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ㆍ25전쟁 발발 당일 38선 동부전선, 동해안 쪽 방어는 8사단이 맡고 있었다. 이 사단도 초전에서 옆 중부 전선 가평-춘천-양구 방면의 6사단과 비견될 만한 선전(善戰)을 했다. 8사단은 장비와 인원을 잃지 않고 북한군에게 타격을 주며 축차적인 철수를 했다. 8사단 포병인 18포병대대의 분전을 소개한다.
전사에 크게 알려진 이웃 6사단의 16포병대대가 호쾌한 전투를 했다면, 8사단의 18포병대대는 처절한 전투를 겪었다고 하겠다.
[국군 포병과 M-3 105mm포]
1950년 6월 25일 대대장 장강석 소령(육사 5기)은 서울로 출장을 떠나 있었고, 포대장 3명 역시 교육을 받기 위해 서울로 출발한 상황이라서 대대 부관 이남구 대위가 3중대는 대대본부에서 대기하도록 하고 전포대장들이 지휘하는 2개 중대를 이끌고 출동을 했다.
대대는 사천면 미노리 사천 초등학교로 나아가 1중대를 사천 건너 석교리에, 2중대는 사천 초등학교 운동장에 배치하고 포를 방열했다. 이 곳의 위치는 대강 경포호 이북으로써 매봉에서 발원한 사천[沙川]이 동해안으로 흐르는 곳이다. 과거에는 명주군이었지만 지금은 강릉시가 되었다.
18포병대대는 포 방열 후에 양지말에 집결한 적에게 타격을 가했고, 석교리에 위치한 1중대는 적의 장거리포에 위치가 노출되어, 16:00경 사천 초등학교 서쪽의 밤나무 숲속으로 진지를 이동해야 했다.
[현재의 사천 초등학교]
하루가 지난 26일 교육을 갔던 3개 포대장들이 모두 귀대했고, 그 다음 날 27일 대대장도 귀대해서 전투를 지휘할 수가 있었다. 27일 동해안 방면의 적들은 대공세를 취해서 아군은 악전고투(惡戰苦鬪)를 해야 했다. 압도적인 병력의 적이 포병 대대의 전면에 쇄도하여 화력을 통제할 시간의 여유도 없었다.
그래서 각 포 단위로 사격하는 변칙적인 운용으로 적을 계속 포격하였는데 이때 각 중대장의 명령은 사격제원을 부여하는 사격명령을 내리는 것이 아니라 "각 포, 계속 쏴!"의 한 마디 뿐이었다. 이와 같은 포병들의 필사적인 저항은 주저항선을 돌파한 여세를 몰아 밀물처럼 밀어닥친 적의 진출을 지연시켰으며, 사단이 사천선[沙川線]에서 병력을 수용하고 지연 진지를 준비할 수 있는 시간을 갖게 하는 데에 크게 기여하였다.
사단장 이성가 소장은 전방 전투 부대가 분산되어 후퇴하자 화력지원 부대의 안전을 위해서 포병대대에게 철수 명령을 하달하였다. 그러나 포병대대 장병들은 공격하는 적의 기세를 일단 제압한 후 안전한 철수를 하기 위해서 포격을 줄기차게 퍼부었다. 이렇듯 사격에 열중하고 있을 때 갑자기 밤나무 밭으로 포진지를 이동하여 분전중인 제 1중대를 북한군이 기습했다.
이들은 북한군 육전대로써 후방인 경포 해안에 상륙하여 후방에서 기습하여 온 것이다. 맨 먼저 포병 관측반이 그들과 충돌하여 전방 관측병과 한명화 하사가 장렬하게 전사하였다. 다급해진 중대장 박동엽 대위는 영거리 사격으로 적을 제압하였으나, 끝내 적병들이 포진지에 몰려 들어와 치열한 백병전이 벌어졌다.
* 영거리 사격 : 포를 쏜 뒤 바로 포탄이 터질 수 있도록 조절하여 하는 사격. 가까운 거리의 목표물에 실시한다.
그런데 18포병대대 병사들은 거의 모두가 서북 청년단 출신으로서 실향의 뼈저린 아픔이 있었다.
* 서북 청년단 : 1946년 11월 월남한 청년들로 조직되어 반공운동의 선봉이 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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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군에 입대해서 싸운 서북 청년 단원들은 특히 그 용감성이 대단했다. 충주시 동락리 대첩에서 싸운 6사단 7연대 2대대도 서북 청년단들이 다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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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록 포병이지만 육박전에서 적 보병들에게 밀리지 않겠다는 결심이 강해 뒤로 물러서는 포병은 한 명도 없었다. 포병들은 소총, 곡괭이, 야전삽, 돌멩이 할 것 없이 닥치는 대로 손에 잡고 적과 맞붙어 피비린내 나는 육박전을 벌여 끝내는 적들을 격멸하였다.
[초기 국군 포병의 제식포 M-3, 기존 105mm포를 공수가 가능토록 포신을 줄이고 경량화함.]
이 날 18포병대대의 백병전과 직접 조준사격은 어느 전투에서도 그 유례가 드문 처절한 싸움이었고, 장병들의 용감성은 전사 상에 길이 빛날 한 장을 수놓았던 것이다. 1중대는 진내(陣內)에 몰려든 북한군 병사들을 모두 격멸하자 곧 영거리 사격을 계속하는 한편 포를 문(門)단위로 뽑아내서 철수를 했으며, 인접 2중대가 1중대 포들의 철수를 엄호했다.
그러나 대치한 적은 조금도 공격을 늦추지 않았으므로 1ㆍ3번포는 눈물을 머금고 폐쇄기만 분해하여 가지고 철수하였다. 이 때 1번포 사수는 왼팔에 관통상을 입어 선혈(鮮血)로 시뻘겋게 물들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폐쇄기를 뽑아내어 그 무거운 것(43kg)을 한손에 들고 나옴으로써 보는 이로 하여금 저절로 머리가 숙여지게 하였다.
포차 운전병 심우택은 백병전 상황에서 포차로 진지 이탈 중 전사하였다. 장사로 소문난 대대 최서종 중사는 그가 미처 야전용 유선통(wire drum)을 가지고 나오지 못한 것을 뒤늦게 알아 차렸다. 그는 "나의 무기가 그것인데 어찌 군인이 무기를 버릴 수가 있느냐"라고 하면서 동료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적중으로 들어갔으나 얼마 후 콩 볶는 듯한 총소리만 들려 왔을 뿐 영영 그는 돌아오지 않았다.
2중대장 김영택 대위는 1중대 진내에 몰려든 북한군에게 연속적인 사격을 집중하여 이를 교란ㆍ격퇴시켰다. 같은 중대 관측장교 김용운 소위는 "그 때의 상황은 참으로 처참했다. 적의 포격이 어찌나 치열했던지 포진지에 떨어진 포탄이 터지면서 포 폐쇄기를 잡은 포사수의 몸뚱이가 날아가고 끊어진 손목만 남았는데 다른 병사가 폐쇄기에 엉켜 붙은 그 손목을 떼어내고 다시 사격을 계속했다." 라고 처절했던 상황중의 한 장면을 되새기며 증언하였다.
이와 같이 사단 포병이 사천 초등학교 일대에서 고군분투(孤軍奮鬪)하고 있을 때 8사단 21연대 3대대가 증원되고 적의 기세 또한 크게 꺾였다. 18포병대대는 이 틈에 21연대 3대대의 엄호를 받으며 난곡동 오죽헌 부근으로 철수하고, 13:00부터는 다시 화력 지원을 계속하였다.
최서종 중사는 비록 전사했지만 그의 투철한 책임감과 군인정신은 18포병대대 전통의 밑거름이 되었으며 구전되는 사천 전투 무용담에서 빼어놓지 못할 화제중의 꽃이 되었다.
1950년 6월 27일 사천 초등학교 일대에서 전개된 18포병대대의 혈전은 이곳 주민들에게 깊은 감명을 주었다. 그 뒤 피난갔던 주민들이 돌아오자 그들은 전투장에 흩어진 유해를 한데 모아 안장하였다.
[제 18포병대대 전사 묘비, 이북이 고향이라 영현을 거두어줄 유족들이 없었다.]
그로부터 20년의 세월이 흘러간 1970년 3월 1일 사천 초등학교로 부임한 김유진 교장이 이 사실을 알고 면 유지 염재근씨(명주군 사천면 미노리)를 비롯한 관내 기관장들의 협조 아래 무명용사 3위의 묘를 복원하고 호국 영현으로 모시고 추모하였다.
다시 10년이 지난 1980년 3월에는 포병 출신인 사천면 예비군 중대장 장천[張天]씨가 수소문 한 끝에 그 3위의 영령 신원이 최종서, 한명화, 심우택임을 밝혀냈다. 내용을 알게 된 18포병대대 전우회와 사천면 유지들은 사천 초등학교 뒷산에 묘비를 세우고 매년 현충일에 참배 행사를 개최하고 있다.
1991년 정부의 지원으로 깅릉지구 포병 전공비가 건립되었다. 이 글을 쓰면서 강릉시 사천면 사무소에 확인해본바 이들 산화 장병 3위의 묘와 추모비는 현재도 그 위치에 있으며 잘 관리되고 있다고 말해준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