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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효란 무엇일까요?
가. 효의 정의
이 세상에 부모 없이 태어난 사람은 없습니다. 부모는 자녀를 위해서 모든 것을 희생하며 사랑을 베풀어주는 분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낳아주고 길러주신 부모님의 은혜는 하늘보다 높고 바다보다 깊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효’란 나를 낳아주고 길러 주신 부모님을 위하여 자식으로서 마땅히 해야 할 도리입니다.
그런데 자식은 부모님의 은혜를 잘 알지 못합니다. 내가 어떻게 이 세상에 태어났는지, 그리고 부모님께서 나를 어떻게 키워주셨는지 잘 생각하지 않습니다. 자식이 아프면 부모님은 밤잠을 설치며 정성을 다해 간호하고 보살핍니다. 어떠한 대가를 바라지 않고 오로지 자식에 대한 사랑을 보여줍니다. 그런데 과연 자식들은 부모님께서 편찮으실 때 어떻게 하고 있습니까. 사람은 누구나 부모를 사랑하는 마음은 가지고 있답니다. 자식 된 도리를 사랑으로 실천하는 것이 ‘효도’랍니다.
우리는 흔히 효도를 어려운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효도는 어렵고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가깝고 쉬운 데에 있습니다. 부모님께 항상 감사하고 존경하는 마음을 가지는 것이 진정한 효도의 출발입니다.
나. 효의 종류
효에는 여러 가지 종류가 있지만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습니다.
첫째는 부모님의 마음을 편안하게 해드리고 부모님의 뜻을 받드는 효도입니다. 이것을 양지(養志)의 효도라고 합니다. 둘째는 부모님의 몸을 편안하게 하고 부족함이 없도록 해드리는 양구체(養口體)의 효도입니다. 양구체란 부모님의 몸을 물질적으로 봉양하는 것으로 부모님을 육체적으로 편안하게 해드리는 효도입니다.
부모님의 마음을 편안하게 해드리는 것 못지않게 부모님의 몸을 편안하게 해드리는 효도 역시 중요합니다. 하지만 어느 것이 더 중요하냐고 묻는 다면 그것은 바로 부모님의 뜻을 받드는 양지의 효도입니다.
다. 효를 실천하기 위한 원칙
첫째, 내 몸을 건강하게 유지하는 것이 효의 시작입니다. 사람은 부모로부터 몸을 받아 태어납니다. 그래서 “효경”이라는 책에서는 “내 몸은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것이므로 감히 다치거나 상하게 하지 않는 것이 효도의 시작이다.”라고 했습니다. 부모님께서 자신보다 자녀들의 몸을 더 소중하게 생각하고 계신다는 것을 안다면 몸을 함부로 다루거나 다치게 해서는 안 됩니다.
둘째, 부모님의 마음과 몸을 편안하게 해 드리는 것입니다. 부모님께서 일어나도록 깨우거나 공부하라는 말을 하지 않아도 스스로 알아서 자기가 할 일을 충실하게 하는 것이 부모의 마음을 편안하게 해드리는 효도입니다. 부모님의 마음을 편안하게 해드리는 것과 마찬가지로 부모님의 몸도 편안하게 해드려야 합니다. 부모님은 연세가 많아 그만큼 몸이 쇠약하고 앞으로 사실 날도 자녀 보다 많지 않기 때문입니다. 부모님의 마음과 몸을 편안하게 해드리는 방법은 누구나 알 수 있습니다.
셋째, 훌륭한 인물이 되어야 합니다. 효도의 시작은 내 몸을 건강하게 잘 간직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효도의 끝은 어디일가요? 그것은 바로 세상에서 아름다운 이름을 남기는 것입니다. 공부를 잘 해서 이름을 남기는 사람도 있고, 운동을 잘 해서 이름을 남기는 사람도 있으며, 남을 위해 봉사하고 실천하며 이름이 알려지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 사회에 반드시 필요한 일꾼이 되도록 노력한다면 모두 훌륭한 인물이 될 수 있습니다.
라. 효의 작은 실천
아주 작은 것부터 하나씩 실천하면 누구나 효자 효녀가 될 수 있습니다. 아래 사항들을 읽은 다음 현재 실천하고 있는 것과 아직 실천하지 못하고 있는 것을 구별해봅시다
* 부모님의 연세와 고향, 일가친척, 건강상태, 좋아하시는 것 등 을 알아 둡시다.
* 항상 부모님께 감사의 마음을 표현하도록 노력합시다.
* 부모님의 의견을 존중하고 따르도록 해야 합니다.
* 책임감을 가지고 자신의 일을 처리해야 합니다.
* 부모님께서 부르시면 큰 소리로 대답하고 즉시 달려가야 합니다.
* 부모님께서 편찮으시면 정성껏 간호해야 합니다.
* 컴퓨터 사용 시간을 줄이고 스스로 공부하도록 합시다.
* 친구와 놀면서 부모님께 걱정을 끼치지 않아야 합니다.
* 밤에는 부모님의 잠자리를 펴드리고 아침에는 먼저 일어나 부모님께 문안 인사를 해봅시다.
* 외출할 때는 반드시 가는 곳을 미리 말씀드리고, 다녀와서는 얼굴을 뵙고 다녀왔다는 인사를 합시다.
* 부모님께서 외출하실 때에는 자리에서 일어나 인사를 합시다.
* 부모님과 함께 식사를 할 때는 부모님께서 수저를 든 다음에 먹기 시작해야 합니다. * 식사를 마친 뒤에는 부모님 을 도와 뒷정리와 설거지를 합니다.
* 부모님께서 집안일을 할 때 는 작은 것이라도 거들어야 합니다.
* 맛있는 음식이 있으면 부모 님께 먼저 드시도록 합시다.
* 중요한 일은 항상 부모님께 말씀 드리고 상의한 뒤에 결정해야 합 니다.
* 부모님 앞에서는 형제자매와 다투지 않아야 합니다.
☞ 부모님께 이렇게 말하면 어떨까요?
* 저를 키워주셔서 정말 고맙습니다.
* 오늘도 힘드셨죠? 제가 어깨 주물러 드릴께요.
* 어머니께서 해주신 음식은 정말 맛있어요.
* 제가 효도 많이 할께요. 오래 오래 사세요.
* 편찮으신데 없으세요?
* 모두 부모님 덕분입니다.
* 열심히 공부해서 훌륭한 사람이 되겠습니다.
* 앞으로 제방은 제가 청소하겠습니다.
* 저 때문에 고민 많으시죠? 앞으로 잘 하겠습니다.
☞ 인간의 다섯 가지 도리 오륜(五倫)
사람이 살아가면서 만나는 많은 사람들과 서로 지켜야 하는 도리가 있는데 그것을 오륜이라 했습니다. 다섯 가지 도리라는 뜻입니다. 이제 다섯 가지 인간의 도리를 배우고 생각해봅시다.
* 부자유친(父子有親) : 부모와 자식사이에는 친함이 있어야 한다. 부모는 자식을 사랑하고, 자식은 부모를 존경하는 것입니다.
* 군신유의(君臣有義) : 임금과 신하 사이에는 의리가 있어야 합니 다. 오늘날은 임금과 신하가 없기 때문에 국가가 국민으로 생각하면 좋겠습니다. 국 가는 국민을 위해 존재하고 국민은 국가를 위해 봉사해야 합니다.
* 부부유별(夫婦有別) : 부부 사이에는 서로 구별되어야 합니다. 남 성과 여성의 역할이 조금 다른 것처럼 부부 사이에도 서로의 역할을 잘 구별해서 서로 존중해야 합니다.
* 장유유서(長幼有序) : 어른과 아이 사이에는 차례가 있어야 합니 다. 어른은 어린 사람을 잘 보살피고 어린 사람은 어른을 존경해야 합니다.
* 붕우유신(朋友有信) : 친구 사이에는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친구 사이에는 항상 약속을 잘 지키고 믿음으로 보답해야 합니다.
이상의 다섯 가지 도리인 오륜을 잊지 말고 항상 가슴에 새겨둡 시다. 오륜을 확대시키면 나머지 사람 사이의 관계도 쉽게 알 수 있고 실천할 수 있습니다.
☞ 다섯 가지 불효
맹자께서 사람이 저지르기 쉬운 다섯 가지 불효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첫째, 자신의 몸을 게을리 하여 부모를 봉양하지 않는 것
둘째, 술 마시고 노는 것을 좋아해서 부모를 봉양하지 않는 것
셋째, 재물을 탐내고 자기 처자식만 위하면서 부모를 봉양하지 않는 것
넷째, 자기의 욕심만을 채우다가 부모를 욕되게 하는 것
다섯째, 난폭하고 사나운 행동을 해서 부모를 위태로운 지경에 빠 뜨리는 것
이 다섯 가지는 사람이 살아가면서 항상 경계하고 조심해야 할 일입니다. 게으름을 피우며 부모님의 마음과 몸을 힘들게 하거나 부모님을 고생 시킨 적은 없는지를 생각해 봅시다.
또한 자기의 욕심만 생각하고 행동하다가 부모님을 욕되게 하지 않았는지, 친구들과 싸워 부모님께 걱정을 끼쳐드리지 않았는지, 공부는 하지 않고 친구들과 뛰어 놀며 부모님의 마음을 아프게 하지는 않았는지 생각 해 봅시다. 어른이 되어 자녀를 낳아 기를 때에도 부모님이 계시면 항상 부모의 마음을 헤아리고 은혜를 잊지 않아야 합니다. 그것이 자식의 도리입니다.
☞ 혼정신성(昏定晨省)의 효도
효도의 방법 가운데 가장 많이 행해지고 누구나 마땅히 해야 할 일들이 오늘날은 행해지지 않고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혼정신성의 효도는 날이 저물어 잠자리에 들기 전에 부모님께서 편안하게 주무시도록 이부자리를 깔아드리고, 아침에는 일찍 일어나 부모님께서 잘 주무셨는지 안부를 묻는 것입니다. 이것이 자식의 도리였습니다.
그런데 요즘에는 많은 부모들이 자식의 방을 대신 청소해주고 이부자리를 정돈해 줍니다. 또한 아침이면 밥을 차려놓고 일어나도록 깨우는 경우가 많습니다.
혼정신성의 효도와는 반대가 되어버렸습니다. 학생들이 공부하느라 고생한다는 사실을 알고 계신 부모님들께서 자식을 위해 희생하며 부지런히 일하십니다. 시대가 바뀌고 생활이 달라졌지만 부모와 자식의 도리는 바뀌지 않습니다. 이제부터는 자기 방은 스스로 청소하고 이부자리를 정돈하며 아침에는 부모님께서 깨우기 전에 미리 일어나 학교에 갈 준비를 하도록 노력해 봅시다. 작은 실천이 여러분의 마음을 맑고 깨끗하게 해줄 것이며 행복한 가정을 만들어 드릴 것입니다.
2. 예천의 효자 이야기
가. 도시복 선생 일화
≪하늘이 낸 효자(孝子) 도시복(都始復)≫
천품(天品)이 고매하고 효성(孝誠)이 지극하여 효(孝)의 화신(化身)으로 추앙(推仰)받고 있는 출천(出天)의 효자 도시복(都始復, 1817~1891)은 조선 철종, 고종 때 사람으로 본관(本貫)이 성주(星州)이며 성산부원군 진의 25세손이다. 호는 야계(也溪)이며 1817년 5월 15일 경상북도 예천군 상리면 용두리 야목 마을의 가난한 농가에서 태어나 1891년 10월 19일에 타계하니 향년 75세였다. 그는 수없이 많은 효행(孝行)을 남겼으며, 특히 <명심보감 속편(明心寶鑑 續篇) 효행에도 그에 관한 내용이 나오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소리개(솔개)가 날라 준 고기
출천(出天)의 효자 도시복은 집은 비록 가난하였으나 마음씨가 착할뿐더러 늙은 홀어머니에게 효성을 다하여 정성껏 모시고 살아가고 있었다. 그는 매일 산에 가서 나무를 하여 예천(醴泉) 장날이면 내다 팔아 자기들 내외는 꽁보리밥과 감자, 옥수수로 끼니를 이으면서 어머니에겐 항상 쌀밥과 고기반찬을 사다가 지극(至極) 정성(精誠)으로 봉양(奉養)하였다
.어느 날 예천장(醴泉場)에서 나무를 팔아 어머니에게 드릴 고기를 사서들고 어두운 산길을 더듬거리며 집으로 돌아오는데 난데없는 솔개 한 마리가 날아와서 어머니에게 드릴 고기를 가로채 날아가고 말았다. 날은 저물고 솔개의 간 곳은 모르고 하여 슬피 울며 집에 돌아오니, 이미 어머니가 저녁식사를 하였으므로 근심스러운 말로 물어 보니 천만 뜻밖에 솔개가 채갔던 그 고기로 반찬을 차려드렸다 한다. 마음속으로 고기를 날라다 준 솔개에게 감사하였으며, 이는 아마 솔개도 도효자(都孝子)의 효성에 감동(感動)하여 무거운 짐을 날라다 주었으리라.
2) 호랑이 타고 음력 5월에 얻어온 홍시(紅枾)
음력(陰曆) 5월에 어머니가 병이 들어 음식은 먹지 못하고 때 아닌 홍시(紅枾)가 먹고 싶다고 하였다. 효성이 남다른 그는 행여나 하고 감나무가 있는 곳마다 며칠을 돌아다니면서 홍시를 찾아 헤매었지만 음력 5월에 홍시가 있을 리 만무하였다.
하루는 날이 저물도록 홍시를 찾아 감나무가 많은 은풍 마을까지 가서 숲을 헤매다가 헛탕을 치고 어둑어둑하여 집으로 힘없이 돌아오는데 집채만 한 호랑이 한 마리가 길을 가로막고 있는 것이 아닌
가. 깜짝 놀라 도망가려 하였으나 여러 번 앞길을 가로막으며 긴 꼬리로 제 등을 툭툭 치면서 타라는 시늉을 보냈다. 자기를 해치려는 뜻이 없는 것을 알고 용기를 내어 엉겁결에 호랑이 등에 올라타고 말았다. 도 효자를 태운 호랑이는 어둡고 험한 산길을 수 백 리를 나는 듯이 달리더니 드디어 산속 어느 집 뜰에 내려놓았다. 밤중이지만 염치 불구하고 주인을 찾아 인사를 나누고 하룻밤 쉬어 가기를 청하였다.
주인이 쾌히 승낙하여 잠을 잤더니 얼마 안 되어 제삿밥을 차려 오는데 음식상에 홍시가 있는 것이 아닌가.
그는 너무나 기쁜 나머지 주인에게 어머니께 드릴 홍시를 구하고 있는 자신의 사정을 얘기하고 제철이 아닌 홍시의 내력(來歷)을 물으니, 주인은 돌아가신 아버지가 살아 계실 때 홍시를 몹시 즐겼기에 아버지의 제사에 쓰려고 해마다 가을이면 홍시 200개씩 골라 토굴 속에 저장(貯藏)하였지만 해마다 이맘쯤이면 홍시가 대부분 상하고 씀직한 것은 일곱 여덟 개 밖에 안 되더니 올해는 웬일인지 쉰 개(50개)나 상하지 않아서 이상하게 생각하고 있던 중이라면서 이 모두가 그대의 효성에 하늘이 감동하여 된 것이니 어머니에게 갖다 드리라면서 홍시 스무 개(20개)를 내주었다.
주인에게 감사 인사를 올리고 문밖에 나오니 호랑이가 아직도 엎드려 기다리고 있는지라 호랑이를 타고 집에 돌아오니 여기저기서 새벽닭이 울고 있었다.
하늘이 낸 효자는 산짐승까지도 감화시켰고, 호랑이가 몇 백 리나 되는 강릉(江陵)의 김씨(金氏)집에 홍시가 있는 것까지 알고 자기 등에 태워 데려갔다 왔다. 당시 호랑이에게 업혀갔다 하여 그 골을 “업은 골”이라 하여 지금의 하리면 송월리(월감 뒷산)에 위치하고 있다.
3) 한겨울에 때 아닌 수박을 얻다.
어머니가 음력 섣달에 병이 나서 때 아닌 수박을 먹고 싶다고 하였다. 추운 겨울에 수박이 있을 리 만무하였으나 효성이 남다른 도씨는 지난여름에 수박을 심었던 밭을 헤매고 다녔지만 수박이라곤 구경조차 할 수 없었다. 며칠을 이렇게 수박을 찾아 헤매던 어느 날, 그 날도 역시 종일 돌아다니다가 마침내 안동군(現 安東市 豊山邑)에 이르렀다. 수박과 참외로 이름난 풍산들이었지만 수박은커녕 푸른색을 띈 것은 자취를 감추고 낙동강(洛東江)에서 몰아치는 찬바람만 귀를 에이고 지나갈 뿐이었다.
실망한 그는 우연히 한쪽을 건너다 바라보니 다 찌그러진 원두막 한 채가 모질게 몰아치는 강바람을 못 이겨 바람이 불어올 때마다 일렁이고 있었다. 행여나 하고 피곤한 다리를 절룩거리며 원두막에 와서 걸터앉으니 넝쿨을 거두어 올려놓은 곳에 수박이 한 개 달려있지 않는가?
깜짝 놀란 그는 자신의 눈을 의심하면서 다시 자세히 살펴보니 틀림없는 수박이었다. 껑충껑충 춤을 추면서 수박을 안고 집으로 돌아와서 어머니에게 드렸음은 물을 것도 없다.
4) 배추밭을 타작하였더니 …
어느 해 한여름 날, 도 효자는 마당에서 도리깨로 보리타작을 하고 있었다. 어머니께서 나오시더니 텃밭에 있는 배추밭을 도리깨로 타작을 하라는 것이었다. 풋풋하게 자라는 배추를 타작하라니 기가 막힐 노릇이었다. 그러나 워낙 효성이 지극한 그는 어머니의 명(命)을 거역하는 법이 없었으니 도리깨로 막 속이 차려는 배추밭을 모두 타작하고 말았다. 동네 사람들은 혀를 찬 것은 물론이었다. 그러나 이게 웬 일인가 다음날 일어나 보니 난장판이 됐던 배추밭에는 속이 꽉 찬 배추로 가득 차 있는 것이 아닌가.
5) 호랑이와 함께 한 3년 시묘(侍墓)
어머니가 병환(病患)으로 돌아가시니 그는 피눈물을 흘리며 슬퍼하였다고 한다. 3년 시묘(侍墓)를 하는데 호랑이가 나타나 함께 시묘를 하였으며 양식을 구해와 굶주리지 않게 하였다 한다.
그러던 어느 날 시묘 살이 하던 어두운 밤에 낯선 아리따운 여인이 나타나 하루를 쉬어가게 해 달라 사정하므로 당시의 사회 통념상(通念上) 같이 있을 수 없는지라 동네까지 안내하여 주니 뒤따르던 여인이 홀연히 사라져 보이지 않아 이상하게 생각하며 돌아오니 호랑이가 여막 앞을 가로막으며 못 들어가게 하였다. 이에 도 효자는 여막을 비우고 여인을 안내한 잘못을 묘 앞에 절하고 비니 호랑이가 비켜 주었다.
밤마다 나타나던 호랑이가 어느 날 보이지 않아 사방으로 찾아보니 중성골(현 문경시 동로면)에 사람이 파놓은 함정에 빠져 있어 이를 구(求)하니 다른 사람들은 잡아서 약(藥)에 써야 한다며 돌려 달라 하므로 도 효자는 “내 호랑이이니 절대 안된다.”고 하면서 데리고 와서 상처를 치료하여 주었다.
6) 하늘이 추려 낸 효행록(孝行錄)
임금이 전국에 명을 내려 충신(忠臣), 효자(孝子), 열녀(烈女)를 추천(推薦)하라 하였다. 전국에서 고을 원들이 충신, 효자, 열녀들의 행적을 적어 올리니 궁궐(宮闕)에 효행록들이 산더미처럼 쌓였다. 이를 본 임금이 조선에 충신 효자 열녀들이 이렇게 많으면 나라가 이 모양일 수 있느냐며 거짓이니 모두 태워버리라고 명을 내렸다고 한다. 신하(臣下)가 불을 붙이니 기록들이 타는데 어디서 바람이 불어와 3편(篇)의 기록만 하늘로 솟구쳐 건져내고는 다른 모든 기록(記錄)들은 태워 버리고 말았다. 즉 하늘이 그들의 효행(孝行)을 인정해 준 것이었다. 그 3편의 기록 중 하나가 이 도 효자의 효행록으로서 그 행적이 <명심보감> 속편(續篇)에 기록되었다.
그밖에도 꿩이 도 효자의 품에 날아와 어머니의 병환을 쾌유하게 하였던 일, 여름철 도 효자의 논밭에만 우박 피해를 면하였던 일 등 도 효자의 효행은 이루 말할 수 없이 많다.
실제 1882년 암행어사 이도재(李道宰)가 이곳에 직접 내방 탐사해서 왕에게 계장(啓狀)을 올렸으나 세정(世情)이 어수선하던 조선조 말엽이어서 정려(旌閭)를 윤허(允許)받지 못했다.
1978년 가을 향토의 유림과 유지들이 예천공설운동장 건너 보문 통로 변에 그 갸륵한 효성을 기리기 위해 효자비(孝子碑)를 세웠으며, 그 뒤 도로 확장으로 상리면 용두리 생가(生家) 옆으로 이전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우리 군은 유교문화(儒敎文化)의 근본이며 인류의 소중한 삶의 가치인「孝」를 일깨우고 고귀한 정신문화를 계승(繼承)시키고자 도 효자를 형상화한『효동이, 효순이』를 캐릭터로 개발하였으며,
「충효테마공원」조성 및「도 효자 생가」등 유적을 복원, 발굴 하였다.
나. 최 효자 일화
최 효자는 경북 예천군 지보면 상월리 내성천 기슭의 깊숙한 골짜기에서 태어났으며, 이름은 진봉(鎭奉)이고, 어릴 때에는 일봉(一鳳)이라고 불렀고, 본관은 경주이고, 아버지는 종업(宗業)이고, 어머니는 김해 김씨이다. 효자가 어릴 적에 아버지가 큰 병이 들었다.
김부인(金夫人)이 그 병을 고치고자 온갖 노력을 다했으나 효험도 없이 9년을 앓다가 죽었다. 金夫人이 곧 따라 죽고자 하였으나, 아들이 어려서 집안을 다스릴 수 없으므로 슬픔을 참았다.
최 효자는 하늘이 낸 큰 효자이다. 비록 글을 배우지는 못했으나 학식(學識)과 덕망(德望)이 높은 군자(君子)의 행실과 같았다.
어버이 거처(居處)가 겨울에는 따뜻하게, 여름에는 서늘하게 하면서도 늘 미치지 못할까 걱정하고 어버이께 맛있는 음식을 드리면서 늘 어린이를 돌보듯이 극진히 하고 공경하여 우러러 받들기를 매우 조심하여 모셨다.
또 어버이가 길러주신 은혜와 고생한 일을 사모하여 잠시도 어버이 곁을 떠나지 않고 기쁜 마음으로 모시고 받들면서 삼가고 매우 조심하여 살얼음을 지나가듯 하였으니 그 행적의 아름다움을 글이나 말로는 다 표현할 수 없다. 이제 그 평생에 한 일이면서 세상 사람들이 모두 보아 온 한 두 가지 사실만 살펴본다.
효자의 모친이 늘 머리가 아프다고 했다. 효자는 그 병을 고치고자 온갖 노력을 기울이다가 어느 의원이 그 병에는 정월에 잡은 비둘기가 가장 좋은 약이 된다고 일러주었다. 이 말을 들은 효자는 총을 사서 매년 정월이면 날마다 비둘기 사냥을 하고 깃털채로 푹 고아서 그 물로 머리를 감고 그 고기를 계속 잡수시게 해서 드디어 병을 고칠 수 있었고 다음부터는 그런 증세가 없어졌다.
1909년(乙酉) 2월에 모친이 또 병이 들었다. 이때부터 정성을 다해 약을 쓰고 간호해도 병이 나아지기는커녕 점점 깊어만 갔다. 이에 효자는 마을 뒤 절골 산에 올라가서 경건한 마음으로 제물을 차려 놓고 정성으로 하늘과 땅에 제사를 올리고 모친의 병을 고쳐 달라고 기도했으나 보람이 없자 또 밤에 다시 그 산에 올라가서 있는 정성을 다하고 그 다음 날도 이와 같이 했으나 병은 조금도 나아지지 아니하고 거의 숨이 끓어지려 했다. 이 때 효자는 손가락을 깨물어 그 피를 모친 입에 흘려 부으니 비로써 정신을 차리고 점점 병이 나아져서 다시는 병으로 앓는 일이 없이 지냈다.
또 효자가 어쩌다가 스스로 잘못을 저질렀다고 여겨지면 모친이 보지 아니하는 곳으로 가서 회초리로 제 종아리를 쳐서 피멍이든 다음에야 그만 두었다. 모친이 연만하여 잘 걸어 다닐 수 없을 때 혹 이웃에 구경거리가 있으면 효자의 부인이 업고 다녔으며 먼 곳에 구경거리가 있으면 가마로 모셨으며, 봄이나 가을에 들 구경을 하고 싶어 할 때는 효자가 몸소 업고 다녔다.
그 모친의 마음을 즐겁게 하고 받들어 모신 것이 모두 이와 같았다. 효자의 타고난 효성으로 그 모친의 노쇠한 모습을 보고 슬퍼져서
“어머님, 어머님이 백세후에 어떻게 해야 되겠습니까?”하고 물으니 대답하되“남대로 하고 형편대로 해야지”하고 말씀하셨다.
효자는“어머님은 평생을 남달리 고생만 하셨습니다. 젊으실 때 아버님이 돌아가시고 정절을 지켜 어린 자식들을 기르면서 가장 없는 가난한 살림에 오죽이나 고생하셨습니까? 이루 해아 릴 수도 없습니다. 제 생각으로는 선혈로 축문을 써서 장례를 치루어도 오히려 원통함이 남을 것입니다.”하고 한글로 벽에 적어 두었다. 그리고 또“저승도 이승과 같다면 미리 가서 계신 아버님을 뵙고 아들을 키우느라고 고생하신 형편들도 말씀하소서”하면서 흐느끼고 우니 그 모친 또한 눈물을 머금었다.
이로부터 한 달 남짓하여 모친이 우연히 병을 얻어 날로 병세가 더해져 갔다. 그 모친이 스스로도 병이 나아 일어날 수 없다고 짐작했음인지 효자에게 “의원의 약으로는 내 병을 고칠 수 없으니 밖에 나가서 바위틈에 있는 약을 구해 오너라”했다. 효자는 당황하여 어찌할 줄 모르면서 시키는 데로 집 밖을 나서니 한 겨울이라 사방이 눈으로 덮였고 땅이 얼어 붙었다. 멀리 바라보니 마침 바위틈에 한 길이 넘는 고드름 두어줄기가 보였다. 그것을 따다가 모친에게 드렸더니 조금 차도가 있는 듯도 하더니 사흘 뒤 저녁에 마침내 운명하니 1922년(壬戌) 섣달 스므 이래(12월 27일)이다.
효자는 그지없이 슬퍼하면서 그믐을 지나 아흐랫 만에 장례를(九日葬)치룰적에 손가락을 깨물어 그 피로 발인축을 쓰고 또 손가락을 깨물어 평토축을 썼다. 그 다음날 살펴보니 축문에 한 글자가 빠져서 다시 손가락을 깨물어 글자를 채워 쓰고 밤낮 통곡하다가 아버지 무덤 아래쪽에 장사 지냈다.
이 날부터 부모의 무덤에 하루 두 번씩 신혼곡(晨昏哭)을 다니면서 흙 세 삼태기와 잔디 석 장, 돌 한 덩이씩을 가지고 가서 가토했다.
효자의 부인도 달마다 초하루와 보름에 제수를 차려 성묘하면서 흙 한 삼태기, 잔디 한 장, 돌 한 덩이씩을 날랐다. 이와 같이 담제(禫祭)때까지 하루도 쉬지 않고 무덤을 다듬으니 봉분도 커지고 무덤 앞도 아주 넓어졌다.
효자는 또 두 떨기 참꽃(杜鵑花)을 꺾어 부모의 무덤 앞에 나누어 꽂아 두고 빌기를“혼령이 계신다면 이 꽃이 시들지 말게 하여 영험을 보여 주소서”하고 했다. 그 이튼 날 살펴보니 아버지 무덤 앞의 꽃은 시들었고 모친 무덤 앞의 꽃은 꽃빛이 조금도 변하지 아니하고 살아 있었다. 열흘 사이에 세 번이나 되풀이하여 꽃을 꽂아도 시들지 않고 싱싱하기가 늘 한결 같았다.
장사 지낸 두 달 뒤에 보라매 같은 새가 밤에 날아와서 무덤 곁에 있는 나무에 깃들이고 효자가 소리 내어 울 때 함께 따라 울다가 시월에 어디론가 날아가더니 그 다음 해에도 또 그 때 쯤하여 날아왔었고 삼년상을 마치니 그 새도 다시는 오지 않았다.
그 해 사월에 성묘 갔다가 갑자기 우박을 만나 지척을 분간할 수 없었고 천둥 번개가 쳐서 굴건이 벗어졌으며 칠월에는 밤에 무덤 앞에서 곡을 하다니 이름도 모를 큰 짐승이 무덤위에서 효자의 길을 막으므로 타이르면서 길을 비키라고 하니 짐승도 말귀를 알아 듣는 지 길을 열어 주었다.
시월에도 밤에 무덤 앞에서 곡을 하는데 갑자기 어디선가 큰 소리가 들려왔다. 살펴보니 무엇인지는 모르나 모양이 다북솔(叢松)과 같은 것이 길을 막았다. 비켜서 돌아가다가 부딪치니 달아나서 그것이 무엇이며 어떻게 생겼는지도 잘 모르겠다.
효자가 하루 두 번씩 하늘과 땅에 기도를 하며 저승의 부모를 돕고자 하여 달마다 열흘에 한번 곧 한달에 세 번씩 절골산 마루에 올라가서 또 기도했다. 어머니 상사 이후로 언제나 눈물을 흘리지 아니하는 날이 없었으며 삼년 동안 시묘하면서 부모를 추모하여 자식으로서의 도리를 다했다.
그리고 효자는 생각하기를 “조부모는 부모의 부모이니 그 윗대의 조상은 또 조부모의 부모가 아니겠는가 어찌 잊을 수 있겠는가”고 여겼다. 조부모의 기제삿 날은 일찍 성묘하고 신을 맞이하여 오고 온 정성을 다하여서 제사를 지냈다.
1923년 2월 밤에 상복에 흙을 싸 가지고 가서 직계 조상 14대 이하의 묘소들을 모두 가토(加土)하고 고유(告由) 하고 나니 날이 밝으려 했다. 이리하여 온 고을의 여러분들이 그 효성에 감탄한 적이 오래 되었더니 1925년 큰 상으로서 그 훌륭한 효행을 표창했다.
이 효자의 실천한 자취는 옛사람이 얼음 속에서 잉어를 눈 속에서 죽순을 구한 일에 비겨 비록 덜하다고 할지라도 자식으로서의 도리를 지키면서 남이 따를 수 없는 일들을 행하였으니 진실로 효자라 할 만하지 아니한가 효자는 집안이 가난하여 공부를 하지 못했으니 듣고 보아 얻은 지식들도 없을 터인데 평생에 어버이의 뜻을 따르고 어기지 아니하며 조심조심하여 지성으로 어버이를 모시고 예순이 넘어서도 어린 아이가 부모를 따르는 듯이 깊이 사모하여 우러러 받드는 마음이 한결 같았다.
최진봉 효행
(예천군 지보면 상월리 소재)
다. 효도 아리랑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로 넘어간다.
1. 아기 업고서 고개넘기
엄마는 얼마나 힘이들까.
2. 잘도 자라서 무거우면
엄마는 좋아서 더 잘 넘네
3. 쑥쑥 커가서 철이 들면
부모님 은혜에 보답하리
4. 어른 되면 늙으신 부모님
편히 모시고 살아가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