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에 남은 인간 최초의 흔적, 치평동 유적
350만 년 전 지구상에 등장한 인류 최초의 조상인 구석기인들은 어떤 모습일까? 너무 오랜 시기이다 보니 그들이 남긴 흔적조차 만나기가 결코 쉽지 않다. 그들의 삶은 21세기 현대인에 비해 너무도 단순했을 것임이 분명하지만 절대적인 정보 부족으로 정확한 모습은 그릴 수 없다. 단지 지금까지 확인된 대략의 모습은 다음과 같다.
그들은 동굴이나 강가에 막집을 짓고 살았다. 배가 고프면 뗀석기를 이용하여 사냥을 하거나 나무 열매로 먹을 것을 해결하였다. 아직 계급도 사유재산도 출현하지 않은 원시공동체 사회였다. 불이 발견되면서 원거리 이동이 가능해지고, 익혀 먹게 된다. 시간이 흐르면서 석회암이나 동물의 뿔 등이 사용된 조각 작품이 만들어지기도 했다. 그 흔적을 알려주는 한반도의 대표적인 유적으로는 상원 검은모루 동굴, 연천 전곡리, 공주 석장리 등이 있다.
남도에는 언제부터 구석기인들이 살았을까? 10여 년 전까지도 남도는 구석기인들이 살지 않은 땅이었다. 한반도에서 가장 비옥한 조건을 갖춘 남도에 구석기인들이 살지 않았을 리는 없다. 단지 그 흔적을 오랫동안 찾지 못했을 뿐이었다. 그런데 2006년 판 국사교과서에 남도에도 구석기인들이 살았음을 확인하는 순천 죽내리 유적지가 지도에 실리게 된다.
교과서에 실린 12만 5천 년 전의 순천 죽내리 유적은 하층의 문화층에서 연천 전곡리 유적에서 볼 수 있는 석영과 응회암으로 제작한 대형격지와 주먹도끼, 찌르개, 긁개 등 중기 구석기 시대의 석기류가 발굴된다. 그리고 이어 화순 도산 유적지에서도 석기 제작터와 함께 찍개, 긁개, 톱니날 석기 등이 출토된다. 이들 지층과 유물은 적어도 중기 구석기 시대부터 남도 일원에 구석기인들이 정착했음을 보여준다.
남도에 들어온 구석기인들의 주 정착지는 강가나 하천의 야트막한 언덕이었다. 특히 그들의 생활 터는 하천이 합류하는 낮은 구릉이나 둥글게 휘돌아 섬처럼 이어진 구릉, 그리고 물가에서 얼마간 떨어져 주변을 조망하기에 적당한 곳이나 햇볕이 오래 드는 곳 등에서 확인된다. 이런 생활 터는 수렵이나 어로를 비롯한 각종 생산 활동이 용이한 천혜의 자연 조건을 갖춘 지역으로, 구석기인들에게는 명당이었다. 남도의 젖줄인 영산강과 샛강인 극락강, 황룡강, 지석강 주변과 보성강도 바로 그런 곳이었다.
천혜의 조건을 갖춘 영산강 유역의 구릉상에 구석기인들이 삶의 터전을 마련했음은 당연하다. 실제로 영산강의 중상류 지역에 위치한 광주 첨단지구의 산월동과 상무지구의 치평동, 철도이설 구간인 매월동 등의 구릉상에서 구석기인들이 사용한 여러 점의 뗀석기가 출토된다. 또한, 나주 동강면과 공산면, 산포면 등 영산강 하류 지역에서도 다양한 뗀석기 유물들이 확인되고 있다. 영산강 유역에서 출토된 다수의 유물은 주먹도끼, 긁개, 찍개 등 후기 구석기에 속한 유물이었다. 이는 광주를 비롯한 영산강 유역이 후기 구석기인들의 주 무대였음을 보여준다.
광주 최초의 인간 흔적이 남아 있는 서구 치평동(92~1번지) 유적은 극락강과 그 지류인 광주천 주변의 동남쪽에 형성된 30~40미터의 낮은 구릉지대에 위치한다. 1996년, 조선대학교 박물관의 발굴 조사 결과 9개의 지질층을 갖고 있었고 그 지질층에서 2개의 구석기 문화층이 확인된다.
구석기 1문화층에서는 몸돌 1점, 조각돌로 만든 긁개 2점이, 그리고 구석기 2문화층에서는 몸돌 2점, 격지, 찍개, 여러면석기, 조각돌이 각각 1점 등 지표에서 채집된 유물을 포함하여 총 12점이었다.
이 2개의 문화층 중 구석기 2문화층은 후기 구석기의 늦은 시기에 해당되고, 구석기 1문화층은 이보다 이른 시기로 판단된다. 구석기 1문화층의 연대는 구석기 2문화층에 이르기까지 쌓인 약 3미터에 이르는 퇴적 두께와 그 사이에 적갈색 모래질찰흙층이 있는 점을 고려한다면, 적어도 중기 구석기시대에 속할 가능성도 있다.
광주 치평동 구석기 유적은 영산강 유역에서 발견된 최초의 구석기 유적이라는 점, 제1문화층이 중기 구석기 단계까지 올라갈 수 있는 가능성이 함축되어 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지금 광주의 신도심은 시청이 버티고 있는 상무지구다. 한 때 이곳은 대한민국 군 장교 양성의 요람이기도 했다. 1994년, 상무대가 장성으로 옮겨가면서 지금 전남중학교 주변인 치평동 92~1번지 일대가 구석기인들의 보금자리였음이 밝혀진다. 시굴된 유적은 다시 흙으로 덮어지고, 그리고 그 위로 고층 아파트들이 빼곡히 들어서 있다. 수 만년이 흐르면서 구석기인들의 주거지였던 막집은 이제 21세기의 주거지인 아파트로 변해버렸다. 아파트 빌딩 속에서 수만 전 전의 구석기인들의 막집을 떠올리기는 쉽지 않지만, 치평동 유적은 광주에 남은 인간 최초의 흔적임은 분명하다.
구석기인의 보금자리, 한반도
인류가 언제 출현했는지에 대해서는 몇 가지 학설이 있지만, 대체로 350만 년 전에 아프리카에서 출현했다고 알려져 있다. 한반도에 구석기 시대의 출현은 이보다 훨씬 늦은 70만 년 전이고, 한반도의 남쪽 끝자락에 자리 잡은 광주·전남의 경우는 더 늦다.
인류는 진화 과정에서 직립이 가능해짐에 따라 손을 사용할 수 있게 되자 돌을 깨 석기를 만들어 사용하게 된다. 생산도구였던 석기를 다듬는 기술을 기준으로 구석기 시대는 전기(350만 년 전~12만 5천 년 전), 중기(12만 5천 년 전~4만 년 전), 후기(4만 년 전~1만 년 전)로 나뉜다.
전기는 큰 석기 하나를 여러 용도로 사용했고, 중기는 큰 몸돌에서 떼어낸 돌조각인 격지들을 가지고 잔손질을 해 석기를 만들어 사용했으며, 나중에는 크기도 점점 작아지고 하나의 석기가 하나의 용도만을 가지게 된다. 후기에는 쐐기를 대고 형태가 같은 여러 개의 돌날격지를 만들게 된다.
현재로 한반도 곳곳에서는 구석기 시대의 유적·유물이 계속 발굴 조사되고 있다. 그런데 1960년대 전반 공주 석장리 유적이 발굴 조사되기 전까지 한반도는 구석기 시대의 존재가 인정되지 않았던 적도 있었다. 1935년 함경북도 동관진 유적에서 몇 점의 석기와 동물뼈가 조사되었지만, 한국사의 단계적 발전을 부정하는 일본인 연구자들에 의해 부정되었기 때문이었다. 그 후 1970년대 말 경기도 연천군 전곡리 유적 발굴을 시작으로 광주 치평동 유적까지 한반도 곳곳에서 구석기 시대 유적이 발굴되면서, 한반도는 구석기인들의 삶의 보금자리였음이 확인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