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종실록 지리지 광주목, 죽산현
세종 지리지 / 경기 / 광주목 ⊙ 광주목(廣州牧)
목사(牧使) 1인, 판관(判官) 1인, 유학 교수관(儒學敎授官) 1인. 백제 시조(百濟始祖) 온조왕(溫祚王)이 한(漢)나라 성제(成帝) 홍가(鴻嘉) 3년(18) 계묘에 국도(國都)를 위례성(慰禮城)에 세웠다가, 13년 을묘에 이르러 임금이 여러 신하에게 이르기를, “내가 보매, 한수(漢水) 남쪽의 땅이 기름지고 걸으니, 마땅히 여기에 도읍을 세워서 장구한 계교를 도모하고자 하노라.” 하고, 드디어 한산(漢山) 아래에 나아가 목책[柵]을 세우고, 위례성의 민호(民戶)를 옮기며, 궁궐을 짓고, 14년 병진 정월에 도읍을 옮기고 남한성(南漢城)이라 하다가, 3백 76년을 지나 근초고왕(近肖古王) 24년 신미에【곧 동진(東晉) 간문제(簡文帝) 함안(咸安) 원년(元年).】 도읍을 남평양(南平壤)에 옮기고 북한성(北漢城)이라 하였다.
당(唐)나라 고종(高宗) 현경(顯慶) 5년 경신에 당나라 장수 소정방(蘇定方)이 백제를 치는데, 신라 태종왕(太宗王)이 김유신(金庾信)을 보내어 협공(夾攻)하여 〈백제를〉 멸하고, 당나라 군사가 다 돌아가매, 문무왕(文武王)이 차츰 그 땅을 거두어 차지하여, 3년 갑자에【인덕(麟德) 원년(元年).】 한산주(漢山州)로 고치고, 8년 경오에【함형(咸亨) 원년.】 남한산주(南漢山州)로 하였다가, 경덕왕(景德王) 15년 정유에【곧 당나라 숙종(肅宗) 지덕(至德) 2년.】 한주(漢州)로 고쳤고,【신라가 이미 고구려와 백제를 병합하매, 신문왕(神文王)이 비로소 신라 경내(境內)의 사벌(沙伐)·삽량(歃良)·거열(居列)의 3주(州)와 백제의 옛땅 웅천(熊川)·완산(完山)·무진(武珍)의 3주와 고구려의 옛땅 한산(漢山)·우수(牛首)·하서(河西)의 3주로써 구주(九州)의 수를 갖추었는데, 경덕왕 때에 이르러 구주(九州) 및 모든 군현(郡縣)의 이름을 모두 고치었으므로, 뒤에 대개 신라가 고쳐서 모모(某某)로 하였다고 한 것은 모두 이 해의 일이다.】
고려 태조(太祖) 23년 경자에【곧 진(晉)나라 고조(高祖) 천복(天福) 5년.】 광주(廣州)로 고치고, 성종(成宗) 2년 계미에【곧 송(宋)나라 태종(太宗) 태평흥국(太平興國) 8년.】 처음으로 12주·목(州牧)을 두니, 〈광주가〉 곧 그의 하나이다. 〈성종〉 14년 을미에【곧 송나라 지도(至道) 원년.】 12절도사(節度使)를 두고 광주 봉국군 절도사(廣州奉國軍節度使)라 하였다가, 현종(顯宗) 3년 임자에 절도사를 폐하여 안무사(按撫使)로 고치고, 9년 무오에【곧 송나라 진종(眞宗) 천희(天禧) 3년.】 8목(牧)을 정해 둠에 따라, 광주목(廣州牧)이 되었다. 본조(本朝)에서도 그대로 따랐다. 별호(別號)는 회안(淮安)이다.【성종(成宗) 10년 신묘에 주군(州郡)의 별호(別號)를 정하였는데, 광주를 회안(淮安)이라 하니, 곧 송나라 태종(太宗) 순화(淳化) 원년이다. 뒤에 순화(淳化)에 정한 바라 한 것은 모두 이를 말함이다.】
검단산(黔丹山)【주(州) 동쪽에 있으니, 고을 사람들이 진산(鎭山)이라고 일컫는다.】 도미진(渡迷津)【주(州) 동북쪽에 있으며, 나룻배가 있다.】 그 서쪽을 진촌진(津村津)이라 하며,【주(州) 북쪽에 있으니, 나루머리[津頭]에 수참(水站)을 두었고, 참선(站船)이 15척이다.】 또 그 서쪽에 광진도(廣津渡)가 있다.【도승(渡丞)이 있어서 〈사람의〉 드나드는 것을 조사하는데, 좌도 수참 전운 판관(左道水站轉運判官)이 겸하여 조운(漕運)을 관장한다.】 사방 경계[四境]는 동쪽으로 양근(楊根) 용진(龍津)에 이르기 30리, 서쪽으로 과천(果川)을 지나서 수원(水原) 경계의 성곶이[聲串]에 이르기 85리, 남쪽으로 이천(利川)의 양지(陽知)에 이르기 45리, 북쪽으로 양주(楊州)에 이르기 11리요, 동서(東西)가 1백 15리, 남북(南北)이 56리이다.
헌릉(獻陵)은 태종 공정 대왕(太宗恭定大王)과 원경 왕후(元敬王后)를 합장하였다.【주(州) 서쪽 대모산(大母山)의 양지쪽 건해산(乾亥山)에 있으니, 건좌 손향(乾坐巽向)이다. 능 앞에 신도비(神道碑)를 세우고, 능직(陵直)·권무(權務) 2인과 수호군(守護軍) 1백 호를 두고, 매호마다 밭 2결(結)을 주었다.】 문묘(文廟)【주(州) 북쪽에 있다. 나라에서 각도 주(州)·부(府)·군(郡)·현(縣)에 모두 문묘를 두고 향교(鄕校)라 한다. 그 생도(生徒)의 액수(額數)는, 유수관(留守官)에는 50명, 목(牧)과 도호부(都護府)에는 40명, 군(郡)에는 30명, 현(縣)에는 15명으로 하며, 제전(祭田)·학전(學田)과 노비(奴婢)를 주는데, 각기 차이를 둔다. 도호부(都護府) 이상은 모두 교수관(敎授官)을 두고, 군과 현에는 혹은 교수관, 혹은 교도(敎導)를 두며, 만일 민호(民戶)가 5백 호가 차지 못하면 학장(學長)을 두어 생도들을 가르치게 한다. 뒤에는 각 고을[邑]에 다시 문묘를 적지 아니한다.】
호수는 1천 4백 36호, 인구는 3천 1백 단(單)10명이며, 군정(軍丁)은 시위군(侍衛軍)이 1백 22명이요, 선군(船軍)이 2백 63명이다.【잡색군(雜色軍)은 다 토정(土丁)을 뽑아 군사를 삼았으므로 같이 적지 아니한다. 나머지 고을도 〈모두〉 이와 같다.】 토성(土姓)이 3이니, 이(李)·안(安)·김(金)이요, 가속성(加屬姓)이 3이니, 박(朴)·노(盧)·장(張)이요,【이 6성은 옛 문적과 지금의 본도(本道) 관록(關錄)에 의거한 것이며, 그 가속성(加屬姓)이란 것은 옛 문적에 기록되어 있는 바이니, 뒤에도 모두 이와 같다.】 망성(亡姓)이 5이니, 윤(尹)·석(石)·한(韓)·지(池)·소(素)이다.【대개 망성(亡姓)이라 한 것은 옛 문적에만 있고 지금은 없음을 이름이니, 뒤에도 모두 이와 같다.】
땅은 기름지고 메마른 것이 서로 반반 되며, 간전(墾田)이 1만 6천 2백 69결(結)이다.【논이 4분의 1이 넘는다.】 토의(土宜)는 오곡(五穀)【오곡(五穀)의 주석(註釋)을 살펴보면, 모든 책이 같지 아니하다. 오직 《주례(周禮)》 직방씨(職方氏)에 “예주(豫州) 땅에 곡식의 5종류가 알맞게 된다.” 함에, 안사고(顔師古)가 주를 내되, “기장[黍]·피[稷]·콩[菽]·보리[麥]·벼[稻]”라 하였고, 주자(朱子)가 《맹자(孟子)》의 오곡을 주내되, 안사고의 말을 좇았으므로, 이제 그를 따른다.】·잡곡(雜穀)과 대추[棗]·칠(漆)·닥[楮]·왕골[莞]·뽕[桑]이요, 토공(土貢)은 느타리[眞茸]요, 약재(藥材)는 돌고드름[禹餘糧]·안식향(安息香)·사자발쑥[獅子足艾]·현호색(玄胡索)·진봉(蓁芃)이요, 토산(土産)은 은구어(銀口魚)이다.【주(州) 서쪽 어원(御院) 앞 내에서 난다.】 염소(鹽所)가 1이요,【분(盆) 1, 구(區) 2이다.】 자기소(磁器所)가 4이니, 하나는 주(州) 동쪽 벌내[伐乙川]에,【상품(上品).】 하나는 주(州) 동쪽 소산(所山)에, 하나는 주(州) 남쪽 석굴리(石掘里)에,【모두 하품(下品)이다.】 하나는 주(州) 동쪽 고현(羔峴)에 있다. 도기소(陶器所)가 3이니, 하나는 주(州) 남쪽 초현(草峴)에,【중품(中品).】 하나는 주(州) 동쪽 초벌리(草伐里)에, 하나는 주(州) 서쪽 배곶이[梨串]에 있다.【모두 하품(下品)이다.】
일장 산성(日長山城)은 주치(州治)의 남쪽에 있다.【높고 험하며, 둘레가 3천 9백 93보(步)요, 안에 군자고(軍資庫)와 우물 7이 있는데, 가뭄을 만나도 물이 줄지 아니한다. 또 밭과 논이 있는데, 모두 1백 24결(結)이다. 《삼국사(三國史)》에는, “신라 문무왕(文武王)이 비로소 한산(漢山)에 주장성(晝長城)을 쌓았다.”고 하였다.】
역(驛)이 4이니, 덕풍(德豐)·경안(慶安)·봉안(奉安)·낙생(樂生)【옛 안박(安菐).】이요, 목장(牧場)이 2이니, 하나는 주(州) 서쪽 마전포(麻田浦)에,【둘레 20리.】 하나는 주(州) 서쪽 조포평(助布坪)에 있고,【둘레 18리.】 봉화(烽火)가 1곳이니, 천천산(穿川山)은 주(州) 서쪽에 있다.【남쪽으로 용인(龍仁)의 석성(石城)에 응하고, 북쪽으로 서울 목멱산(木覓山)에 응한다.】 관할[所領]은, 도호부(都護府)가 1이니, 여흥(驪興)이요, 군(郡)이 1이니, 양근(楊根)이요, 현(縣)이 6이니, 음죽(陰竹)·이천(利川)·과천(果川)·천녕(川寧)·지평(砥平)·금천(衿川)이다. 【원전】 5 집 615 면 ---------------------------------------------------
세종 지리지 / 충청도 / 청주목 / 죽산현 : 조선 초에 죽산은 충청도에 속했다.
◎ 죽산현(竹山縣) 본래 고구려의 개차산군(皆次山郡)인데, 신라에서 개산군(介山郡)으로 고쳤고, 고려에서 죽주(竹州)로 고치었다. 성종(成宗) 14년에 단련사(團練使)를 두었다가, 목종(穆宗) 8년 을사에 단련사를 폐하였고, 현종(顯宗) 9년에 광주(廣州) 임내에 붙이었다. 명종(明宗) 2년 임진에 비로소 감무(監務)를 두었고, 본조 태종(太宗) 13년 계사에 예에 의하여 죽산 현감(竹山縣監)으로 고쳤다. 별호는 음평(陰平)【순화(淳化) 때 정한 것이다.】 또는 연창(延昌)이다.
사방 경계는 동쪽으로 경기(京畿) 양지(陽智)에 이르기 16리, 서쪽으로 안성(安城)에 이르기 17리, 남쪽으로 진천(鎭川)에 이르기 21리, 북쪽으로 양지(陽智)에 이르기 36리이다.
호수는 4백 70호, 인구가 2천 1백 18명이다. 군정은 시위군이 28명이요, 선군이 1백 35명이다. 토성(土姓)이 9이니, 박(朴)·최(崔)·안(安)·양(梁)·이(李)·유(庾)·민(閔)·김(金)·음(陰)이다. 땅이 기름진 것이 적고, 메마른 것이 많으며, 기후는 차다. 간전(墾田)이 5천 7백 89결이요,【논이 9분의 4가 된다.】 토의(土宜)는 기장·벼·콩·조·팥·메밀·참깨·밀이다. 토공(土貢)은 대추·칠(漆)·족제비털·잡깃[雜羽]·종이·삵괭이가죽[狸皮]이요, 약재(藥材)는 인삼이다.
역(驛)이 2이니, 분행(分行)·좌찬(佐贊)이요, 봉화가 1곳이니, 현의 북쪽 건지산(巾之山)이다. 일명(一名) 검단산(劎斷山)이라 한다.【동쪽으로 충주(忠州) 망이성(望伊城)에, 서쪽으로 용인(龍仁) 석성(石城)에 응한다.】 【원전】 5 집 628 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