유로 말한다면 아버지에게서 벗어나 자유롭게 즐기며 살다가 가진 것들을 잃어버린 후에야 깨닫고 돌아온 탕자처럼 신에게 돌아올 때입니다. 그 탕자의 비유의 궁극적 주제는 신이 이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을 찾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만 끝내야겠는데요, 바빠서.
한 줄기 빛이 사라진다.
소년 : (이씨를 향하여) 고도께서 자리를 뜨셨습니다. 더 하실 말 있으면 저한테 하세요, 전해드릴 테니까.
이 : (퉁명스럽게) 혼자만 바쁜 줄 아나, 바쁘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다고.
김 : 우리가 바쁜 건 없잖아.
이 : 바쁜 게 없다니. 고도를 하염없이 기다리느라 하염없이 바쁘고, 게다가 넌 낮잠 자느라 바쁘고, 난 치킨 먹느라 바쁘고, 너무 바빠서 치킨도 먹다 말았는데. (윗도리 주머니에서 치킨을 꺼내 보이며) 증거도 있잖아.
김 : 하염없이 기다리느라 하염없이 바빠? 낮잠 자느라 바빠?
이 : 바빠서라는 세상 모든 사람들이 아는 뻔한 핑계를 대고 슬며시 가버리는데 우리라고 못 바쁠 건 없잖아. (소년에게) 그뿐인 줄 알아? 난 요즘도 아침은 늘 서둘러 먹는다, 하는 일 없이 바빠서.
김 : 맞는 말이다, 게으름을 피우느라 늦게 일어나는 바람에. 다시 말해 게으름 피우느라 바빠서. 내가 증인이다.
이 : 봐라. 우린 증인도 증거도 다 있잖아. 가서 전해라, 우린 고도로 인정할 수 없다고. 괜히 남들을 구원할 생각 같은 건 하지 말고 자기 자신이나 구원 받아서 잘 먹고 잘 살라고 전하거라.
소년 : 네.
김 : 아니다, 우린 고도로 인정한다고 전해라.
이 : (가라앉은 목소리로) 가서...... 나는...... 고도로 인정할 수 없다고 말하더라고 전하거라.
김 : 우리를 기억해주고 천국에 함께 있게 해달라고 전해라.
소년 : 네. (뒤돌아서 뛰어나간다.)
김 : 저 아이도 덩달아 바쁜가 보다.
이 : 이 세상에 바쁘지 않은 사람이 없다니까 그러네.
순간 어둠이 내리고, 가로등 불빛이 무대를 밝힌다.
이 : 갑자기 너랑 서먹해진 거 같다.
김 : 네 말을 듣고 보니 그런 거 같다. 가로등 불빛 때문인가? (사이) 가자. 성경을 다시 한번 자세히 읽어봐야겠다. (쇼핑백을 집어 든다.)
이 : (빈정거리듯이) 수면제 대용으로?
김 : (맞받아치며) 그래.
이 : 문제가 풀릴 거라고 해서 혹시나 아파트 구입 보조금이라도 지급해주고 가나 했더니 역시나 그저 빈말뿐이었다.
김 : 아! (가로등 아래로 가서 쇼핑백을 놓아두고 온다.)
이 : 뭐 하는 거야?
김 : 세일로 산 외투와 바지야.
이 : 왜 입지 않고......?
김 : 누군가 필요한 사람이 있으면 가져가겠지.
이 : 딴 사람한테 주겠다는 거냐?
김 : 구세주도 그랬는걸.
이 : 아파트는......?
김 : 지금 살고 있는 집이 있으니까, 구옥이라서 불편하긴 하지만. 구세주는 집도 없었는데, 뭐.
이 : 잘 알아맞힌다고 하니까 네가 아주 신났구나, 얻어맞고 신난 것처럼.
김 : 모호하고 난해하여 맞출 수 없는 흐트러진 퍼즐 조각 같았던 낱말들, 고도, 신, 구세주, 고통, 인간이 맞춰졌거든. 만약 고도를 만나지 못했더라면 난 단지 예수는 세계 4대 성인의 한 사람이며 십자가에 못 박힌 기독교 창시자로만 알고 있을 거다. 예수가 나를 구원하기 위해서 십자가에 못 박혔다는 것을, 그 예수가 우리가 기다리는 고도라는 것을, 평생토록 깨닫지 못할 게 분명해. 창조주가 존재한다는 일말의 가능성이라도 남아 있는 한, 부모의 원형인 창조주를 섬기는 것은, 천국의 존재 여부를 떠나서, 지적 생명체 인간의 도리라는 것도 깨닫게 됐어. 인간이 도저히 납득할 수 없는 것까지도 신의 높고 깊은 뜻이 있다는 것도...... 그리고 예수가 극한적 고통을 자진해서 받은 것만으로도 인간의 고통을 대신 당해주고 싶어하는 부모와도 같은 마음을 그가 갖고 있다는 것도......
이 : 한데 그 모든 것들은 잘못 맞춘 퍼즐이야, 착각해서 맞춘 것처럼 보일 뿐. 자칭 고도라는 인물이 나타나서 치밀한 해석을 덧붙였지만 이놈의 세상과 원시적 전설 속의 구세주 예수, 뭐 하나 달라진 것은 없거든.
김 : 네 말대로 구세주 예수가 전설 속의 존재였더라면 더 좋았을 텐데, 그가 당한 고통이 너무 극한적이라서. 그랬더라면 그 전설은 신의 뜻을 나타낸 최적의 비유가 됐을 거다.
이 : 그래서 넌 다시는 여기 안 올 거냐?
김 : 넌......?
이 : 와야지, 고도가 올 때까지, 내일도, 모레도, 그 후에도 계속.
김 : 그럼 나도 와야지, 가끔, 널 보러. (사이) 성경을 읽는 동안 내내 몰려오던 졸음이 마지막 페이지를 펼치니까 그제서야 달아나버리더라.
이 : 가자. (무대 밖으로 발걸음을 옮긴다.)
김 : (관객들을 향하여) 그래서인지 다음과 같은 성경의 마지막 구절이 새삼스럽게 기억나는군요. ‘주 예수의 은총이 모든 사람들에게 함께하기를 기원합니다. 아멘.’
김씨, 이씨를 뒤따라간다.
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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