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원 A의 손에 커피가 들려있다. ‘아이스 아메리카노 하나요’라는 말은 현대인의 습관이 되었다. 저녁을 먹을 때는 컵라면을 먹을지, 김치찌개를 먹을지 고민할지 몰라도 커피를 마실 때는 고민이 없다. 사원 A든, 과장 B든, 이사 C든 전부 카페에 가서는 원두를 곱게 간 커피를 선택한다. 고민이 없는 이유는 커피가 채우기 위해서가 아니라 비우기 위해서 존재하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밥을 먹으며 포만감을 느끼고 자신이 이만큼 좋은 음식을 먹을 정도로 돈을 벌었다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커피를 마시는 건 머릿속에 가득 찬 잠을 비우고 뇌를 맑게 하기 위함이다. 따라서 사람들은 고민 없이 커피를 마시며 내가 소유하고 있던 것을 비운다.
사람마다 채움의 속도는 다르지만 비움의 속도는 커피로 인해 전부 같아진다. 그런 의미에서 요즘 사람들이 유독 커피 취향을 따지는 건 색다르게 느껴진다. 커피를 처음 배우는 사람들에게 흔히 하는 말이 있다. ‘먹다 보면 씁쓸함 뒤에 숨어있는 다채로움을 만나게 된다’. 커피를 마시면 비움(empty)의 끝에서 풍부함(plenty)을 만나게 된다. 그러한 풍부함을 얼마나 잘 느낄 수 있는지에 따라 사람들의 커피 취향이 갈린다. 커피를 마시는 목적이 ‘비움’으로 시작했더라도 말이다. 이러한 커피의 맛은 사람들에게 ‘무소유’의 법칙을 알려준다. 무언가를 소유하기 위해서 애쓸 때보다 비울 때 더욱 많이 얻어지는 경우가 있다. 커피를 먹을 때는 입안으로 완전히 머금고 모든 것을 목구멍으로 흘려보낸 다음에야 다채로운 끝맛이 느껴진다. 이렇게 모든 것을 흘려보낼 줄 아는 사람이 커피에 대한 확고한 취향을 갖게 되고, 보다 다양한 커피의 본연의 맛을 더욱 잘 느끼게 된다.
요즘, ‘소유’하고자 하는 욕망이 강해지는 세상에서 ‘비움’의 의미를 알게 되는 것은 중요하다. 비움은 사물의 본질을 알게 되는 것이다. 당장 소유하기 위해서 악착같이 돈을 모으고, 막상 소유하고 나서는 쉽게 질려서 빛이 바래지도록 방치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먼 거리에서 바라보고 오랫동안 향유할 때 사물의 본질은 더 선명하게 드러난다. 사물의 본질을 아는 것은 커피의 본 맛을 알게 되는 것과 같다. 최근 개봉한 영화 ‘그녀가 죽었다’에서는 SNS 인플루언서인 그녀가 소유로 덧칠한 삶을 유지하고자 생명을 함부로 해치기도 하고 남의 물건을 몰래 가져가기도 한다. 정작 그렇게 소유한 것들은 사진 한 장을 찍고 버려진다. 이 영화를 본다면 소유 뒤에 감춰진 진정한 삶이란 무엇인가 생각이 들게 한다.
커피에 취향을 갖게 된다는 것은 본연의 맛을 아는 것이지, 비싼 커피를 향유하는 것이 아니다. 커피를 끝까지 삼킬 줄도 모르면서 루왁커피나 블랙 아이보리 커피를 즐긴다고 자랑하는 것이 과연 의미가 있을까. 그보다는 오늘 커피 한 잔을 뽑아들어 완전히 목구멍으로 넘어가 모든 것이 비워지는 순간을 경험해보자. 완전히 비워지는 순간에 새로운 맛의 향연이 펼쳐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