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Ⅰ. 석호집선(石壕集選) 해제(解題)
글쓴이/ 문학박사 나천수
저자 : 석호 나해구(石壕 羅海龜, 1581~1660)
서지사항 : 석인본, 1책 29장, 1857년 출간.
소장처 : 나주나씨 석호(石壕)파 후손.
관련지역 : 나주
나해구(羅海龜)의 자는 응주(應疇), 호는 석호(石壕), 본관은 나주이다. 1581년(선조 14) 10월 1일 아버지 임진왜란 의병 운량사(運糧使) 나덕양(羅德讓)과 어머니 함풍이씨(咸豊李氏)와의 사이에서 나주 금계리(錦溪里)에서 태어나 1660년(현종 1) 향년 80세로 졸하여 묘는 나주 보산동(寶山洞)에 있다. 석호공의 가계를 살펴보면 나주나씨 시조 부(富)후 11세 일손(逸孫)은 그의 고조부로 기묘사화 때에 낙향하여 소위 「금강11인 현계(賢禊)」를 조직하여 오늘날까지 후손들에 의해 유지되고 있으며, 증조부 창(昶)은 문과급제 후 세자시강원 필선(弼善)을 역임하였으며, 조부 사음(士愔)은 용양위부호군을 하였고, 부 덕양(德讓)은 임진왜란 때에 의병장 김천일을 도와 운량사(運糧使) 역할로 의병에 가담하였다.
석호공의 사승(師承)관계를 살펴본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아버지 나덕양(羅德讓)은 의병장 김천일(金千鎰)과 출병하면서 어린 자녀인 해구(海龜/당시 11세)와 해봉(海鳳/당시 8세) 형제를 시서 김선(市西 金璇, 1568-1642)에게 맡기고 출병하자, 시서는 자신의 가족과 나덕양의 두 자녀를 데리고 황해도 장연(長淵)으로 피난을 가서, 7년간 장연에서 살면서 피난 중에 해구, 해봉에게 공부를 가르친 인연으로 평생 동안 스승이면서, 친구처럼, 시우(詩友)처럼 지냈다.
24살 때인 1599년(선조 32)에 영광의 수은 강항(睡隱 姜沆, 1567-1618) 문하에 세 종형제〔석호 나해구, 남간 나해봉, 송도 나해륜(松島 羅海崙)〕가 함께 공부를 하였으며, 이때에 수은 선생이 〈나응서 해봉 형제휴주래(羅應瑞 海鳳 兄弟携酒來)〉란 제목으로 석호, 남간 형제 우애하는 모습으로 시를 지어 주자, 석호가 화답한 시를 지었는데, 본 유집 시편 제5에 있다. 아울러 강항선생이 지은 원운시는 시편 제6에 있다. 한편 원운시는 수운집(睡隱集)에도 수록되어 있다.
1609년(광해 1)에 사계 김장생(沙溪 金長生, 1548-1631) 문하에 들어가 형제가 함께 공부 하였다.
다음은 석호공의 과거시험에 대해 살펴본다. 사계선생 문하에서 학문을 연마한 두 형제 중에 동생 해봉은 1606년 진사시에 합격 하였으며, 성균관에 들어가 문과를 준비하고 있었으며, 해구는 1617년(광해 9)에 사마시 향시(鄕試/1차 시험)에 합격하여 서울의 회시(會試/2차 시험)를 치르러 갔는데, 석호공이 당시 광해군의 폐모론(廢母論)에 반대의 입장을 표명한다는 이유로, 이이첨(李爾瞻)의 사주를 받은 시관(試官)이 정거(停擧)의 벌이 내리므로 과장(科場)에서 쫓겨나게 되어, 이후 과거를 폐하게 되었다.
한편 동생 해봉은 34세 때인 1617년(광해9)에 “가을에 별시에 장원하였으나, 정론(正論)을 썼다는 이유로 시관 권진(權縉)이 합격자 명단에서 빼버렸다”라 하여 고배를 마셨고, 41세 때인 1624년(인조2)에 “가을 별시에 합격하다”란 기록과, 46세 때인 1629년(인조9)에 “동당별시에 합격하다”란 기록으로 보아 문과 초시에는 합격하였으나 복시에서 고배를 마신 듯하다. 그러나 해봉은 49세 때인 1632년에 수성금화사별제(修城禁火司別提, 6품)를 제수 받았고, 50세 때에 5품인 별좌(別坐)로 승진하였으나, 당시 정치에 환멸을 느끼고 낙향해 버렸다.
1627년 정묘호란 때에는 사계 김장생 스승이 호소사(號召使)가 되어 해구, 해봉을 불렀는데, 마침 시묘 중에 있어서 동생 해봉을 보내어 스승을 도왔다. 53세인 1633년 지천 최명길(遲川 崔命吉, 1586-1647)이 유일(遺逸)로 승사랑(承仕郞)에 희능참봉(禧陵參奉)에 제수 하였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석호집선 이전에 원래 석호유집이 있었다는 것을 석호의 행록(行錄)에 기록에서 볼 수 있고, 나정일(羅廷一)의 진사공 유고(進士公遺稿) 발문에서도 “이제 현손(玄孫) 학신(學愼)이 유고를 수집하여 송자(宋子)의 5세손〔宋欽書〕에게 발문을 받았으니 지금 영평재(永平宰, 남평 현감)다. 아! 우리 집안이 대대로 유업(儒業)을 지켜 전해 온 문집 유고가 남간집(南磵集) 석호집(石壕集) 계수집(溪叟集) 계재집(溪齋集) 신재집(新齋集)이 있어 족히 일가(一家)의 대전(大全)이 될 만하다.”라는 기록으로도 석호집선 앞에 원래 석호집이란 유집이 있음을 파악할 수 있다.
석호집선을 일별해 보면 총 29장중에 23장이 시 133수이며, 뒷부분 6장이 거의통문(擧義通文) 1편, 제문1편, 기문1편, 합보서(合譜序) 1편, 후손이 쓴 묘지 1편, 후손이 쓴 발문 1편으로 되어 있다.
시문을 나눈 사람을 보면 송시열(宋時烈), 이응시(李應蓍), 임담(林墰), 김선(金璇), 유지경(柳持敬) 등이다. 나해구 62세 때에 병자호란으로 인조가 남한산성에서 항복하고 세자와 청음 김상헌(淸陰 金尙憲, 1570-1652)이 볼모로 잡혀 갔다가 9년 만에 돌아 왔는데, 이와 관련하여 〈신의양황휘신설단통곡작비분시(神毅兩皇諱辰設壇痛哭作悲憤詩)〉를 지었는데, 그 당시 36세인 송시열이 차운하여 지은 시가 『석호집선』에 수록되어 있는 것으로 보면, 상호간에 시찰(詩札)이 오고 간 것으로 보여 지며, 그 배경에는 사계(沙溪)라는 스승의 학맥이 같기 때문이라 여겨진다.
교우인물에 대해 살펴본다. 석호와 남간은 3살 터울의 형제이다. 두 형제간의 우애는 수은 강항선생이 칭찬한 바이고, 문집의 기록을 보면 두 사람은 형제이면서 친구같이, 두 사람이 사귀는 시우(詩友)와 스승이 같다는 점이다. 더더욱 동생 남간이 불행하게도 55세에 일찍 죽게 되자 석호공은 동생을 그리워하는 시를 많이 남겼다. 문집에 나타난 교류인물을 보면 참봉 유평(柳坪), 강백영(姜伯英), 우암 송시열(宋時烈), 청음 김상헌(金尙憲), 임연(林堜), 임담(林墰), 김지립(金持立), 오이건(吳以建), 임평중(林平仲), 유선숙(柳善淑), 水使 유지경(柳持敬), 城主 김효성(金孝誠), 참봉 이지호(李之皓), 홍자거(洪子擧) 등이다.
석호공의 사상과 성향은 시문과 거의통문(擧義通文), 묘지(墓誌)등에서 살펴볼 수 있다.
첫째, 효 정신이다. 석호공의 아버지 통정공이 병이 들자 2년 동안 병수발을 하다가 1618년에 돌아가시자 형제가 함께 3년 시묘살이를 하였다. 오늘날 이 풍습은 완전히 없어졌지만, 당시에는 탈상을 할 때까지인 3년 동안 묘소 근처에 움막을 짓고 산소를 돌보며 좋은 먹 거리로 공양을 드리며 아침저녁으로 문안을 드리는 것이 자식으로서 해야 할 도리였다. 3년 동안 상복만을 입고, 거친 음식으로 연명해야 하였다. 이때에 시서 김선이 시묘 움막에 찾아와, 동쪽 벽에 영모(永慕), 서쪽 벽에 종모(終慕)란 글을 써 붙였다. 그리하여 3년 시묘를 끝낸 것이 1621년인데, 이어서 5년 후인 1626년 어머니 숙부인 이씨가 돌아가시자 또 두 형제가 3년 시묘살이를 하였다. 1627년 정묘호란이 일어나나, 스승 사계 김장생이 호소사가 되어 제자인 두 형제를 불렀는데, 시묘중이라 석호공은 시묘 터를 떠날 수 없어 동생 해봉을 의병으로 보내니 모의사(募義使)로 활동 하였다.
6년을 시묘살이 한 것이다. 또한 시문에서도 부모를 그리워하는 시가 9수가 수록되어 있다.
둘째 형제간 우애 정신이다. 스승 강항도 이를 시로써 드러낸 것이 「나응서 해봉 형제휴주래(羅應瑞 海鳳 兄弟携酒來)」라는 시로 형제간의 우애를 극찬하였다. 두 형제가 함께 시서, 수은, 사계를 스승으로 공부를 하였는데, 과거의 시험으로 보면 동생 해봉이 형 석호공보다 공부를 더 잘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동생 해봉은 1605년에 진사시에 합격을 하고 문과 초시를 1617년, 1624년, 1629년에 모두 합격하였으나 복시에서 실패를 하였다. 그러나 석호공은 소과초시(小科初試)에 합격을 하여 1617년 2차 시험인 회시(會試)를 치르러 마침내 상경하여 과장(科場)에 들어가 첫 번 시험인 시강(試講)에서 “인목대비 폐모론”에 동조하지 않는다 하여 정거(停擧)를 당하였다. 그 억울함을 풀기 위해 수 백수 시를 지었다 하였는데, ≪석호집선≫에는 〈회시(會試)에 정거(停擧)를 당하여 읊다〔會試被停吟〕〉과 〈서선리를 시로써 우연히 읊다〔書仙里詩以寓吟〕〉의 두수의 시가 당시의 상황을 말해 주고 있다.
1632년에 동생 남간은 6품인 수성금화사 별제(別提)로 특채되어 서울에 올라가 1633년에 별좌(別坐)로 승진하였다. 그런데 이때 석호공이 지천 최명길이 유일(遺逸)로 천거하여 승사랑에 희릉참봉에 제수하였으나, 나아가지 않고 사양하면서, 오히려 벼슬 중에 있는 동생 해봉에게 이르기를 “여관방에서 벼슬을 구하는 것이 형제가 남은 여생에서 평화롭고 화락하게 즐기는 것과 같지는 않을 것이다. 뜻밖의 희릉참봉에 명(命)을 받아 비록 축하할 일이긴 하나, 본래부터 명성과 이익에 별다른 생각이 없음을 글로 올렸는데 갑자기 고칠 수 없겠지만, 지난달에 승지(承旨)에게 도리로 보아 사양하였다. 돌아가 별장에 누워 여러 가지 생각을 쉬고 싶구나. 그대 또한 일찌감치 고향으로 돌아가자고 말한다.”라고 하자, 남간(南磵)도 공(公)의 편지를 보고 그날로 벼슬을 그만두고 시골로 돌아갔다. 이 정도로 형제는 마음이 통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동생 남간이 1638년에 세상을 뜨자, 석현마을에 석호 자신이 묻힐 자리를 동생에게 내어주며 장사를 지내며, 〈동생 남간(南磵)이 죽어 울면서 비통시를 짓다〔哭弟南磵喪作悲慟詩〕〉를 짓고, 해마다 동생을 그리워하는 시 10여수를 지었다.
셋째, 올 곧은 충(忠)과 의(義)의 정신이다. 1617년 2차 회시 시험장에서 다만 광해군의 인목대비 폐모론에 동조했다면 무난히 합격하였을 것이다. 광해군으로 보면 아버지 선조왕의 두 번째 부인인 인목대비도 비록 계모이지만 자식의 입장인 광해군이 어머니를 폐위한다는 것은 옳지 않다고 동조하지 않은 올곧은 선비정신을 가지고 있었다. 과거 시험을 보지 못할지언정 옳지 않은 일에 동의하지 않는다는 것 때문에, 결국 정거(停擧)가 되고, 과거 시험장에서 쫓겨나게 된 것이다. 또한 1624년 이괄의 날 때에도 동생 남간을 의병으로 보내고, 모곡(募穀)의 계책을 논의하였으며, 1627년 정묘호란 때에는 시묘살이 중이라 동생 남간만 의병에 내보냈으며, 1636년 병자호란 때에는 거의통문(擧義通文)을 돌렸다.
넷째, ≪석호집선≫의 사료적 가치를 살펴본다. 1857년(철종 8)에 석호공의 6세손 학경(學敬)이 쓴 묘지(墓誌)를 보면 “석호정(石壕亭)이 화재가 나는 날에 한 치 묵(墨)과 한 자 글자도 불에 타 잿더미가 되었으니, 전할 것이 없어져 훌쩍 훌쩍 울며 애통해 하였다. 왕고(王考/돌아가신 할아버지)께는 불초하지만, 각각의 집에 수창(酬唱)한 시(詩) 약간을 수습하였으나, 오히려 책을 만들지 못하고 있던 중에, 나이로 족형(族兄)이 되는 학중(學中)씨가, 널리 찾고 널리 수집하여, 겨우 한권의 책을 만들어서, 출판하는 날이 있기를 기다렸는데, 어느 곳에서 틈이 날지 알지 못하고 증거도 없었다. ”라 한 것으로 보아, 석호정에 불이 난 것은 학경의 왕고 즉 석호공의 고손자 정윤(廷尹, 1753-1801)의 때 일 것으로 추정 된다. 그전에 행록에서 여러 번 언급된 ≪석호집≫이 있었을 것인데 석호정사가 불이 나서 모든 자료가 불타 버려 훗날 찾아낸 자료를 모아 이를 ≪석호집선≫이라 하여 발간한 듯하다. 비록 이러한 유집이지만 대략 400여 년 전의 그 당시를 엿볼 수 있는 기록이기에 사료적 가치가 있다고 본다. 특히 나주나씨 문중 차원에서 보면 시조 후 9세 자강(自康)공이 태종조에 문과 급제 후 무안현감을 역임하면서 잠시 나주목사를 직무대행 하면서 나주 서수구내에 산수청려함을 보고 가기(家基)로 정하였다는 족보 기록과 석호공 묘갈명에 석호, 남간 형제가 서수구 내의 금계리(錦溪里/해방 후 금계동으로 바뀜)에 태어났다는 기록으로 보아 비단같은 냇물이 흐르는 금계리 이곳이 나주나씨 종가터로 약 600여년이 되었음을 알 수 있게 하는 귀중한 자료라고 본다.
한편 금회 ≪석호집선≫ 역주 번역하면서 타문집에 수록된 석호공 관련 글을 모았다. 그런데 송덕상(宋德相,1710-1783)의 문집인 과암집(果菴集)에 실린 〈석호나공묘갈명 병서〔石壕羅公墓碣銘幷序〕〉에 보면 “마침내 과거 공부를 폐하고 석호강(石壕江) 위에 작은 정자를 지어 서울 생활의 자취를 지우고 한가로이 놀면서 죽고자 했다.”란 기록으로 보아 석호란 호를 영산강의 지류인 석호강(오늘날 장성천)에서 따온 것을 알 수 있으며, 또한 석호공의 유년 스승이었던 시서 김선의 문집인 ≪시서유집≫에 〈돌고개 마을의 응주를 추억하며〔憶應疇石嶺〕〉란 제목으로 “鱸魚灘北石村幽(로어탄북석촌유) /농어가 헤엄치는 여울 북쪽 석현 마을은 그윽한데”란 구절로 보아, 400여 년 전의 석호강은 밀물 때에 바닷물이 올라 왔음을 농어로써 짐작할 수 있다. 이를 근거로 고려시대에 시조 부(富)가 탄 배가 여황(艅艎)에 정박할 수 있었음을 간파할 수 있고, 시조의 동도(東渡) 루트, 고려 정착으로 최초 여황에 터를 잡은 수수께끼를 푸는 열쇄가 된다. 그래서 사료적 가치가 있다고 하는 것이다.
한편 당시의 숭명배금(崇明排金) 사상을 엿볼 수 있다. 조선에서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명나라 신종(神宗)과 의종(毅宗) 두 황제가 조선에 구원병을 파병하였다. 이로 인해 우리나라는 대보단(大報壇)의 제단을 만들어 신종과 의종을 제사 지내게 되었다. 그런데 지방인 나주에서 성주동(聖主洞/오늘날 금성산)에 단을 설치하여 제사 지낸 기록이 〈성주동기(聖主洞記)〉에 있다. 석호공은 이 사상이 더욱 깊었다. 80세 죽음에 임박하여 유언하기를 “내가 죽은 후에 관명(官名)을 쓰지 말고, 명(明)나라 황제의 유민 석호처사(遺民 石壕處士)라 나무로 만든 위판(位板)에 쓰고, 평소의 내 뜻에 저버리지 말라”하는 정도였다. 묘지는 나주 장흥동 도선산 동편의 함성록(咸城麓)에 있다. 우리나라가 중국 연호를 인용하여 쓰면서 청나라가 지배하게 되자, 청나라 연호를 쓰지 않기 위해 명나라 마지막 연호인 숭정(崇禎)을 지키고자, 숭정기원후〇〇간지를 넣은 이유도 여기에 있다.
2015년도에 ≪석호집선(石壕集選)≫의 발견과 동시에 석호공의 후손인 나학경(羅學敬)의 ≪금촌유고(錦村遺稿)≫, 나영집(羅英集)의 ≪소백유고(小栢遺稿)≫, 나병관(羅炳觀)의 ≪유재사고(裕齋私稿)≫가 발견 된 것을 쾌거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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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김선(市西 金璇, 1568-1642)에게 맡기고 출병하자, 시서는 자신의 가족과 나덕양의 두 자녀를 데리고 황해도 장연(長淵)으로 피난을 가서, 7년간 장연에서 살면서 피난 중에 해구, 해봉에게 공부를 가르친 인연으로 평생 동안 스승이면서, 친구처럼, 시우(詩友)처럼 지냈다. "
(어머니와 해학 4식구)
이건 알고 있었지만 두 형제만 나타냈음.
좋은 정보 배우고갑니다
감사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