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에 우리나라에서 출판된 '정의란 무엇인가'는 판매 부수가 130만 부를 훌쩍 넘어섰다. 미국에서는 10만부 남짓 팔리는 정도였으나, 우리나라에서 유독 크게 인기를 끌어 2010년 7월 베스트셀러 1위를 기록하였고 인문학 서적으로는 드물게 100만 부 선을 돌파했다. 소설도 아니고, 불경기에 유행하는 자기계발서나 재테크의 비법을 담은 책도 아닌 인문학 책이 어떻게 이토록 오랜 기간 신드롬을 일으키는 것일까? 이 책이 우리 사회에서 갖는 함의는 무엇일까?
유독 우리나라 독자가 열광한 이유
우리나라 독자가 이 책에 열광한 이유는 정의에 대한 체감 지수에서 찾을 수 있다. 아래 표는 전국 남녀 1000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한 결과이다. 조사 결과 대한민국이 정의로운 국가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고작 5%에 불과하고 과반 이상이 대한민국은 정의로운 국가가 아니라고 응답했다. 국민 10중 4명이 법을 지키면 손해라고 여긴다.
이런 배경에는 사회지도층의 솔선수범(?)이 보여준 갖은 편법과 탈세가 한 몫 했다. 2008년 이후 부동산 투기, 위장전입과 같은 법적, 도덕적 문제로 청문회 과정엣 낙마한 장관급 후보자는 10명이나 된다. 2011년에는 부실 금융기관을 감시해야 할 금융감독원이 부실 저축은행의 비리에 연루되는가 하면, 외교통상부 장관의 딸은 아버지의 후광을 입고 특채로 외교관이 되었고, 한때 현 정부의 장관급 공무원 중 군필자는 고작 3명에 불과했던 적이 있다. 이런 불신이 자연스럽게 우리 사회의 ‘정의’를 생각해보게 하는 계기를 마련해 준 셈이다.
'정의란 무엇인가’는 하버드 대학교 교수이자 정치철학자로 유명한 마이클 샌델이 집필한 정치 철학서이다. 저자가 1980년부터 진행한 '정의'(Justice) 수업 내용을 바탕으로 한 정의가 무엇인지를 다양한 관점에서 질문한다. 정의와 관련한 각종 딜레마를 다루고, 공리주의·자유주의·칸트의 철학·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공동체주의를 정의라는 개념과 연결한다.
저자는 정의를 구성하는 요소를 크게 3가지로 나누어 설명한다. 오랜 시간을 거쳐 귀결되어온 여러 학자의 ‘정의’에 관한 철학적 내용을 바탕으로 사례를 제시한다. 그리고 독자로 하여금 정의의 딜레마와 해결책을 논리적으로 판단하고 ‘정의’가 무엇인지 생각해보게 한다.
마이클 샌델은 '결국 정의란 미덕을 키우고 공동선을 고민하는 것’이라 말한다. ‘정의란 무엇인가’는 어디까지나 인문 철학책이다. 그렇기 때문에 다만 선택의 갈림길에서 바뀔 수 없는 큰 원칙을 제시하고 우리의 정책이나 이슈가 어떤 철학을 담아야 하는지 큰 틀을 제시하는 역할만을 한다.
저자는 각 시대, 각 상황에 따라 여러 철학자가 제시한 ‘정의’를 대입해 그 상황을 해석하고 ‘정의’에 대해 다른 원칙을 제시하면 그 결과가 어떻게 달라질 수 있는지를 설명한다. 다음과 같은 식이다.
한 퀴즈대회에 참가한 아이가 오답을 말했음에도 심사위원이 무심코 통과시키자 아이 스스로 오답임을 밝히고 퀴즈를 포기했다. 아마 대부분의 대중은 이 아이가 올바른 양심을 갖고 있다고 보고, 이 아이의 용기를 칭찬할 것이다. 그러나 만약 아이가 단순히 죄의식을 피하기 위해 자신이 틀렸다는 것을 스스로 밝혔다면 칸트의 입장에서는 ‘정의’가 아니다. 이는 칸트가 정의한 정언명령, 즉 순수한 선의도로 진실을 고백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사실 책에는 우리가 원하는 '정답'은 나오지 않는다. 저자는 오랜 세월 축적된 이론을 수용해 ‘정의’에 대해 생각해보려 했다.
그러나 ‘정의’는 도처에 숨쉬는 현재의 삶이자 도덕관이다. 과거 철학자들이 ‘정의’를 개인적 논리의 전개를 통해 규정했듯이, 오늘날의 정의도 결국 우리가 생각하는 공동선이 실현되는 상황을 의미할 것이다.
결국 처음부터 ‘정의란 무엇인가’는 우리가 생각하는 ‘정의’에 대한 정답을 제시해 줄 수 없었던 것이다. 즉, 우리가 원했던 ‘공정사회’의 출발점으로서의 ‘정의’는 담겨져 있지 않은 것이다. 무엇이 정의인지 함께 고민해보자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는 것이다.
‘정의란 무엇인가’의 미덕
이 책은 끊임없이 질문을 한다. 독자는 그 질문에 스스로 답을 고민함으로써 ‘정의’의 개념을 철학적으로 학습하고, 이를 바탕으로 더욱 현명하게 우리 사회에 ‘정의’를 요구할 수 있게 되었다. 1980년대는 정의롭지 않은 정부가 ‘정의’를 외쳐도 아무도 정의를 외치지 못 했다. 그러나 이제는 많은 국민이 ‘정의’를 논하고 이를 바탕으로 우리 사회에 ‘정의’를 요구한다. 그리고 정부는 이 목소리를 더 이상 무시하지 못 한다. 대중이 책을 통해 얻은 개념과 고민을 바탕으로 우리 사회의 ‘정의’에 대해 자각하고 사회를 향한 ‘정의’의 목소리를 낼 수 있게 된 것. 그것이 이 책의 미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