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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신형자동차, 신형목회, 신형교인>의 줄거리:
"세상의 모든 자동차들이 한 방향으로 달려갈 때, 전혀 새로운 방향의 진화를 시작합니다. 기교가 아닌 기본기에 더 집중한, 자동차의 본질에 가장 가까이 다가간 자동차. run/ turn/stop/ protect" 신형 쏘나타의 광고 문구 중 하나입니다. 본질로의 진화. 두 단어가 모순 되어 보입니다. 누적된 발전의 성과 없이 원점으로의 회귀를 뜻하는 것 같아서 말입니다. 그러나 교회야 말로 이와 같은 신형 목회 신형 교인들이 되어 후퇴 같은 진화를 이루어야 합니다.
신형자동차, 신형목회, 신형교인
(딛1:1~4)
1. 하나님의 종이요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인 나 바울이 사도 된 것은 하나님이 택하신 자들의 믿음과 경건함에 속한 진리의 지식과
2. 영생의 소망을 위함이라 이 영생은 거짓이 없으신 하나님이 영원 전부터 약속하신 것인데
3. 자기 때에 자기의 말씀을 전도로 나타내셨으니 이 전도는 우리 구주 하나님이 명하신 대로 내게 맡기신 것이라
4. 같은 믿음을 따라 나의 참 아들 된 디도에게 편지하노니 하나님 아버지와 그리스도 예수 우리 구주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네게 있을지어다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말씀 중심으로 <신형자동차, 신형목회, 신형교인>이라는 제목의 하나님말씀 증거 합니다.
‘신형자동차, 신형목회, 신형교인’
자동차 광고 중 요새, 새로 모델이 나와서 한참 많이 접할 수 있는 광고가 하나 있습니다.
쏘나타라고 하는 자동차의 광고에요.
이 광고의 내용이 사뭇 철학적인 분위기가 맴 돕니다.
철학적인 분위기가 있다고 해서, 대중과 추상화된 그런 내용이 아니에요.
얼마든지 대중들이 피부로 느낄 수 있는 그런 내용을 아주 철학적으로 담아냈습니다.
그래서 저는, 우연히 보는 게 광고 아닙니까? 근데 일부러 이 광고를 찾아보기까지 했습니다.
내용이 뭐냐 하면, 한 번 읽어볼게요, 여러분 잘 들어 보세요.
“세상의 모든 자동차들이 한 방향으로 달려갈 때, 전혀 새로운 방향의 진화를 시작합니다.
기교가 아닌 기본기에 더 집중한, 자동차의 본질에 가장 가까이 다가간 자동차, Run, Turn Stop, Protect“
이 Run, Turn Stop, Protect, 달리고 돌고 멈추고 보호하는 것, 이것이 자동차의 본질인데, 다른 모든 자동차 회사들의 자동차들이, 달리고 돌고 멈추고 보호하는 이 일보다는 요새는, 기교에 치중을 한다는 겁니다.
근데 자기네는 방향을 거꾸로 돌려서, 자동차의 가장 본질적인 기능인, 달리고 돌고 서고 보호하는 이 본질적 네 가지 요소로 집중적으로 발전을 시도한다, 이런 얘기에요.
그러니까 최상의 달림과 최상의 돔과 최상의 멈춤과 최상의 보호를 위해서 총력을 기울인다, 이런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또 두 번째로 만든 문구는, “100분의 1초를 앞당기는 차보다, 10년 뒤 20년 뒤에도 당신의 마음에서 벗어나지 않는 자동차의 본질에 가장 가까이 다가간 자동차, Run, Turn, Stop, Protect!” 이렇게 나와요.
100분의1초를 앞당기기 위해서 엔진의 성능을 강화시키기 위해서 얼마나 애를 씁니까?
10년 뒤 20년 뒤에도 당신의 마음에서 벗어나지 않는 자동차를 만든다는 거예요.
근데 마음에서 벗어나지 않는 이유가 뭐냐 하면, 아주 자동차의 기본 본질을 10년 20년 뒤에도 잘 수행해 나가는 그런 차를 만들겠다.
참, 이런 거지요.
엠파이어스테이트 빌딩이 102층 아닙니까?
정확하게 언제 지어졌는지 모르지만 수십 년 됐잖아요?
그러면 맨 꼭대기 102층이 제일 고마워할 부분이 어디겠습니까?
101층한테 고맙다고 그러겠어요? 101층이 없으면 자기가 101층 되면 돼요.
그리고 저기 중간에 뭐 50층 56층 두 개 층이 없으면, 자기가 그냥 100층 되면 됩니다.
그러나 기초가 없으면, 기초에서 가장 멀리 떨어져 있는 102층이지만, 102층 자체가 존립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까 102층이 몇 십 년이 지나도 102층 마음속에 기초를 담고 있는 거예요.
바로 밑에 있는 101층을 고마워하고 100층을 고마워하는 게 아니라, 몇 십 년이 지나도록 오직 마음속에는, 처음부터 지금까지 기초에 대해서 고맙게 느끼는 겁니다.
광고 재미있지 않아요, 여러분?
그리고 마지막 문구가 어떻게 구성되어 있느냐?
자동차를 포장하는 모든 형용사와 감탄사를 빼고 빼고 빼고 나면 남는 단 네 개의 동사, Run, Turn, Stop, Protect.
자동차의 본질은 결국 이 네 가지.
하아! 전 아무리 봐도 멋있어요, 저만 그런가요? 저희 집사람은 하나도 멋있는지 모르겠다고 그러더라고요.
저희 아이한테 물어봤더니 저희 아이는, 새로 나온 차가 그냥 멋지다고 그러고.
이거 뭐 대화가 통해야 말을 하지요.
자동차를 포장하는 모든 형용사와 감탄사를 빼고 빼고 빼고 나면 남은 단 네 개의 동사.
이거 너무 신앙적이잖아요 여러분? 무슨 얘기일까요.
젊거나 어린 자녀를 먼저 보내 부모님들을 만나 뵈면 공통된 이야기가 있습니다.
이까짓 집 뭐합니까? 이까짓 재산 해서 뭐합니까? 전부 그거에요.
그리고 뭐라 그러냐 하면, 아프더라도 살아만 있으면 좋겠습니다.
서울대 못 들어가도 대학을 아예 못 들어가도 살아만 있으면 좋겠습니다.
그러니까 자녀들에 대해서 갖고 있었던 그 많은 다양한 소원들을 다 삐고 빼고 빼고 빼고 나면 남는 본질이 뭐냐, 살아만 있으면 좋겠습니다.
세월호 사건을 보니까, 참 참혹해요.
얼마나 마음이 아픈지, 어떤 부모님들이 생겼냐 하면 자식의 시신이라도 찾았으면 좋겠습니다, 라는 바람을 갖는 부모님이 생겼어요.
자식에 대해 ‘시신이라도 찾았으면 좋겠습니다’ 이런 바람을 갖는 부모님이 생겼습니다.
어떤 부모님들은, 하버드대학 들어가라, 연예계에서 예능계에서 체육계에서 1등하는 사람이 되라, 이렇게 가르치고 있고 이렇게 바라고 있는 판에, 시신이라도 건졌으면 좋겠다.
예수님이 재림하실 때 어떨 거 같습니까?
이 세상에서 내가 소망하는 것들 다 빼고 빼고 빼고 빼고 가장 본질적인 것 가지고 예수님을 만나게 될 거에요.
오늘 왜 이 이야기를 하냐 하면, 디도서도 디모데전후서와 마찬가지로 목회서신입니다.
사도바울이 디모데에게도 아들이라고 부르고, 디도에게도 아들이라 불러요.
지금 디도는 그레데라고 하는 지중해 전체 바다에서 네 번째로 큰 섬인데, 그 그레데라고 하는 지역에서 지금 목회를 하고 있습니다.
목회를 하고 있는 디도에게 쓴 편지에요.
그런데, 일반적으로 모든 바울이 쓴 서신 앞에 나타나는 것과 대동소이해 보이는, 1절부터 4절까지의 편지에 서두 말씀이, 이 속에 우리가 모든 신앙과 교회생활과 목회와 교인으로서 이 세상을 살아갈 때에, 관계 되어지는 모든 형용사를 빼고 빼고 빼고 다~ 뺀 다음에, 형용사와 감탄사와 모든 수식을 다 뺀 다음에 남는 신형 자동차에 적용된 네 가지 본질과 마찬가지로, 세 가지 본질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목회서신을 쓰는 이유는, 이 세 가지 본질을 교인들에게 가르치고, 이 세 가지 본질의 원래 가장 근본적인 정신에 가까이 가도록, 교인들의 마음을 발전시키고, 유지시켜 나갈 것이다, 이것에 방해 되는 것은 배척하고 배제할 것이며, 이것에 도움이 되는 것들은 적용할 것이다.
이 내용을 지금 말하고 있는 겁니다.
그러니까 내가 어느 교회의 교인으로 살고 있다고 그러면, 이 본질을 내가 지금 교회생활을 통하여, 함양시키고 있고 유지시키고 발전시키고 있는가, 새로운 방향으로의 진화라고 얘기했는데, 이 본질로의 진화를 이루고 있는가라고 하는 걸 확인하면 되는 것이고, 목회자의 입장이라면, 내가 이 세 가지의 본질을 목회가 지향해야 될 근본 방향으로 설정하고 있는가?
여기에 방해되는 건 다 배제하면 되는 겁니다.
그러면 완벽한 목회가 될 수 있는 거예요.
완벽에 가까워지는, 완벽을 향하여 갈 수 있는 그런 목회가 될 수 있다는 거예요, 이 세 가지 본질에 충실하면.
그러니까 수백 가지의 프로그램을 적용하려고 그러지 않습니까?
자동차들이 이런 기술, 저런 기술 뭐 심지어는 일본에 캠리 자동차는, 앞으로 적용할 기술을 소개하는 그 기사를 읽어 보니까, 뒷좌석에 있는 유리 창문을 통해서 바깥에 들판에 있는 나무가 보이면, 단추를 누르면 그 유리창에 그 나무와 이 자동차와의 거리, 그 나무 있는 지점을 지나가고 있는 자동차와의 속도, 뭐 이런 것까지 다 계산이 되고 나온다는 거예요.
그게 뭐가 그렇게 필요할까요?
하여간 그런 식으로, 교회도 온통 새로운 프로그램을 적용하기 위해서, 아주 몸부림을 치고 있는 모습이 보이지 않습니까? 이게 다 잘못 된 거라는 거예요.
진화의 방향을 바꾸라는 겁니다.
그래서 본질, 지금 사도바울이 말하고 있는 목회에서 염두에 둬야 될 본질적인 세 가지 요소로 집중하라는 거예요.
그러면 그 세 가지 요소가 뭐냐?
결국 사도바울은 이 세 가지 요소를 사람들에게 알리기 위하여 전도하고, 전도라고 하는 것을 위해서 하나님께 위탁 받았다고 얘기하는 것이고, 이 전도의 내용은 이 세 가지 본질적인 요소를 사람들은 받아들이고, 그 받아들인 사람들이 교회가 되고, 그 사람들이 모여서 그 세 가지 본질적인 요소에 점점 더 충실하게끔 양육하고 인도해 가는 게 목회가 되는 겁니다.
그 첫 번째가 1절에 하나님이 택하신 자들의 믿음 그리고 경건함에 속한 진리의 지식과 그리고 영생의 소망입니다.
이 세 가지에요.
빼고 빼고 빼고, 기독교의 모~든 수식어와 묘사와 모든 걸 다 빼고 빼고 빼고 나면 남는 본질, 이것만 있으면 기독교가 될 수 있다고 하는 본질이 이게 바로, 하나님이 택하신 자들의 믿음, 경건함에 속한 진리의 지식, 영생의 소망, 이 세 가지라는 겁니다.
그러면, 이거 뭐 우리가 너무 잘 접하고 있는 그런 얘기인데 뭐 새삼스러울 게 있을까, 이렇게 생각이 듭니까?
아니에요.
하나님이 택하신 자들의 믿음이라고 하는 것은 여러분 뭡니까?
하나님은 왜 사람을 택하십니까?
믿음을 가지라고 택하는 거예요, 그렇지요?
하나님이 날 택하신 것은, 내가 믿음을 가지라고 택하신 것이고, 그러면 그 믿음이 뭡니까? 믿음의 내용이 뭘 말하는 겁니까?
하나님을 택하는 겁니다.
하나님이 나를 택하신 이유는, 나도 하나님을 택하기를 원하셔서, 내가 하나님을 택하는 것이 이게 또 믿음이에요, 이 문맥에서.
그럼 내가 하나님을 택한다는 것이 도대체 무엇일까요?
다윗과 골리앗의 얘기를 다시 한 번 해봅니다.
다윗이 골리앗에게 나갈 때 뭐라고 얘기합니까?
너는 칼과 창과 단창을 의지해서 나에게 나오지만, 나는 물맷돌과 개천에서 구한 다섯 개의 조약돌을 의지해서 나간다, 이렇게 얘기합니까?
골리앗이 갖고 나오는 무기를 얘기했으면, 자기도 무엇을 갖고 나온다는 무기를 얘기해야 되는 거 아닙니까?
손에 쥐고 있는 무기를 얘기하지 않고, 엉뚱하게 ‘여호와 하나님을 의지해서 나간다’ 이렇게 얘기합니다.
이게 선택이라는 거예요.
무슨 얘기냐?
사울 왕은 같은 자리에서 골리앗과 똑같은 걸 선택합니다.
골리앗이 칼과 창과 단창을 갖고 나오는데, 기골이 장대하고 어렸을 때부터 싸움꾼입니다.
그러니까 사울 왕이 바라고 있는 것은, 골리앗을 능가할만한 싸움꾼이 이스라엘에게도 있었으면 하는 것이고, 그런 사람이 없음으로 두려워 떨고 있었습니다.
근데 바울의 선택은 달랐던 거예요, 하나님을 선택합니다.
이걸 우리 생활 속에 적용하면 어떻게 적용이 되느냐?
내가 지금 돈이 없어서 걱정이 듭니다.
그럼 세상 모든 사람들은 이 돈 때문에 생긴 걱정을 어떻게 극복하나 하면, 돈을 많이 벌거나 돈을 누구에게 꾸거나 해가지고 극복하려고 합니다.
근데 하나님에 의해서 선택받은 사람들은, 돈 문제가 생겼을 때 해결을 위해 돈을 선택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 나가서 돈 달라고 하는 것은 여전히 돈을 선택하는 거예요.
돈을 버는 방법이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일 뿐이지요.
그러면 하나님을 선택한다는 건 뭡니까?
돈 때문에 생긴 걱정인데도, 이상하게 하나님을 벌어서 해결하려고 합니다.
돈이 없는 상황은 그대로 유지되고 있어요, 그런데 하나님을 많~이 많이 내 마음에 모셔 들임으로써 하나님 부자가 될 때에, 평강이 주어지고 기쁨과 만족이 주어지면서 돈은 문제가 있는데도 마음에서 문제로 느껴지지 않습니다.
이게 이상한 거예요, 이게.
베드로가 내일 아침이면 목 베어 죽게 됩니다, 내 목숨이 날아갈 것 같은 두려움과 불안과 공포의 시간입니다, 잠을 잘 수가 없지요.
근데 거기서 잠을 잡니다, 왜 그렇습니까? 어떻게 내가 빠져나갈 것인가, 어떻게 내가 이 참수형 당할 수 있는 위기로부터 벗어날 수 있을 것인가라고 하는 것에 대해서, 내 목숨을 어떻게 유지할 것인가를 과제로 삼지 않고, 하나님을 과제로 삼습니다.
어떻게 지금 이 순간에 내가, 하나님을 마음속에 많이 벌어들일 수 있을까, 마음 안으로 가능하면 어떻게 하나님을 많~이 모셔 들일 수 있을까, 이게 하나님 선택한 겁니다.
이건 왜 그렇습니까?
믿음이 있기 때문에, 이 세상에서 내게 주어진 상황이 어떻게 열약하고 힘든 상황 일지라도 내 마음이 평강하고 만족하고 기쁨으로 도달하는 길은, 하나님으로 마음을 채우는 것이지, 내게 주어진 상황에서 느끼는 결핍을 채운다고 해결되는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믿는 겁니다.
하나님만이 나의 진정한 기쁨과 만족과 행복의 근거요 이유가 될 수 있다고 하는 믿음을 가지고 하나님을 선택하는 자들이, 하나님께 선택을 받은 자들입니다.
그러면 그 다음에 나오는 경건함에 속한 진리의 지식은 뭘까요?
그렇게 선택한 하나님, 돈 문제가 있어도 돈으로 해결하지 않고 자식문제가 있어도 자식을 어떻게 인도함으로써 해결 하려고 그러지 않고, 우선은 내 마음이 하나님을 가득 모셔 들임으로써, 하나님만이 내 평강의 이유가 되신다는 것을 믿고 하나님을 선택한 사람들이, 그 다음에 해야 될 일은 진짜 실제로 말로만이 아니라, 영이신 하나님, 하늘에 계신 그 하나님을 아버지로서 만나야 되는 거 아닙니까?
실제 만나야지요.
백날 천 날 말만 하면 뭐해요?
열권짜리 전집으로 조직신학 기독교 교리를 정리해 놓은 책을 쓰면 뭐합니까?
내 마음이 실제로 영이신 하나님 하늘에 계신 하나님을 만나야지요.
하나님이 나를 선택해 주신 것처럼 내가 하나님을 선택했으면, 선택한 그 좋으신 하나님을 최고로 좋으신 그 하나님을 만나야 되는데, 그 만남이 경건입니다.
만나서 이 세상을 사는 상태가 경건이라는 거예요.
살아계신 하나님과 라이브로 연결된 상태로 이 세상을 살아가는 것이 경건인데, 어떻게 하나님을 만납니까?
그게 진리를 통해서 만난다는 거예요.
그 진리를 알아야 된다는 거죠, 그러니까 아는 지식이라 그러죠?
진리가 뭡니까? 예수님의 연쇄사건이에요.
앞으로 봐도 뒤로 봐도, 바울서신 전체를 다 뒤져 봐도, 지금 사도바울이 얘기하고 있는 이 경건함에 이르는 진리, 하나님을 실제로 만난 상태에서 살아가는 이 삶으로 도달할 수 있는 길, 그것은 예수님의 연쇄사건입니다.
육체로 오셔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그 예수님께, 내 마음이 연합을 하는 겁니다.
내 육체와 연합된 내 마음, 그래서 이렇게 연합된 내가 십자가에서 죽으면서, 내 마음이 주님의 몸과 연합해서, 부활할 때 내 마음이 살아나서 하나님을 향하고, 승천할 때 내 마음이 같이 따라가 하나님 아버지 앞에 이를 때, 이 주님의 연쇄사건을 통해서만, 실제로 하나님을 만날 수 있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가 주님을 믿는다는 것은, 하나님이 좋아서만 할 수 있는 얘기라는 거예요.
내 인생고를 해결할 길이 막막하기 때문에 주님을 믿는 게 아닙니다.
내 건강 때문에 주님을 믿는 게 아닙니다.
내 자식 문제 때문에 주님을 믿는 게 아니에요.
하나님이 제일 좋은데, 그 하나님께 도달할 길이 없기 때문에, 주님께 마음을 의탁하고 주님을 믿는 겁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좋아하고, 하나님을 벌어들이고, 하나님이 부자가 될 마음이 없다 그러면, 주님을 믿을 필요가 없어요.
그건 시간 낭비이고 헛된 일입니다.
주님은 오직 하나님께만 가기 위해 필요한 분이십니다.
이게 바로 두 번째 본질이라는 거예요.
교인들이 하나님과 실제로 만나서 직장생활을 하고 있느냐, 하나님과 함께 가정생활을 하고 있느냐, 이걸 중점적으로 목회를 하라는 얘기입니다.
그리고 교인들의 입장에서는, 목사님이 나로 하여금 직장에서 가정에서 돈 많이 버는 방법을 가르치나, 아니면 하나님을 만난 상태로 살아가는 방법을 가르치나를 보라는 거예요.
본질에 가까운 신형자동차처럼 이제는 이 세상에서는 보기 힘들어진 신형목회를 하자는 거예요, 신형교인이 되자는 얘기입니다.
그리고 세 번째는, 영생의 소망입니다.
영생의 소망이라는 게 뭐에요? 흔히 많이 듣던 얘기 아닙니까?
영생의 소망을 우리가 마음에 확인할 수 있는 길은 증거들이 있어요, 증거, 증거를 봐요.
그러니까 영생의 삶을 소망하는 이유가 어떻게 설명될 수 있냐면, 여러분이 한 번 꿈 꿔보세요, 이 세상에서 여러분들에게 일어나야 될 일 중에, 일어나면 가장~ 좋을 일을 한 번 꿈 꿔보세요.
이 일만 일어나면 정말 좋을 그런 일을 한 번 꿈 꿔보세요, 그려 보세요.
뭡니까?
이제 막 장사를 시작하신 분은, 이 가게가 막 불붙듯이 일어나는 거 아니겠습니까?
또 공부하는 학생을 둔 부모님은, 우리 자식 공부 많이 해 가지고 서울대학 철커덕 붙는 거 아니겠습니까?
아니면 고등고시 합격하는 거, 외무교시 합격 하는 거, 하버드대학에 입학하는 거, 이런 거 아니겠습니까?
가장~ 좋은 게 뭐에요, 남편 사업이 잘~되는 거요?
그리고 병이 드신 분들은 병이 나아서 병이 없을 때처럼 자유롭게 활보하는 거 아니겠습니까?
이런 소원이 다 있을 거예요.
세상에서 이루어질 수 있는 소원 중에, 지금 현재 내가 마음속에 이것이 이루어지면 가장~ 좋겠다고 하는 그 소원이 이루어진 상태를, 천국의 삶은 그 좋음을 제로로 만들어 버리는 삶입니다.
연세대학 들어갔다고 막~ 자랑을 해요 사방에.
그래 그동안 소식 끊고 살았던 친지에게 우리 아들이 연세대 들어갔다고 전화를 걸었습니다.
그랬더니, 아 저~ 시골에 있는 친척이 잘됐다고 축하한다고, 그러고 나서 하는 말이 아! 우리 애도 요번에 대학 들어갔어, 그래요.
어디 들어갔어요? 어~ 애가 뭐 그냥 서울대 들어갔어, 이래 버립니다.
연세대학 고려대학 들어갔다고 좋아하고 온데 자랑하다가, 전화기를 방바닥에 내 팽개쳐 버리는 거예요.
이게 바로 천국의 삶입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좋을 것 같아서 그것만 이루어지면 신나하는 거 있지 않습니까?
그 기억을 담고 있다가 주님 재림하시고 천국에 가면, 천국의 삶에 비교하면 그렇게 최고로 좋은 것들이, 다 전화기를 내 팽개칠 기분으로 보게 될 것들이라는 겁니다.
내가 왜 그것을 좋아했던가 싶을 정도로 후회가 될 정도의 일들이라 이거에요.
천국의 삶이 그 정도라는 겁니다.
그렇게 말할 수 있는 증거가 있을까요? 있지요.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이 얼마나 열심이었습니까? 뭐에 열심입니까?
예수님 따라 다닐 때, 요 예수님만 붙들면, 이 능력을 볼 때 나라를 독립시키고 그 분이 나라를 새로 건립할 때에, 우리가 한 자리씩 할 것이다, 목숨을 건 거에요.
이렇게 목숨 걸고 열심히 최선을 다해서, 수제자 세 명 그룹에 들었습니다.
이렇게 살던 사람들이, 변화산에 올라가서 예수님께서 천국에서의 그 영화로운 모습을 회복하자, 그걸 보고 그렇게 열심이고 가장~ 이 세상에서 이루어지면 좋겠다고 생각했던 꿈을 완전히 잊어버립니다, 망각해 버립니다.
그리고 뭐라 그러냐 하면, 여기서 살자고 얘기합니다.
이게 천국의 삶이에요.
스테반 집사님, 여기도 증거가 나타납니다.
돌에 맞아 죽어도 천국을 본 사람은, 돌에 맞아 죽는 게 불행이 아닙니다, 거꾸로에요.
나라 독립해서 장관자리 차는 게 가장 좋은 건데 그것도 잊어버리게 되고, 돌에 맞아 죽는 게 가장 비참한 건데 그것도 의미가 없어지는 거예요.
비참함의 힘이, 마음에 미치질 못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지금, 세상에서 볼 때 비참한 자리에 있습니까?
천국으로 천국의 삶이 주어지게 되면, 그 비참한 건 비참 축에도 못 드는 겁니다.
제일 좋은 걸 얻었습니까, 세상에서?
천국의 삶에 비하면, 그 좋은 건 좋은 축에도 못 드는 거예요.
또 하나 증거를 댈까요?
예수님이 부활하셨습니다, 부활하셔서 제자들에게 나타나시면서, 못 자국을 보라 그러면서 영화로운 변화산의 모습과 다른 모습으로 나타나신 이유가 뭡니까?
예수님의 identity, 십자가에 달리기 전에 그 인격이 바로, 부활한 이 인격이라는 이 인격의 동일성을 제자들에게 확인시켜 주시기 위해서 그 몸으로 나타나십니다.
그런데, 그렇게 나타나신 예수님께서 이제부터 제자들이 원하는 대로, 사도행전에 보면 제자들이 그렇게 물어봐요, 나라를 회복하심이 언제입니까?
이제 예수님은 부활한 몸이시기 때문에 죽일 수도 없는 몸 가지고 이 나라에서 알렉산더처럼, 칭기즈칸처럼, 광개토대왕처럼 해 치워버리면 되지 않습니까? 이 세상에서 이룰 좋을 것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런데 어쩌면, 세상을 졸로 아시고 세상에서 사람들이 그렇게 간절히 원하고 원하는 좋은 모~든 것들을 졸로 아시고, 다 팽개쳐 버리시고 미련도 없이 아버지께로 올라가 버리십니다.
이게 영생의 삶이, 이 세상에서 우리가 생각하는 좋다는 가장~ 좋은 것들이 이루어져서 그 좋음이, 퇴색해 버리고 무색해 질 수밖에 없다는 증거에요.
사도바울이 뭐라 그럽니까?
아그리파 왕이여 날 닮으소서!
당신은 왕이지만 아무 것도 아니라는 거예요, 영생의 소망에서 나오는 얘기입니다.
이 세 가지 본질, 하나님이 날 택하셨기 때문에 나도 하나님을 택한다.
하나님을 택한다는 게 뭐냐? 어떤 상황의 문제, 어떤 이유 때문에 주어지는 것이라도, 내 마음에 걱정과 근심의 이유를, 하나님이 충만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믿는 겁니다.
돈이 없어서 걱정인대도 이건 돈 때문이 아니다, 하나님 때문이다.
자식 때문에 걱정인대도 이건 자식 때문이 아니라, 이건 내가 하나님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내 마음속에.
이렇게 믿는 거, 이게 바로 선민들입니다.
그러면 그 하나님에게 어떻게 도달합니까? 날마다 주님의 십자가와 부활과 승천의 길을 반복해서 걸어가는 겁니다.
내 마음을 뺏길 때마다 십자가에서 그 빼앗아 가는 대상에 대해서 죽고, 하나님을 만나서 살아갑니다.
그럼 어떻게 살아가요?
하나님을 만났을 때, 하나님으로부터 내가 행동해야 될 기찻길이 설비가 되는 거예요.
그렇게 살아가면서 점점 더 소망이 짙어질 때, 점점 더 하나님과의 경건의 생활이 짙어질 때, 우리의 바람은 어떻게 됩니까?
지금이라도 육체를 떠나서, 주님과 함께 거하는 것이 내게 가장~ 유익한 것이다, 라는 걸 알고, 이 세상을 살아가게 되는 신형교인이 되는 것이고, 이런 교인을 모델로 삼고 교인들을 이끌어 가는 게 신형목회가 될 수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한 신형자동차가 지향하는 바처럼, 우리도 신형목회자로서 신형교인들로서 살아갈 수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첫댓글 '고수는 기본을 좋아한다.'
주님이 가신 길을 묵묵히 걸어가며 신형 목회자로, 신형 교인으로 살아 가게 하시니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