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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la Scriptura Tota Scriptura
예레미야 17장 9절
TULIP1 전적 타락
올해가 종교개혁 500주년이 되는 해입니다. 그래서인지 저희 교단(합신)에서도 종교개혁에 관하여 생각할 수 있도록 1년 동안 종교개혁과 관련된 주제들, 예를 들어 다섯 가지 솔라(오직 성경, 오직 은혜, 오직 믿음, 오직 그리스도, 오직 하나님께 영광)와 칼빈주의 5대 교리(전적 타락, 무조건적 선택, 제한속죄, 불가항력적 은혜, 성도의 견인) 등을 묵상하고 설교할 수 있도록 1월부터 12월까지 관련된 본문을 보내온 적이 있습니다. 이런 내용들을 살피는 것이 뜻깊고 유익한 일이긴 하지만 저희 교회가 계속해서 살펴오던 본문들이 있어 1년 동안 멈추는 것은 안 되겠다는 생각을 가졌습니다. 그러다 주일 오후에 정 목사님의 글 중 소위 칼빈주의 5대 교리라고 일컬어지는 내용, 그러니까 도리트 신조와 관련된 것이 있어 그 부분을 좀 살피고 가야겠다는 생각을 가졌는데, 아예 그 내용을 성경 본문을 통해서 함께 살펴보는 것도 유익하겠다는 생각을 가지게 되어 오늘부터 몇 주간 칼빈주의 5대 교리라고 일컬어지는 내용을 살펴보고자 합니다.
우선 오늘 본문, 예레미야 17장 9절을 보시면 인간이란 어떤 존재인가와 관련하여 말씀하시는 구절을 보게 됩니다.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 누가 능히 이를 알리요마는” 여기서 우리는 두 가지 사실을 알 수 있는데, 첫째는 인간의 마음이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하다는 것이고, 둘째는 그런 마음에 대하여 인간 스스로 알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특히 본문 바로 앞에서 하나님께서는 무엇을 말씀하시느냐 하면 여호와를 떠난 자는 저주를 받지만 여호와를 의지하는 자는 복을 받는다고 말씀하십니다(렘17:5-8). 그러나 “인간 스스로 하나님을 의지할 수 있는가? 하나님을 의뢰하고 그분에게로 돌아갈 수 있는가? 아니 하나님을 찾기라도 할 수 있는가?” 했을 때 성경의 답변은 결코 그럴 수 없다는 데 있습니다. 왜냐하면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이 사람의 마음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마음인데 어떻게 참되고 거룩하신 하나님께로 돌아갈 수가 있겠습니까? 당연히 복이 아니라 저주를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10절에서 말씀하시는 것처럼 그 행위와 그 행실대로 보응을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여러분, 성경을 따라 고백하고 있는 우리의 교리 가운데 전적 타락(Total Depravity)이라는 교리가 있습니다. 전적 타락이라는 말은 죄로 말미암아 사람이 완전히 타락했다는 말입니다. 타락하지 않은 부분이 하나도 없다는 말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마음에 대해 말하고 있지만 마음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것이 거짓되고 심히 부패하였다고도 볼 수 있습니다. 우리의 생각, 우리의 감정, 우리의 의지까지 타락하지 않은 부분이 없다는 것이고, 타락하였으되 철저히, 완전히 타락했다는 말입니다.
실제로 성경은 어떻게 말씀하기도 하는가? 창세기 6장 5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여호와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가득함과 그의 마음으로 생각하는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가득하다는 것은 세상의 어느 한쪽은 죄악으로, 다른 한쪽은 죄악이 덜한, 혹은 죄와는 상관없는 그런 곳이 있다는 게 아니라, 전 세계가 죄악으로 완전히 팽배해 있으며 그 결과로 하나님 보시기에 기뻐하실만한 것이 세상의 어느 구석에도 도저히 찾아 볼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세상이 그렇게 된 것은 무엇 때문인가? 세상 자체보다는 세상에 살고 있는 사람들 때문인데, 창세기 6장 역시 예레미야 선지자와 다를 바 없는 말씀을 증거 합니다. 즉 사람의 마음으로 생각하는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하기 때문이란 것입니다. 인간의 전적 타락이란 바로 이런 의미입니다. 사람의 마음으로 생각하는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하다는 것이고, 마음의 생각 그리고 계획만이 아니라 그로부터 나오는 모든 행동들이 그러하다는 것입니다.
물론 이 문제에 있어 항상 반론을 제기하는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착한 사람이 있다는 것입니다. 모두가 다 그런 것은 아닐지라도 선한 행동을 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질문은 이미 기준 자체가 다르다는 것을 인식해야 합니다. 성경이 말하고 있는 기준은 ‘사람이 볼 때’가 아닙니다.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이십니다. 때문에 지금 성경이 말하고 있는 내용은 사람의 마음이 죄악으로 아주 철저하게 감염되어 있기 때문에 그 전체가 다른 것은 전혀 제시하지 못하고 오직 정죄 받을 것만을 내고 있다는 것입니다. 혹 사람이 볼 때 착하고 선한 것조차 실상 하나님 앞에서는 정죄 받을 만한 것만을 내놓고 있다는 것입니다.
특히 창세기 6장과 관련하여 칼빈은 ‘항상’이라는 단어와 관련해 주석할 때 이렇게 말하기도 합니다. “세상은 그 당시에 그 자체의 죄악으로 대단히 강퍅해 있었으며 어떤 보수를 한다거나 또는 잘못을 뉘우치는 그 어떤 감정을 느끼는 것에서는 아주 거리가 멀었으며 도저히 불가능한 것이어서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점점 더 악화일로에 있었던 것을 의미하고 있는 것이다. 더 나아가서, 그것은 며칠간의 어리석음이 아니라 뿌리 깊은 철저한 타락이었으니 그것은 세습적인 권리로 어린이들의 자기들의 부모들로부터 받아서 그들의 후손들에게 물러 주고 있는 타락이다.”
창세기 6장뿐만 아니라 로마서 3장도 전적 타락을 말할 때 자주 언급합니다. “기록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함께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롬3:10-12) 여기 보면 ‘기록된 바’라고 말하고 있는데, 시편 14편 그리고 거의 같은 내용을 반복하고 있는 시편 53편을 인용하고 있는 내용입니다(시14:1-3, 53:1-3). 특히 바울은 시편을 인용하면서 모든 인류에 대하여 말하는데, 모든 인류 가운데 의인이 있는가? 한 사람도 없다고 말합니다. 깨닫는 자는 있는가? 다시 말해 자기 자신에 대해 정확하게 알고 있는 자가 있는가? 그것 역시 없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함께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가 없나니 하나도 없다고 말합니다. 물론 이때 선이란 하나님 앞에서의 선입니다. 사람들이 말하는 그런 선이 아닙니다.
여러분, 인간이 전적으로 타락했다는 것은 이런 점에서 결코 부인할 수 없는 진리입니다. 부분적 타락이 아닙니다. 타락했지만 타락하지 않은 부분도 있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성경은 의인이 없나니 하나도 없다고 말합니다. 심지어 선을 행하는 자가 없나니 하나도 없다고 말합니다. 하나님 지식도 없어서 하나님을 찾지 않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에 대한 반감만 있을 뿐입니다. 시편 2편을 통해 말하는 것처럼 여호와와 그의 기름 부음 받은 자를 대적하며 그분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발버둥 칠뿐입니다(시2:2-3).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어서 이런 모습인데 이웃과의 관계는 어떻겠습니까?
실제로 아담의 타락 이후 아담으로부터 난 자들, 즉 형제 사이에 살인이 있었다는 것은 굉장히 충격입니다. 그러나 죄로 말미암은 타락이 무엇인지를 그것보다 더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사건도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율법을 통해 살인하지 말라는 계명에 대하여 실제 살인만이 아니라 그 마음으로 품는 악한 생각들까지 살인죄와 같다고 말씀하고 있으니, 누가 이웃 사랑에 있어 흠 없이, 점 없이 실천할 수 있겠습니까? 가장 가깝다고 할 수 있는 부부부터 부모와 자녀, 그리고 형제 관계 속에서 끊임없이 갈등과 다툼으로 치닫는 것은 인간이 타락한 결과로 나타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다시 본문으로 오셔서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고 할 때 방금 말씀드린 창세기 6장과 로마서 3장의 이해가 여기 있는 것입니다. 만물보다 거짓되다는 비교급 때문에 최상급으로 말할 수 없는가? 다시 말해 전적으로 타락했다고 볼 수 없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심히 부패하다고 말하기 때문에 완전히 부패된 것은 아니라고 말할 수 있는가? 그럴 수 없습니다. 아담의 타락 이후 모든 사람은 어느 누구도 예외 없이 마음으로 생각하는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입니다. 때문에 의인이라고 불릴 수 있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선이라는 것을 내어놓을 사람도 한 사람도 없습니다. 로마서 3장 23절에서 말하는 것처럼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는 상태가 되고 말았습니다.
그럼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사람의 마음이라고 할 때 처음부터 그런 모습으로 있었는가? 달리 말하자면 첫 사람부터 그런 모습으로 창조되었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창세기 1장을 보시면 창조의 모든 역사 속에서 하나님은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는 말씀을 하십니다. 달리 말하면 하나님의 창조 역사 속에 죄라는 것이 있었는가? 없었다는 것입니다. 당연히 인간을 창조하실 때 인간에게서 죄의 흔적을 발견할 수 있었는가? 결코 없었습니다. 특별히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창조하실 때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셨다고 말씀하십니다(창1:27). 하나님의 형상이란 무엇인가? 여기에 대해 여러 가지 내용이 있지만 가장 기본적인 내용은 이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지식, 의, 거룩과 같은 성령의 열매들이 인생의 기초와 틀이 되도록 지으셨다는 것입니다(골3:10, 엡4:24 참조). 때문에 하나님 지식이 있었고 이웃에 대한 지식도 있었습니다. 기록된 율법은 아직까지 없었지만 이미 아담 안에 그런 율법에 대한 이해가 분명 있었습니다. 그런 이해와 더불어 의와 거룩의 열매를 맺을 수 있었으며, 뿐만 아니라 그런 열매를 맺으며 살도록 의롭게, 거룩하게 지음 받았습니다. 심지어 하나님께서 모든 만물을 다스리는 것처럼 인간에게도 하나님과의 교제 안에서 다른 피조물들을 다스릴 수 있는 권한까지 주셨습니다. 이 모든 것을 보시고는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고 말씀하셨던 겁니다.
그러나 성경의 기록을 따라 ‘나타난 일’(신29:29)로 말씀드리자면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것, 즉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창2:17)는 말씀에 대하여 불순종함으로 처음 받았던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말았습니다. 하나님처럼 되어 보라고 유혹한 사탄의 꾐에 넘어가 그 스스로 교만해져 하나님을 반역하고 말았던 겁니다. 문제는 아담이 모든 인류의 대표라는 것과 대표이기 때문에 그의 죄가 우리에게 전가된다는 데 있습니다. 로마서 5장 12절입니다. “그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들어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
기독교 신앙에 있어 가장 중요한 것 중 하나가 이것입니다. 자신이 죄인이라는 것을 인정하는 것! 그러나 단순히 자기 자신이 지은 죄로 말미암아 죄인이라고 인정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모든 인류는 아담 안에서 죄를 지었고 그와 함께 타락했다는 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신학적 용어로 하자면 자범죄만이 아니라 원죄를 인정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럼 원죄란 무엇인가? 간혹 원죄를 아담이 처음으로 지은 죄로 오해하는 경우가 있는데, 원죄는 아담이 지은 최초의 죄가 아닙니다. 아담의 죄로 말미암아 이후 자연적 출생으로 태어나는 모든 이들이 갖게 되는 죄가 원죄입니다. 그러니까 자범죄를 짓지 않더라도 태어날 때부터, 아니 어머니의 뱃속에 있을 때부터 인간은 원죄를 가지고 있으며, 그렇기 때문에 자범죄를 짓지 않더라도 죄인이라고 불릴 수밖에 없습니다. 특히 원죄는 무엇으로 구성되어 있는가 했을 때 죄책과 부패로 구성되어 있다고 말합니다. 죄책은 죄에 대하여 책임이 있다는 말로서 아담의 죄에 대하여 우리 역시 책임이 있다는 것을 뜻합니다. 그가 죄를 지었기 때문에 우리와 상관없다가 아니라 그가 모든 인류의 대표로 세움 받았기 때문에 그의 죄에 대한 책임은 그만의 것이 아니라 우리의 책임이기도 하다는 것입니다. 부패는 하나님 보시기에 심히 좋았던 상태에서 벗어난 상태, 다시 말해 하나님께서 선하고 정결하게 지으셨지만 그런 본성을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파괴되고 악하게 되고 더럽게 된 것을 말합니다. 그래서 인간은 죄를 배우지 않고도 죄를 짓는 겁니다.
이런 원죄, 특별히 부패된 본성으로부터 자범죄가 나오는데, 우리가 죄를 지으며 살아갈 수밖에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가 선을 행할 수 없다고 말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죄를 지으며 살기 때문에 죄인이 아니라 죄인이기 때문에 죄를 지으며 살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우리의 전 본성이 부패했기 때문에 선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을 내놓을 수 있는가? 결코 없습니다. 앞서도 말씀을 드렸지만 마음으로 생각하는 모든 계획이 악할 뿐입니다.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이 사람의 마음인 것입니다. 그런 마음으로부터 나오는 것 중에 무엇이 선하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오늘 본문에서 말씀하고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이 사람의 마음이지만, 그런 마음이라는 것을 그 스스로는 모른다는 것입니다. 전적으로 타락했고 전적으로 부패했지만 그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서 죄인이라는 사실을 인정하기 싫어합니다. 아담의 죄에 어떻게 나의 관련이 있느냐고 따질 뿐입니다.
물론 사람들 사이에서 자신의 죄를 인정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뉘우치는 일이 있습니다. 그러나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마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치고 자신이 전적으로 타락했다는 것을, 전적으로 부패했다는 것을 인정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죄인이라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외적인 살인, 외적인 간음, 외적인 도둑질에 대해서는 죄라는 것을 인정하기도 하지만 내적인 것까지 인정하느냐? 굉장히 드뭅니다. 혹 그것까지 인정한다 할지라도 율법의 두 번째 돌판 부분이 아니라 율법의 첫 번째 돌판 부분인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것에 대해서는 결코 죄라고 인정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을 대적할 뿐입니다.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가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려졌지만(롬1:20), 그리고 그런 측면에서 하나님을 모른다고 할 수 없지만 결코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지도 않으며 감사하지도 않습니다(롬1:21). 오히려 하나님을 대신하여 다른 우상을 만들어 섬길 뿐입니다(롬1:23 참조). 복음의 외적 증거를 통해 하나님께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야 한다고 말씀하기도 하셨지만 근본적으로 그 마음의 변화가 있지 않는 이상 다 거절할 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만이 죄 문제를 해결하실 수 있으며, 실제로 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지만, 그리고 복음이라고 할 때 그 사실을 믿어야 한다고 말하지만 아무도 예수 그리스도를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그만큼 무지한 것입니다. 그만큼 철저히 타락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교리를 싫어하는 자들은 전적 타락에 대해서 끊임없이 반대합니다(바빙크의 개혁교의학 3권, s.319-s.320 참조). 예를 들어 어거스틴 시대의 펠라기안주의자들은 원죄를 부정했습니다. 하나님의 형상이란 오직 자유로운 인격으로서 아담의 범죄가 인간에게서 이 하나님의 형상을 빼앗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그럼 어떻게 해서 아담의 범죄가 그의 후손들에게 해를 끼쳤는가? 그들은 모방에 의해서라고 했습니다. 그가 악한 예를 보여주어 다른 사람들이 그 뒤를 따라 인류 가운데 죄가 하나의 능력이 되게 했다는 것입니다. 당연히 아담의 죄의 전가를 인정하느냐?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이후 반(半)펠라기안주의자들이 나타났는데, 그들은 아담의 타락의 결과 자신과 그의 후손들에게 있어서 죽음 외에, 특히 도덕적 능력의 약화를 말했습니다. 다시 말해 도덕적으로 병이 들었다는 것이요, 병이 든 만큼 의지가 약화되었고 악으로 기울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그들은 선을 원할 수 있으며, 그래서 만일 그가 이 선을 원한다면 그가 선을 성취하는 것을 돕도록 은혜가 주어진다고 말했습니다. 물론 죄의 보편성을 그들이 거부하는가? 그렇지는 않았습니다. 죄의 보편성을 인정하며 펠라기안주의의 입장으로서 모방에서 나온 죄에 대한 해설은 분명 거부했습니다. 다시 말해 반펠라기안주의는 펠라기안주의에 대하여 외적으로는 받아들이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죄의 성격과 심각성을 부인하기는 매한가지였습니다. 원죄는 실제적인 죄가 아니라, 다만 죄를 야기 시킬 수 있는 원인인 질병, 결함, 질환으로 말할 뿐이었습니다.
여러분, 전전 타락을 반대하는 두 이단에 대해서만 말씀을 드렸지만 교회 역사 안에서는 너무나도 많은 부류가 이것을 반대해 왔습니다. 유대인들의 의하면, 영혼은 지금도 항상 하나님에 의해 순수하게 창조되고, 육체 안에 거하는 탐욕에 대항하여 정복할 수 있는 능력을 지닌다고 합니다. 가톨릭 역시 하나님이 형상에 대한 초자연적이고 기계적인 견해를 통해 자연적 인간은 추가된 선물을 상실한 후에도 과연 여전히 초자연적인 의미가 아닌 자연적인 의미에서 선한 일들을 할 수 있다고 고백합니다. 말 자체가 어려울 수 있는데, 성경이 말하고 있는 것과는 달리 자연적인 의미에서 선한 일들을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도르트 신조와 관련된 알미니안주의도 여기서 벗어나지 않습니다. 원죄를 부정하며 자유의지에 대하여 긍정합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을 통해 보자면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이 사람의 마음이지만, 그런 마음임을 그들은 전혀 모르고 있을 뿐입니다. 인간 본성에 대한 바른 이해가 전혀 없습니다. 철저히 무지한 것입니다. 거저 전적 타락이라는 성경의 가르침을 거부하고 끝까지 인간에게 무엇이라도 돌리고자 하는 정신일 뿐입니다.
에베소서 2장을 보겠습니다. “그는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 그 때에 너희는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조를 따르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엡2:1-3) 여기 보면 모든 인간에 대하여 허물과 죄로 죽었다는 표현을 사용합니다. 죽었기 때문에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의미입니다. 물론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의사로서 비유하실 때 죄인에 대하여 병들었다는 전제로서 말씀하기도 하시만, 어떤 의미에서 말씀하시고자 하시는지를 놓치지 마셔야 합니다. 반펠라기안주의처럼 병들었기 때문에 완전히 죽은 것이 아니라고 말할 수 있는 그런 의미가 아니란 것입니다.
어쨌든 에베소서에서는 죽었다는 표현을 사용하고 있는데, 모든 인류의 대표인 아담에게 명령하신 것이 무엇인가 하면 이것입니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시니라”(창2:17) 그리고 그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하여 불순종했을 때 그 즉시로 죽은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분명히 말할 수 있는 것은 모든 인류는 죄와 타락으로 인하여 하나님과의 교통을 잃어버렸습니다. 불순종 이후 하나님께서 찾아오셨지만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을 피하여 숨게 되었고(창3:8), 하나님의 음성에 대하여 두려워하기까지 한 것이 그 증거라 할 수 있습니다(창3:10). 심지어 아담과 하와는 에덴동산에서 추방되었는데(창3:24),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하나님과의 교통이 단절된 것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허물과 죄로 인하여 죽었다고 할 때 육신의 죽음보다 앞서 하나님과의 교통의 단절, 즉 영적 죽음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영적 죽음에 놓인 자들에 대하여 바울은 이 세상 풍조를 따르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다고 말합니다. 육체의 죽음에 이른 것이 아니기 때문에 뭔가를 향해 적극적으로 움직이는데, 그 방향이 어디인가? 하나님에 대하여 죽었기 때문에 하나님이 아니라, 하나님과 상관없는 방향을 따르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 세상 풍조를 따르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다는 것은 바로 이런 뜻입니다. 동시에 성경은 무엇까지 말씀하고 있는가? 이 세상 풍조를 따르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다고 할 때 공중 권세 잡은 자에 대하여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고까지 말씀합니다. 불순종의 아들들이란 이 세상 풍조를 따르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르는 자들입니다. 허물과 죄로 죽은 너희라고 부르는 자들입니다. 하나님과의 교통을 잃어버린 자들, 그들이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입니다. 그런데 그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자가 누군가? 공중의 권세 잡은 자입니다. 그러니까 영적 죽음에 놓인 자들은 방향에서만 이 세상 풍조를 따르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르는 정도가 아니라, 그들 위에서 역사하는 영이 누군가 하면 공중의 권세 잡은 자라는 것입니다. 좀 더 쉽게 말하면 영적으로 죽은 자들은 누구도 예외 없이 공중 권세 잡은 자의 종이라는 뜻입니다. 한편으로는 우리가 따르는 것이기도 하지만, 또 다른 한편으로는 공중 권세 잡은 자가 우리를 지배하고 있기도 한 것입니다. 한 마디로 사탄의 종이요, 죄의 종인 겁니다.
사람들은 이렇게 생각합니다. “죄의 종이라니 말도 안 된다.” 왜냐하면 마음만 먹으면 죄를 짓지 않고 살아갈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 내 의지로 죄 짓지 않고 살아갈 수 있는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기준 앞에서 스스로가 죄에서 벗어날 수 있는가? 없습니다. 우리의 본성은 태어날 때부터 죄의 본성을 가지고 태어납니다. 죄의 본성을 가지고 태어나기 때문에 죄의 힘을 거부할 수 없습니다. 오히려 끌려 다닐 뿐입니다.
우리가 주일 오후에 칼빈의 글인 피기우스의 자유의지론 논박에 대해서 살피고 있는데, 피기우스만이 아니라 인간은 이성이나 의지에 대하여 굉장히 높은 평가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전적으로 타락했다는 성경의 가르침과는 달리 이성과 의지는 타락하지 않았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의지에 대해서는 자유의지라는 말까지 붙여가면서 마치 의지에 독립성이라도 있는 것처럼 생각합니다. 하지만 아담의 타락 이후 모든 인류는 죄를 향해서만 자유의지를 가질 뿐입니다. 진정한 의미에서의 자유가 아니란 것입니다. 그래서 어거스틴은 “의지는 타락으로 인해 장악되었기 때문에 인간 본성에는 자유가 없다”고 말하기도 했습니다(칼뱅작품선집 4권, p.198). 그렇다고 해서 어거스틴이 자유의지라는 말 자체를 싫어했는가? 그렇지는 않습니다. 루터와 칼빈의 경우 자유의지라는 말 자체를 꺼려했지만, 어거스틴은 자유의지라는 말을 사용하는 데 있어 결코 꺼려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어떤 이해가 있었는가? “인간은 자유의지를 오용했기 때문에 자기 자신과 자유의지 둘 다를 잃어버렸다.” “그리고 자유의지는 죄로 오염된 것이기 때문에 죄를 짓는 일만 할 수 있다.” 나아가 “자유의지는 의로부터 자유롭다. 그리고 죄의 속박 안에서 자유롭다.”는 말까지 했습니다(같은 책, p.199-200).
여러분, 죄의 종이란 말은 이런 측면에서 우리의 의지로 죄를 거부하고 선을 택할 수 있다는 것을 철저히 거절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 우리가 전적으로 타락했다고 할 때 그 안에는 전적인 무능력까지를 포함하여 말하는 것입니다. 로마서 3장에서 하나님을 찾는 자가 없다는 말씀은(롬3:11) 이런 무능력을 잘 드러내고 있는 말입니다. 우리 스스로 하나님을 찾을 수 있는 능력이 있는가? 없습니다. 스스로 구원을 향해 나아갈 능력이 있는가? 없습니다. 할 수 있는데 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할 수가 없습니다.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는 자들이요,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는 자들입니다. 심지어 선을 행하는 자가 하나도 없다는 말씀 역시(롬3:12) 이런 무능력을 잘 드러내고 있는 말입니다. 예레미야 13장 23절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구스인이 그의 피부를, 표범이 그의 반점을 변하게 할 수 있느냐 할 수 있을진대 악에 익숙한 너희도 선을 행할 수 있으리라” 얼핏 보면 선을 행할 수 있다는 쪽으로 생각되기 쉽지만 구스인이 그 피부를, 표범이 그 반점을 변하게 할 수 있다면 악에 익숙한 너희도 선을 행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구스인이 피부를, 표범이 반점을 변하게 할 수 있느냐? 없습니다. 당연히 악에 익숙한 자들 역시 선을 행할 수 있는가 하면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허물과 죄로 죽었다는 말은 이런 측면에서 하나님을 향하여 나아갈 어떤 능력도 없다는 것이요, 하나님 앞에서 선이라고 할 만한 것을 행할 수 있는 능력이 전혀 없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이런 사실은 에스겔 37장에 나오는 마른 뼈 환상을 통해서도 잘 드러나는 사실입니다. 마른 뼈가 어떻게 그 스스로 살아 움직이겠습니까? 여호와께서 효력 있는 말씀으로 말씀하실 때 마른 뼈가 살아나는 일이 있는 겁니다. 그렇지 않고 스스로 살아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아무런 능력이 없다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런 자들에 대하여 에베소서 2장은 한 마디로 뭐라고 말하는가? 본질상 진노의 자녀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진노를 받아 마땅한 자라는 겁니다. 하나님의 저주의 대상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전적 타락이라는 교리는 이처럼 인간의 본성이란 어떠한가에 대해서 다룹니다. 오늘날 세상이 좋아하는 가르침은 무엇입니까? 앞서 전적 타락을 반대하는 자들에 대하여 잠시 언급했지만 세상 역시 그들과 같은 가르침을 좋아합니다. 쉽게 말하면 인간의 가능성을 좋아합니다. 할 수 있다는 원리를 좋아하고,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는 원리를 좋아합니다. 끊임없이 인간, 인간, 인간입니다.
그러나 성경의 가르침에 주목하셔야 합니다.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 누가 능히 이를 알리요마는”(렘17:9) 앞에서도 말씀드렸지만 비교급이 아닙니다. 심히 부패했다고 말하기 때문에 여전히 부패하지 않은 부분이 있다는 것이 아니라, 성경은 전적으로 타락했다, 전적으로 부패했다는 것을 말합니다. 문제는 이런 본성에 대하여 사람들이 알고 있느냐 하면 알고 있지 않다는 데 있습니다. 아니 어느 정도 아는 바가 있다 할지라도 그것을 인정하기 싫어합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인간 자신이 주목되기를 원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이 교리를 믿음의 내용으로 받아들이는 자들은 끊임없이 인간, 인간, 인간을 외치는 자리에서 하나님을 외치게 됩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무능 때문에 하나님의 전능의 역사가 있지 않고는 구원을 말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반펠라기안처럼 스스로는 할 수 없지만 하나님이 조금만 도와주시면 그때 내가 할 수 있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인간은 전적으로 타락했고, 전적으로 타락했기 때문에 구원을 위한 1%도 뭔가를 행할 수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 홀로 그 모든 일을 행하셔야만 합니다. 그때서야 비로소 우리의 구원을 말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전적으로 감사드릴 수밖에 없는 이유, 그리고 오직 하나님께만 영광을 돌릴 수밖에 없는 이유가 여기 있는 겁니다. 왜냐하면 전적으로 타락했다는 것과 거기에서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하나님께서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 홀로 행하셨다는 것을 알 때 인간에게 돌아가 영광은 하나도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여기에 참된 겸손이 있으며, 여기에 다른 사람에 대한 인내도 있게 되는 겁니다. 우리는 이런 생각을 가질 때가 있습니다. 왜 저 사람은 저것 밖에 되지 않는가? 그러나 저것밖에 되지 않는 것이 당연할 수밖에 없습니다. 전적으로 타락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 자신을, 그리고 다른 사람을 변화시킬 수 있는 유일한 분은 오직 하나님 밖에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만을 의지할 수밖에 없으며, 또한 실제로 의지해야 하는 자들인 겁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역사하실 때까지 우리는 변하지 않는 자들에 대한 인내를 가져야 될 것이고, 또한 모든 일 속에서 오직 하나님께만 영광을 돌리는 주의 백성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