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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말
나는 왜 이책을 쓰는가?
눈은 보아도 만족하지 못하고
귀는 들어도 가득 차지 못한다. (코헬 1,8)
나는 다른 생각을 가진 세대들 간에 태어나 다양한 문화들을 겪으며 여러 종교를 봐온 사람이지만 그래도 역시 행복한 그리스도인이다. 나는 현재 내가 보는 걸 사랑한다. 지금 보이는 대로의 인생은 나를 흥분시킨다. 물론 나는 여전히 보고 들을 것이 많고, 알고 행할 것이 많다는 것도 안다. 그러나 본다는 행위는 또한 고통스럽기도 하다. 개중에는 보고 싶지 않거나 알고 싶지 않던 것들도 있기 때문이다.
나는 세계대전 중인 1943년에 중부 아메리카의 중앙인 캔자스에서 뿌리 깊은 독일계 보수주의의 가톨릭 농가에서 태어났다. 하지만 1960년대에 급속도로 바뀌면서 새로워진 휠씬 큰 세상으로 보내어져 거기서 교육울 받았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가톨릭교회를, 치료 운동therapeutic movement은 인간의 정신을, 가난과의 전쟁과 시민평등권 운동과 반전 운동은 미국을 개혁하려 하고 있었다.
나는 거의 모든 것을 '이것도 저것도both-and'로 (또는 '반대들의 충돌'로) 보려는 고정관념이 내게 있다는 말을 듣곤 했다. 마치 천성이 그런 것처럼 느껴진다. 내가 저지른 가장 고약한 실수들은 자기 균형을 이루지 못한 데서 온다. 당신이 별자리를 믿는다면, 나는 예수부활대축일이 가장 늦은 해에 겨울에서 봄 사이 어느 날, 두 마리 물고기가 서로 반대 방향으로 움직이는 물고기자리에서 태어났다.
나는 늘 부활대축일을 기다리는데, 해마다 기대감도 대단하다. 캔자스 주 토피카 시의 스톤스 폴리 유적지에서 1900년에 사람들이 처음 방언을 하기 시작했는데, 나는 그로부터 70년 뒤에 그곳의 한 가톨릭교회에서 사제품을 받았다. 언제나 가톨릭 신자라는 사실에 만족했지만 나는 개신교와 오순절 교회에 대해서도 알고 싶은 게 많있다. 나는 사람들의 앎에 서로 다른 종류가 있다는 사실을 일찌감치 알았다. 언어는 '이것 아니면 저것either and or'으로 갈라놓았지만 내 삶의 경험은 언제나 '이것도 저것도both-and'였다.
나는 내 생각과 다른 이들의 생각 대부분을 시인하면서 동시에 부인하는, 다리를 놓으려는 시도를 통해서만 살아남을 수 있다. 많은 사람이 나를 상당히 진보적인 사람으로 보는 것 같다. 그러나 실제로는 가치는 보수, 과정은 진보적인 사람이라고 하겠다. 나는 정의, 진실, 끝까지 성실함, 정직함, 개인적이고 재정적인 책임, 충실한 사랑, 겸손을 믿는다.(이 모두가 매우 전통적인 가치들이다. 하지만 내 견해로는 이런 가치들을 조금이라도 실현하면서 살려면 상상력이 있어야 하고 급진적이고 대화에 익숙하고 심지어 반反문화적일 필요가 있다. 오늘날 교회나 정치판에서 보수 진영도 진보 진영도 이 일을 잘 해내지 못하고 있다. 양쪽 모두지나치게 이원적이다.) 그들은 신비주의자들처럼 생각하거나 보지 못한다.
나는 좋든 나쁘든 20세기 미국 문화와 가톨릭 신학, 그리고 원주민 종교와 세계 종교들의 지혜로운 전통들, 특히 주로 좋은 영향을 준 프란치스코 사상의 영향을 받으며 자랐다. 나는 이 책에서 발달심리학, 신학, 철학, 역사, 많은 종교의 신비가들에 의거한 통찰뿐 아니라, 공동체 건설과 영적 지도의 경험에서 오는 통찰에 의지하고, 특히 올더스 헉슬리가 '영원의 철학'이라고 부른 것에 의지하고자 한다.
무엇보다도 나는 여기에서 왜 사람들이 잘 보지 못하는지, 어떻게 우리가 잘 볼 수 있는지에 관심이 있다. 무엇이 사람들로 하여금 현실을 정직하게, 겸손하게, 그리고 도움 되는 방향으로 읽지 못하게 하는가? 어째서 우리는 그토록 자기 자신의 감옥에 갇힌 자들로 보이는 것인가?(이점은 교회와 교육계와 정부의 고위층도 마찬가지다.) 실제로 어째서 세계의 종교들이 사람과 문화를 변화시키는 본디의 직책을 제대로 감당하지 않는 것인가? "눈도 본 적이 없고 어떠한 귀도 들은 적이 없으며 사람의 마음에도 떠오른 적이 없는 것들을"(1코린 2,9) 하느님이 하고 계시는데. 어째서 우리는 사람들에게 하느님을 체험하려면 하느님을 '믿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인가?
나는 앞에서 언급한 자료들에 덧붙여 나 자신이 거쳐온 여정에도 의지하고자 한다. 그것은 나 자신과 세상을 정직하게, 좀 더 사랑스러운 눈으로, 그리고 더 넓고 덜 자기중심적인 틀로 보고자 한 여정이었다.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나의 허물에서 나는 많은 것을 배웠다. 실패, 범죄, 몰락, 그리고 그늘진 행위들은 우리가 허용하기만 하면 모두 훌륭한 교사들이다. 나는 자기성찰, 이야기, 어록, 히브리 성경과 그리스도교 성경에 대한 해석, 그리고 구체적 실습 등 여러 방식을 동원하여 이 책의 중심과제를 풀어보려고 한다. 이 책을 첫 장에서 마지막 장까지 읽을 수도 있지만, 한 번에 한 장씩 읽고 그 메시지가 당신 안목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되돌아보는 것도 좋겠다. 각 장 제목을 보고 마음에 끌리는 것을 읽어도 좋다. 대부분의 글이 독립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이제까지 말한 모든 주제들이 이 책을 관통하는 다음 메시지로 나를 이끌었다.
모든 말saying이 말 없음unsaying으로 균형을 이루고, 앎은 모름으로 겸손해져야 한다. 이 균형이 이루어지지 않은 종교는 틀림없이 공격적이고 배타적이고 심지어 난폭하다.
모든 빛이 어둠에 의해, 모든 성공이 고통에 의해 채워져야informed한다. 그것을 십자가의 성요한은 밝은 어둠이라 하였고, 성 아우구스티노는 파스카 신비 또는 불가피한 과월절이라 하였고, 가톨릭은 성체성사 때마다 신앙의 신비로 선포한다. 하지만 그것이 우리 삶의 중심원리로 자리 잡는 일는 매우 드물다.
일찌감치 배워서 익숙한 이원적 사유思惟는 우리를 한쪽으로만 멀리까지 데려갈 수 있다. 그래서 좀 더 성숙한 차원의 모든 종교가 죽음, 사랑, 무한, 고통, 하느님 같은 큰 질문들을 풀어내는 과정에서 다른 소프트웨어를 발견한 것인데, 많은 이가 그것을 '관상觀想, contemplation'이라고 부른다. 순간을 비非이원적으로 보는 것이다. 본디 그 말은 단순히 '기도'를 뜻하는 말이었다.
'현재 순간의 성사聖事, sacrament'를 벌거벗은 지금에 살아내야만, 우리는 경험이 좋든 나쁘든 추하든 그것을 있는 그대로 경험하고 그를 통해 변화하는 법을 배울 수 있을 것이다. 언어는 그 자체로써 순간을 어김없이 나눠놓고, 순수 현존은 있는 것을 있는 그대로 있게 한다.
당신이 현재에 존재할 수 있을 때 당신은 참된 현존Real Presence을 알게 될 것이다. 나는 이 말이 진실임을 당신에게 약속한다.
그것은 거의 그토록 간단한 것이다.
2008년 3월 20일 성목요일에
제1부
이미 받은 선물
희망은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받은 성령을 통하여
하느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어졌기 때문입니다.(로마 5,5)
세상은 그분을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하기 때문에
그분을 받아들이지 못하지만, 너희는 그분을 알고 있다.
그분께서 너희와 함께 머무르시고
너희 안에 계시기 때문이다.(요한 14,17)
예측할 수 없고 통제할 수 없는 미래는 역설과 신비와 혼돈으로 가득 차있다.
그것은 어느 차원에서 보아도 완성되지 않은 세계다.
그래서 미래는 어쨌거나 늘 두렵기 마련이다.
우리는 불완전한 미래에 대하여, 마음속으로나마 여러 가지 방어벽을 쌓으려한다.
예측할 수 없는 미래와 그에 대한 준비가 우리 삶의 대부분을 차지한다.
그래서 조금이라도 안심하고자 앞날을 내다보는 능력과 설명, 그리고 질서를 갖추려고 노력한다.
심지어 종교 자체도 상당 부분 사회질서, 그룹의 단결, 개인의 가치에 대한 추구나 다음 세상으로 도피하는 길이 되어버렸다.
하지만 그러는 사이에 불행하게도, 종교의 변화시키는 힘이 대부분 소멸되고 마는 것이다.
완벽함이나 통제, 또는 다음 세상으로 들어가는 문을 추구하는 것은 참된 영성이 아니다.
참된 영성은 지금 여기에서 신과 하나 됨unity을 실현하는 것이다.
우리가 찾고 있는 것을 이미 받았음을 보는 것이야말로 위대한 발견이다!
내가 그것을 발견한 게 아니다.
그것이 나를 발견한 것이다.
꿈에 하늘에 닿은 시다리를 본 야곱이 잠에서 깨어나 내지른 외침(Eureka!)이 바로 그 것이었다.창세 28,16-17
하나 됨과 완전함은 매우 다른 방편들로 이어가는 두 가지 서로 다른 여정이다.
일반적인 종교는 개인의 완전함을 추구하고, 신비가들은 바탕 자체,
곧 전적으로 선물일 뿐인 신과 하나 됨을 추구하고 더 나아가 즐긴다.
개인의 완전함은 지식과 확신을 강조한다.
그런데 놀랍게도, 하나 됨이 지식으로 가는 훨씬 좋은 길이다.
그것은 공유된 지식으로서 더욱 견고하고 위안을 준다.
예수에게서 볼 수 있는 가장 놀라운 사실은,
다른 종교의 창시자들과는 달리 무질서와 불완전함에서 하느님을 발견한다는 점이다.
그리고 그는 우리에게 이렇게 말한다.
그대들도 그렇게 하라고, 아니면 이 땅에서 결코 만족할 수 없을 것이라고.
이 때문에 예수는 대부분의 시대와 문화에 낯설고 거북한 존재가 되고,
대부분의 사람이 그의 복음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게 된다.
그의 핵심 메시지와 그것을 스스로 경험할 수 있게 해주는
구체적 프로그램을 이해하지 못하는 바로 여기에, 오늘 우리 종교의 중심 문제가 있다.
우리는 약속받지 못한 곳에서 희망을 찾으려 했고,
아무도 우리에게 무질서와 불완전함 속에서 희망할 수 있게 해줄 소프트웨어를 제공하지 않았다!
무엇보다 고약한 것은, 우리가 희망과 하나 됨이 같은 것이고.
참된 희망은 정신적 확신과 전혀 상관없는 것임을 몰랐다는 사실이다.
두려움과 오락에 굴복할 때
불확실한 현실이 주는 두려움에 무릎 꿇을 때
당신의 인생은 한 묶음 보험설계 다발로 바뀔 수 있다.
그렇게 되면 이 땅에서의 짧은 생애가, 당신 눈에 확실해 보이고
당신이 통제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 (하느님까지 포함하여)을 중심으로
빙글빙글 돌아가는 작고 초라한 역마차의 행진이 되는 것이다.
그리하여 당신은 스스로 마부 자리에 앉아서 안전한 길을 찾아,
가야 할 곳으로 가고 있다는 착각에 빠진다.
너무나 많은 사람이 '교회가 말하기를, 성경에 이르기를'운운하면서
처음부터 답을 알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들에게는 인생 여정이라는 것이 사실상 쓸모없는 것이 되고 말았다.
같은 문제에 달리 접근하는 그룹도 있다.
그들은 어둠 속에서 휘파람을 불며 엉뚱한 길을 찾거나
아니면 세상에서 중요한 존재가 되는 여러 방법을 모색하느라고 끊임없이 분주하다.
예수의 말을 빌리면, '더 큰 곳간을 짓느라고'바쁜 것이다.
그들에게 인생은 조작된 드라마와 오락,
아니면 본질적인 질문을 피하도록 해주는 온갖 술책의 연속이다.
여기서 흔히 '치열함intencity'이라고 불리는 것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실제로는 내가 '지금 여기 있음 presence'이라고 말하는 것,
곧 자기 자신과 남들과의 친밀한 관계에 대한 회피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최근 붕괴되는 모습을 보여 주고 있는 이른바
'소비문화'야말로 이 회피를 상징하는 것이다.
이 그룹 또한, 특히 개발된 문명세계에서 인구의 대다수를 차지하고 있다.
정부들은 이른바 '빵과 서커스'라는 이름의
여러 가지 기분전환 방식으로 두려움을 해결하도록 부추긴다.
그들은 그러한 것들을 통해 우리가 모든 위대한 영혼의 관심사인
"의로움과 자비와 신의처럼 율법에서 더 중요한 것들" 마태 23,23에 흥미를 가지는 대신
시시한 것들로 만족하게 된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것이다.
셋째 그룹은 여러 형태의 초월성과 영성을 모색한다.
그러나 성숙한 방법과 미숙한 방법을 두루 섞어 쓴다.
불행하게도, 오늘날 많은 종교인이 하느님, 나, 다른 사람과의 진정한 하나 됨과는 거리가 먼,
미숙한 초월과 이분법에 묶여있다.
말하자면 오언 바필드가
'무소속의 빈 들 desert of nonparticipation'이라고 부르는 영역에 속해있는 것이다.
제대로 체험했더라면, 그리스도교야말로 세속의 이분법과 분열을
하느님 안에서 한꺼번에 완전히 극복하는 종교라 할 것이다.
그러나 슬프게도 우리 가운데 대다수가
여전히 딱딱한 형식과 종교적 횡설수설에 갇혀있다.
거기서는 깊고 한결같은 소망을 찾을 수 없고
따라서 참된 기쁨도 맛볼 수 없다.
우리는 지금 여기에서 부분적으로나마 맛볼 수 있는
'궁극 소속 final participation'의 기름진 땅을 향해 이 분열과 무소속의 빈 들을 떠나야 한다.
기꺼이 하느님께 굴복할 때
성숙한 초월은, 제임스 엘리슨이 말한 대로 하느님 '안으로 떨어져' 하느님을 '겪는'것이다. 하느님이 "우리에게 (뭔가를)하시고" 우리는 주님 탄생 예고를 받을 때의 마리아나 겟세마니 동산의 예수처럼, 그 일이 우리한테서 일어나게 해드리는 것이 할 수 있는 일의 전부다. 우리가 그 안으로 떨어지는 곳은 그리스도교에서 말하는 '심연'이자 '밑바탕'이다. 대단한 역설이다! 하지만, 하느님 안에서는 그것들이 반대가 아니다.
그곳에 이를 때 우리는 어떻게 여기까지 왔는지 의아해진다. 우리가 한 일이 거이 없다는 사실과 함께, 뭔가가 우리한테서 이루어졌음을 어렴풋이 알 따름이다. 우리는 친절하게 그리고 따뜻하게 붙잡히고, 동시에 두려운 신비 속으로 속절없이 떨어진다. 그러면서 '이것이 나를 어디로 데려갈 것인가?'를 묻는다. 이와 같은 변모가 이루어진 뒤에는, 내가 무엇을 발견했다는 느낌이 거의 들지 않고 그보다는 누군가 나를 발견한 느낌이 더 많이 든다는 얘기를 우리는 자주 듣는다.
당신은 누군가에게 붙잡히고 끌어안기고 그 누군가의 연인이 된 것을 깨닫는다. 처음에는 무슨 일이 진행되고 있는지조차 모른다. 그것이 참으로 이상스런 '경험'이라는 게 당신이 알고 있는 전부다. 당신은 '당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예레 20,7-9; 이사 6,4-7 누군가의 손아귀에 잡혀있는 것이다. 그 방법 말고 누가 스스로 통제를 포기하겠는가! 아무도 그러지 않을 것이다. 인간은 종교까지도 위장된 통제 수단으로 사용하고, 하느님마저도 자신의 선한 행실로 통제하려 든다.
마침내 당신은 당신의 정체를 비추어 주는 단 하나의 거울 앞에 서게 된다. 참된 기도와 온전한 현존 presence의 '벌거벗은 지금 naked now'에 굴복하는 것이다. 당신은 위대한 '나인 나 I AM'앞에서 '너Thou'가 된다. 그 최후의 거울 보기가 다른 거울들을 뒤에 두고 떠날 용기를 준다. 예수는 이렇게 고백한다. '사람들의 칭찬은 내게 아무 의미가 없다. 그대들은 어째서 한 분 하느님의 칭찬을 이미 받고 있으면서, 서로에게 칭찬을 들으려고 헛된 시간을 낭비하는가?'요한 5,41.44
"그대는 그대 안에서 하느님을 발견하고, 하느님 안에서 그대를 발견하다"는 아빌라의 데레사의 말처럼, 이것이야말로 이 세상에 탁월한 심리학의 모든 것을 앞서고 능가하고 그 밑동을 자르는 엄청난 발견이다.
우리네 변덕스러운 문명사회에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거울로 둘러싸인 홀에 살고 있다. 그리하여 깨어지기 쉽고 끊임없이 바뀌는 자기 정체성을 유지하려고 어떻게든지 남의 인정을 받으려 한다. 특히 우리는 젊은이들한테서 이런 모습을 본다. 그들은 피상적 이미지의 광고나 판매를 포함하여 자신들을 둘러싸고 있는 수많은 것이 조작하는 느낌, 기분, 아이디어 위에 자기 정체성을 세운다.
당신에게는 그보다 더 좋고 즐겁고 본질적인 것이 주어졌다! 하느님의 현존과 그에 따라오는 믿음, 소망, 사랑은 선물이다. 당신이 좌지우지할 수 없지만 당신이 달라고 할 수 있고 달라고 해야 하는 선물이다. 루카11,13 하느님께 무엇을 청한다는 것은 그것을 주시도록 하느님을 설득한다는 뜻이 아니라, 이미 우리 안에 주신 그분의 선물을 알아차린다는 뜻이다. 당신은 이미 맛보기 시작한 무엇을 달라고 할 수 있을 뿐이다. 선물은 이미 주어졌다. 참으로 딱하고 안된 일이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이 자기에게 선물이 주어졌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다. 초세기 그리스도교 스승들과 그 뒤의 많은 신비가와 성인은 이것을 분명히 알았다. 하지만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은 "성령이 있다는 말조차 듣지 못하였습니다"사도19,2 라고 말하던 에페소 시민들과 여전히 같은 수준에 머물러 있다.
타고난 권리 되찾기
성숙하지 못하고 이분법적 틀에 갇혀있는 사람들에게, 그들이 직접 그것을 체험하기 전에 '위대한 내재Great Indwelling'를 말한다는 것은 그 자체가 위험한 짓이다. 그들은 자신의 우월함을 드러내고 남을 통제하는 데 그것을 이용하거나 통속적인 것으로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예수가 "너희의 진주를 돼지들 앞에 던지지 마라"마태7,6 고 한 것도 아마 그런 뜻이었으리라. 하지만 우리는 그것을 부인하거나 일급비밀로 묻어두어서는 안 된다. 어쩌면 성직자들 자신이 신적 일치를 체험하지 못했고, 그래서 그것을 남들에게 가르칠 수 없었기에, 그런 일이 일어났을 것이다. 가톨릭과 정교회는 성령을 교회생활과 성사에 기대는 존재로 만들고, 프로테스탄트는 개인의 결단이나 테크닉으로서의 신앙에 기대는 존재로 만든다. 양쪽 모두 '우리'가 배후고 '우리'가 행위자다. 여기엔 하느님에 대한 경험이라곤 없다.
어느 정도 진심으로 회심한 사람만이 성령을 받았다고 말할 수 있고,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를 알 준비가 되어있다. 그때 그의 삶은 "하느님의 은사를 불태우게"2티모 1,6 될 것이다. 하지만 은사의 불꽃이 자기가 아니라 '다른 어디'로부터 왔다는 사실을 그는 잘 알고 있다. 성령을 받기 위해서 당신이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다. 하느님의 내재하심을 위해 당신이 할 수 있는 일은 전혀 없다.로마 8,9; 갈라3,1-5 성령을 여러 교리 가운데 하나로 '믿으려'하지 말라. 그 대신 당신 안에 있는 깊은 샘물을 길어 올려라. 그러면 저절로 믿어질 것이다. 먼저 마차에 말을 매야 마차가 앞으로 나아갈 것이다.
동시에 이미 당신 안에 있는 성령을 '잃어버리기'위해 당신이 할 수 있는 일도 없다. 당신이 할 수 있는 일은 에페소 사람들에게 바오로가 말한 대로, 당신 안에 '봉인되어 있는 sealed, 에페 4,30' 하느님의 성령을 '슬프게'해드리지 않는 것이 전부다. 당신은 타고난 권리를 모를 수 있다. 당신이 그런 선물을 받은 줄 몰라 그 놀라운 열매를 즐기지 못할 수도 있다. 우리가 '죄인'이라고 부르는 많은 사람 이 아마 그런 사람일 것이다. 도덕적으로 열등한 사람이라기보다는 자기가 누군지, 누구에게 속한 존재인지를 모르는 사람, 자신의 타고난 존엄성과 중요성을 알지 못하는 사람이 '죄인'이다. 그들은 자기 안에 처음부터 있다는 것을 모르고 그것을 얻기 위하여 온갖 부질없는 고생을 다하고 있다. 얼마나 쓸데없는 짓인가! 그런즉 '죄인들'을 미워하거나 업신여길 게 아니라, 그들이 놓치고 있는 것을 안쓰럽게 생각할 일이다.
어째서 우리는 선물을 받았으면서 그것을 받은 줄 모르는 것일까? 아마도 하느님은 우리가 진심으로 원하고 스스로 선택하지 않으면 강제로 주고 싶어 하시지 않아서일 것이다. 그렇게 하여, 하느님과 우리 양쪽의 자유를 보존하면서 둘이 함께 사랑의 춤을 추는 것이다. 선물은 분명 우리 안에 있다. 그런데 우리 쪽에서 그것을 갈망하고 알아차려야 한다. 하지만, 그것이 일깨워지기 전에는 우리 안에 있는 줄을 알지 못한다. 이것은 또 하나의 역설이다. 믿음은 그것을 경험한 뒤에 비로소 분명해지는, 기쁨 충만한 깨달음이다. 그러나 그것을 향하여 우리는 여전히 여러 단계이 어둠을 통과하며 위험한 길을 걸어야 한다. 이제부터 당신은 당신이 빛 속에서 경험한 것을 어둠 속에서 기억하게 될 것이다. 그래도 당신 앞에 놓인 길은 언제나 어둠과 빛이 혼합된 길이리라.
유다-그리스도교 창조설화에서 인간은 '하느님의 모습대로'창세1,26지어졌다. 우리의 디엔에이DNA는 신성하다. 우리 안에 하느님이 사시게 된 것은 우리가 특별한 업적을 세우거나 의식儀式을 행해서가 아니다. 오직 은총으로 주어진 것로마 11,6; 에페 2,8-10인데, 우리가 그것을 깨닫고 그분을 사랑하게 되는 것이다. 때가 되면 우리는 자신의 한없는 신비에 압도당할 것이다. 다른 모든 사람과 마찬가지로, 같은 자비의 폭포 아래 서서 자격 없는 자에게 주어지는, 만유의 뿌리에 닿아있는 근본적인 은총을 받은 자신을 보게 될 것이다. '심연'이면서 '밑바탕'인 하느님을 체험하지 않고서는 지금 여기에서 있는 그대로의 참 자기를 옹글게 살 수 없거니와, 언제나 심연을 채우는 동시에 바탕을 흔드는 역설적인 하느님의 현존을 알 수도 없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