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산 14세 안지원 선조의 묘소-해남 록산면 대천동
9806.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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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흥 20(順興 二十世)
죽산 14세(竹山 十四世)
안지원(安之遠) 자인백(字仁伯)
之遠
字仁伯
生仁祖辛未
卒肅宗丙戌
配順天金氏義倫女
墓海南祿山面大川洞上乙坐合窆○乙譜不載
자 인백
생 인조 신미
졸 숙종 병술
배 순천 김씨 의륜 녀
묘 해남 록산면 대천동 상을 좌 합폄○부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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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 인조(仁祖) 신미(辛未)는 인조 9년(서기 1631년)이다.
주) 숙종(肅宗) 병술(丙戌)은 숙종 32년(서기 1706년)이다.
주) 배(配): 배우자가 순천 김씨 의륜이다.
주) 묘(墓): 해남(海南) 록산면(祿山面) 대천동(大川洞)
상(上) 을좌(乙坐) 합폄(合窆)
주) 합폄(合窆): 합장(부부의 묘를 함께 쓰다)
주) 을보 부재(乙譜 不載): 죽산 두 번째 족보인 신유보(辛酉譜) 3책(순조6년,1806년)에는 기록이 없으나 세 번째 족보인 을묘보(乙卯譜) 7책(철종6년,1855년)에 족보에 내용을 기록한다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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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 인조(仁祖) 신미(辛未)는 인조
9년(서기 1631년)이다.
주) 숙종(肅宗) 병술(丙戌)은 숙종 32년(서기 1706년)이다.
주) 배(配): 배우자가 순천 김씨 의륜이다.
주) 묘(墓): 해남(海南) 록산면(祿山面) 대천동(大川洞)
상(上) 을좌(乙坐) 합폄(合窆)
주) 합폄(合窆): 합장(부부의 묘를 함께 쓰다)
주) 을보 부재(乙譜 不載): 죽산 두 번째 족보인 신유보(辛酉譜) 3책(순조6년,1806년)에는 기록이 없으나 세 번째 족보인 을묘보(乙卯譜) 7책(철종6년,1855년)에 족보에 내용을 기록한다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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록산면(祿山面):
조선시대에(朝鮮時代)에 해남은, 현내면(縣內面), 비곡면(比谷面), 청계면(淸溪面), 마포면(馬浦面), 산포일도면(山浦一道面), 산포이도면(山浦二道面), 황원면(黃原面), 장내면(場內面), 록산면(祿山面), 화산면(花山面), 현산면(縣山面), 은소면(銀所面) 등 12면으로 구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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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 대천동(大川洞): 현재 지명은 삼산면 평활리에 있는『대냇골』이다.
대냇골을 옛날에는 대천동(大川洞), 죽천동(竹川洞), 죽천점(竹川店), 죽천평(竹川坪)이라고 했다.
양촌 남쪽 위에 있는 골짜기가 바로 대천동(大川洞)이다. 이곳은 원래 대나무가 많아 조선시대에 화살은 만드는 곳이며, 대숲과 주막이 있었다.
주)평활리(平活里): 본래 해남군 녹산면(祿山面) 지역으로, 평지에 새로 마을을 이룩하였으므로, 평활이라 하였다.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신활리, 양촌리, 산림리, 신기리, 중리 일부 지역을 병합하여 평활리라 하여 삼산면에 편임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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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삼산면 평활리 가는 길은 해남읍에서 버스를 타고, 평활리에서 하차하면, 마을아래 저수지가 있다. 이 저수지는 원래 만수동(萬水洞, 萬樹洞)이라는 마을로 양촌 동북쪽에 위치한 마을이었으나, 1953년 양촌저수지를 만듦에 따라 저수지 안에 침수되어 폐촌이 되었다.
※안지원(安之遠) 선조의 묘소가 있는 정확한 장소는 해남읍 북일면 운전리 산 189번지이다. 현재 임야 소유자는 북일면 379번지에 거주하는 김기종 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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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한국지리 지총(志叢)서』,『읍지(邑誌)』4권, (아세아문화사,1983),P.624.
해남군 발행,『마을 유래지(由來誌』, (광주일보 출판국,1987년),P.26. 해남군청 1층에
소장되어 있음. 서기1432년(세종14년)에 편찬된 인문지리서『신증동국여지슬람』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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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천동의 선산은 해남 삼산면 연정리에 사는 최장옥 씨의 당숙이 우리 종친회에서 제공한 문종 전답을 지으면서 선산을 관리하여 왔으나, 이미 세상을 떠났다.
다만 조카되시는 최장옥씨가 광주에서 거주하고 있으나(전화번호: 062-55-2941), 자신의 당숙이 선산을 관리하고 있었다는 내용만 할 뿐 정확한 선산의 위치를 알기 못했다.
우리의 선산을 관리해 온 최장옥씨의 당숙되시는 분은 이미 오래전에 고인이 되었고, 그 아들인 최상섭 씨가 생존해 있다는 소식을 최장옥씨에게 들었다. 최상섭 씨는 원래 화산면 연정리에서 살다가 황산면으로 이사하여 산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러나 그 아들도 우리의 선산을 알 가능성은 없어 보인다.
해남의 선산에 가보셨던 분들
지금으로부터 약 40-50년 전에 용산의 고안세배 당숙님과 안창배(昌培) 당숙님 그리고 현재 진도군 지산면에 살고 계시는 안삼철 당숙님 3인이 산소 관리인의 인도를 받고 찾아 갔었다.
그러나 안삼철 당숙님은 당시 중학생이었기 때문에 산소가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증언하셨다.
내가(안병삼) 고안세배 당숙과 안삼철 당숙을 모시고 약 10여 년 전에 선산이 있다는 곳에 도착했다.
그러나 20-30년의 오랜 세월이 지난터라 풀만 있던 곳에 많은 나무들이 자라 숲을 이루고 있었기 때문에 두 분다 정확한 곳을 찾지 못했다. 그 지역 일대를 샅샅히 뒤졌으나 도무지 찾을 길이 없어 포기하고 돌아 올 수 밖에 없었다.
그 뒤 내가(안병삼) 광주 종친회, 장흥, 강진, 해남 등의 종친들을 만나 오래된 족보의 기록들을 재확인 하는 한편, 족보의 기록에 나타나 있는 지명 등을 집중적으로 살펴보기 위해 각종 인문지리서 등을 살펴 본 결과 족보의 기록이 신빙성이 높다는 판단을 내리고 다시 용산에 사시던 고안세배 당숙님을 모시고 해남에 도착하여 족보 기록에 의존하여 찾아 본 결과 몇 개의 묘를 찾을 수 있었다.
그러나 비석이 없어 누구의 묘인지 알 수가 없었으며, 나침반을 가지고, 족보기록에 근거하여 묘의 방위를 정확하려고 하였으나, 확실한 단정을 내릴 수가 없었다. 따라서 벌초를 하고, 표시를 남긴 후에 돌아왔다.
그 소식은 전해들은 목포의 안영화 당숙이 혼자 그곳을 방문하여 소수병 속에 편지를 써서 넣어 놓고 산주인이나 산소의 주인이 나타나기를 기다렸다. 그 후 산주인이 연락하여 산을 구입 할 용의가 있느냐는 질문을 했으나, 우리 측에서는 그 어떠한 답변도 주지 못했다. 그것은 묘의 위치를 정확하게 알 수 없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당숙들이 해남의 산소를 찾아 갔던 시절은 우리나라가 정치적으로 사회적으로 경제적으로 매우 어렵고 힘든 시절이었다. 어렵고 힘든 세월을 살았던 탓에 선조들이 묻힌 선산을 제대로 관리하지 못하여 잃어 버린 것은 모든 후손들의 잘못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안병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