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백씨의 시조는 백우경이다. 자는 경천(擎天)이고, 호는 송계(松溪)이며 당(唐)나라 소주(蘇州)사람이다. 중국 황제헌원(黃帝軒轅)의 후손이며 당나라 시성(詩聖) 백낙천(白樂天)과 사촌간이다. 인품이 고결하고 학문이 뛰어나 당나라 첨의사이부상서(僉議事吏部尙書)에 올랐으나 간신배들의 모함을 당하자
서기 780년 신라선덕왕 원년에 당나라를 떠나 신라에 오신 후 대상( 大相)의 벼슬에 오르셨으며 만년에 계림 자옥산(鷄林紫玉山 : 현 경북 경주시 안강읍 옥산리) 기슭에 영월당(迎月堂)과 만세암(萬歲庵)과 13층 석탑을 짓고 신라의 발전에 이바지 하셨다. 어느날 선덕왕이 이곳에 몸소 찾아와 영월당 현판에 경춘(景春)이라 쓰고 만세암을 정혜사로 고쳐주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세월이 흐르는 사이 정혜사의 불당은 없어지고 13층 석탑만이 남아 국보 40호로 지정되어 보존 되고 있다. 동경통지(東京通誌) 제 7권 불사편(佛寺篇)의 아래와 같은 기록이 이를 입증하고 있다. 「淨惠寺惠址 在紫玉 山下 新羅宣德王庚申 唐朝僉議事白宇經 被讒來寓干紫玉山下 建迎月唐萬歲庵 宣德王幸行 改庵爲淨惠寺爲景春 云云」 송계공께서는 당나라 황제가 여러 차례 돌아오라고 간청하였으나 돌아가지 않고 신라에서 사시다가 영월당에서 일생을 마치셨는데 향년 73세였다. 묘는 자옥산 남쪽에 있다고 하나 찾지 못하고 있다가 1959년 우리 일가들이 추심운동을 전개하여 10여 년 만에 자옥산 남쪽 기슭 경좌갑향에 있는 묘를 찾아내는 데 성공하여 1966년 11월 10일에 사초개봉하였으며 1968년 음력 4월 8일에 첫 제향을 지내고 옥산세사로 명명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후손(後孫)들이 그를 시조(始祖)로 하고 경명왕(景明王)(신라 54대)때에 중랑장(中郞將)을 지낸 백창직(白昌稷)을 중시조(中始祖)로 하며 1세(世) 조상(祖上)으로 하고 있다. 본관(本貫)의 유래(由來)는 중시조(中始祖) 백창직(白昌稷)의 증손자(曾孫子)인 명휘가 고려(高麗)때 대사마대장군(大司馬大將軍)으로 수원군(水原郡)에 봉해졌다는 설과 백창직(白昌稷)의 9세손인 백천장이 중국(中國)에서 이부상서(吏部尙書)를 거쳐 우승상(右丞相)으로 수성백(水原白)에 봉(封)해지고 고려(高麗)때 수원백(水原白)에 봉(封)해져서 수원(水原)으로 하였다는 두 가지의 설이 있다. 이밖에 남포백씨, 부여백씨, 대흥백씨도 모두 수원백씨(水原白氏)에서 갈려나간 성씨(姓氏)다. 그러나 현재(現在)는 모두 수원백씨(水原白氏)로 통용(通用)되고 있다.
2. 백씨의 선계(先系) 백씨는 시조 송계공, 2세 정(靖), 3세 입승(立昇), 4세 상(尙), 5세 (永), 6세 연복(延福), 7세 중학(仲鶴), 8세 득장(得璋), 9세 광원(光元), 10세 대인(大仁), 11세 진방(進邦), 12세 시안(時顔), 13세 진(瑨), 14세 홍준(弘俊), 15세 창직(昌稷)으로 되어 있으나 홍준까지는 세계(世系)가 너무나 불확실하고, 창직부터 확실한 세계가 가능하다.
한편 송계공이 신라에 오신 해가 서기 780년이고 창직은 서기 920년대까지 생존하신 것으로 추정할 때, 이 기간은 140여 년밖에 되지 않아 한 세대를 30년으로 보는 기준에 따르면 5대에 불과하다. 따라서 1857년 정사대동보를 편찬할 때 시조 송계공부터 14세 홍준까지를 선계(先系)로 하고 창직을 중시조로 하여 1세로 세계하기로 하였으며 1982년 임술대동보 편찬시 이를 다시 한번 정리하였다.
<백씨 선계의 내력> ● 정(靖) 벼슬은 삼중대광 우간의대부(三重大匡右諫議大夫)로 참소를 받아 대우도(大牛島)에 귀양갔다가 이듬해 봉화현(現慶北奉化)에 옮기시어 2년뒤에 풀려났으나 다시 벼슬길에 오르지 않았다고 한다. 묘는 송계공 묘아래 자좌(子坐)라고 하나 찾지 못하여 영월당 경내에 사공단비(四公壇碑)를 세워 공이하 4대를 합사(合祀)하고 있다. ● 입승(立昇) 字는 자평(子平)이요 벼슬은 광록대부(光祿大夫)로 中國에 건너가 서주대도독(徐州大都督)을 지내다 신라로 돌아왔다고 한다. 또는 애장왕(哀莊王)때 각간시중(角干侍中) 벼슬로서 당나라 임금의 부름을 받고 가서 자광록대부(金紫光綠大夫) 서주도독대윤(徐州都督大尹)을 제수하고 9년만에 돌아왔다고도 한다. 묘는 송계공 묘 아래 좌강외 임좌(左岡外壬坐)라고 한다. ● 상(尙) 字는 여화(汝和)이며 한주태수(漢州太守)를 지냈다. 묘는 송계공 묘 아래 좌강외 임좌라고 한다. ● 영(永) 字는 구지(久之)이며 시호(諡號)는 문원(文元)이다. 신라 헌덕왕 丙午년(서기826년)에 우잠태수(우잠은 현 황해도 금천군)가 되자 한산이북(漢山以北) 주민들 일만명을 동원하여 패강장성(패강은 현 대동강) 300리를 구축했다고 한다. 이 사실은 삼국사와 대구 국립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경주읍지(慶州邑誌) 제2권에 기록되어 있다. 한편 당나라에 가서 첨의사를 지내고 4년 뒤에 돌아와 우잠태수가 되었다고도 전한다. 묘는 송계공 묘 옆에 있다고 한다. ● 연복(延福) 字는 덕이(德而)이고 시호(諡號)는 충정(忠正)이며 벼슬은 어사대부(御史大夫)다. 中國에 가서 대양도독(大梁都督)을 지내고 돌아왔다고 한다. 묘는 하양현(지금 경산군 하양읍)에 있다고 한다. 배우자는 수인성덕대자공주(垂仁聖德大慈公主)金氏인데 憲德王 김언승(金彦昇)의 따님이시다. ● 중학(仲鶴) 字는 운로(雲路)요 시호는 익열(翼烈)이다. 벼슬은 헌안왕(憲安王)때 삼중대광 좌간의대부(三重大匡左諫議大夫)에 올랐는데 그 사적(事蹟)이 여지승람(與地勝覽) 남포인물론(藍浦人物論)에 실려 있다. 묘는 남포현 쌍계산에 있다고 하나 실전(失傳)이다. 또는 남포현 계림산임좌에 있다고도 하고 영풍현(지금의 경북 영풍군)에 있다고도 한다.배(配)는 경주김씨인데 시중 김탕의 딸이다. 묘는 쌍봉(雙封)이다. ● 득장(得璋) 헌강왕(憲康王)때 이부시랑(吏部侍郞) 벼슬을 지냈다고 한다. 또 문하시중(門下侍中) 상서시랑(尙書侍郞) 평장사(平章事)에 올랐다고도 하며 개주(지금의 개성)에 살았다고 한다.배(配)는 김씨인데 어사대부 김일(金鎰)의 딸이다.득기(得琦)라는 아우가 있는데 벼슬은 문하성사(門下省事)라고 한다.그의 배(配)는 홍씨인데 홍감경의 딸이다. ● 광원(光元) 호는 연정(烟亭)이요 시호는 소장(昭章)이며 벼슬은 광록대부 문하시중 정당문학평장사(光祿大夫門下侍中政堂文學平章事)다. 그의 문장(文章)과 덕행(德行)이 뛰어나 그 때 사람들이 옛날의 이윤(伊尹)과 여상(呂商)의 반열(斑列)이요 소하(蕭何)와 조삼(曺參)의 여주(與주)라고 칭송하였다고 한다. 고운 최치원(孤雲崔致遠)선생이 찬명(撰銘)하고 묘는 남포현 양각산 동막동 갑좌인데 중세(中世)에 실전되었다가 서기 1740년 에 후손 시규(時糾)가 지석(誌石)을 찾아 개봉(改封)하고 매년 양력 10월 마지막 일요일에 향사(享祀)하고 있다.배(配)는 박씨인데 한림학사 박몽성의 딸이다.광형(光亨)이라는 아우가 있는데 벼슬은 밀직부사(密直副使)다. ● 대인(大仁) 자는 은삼(殷三)이요 호는 관죽당(觀竹堂)이며 시호는 문성(文成)이다. 어제(御製)에 말씀하시기를 公은 孔子를 배우고 안자(顔子)를 사모(思慕)하여 정도(正道)에 변함이 없었다한다. 벼슬은 광록대부 정당문학 태자태부 평장사(光祿大夫 政堂文學 太子太傳 平章事)다.배(配)는 완산이씨니 사공 벼슬을 지낸 이한의 딸이다.대의(大義)라는 아우가 있는데 그의 벼슬은 예부시랑이다. ● 진방(進邦) 호는 고와(孤窩)요 시호는 경열(敬烈)이다. 벼슬은 광록대부 중서성상장군(光綠大夫 中書省上將軍)이며 고운 최치원선생(孤雲 崔致遠先生)이 전서(篆書)한 찬지(撰誌)가 있다한다.배는 상덕화양공주 김씨인데 정강왕 김황의 딸이다.그의 형은 진국(進國)인데 벼슬은 광록대부 좌시랑 태자태부이며 무후(無后)이다.그의 아우는 진문(進門)인데 중국에 들어가 돌아오지 않았다고 한다. ● 시안(時顔) 자는 내연(乃淵)이요 벼슬은 광록대부 문하성사(光綠大夫 門下省事) 또는 문하시중 대사도(門下侍中 大司徒)라고도 한다.배(配)는 박씨인데 시중 벼슬을 지낸 박오의 딸이다. 진(瑨) 중국에 가서 국자진사(國子進士) 벼슬을 지냈다고 한다. 배(配)는 김씨인데 원외랑 김성한의 딸이다. ● 홍준(弘俊) 호는 담재(澹齎)인데 중국에 가서 국자생원(國子生員) 벼슬을 지냈다고 한다. 배(配)는 배씨인데 한림학사 배천서의 딸이라고 한다. 또 이씨라는 설도 있다. 아우는 홍걸(弘傑)인데 광록대부 정당문학 평장사 벼슬을 지냈다. 홍걸의 배(配)는 최씨인데 좌복야 최등완의 딸이다. 중시조- 백창직(白昌稷) 중시조의 자는 화숙(和淑)이며 시호는 영희(英禧)이다. 정확한 생존연대는 기록되어 있지 않으나 서기 870년 대부터 서기 920년대 후반까지 생존하신 것으로 추정된다. 신라54대 경명왕의 부마였는데 상화공주께서 일찍 타계하여 계비 진천 임씨를 맞이하여 장자 길(吉)과 차자 탁(卓)을 두셨다. 무인이었으며 계급은 중랑장으로 전해지고 있으며 묘는 예천에 있으나 실전이라고 한다.
3. 본관(本貫) 연혁(沿革) 수원(水原)은 경기도(京畿道) 중남부(中南部)에 위치(位置)하며, 수성(隋城)이라고도 하였다. 삼국시대(三國時代)에는 매홀군(買忽郡), 757년(신라 경덕왕 16)에는 수성군(水城郡)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940년(고려 태조 23) 수주(水州)로, 1271년(원종 12)에 수원도호부(水原都護府)로 승격(昇格)되었다가 후(後)에 수주목(水州牧)이 되었다가, 1310년(충선왕 2) 수원부(水原府)로 되었다. 1362년(공민왕 11)에는 군으로 환원되었다. 1413년(태종 13)에 다시 도호부로 고쳤고, 세조 때에는 진(鎭)을 두었으며, 1789년(정조 13)에 정조는 아버지 사도세자의 능을 양주에서 수원의 진산인 화산(華山)으로 옮기고, 팔달산 동측으로 수원(水原)의 읍치를 이전하였다. 1793년에는 수원(水原)을 개성부·강화부·광주부와 같은 지위인 유수부(留守府)로 승격(昇格)시키고, 1794년부터 수원성 축성을 시작하였다. 1796년에 축성(築城)을 완료(完了)하여 수원(水原)은 새로운 성곽도시로 변모했으며, 옛 읍성의 전형적(典型的)인 모습을 오늘날까지도 보여주고 있다. 1895년(고종 32) 지방제도(地方制度) 개정(改定)으로 인천부 관할(管轄)의 수원군(水原郡)으로 되었다가, 1896년 경기도 수원군이 되었다. 1931년 수원면(水原面)이 수원읍(水原邑)으로 승격(昇格)되었고, 1949년 수원군(水原郡)을 분할(分割)하여 수원시(水原市)로 승격(昇格)시키고 나머지 지역은 화성군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1967년에 경기도청이 옮겨옴에 따라 수원(水原)은 명실상부(名實相符)한 경기도(京畿道)의 중심지(中心地)가 되었다. 1988년 구제 실시로 권선구와 장안구를 설치하고, 1993년 팔달구(八達區)를 설치하였다. 1995년 화성군 태안읍 영통리가 팔달구로, 화성군 반월면 당수리·입북리가 권선구로 편입되어 시역이 확장되었다.
7.수원백씨(水原白氏)집성촌(集成村) - 강원도 김화군 임남면 일원 - 강원도 평강군 목전면 기산리 - 기도 양평군 서종면 문호리 - 경상남도 거창군 주상면 도평리 - 경상남도 고성군 상리면 일원 - 경상북도 예천군 개포면 황산리 - 전라남도 무안군 청계면 일원 - 충청남도 부여군 장암면 원문리 - 황해도 장연군 신화면 대사리 - 평안남도 순천군 후탄면 양포리 - 평안남도 안주군 동면 금서리 - 전라남도 장흥군 안양면 일원
8.수원백씨(水原白氏)인물(人物) <신라시대> ● 백 정(白 靖) 벼슬은 삼중대광우간의대부(三重大匡右諫議大夫). 묘는 송계공묘 아래 자좌(子坐)하나 찾지 못하여 영월당 경내에 사공단비(四公壇碑)를 세워 공을 포함한 4위를 합사(合祀)하고 있다. ● 백입승(白立昇) 字는 자평(子平)이요 벼슬은 광록대부(光祿大夫)로 中國에 건너가 서주대도독(徐州大都督)을 지내다 신라로 돌아왔다고 한다. 또는 애장왕(哀莊王)때 각간시중(角干侍中) 벼슬로서 당나라 임금의 부름을 받고 가서 자광록대부(金紫光綠大夫) 서주도독대윤(徐州都督大尹)을 제수하고 9년만에 돌아왔다고도 한다. 묘는 송계공 묘 아래 좌강외 임좌(左岡外壬坐)라고 하나 실전되고 사공단비에 합사하고 있다. ● 백 상(白 尙) 字는 여화(汝和)이며 애장왕시대에 한주태수(漢州太守)를 지냈다. 묘는 송계공 묘 아래 좌강외 임좌라고 하나 실전되고 사공단비에 합사하고 있다. ● 백 영(白 永) 字는 구지(久之)이며 시호(諡號)는 문원(文元)이다. 신라 헌덕왕 병오년(826년)에 우잠태수(우잠은 현 황해도 금천군)가 되자 한산이북(漢山以北) 주민들 일만명을 동원하여 패강장성(패강은 현 대동강) 300리를 구축했다고 한다. 이 사실은 삼국사와 대구 국립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경주읍지(慶州邑誌) 제2권에 기록되어 있다. 한편 당나라에 가서 첨의사를 지내고 4년 뒤에 돌아와 우잠태수가 되었다고도 전한다. 묘는 송계공 묘 옆에 있다하나 실전되고 사공단비에 합사하고 있다. ● 백연복(白延福) 字는 덕이(德而)이고 시호(諡號)는 충정(忠正)이며 벼슬은 어사대부(御史大夫)다. 中國에 가서 대양도독(大梁都督)을 지내고 돌아왔다고 한다. 묘는 하양현(지금 경산군 하양읍)에 있다고 한다. 고려시대 인물 ● 백 길(白 吉) 중시조의 장자로 자(字)는 태초(太初)요 신라 경순왕조(敬順王朝 927~934)에 음보(蔭補)로 교위(校尉)를 지냈다. 고려 태조13년 (930)에 우릉도(芋陵島 : 지금의 울릉도)의 사절(使節)로서 토두(土豆)와 함께 여조(麗朝)에 공물(貢物)을 바쳤다. 이 때 공(公)은 정위, 토두(正位, 土豆)는 정조(正朝)의 벼슬을 받았다고 한다. 공(公)은 용력(勇力)이 뛰어나 고려 태조조(太祖朝 936)에 정남대장군 광평시랑(征南大將軍 廣評侍郞) 벼슬을 지내고 혜종(惠宗)과 정종(定宗)에 이르기까지 삼대왕(三代王)을 섬기다가 서거(逝去)하니 문하시중(門下侍中)을 증직(贈職)하다. ● 백 탁(白 卓) 중시조의 차자인 2세손으로 자(字)는 성지(聖之)요 고려태조(高麗太祖 919~943)때에 벼슬이 병부시랑(兵部侍郞)에 이르렀고, 고려사(高麗史)에 따르면 태조세가(太祖世家)의 궁예(弓裔)가 왕창근(王昌瑾)이 지은 고경문(古鏡文)을 문인(文人) 백탁(白卓)으로 하여금 해석(解釋)케 하였다고 하고 있다. ● 백사유(白思柔) 중시조의 손자인 3세손으로 호(號)는 퇴은(退隱)이고 시호(諡號)는 문정(文正)이며 생졸년 미상. 서기 973년 과거(科擧)에 급제(及第), 벼슬이 한림학사(翰林學士)에 이르렀고, 991년에는 사신으로 송나라에 다녀온 적이 있으며, 993년과 995년의 두 차례에 걸쳐 시랑(侍郞)의 지공거(知貢擧)를 역임하였다. ● 백사청(白思淸) 3세손으로 동국전란사(東國戰亂史)에 의하면 고려 인종조(仁宗朝 1123~1146)에 녹사(錄事)로서 성내좌순검사(城內左巡檢使) 벼슬을 하였고, 공의 손자인 비화(賁華)의 묘지(墓誌)에 따르면 광종조(光宗朝 )에 태복경(太僕卿) 벼슬을 지내고 삼중대광(三中大匡)에 증직(贈職)되었다. ● 백 휘(白 揮) 4세손으로 자(字)는 경열(慶悅),호(號)는 포주(浦洲)이며 시호(諡號)는 청헌(淸獻)이다.16세에 등과(登科)하여 장원(壯元)으로 국자진사(國字進士)를 지내고 벼슬은 내봉감(內奉監)에 이르렀다. 고려 목종조(穆宗朝 998~1009)에 대사마 대장군(大司馬 大將軍)으로 수원군(水原君)에 봉(封)해졌으며 문종조(文宗朝1047~1082)에는 평장사(平章事)가 되었다. 공의 문학고행(文學高行)은 멀리 중국에까지 떨쳤다고 한다. ● 백광신(白光臣) 4세손으로 명종(明宗 1171~1197)과 신종(神宗 1198~1204) 2대왕(二代王)에 걸쳐 정순대부 판전교시사판비서성사 한림학사(正順大夫 判典校寺事 判秘書省事 翰林學士) 벼슬을 하였고, 고려사(高麗史)와 이백운규보집(李白雲奎報集)에 의하면 기노회(耆老會)를 만들어 무우한유(無優閑遊)하니 세상 사람들이 지상선인(地上仙人)이라 하여 후세에 전하고 있다. 또한 남산(南山)에 있는 정자에서 최충헌(崔忠獻)과 더불어 작시(作詩)하였다고 한다. ● 백간미(白簡美) 5세손으로 자(字)는 신보(愼甫), 호(號)는 월곡(月谷)이며 시호(諡號)는 정민(貞愍)이다. 고려 성종조(成宗朝 982~997)에 등과(登科)하여 벼슬이 광록대부 판병부사 감수국사겸 대장군보국사(光祿大夫 判兵部事 監修國史兼 大將軍輔國事)로 6대 국왕(國王)을 섬기고 노쇠하여 영해 전장(寧海 田庄)으로 돌아가 살았으며 97세에 서거. 부음(訃音)이 조정(朝廷)에 전해지니 왕이 3일간이나 정무(政務)와 시정(市井)을 철폐(撤廢)하고 주육(酒肉)을 금하며 친히 분향하고 예관(禮官)을 보내 치제(致祭)했다. 묘(墓)는 영해부서 용두산 동록 추자동 갑좌(寧海府西 龍頭山 東麓 楸子洞 甲坐)에 있으며 신도비명(神道碑銘)은 참지정사 박인량(參知政事 朴寅亮)이 짓고 정당문학 박 신(政堂文學 朴 伸)이 썼다고 하나 실전(失傳)되었다. ● 백가신(白可臣) 6세손으로 일찍이 등과(登科)하여 벼슬을 태사내사령겸(太師內史令兼) 지어사대사 평장사(之御史臺事 平章事)로 남포(藍浦)에 돌아가 아미산하(蛾眉山下) 태을동(太乙洞)에 살다 홍주(洪州)로 이사했다. 고려사에는 1096년 하정사(賀正使)로서 요(遼)나라에 갔었고 또 1100년에 시랑(侍郞)으로 조위사(弔尉使)가 되어 송(宋)나라에 갔었다고 한다. ● 백이정(白이正) 8세손(1247~1323년)으로 고려 충선왕(1309~1313)때의 유학자. 자는 약헌(若軒) 호는 이재(彛齋). 보문각 학사(寶文閣 學士). 시호(諡號)는 문헌(文憲). 1275년에 등과하여 충숙왕조(忠肅王朝 1314~1330)에 벼슬이 첨의평리 상의회의도감사(僉議評理 商議會 議都監事)에 오르고 삼중대광(三重大匡)에 올라 상당군(上黨君)에 봉(封)해졌다. 공(公)이 충선왕(忠宣王 1309~1313)을 따라 원나라에 가서 10년간 체류(滯留)하여 정주성리학(程朱性理學)을 전공(專攻)하고 널리 성리 서적(性理 書籍)을 수집(蒐集)하여 도학(道學)을 광포하니 세인(世人)이 지금까지 동방부자(東方夫子)라 칭한다. 1323년 12월에 서거(逝去)하니 춘추(春秋)가 77세(歲)였다. 묘는 충남 보령군 웅천면 평리 양각산. ● 백천장(白天藏) 9세손으로 호는 묵와(?窩). 문과에 등과하여 한림학사와 정당문학(政堂文學)을 역임한 후에 元나라에 遊學하여 翰林學士. 吏部尙書. 右丞相을 歷任하시고 귀국후에 水原伯을 封해지고 八十五世에 逝去하시었다. 訃音을 朝廷에 傳하니 忠宣王(1309~1313)이 哀悼하시어 酒肉을 禁하시고 朝禮까지 避하시며 禮官을 派遣하여 致祭하고 시호를 문익(文翼)이라 하시었다. ● 백문보(白文寶) 10세손으로 자(字)는 화부(和父), 호는 담암. 충숙왕조(忠肅王朝 1314~1339)에 문과에 등제하여 춘추검열(春秋檢閱)에 보직(補職)되었고 공민광(恭愍王 1352~1374) 즉위초인 1352년에 전리판서(典理判書),밀직제학(密直提學)등을 역임. 1374년에 서거후 시호충간(忠簡)에 봉하다. ● 백 장(白 莊) 12세손으로 자(字)는 명윤(明允), 호는 정신재(靜愼齋). 포은선생(圃隱先生)에게 수업(授業)하여 16세에 진사(進士)가 되고 25세에 원나라에 과거(科擧)하여 한림시독학사(翰林侍讀學士)를 지내고 공민왕(恭愍王1352~1374)때에 보문각(寶文閣) 대제학(大提學)에 이르다. 조선이 개국되고 태조(太祖 1393~1398)가 관직(官職)을 주었으나 고사(固辭)하여 해미(海美)로 귀향시켰고, 태종(太宗1401~1418)이 즉위하여 특사(特赦)하여 대제학(大提學)을 임명하고 친서(親書)로 불렀으나 “충신(忠臣)은 두 인군(人君)을 섬기지 아니하고 열녀(烈女)는 두 번 시집가지 아니 하거늘 어찌 삼조(三朝 : 세 임금을 말함) 식록(食祿)의 신하(臣下)로서 두 마음을 두리요” 하고 불취(不就)함에 이배(移配 : 옮기어 귀양보내는 것)당함. <조선시대> ● 백인영(白仁英) 16세손으로 도승지공파 파조이고 공(公)의 휘(諱)는 인영(仁英)인데 중종(中宗 1506~1544) 32년(1537)에 문과(文科) 갑과(甲科)에 급제하였다. 호조참판(戶曹參判), 직제학(直提學), 이조참의(吏曹參議) 승가선대부(陞 嘉善大夫), 승정원(承政院) 도승지(都承旨) 겸 경연참찬관(經筵參贊官), 춘추관(春秋館) 상서관(尙瑞官)을 역임했다. ● 백인걸(白仁傑) 16세손으로 인걸(1497~1579년)은 휴암공파의 파조이며 조선의 유학자. 조광조의 문하인. 1537년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 성균관에 오래 머무르다가 검열 예조좌랑 남평현감 호조정랑 지평 헌납을 역임했다. 1545년 을사사화 때 윤원형 등 소윤의 미움을 사서 파면되고, 1547년 양재역 벽서사건에 연루되어 안변에 유배되었다.1551년 풀려나와 윤원형이 죽자 복직, 1567년 71세의 나이로 교리가 되었다. 선조(1568~1608)때 직제학 이조참판 대사간 대사헌을 거쳐, 공조참판 으로 동지경연사 동지의금부사를 겸임, 다시 대사헌이 되어 권신들을 논핵하다기 사임했다.1578년에 우참찬에 임명되었으나 사퇴, 이듬해 동서분당의 폐단을 논하고 군비강화를 강조했다. 선조 때 청백리에 녹선되었으며 학문에 뛰어났다. ● 백인국(白仁國) 17세손으로 인국(1530~1613년)은 조선 중기의 문신?학자로 호는 족한당(足閒堂)이다. 종숙부인 침(?)에게 수학하였고 1571년 천거에 의하여 선교랑(宣敎郞)에 제수되었고 증광문과에 급제하였다. 1574년 진잠현 교관(鎭岑縣 敎官)이 된 뒤 평해(平海)? 연일(延日)? 고령(高靈)? 김해(金海) 등지의 교관을 지냈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규합하여 권전(權銓)과 합세하여 축산(丑山)에서 적을 격파하는 한편, 외아들인 민수(民秀)를 곽재우(郭再祐)의 휘하에 보내 참전하게 하였다. 권춘계 (權春桂)· 유성룡(柳成龍)· 황응청(黃應淸)· 안여지(安汝止) 등과도 교분 이 두터웠으며, 만년에는 후진교육 에 주력하였다. 저서로는《족한당 문집(足閒堂 文集)》이 있다. ● 백유양(白惟讓) 17세손안 유양(1530~1589)은 조선의 문신. 1572年 친시문과(親試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1581年 홍문관교리(弘文館校理), 이어 강원도어사(江原道御使), 사헌부집의(司憲府執義), 홍문관전한(弘文館典翰)을 지내고 1588년 성균관대사성(成均館大司成)·이조참의(吏曹參議), 1589년 병조 참판·부제학(副提學) 등을 역임하였다. 성품이 인자하였으며 사정(邪正)의 시비를 가려낼 때에는 의논이 강직하여 남에게 굴하지 않아서 명망이 두터웠다.1589년 정여립(鄭汝立)의 모반사건이 일어나자 아들 수민(壽民)이 정여립의 형 여흥 (汝興)의 딸을 아내로 삼았던 탓으로 연좌되어 사형당하자 사직하였고, 이어 서인(西人)으로부터 백인걸(白仁傑)· 백유함(白惟咸)부자가 탄핵을 받자 부령에 유배, 장살(杖殺)되었다. ● 백유함(白惟咸) 17세손으로 유함(1546~1618)은 조선의 문신. 휴암공 인걸(仁傑)의 아들. 1570년에 사마시에 합격하여 진사가 되고, 1576년 식년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였다. 그해 승문원주서(承文院注書)에 등용되고, 이어서 정자(正字)·박사·부수찬·지제교(知製敎)를 거쳐, 병조정랑이 되었다.1583년 이조좌랑이 되었다가 이듬해인 1584년 이조정랑이 되었다. 당쟁을 중재하던 이이(李珥)가 죽자 그도 당쟁을 피하여 벼슬을 버리고 용안(龍安-지금의 龍仁)의 농장에 내려가, 그곳에 있는 백운암(白雲庵)에 들어가 교학(敎學)에 힘쓰기도 하였다. 1589년 정여립(鄭汝立)의 모반사건이 평정되자 예조정랑으로 복직되었다. 1591년 왕세자 책봉문제로 서인(西人)인 정철(鄭澈)의 주장에 동조하다가, 정철이 물러나자 그도 경성으로 유배되었고,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유배가 풀려 직제학으로 복직되었다. 명나라 군사들의 군량을 조달하라는 특수임무를 부여받고 윤승훈(尹承勳)과 함께 군량미2만석을 조달하였고, 그 해 10월 성균관사성이 되어 세자시강원보덕(世子侍講院輔德)을 겸직하였다.1593년 함경도에서 왕자를 왜군에게 잡히게 한 황정욱(黃廷彧)을 탄핵하였다.1594년 동부승지가 되었다가 황주목사로 나가 도탄에 빠진 백성을 잘 어루만져 치적을 남겼다.1596년 명나라에 사신으로 다녀왔다. 광해군(1609~1622)초에 이이첨(李爾瞻)의 탄핵으로 부안에 유배되었다가 1617년에 고향 용인(龍仁)에 방환(放還)되었다가 1617年 신원(伸寃)되어 개성(開城)에서 죽었다. ● 백수장(白壽長) 18세손으로 수장은 자는 팽조(彭祖), 1498年에 과거(科擧)에 급제, 중종반정(中宗反正)때 공(功)을 세워 정국공신(靖國功臣)에 책록되고, 공조판서(工曹判書)를 역임하였으며, 정해군(貞海君)에 봉(封)해졌다. ● 백광홍(白光弘) 20세손인 광홍(1522∼1556)은 조선 중기의 문인. 자는 대유(大裕), 호는 기봉(岐峯). 아우 광안(光顔)과 광훈(光勳) 및 종제 광성 등 한 집안 4형제가 모두 문장으로 칭송을 받았다.1549년 28세로 사마양시(司馬兩試)에 합격하고,1552년 식년문과에 을과로 급제했다. 홍문관정자로 임명되고, 1553년 호당(湖堂)에 뽑혔다. 그 뒤 1555년 봄에 평안도평사가 되어 〈관서별곡〉을 지어 그곳의 생활상과 자연풍물을 읊었다. 특히 〈관서별곡〉은 정철이 지은 가사〈관동별곡〉보다 25년이나 앞서 지은 작품으로 기행가사의 효시가 되어 후대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저서로《기봉집》이 있다. ● 백광훈(白光勳) 20세손인 광훈(1537~1582)은 조선의 시인. 자는 창경(彰卿), 호는 옥봉(玉峰). 1564年에 진사(進士)가 되었으나 벼슬에 뜻이 없어 산수(山水)를 즐기며, 시서(詩書)에 열중했다. 1572年에는 명나라 사신이 오자 노수신을 따라 백의(白衣)로써 제술관(製述官)이 되어 사신을 감탄케 했다. 1577年 처음으로 선릉참봉(宣陵參奉)으로 관직에 나서고, 이어 정릉(靖陵), 예빈시(禮賓時), 소격서(昭格署)의 참봉을 지냈다. 당시의 최경창(崔慶昌), 이달(李達)과 함께 조선에서는 처음으로 성당(盛唐)의 시풍(詩風)에 들어갔다 하여, 삼당(三唐)으로 불렸다. 명필(名筆)로도 알려졌는데 특히 영화체(永和體)에 빼어났다. 1590年 강진(康津)의 서봉서원(瑞峰書院)에 제향(祭享)되었다. ● 백광언(白光顔) 20세손인 광언( ~ 1592)은 조선의 무관. 호는 풍암(楓巖), 시호는 충민(忠愍). 일찌기 무과(武科)에 급제했다. 1589年 북청판관(北靑判官)을 지내고 1592年 모친상(母親喪)을 당해 집에 있을 때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공주(公州)에 달려가 군대를 해산하려는 이광(李洸)의 마음을 돌이켜 그와 함께 전주(全州)에 가서 군대를 재정비하고 용인(龍仁) 전투에서 조방장(助防將)으로 선봉이 되어 분전하다가 전사했다. 병조판서에 추증(追贈), 모충사(慕忠詞)에 제향(祭享)되었다. ● 백현룡(白見龍) 헌룡(1556~1622)은 조선의 학자. 자는 문서(文書), 호는 성헌(惺軒), 고려의 정당문학(政堂文學) 문보(文寶)의 후손. 이황(李滉)의 문인. 조목(趙穆), 김성일(金誠一), 유성룡(柳成龍)등과 학문 교유(交遊)가 있었다. 1592년의 임진왜란때 영해(寧海)에서 의병(義兵)을 일으켜 곽재우(郭再祐)의 휘하에 들어가 화왕산성(火旺山城)을 방위, 난이 끝난 후 벼슬을 바라지 않고 자연을 벗하며 학문에 전심, 1543년 67세에 비로소 진사(進士)가 되었다. 저서로는 《성헌집이 있고 운산서원(雲山書院)에 제향. ● 백진남(白振南) 진남(1564~1618)은 조선의 시인. 자는 선명(善鳴), 호는 송호(松湖). 15세때 사학과시(四學課試)에 시부(詩賦)로써 뛰어나 이이(李珥)도 보고 이를 칭찬할 정도였다. 1590년(선조 23) 진사시(進士試)에 합격, 1597년 정유재란(丁酉再亂) 때 통제사(統制使) 이순신(李舜臣)의 진중(陣中)으로 피란했다. 명나라 장군 계금피(啓金皮), 승덕(承德)등이 그의 시를 보고 크게 찬탄했다. 1606년 명나라 사신 주지번(朱之蕃)이 왔을 때에 관반(館伴)유근(柳根)의 천거를 받아 백의(白衣)로써 사신을 영접했다. 문장과 필법(筆法)으로 천하에 이름을 떨친 주지번은 그의 필적을 보고는 절찬하며 소중히 간직했고, 주지번의 필적을 선사받기도 하는 등 서로 교의가 두터웠다. ● 백수회(白受繪) 19세손으로 수회(1574~1642)는 조선의 문신. 자는 여빈(汝彬), 호는 송담(松潭), 임진왜란 때 포로로 9년간 일본에 억류되었다가 귀국후 광해군의 난정(亂政)을 여러번 상소하여 맹렬히 비판했다. 인조 반정(仁祖反正 -1623)후 예빈시참봉(禮賓侍參奉), 자여도찰방(自如道察訪)을 지냈다. 호조참의(戶曹參議)에 추증(追贈), 양산(梁山)의 송담서원(松潭書院)에 제향(祭享)되었다. ● 백대형(白大珩) 19세손인 대현(1575~1623)은 조선의 문신. 자는 이헌(而獻). 1591년에 진사시(進士試)에 합격, 이듬해 제용감참봉(濟用監參奉)이되고 1599년 정시문과(庭試文科)에 급제, 북평사(北評事), 형조좌랑(刑曹佐郞),감찰(監察), 황해도 도사(黃海道都事)등을 지냈다. 광해군때 희천군수(熙川郡守), 형조정랑(刑曹正郞), 황해도 관찰사, 동부승지(同副承旨), 형조참의(刑曹參議)를 거쳐 병조참판(兵曹參判)에 이르렀다. ● 백시구(白時耉) 20세손인 시구(1649∼1722)는 조선 후기의 무신. 자는 덕로(德老). 1680년무과에 급제하여 1684년 선전관(宣傳官)이 되고 ,1708년 황해도병마절도사가 되었다.1717년 함경도병마절도사를 거쳐, 평안도병마절도사를 지냈다. 이때에 기로소(耆老所)에 백금을 빌려준 일이 있는데 이 일로 반대파에 의하여 옥에 갇히고 문초를 받았으며, 김일경·목호룡(睦虎龍) 등에 의하여 신임사화가 일어날 때 이를 기화로 김창집(金昌集)의 죄상을 조작하려 하였다. 그러나 그는 심문에 불복하였고 결국 고문에 못이겨 옥사하였으나, 뒤에 1741년엔 영조가 임인옥안(壬寅獄案)을 불태우고 탕평책을 쓸 때에 그의 관직을 복구하고 몰수하였던 재산도 후손에게 돌려주었으며 호조판서를 추증하였다. 유저(遺著)로는 《충장부군시고 忠莊府君詩稿》1책이 있다. 시호는 충장(忠莊)이다. ● 백종걸(白宗杰) 28세손인 종걸(1800∼1876)은 조선 후기의 문신. 자는 긍첨(兢瞻), 호는 지산(止山). 1831년 문과에 병과로 급제, 이듬해 의정부사록(議政府司錄)에 임명되었고, 1835년 출륙(出六)되어 전적(典籍)에 승진되었다. 그 뒤 예조정랑· 사직서영(社稷署令)·지평(持平)·병조정랑 등을 거쳐 1839년 문천군수(文川郡守)가 되었다.1846년 병조정랑 등을 거쳐 1855년 통례원좌통례(通禮院左通禮)가 되었고, 1861년 통정대부에 승자(陞資)되어 부호군이 되고 병조참지를 거쳐 병조참의에 승진되었다.1868년 우부승지가 되었다가 사직, 고향으로 돌아가 후진양성에 전념하였다.시문에도 능하였으며, 저서로는《지산문집》이 있다. ● 백홍인(白弘寅) 홍인은 자는 자행(子行), 호는 세심당(洗心堂), 1905年 을사조약(乙巳條約)이 체결되자 최익현(崔益鉉)과 함께 의거할 것을 결의, {포고(布告) 8도사민서(士民書)}를 남도(南道) 제읍(諸邑)에 배포(配布)하고 제주도(濟州道)로 가다 발각되어 장흥헌(長興憲)에 수감(收監)되었다. 그 후 한일합방(韓日合邦)이 되자 문인(門人) 40여명을 이끌고 뒷산에 올라 의거(義擧)할 것을 획책하다가 웅치순검청(熊峙巡檢廳)에 수감되었다. ● 백성기(白性基) 29세손인 성기(1860∼1929)는 조선 말기의 무신.자는 효천(孝天), 호는 소송(小松). 임오군란이 일어난 1882년에 남행선전관(南行宣傳官)으로 관로에 오르기 시작해서 같은 해 무과에 급제한 뒤 승선(承宣)·철산부사(鐵山府使)·내금위장(內禁衛將)·훈련원도정(訓練院都正)·경상좌도병마절도사·한성부우윤 등을 역임하였고, 1895년 갑오개혁 때는 참장(參將)에 임명된 뒤 군부협판·갑산관찰사(甲山觀察使)·평리원검사(平理院檢事)·평리원재판장 및 군법기초위원을 지냈다. 독립협회 활동시에는 개화파 무관의 한 사람이었으며 중추원의관(中樞院議官)에 선임되기도 하였다. 1900년 군정교구(軍政矯구)에 관한 상소를 올렸다.이 상소는 고종이 원수부(元帥府)에 실시토록 영을 내려 일련의 군제정비가 이루어지는 결과를 가져왔다. 육군법률 317조가 1900년 9월 제정되면서 육군법원이 설치되는 등 군사법제도가 완비되는 계기가 된 것이다. 그 과정에서 중심역할을 한 이후 육군법원장·원수부군무국총장·기록국총장·검사국총장·평안북도관찰사·교육부참모장 등을 역임하였다.1904년말 경무사(警務使)를 겸하고 있던 중 일제침략에 저항하는 상민배(商民輩)를 탄압하지 않았다고 하여 해임당하기도 하였다.1905년 을사조약 강제체결 때 민영환(閔泳煥)과 함께 극간(極諫)하였으나 대세의 흐름이 돌이키기 어려운 것을 깨닫고 수원(水原)으로 퇴거하여 여생을 보냈다.
7.수원백씨(水原白氏)각파(各派)항렬표(行列表) 수원파
16세
17세
18세
19세
20세
21세
22세
영(榮)
문(文)
윤(允)
민(民)
시(時)
화(華)
태(兌)
용(龍)
상(尙)
23세
24세
25세
26세
27세
28세
29세
사(師)
동(東)
진(鎭)
수(洙)
락(樂)
남(南)
균(均)
기(基)
30세
31세
32세
33세
34세
35세
36세
현(鉉)
호(鎬)
흠(欽)
승(承)
운(雲)
종(鍾)
인(寅)
열(烈)
하(夏)
규(圭)
재(在)
선(善)
용(鎔)
순(淳)
태(泰)
37세
38세
39세
40세
41세
42세
43세
식(植)
근(根)
환(煥)
섭(燮)
수(壽)
중(重)
상(尙)
경(庚)
윤(潤)
해(海)
영(榮)
주(柱)
연(然)
희(熙)
장흥파
28세
29세
30세
31세
32세
33세
34세
희(熙)
기(基)
흠(欽)
영(永)
인(寅)
형(亨)
남(南)
선(善)
교(敎)
35세
36세
37세
38세
39세
40세
41세
종(鍾)
용(鎔)
순(淳)
준(浚)
계(桂)
병(柄)
열(烈)
경(炅)
재(在)
규(圭)
호(鎬)
전(銓)
홍(洪)
문(汶)
42세
43세
44세
수(秀)
근(根)
찬(燦)
휴(烋)
균(均)
성(?)
대흥파
世
行列字
世
行列字
世
行列字
世
行列字
世
行列字
25
玉(옥)
26
居(거)
27
運(운)
28
重(중)
29
鎭(진)
30
淳(순)
31
雲(운)
32
董(동)
33
土(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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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수원백씨(水原白氏)인구수(人口數) 2000년 인구조사에서 수원백씨는98,748가구 총316,535명이 있는 것으로 되어 있다.
9. 수원백씨의 근원 만성통보(萬姓統譜)에 나타나 있는 백(白)씨성의 근원은 다음과 같다 黃帝之後此來中華白姓之源也(황제지후차래중화백성지원야) 始祖松溪公卽中華蘇州人而居東方(시조송계공즉중화소주인이거동방) 이라 기록되어있다 이 기록에 의한 근원을 알아보면 황제의 후손이 중국 백씨성의 근원이 되며 시조가 되시는 송계공은 중국 소주사람으로 동방으로 이주해와 살았다는 뜻이며 백씨의 조상은 거슬러 올라가면 黃帝軒轅(황제헌원)에 이른다는 뜻이 된다. 수원백씨 중앙 종친회에서 발간한 수원백씨 보감에 기록하길 제왕전승성원도(帝王傳承姓源圖)에 의하면 중국 백씨(中國白氏)의 시조는 황제의 후손인 백공승(白公 勝)이라 기록되어있다고 서술하고 있다. 백씨(白氏)의 기해대동보(己亥大同譜)에 보면 제왕전승성원도(帝王傳承姓源圖)에 시조 백우경이 백공승의 후예인 백계반(白季般)의 아들이라 기술하고 있으며 백계반(白季般)은 백굉의 둘째 아들이며 당대 최고의 시인 백낙천(白樂天)의 아버지인 백계경의 아우가 되시는분이다. 백낙천(白樂天)이 지은 백굉의 사장(事壯)에 따르면 초평왕(楚平王)웅거(熊居)의 손자인 승(勝)이 오(吳)나라와 초(楚)나라 사이에 살면서 백공(白公)이라 일컬어 성(姓)씨로 삼았다 기록하고 있다. 또한 이 사장(事壯)은 백공 승(白公 勝)의 후예인 무안군 백기(武安君 白起)가 백굉의 27대조라고 기록하고 있으며 향산 문공년보 자서문(香山 文公年譜 自序文)에 따르면 그의 시집 5권가운데 한권은 신라에 사는 족인(族人)이 가져다 신라에 둔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한편 수원백씨 종친회에서는 이를 증명키 위해 1997년 중국정부와 염황문화연구회(炎黃文化硏究會) 의 초청을 받아 중국을 방문하여 헌원황제 대제(軒轅黃帝 大祭)를 주관하고 시조 백우경이 중국 당나라의 시성(時聖)향산 백낙천과 사촌(四寸)간 이라는 확인하고 1999년,2000년,2001년 세 차례에 걸쳐 중국을 방문 자료 수집은 물론 중국 섬서성 위남시에 있는 백씨 능원을 참배하고 진나라의 명장 백기와 향산 백거이 묘소도 확인했다고 한다.
참고로 중국 제왕전승성원도의 내역은 다음과 같다 황제(黃帝)--창의(昌意)--후 전욱(后 顫頊)--후 축융(后 祝融)--후 계연(后 季連) 후 약오(后 若敖)--후 소오(后 宵敖)--후 평왕(后 平王)-태자 건(太子 建)- 백공승((白公 勝):중국 백씨성의 시조--후 을병(后 乙丙)--기강(己降)-후 기(后 起)-중(仲) -- 건(建)--사통(士通)--지선(志善)--온(溫)-ㅣ(차자인-계강)--육자 굉(六子 굉)-(계경-유문, 거이),,,계반(우경-(수원백씨의 시조),,,계진,,계령,,계평 이상 백씨보감에 의한 백시의 근원 임
● 옥봉(玉峯)백광훈(白光勳) 수원 백씨 정신제공파(玉峯派)詩祖는 옥봉(玉峯)백광훈(白光勳)으로 그는 조선 선조때의 시인이며 문장가로 字는 彰卿이요 玉峯은 그의號다. 본관은 水原으로 朝鮮 中宗32年(1537년)정유년 全男 長興郡 安良面 岐山里)에서進士로 참봉을 지낸 白世仁의 세 아들 중 막내로 태어났다. 그의 맏형은 관서별곡의 저자로 알려진 光弘이고 둘째는光顔인데 사촌 동생 光城과 더불어 4형제가 모두 문장에 뛰어나 당시 사람들 사이에(一門四文章)이라 불리울 정도였다. 원래 그의 선조들은 대대로 水原을 중심으로 정착해 살았는데 조상인 白繪가 연산군 때 長興으로 귀양을 와 정착하게 되었다고 전해진다. 玉峯 白光勳은 이같은 조상들의 높은 학문적업적과 가풍을 이어 받아 평생을 방랑시인으로 유랑하며 많은 문장을 남겼다. 玉峯 白光勳이 태어날 무렵의 조선 사회는 잦은士禍로 많은 선비들이 벼슬에 환멸을 느끼고 산골로 들어 가거나 혹은鄕里로 돌아가 세상을 회피하고 자연에 의지하며 술과 문장을 벗 삼아 나름대로의 의리를 지켜오던 시기였다. 바로 지팡이 하나에 집신을 걸머지고 팔도의 명산대천을 유랑하며 어지러운 세상과 나라의 앞일을 文章으로 토해내는 유랑문화의 태동이 그것이다. 玉峯 白光勳역시 이러한 세태 속에서 그 누구보다 울분을 참지 못하고 진한 붓 끝으로 애달픈 심사를 토해낸 사람이었다. 그가 태어난 丁酉年(1537年)만 하더라도(丁酉參凶)이라 일컬었던 金安老 許抗 蔡無擇 등이 中宗의 제2妃 尹氏(文貞王后)를 폐하려다 실패, 金安老가 賜死되고 귀양을 가게 되었다. (金安老 : 1481~1537중종 때의 권신 기묘사화 후 이조판서 예조판서를 지냄).
10. 장흥군 집성촌 백씨의 연혁
▲기봉 백광홍의 혼과 문학의 얼이 깃든 기양사
◆…이 글은 본래 '오마이뉴스'의 유길수 기자가 '관서별곡 백광홍과 문학의 고장'이라는 제목으로 쓴 글이지만, 편의상 '특집/장흥의 가사문학과 백광홍'편에 포함시켜 '백광홍과 기양사'라는 제목으로 재편집했음을 알려드린다. ◆
기행가사 효시, 문학성 재조명 부상돼야 청출어람(靑出於藍), 쪽에서 뽑아낸 물감이 쪽보다 더 푸르다는 뜻이다. 나중이 먼저보다 더 빛난다는 의미이다. 기봉 백광홍과 송강 정철, 제자나 후학이 스승이나 선배보다 더 뛰어날 때 그 사회가 발전하는 장대한 흐름에서, 큰 별의 선후를 가릴 필요 있을까.
관서별곡과 관동별곡! 두 작품은 한국문학사에서 우리나라 말의 아름다움, 우리 국토의 아름다움, 우리 민족성의 아름다움을 문자로 형상화한 최고의 작품들이다. ‘선별곡’인 관서별곡은 기행가사의 효시로, ‘후별곡’인 관동별곡은 기행가사 백미로 알려지고 있기도 하다. 문제는 관서별곡(1556년)이 관동별곡(1580년)보다 무려 25년이나 앞선 작품이고, 후별곡인 관동별곡에 지대한 영향을 주었고, 조선조 이후 모든 기행문학의 모체로까지 전해지면서도 뒷 작품 그늘에 가려져 왔다는 점이다. 가사문학을 이해하려면 ‘긴 시조’ 쯤으로 알면 편리하다. 시조를 ‘단가’로 가사를 ‘장가’로 알고, 구와 행수에 제한을 두지 말고 4음보 연속체로 읊조리면 될 성 싶다. 조선 전기에 출발한 가사문학은 중기, 후기, 개화기로 이어오면서 양반 사대부에서 여성 평민층의 문학으로 보편화된 우리 민족 문학의 큰 갈래였다. 이런 가사문학 산실이 전남 담양 지역으로만 본격 알려진 것은 송강 정철의 명성과 관동별곡의 작품성 외에도 광주호 상류 지역에 있는 송강정, 소쇄원, 식영정, 면앙정, 환벽당 등의 널려 있다시피한 ‘가사문학 유적’과 송순, 정철, 기대승, 김성원, 김인후, 고경명, 김덕령 등의 ‘인물 파워 브랜드’의 덕분일 것이다.
기봉 백광홍(白光弘, 1522-1556) 선생이 34세 때, 평안도 평사(評事)라는 벼슬을 하면서 지은 관서별곡은 은일가사(隱逸歌辭)→유배가사(流配歌辭)→기행가사(紀行歌辭)→내방가사(內房歌辭) 등등으로 맥을 잇는 ‘가사문단’에서 그 위상이 특별하다. 관서별곡은 정송강의 관동별곡에 지대한 영향(구성 표현 어귀배열 등)을 비롯하여 형식에 있어서나 내용에 이르기까지 골고루 청출어람 할 바탕을 마련했다는 점이다. 이는 450년 전 선비들이 평생을 공부하는 ‘학생정신’을 견지하면서 ‘불치하문(不恥下問)’ 하는 정신을 한 점 부끄럽게 여기지 않았다는 한 측면에서 유추할 수 있을 법하다. 관서별곡의 가장 큰 장점은 호남지방을 조선조 시가문학의 ‘선도지역’으로 만들었다는 점이다. 참여 계층의 다양성(양반 사대부에서부터 판소리의 서민층까지)이 특징인 호남문학 풍토에서 ‘기행가사문학’의 양대 산맥인 관동별곡과 더불어 ‘호남을 예술과 문학의 본고장’으로 격상시켰음이 분명하다. 관서별곡은 또한 ‘남도 끝땅’ 장흥을 문향으로, 수원 백씨 집안을 문반(文班)가문으로, 업그레이드시킨 점 또한 부인할 수 없을 성 싶다.
장흥은 대한민국이란 국가 간판 아래 송기숙(녹두장군), 이청준(서편제), 한승원(아제아제 바라아제) 등 국보급 문인을 배출한 ‘남도 최대 문인촌’으로, ‘문림의향 장흥’의 이름을 팔도강산에 널리 알리고 있다. 고려말 두문동 출신 중시조를 둔 장흥군 안양면 기산리 수원 백씨 집안은 기봉의 동생 백광훈이 ‘옥봉집’에 500여수가 넘는 시 등을 지어 남기고, 광홍 광안 광훈 3형제와 사촌 광성 포함 백씨 종형제 4명이 ‘1문 4문장’으로 추앙받아 오면서, ‘남도 먹물부자 집안’으로 배가 부를 정도이다. 장흥(長興)이란 지명의 풀이는 ‘길고도 길게 판단하고 오래 견디다 보면 반드시 흥한다’는 ‘기다림의 미학과 내일에 대한 희망’ 의미가 녹아 스며들어 있는 듯하다. 장흥골은 한때는 왕비를 배출한 ‘지엄한 고을’에서 반란과 민란이 연속된 ‘몹쓸 지방’으로 오락가락했던 흥망의 역사가 유별난 곳이다. 지엄한 고을은 고려 17대 임금인 인종비인 공예태후 임씨의 고향이 이곳이어서 유래됐다. 몹쓸 지방은 고려말 왜구 침입, 조선말 동학란 당시 ‘새야 새야 파랑새’의 한 서린 노랫가락이 남도에서 가장 오래 울려 퍼져, 초래됐다. 흥망이 오락가락하는 세상사 이치를 느끼기 위해서라도, 음지 다음 양지라는 인생철학을 깨닫기 위해서라도, 처절함 속에서 희망을 잉태해내는 ‘생존법칙’을 익히기 위해서라도, 장흥골에서‘자으흐응’해야 할 것만 같다.
관서별곡 형식은 8단락 172구 1156자로 돼 있다. 기산별곡과 향산별곡을 합친 관서별곡은 서사(序詞)-관서평사의 명을 받음, 본사(本詞)-평사 부임과정과 관서지방 경치, 말사(末詞)-임금님과 어버이에 대한 상념, 으로 크게 3구분 할 수 있다.
서쪽 시냇가에 얼음과 눈이 깨끗해 있고 사흘 밤을 서로 그렇게만 보냈다오 혜초가 심어진 두둑에 향기로운 냄새가 나고 오동나무 강가에 봉황이 훼훼하는 소리 들리고 있다오 기풍과 도량은 그전부터 훌륭한 것을 알았으니 백두산 아래에서 근원이 발하기는 두 강이 똑 같다네(중략).
시인이 친구를 보내면서 ‘영중으로 가는 상황을 운중으로 가는 것‘으로 비유하여 높은 시적 감각을 표현한 작품이다. 이처럼 백광홍의 작품 속에 녹아있는 작품성은 작가 특유의 기상과 낭만적인 자기 심취 등이 곳곳에 담겨있는 점이 장점이다. 기봉의 창작활동은 30세 전후가 절정기로 추정된다. 그 당시 지은 '동지부'라는 기봉의 작품은 영호남 등 기라성 같은 대가 작품 중에서도 장원시로 뽑히기도 했기 때문이다. 장원상으로 명종 임금이 직접 하사한 ’선시십권‘은 기봉의 장흥 생가에 현존하고 있다. 시인으로서만 기봉의 생애를 가늠해 본다면 28세 이전에는 고향 장흥에서 자연시를, 28세 이후에는 사친, 취락, 애민, 송양시 등 ‘참여시’를 창작했던 것으로 분석된다. 작가적 측면에서 백광홍의 위대함은 기행가사라는 장르에다 단순한 노정과 있었던 사실만을 기록한 게 아니라는 측면에서 도출된다. 호남지방에서 생의 대부분을 살아내고 관서지방을 2년 동안 여행하면서, 백 작가는 그 대상에다 자신의 사상과 정서를 절묘하게 심을 수 있었다. 경(景)을 보고 그 경에다 정(情)을 접합시킬 줄 알았다. 자연미에다 인간성을 접목할 줄 알았다. 당시 선비들의 세상사는 ‘주재미’인 풍류 등을 여행하는 재미에다 덧붙여 ‘문학적 상상력’을 추가시키고 문학성을 진화시킬 줄 알았다. 그런 관서별곡의 문학성은 송강 정철의 관동별곡으로 ‘맥이음’됨으로서 기봉 백광홍의 ‘기행문학’이 한국의 문학세계를 확장시켰던 일등공신의 공로만은 그 누구도 부인할 수 없을 정도이다. 기봉의 시문학성이 위대해 보이는 기산 마을 기행이었다. 기행 길에서 들은 기봉 백광홍의 ‘2004년 6월 이달의 문화인물’ 선정 소식은 장하면서 기다리다 보면 흥하는 이치를 깨닫게도 했다. 백광홍의 ‘흥소식’은 ‘문과에 급제, 조선의 8대 문장가로 가사문학의 효시인 ’관서별곡‘을 남기는 등 가사문학발전에 큰 업적을 남김. 주요저서로는 ’기봉집‘ 등이 있음’으로 함박웃음을 오래 띄게 만든다.
정해군 관련 자료 (족보에 실린 글을 중심으로)
白壽長 字 彭祖 백수장 자는 팽조 乙丑 (1469년 ~1543 ) 74세 終 戊午武科 丁卯 1506 년 重試 무관에게 십 년마다 한 번씩 관품을 올리던 과거 屢中官至 합격하여 嘉善大夫 종2품 문무관 訓鍊院都正 정삼품 당상관이 되었다 中宗朝 중종조 (1506년 반정 ) 秉忠奮義 忠奮義 충과의로 정권을 잡으니 靖國功臣 정국공신(靖國功臣) 연산군을 폐위하고 중종을 추대하는 데 공을 세운 훈호 貞海君 정해군이 되었다(백수장을 말함) 資憲大夫 정2품 하의 문무관 工曹判書(공조판서) 가 되었다.으뜸 벼슬. 품계는 정이품 賜綠邑,水原, 仁川, 溫陽, 牙山,四州公 甞戒胤 中樞公 중추적으로 공을 세웠다 曰 말 하기를 汝湏惕 그대여 念效死國社無忝勿 나라를 위해 한 목숨바치며 以肝人門下以 나의 간장을 문하에 바치노라 墜家聲 소리쳤다 中樞公之除宰守也 중추적 공을 세운 것이다 그때 나이 25세다 書以 글로써 말하노니 淸白忠孝勿忘於 청백충효를 잊지 마라 心貧虐奢侈莫行 가난을 삼키고 사치를 멀리 하였다 乎 身十六字而 신체 16 자 작은 키로 送之至於 가문 을 빛냈다 一家親戚諄諄 일가친척을 도우고 常戒 타이르며 期近不沙懈焉 가까운 사람도 멀고도 가깝게 하였다 癸卯 參月一日卒 1543년 3월1일 졸
1469년(예종 1)∼1543년(중종 38). 조선 중기 무신. 전라남도 장흥군(長興郡) 안양면(安壤面) 동촌(東村)에서 태어났다. 1498년(연산군 4)에 무과(武科) 중시(重試)에 장원으로 급제하여 영흥판관(永興判官)으로 임명된 후, 진도군수 훈련원도정 을 거쳐 공조판서(工曹判書)에 이르렀다. 1506년(연산군 12) 연산군을 폐위 시키고 연산군의 동생 중종 을 즉위시킨 중종반정(中宗反正) 때의 활약으로 정국공신(靖國功臣)에 녹훈(錄勳)되고, 정해군(貞海君)에 봉해졌다. 1509년(중종 4)에는 전라남도 진도(珍島)에서 민란(民亂)이 이어지자, 그를 진도군수 에 제수(除授)하였는데, 이때 그는 도의 민란을 안정시키고 질서를 회복 시켰다. 그가 죽자 조정에서는 관헌을 보내는 예우를 해 주었다. 후손 백진항(白鎭恒)의 『계서유고(溪西遺稿)』 권4 『가사별록(家史別錄)』에는 선조들의 교서(敎書), 시(詩), 서간(書簡), 유언(遺言), 유서(遺書), 제문(祭文) 등을 기록해 두었는데, 이곳에 그의 유사 「정해군선조(휘수장)유사(貞海君先祖(諱壽長)遺事)」가 실려 있고 그 뒤에 그가 쓴 「중종대왕제문(中宗大王祭文)」과 그에 대한 제문 「제공제문(諸公祭文)」 등의 글들이 첨부되어 있다. 유물로는 1507년(중종 1) 2월에 임금이 내려준 교서 「백수장정국공신록훈교서(白壽長靖國功臣錄勳敎書)」가 남아 있다.
장재도(壯載島) 전라남도 장흥군 안양면 사촌리 남쪽에 있는 섬이다. 인공방조제로 육지와 연결된다. 『해동지도』(장흥)에는 장재도(壯載島)라고 표시되어 있다. 장재(장자, 부자)가 살았다고 하여 장재도라고 부른다고 한다. 중종 때에 정국공신 정해군(貞海君) 백수장(白壽長)이 은퇴하여 서재를 짓고 살았다. 1957년에 둑을 쌓아 육지와 맞닿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