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장애인의 노동은 평가절하되는가. 이 물음에서 시작한 인권운동네트워크 바람의 장애인노동권담론모임이 3년간의 연구와 조사를 이어 가고 있다. 올해는 아름다운재단의 지원으로 연구와 조사를 했다. 장애인노동권을 고민하는 담론모임 활동가들은 생산성 중심 평가의 한계를 넘어 담론을 재구성하자고 제안한다. 이들의 주장을 5회에 걸쳐 싣는다.<편집자>
▲정창조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 노동권위원회 간사 “생산성도 떨어지는 장애인들 고용해 줘서 훈련해 주는 것도 감지덕지 아니냐.”
올해 최저임금위원회에서 사용자위원 중 한 명은 노동자위원측의 장애인 최저임금 적용제외 폐지 요구에 이렇게 답했다. 노동자위원들은 물론 장애인운동 활동가들도 즉각 반발하긴 했지만, 사실 이 주장은 꽤 솔직한 것이기도 하다. ‘장애’란 용어가 애초 자본주의 체제에서 ‘임금노동이 불가능한 신체’를 분류하기 위해 발명되고 보편화됐다는 데까지 소급해 갈 것도 없다. ‘장애인은 생산성이 낮다’는 전제는 오늘날 장애인 정책의 가장 기본적인 전제 중 하나이며, 너무나도 당연한 상식으로 여겨지고 있기 때문이다. 조금은 솔직해져 보자. 장애인운동·노동운동 진영은 그동안 이 전제로부터 얼마나 자유로웠던가.
이 인식이 ‘정상 신체’에 대한 효율적 착취에 기반을 둔 현 생산조건 속에서 재생산돼 온 결과는 명확했다. 한국 장애인의 비경제활동인구 비율은 63%에 달한다. 소위 선진국이라고 해서 크게 다를 건 없다. 심지어 한국 장애인 예산은 다른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들에 비해 매우 낮은 수준이기 때문에, 한국 장애인들 상당수는 도무지 빈곤 상태에서 벗어날 가망이 보이지 않는다.
취업한 장애인이라면 상황이 좀 나을까? 꼭 그렇지만도 않다. 이들은 끊임없이 불안정한 일자리로 내몰리고 있으며, 임금은 비장애인 노동자의 75% 수준이다. 심지어 최저임금을 받지 못하는 장애인 노동자의 월평균 임금은 37만원에 불과하며, 장애인 노동자 중 비정규직 비율은 60%에 달하기도 한다. 이는 전체 인구 비정규직 비율 36%에 비해 매우 높은 수준이다.
한편 장애인고용 정책 담당자들은 시장에서 경쟁력이 떨어지는 이들을 ‘보호 고용’의 울타리에 가둬 두고서, 그것이 장애인 노동 문제의 유일한 대안인 것처럼 말해 왔다. 이 영역에는 ‘재활’이라는 이름이 따라붙었는데, 재활은 그것의 ‘따뜻한(?)’ 의도와 별개로 장애인들의 현 상태를 ‘비정상’으로 낙인찍는다. 오직 장애를 극복할 수 있는 자만이 ‘정상적 노동력’으로 거듭날 수 있다. 극복에 실패한 자는 보호를 받아야 하는 존재일 뿐이고, 그래서 노동자성을 부정당한 채 영원히 ‘훈련생’으로 남겨질 뿐이다.
이런 현실 속에서 “장애인도 충분히 생산성을 가지고 있다”며 “장애인을 바라보는 시선을 돌리면 안 보였던 능력이 보입니다”(장애인고용공단 2021년 인쇄매체디자인 수상작) 따위의 말로 자본의 시혜적 고용을 촉구하는 것은 과연 얼마나 효과가 있을 것인가.
문제는 장애인의 몸이 아니라 자본주의적 생산성이다
역사적으로 볼 때 “가진 게 몸밖에 없던” 비장애인의 신체들도 먹고살기 위해 자본주의적 노동에 적응하게 된 것일 뿐 본래부터 임금노동에 적합한 건 아니었다. 하물며 자본이 애초부터 ‘비정상’으로 분류한 신체들이 여기에 적응할 수는 당연히 없는 노릇이다. 실제로 상당수 장애인은 이윤창출 노동에 적합하지 않다. 교육·이동·문화생활에서도 철저히 배제된 결과, 세계와 가장 기본적인 관계조차 맺기 어려운 상황에서 어떻게 자본이 요구하는 표준적 노동규율을 체화할 수 있을까.
문제의 핵심은 ‘장애인은 생산성이 낮다’는 데 있는 게 아니라, 지금 자본주의 체제가 요구하는 ‘노동생산성’ 개념 자체에 있었던 건 아닐까? 장애인을 노동에서 배제하던 기존 생산성 개념을 뒤집는다면, 장애인 노동 문제도 새로운 시각으로 접근해 볼 수 있는 길이 열리진 않을까?
생산성을 평가하는 잣대는 물론 다양하지만, 이 잣대들은 대부분 ‘노동자가 자본의 이윤창출에 기여한 정도’를 측정하기 위해 마련됐다. 그래서 매일같이 놀라운 일이 벌어진다. 실제로는 세계를 위해 아무것도 생산하지 않는 활동도, 생산 과정만 바뀐다면 수행되지 않아도 되는 활동, 혹자의 표현에 따르면 소위 ‘불쉿잡(Bullshit job)’도, 심지어 세계를 파괴하는 활동도 단숨에 ‘생산적 노동’으로 둔갑한다. 이유는 단순하다. 그것이 세계를 파괴하든 말든 자본의 이윤 창출에 기여하기 때문에.
전 세계 경제를 망가뜨리는 데 매 순간 매달려 있는 금융투기자본 노동자들은 왜 생산성이 높다고 평가될까? 기후 재앙을 양산하는, 그래서 인류의 절멸을 매일같이 조금씩 준비해 가는 노동은? 탈세, 부동산 투기 등 ‘생산 없는 이윤’을 창출하는 노동은? 생산 과정이 바뀐다면 사라져도 무방한 문서작성 작업은?
너무 당연한 것이지만, 쉽게 망각되는 사실이 있다. 이윤은 곧 세계가 아니다. 이윤 창출은 세계 생산과 다르다. 시장에서 가격이 붙는 것을 생산한 거라면 어떤 것이든 생산적인 활동이라는 생각, 자본에 고용돼 돈을 벌어다 주는 노동만이 생산적이라는 생각은 이 시대에만 통용될 수 있는 환상이다. 심지어 요즘은 상당수 자유주의 경제학자조차 시민들에게 유용한 생활 조건을 마련해 주는 실제적 부를 생산하지도 못하면서 이와 무관하게 대량의 이윤을 뽑아 내는 것을 ‘비생산적’이라 규정하고 있지 않나.
이제는 그간 ‘정상적’ 임금노동에 포함되지 못했으나, 세계를 끊임없이 재창조하는 다양한 활동에 주목해야 한다. 그 활동들이 임금노동 안에 포함되지 않는다고 해서, 그 활동들이 직접적으로 이윤을 창출하지 못한다고 해서, 노동 바깥으로 내몰릴 이유는 없다. 그리고 이 자본주의적 생산성 개념의 환상을 넘어설 때 비로소 그간 노동에서 배제된 신체들의 활동 역시 재고될 여지가 생긴다.
새로운 노동을 위해
이 세계에 필요한 노동이란 무엇일까? 이에 대답하기 위해서는, 자본이 요구하는 생산성 개념에서 벗어나, 이 세계가 정말로 필요로 하는 것은 무엇인지, 공적 차원에서 요구되는 가치는 무엇인지 사회적 논의가 필요하다. 그리고 정말로 이 사회가 필요로 하는 것들을 생산하는 일자리를 사회적으로 구성해, 노동을 원하지만 실업상태에 놓인 이들에게 우선 제공할 필요가 있다.
서울시·경기도에서 장애인운동계가 투쟁으로 쟁취해 낸 ‘중증장애인맞춤형 권리중심공공일자리’는 이런 차원에서 주목할 만하다. 이 일자리를 통해 단 한 번도 임금노동을 경험해 보지 못한 이들이 ‘이 사회 장애인인권의 현실화’와 ‘누구도 배제되지 않는 지역사회 구성’을 위한 노동을 한다.
이 노동자들은 이윤이 아니라 ‘권리’를 생산한다. 권리란 단순히 발화된다고 실현되는 게 아니기에, 장애인 노동자들은 비장애인 중심으로 구성된 물질적 시공간을 변화시키는 노동을 한다. 중요한 것은 자본이 요구하는 생산성을 체화해야 한다는 요구 없이 스스로의 신체 그대로 존중받으면서 이 노동을 수행한다는 점이다. 즉 이 장애인들은 ‘정상화’될 필요가 없다. 그 신체 그대로 세계의 창조에 참여한다.
그런데 장애인 노동자들의 신체가 이윤을 창출할 수 있는 능력이 없다고 해서, 생산성이 낮은 것인가? 이 노동은 도리어 기존의 ‘파괴적’ 생산성 개념을 타파하고 새로운 생산성 개념을 정립해 가는데 자본이 아니라, 장애인을 포함한 모든 인간을 위한 해방적 노동세계를 정립해 가는 데 중요한 방향을 제시해 주지는 않는가.
자본주의에서 거부당한 몸들은 자본의 기준에 스스로의 몸을 편입시킬 필요가 없다. 도리어 지금은 이렇게 외쳐야 할 때다. “나의 몸이 자본주의를 거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