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y 조제
그거 내가 쓴 소설인데. 아, 막 다 읽었다고요? 이거 참, 쑥스러운데. 근데 말이에요. 지금... 혹시... 그 책 읽고 운 거 맞아요? 와! 진짜 기분 좋은데요. 기뻐요. 음, 정말 마음이 따뜻해지고 세상이 조금은 살만하게 느껴졌어요? 옛날에 딱한번 사랑했던 사람이 기억나고.
아아, 괜찮다면 조금만 더 이야기해주면 안될까요? 제가 커피 한잔 살게요. 서점앞에 괜찮은 까페가 하나 있거든요. 유별난 작가라고 생각하겠지만 작가들이 원래 좀 그렇잖아요.
아가씨가 지난 몇년간 혼자 지내왔고 원래 낯선 이랑 이야기하는 사람은 아니라고 하니 예전의 제가 생각나요. 저도 아주 오랫동안 그렇게 지냈거든요. 혼자인 게 내게 잘 맞는 낡은 옷이고 내옆에는 누구도 필요없다고 생각했죠. 어릴 때부터 쭉 그래왔으니까. 부모들과도 서로 마음이 통해본 적이 없었어요. 아, 아주 예전에 돌아가셨어요.
어쨌든, 그런 나라도 아주 가끔은 그 시간들이 목밑까지 차곡차곡 쌓여 조용한 진공에 갇힌 느낌이 들 때가 있었어요. 그땐 그게 무엇인지 몰랐죠. 아, 맞아요. 그게 '고독'이죠. 몰랐다니 우습다고요? 그런 사람도 있답니다. 후후. 그럴 땐 까페에 가서 낯선 사람들 사이에 앉아 있곤 했어요. 그럼 불편했던 그 느낌은 서서히 수군수군 이야기하는 사람들의 목소리에 묻혀 먼지처럼 가라앉으니까.
그래요, 지금의 절 보면 잘 안 믿기겠죠. 잘 웃고 수다스럽고. 그러니까 오래전의 일이라고 했잖아요. 하하. 이제야 웃는다! 웃으니까 아가씨도 참 따뜻해보여요. 이름이 뭐에요? 김민선. 다정한 느낌의 이름이에요. 엉터리라고요? 하하. 뭐가요. 내가 그렇게 느꼈다는데. 그래요, 그래. 다정하다는 소리는 처음 들었다해도 전 지금 민선씨가 그렇게 보여요.
어디까지 이야기했더라? 너무 길지요? 조금만 참아요. 음... 그런 밀폐된 진공 유리병 같은 시간들을 꽤나 보낸 끝에 나는 결국 병이 들고 말았어요. 어디가 아팠냐고요? 마음이요. 후후. 표정 좀 봐라. 걱정마요. 지금 전 미친 거 아닙니다. 자기가 소설가라는 망상에 시달리는 것도 아니고. 주민등록증 보여드려요? 농담!
참 오래오래 아팠어요. 그리고 결국엔 알아냈어요. 아니 자명한 이치에 무릎을 꿇은 거죠. 인간은 혼자 살 수 없다는 것에. 내가 병든 것은 고독해서였다는 것, 그리고 그건 말조차도 낯선, '사랑'이 필요하다는 외침이라는 것에요. 그래요, 사랑. 죽도록 싫었지만 어쩌겠어? 죽기 싫으면 아무리 싫어도 그 사랑이라는 게 뭔지 알아봐야죠.
민선씨가 들고 있는 그 책이 그 '사랑'이라는 게 무엇인지 알아갔던 제 지난 10년간의 기록입니다. 참 쉽지는 않았어요. 아프고 힘들고 넘어졌다 완전히 뻗었다 그래도 또 살아보겠다고 일어나고. 그랬죠. 응, 그랬어요. 하지만 소설을 쓰면서 난 그걸 계속할 힘을 얻었던 것도 같아요.
처음 시작은 내안의 독기를 내뿜기 위해 그래서 숨이라도 좀 쉬게 마냥 정신없이 악에 받쳐 썼다고 하면, 그다음엔 서서히 무언가 다른 게 섞이기 시작했어요. 어둠속의 희미한 반딧불처럼. 물론 '어둠은 빛의 왼손이고, 빛은 어둠의 오른손'이니까 한가지 색으로만 물들지는 않았죠. 그래요, 빙고~ 어슐러 르귄이에요! 후후.
아... 손 잡아줘서 고마워요. 사실 내가 먼저 잡고 싶었는데 싫어할까봐. 이렇게 나이 먹었어도 아직도 이렇답니다. 사랑이 뭐냐고, 먹는 거냐는 우스개가 있죠? 근데 그 말이 맞아요. 사랑은 먹는 거에요. 마음이. 몸이 음식을 먹 듯, 마음은 사랑을 먹고 살아요. 그걸 아는데 그토록 오랜 시간이 걸린 거죠.
이제 집에 가야된다고요. 음, 우리 서로 안아주면 안 될까요? 민선씨를 왠지 안아주고 싶어요. 나도 안기고 싶고. 아, 저도 사실 아직도 안는 거 어색해요. 하지만 어색해도 좋은 건 좋은 거더라구요. ...따뜻하네요. 잘 가요, 다음에는 누군가와 함께 있을 때 마주치면 좋겠네요. 안녕~
(그런데 당신, 이제 몇년 있으면 소설을 쓰게 될 거에요. 그전에 먼저 많이 아프게 되겠지만... 안 아프면 깨질 수 없으니까 죽지 말고 잘 견뎌봐요. 그리고 그리고 있죠, 견뎌내고 나면 사람들을, 세상을 아주 조금씩 사랑하기 시작할 거에요. 많이 힘들겠지만, 틀림없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