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해안을 따라서 - 도보여행기 (목포→강화) 이찬웅 도보여행은 나의 오래된 호기심, 그러나 잊혀져 있던 꿈이었다. 내가 중, 고등학교에 다니던 1960년대에는 무전여행이 유행이었다. 배낭을 메고 전국을 주유했던 동네 형들이나 선배들의 무용담을 들으면 가슴이 설레었지만, 나에게는 그런 기회도 그럴 용기도 없었다. 그리고 그 꿈은 서서히 잊혀져 갔다. 30년 넘게 근무한 직장을 퇴직하고 나서, 앞으로 내가 하고 싶은 일들을 노트에 정리하는데, 불쑥 도보여행이 튀어나왔다. 내 의식의 밑바닥에서 잠자고 있던, 어렸을 적의 꿈 하나가 기지개를 켜고 일어 난 것이다. 그러나 그때까지도 아직 막연한 생각일 뿐이었다. 구체적으로 생각해보기 시작 한 것은 한비야의 국토종단기와 김훈의 자전거 여행을 읽으면서였다. 그리고 인터넷 카페 '인생길 따라 도보여행'을 통하여 동호인들과 몇 번인가 1박2일 걷기를 하면서 '나도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갖게 되었다. 평소 바다보다는 산을 좋아했던 내가 해안 길을 선택한 것은 아마도 내 고향이 바닷가(목포)이고 내가 해군이었다는 것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산길이나 내륙 길은 아무래도 버겁다는 생각도 작용했다. 해안 길을 걷겠다는 생각을 하니, 자연스럽게 서해안을 선택하게 됐다. 동해안이나 남해안보다 서해안이 훨씬 친근한 이미지로 다가왔기 때문이다. 모든 도로가 해안 길은 아니겠지만, 항상 서해를 바라 볼 수는 있으리라. 서해안을 걸으며 매일 노을을 볼 것이다. 수평선 너머로 툭, 떨어지는 진홍빛 태양을 단 한 번이라도 보고 싶다. 서해의 섬에도 가보고 싶다. 최소한 선유도는 들려야지. 그리고 김제의 넓은 들판도 걸어봐야지. 그 들판은 벼 이삭이 황금빛 춤을 추는 가을이 제격이겠지만, 뭇 생명이 태동하는 봄날도 괜찮을 거다.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뛴다. 2009. 4. 22. (일주일 전) 오늘 처음으로 배낭을 꾸려 봤다. 장기 도보 여행자들의 기록을 보면 하나같이 배낭을 열댓 번은 쌌다 풀었다 했다고 한다. 가져갈까, 말까 망설여지는 것은 가차 없이 빼라고 했다. 심지어 눈썹도 빼놓고 가라 했다. 나도 배낭을 꾸려보니 30리터 배낭은 어림도 없고, 대충 50리터 정도 되는 배낭에 넣으니 꽉 찬다. 무게도 12킬로그램이 넘어간다. 우선 코펠, 바나, 연료를 빼고, 짐을 풀어서 하나하나 다시 따져 보아야겠다. '집 나가서 개고생' 안 하려면. 2009. 4. 27. (이틀 전) 머리를 짧게 깎았다. 35년 전 군대 훈련소 시절 이후 처음으로 머리를 바짝 깎은 것이다. 너무도 어색하여 모자를 쓰고 집에 왔는데, 아내는 더 멋있다며 만져보자고 했다. 여행 중에 머리감기 편하도록 짧게 깎은 건데, 머리 한 복판이 휑하다. 머리를 깎은 또 다른 이유는 더 이상 머뭇거리지 말고, 어서 떠나라는 스스로의 독촉이었다. 2009. 4. 29. 맑음 (첫날) 지금은 도로가 되어버린, 옛날 우리 집이 있던 곳.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살았고, 나와 우리 7남매가 낳고 자란 곳, 목포시 대성동 135번지에서 이번 도보여행은 시작되었다. 전남 무안군 청계면에 있는 초의선사 생가 터의 정자, 용호백로정(蓉湖白鷺亭)은 일품이었다. 정자에 올라서니 풍경소리가 청아하고, 추사의 주련 또한 운치가 있다. 마룻장 틈을 벌려 그 사이로 연못의 물이 보이도록 해 놓은 솜씨는 장인의 여유일 것이다. 팔베개를 하고 마루에 누웠는데 천정에 뭔가가 아른거린다. 아, 연못의 물에 반사된 햇빛이 천정에서 촛불처럼 일렁이고 있었다. 우연일까, 계산된 건축일까? 장인의 천재성이라고 믿고 싶다. 5. 1. 맑은 후 흐리고 비 (3일째) 일찍 잠자리에 들기 때문인지 새벽이면 저절로 눈이 떠진다. 걸으면서 물을 많이 마시기 때문에(하루 약 4리터 정도) 소변이 마려운 탓도 있다. 둘째 아들이 3일간의 연휴를 맞아 아버지와 함께 걷겠다고 서울에서 출발했단다. 전남 함평군 손불면 버스 터미널에서 만나기로 했는데, 예정보다 1시간 정도 늦게 도착할 것 같다고 전화가 왔다. 시간이 남아서 터미널 주변을 어슬렁거리는데 세탁소에 있던 동네 분들이 말을 걸어왔다. "지도 들고 댕기는 것을 보니 땅 보러 댕기는 갑소잉?" "아니요. 목포에서 강화까지 도보여행 중인데, 아들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강화가 으딘디, 참말로 거까정 걸어 갈라요?" 대답대신 등에 매단 깃발을 가리켰다. 깃발에는 ‘서해안을 따라서, 목포→강화’ 라는 글자가 적혀있다. "뭐땀시 그라요?" "다른 사람은 차 타고 여행 다니잖아요. 저는 차대신 걸어 다니는 거죠." "으디가 편찮으시요?" "제가 조금 돌았다는 말씀이신가요?" "워따, 징해라. 뭔말을 고렇게 허시요? 으디가 아퍼서 치료를 할라고 걷느냐니께." 함께 웃고 말았다. 5. 5. 맑음 (7일째) 내 외모가 좀 불량하게 보인 탓인지 (남양군도의 일본군 같은 모습에 손가락 끝만 나온 장갑을 끼고 일주일째 면도를 하지 않았다. 거기다가 선글라스까지 쓰면. 풋!) 나에게 먼저 말을 걸어오는 경우는 흔치 않다. 그러나 내가 먼저 말을 걸면 기다렸다는 듯이 질문을 쏟아낸다. 어디서 왔느냐, 뭐 하는 사람이냐, 며칠 걸렸냐, 왜 걷느냐, 잠은 어디서 자느냐 등등. 심지어는 집사람이 뭐라고 그러더냐고 묻는 사람도 있었다. 전북 고창군 흥덕면의 식당 아주머니도 그랬다. 아침식사를 주문하고 말을 건네자, 이것저것 묻더니, 도보여행 하는 사람들을 여럿 보았다고 했다. 혼자서 전국을 일주 하는 65세 된 할머니도, 70세가 넘어 보이는데 전국을 세 바퀴 째 돌고 있다는 어느 할아버지도 식당에 들렸었다고 했다. 세상에는 알려지지 않은 고수가 많다. 그러니, 항상 겸손 할 일이다. 아주머니 앞에서 내가 걸어 온 길을 자랑이라도 했더라면, 얼마나 가소롭게 생각했겠는가. 그런데 우리 얘기를 옆에서 듣고 있던 손님이 덥석 내 손을 잡으며 "형님, 존경합니다." 그런다. 고향이 강화 교동도 인데 이 근방 건설공사 현장에서 덤프트럭을 운전한다고 했다. 나처럼 도보여행 하는 사람을 처음 본다며 이름도 묻고 전화번호도 물어왔다. 내가 걷는 도보여행의 종착점이 강화라 더욱 감격했던 모양이다. 이런 것이 여행의 작은 재미다. 길을 걷다 쉬고 싶을 때는 길가에 있는 산소가 제일 좋다. 그래서 산소만 보면 쉬었다 가고 싶어진다. 양지 바른 곳인데다 대개 그 옆에는 나무 그늘이 있고 땅에는 잘 손질된 잔디가 깔려있다. 배낭을 내려놓고 양말까지 벗고 봉분에 허리를 기대면 스르르 눈꺼풀이 내려앉는다. 양말을 벗고 바람을 쐬면, 발바닥 속은 화끈거리는데 살갗온도는 내려가니 발바닥이 얼얼해진다. 몸살이 나면, 몸 안의 온도와 피부의 온도 차이 때문에 으스스한 한기가 느껴지는 것과 같다. 그렇게 잠시 졸고 나면 기분이 좋아지고 원기가 회복된다. 묘지에 잠드신 분이 나그네에게 베푸는 음덕이라고나 할까. 다음으로는 동네 입구에 있는 정자가 좋다. 정자 옆에는 아름드리 정자나무가 있는 경우가 많은데, 없어도 괜찮다. 정자에 앉아 쉬고 있노라면 지나가던 어르신들이 신기한 듯 이것저것 물어온다. 그분들하고 이런 저런 얘기를 나누는 것도 여행의 재미 중 하나다. 나도 동네 분들에게 내 갈 길을 한번 더 확인 받고, 때로는 지름길을 소개 받기도 한다. 세 번째는 버스 정류장이다. 시골에는 벽돌로 지어 놓고 비바람을 피할 수 있는 두 평정도의 버스정류장이 있다. 마을 표시도 있고 행선지도 있어서 이정표 역할도 한다. 의자도 있어서 잠시 쉬어가기 좋은 곳이나, 대개 먼지가 많이 쌓여있다. 네 번째는 아무데나 철퍼덕 앉으면 된다. 아스팔트 바닥이나, 풀밭이나. 5. 6. 맑음 (8일째) 휘적휘적. 성큼성큼. 느릿느릿. 어그적어그적. 혼자이니 내 맘대로 걷는다. 왼편에 끼고 걷는 서해가 바닥까지 들여다보인다. 서해가 이리 맑을 수도 있구나. 서해는 항상 개펄에 적신 탁한 바다라는 선입관을 여기서 버려야 했다. 어느덧 해는 기울고 그림자가 오른쪽으로 눕기 시작하자, 배낭을 메고 깃발을 펄럭이며 나를 따라 걷고 있는 어떤 사내가 보였다. 앉으면 따라 앉고 걸으면 따라 걷고. 빨리 가면 빨리 오고 천천히 가면 저도 천천히 온다. 카메라에 담으려는데 녀석이 자꾸 움직인다. 오늘은 하루 종일 그림자하고 놀았다. ㅎㅎ 부안군 채석강에 도착하여 숙소를 정하고 저녁을 먹으러 나갔더니 해가 바다 위에서 벌겋게 상기되어 있다. 석양은 해면에 어리고 모래사장엔 물새 몇 마리 서성인다. 붉은 해는 이제 그 눈부신 광채를 잃고 서서히 수면 아래로 사위어 간다. 우리네 삶도, 밝고 빛나던 젊은 날이 지나면 아름다운 고요의 노년이 오고, 그렇게 조용히 막을 내리는 것이리라. 나의 삶도 어느덧 석양의 문턱에 와 있다. ‘나의 노을도 저렇게 아무런 미련 없이 편안하고 고요하기를…….’ 하늘과 바다가 맛 닿은 곳에서 댕그랑, 종소리라도 울릴 것 같은 서해의 낙조를 바라보며 마음속으로 빌었다. 5. 9. 맑음 (11일 째) 김제시 외곽에 있는 벽골제는 백제 비류왕 때 축조 된 것으로, 우리나라 최대의 고대 저수지라 한다. 벽골은 벼의 골, 즉 벼농사를 짓는 고을이라는 뜻을 이두문자로 표기한 것이라 한다. 벽골이란 이름에서 ‘뼈꼴 빠지다’의 뼈골을 연상했던 내가 스스로 우스웠다. 약 3km 의 제방이 아직까지 남아 있는데, 축조 당시 연인원 32만 명이 동원 된 것으로 추정된다 하니 당시 사회규모로 보면 어마어마한 대 공사였을 것이다. 백제의 문화유산이 대부분 유실된 것을 감안하면, 당시의 수문기둥이 지금까지 남아 있는 것은 기적에 가깝다. 백제 무령왕릉이 도굴되지 않고 발견된 것처럼. 벽골제 건너편에 조정래의 아리랑 문학관이 있었다. 들어가는 입구에 육필로 쓴 원고지가 작은 매듭으로 묶어져 약 3미터 높이로 쌓여 있었다. ‘일제 강점기 36년간 죽어간 민족의 수가 400만, 내가 쓴 200자 원고지 18,000 매의 글자수가 고작 300여 만.’이라는 작가의 탄식에 눈시울이 뜨거워 졌다. 글자 한 자당 한 사람의 희생자라니…. 그는 저 원고 속에 우리 민족의 피와 살과 한을 담았을 것이다. 조정래의 태백산맥은 읽었으나 아리랑은 아직 읽어보지 못했다. 작가에게 송구스런 마음이 들었다. 끝없이 펼쳐지는 징게맹갱 외에밋들(김제만경 넓은 들)을 가로지르며 걷는 기분은 상쾌함, 풍요로움, 그리고 가슴 그득히 차오르는 충만감 바로 그것 이었다. 이곳은 우리나라에서 유일하게 지평선을 볼 수 있는 곳이라 한다. 그러고 보니, 우리나라 풍경화에서 산이 빠진 적이 있던가. 길을 걷다가 멀리서 보니 트랙터로 청보리를 베어 내는 것 같아 익지도 않은 보리를 왜 베는가 물어 봤더니, 청보리가 아니라 ‘이태리안 그라쓰’라는 이름의 목초인데 사료용으로 재배한 것이라 한다. 그리고 덧붙이는 얘기가, 보리도 대부분 곡식용이 아니라 사료용으로 재배한다 한다. 세상 참 많이 변했다. 어린 시절, 보리도 못 먹어 맹물로 배를 채우던 슬픈 이야기는 이제 전설이 되었다. 보리와 목초도 구별 못하는 도시 뜨기가 그들에게 가소롭게 보였음 직하다. 해는 뉘엿뉘엿 저무는데 오늘도 아직 잠자리를 구하지 못했다. 다리는 무겁고 배도 고프다. 어서 쉴 곳을 찾아야 하는데…. 그런데, 어느 순간 눈에 번쩍 띄는 안내판, ‘옥산 찜질방 1.5km’. 도보 여행자는 찜질방을 최고의 잠자리로 친다. 값이 싸다 (5,000~ 8,000원), 식당이 딸려있다, 냉탕온탕이 있다, 경우에 따라 인터넷도 할 수 있다, 등등 잇점이 많기 때문이다. 찜질복을 입고 휴게실 귀퉁이에서 여행일지를 쓰고 있는데, 젊은 아주머니 한 분이 앞에 와 앉는다. "뭘 쓰고 계세요?" "네, 도보 여행 중인데, 여행일지를 쓰고 있습니다." "아니? 사주 보시는 분 아니세요?" ㅎㅎㅎ 희끗희끗한 수염을 달고 조용히 앉아 있으니 도사로 보였나 보다. 5. 11. 바람, 맑은 후 흐리고 밤늦게 비 (13일째) 열 이틀을 걷고 오늘 하루 군산시 선유도에서 휴식시간을 가졌다. 아침에 일어나 빨래를 하면서 그 동안 입고 다녔던 긴 바지도 빨았다. 빨래라야 물에 헹구는 수준이지만, 그래도 땀에 젖은 바지를 처음 빤 것이다. 이순신 장군이 ‘尙有十二 微臣不死’의 장계를 올리고, 명량해전에서 세계 해전사에 빛나는 승리를 거둔 후 이곳 선유도에 와서 열흘 정도 휴식을 취했다고 안내문에 기록되어 있었다. 나도 12일을 걷고 이곳에 와서 휴식을 취하고 있으니, 숫자와 장소가 일치해서 기분이 묘하다. 더구나 나도 해군 출신 아닌가. (ㅋㅋ 내가 너무 오버했나?) 서울에는 비가 많이 온다고 여러 사람들이 문자를 보내왔다. 다들 내일처럼 걱정해 주는 것이다. 혼자가 아니라는 생각에 이번 도보여행을 완수해야 될 책임감 같은 것을 느꼈다. 여기는 아직 쾌청한 날씨. 비는 오지 않으나 바람이 많이 불어 내일 배가 올지 걱정이 되었는데, 민박집 주인아저씨는 "물위로 걸어가는 재주가 없으면 기둘려야지요." 라고 한다. 날씨를 하늘의 뜻으로 알고 살아가는 섬사람 특유의 느긋함 앞에서, 절로 쓴 웃음이 나왔다. 대책이 없으니 걱정은 하나마나 이고, 하나마나 한 걱정은 왜 하고 있는가, 그런 말씀인 것이다. 5. 13. 맑음 (15일째) 어제 내려왔던 아내는 떠나고, 며칠 전 서울에서 내려 온 친구와 둘이서 전형적인 지방국도(617번 도로)를 걸었다. 앞서가던 그가 점심을 먹자고 찾아 든 집은 '木音山房'이라는 카페 분위기가 물씬 풍기는 곳이었다. 백반을 주문하고 집 주위를 둘러보았다. 집의 구조나 창문배치, 황토 벽난로, 긴 의자, 황토를 구워 만든 신경림의 시비, 뜰의 풀숲에 몸을 반쯤 감춘 여인 나상, 나무에 매단 철종 등이 예사 솜씨가 아니다. 우연히 들여다 본 연못에서 커다란 황금빛 잉어를 발견한 느낌이었다. "혹시 미술 전공하셨어요?" "아~니요, 그냥 촌에 사는 사람이에요." 음식도 깔끔하고 맛이 있어서 이번 여행 중에 먹어본 백반 중에서 최고였다. 수줍은 듯 다소곳한 아주머니는 이 집의 주 메뉴가 보신탕이라 했다. 아니, 이 집의 분위기와 아주머니의 모습에서 어떻게 보신탕을 연상 할 수가 있겠는가? 납득하지 못하는 우리의 표정을 보았는지, 이곳 충청도 서천 지방에서는 개고기를 생명의 음식으로 여기기 때문에 부모님 상중에도 보신탕을 먹는다고 설명했다. 그런가?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도저히 어울리지 않는 결합에 고개를 갸웃했다. 보신탕은 좀 시끌시끌한 시장 바닥 같은 집에서 억세게 생긴 아주머니가 입담 섞어서 팔아야 제격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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