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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미술 [中國美術]
요약 |
중국에서 발달한 회화·조각·공예 등의 예술. 중국은 50개가 넘는 민족으로 이루어진 다민족국가이며 그 중에서 역사의 주역을 맡은 민족은 한족(漢族)이다. 오늘날 국토의 북변에 있는 만리장성(萬里長城)은 고대농경(古代農耕)의 북쪽 한계선이며 북방의 이민족에 대한 방위선이지만, 과거 수천년에 걸쳐 중국역사는 사실상 남북세력간의 항쟁의 역사라고 할 수 있다. |
내용 |
중국에서 발달한 회화·조각·공예 등의 예술. 중국은 50개가 넘는 민족으로 이루어진 다민족국가이며 그 중에서 역사의 주역을 맡은 민족은 한족(漢族)이다. 오늘날 국토의 북변에 있는 만리장성(萬里長城)은 고대농경(古代農耕)의 북쪽 한계선이며 북방의 이민족에 대한 방위선이지만, 과거 수천년에 걸쳐 중국역사는 사실상 남북세력간의 항쟁의 역사라고 할 수 있다. 중국 북방에서 일어난 강력한 유목민족은 가끔 만리장성을 넘어 남하하거나 때로는 강력한 정복왕조(征服王朝)를 수립하여 원(元)나라와 청(淸)나라처럼 오랫동안 한민족을 지배했던 경우도 있었지만, 그때에도 문화적으로 우위를 차지했던 것은 항상 한족이었다. 그리고 중국문화사에서 중요하게 고찰해야 할 것은 남북관계보다는 오히려 동서관계인데, 인도와 페르시아를 비롯하여 그리스·로마·이집트 등의 서방문화는 중국문화 형성에 큰 영향을 끼쳤다. 가령 중국미술을 화려하게 장식한 것이 비단이라고 가정한다면 종사(縱絲)는 중국고유의 전통미술이고 횡사(橫絲)는 서방에서 전래된 외래미술이라고 할 수 있다. 서방의 영향은 예로부터 많이 있었지만 가장 큰 것은 불교로, 그것을 독자적으로 흡수·발전시킨 힘도 놀랄 만하다. 중국에서 재편성된 불교문화는 주변 여러 나라의 미술에도 결정적인 영향을 끼쳤다. |
1 채도문화(彩陶文化)와 흑도문화(黑陶文化)
중국에서 최초의 예술활동으로서 두드러지게 나타난 것은 채도문화이다. 지금부터 수천년 전 산시성[陝西省]·산시성[山西省]·허난성[河南省] 등 황허강[黃河] 유역에 옮겨 살았던 한족의 조상들은 훌륭한 솜씨로 아름다운 형태의 토기(土器), 채도를 만들어냈다. 표면에 붉은색, 검은색, 흰색 등으로 소용돌이무늬와 물결무늬를 그려 넣어, 손으로 만든 토기이다. 1921년 허난성 ?x츠현 양사오촌[仰韶村]에서 스웨덴 지질학자 J.G. 안데르손에 의해 발견되었기 때문에 양사오문화[仰韶文化]라고 한다. 정교한 간석기[磨製石器]와 함께 회갈색의 시루[甑]·세발솥 등도 출토되어 이미 농업과 목축을 했다는 사실을 추정할 수 있다. 첫 발굴 이후 70여 년이 지난 오늘날에는 자료가 풍부하고 방대해져서 황허강 중·상류에 광범하게 분포된 채도문화는 양사오문화·다원커우[大汶口]문화·마자야오[馬家窯]문화로 발전되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또 1954년 시안시[西安市] 동쪽 교외의 반포촌[半坡村]에서 양사오문화 말기의 것으로 보이는 고대인의 주거지와 무덤의 유적이 발견되었고, 원형과 방형의 건물자리와 농경과 수렵을 위한 생산도구 등이 많이 출토되었다. 유적의 일부는 반포박물관[半坡博物館]에 그대로 보존되어 있는데, 반포에서 출토된 채도는 검은 선으로 물고기와 사람의 얼굴이 그려져 있어, 소박한 분위기의 원시적 회화로서 주목받고 있다. 이 채도에 이어서 나타난 것이 흑도문화이다. 흑도는 칠흑의 가늘고 아름다운 광택을 가진 토기로, 때로는 녹로를 사용해서 얇고 가벼우며 정교하게 만든 것도 있다. 1931년 산둥성[山東省] 지난[濟南]에서 가까운 룽산전[龍山鎭]에서 발견되었기 때문에 룽산문화[龍山文化]라고 하며, 주로 산둥성·허난성·허베이성[河北省] 그리고 랴오둥반도[遼東半島] 등에 분포되어 있다. 흑도는 채도에 비해 형태가 복잡하며 솥처럼 세발[三脚]이 있고, 부리를 몸통으로부터 경사지게 넓혀 잡기 편하게 만드는 등 이미 상당한 고도의 문화가 존재했었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다. 오늘날 은왕조(殷王朝)보다 먼저 있었던 하왕조(夏王朝)의 존재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고 있고 허난성 옌스현[偃師縣]에서 발견된 왕궁터를 하왕조의 옛 터로 보는 학자들도 적지 않다. 흑도의 룽산문화가 하왕조와 어떻게 관련되느냐 하는 것은 앞으로의 연구과제이다. 한편 양쯔강[揚子江] 유역에서 예부터 벼농사를 지었다는 사실을 입증하는 저장성[浙江省] 위야오현[餘姚縣]의 허무두[河姆渡] 유적도 고고학자들의 주목을 받고 있다.
2 은주시대(殷周時代)
룽산문화의 뒤를 이어 황허강을 중심으로 번영을 누렸던 왕조가 은·주왕조(殷周王朝)이며, 이때에는 이미 청동기문화가 고도로 발전하였다. 허난성의 정저우시[鄭州市]가 있는 곳이 은나라 전기의 도읍인데, 한 면이 1.7㎞∼2㎞에 이르는 넓은 성벽이 남아 있고 청동기와 골각기(骨角器)를 만든 공방자리 등이 발견되었다. 또 허난성 안양현(安陽縣) 서쪽 교외의 샤오툰촌[小屯村]에 있는 은허(殷墟)는 은나라 후기의 도읍이었던 곳으로 20세기에 들어와 조직적인 발굴조사가 계속 이어지고 있다. 크게 굽이치는 위안허강[洹河]의 남안에서는 왕궁과 종묘의 터가 발견되었고 많은 갑골단편(甲骨斷片)이 출토되었으며, 위안허강의 북쪽 강가, 허우쟈좡[侯家莊]의 북서쪽 언덕에서는 아자형(亞字形)과 중자형(中字形) 등 평면의 수십 기의 큰 무덤이 발굴되었다. 이 큰 무덤들에서는 수십 구(具)나 되는 순사자(殉死者)와 목이 잘린 희생자들이 나왔고, 왕조의 절대적인 권력을 상징하듯이 거대한 청동기가 다량으로 출토되었다. 최근에 샤오툰촌에서는 중형의 무덤이 완전한 형태로 발견되었으며 <부호(婦好)>라고 새겨져 있는 청동기가 많이 출토되었다. 부호란 제22대 왕 무정(武丁)의 왕비로 추정된다. 주나라가 은나라를 멸망시킨 것은 BC 1028년 무렵으로 주나라는 산시성[陝西省] 치산[岐山]에서 일어나 시안[西安]의 서쪽 교외에 있는 종주(宗周)에 도읍했으나 성왕(成王) 때 뤄양[洛陽] 땅에 성주(成周)라는 도읍을 건설하고 각처에 유력왕족과 공신들을 제후로 봉했다. 주나라의 유적은 랴오닝[遼寧]과 광둥[廣東]을 비롯한 중국 전역에 퍼져 있어서 중앙의 문화가 일찍부터 지방으로 확산되었다는 사실을 증명하고 있다. 은주시대는 청동기문화가 최고조에 달했던 시기로서, 청동기의 형태는 실로 다양했다. 용도별로 본다면 정(鼎)·력·헌(獻) 등은 음식을 삶는 그릇이고, 궤·두(豆)는 음식을 담는 그릇, 존(尊)·유·뇌·호(壺)·부 등은 술을 담는 그릇, 고·치는 술을 마시는 그릇, 작(爵)·가·화 등은 술을 데우는 데 사용하는 그릇, 반(盤)·감(鑑)·우(盂)·이 등은 물을 담는 그릇이다. 은나라 청동기의 명문(銘文)은 겨우 도상문자(圖像文字) 몇 자가 새겨져 있는 정도에 불과하지만, 주나라의 명문은 상당히 긴 문장으로 제작된 유래를 상세히 알 수 있다. 여기에 따르면 청동기는 모두 조상에게 제사를 지내기 위한 것으로서, 제왕과 귀족의 존엄성을 과시하고 명예와 특권이 세습된다는 사실을 강력하게 드러내고 있다. 표면에는 도철문과 훼룡문 등의 괴수 외에도 부엉이나 호랑이, 뱀 등 조수(鳥獸) 무늬를 그렸고, 무늬와 무늬 사이에는 매우 세밀한 소용돌이모양의 번개무늬[雷文]로 채워졌다. 녹청(綠靑)과 적자(赤紫) 등 고색미와 어우러져 독특한 미의 세계를 자아낸다. 또 일반의 생활용구로서 회도(灰陶)라는 조악한 도기가 사용되었고 유약을 칠한 청자계통의 도기도 있다. 특히 은나라에서는 백도(白陶)라고 하는 순백의 고급도기가 눈길을 끌며, 크게 나누어서 채도문화 → 흑도문화 → 백도문화에 이르는 3단계 발전과정이 있었다는 사실이 지층의 층서관계에 의해서 증명되었다. 또 의복은 마(麻) 등의 섬유 외에 모피와 비단도 사용했다. 장신구로는 비녀·빗·목걸이·팔찌 등이 출토되었고 물고기·새 등의 동물 형상을 한 미옥(美玉)도 있었으며, 상감(象嵌)과 칠그림의 기술 등이 이미 높은 수준에 도달하였다.
3 춘추전국시대(春秋戰國時代)
황허강 유역을 중심으로 넓은 범위에 걸쳐서 중국을 지배했던 주왕조(周王朝)는 BC 770년, 본거지였던 종주가 북방의 견융(犬戎)의 침략을 받아 평왕(平王)이 뤄양으로 동천(東遷)함으로써 멸망의 위기에서 벗어났다. 주왕조의 뤄양 동천 이전을 서주(西周), 이후를 동주(東周) 또는 춘추전국시대라고 부른다. 춘추전국시대는 진(晉)나라가 조(趙)·위(魏)·한(韓) 등 세 나라로 분열된 BC 403년을 기점으로 하여 춘추시대와 전국시대로 나뉜다. 서주 말기에 왕조의 쇠퇴와 함께 청동기도 힘을 잃게 되어, 정교했던 무늬가 조잡해졌다. 이런 경향은 춘추시대 전반까지 계속되었고, 춘추시대에 들어서자 출토된 청동기의 대부분이 제후국의 소유물로 바뀌었다. 춘추시대 중기 이후부터 강대해진 제후들의 힘이 반영된 결과 형태와 무늬에 변화가 나타났다. 뚜껑 위에 판상돌기(板狀突起)가 있는 방호(方壺)와 궤는 이 시대 청동기의 한 특징이다. 무늬에서는 도철문 같은 수면(獸面)이 감소되고 그 대신 간략화한 절곡문(竊曲紋)과 구성단위가 축소된 반룡문(蟠龍紋) 그리고 반리문이 주류를 이룬다. 춘추시대 말기부터 전국시대에 걸쳐서 제후국에서 제작된 청동기가 주왕조의 전통을 벗어나, 본래의 예기(禮器)와 제기(祭器)로서의 의미를 상실하고 단순한 보물(寶物)로 여기게 되었기 때문이다. 형태와 무늬도 여러 가지로 변화했는데, 북방 유목민족의 영향을 받은 동물무늬와 양쯔강 유역에서 전통적으로 계승된 기하학무늬 또는 사람들의 생활묘사 등이 얇고 단순한 기형(器形)에 상감기법으로 표현되었다. 1974년 허베이성 핑산현[平山縣] 후퉈허 강가에서 백적인(白狄人)의 소국 중산국(中山國)의 초대왕의 능이 발굴되었으며, 출토된 금은상감용봉방안(金銀象嵌龍鳳方案)과 병풍대좌(屛風臺座) 그리고 운문방호(雲文方壺) 등의 청동기군에서 볼 수 있는 높은 완성도는 청동기예술의 절정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 밖에 동판에 금으로 상감한 이 능묘의 설계도인 조역도(兆域圖)와 약동적인 무늬로 장식된 광택이 있는 흑도기(黑陶器)와 다양한 옥기(玉器) 등이 출토되었다. 이 출토품들 가운데에는 다른 황허강 유역의 전국묘(戰國墓)와 공통점이 있는 것도 있다.
4 진(秦)나라시대
BC 306년 서북 변경의 진나라에 소양왕(昭襄王)이 즉위했다. 소양왕의 증손 진왕(秦王) 정(政)이 시황제(始皇帝)로 즉위한 것이 BC 247년으로, 13세 때이며 그는 즉위와 동시에 리산의 시황제릉(始皇帝陵)을 축조하기 시작했다. BC 221년 진나라가 천하통일을 달성하자 자신의 칭호를 황제라 정하고 도량형·화폐·글씨체·차폭(車幅) 등을 통일시켰다. 이 제도들을 철저하게 시행하고 황제의 위엄을 과시하기 위해 전국을 순수(巡狩)하고, 각지에 통일문자인 전서(篆書)로 각석문(刻石文)을 남겼다. 또 민간에 있는 무기들을 몰수하여 수도 함양(咸陽)에 전부 모아 30t이나 되는 인물상 12개와 종거(鍾據)라는 악기를 주조하게 했다. 북방의 흉노에 대해서는 연(燕)나라와 조(趙)나라가 축조한 북쪽 변방의 장성을 연결하여 1만 수천 리에 이르는 대장성을 쌓았다. BC 212년 웨이수이강[渭水] 남안에 아방궁(阿房宮)을 짓기 시작하였다. 아방궁은 동서가 690m, 남북이 115m의 2층건물로서 윗층에 1만 명이 동시에 앉을 수 있었다고 한다. 이 궁전은 복도가 남북으로 놓여 있어서 남쪽으로는 남산(南山)의 정상까지, 북쪽은 웨이수이강을 건너서 함양궁(咸陽宮)에까지 이르렀다고 한다. 근년에 와서 함양궁에 대한 발굴이 진행되어 몇 마리의 말이 그려진 벽화 조각들이 출토되었다. 리산에서는 1974년 병마용갱(兵馬俑坑)의 발굴이 시작되었다. 이 용갱은 시황제릉의 분구(墳丘)에서 동쪽으로 2㎞ 정도 떨어진 곳에서 3곳이 발견되었고, 갱내에는 능원(陵園) 전체를 바깥쪽에서 수호하는 군단용(軍團俑)이 묻혀 있었다. 출토품은 목제전차(木製戰車) 20량과 도마(陶馬) 100두, 도기마병(陶騎馬兵) 29개, 도무인용(陶武人俑) 1400개, 청동무기 1만여 점, 미출토된 것까지 포함하여 1만 개 이상의 용(俑)이 있다고 한다. 이것들은 모두 등신대(等身大)로서 지극히 사실적으로 만들어졌으며 무기는 모두 실물이다. 이 병마용(兵馬俑)의 정교성과 거대한 규모는 놀랄 만한 것이었지만 겨우 능원의 일부를 차지하는 것일 뿐이다. 이 능은 BC 206년 항우군(項羽軍)에 의해서 파헤쳐졌으며 능원의 내외에서는 용갱 이외에도 수많은 유품과 유적이 계속 발굴되었다. 1980년 분구의 서쪽에서 축척 1/2의 청동제 마차가 2량 발견되었고 그 정교한 주조기술과 아름다운 차개(車蓋)의 형태 등은 보는 사람들을 경탄시켰다. 일찍이 진나라가 미술사에서 차지하는 위치는 불분명한 점이 많지만 시황제릉과 함양궁 등의 발굴로 강력한 사실성(寫實性)이 재인식되어 주목을 받고 있다.
5 한(漢)나라시대
한나라는 전한(前漢, BC 202 ∼AD 8)과 후한(後漢, AD 25∼220)으로 나뉘며(이 중간에 王莽이 나라를 빼앗아 세운 新이 있다), 전한은 산시성[陝西省]의 장안(長安)을, 후한은 뤄양을 수도로 삼았다. 은·주에서 춘추전국시대에 걸쳐 각지에서 성숙된 지방문화는 안정된 통일왕조 밑에서 통합·정리되어 한문화(漢文化)를 형성했다. 이 한문화는 이때부터 중국의 많은 분야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미술사에서도 한대미술(漢代美術)이 가지는 의미는 지극히 크며, <중국 고유의 미술>이라고 하는 경우 한나라 때 형성된 독특한 미술양식을 지칭한다고 보아도 된다. 전한 초기에 한나라는 북쪽 흉노와의 싸움이 잦았으나, 국력이 충실해진 무제(武帝) 때에 흉노를 정복했고 또 특사 장건(張騫)에 의해서 개척된 서역으로 향하는 길은 대원원정(大宛遠征)까지도 가능하게 했다. 이 원정 이후 서방 여러 나라와 교역이 크게 확대되었고 서방의 문물이 많이 유입되었다. 1968년과 72년에 도굴이 안 된 전한의 대형분묘 2기가 발굴되어 세인의 주목을 받았다. 하나는 허베이성 만청현[滿城縣]의 서쪽 교외 링산산[陵山]의 정상에서 발견된 무제의 서형(庶兄) 중산왕(中山王) 유승(劉勝)과 부인 두관의 묘인 애묘(崖墓)이다. 유승과 두관은 현재 발굴된 한나라의 묘 가운데에서 가장 지위가 높은 인물이고, 껴묻거리[副葬品]도 신분에 걸맞게 장신궁등(長信宮燈)과 금상감박산로(金象嵌博山爐), 금은상감조형전서동종(金銀象嵌鳥形篆書銅鐘) 등 정교한 주조와 상감기술을 구사한 화려한 물건 외에 금루옥의(金縷玉衣)가 완전하게 출토되었다. 동루(銅縷)·은루(銀縷)·옥의(玉衣)는 단편이 여러 개 발굴된 것이 있지만 금루옥의의 발견은 처음이다. 또 하나의 대형묘는 후난성 창사[長沙]의 동쪽 교외 마왕두이[馬王堆]에서 발굴된 3기의 수혈식(竪穴式) 목곽묘(木槨墓)로서, 그 가운데 1호무덤은 축조 후에 완전하게 밀봉했기 때문에 보존상태가 좋은 유해가 출토되었다. 껴묻거리의 보존상태도 양호하여 보통은 조각조차 전하기도 어려운 칠기(漆器)·견직물·목제명기(木製明器)·관(棺)·죽간(竹簡)·백서(帛書)·백화(帛畵) 등이 거의 완전한 형태로 다량 출토되었다. 특기할 것은 출토된 4겹으로 된 관 가운데서 제 2 관과 제 3 관에 그려진 칠(漆)그림과 관 위에 놓인 비의(非衣)라고 불리는 백화이다. 제 2 관에는 검은 바탕에 흐르는 듯한 채색운기문(彩色雲氣文)과 그 가운데서 뱀을 가지고 노는 괴신(怪神)과 선인(仙人)이 생생한 모습으로 그려져 있다. 제 3 관은 붉은 바탕에 각 면 가득히 용·호랑이·선산(仙山)의 사슴, 둥근 옥을 꿰뚫은 쌍룡 등이 선명한 색상으로 그려져 있다. 비의는 T자형을 한 2m 정도의 동번(幢幡)과 같은 구조의 백화로서, 좌우의 소매에는 일월쌍룡(日月雙龍) 등을 그렸고 중심선을 따라 위에서부터 여신사미상(女身蛇尾像)과 탁(鐸), 문신(門神), 부엉이, 묘주상(墓主像), 둥근 옥을 꿴 쌍룡, 인면조(人面鳥), 음식상을 올리는 장면, 최하단에는 이것들을 받치고 있는 역사(力士)와 괴어(怪魚)가 그려져 있다. 무엇을 뜻하는지 알 수는 없지만, 초(楚)나라에서 전해 내려온 전설과 신화에서 소재를 얻어 그린 것으로 여겨지며, 당시의 문화 수준과 그림의 수준을 전해주는 귀중한 출토품이다. 은·주 이후의 무덤형식이었던 구덩식[竪穴式] 목곽묘는 시황제릉 이후에 중원(中原)을 중심으로 서서히 바뀌어 전한 말에는 굴식[橫穴式] 지하궁전이 주류를 이루게 되었다. 묘주는 묘실 내를 사후의 생활장소로 생각하여 내부를 지상의 궁전을 본떠서 장식했고 일용품과 가재도구 그리고 식량과 변소까지 껴묻기하였다. 또 벽에는 생전의 생활장면을 그렸다. 전한은 뤄양[洛陽]의 복천추묘(卜千秋墓), 후한은 허베이성 왕두현[望都縣]의 1호한묘(漢墓), 내몽고자치구 허린거일[和林格爾] 한묘, 허난성 미현[密縣] 타호정(打虎亭) 한묘 등이 발굴되어, 이것을 통해서 당시의 회화작품의 단면을 엿볼 수 있다. 그리고 산둥성과 허난성을 중심으로 화상석(畵像石)을 만들었는데, 화상석은 건축용 석재의 표면에 선이나 엷은 부조(浮彫)로 이야기와 전설, 신화 그리고 생활의 단면들을 그린 것으로서 후한 때의 것이 많다. 유명한 것으로 산둥성에서는 이난현[沂南縣]의 석곽, 페이청현[肥城縣]의 샤오탕산[孝堂山] 석실, 자샹현[嘉祥縣]의 무씨사석실(武氏祠石室), 취푸현[曲阜縣] 루청[魯城]의 영광전(靈光殿) 유적, 쓰촨성 취현[渠縣]의 풍환석궐(馮煥石闕), 야안현[雅安縣]의 고이석궐이 있다. 허난성에서는 1960년대에 난양시[南陽市]를 중심으로 많은 화상석묘(畵像石墓)가 발굴되었는데 이것만으로도 난양화상석[南陽畵像石]이라는 한 양식을 형성한다. 난양화상석은 전한의 것으로 확인되었다. 묘의 껴묻거리는 후한시대의 것을 중심으로 한 방대한 양의 토용(土俑)이 출토되었다. 중화인민공화국 이전에 발굴된 용은 대부분 출토된 곳이 불분명하기 때문에 연구하기에 곤란했으나, 그 이후에 출토된 것은 과학적인 조사로 출토지의 분류 및 정확한 연대판정이 가능해졌다. 또 간쑤성[甘肅省] 우웨이현[武威縣] 레이타이[雷臺] 한묘에서는 수 개의 청동용이 출토되었다. 그 가운데서 비연(飛燕)을 탄 말은 특기할 만한 뛰어난 작품이다. 시신의 주변에 놓여 있는 청동거울은 전국시대 이전부터 알려졌는데, 뒷면의 무늬는 이 시대에 와서 더욱 장식화하고, 내행화문경(內行花紋鏡)·사신경(四神鏡)·방격규구경(方格規矩鏡) 등 더욱 다양해졌다. 능묘에 있는 석조조각으로는 무제시대(武帝時代) 장군 곽거병 묘의 거대한 석수(石獸)가 유명하다.
6 남북조시대(南北朝時代)
한(漢)나라가 멸망하자 위(魏)·촉(蜀)·오(吳) 삼국이 정립(鼎立)하여, 위나라는 허난성 뤄양에, 촉나라는 쓰촨성 청두[成都]에, 오나라는 장쑤성[江蘇省] 건업(建業;南京)에 각기 도읍하였다. 위나라는 진(晉)나라로 바뀌어서 AD 280년 삼국을 통일하고 왕조를 세웠지만 이것도 서진(西晉, 265∼316)과 동진(東晉, 317∼420)으로 나뉘어졌으며 서진은 뤄양에, 동진은 장쑤성 건강(建康)에 도읍하였다. 이후부터 송(宋)·제(齊)·양(梁)·진(陳)으로 이어지고 이것을 남조라 하며, 북중국을 통일한 북위(北魏)에서 시작되어 동위(東魏)·서위(西魏)·북제(北齊)·북주(北周)로 이어지는 화베이[華北]의 여러 왕조를 북조라 한다. 한나라가 멸망한 뒤에 북주에서 나온 수(隋)나라가 진나라를 쳐서 전국을 통일하기까지의 약 370년을 위진남북조시대라고 한다. 전한 무제 때에 개척한 서방과의 교역로, 이른바 실크로드를 통해서 불교가 중국에 전래된 것은 전한 말에서 후한에 걸쳐서이다. 당시 인도에서 융성했던 불교가 중국에서는 외래 신흥종교의 하나에 불과하였고, 초기의 불상이 노자(老子)의 상(像) 등과 함께 모셔지기도 하였다는 기록을 보면 불교는 전래된 당초부터 중국 고유의 종교문화 속에 흡수되었고 그 속에서 육성되었다고 할 수 있다. 불상을 모시기 위한 사당과 의식 등은 거의 중국식이 되었으나 불상제작의 본보기가 된 것은 간다라양식의 작은 불상이었다고 추정된다. 후한 말에는 불교 교단이 조직되고 경전도 번역되었지만, 사회생활 속에 본격적으로 뿌리를 내린 것은 남북조에 들어와서부터이다. 한나라 멸망 후에 불교의 중심지는 뤄양에서 동진의 건강으로 옮겨졌으며 동진 말이 되자 조각가 대안도(戴安道)가 불상양식에 큰 변혁을 일으켰다. 그의 불상의 특징은 지극히 중국적이고 한족의 취향에 알맞는 얼굴모습과 과장된 의상에 있었다. 이 변혁으로 건강의 불교미술은 불상을 포함하여 모두 중국식이 되었고 이 때부터 이것이 주류를 이루게 되었다. 한편 고유의 문화가 없던 북위에는 서방으로부터 새로운 불교미술이 흘러 들어왔다. 그것은 당시에 중앙아시아까지 보급된 인도 굽타왕조 미술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서, 불상은 둥근 얼굴에 인상적인 눈 그리고 얇은 옷을 통해서 보이는 과장된 육체가 특징이었다. 이 양식은 이미 양주(凉州)에까지 전해져 있었고, 북위가 북량(北凉)을 합병함과 동시에 도읍 평성(平城)으로 유입되었다. 초기의 둔황석굴[敦煌石窟], 빙링사석굴[炳靈寺石窟], 마이지산석굴[麥積山石窟], 윈강석굴[雲崗石窟] 등은 모두 이 서방양식이 동점(東漸)하는 흐름 속에서 조영(造營)되었다고 할 수 있다. 윈강석굴에는 당시의 불상이 많이 보존되어 있는데, 이 석굴은 북위 불교계의 최고지도자인 북량 출신의 승려 담요(曇曜)가 문성제(文成帝)의 허락을 받아 460년 조영한 석굴사원으로, 초기의 5대굴을 특히 담요 5 굴(曇曜五窟)이라고 한다. 이 다섯 굴의 내부에는 태조(太祖) 이하 다섯 황제를 그렸다는 수십 m의 대상(大像)이 둥글게 조각되어 있다. 그리고 494년 왕조가 뤄양으로 천도하기까지 42곳의 석굴이 조영되었다. 천도 뒤에는 뤄양 교외 룽먼[龍門]에도 석굴사원이 조영되었으나 북위불교의 후원자들은 이 때부터 새로운 미술양식을 선택하였다. 즉 다퉁[大同]을 중심으로 성행했던 북량계(北凉系)의 불교양식을 버리고 남조 건강의 한민족 불교양식을 채택한 것이다. 이 선택은 당시 북위왕조의 모든 분야에서 시행되었던 한화정책(漢化政策)의 일환이라고 할 수 있다. 뤄양에 출현한 불교는 중국불교의 제 1 기황금시대라 할 수 있는 것으로, 남조(南朝)와 제(齊)나라, 양(梁)나라 불교미술의 영향 밑에서 번영을 누렸다. 그러나 건강이나 뤄양에서 번영했던 사찰과 불상들은 곧 전화(戰火)로 불타버렸다. 불교미술 외에는 남조에서의 회화 발전이 특기할 만하다. 동진에서는 고개지(顧愷之)가 나와, 회화는 더욱 고도의 기술과 높은 예술성을 띠게 되었다. 그의 작품은 후대의 모사작(模寫作)인 《여사잠도권(女史箴圖卷)》 《낙신도권(洛神圖卷)》 등으로 전해진다. 4세기 후반 왕희지(王羲之)·왕헌지(王獻之) 부자에 의해 크게 발전한 서예는 회화의 발전에도 공헌하였다. 또한 5세기 초에는 종병(宗炳)과 왕미(王微) 등에 의해서 산수화가 창시되었고, 6세기 중반 무렵까지 회화의 평론기준이라고 할 수 있는 <육법(六法)>이 사혁(謝赫)의 《고화품록(古畵品錄)》에 의해 이론화되었다. 그들은 모두 서예와 문학 그리고 음악에도 능한 문인화가였다. 한편으로는 궁정을 중심으로 송나라의 육탐미(陸探微), 양나라의 장승요(張僧繇) 등 직업화가의 활약도 두드러졌는데, 특히 장승요는 간결한 필치와 음영(陰影)에 의한 입체적 표현법을 사용하여 많은 불화(佛畵)를 그렸고 수·당나라 불교회화의 모범이 되었다. 남북조시대의 회화는 최근까지 전해진 유품이 적어 후대의 문헌에 의해서 추측할 수밖에 없었지만, 1960년대 난징[南京] 교외에서 남조능묘가 발굴되어 많은 전화가 출토되었고, 최근에는 타이위안시 교외에서 북제의 누예묘(婁叡墓)와 허베이성 츠현[磁縣]에서 동위 여여공주묘(茹茹公主墓)가 발굴되어 색상이 선명한 벽화가 세인의 주목을 받았다. 이것들은 모두 남북조미술을 구체적으로 알 수 있는 귀중한 발견이다.
8 오대십국(五代十國)과 송(宋)나라시대
907년 당나라가 멸망하자 오대십국이라고 불리는 전란의 시대가 전개되었다. 오대십국의 분열은 960년에 송나라가 통일을 이루기까지 계속되었다. 또 몽골에서는 당나라가 멸망한 뒤에 거란인[契丹人]이 요(遼)나라를 일으켜 동쪽은 고려, 서쪽으로는 중앙아시아에서 페르시아에 이르기까지 위세를 떨쳤다. 그러나 동북에서 강력한 세력을 가진 여진족(女眞族)이 1115년 송나라와 연합하여, 요나라를 쳐서 금(金)나라를 세웠다. 금나라는 1126년 송나라의 수도 변경[開封]에 난입하여 휘종황제(徽宗皇帝)를 생포함으로써 송나라는 일시에 무너져버렸다. 이때 화를 모면한 강왕(康王)이 난징에서 왕조를 재건하였으며 후에 임안(臨安;杭州)에 도읍했다. 송나라의 카이펑시대[開封時代]를 북송(北宋), 항저우시대[杭州時代]를 남송(南宋)이라고 부른다.
(1) 오대
이 시대는 중원의 혼란을 피해서 각지로 흩어진 당나라 문화의 기수들이 지방의 권력자 밑에서 활동했던 특이한 시대로서, 촉나라에서는 화조화법(花鳥畵法)의 창시자 황전(黃筌)과 인물화가로서 선월대사 관휴(禪月大師貫休)와 석각(石恪) 등이 있었다. 처음으로 화원(畵院)이 만들어졌던 남당(南唐)에서는 인물화의 주문구(周文矩)·고굉중, 산수화의 동원(董源)·거연(巨然), 화조화의 서희(徐熙) 등이 있었다. 또 요나라에서 일어난 불교문화는 중국에서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목조건축물인 허베이성 지현 두러사[獨樂寺] 관음각(觀音閣)과 산문(山門), 산시성[山西省] 다퉁[大同]의 상·하 화옌사[華嚴寺] 등을 남겼다. 현재 하화옌사[下華巖寺]에는 요나라에서 금나라 초기까지의 소상군(塑像群)이 안치되어 있다. 북서쪽의 둔황에서는 조씨일족(曹氏一族)이 안정된 정권을 세웠는데, 그들의 봉헌조영(奉獻造營) 석굴이 많고 제61동(洞)이 최대규모이다.
(2) 송대
송나라는 개성적 자각에 기초한 독자적인 중국 문화가 성숙된 시대이고 미술사상 회화와 도자기의 진전이 특기할 만한 시대였다. 회화는 화원에서 그린 세밀화와 형식을 존중하는 사실주의의 원체화(院體畵), 형식에 구애받지 않고 자유롭게 수묵으로 개성을 표현한 문인화 등의 두 흐름이 있었다. 송나라의 화원은 북송의 휘종(徽宗) 스스로가 직접 화원에서 창작과 지도를 하는 등 큰 발전을 이룩하였다. 북송화원의 초기 산수화가로는 연문귀(燕文貴)·고극명(高克明)·관동(關同)·범관(范寬)·동원(董源)·거연(巨然)·곽희(郭熙)·마분(馬賁) 등이 있다. 화조화에서는 촉나라 출신의 황거채(黃居寀)·황유량(黃惟亮) 등이 색채를 사용하여 훈염(暈染)과 구륵선(鉤勒線)으로 그리는 황씨체(黃氏體)를 확립했고, 서희의 아들 서숭사(徐崇嗣)는 훈염으로만 그리는 서씨체(徐氏體)를 확립했다. 그리고 오원유(吳元瑜)와 그 제자 휘종이 있다. 화원 밖의 산수화가로는 송나라 제일이라는 이성(李成)과 그 계열하의 허도령(許道寧), 소상팔경(瀟湘八景)의 창시자 송적(宋迪), 그리고 고관으로 시·문·서(詩文書)에도 뛰어난 미불·미우인(米友仁) 부자, 호주(湖州)의 태수로서 묵죽화에 능한 문동(文同), 서예가로도 유명한 소식(蘇軾), 묵매도(墨梅圖)의 화광중인(華光仲仁) 그리고 백묘화(白描畵)에는 마화(馬畵)의 이용면(李龍眠) 등이 있다. 화원은 남송으로 옮긴 뒤에도 융성했으며 휘종화원의 화가들은 다시 이곳에서 활동을 시작했다. 그들은 북송의 화풍을 그대로 가져왔으나, 점차 남송화원의 자유로운 분위기 밑에서 독자적으로 활동하는 화가들이 출현했다. 산수화에서는 이당(李唐)·하규(夏珪)·마원(馬遠), 인물화에서는 유종고(劉宗古)·소한신(蘇漢臣), 이숭(李嵩), 백묘화를 재건한 가사고(賈師古), 백묘를 발전시켜서 감필체(減筆體)를 낳은 양해(梁楷), 화조화에서는 사실(寫實)의 이안충(李安忠), 몰골적(沒骨的) 사실의 이적(李迪), 장식성이 강한 어자명(於子明), 농후한 묘선(描線)의 송여지(宋汝志), 철저한 사실의 모송(毛松) 등이 독창적인 양식을 출현시켰다. 그러나 시대가 지남에 따라 화원도 형식주의에 빠졌고 남송 말기에는 오로지 문인화가 성황을 이루었다. 문인들은 수묵의 농담(濃淡)으로 인격표현을 하는 이상주의적 경향을 가졌다. 묵란(墨蘭)의 정사초(鄭思肖), 수선(水仙)의 조맹견(趙孟堅), 화룡(畵龍)의 진용(陳容)이 특이한 솜씨를 발휘하였다. 선승(禪僧)으로는 시호[西湖] 마노사(瑪瑙寺)의 일관자음(日觀子音)과 육통사(六通寺)의 목계(牧谿)·옥간(玉澗) 등 이름있는 여러 승려들이 항저우를 무대로 활동하였고 그들에 의해서 중국수묵화는 절정에 달했다. 송나라의 불교조각은 서방의 영향은 사라지고, 섬세하고 사실적인 성격을 갖게 된다. 북송시대 카이펑에서 성행했던 목각에는 관음상이나 석가상 등 우수한 유물도 있지만, 당나라 때의 장중하고 신성한 취향은 없어지고 대부분 비속해졌으며, 남송 이후에는 수작으로 꼽을 만한 작품이 거의 없었다. 송나라의 도자기는 중국도자기의 완성기이다. 북송에서는 백자(白磁)를 중심으로 만든 허베이성의 정요(定窯), 청자(靑磁)는 저장성[浙江省]의 월주요(越州窯)와 허난성의 여러 주요(州窯)·균요(鈞窯) 등이 중심이었으나 왕조의 남천(南遷)과 함께 항저우 근교에도 용천요(龍泉窯)를 중심으로 제관요(諸官窯)가 생겼다. 장시성 징더전[景德鎭]에서는 영청(影靑)이라는 이름으로 알려진 청백자(靑白磁)를 제작했고, 푸젠성의 건요(建窯)에서는 차(茶)의 유행과 함께 흑유(黑釉)의 찻잔을 만들었다. 이외에도 허베이성 자주요(磁州窯)와 허난성 수무요(修武窯)에서 회고려(繪高麗)라고 불리는, 긁어서 무늬를 그린 서민적인 작품도 만들었다. 송나라 때의 화론에는 황휴복(黃休復)의 《익주명화록(益州名畵錄)》, 곽희(郭熙)·곽사(郭思) 부자의 《임천고치(林泉高致)》, 화축목록(畵軸目錄) 《선화화보(宣和畵譜)》 등이 있다.
9 원(元)나라시대
칭기즈 칸이 이끄는 몽골족은 1227년 중국 북서부에 있었던 서하(西夏)를 멸망시켰고, 그 뒤를 계승한 쿠빌라이는 대도(大都;北京)에 원왕조를 세우고 76년 남송을 멸망시켰다. 원나라는 다른 정복왕조와는 달리 중국의 전통문화에 전혀 무관심했고 문자도 몽골문자와 파스파문자를 사용했으며 지배계층은 오로지 라마교문화에만 관심을 기울였다. 따라서 중국 고유의 문화는 문인, 사대부 그리고 상인 등 일반 백성에 의해 주도되었다. 원나라의 문화는 종실을 중심으로 발전한 라마교문화와 백성을 중심으로 한 복고주의적 서민문화로 이중구조를 형성했다. 라마교문화의 유품에는 거용관과가탑기(居庸關過街塔基)의 부조(浮彫), 항저우와 페이라이펑[飛來峰]의 석조(石彫), 그리고 베이징과 먀오잉사[妙應寺]의 백탑(白塔) 등이 있다. 회화는 원체화가 쇠퇴하고 복고주의적 문인화가 성행했다. 재야문인으로 활약한 전선(錢選)과, 송나라 왕족 출신으로 원왕조를 섬겼으며 복고운동의 지도자였던 조맹부가 있다. 그리고 원말이 되자 그의 뒤를 계승한 4대가가 출현한다. 평원산수(平遠山水)의 황공망(黃公望), 복고주의의 왕몽(王蒙), 재야에서 시화삼매(詩畵三昧)의 생애를 보낸 예찬(倪瓚), 그리고 역학자(易學者)로서 묵죽(墨竹)·묵화에 능한 오진(吳鎭) 등 4명으로, 그들은 동원(董源)·거연(巨然) 등 당말오대의 화가들을 본보기로 삼아 이상적인 자연 속에서 자신들을 표현하려고 하였다. 그들에 의해서 완성된 남종산수화(南宗山水畵)는 명청화단(明淸畵壇)에 큰 영향을 주었다. 이 밖에도 당대에 많은 선승들이 조사상(祖師像)과 선회도(禪會圖)를 그렸는데, 인다라(因陀羅)·무주자(無住子)·일암(一庵) 등이 유명하다. 공예에서는 도자기에 남빛자기와 적색자기가 등장했고, 또 취청유(翠靑釉)와 불랑감(佛郎嵌)이라는 칠보(七寶) 기법 등이 전래되었다. 칠기에서는 칠면에 금박을 칠한 침금(沈金)과 두껍게 칠한 칠면에 조각한 퇴주(堆朱)가 유행했다.
10 명(明)나라시대
한민족이 다시 천하를 통일하여 세운 명(明)나라의 태조 주원장(朱元璋)은 난징을 수도로 삼고 31년 동안 치세했으며, 제3대 성조(成祖)가 즉위하여 베이징으로 천도, 청나라에게 멸망당하기까지 베이징성[北京城]을 수도로 했다. 명나라는 황제의 권력이 가장 강대했던 시대로서, 미술도 권력자의 기호에 맞는 것만이 행해졌다. 화원에서의 회화는 엄격한 제약을 받았기 때문에 개성 있는 창작활동은 불가능했다. 태조(1368∼98) 때의 화원에는 조원(趙原)·심희원(沈希遠)·상례(相禮) 등이, 선종(宣宗, 1426∼35) 때에는 대문진(戴文進)을 중심으로 이재(李在)·주문정(周文靖) 등 절파(浙派)라고 불리는 사람들이 있었다. 절파는 뒤에 오위(吳偉)·장로(張路)·장숭(蔣嵩) 등 재야화가들에게 계승되었고 명나라 말기에는 남영(藍英)·사시신(謝時臣) 등이 맥을 이었다. 또 명나라 중기에는 직업화가였던 구영(仇英)과 시문·서화에 모두 능한 당인(唐寅) 두 사람이 나와서 원파(院派)라고 불렸는데, 특히 구영의 풍속화는 후세의 많은 사람들이 칭송하였다. 명나라 후반이 되자 화단의 중심이 문인들에게로 옮겨지는데 그 단서가 된 사람이 쑤저우[蘇州]의 심주(沈周)와 문징명(文徵明)이었다. 명나라 말기 문인화가 막시룡(莫是龍)과 동기창(董其昌) 등은 원체화를 북종화, 문인화를 남종화라고 하면서 상남폄북론(尙南貶北論)을 주창하여, 저장강[浙江] 출신자가 많았던 화원화가(畵院畵家)를 절파(浙派)라고 하며 비난했고 쑤저우 출신자가 많았던 문인화가를 오파(吳派)라고 하면서 비호했다. 특히 동기창의 영향력이 커서 오파의 우세가 절대적이었다. 공예에서는 징더전관요[景德鎭官窯]의 융성이 특기할 만한 사항이다. 명나라 초기에는 원나라 때부터 시작된 청화(靑花)와 유이홍(釉裏紅)을 계속 만들었지만 15세기 초부터 더욱 우수한 색상이 나타났고 또 형태도 여러 가지의 모양이 나타났다. 중기 이후에는 유약의 정제기술이 진보하여 청화·적회(赤繪)·오채(五彩) 등은 더욱 세련되었고 또 금채(金彩)를 첨가한 금란수(金欄手)도 만들게 되었다. 1955년 이래 베이징 북쪽 교외에 있는 성조 이하 13인의 황제릉 가운데 몇 능에 대한 발굴이 계획되었고, 신종(神宗)의 정릉(定陵)은 발굴을 마친 상태이다. 또 각지에서 왕족들의 묘가 발굴되어 정교한 껴묻거리들을 통해서 당시 공예기술의 수준이 상당히 높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11 청(淸)나라시대
청나라(1616∼1912)는 만주족 출신의 왕조로서 1683년 타이완공략[臺灣攻略]을 끝으로 중국 전토에 대한 지배권을 확립했다. 청나라는 명나라의 제도를 대부분 채용했으며 문화면에서도 중국의 전통문화를 존중하여 한족의 지식인들을 우대했다. 미술도 모든 방면에서 명나라의 양식이 그대로 계승되었다. 회화에서는 명나라 말기에 동기창에 의해서 이루어진 오파남화(吳派南畵)가 계속 화단의 주류였으며 그 전형주의도 함께 계승하였다. 이 파는 왕시민(王時敏)·왕감(王鑑)·왕휘·왕원기(王原祁)·오력(吳歷)·운격 등 이른바 4왕오운으로 대표되었다. 사왕(四王)은 남화의 형식주의로 일관한 데 반하여, 오운 두 사람은 말년에 남화의 매너리즘에서 벗어나 개성적인 그림을 그렸다. 오력은 예수회 입회가, 운격은 몰골법(沒骨法)의 착색화조화(着色花鳥畵)의 제작이 그 전기(轉機)가 되었다. 특히 운격의 양식은 상주파(常州派)를 형성하였고 마원어(馬元馭)·추일계(鄒一桂)·전대흔(錢大昕)·심전(沈詮) 등을 배출했다. 남화는 화원에서 받아들여져서, 남북화를 절충한 원파(袁派)와 이탈리아인 카스틸리오네가 가지고 들어온 서양화법과 함께 청조원체화(淸朝院體畵)를 형성하는 일파가 되었다. 그러나 이 일파들이 모두 발전하지는 못했고 목종(穆宗, 1862∼74년) 무렵부터 급속도로 쇠퇴해갔다. 청나라 초기의 재야에서는 이민족 지배에 저항하고 자신의 비분감을 표현한 팔대산인(八大山人)과 석도(石濤) 등 명조(明朝)와 관계가 있는 화가들이 주목된다. 또 양주에서는 염상(鹽商) 등 대부호들의 후원을 받은 문인과 학자들이 많이 활동했다. 금농(金農)·나빙(羅聘)·정섭(鄭燮)·이방응(李方膺)·왕사신(汪士愼)·고상(高翔)·황신(黃愼)·이선·민정(閔貞)·고봉한(高鳳翰) 등 양주팔괴(揚州八怪)라고 불린 문인화가들은 형식에 구애받지 않고 자신의 개성을 표현한 독창적인 그림을 그렸다. 그들은 특별히 일파를 형성하지도 않았으며 이름조차 일정하지 않았지만 공통적으로 양주를 중심으로 활동했던 재야의 화가들이었다. 왕사신은 수선(水仙)·매, 이방응은 죽·난·매, 정섭은 죽 등, 본래부터 전문가가 아닌 그들은 같은 화제(畵題)를 가지고 그림을 그리는 경우가 많았다. 팔괴의 주관주의적 회화는 항저우의 화암, 함풍(咸豊)의 조지겸(趙之謙), 청나라 말기의 우쥔칭[吳俊卿] 등으로 계승되었다. 명나라 말기에 작업을 중단했던 징더전관요는 청나라에 와서 재건되었고, 1683년 감도관(監陶官) 장응선(藏應選)의 취임 이후 크게 발전했다. 이어서 세종(世宗)·고종(高宗) 때 감도관들의 노력으로 징더전관요는 절정기에 이르렀다.
12 현대의 미술
아편전쟁에서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 탄생까지 100여 년 동안 청나라 문인화의 전통은 조지겸과 임백년(任伯年) 등으로 계승되었고, 신해혁명(辛亥革命) 이후에는 우쥔칭과 치바이스[齊白石] 등에 의해서 그 명맥을 유지해 왔다. 한편 청나라 말기부터 들어온 서양미술도 일정한 영향을 끼쳤는데, 적지 않은 화가들이 근대 서구의 사실적인 눈으로 자연과 인간을 바라보게 되었다. 전화에 쫓겨서 유랑하는 인민의 비참한 모습을 이러한 풍조의 연장선상에서 수묵화의 전통적인 기법으로 그린 장자오훠[蔣兆和]의 《유인도(流人圖, 1940)》가 있다. 1919년 5·4운동을 계기로 미술계에도 혁신의 기운이 감돌았다. 20년대에 문학자 루쉰[魯迅]은 상하이[上海]에서 정력적으로 유럽미술의 소개에 힘썼고 소련과 독일의 판화집(版畵集)을 출판했으며 빈번하게 미술평론을 발표하는 한편, 목각화강습회를 조직하여 많은 청년화가들을 육성하였다. 이 강습회에서 구위안[古元]·리췬[力群]·옌한[彦涵]·왕런펑[汪刃峰]·리화[李樺] 등 훗날 혁명투쟁 속에서 판화를 무기로 하여 활동한 우수한 판화가를 배출했다. 이렇게 중국의 목판화는 혁명투쟁 가운데 독특한 양식을 형성하여, 중국의 미술사에서 일찍이 없었던 조형(造形)을 창조하였으며 오늘날 중국미술을 대표하는 분야의 하나가 되었다. 중국정부 성립 이후 예술은 <인민을 위하여 봉사한다>는 표어로 국화(國畵)·양화·판화·조각 등 미술의 거의 모든 분야가 혁명투쟁과 사회주의 건설을 주제로 하는 계몽적인 작품이 주로 제작되었고, 산수와 화조를 소재로 하는 국화는 한때 저조했다. 1956년 예술과 학술활동의 활성화를 의도한 <백화제방(百花齊放)·백가쟁명(百家爭鳴)>의 방침이 나왔으나 정치상황의 변화에 따라 이 운동은 실질적으로 저지당했으며, 미술계에도 정치적 색채가 강하고 경직된 작품이 범람하였다. 76년 <문화대혁명> 체제가 무너지자 다시 <백화제방·백가쟁명>의 구호가 드높아졌다. 국화 부문에서도 오늘날의 시점에서 중국화의 전통을 재조명하려는 기운이 높아져서 신중국화라고 해야 할 다양한 형태의 풍경화·인물화가 나타나는 추세에 있다. 양화와 판화도 세계의 미술동향에 눈을 돌리기 시작한 화가들에 의해서 시도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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