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시간에는 “성경의 내력”이란 제목으로 잠시 공부하겠습니다. 성경의 내력이란 성경 말씀의 역사적 순서를 의미합니다. 서울 어떤 곳에 친척이 있어서 찾아가야 한다고 가상할 때 어떻게 해야 찾아갈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우선은 주소를 알아야 하고 다음에는 서울의 지리를 어느 정도 알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여기에서 서울의 지리를 어느 정도 알아야 한다는 것이 바로 성경을 배움에 있어서 성경의 내력을 알아야 하는 것과 같습니다. 지금도 교인들 중에는 성경의 내력을 몰라서 설교를 이해하지 못하는 교인들이 많은 것입니다. 만일 성경을 찾지도 못하는 형편이면 성경의 내력을 아는 것은 더욱 깜깜할 것입니다. 그래서 이 시간에는 성경의 내력에 대해서 잠깐 말씀을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1. 우선 본문을 보시지요.
본문 말씀은 누가복음의 서론입니다. 그러나 이 시간에는 누가복음 서론을 공부하려는 것이 아니고 이 누가복음의 저자가 하나님의 말씀 즉 “성경의 내력을 자세히 살폈다”는 말씀을 드리려고 이 본문을 읽은 것입니다.
1) 1절에서 우리 중에 이루어진 사실이란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을 중심으로 한 복음 사역을 의미하는 것이고,
2) 그 사건을 목격한 사람들의 증언을 토대로 내력을 기록하려고 한 사람들이 많았는데 그 중에는 누가복음을 기록한 당사자도(이 사람은 바로 누가라는 의원 성도임) 그것을 차례대로 기록하여 전도의 대상자인 데오빌로(당시 높은 관직에 있던 사람)에게 보내어 그로 하여금 배워서 확신을 갖게 하기 위함이라고 한 것입니다. 이 말씀에서 확신하는 믿음은 배워서 성취된다 하셨고, 그 배움의 내용으로 먼저 말씀의 내력을 살피는 것입니다(목사님이 성남에서 오금제일교회에 가는 길을 잘 아시는데 한 번은 송파구 방이동 쪽에서 오금제일교회를 직접 가시다가 길을 몰라서 그 근방에서 네 바퀴를 돌고 다시 성남 쪽으로 와서 아는 길로 찾아가셨다고 합니다. 한 편에서 가는 지리만 알고 반대 편에서 가는 지리를 모르니까 그런 어려움을 당한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성경의 내력을 모르면 성경을 이해하기 어려운 것과 같은 비유가 되는 것입니다).
2. 성경의 내력이란 무엇입니까?
1) 성경의 내력이란 계시적인 내력과 역사적인 내력이 있습니다. 계시적인 내력이란 하나님이 자기의 말씀을 어떻게 인간에게 전해 주셨는가 하는 점이요, 역사적인 내력은 성경 66권의 내용의 역사적 순서를 아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인간에게 전달되는 과정을 계시 또는 영감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이 시간에는 계시와 영감을 배우려는 것이 아니고 성경 내용의 역사적 내력을 배우는데 목적이 있습니다. 이것을 모르시면 성경을 배우기도 힘들고 가르치기도 힘드는 것입니다.
2) 하나님은 우리들에게 66권의 성경을 주셨습니다. 이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진리(참)라고 합니다. 이 진리는 부족하게 주신 것도 아니며 더 주시지도 않으며 오직 이 말씀 속에서만 믿고 배우고 행해야 하는 것입니다. 어느 사람 어느 교파이든지 성경을 가감하려 하거나 성경 아닌 것을 주장하면 꼭 배격하셔야 함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3) 성경의 내력은 신약은 예수님 탄생시부터 약 100년간의 역사를 예수님 시대, 예수님 후 시대 순위로 기록하신 것이고, 구약의 역사는 주전 4000경부터 400년경까지의 역사를 순서대로 기록한 것입니다.
이것을 소급하여 말씀드리면 메데 파사 통치 시대, 바벨론 통치 시대, 이스라엘 남북조 시대, 통일 시대, 사사 시대, 광야 시대, 애굽 시대, 족장 시대, 노아 시대, 노아 이전 아담까지의 시대로 나눌 수 있는 것입니다. 더 자세한 내용은 다음 시간에 말씀드리겠고 또 신앙 상식과 성경 개론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제4과 성경에 나타난 역사 공부 (딤후 3:13~15) 목록으로
이 시간에는 “성경에 나타난 역사 공부”란 제목으로 교훈을 받겠습니다. 지난 시간에 성경의 내력이란 제목으로 성경의 내력을 아셔야 할 필요성을 강조하는데 그쳤습니다. 그래서 이 시간에는 조금 더 자세히 말씀드리고 이 제목에 관한 말씀을 마치려고 합니다.
1. 먼저 본문 말씀을 상고하겠습니다. 본문 말씀은 사도 바울께서 목회직의 후계자인 디모데에게 목회상 주의할 점을 부탁하신 말씀입니다.
1) 13절에서는 “악한 자들과 속이는 자들이 더욱 악해지면서 속이기도 하고 또 거기에 속는 자도 있다”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진리에 대하여 속인다는 말씀입니다. 우리 주위에는 수많은 이단자들이 진리에 대하여 속이고 있습니다. 얼마 전에 10월 28일에 예수님이 재림하신다고 극성스럽게 속이더니 결국은 그 속임이 드러나지 않았습니까?
2) 그래서 14절 말씀에서는 “배우고 확신한 일에 거하라”고 하셨습니다. ① 영적 생명은 중생 즉 거듭나는 은혜로 받습니다(엡 2:1). ② 그리고 믿음은 들음에서 난다고 하셨습니다(롬 10:17). ③ 그러면 확신(확고한 믿음)은 어떻게 생길까요? 본문에서는 배움으로써 성취된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열심히 말씀을 배워야 하겠습니다.
3) 배우는데 있어서 “누구에게 배우는 것을 알라” 하심은 가르치는 스승을 바로 만나야 한다는 뜻입니다. 요즈음 세상이 속이는 일에 살벌한 것처럼 신앙 세계에도 그렇다는 것을 아셔서 반드시 목사님의 바른 지도를 받도록 하셔야겠습니다.
4) 어려서부터 성경을 배우고 아는 것이 귀하며 이 성경이 예수 믿는 믿음과 구원을 받게 하는 지혜를 주신다고 하셨습니다.
2. 이 시간 제목대로 성경에 나타난 역사란 무엇입니까?
지난 시간에는 구약의 내력을 소급하여 시대 구분만을 말씀드렸는데 이 시간에는 조금 더 보충 설명만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1) 구약 성경에는 ① 만물의 창조와 인생의 타락과 번성에 관한 말씀이 창세기 앞부분에 기록되었고, 그 때가 주전 4000년경이며 ② 노아 시대가 주전 3000년경이고 ③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 요셉의 시대인데 이를 족장 시대라 하며 주전 2000년경이고, ④ 애굽 시대와 출애굽 시대로 주전 1500년경이며 ⑤ 출애굽하여 가나안 땅에 입국한 후 약 300년쯤 사사들이 통치한 때가 있었고, ⑥ 그 다음 주전 1000년경부터 120년 동안 통일 왕국 시대가 있었으며 ⑦ 르호보암왕 때에 나라가 남북으로 나누어져 300년쯤 내려왔으니 이것을 남북조 시대라 합니다. ⑧ 후에 바벨론에게 완전히 멸망당하여 70년간 바벨론 포로 시대를 맞고, ⑨ 바벨론이 메데 파사국에 멸망당함으로 이스라엘 족속이 바사국의 통치를 받지만 이 때에 해방령과 예루살렘 복구령이 내려져 성전과 성곽을 재건하는 시대가 약 200년 계속되었는데 그 때가 주전 400년경에 해당됩니다. 그리고 구약 성경의 말씀들은 모두 이 시대 안에서 이루어진 말씀들이므로 그 말씀을 증언한 선지자가 어느 시대의 사람인가를 밝히면서 성경을 공부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주전 400년경부터 예수님 탄생시까지를 신구약 중간 시대 또는 암흑 시대(계시가 없는)라 하여 주전 4년인 예수님 탄생까지 이어지게 됩니다.
2) 신약의 역사입니다. ① 신약은 복음서에서 예수님의 탄생과 유년기, 그리고 공생애의 복음 사역, 십자가, 부활 승천의 기사가 있고, ② 사도행전에서 오순절 때에 성령님의 강림하신 사건과 함께 최초 교회의 설립과 이방의 선교 역사가 기록되었고, ③ 사도들의 신앙에 관한 편지들과 ④ 마지막으로 사도요한의 미래에 대한 계시의 말씀으로 되어 있습니다.
이러한 내용은 성경을 공부하시는데에 필수적인 지식이므로 말씀을 드린 것입니다.
제5과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 (살전 2:13) 목록으로
이 시간에는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이란 제목으로 교훈을 받겠습니다. 모든 성도들이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습니다. 그러나 어떤 성도는 대단히 소극적으로 믿는 것 같은 느낌을 받게 할 때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① 성경을 사모하지 아니하고, ② 두려워하지도 아니하며 ③ 잘 지키려고 하지도 않는데서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성도들은 성경 말씀 앞에서 방심하는 태도를 취하면 안 됩니다. 성경 말씀을 대하는 그 시간에는 반드시 하나님을 대하는 것처럼 경건한 자세를 가지도록 노력하시기를 바랍니다.
1. 먼저 본문 말씀을 살피겠습니다.
1) 지금 저희들은 데살로니가전서를 읽었습니다. 데살로니가란 현재 헬라 나라 북쪽에 있는 큰 항구 도시입니다. 헬라 나라에서는 아덴 다음 가는 도시인데 그 당시의 그 지역의 행정 구역명이 마케도냐이고, 그 지역의 데살로니가시에 데살로니가 교회가 있었습니다. 이 데살로니가 교회는 바울 사도께서 주후 52년경에 그 곳에 가셔서 복음을 전파하여 교회를 설립하셨고, 최초에 믿음 생활을 시작한 성도들에게 감사와 격려와 권면의 서신을 보내신 것이 바로 데살로니가전서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두 번째 또 보내신 것은 데살로니가후서가 되는 것이지요. 이렇게 성경 말씀의 출처와 대의를 공부하는 것을 성경 개론이라고 합니다. 한남교회 성도님들이 이미 출판된 성경 개론과 신앙 상식을 배우시기만 한다면 이러한 말씀을 별도로 드리지 않아도 될 것입니다.
2) 본문에서 “우리가 하나님께 쉬지 않고 감사한다”고 하셨으니 이 말씀은 바울 사도를 비롯한 복음 사역자들이 하나님께 감사를 많이 드린다는 것입니다. 그 분들은 쉬지 않고 감사할 만큼 감사를 많이 드렸다고 하였습니다.
무엇을 감사하였을까요? 그 감사의 내용은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이 우리에게 들은바 즉 전도자들로부터 받은 하나님의 말씀을 사람의 말처럼 여기지 않고 진실하게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았다는 것입니다. 성도에게 가장 중요한 태도가 바로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는 태도입니다. 왕의 명령을 받을 때에도 절을 하고 받는 것을 보셨을 것입니다. 성경은 전능하신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에 꼭 두려운 마음으로 받으셔야 합니다.
성경이 어떻게 하여 하나님의 말씀이 되느냐고 하신다면 하나님이 선지자들에게나 사도들에게 영감으로 말씀을 주셔서 기록하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벧후 1:21에 보시면 “예언은 언제든지 사람의 뜻으로 낸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의 감동함을 입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받아 말한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이러한 것을 계시와 영감이라고 하는데 여기에 대하여는 다음에 공부할 기회가 있을 것입니다. 이 시간에는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는 태도를 꼭 확인하시기 바랍니다.
3) 이 말씀이 믿는 자 속에서 역사하신다는 것을 믿고 또 체험을 하셔야 하는 것입니다. 본문에서 “이 말씀이 너희 믿는 자 속에서 역사 하신다”고 하셨습니다. ① 이 말씀은 성경 66권입니다. 성경 66권에 있지 않은 것은 어떠한 경우에도 하나님의 말씀이 아닌 줄로 아셔야 합니다. ② 믿는 자란 곧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는 자요, ③ “그 말씀이 믿는 자 속에서 역사 하신다”는 것은 성경 말씀이 믿는 자의 인격을 지배하신다는 것입니다. 지금도 저희들은 말씀의 지배를 받아야 하고 거기에 끌려야 하며 또 기꺼이 복종하여야 합니다.
결론적으로 이 시간에는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인 것과 모든 성도가 성경을 진리로 받아야 할 것과 그 말씀의 뜻과 능력에 붙잡혀 살아야 함을 체험하는 저희들이 되어야 할 것을 말씀드렸습니다.
제6과 성경말씀을 대하는 태도 (시 119:97~104) 목록으로
이 시간에는 성경말씀을 어떻게 대할 것인가에 대하여 공부하도록 하겠습니다.
1. 지금 저희들은 시편의 말씀을 읽었습니다. 이 시편은 주전 1000년경에 다윗왕을 비롯한 몇 사람이 읊은 시를 한데 모은 말씀입니다. 이 말씀에 보시면 성경의 명칭을 5가지로 나타내셨는데
1) 주의 법이요,
2) 주의 계명이며
3) 주의 증거이고,
4) 주의 법도이며
5) 주의 말씀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이 말씀에서 법이나 법도란 표준을 뜻하고, 계명이란 명령을 뜻하며 증거란 확실함을 표현하신 말씀이고 주의 말씀이란 하나님의 본질과 뜻을 나타내신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말씀은 진리요, 확실한 표준이며 거역할 수 없는 명령이요, 하나님의 신분의 표현으로 받으셔야 하는 것입니다. 성경 말씀을 대하실 때에 꼭 하나님을 대하듯이 하나님을 만난 듯이 여기셔야 할 것입니다.
2. 이 말씀을 의심 없이 신뢰하는 마음으로 받으셔야 합니다. 거짓은 불신의 대상이지만 참은 믿음의 대상만 되는 것입니다. 사람이 만일 참된 것을 믿지 않는다면 거짓에 속는 것 이상으로 피해를 볼 것입니다. 요 18:17에서도 “하나님의 말씀은 진리라” 하셨고, 시 19:8에서도 “하나님의 말씀은 정직하며 순결하며 정결하다”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바로 성경을 믿음으로 받아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때로는 이해 못할 말씀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인간의 무지 때문일 뿐 하나님의 말씀이 잘못된 것은 아닙니다. 옛날의 선지자도 이해 못하는 것이 있었지만 여전히 하나님은 의로우시다(렘 12:1)고 하였습니다.
3. 사모하는 마음으로 받으셔야 하는 것입니다.
본문 말씀에서 “내가 주의 법을 어찌 그리 사랑하는지요 내가 그것을 종일 묵상하나이다” 하신 것은 바로 성경을 사모하고 사랑한다는 뜻입니다. 자식이 귀하면 사랑하듯이 하나님도 귀하신 분이니까 사랑해야 하고 또 사모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사모하는 자는 바로 그의 말씀을 바라는 자입니다. 그래서 종일 묵상하여도 이는 하나님을 가까이 한 것이기 때문에 후회가 없고 복이 될 뿐입니다. 시 73:28에서 “하나님을 가까이 함이 복이라”고 하셨습니다.
4. 그 말씀을 배우려고 하여야 합니다.
본문 102절에서 “하나님은 나를 가르친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가르치시니 만큼 우리는 배우셔야 합니다. 하나님은 지금 이 시간처럼 자기의 말씀을 사람을 통해서 가르치십니다. 예수님도 성전에서 가르치셨고(마 4:23), 제자들보고도 가르칠 것을 명령하셨으며(28:20) 또 바울 사도도 “너희는 배우고 확신한 일에 거하라” 하심으로 진리의 지식은 배워서 얻어지는 것임을 말씀하셨습니다. 저희들의 신앙도 말씀을 전문적으로 배우려하지 않을 때는 믿음이 자랄 수 없다는 것을 아셔서 열심히 배우는 자세를 취하셔야 할 것입니다.
5. 하나님의 말씀은 복종하며 지키는 자세로 대하셔야 합니다.
성경은 믿으라고 주신 말씀도 있지만 행하라고 주신 명령도 있습니다. 그래서 믿을 것은 믿고 행할 것은 행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성경을 지키는 것이 인간의 최고 수단보다 낫고 성경을 따르는 것이 선생의 자문이나 노인의 경험보다 낫다고 하셨습니다. 본문 100절을 보시면 “주의 법도를 지키므로 나의 명철함이 노인보다 승하다”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성도는 하나님의 말씀을 복종하는 것을 큰 보화보다도 더 귀하게 여겨야 하며(시 119:56) 그 방법이 가장 복되는 방법인 줄 아셔야 합니다.
결론적으로 이 시간은 성경을 대하는 태도로서 하나님을 만난 듯이 또 의심 없이 꿀처럼 사모하는 마음으로 배우려는 각오로 대하셔야 할 것을 교훈받았습니다.
제7과 믿음이란 무엇인가? (히 11:6) 목록으로
이 시간에는 믿음이란 무엇인가에 대하여 공부하겠습니다.
저희들은 하나님과 예수님과 또 그의 말씀인 성경을 믿습니다. 하나님과 예수님과 성경을 믿는 것이 믿음인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믿음을 설명할 때에는 조금 더 자세히 설명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1. 이 시간에 저희들은 히브리서를 읽었습니다.
1) 히브리서는 히브리인들에게 보낸 편지란 뜻이요, 히브리인은 이스라엘 선민을 뜻합니다.
2) ‘히브리’란 뜻은 ‘건너오다’의 뜻으로 옛날에 갈대아 우르에 살던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고향을 떠나 유프라데 강을 건너 가나안 땅 쪽으로 왔다는 데서 시작된 말이라고 합니다(창 14:13, 출 1:19).
3) 이 히브리서를 언제 누가 보냈는지에 대하여는 확실치 않으나 그 문체와 사상이 바울 사도의 말씀과 비슷하여 이 말씀을 주후 68년경에 바울이 기록하여 보낸 것으로 믿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2. 본문 말씀에서
1) 인간은 믿음을 가짐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다 하였고,
2) 믿는 자는 반드시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과
3) 하나님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을 주시는 분이심을 믿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믿음의 의미를 부분적으로 말씀하신 것입니다. 저희들은 이 말씀에서 믿는 자라야만 하나님을 영화롭게 할 수 있고 믿는 자는 반드시 하나님의 존재를 믿되 특히 믿음으로 선행하는 자에게 상을 주시는 분이심을 믿고 선행에 힘을 써야 하겠습니다.
3. 그러면 이 시간의 제목인 믿음이란 무엇일까요? 믿음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요?
1) 믿음은 참된 자를 아는 것입니다. 참된 자란 믿어도 되는 대상을 의미합니다. 인간이 믿을 수 있는 대상은 영원히 진실하고 영원히 변치 않아야 하는데 그분이 곧 하나님이십니다. 롬 3:4에서 “하나님은 참되시다” 하셨고, 단 6:26에서 “영원히 변치 않으실 분이라” 하셨습니다. 이 세상에 하나님 외에는 참된 자가 없습니다. 요 14:6말씀에 예수님께서 “내가 곧 그 진리라”하심으로 예수님만이 참되시다는 말씀을 해주셨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을 아는 것은 참된 자를 아는 것이기 때문에 속지 않는 믿음(참 믿음)이 성립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참된 자 하나님을 안다는 그 자체는 하나님의 존재를 믿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2) 하나님의 신분을 바로 아는 것입니다. 성도가 하나님의 신분을 바로 알지 못하면 구원을 받을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마 16:16에서 베드로의 신앙고백을 받으실 때에 “세상 사람이 나를 누구라 하느냐?” 물으셨고, 베드로는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라고 대답함으로 칭찬을 받았으며 그 지식이 교회의 기초가 되고 천국의 열쇠가 된다고 하셨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과 예수님을 바로 알지 못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구원을 받아야 할 성도는 반드시 하나님께서 어떤 분이심을 바르게 아는 것이 중요하며 그것이 바로 믿음입니다.
3)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 곧 진리로 믿는 것입니다. 성도가 하나님을 아는 방법은 성경을 아는 것입니다. 요 5:39에서 성경은 “예수님에 대한 증거”라 하셨습니다. 따라서 성경을 믿지 않으면 참된 자 하나님을 알 수 없으므로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는 것이 곧 하나님을 아는 신앙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참되시고 그의 말씀인 성경도 참되기 때문에 믿음의 근거가 되는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믿음은 ① 참된 자를 아는 것이다. ② 참된 자는 하나님뿐이시다. ③ 하나님은 참되시기 때문에 그의 말씀인 성경도 참되다. ④ 성경이 소개하는 하나님을 바르게 아는 것이 구원을 받을 수 있는 바른 믿음이라는 것을 이 시간에 배우셨습니다.
제8과 믿음의 방도 (시 91:14~16) 목록으로
이 시간에는 “믿음의 방도”란 제목으로 교훈을 받겠습니다.
믿음의 방도란 의미는 믿음의 대상인 하나님에게 어떻게 하여야 하는가를 말씀하신 것입니다. 지난 시간에는 믿음 자체의 성립에 관하여 말씀드렸습니다. 그 때에 믿음은 참된 자를 아는 것이고 참된 자는 하나님 뿐이시며 그 하나님은 그의 말씀인 성경으로 알 수 있으니 성경을 통하여 하나님을 바로 아는 것이 믿음이라 하였습니다. 이 시간에는 그 하나님에 대하여 어떻게 하여야 하는 가를 살피는 것이 바로 믿음의 방도를 설명하는 것입니다.
1. 먼저 본문 말씀을 살피겠습니다.
1) 이 시편은 주전 1000년경 다윗왕 때에 기록되었고 모세와 다윗과 솔로몬 등 여러 사람이 기록한 것입니다. 지금 읽으신 시편 91편은 서두에 누가 기록하였다는 말씀이 없으므로 확실한 저자를 알기 어려우나 다윗이 기록한 시편 18편과 비슷한 내용이 있음을 보아 다윗의 시로 짐작할 수 있습니다. 계시를 받은 성도가 하나님의 말씀을 성령의 감동으로 받았을 때 그 말씀을 노래 가사로 정리하여 찬송을 부른 것이 바로 이 시편의 말씀이 된 것입니다.
2) 본문 14절에서 “하나님은 자기를 사랑하는 자를 건져 주신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방법을 연구해 보셨습니까? 또 무엇에서 건져주실 것 같습니까? 하나님은 자기를 사랑하는 자를 죄와 환란과 사망에서 건져주십니다. 또 “하나님의 이름을 아는 자를 높여 주신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안다는 뜻은 여러 가지로 해석할 수 있겠지만 여기에서는 충성하는 자라고 생각하시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자기에게 충성하는 자를 높여주시기 때문입니다(눅 19:17). 또 15절에서는 “저가 내게 간구하리니 내가 응답하리라”고 하셨으니 이 말씀은 성도가 하나님을 의지하여 은혜를 힘입는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환란 때에도 함께 하셔서 건져 주시고 영화롭게도 하시며 장수의 복과 만족함과 구원의 복도 주신다고 하셨습니다.
2. 그러면 이 시간의 제목이 되는 믿음의 방도란 무엇입니까?
1)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믿을 만한 대상이니까 사랑하여야 하지 않겠습니까? 하나님을 사랑하면 건짐도 받고 구원도 받습니다. 눅 7:47에 보시면 예수님이 바리새인의 집에 들어가셨을 때에 어떤 죄 많은 여인이 비싼 향유를 갖고 와서 예수님의 발을 씻기니 예수님이 말씀하시기를 “네 죄가 사하여졌다 이는 너의 사랑함이 많음이라”고 하신 일이 있습니다. 이렇게 하나님께 대한 믿음은 사랑으로 나타나는 법이고 그 사랑의 믿음이 구원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믿음의 방도 첫째는 하나님께 대한 사랑입니다.
2) 하나님께 충성하는 것입니다. 본문에서 “저가 내 이름을 안즉 내가 저를 높이리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자기에게 충성하는 자를 높이십니다. 눅 19:17에 보시면 “므나 비유 교훈”이 있습니다. 여기에서 열 므나를 받아 열 므나를 남긴 자에게 칭찬을 하신 후 열 고을 권세를 차지하라고 하셨습니다. 또 본문의 “이름을 안다”는 뜻은 “관심이 크다”는 뜻입니다. 하나님께 대한 관심이 충성으로 이어질 때 그것이 곧 믿음의 방도요 따라서 존귀하여지는 은혜를 받게 되는 것입니다.
3) 믿음의 방도는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입니다. 15절에서 “저가 내게 간구하리니 내가 응답하리라”하신 것은 하나님을 의지함으로 은혜를 받는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을 의지하며 사는 생활이 곧 믿음의 생활입니다.
그래서 믿음의 방도 3가지는 ① 하나님을 사랑함이고, ② 하나님께 대한 충성이며, ③ 그 하나님을 의지하는 생활이란 것을 꼭 기억하시고 힘쓰시는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제9과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가 (행 17:24~27) 목록으로
지난 시간에는 믿음이란 무엇인가 또 믿음의 방도는 무엇인가에 대하여 공부하였습니다.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며 충성하려는 성도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알면 크게 유익할 것입니다. 호 4:6에서 “내 백성이 지식이 없으므로 망하는도다” 하셨는데 이 말씀의 지식이란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또 호 6:3, 6에서는 “하나님이 제사보다 인애를 원하시고 번제보다 하나님 아는 것을 원하시니 우리가 힘써 여호와를 알자”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이 시간에는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지에 대하여 살피도록 하겠습니다.
1. 먼저 본문을 살피겠습니다.
1) 저희들은 지금 사도행전을 읽었습니다. 사도행전은 신약성경의 예수님의 행적(복음서) 다음 가는 역사서입니다. 이 사도행전에는 예수님의 승천 기사로부터 초대교회가 설립되고 이방 나라에 복음이 전파되는 과정을 기록한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주후 62년경에 바울사도의 제자 누가(의원)라는 사람이 기록한 것입니다. 그리고 지금 읽으신 말씀의 내용은 바울사도가 2차 선교여행 중 아가야 지방의 아덴(지금의 헬라의 수도 아덴)에서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들에게 증언한 말씀입니다.
2) 이 말씀 24절을 보시면 “하나님은 우주 만물을 지으신 신이시오 천지의 주재자이시라” 하였고, 또 그 “하나님은 광대무한하신 분이라 사람이 지은 성전 안에만 계신 분이 아니라” 하셨으며 또 25절에는 “무엇이 부족하여 사람의 섬김을 받아야 할 분도 아니요 만민에게 생명과 호흡과 만물을 친히 주신 분이라” 하셨고, 26절에서는 “인류의 창조자요 거주의 경계와 연대를 정하여 주시는 분이시라” 하셨으며 마지막 27절에서 “혹”이란 말씀이 있는 것은 모든 사람이 다 하나님을 알 수 있는 것이 아니요 오직 거듭난 자에 한하여서만 하나님을 발견할 수 있기 때문에 그런 제한된 말씀을 사용하신 것입니다.
2. 우리가 알아야 할 하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이것을 신학에서는 ‘하나님의 신분 혹은 속성’이라고 하는데 저희들은 중요한 것만 간단하게 배우셔야 하겠습니다.
1) 하나님은 이 세상에서 가장 높은 신이십니다. 신이란 절대자를 의미합니다. 우리는 흔히 현실을 초월하는 영물들을 귀신, 잡신이라고 합니다. 또 귀신, 잡신을 마귀, 사탄이라고도 하는데 이것들은 하나님을 훼방하는 악한 존재들이요, 또 하나님의 지배를 받는 자들로서 신이라고는 하지 않습니다. 이 세상의 신은 오직 절대자 하나님 한 분 뿐이십니다. 요 17:3에서 “영생은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를 아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2) 그 하나님은 누구의 피조물이 아니요 “스스로 존재 하신다”고 하셨습니다(출 3:14). 하나님은 절대자로서 스스로 존재하시기 때문에 하나님의 원인은 더 이상 있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3) 하나님은 만물의 창조자요, 보존자요, 통치자요, 만물을 친히 주신 자이며 생명과 호흡을 주관하시는 자요, 만물을 처분하시고 심판하실 분이시며 우주 역사의 지배자가 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또 한 가지 아셔야 할 것은 하나님은 인류의 구원자가 되신다는 것입니다.
이 시간에는 하나님에 대하여 이 만큼만 배우겠습니다. ① 가장 높은 신, ② 스스로 계신 분, ③ 창조, 보존, 통치하시고 만물과 생명과 호흡까지 주시는 분, ④ 만물을 끝내시고 심판하실 분, ⑤ 선민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이란 사실을 꼭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제10과 위대하신 하나님 (시 29:3~9) 목록으로
지난 시간에는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가에 대하여 스스로 계시고 만물의 지배자 되심에 대하여 공부를 하셨습니다. 이 시간에는 하나님의 위대하심에 대하여 공부를 하겠습니다. 성도는 하나님의 위대하심 앞에서 떨면서 섬기는 생활을 하셔야 합니다. 시 2:11을 보시면 “여호와를 경외함으로 섬기고 떨면서 즐거워하라”고 하셨습니다. 성도가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모르면 마치 “강아지가 범 무서운 줄 모른다”는 속담처럼 되기 쉬운 것입니다. 그 실례로 눅 5:8을 보시면 베드로가 처음에는 예수님을 평범한 선생님으로만 알았다가 나중에 고기 잡는 이적을 체험하고는 깜짝 놀라서 예수님의 무릎 앞에 엎드려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라고 회개한 사실이 있었지요. 이것은 성도가 하나님을 잘 모를 때와 알게 될 때에 그 생활 태도가 달라지는 것을 보여준 것입니다.
1. 본문에서는 위대하신 하나님에 대하여 인간이 실감 나도록 표현을 하셨습니다.
1) 이 말씀은 하나님의 능력이 크신 것을 자연 통치의 한 면으로 나타내신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자연을 통치하십니다. 이 시를 읊은 다윗은 큰 바람과 뇌성 벽력으로 큰 나무가 부러지고 암사슴이 뛰어 낙태를 하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의 능력으로 이루게 하심이라고 한 것입니다. 따라서 저희들도 자연계의 능력에서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깨달아야 하겠습니다.
2) 본문 말씀을 보시면 “여호와의 소리가 물 위에 있다” 하셨으니 이는 무서운 파도 소리를 의미하며 영광의 하나님이 뇌성을 발하신다 함으로 큰 뇌성소리를 하나님의 위대한 소리로 실감한 것입니다. 또 4, 5절을 보시면 “여호와의 소리가 위엄하므로 백향목을 꺾으시되 레바논의 백향목을 꺾으셨으며 그 뇌성으로 인하여 나무들이 꺾이고 넘어짐이 마치 송아지 뛰는 것과 같다”고 하였습니다. 또 “여호와의 소리가 광야를 진동케 하고 암사슴으로 낙태케 하며 삼림을 말갛게 벗기신다” 하였고, 하나님은 이런 능력과 위대하심으로 인하여 그 전에서 영광을 받으신다고 하신 것입니다. 저희들은 이 말씀에서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마음속으로 실감하시고 하나님 앞에 겸손하게 머리를 숙이는 자세를 취하셔야 할 것입니다.
2. 하나님은 무엇이 위대하십니까?
1) 하나님은 영원히 계신 것 자체가 위대하십니다. 신 33:27에서 “영원하신 하나님”이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이 영원히 존재하시기 때문에 위대하시고 우리도 영원을 살 수 있게 된 것입니다.
2) 그 하나님은 지혜가 무한하시기 때문에 위대하십니다. 롬 11:33을 보시면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부요함이여 그의 판단은 측량치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라” 하셨고, 고전 1:25에서는 “하나님의 미련하심이 사람의 지혜로운 것보다 낫다” 하심으로 그 지혜의 무한성을 말씀하셨습니다.
3) 하나님은 능력이 무한하십니다. 전능하시다는 뜻입니다. 창 17:1에서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하셨고, 출 6:3에서는 야곱에게 “전능하신 하나님을 나타나셨다” 하셨으며 창 18:14에서는 “여호와께 능치 못하신 일이 있겠느냐”고 하셨습니다. 이 세상에서 전능하신 분은 하나님뿐이심을 아셔서 크게 두려워하며 의지하시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4) 하나님은 무소부재하십니다. 어디든지 계시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영으로 존재하시기 때문에 어디든지 계실 수 있고 누구하고도 개인적으로 대면하실 수가 있는 것입니다. 시 139:7과 렘 23:23, 24에서 말씀해 주셨습니다. 지금도 저희들은 하나님과 함께 있음을 아셔야 합니다.
5) 하나님은 그의 사랑이 무한하심으로 위대하심을 나타내셨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에 대하여 앞으로 배우시게 될 것입니다.
영원, 지혜, 능력, 무소부재, 사랑의 위대함을 꼭 믿으시기 바랍니다.
제11과 사람 낚는 어부가 되자 (마 4:18~22) 목록으로
예수님은 최초의 전도를 자기의 고향인 갈릴리 해변 ‘가버나움’에서 시작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원 고향은 나사렛이지만 가버나움에서도 사셨다고 하였습니다(마 4:13). 예수님께서 갈릴리 해변에서 최초로 전도하여 부르신 이가 어부 시몬(베드로)의 형제였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을 부르실 때에 “너희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고 하시니 그들은 하던 일을 멈추고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1. 저희들이 이 시간에 배우려고 하는 것은 바로 전도하는 방법입니다. 전도하는 방법이 여러 가지 있겠지만 예수님의 사람 낚는 어부가 되라는 말씀에서 고기를 낚듯이 전도를 힘써 보시자는 것이 이 시간에 드릴 말씀입니다.
1) 전도하는 방법에는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노방 전도, 부흥 전도, 산업 전도, 교육 기관을 통한 전도 등이고, 여러 교회들도 전도하기 위하여 많이 노력하는 것을 잘 아실 것입니다. 여기에 따라서 한남교회도 전도를 하여야 하는데 한남교회의 입장으로서 가장 적절한 방법이 바로 사람을 낚는 것과 같은 개인 전도입니다.
2) 목사님은 이 개인 전도를 힘쓰게 하기 위해서 여러 차례 이 말씀을 강조하셨습니다. 전도는 성도의 사명이고(마 28:19, 막 1:38, 행 1:8) 교회의 부흥을 위해서 꼭 필요하며(마 2:9) 또 상급이 가장 많은 좋은 일이기도 한 것입니다(단 12:3).
3) 무엇보다도 우리 구역이 더 발전하기 위해서는 오늘부터 꼭 결심하시고 시작하시자는 뜻으로 이 말씀을 드리는 것입니다.
2. 구역 전도의 방법은 어떻게 할 것입니까?
1) 전도의 계획처는 각 구역이 되는 것입니다. 한남교회 26개 구역에서 한 사람씩만 인도를 하여도 26명의 교인을 얻게 됩니다. 이 얼마나 희망적인 일입니까?
2) 전도의 책임자는 구역 예배를 드리는 가족 단위로 합니다. 현재 우리 교회에 구역 예배를 드릴 수 있는 가정이 약 140가정쯤 됩니다. 한 가정이 한 사람씩만 인도해도 140명의 교인을 증가시킬 수 있습니다. 물론 혼자 나오는 성도와 구역 예배를 못 드리는 가정과 개인도 전도하실 수 있습니다. 그런데 기도와 봉사의 힘을 모으기 위하여는 구역 예배를 드릴 수 있는 가정이 더 유력하기 때문에 가족 단위로 힘을 쓰시자는 것입니다.
3) 일단 구역 예배 때나 가족 기도회에서 전도할 것을 결심하시고, 시작을 하는 것이요,
4) 시작하는 방법의 첫 번째가 전도 잘 되기 위하여 하루 한 번씩 특별 기도를 하는 것입니다. 기도는 하나님으로 하여금 일해주시기를 바라는 것이므로 특별히 간절하게 하셔야 합니다.
5) 대상을 정하는 것입니다. 이 때에 어떤 가정이나 개인을 정해도 됩니다. 문제는 잘 만나지고 교제와 친교가 가능한 대상을 선택하는 것입니다. 가족 회의에서 선택하십시오.
6) 그 선택된 대상을 위하여 기도하면서 친절과 봉사의 교제를 특별하게 힘쓰는 것입니다. 인사도 잘 하시고 가족의 안부도 친절하게 묻고 시장에도 같이 가서 짐을 들어 주고 좋은 음식을 나누어 주며 어려운 일이 있을 때 더 살펴주고 특별한 정성을 쏟아 봉사하는 것입니다. 이웃사촌이나 친정어머니만큼 정성껏 잘 해주는 것입니다.
7) 구역 예배 때에 음식을 장만하고 그를 그 곳에 오도록 식사접대 명목으로 초청하는 것입니다. 이 때에 온 구역원은 그를 환영하고 접대하고 축복하고 예배를 간단하게 같이 드리는 것입니다.
8) 그 다음 예배 때에는 선물을 예비하고 한 번 더 청하십시오. 그리고 이 비용은 구역에서 담당하십시오. 그가 좋은 선물을 받고 사랑을 느끼면 구역 예배는 물론 교회에도 나오게 할 수 있을 것입니다.
9) 교회로만 인도하면 교역자가 그를 지도할 것이고 일단 전도 계획이 성공적으로 되는 것입니다. 이 일을 꼭 실천에 옮기도록 결심하시기 바랍니다.
제12과 작은 모임의 기도회 (마 18:19~20) 목록으로
이 시간에는 “작은 모임의 기도회”란 제목으로 교훈을 받겠습니다. 우리 구역 예배의 모임은 작은 모임이요, 작은 모임의 기도회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1. 그런데 본문 말씀에서 예수님은 작은 모임의 기도자들에게 희망의 말씀을 주셨습니다. 그 말씀은 바로 두 사람 또는 두 세 사람이 합심하여 주님의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예수님도 그 곳에 함께 계시며 무엇이든지 구하면 이루어지도록 하시겠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2. 저희들은 이 말씀에서 두 세 사람의 의미, 합심하는 일, 주님의 이름으로 모이는 일, 기도로 구하는 일, 예수님이 함께 하시고 성취되게 하시는 응답에 대하여 살펴보겠습니다.
1) 두 세 사람이란 적은 수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소수의 사람을 결코 무시하시지 않습니다. 아브라함의 기도, 모세의 기도, 다니엘의 기도, 고넬료의 기도는 전부 개인의 기도이지만 응답하셨고, 또 마 6:6에서는 은밀한 골방에서의 작은 모임의 기도를 응답하신다고 하셨습니다. 지금 저희들의 모임이 바로 이 말씀에 해당되는 모임임을 아셔야 하겠습니다.
2) 합심하기를 바라신 것입니다. 이 합심이란 하나님의 뜻에 다같이 동감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사람은 각자의 개성이 다르고 형편이 다르기 때문에 각자의 목적에는 합심하기가 어렵지만 하나님이 원하시는 뜻에는 다같이 마음을 통일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성도가 하나님의 뜻을 위하여 주력하면 하나님은 성도의 일을 도와주시게 되는 것입니다. “너희는 먼저 그 나라와 그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 6:33) 하신 말씀이 바로 그런 뜻입니다. 따라서 기도자는 자기 소원에 합심하려 하지 말고 하나님의 뜻에 합심하여야 합니다.
3) 무엇이든지 구하는 것인데 여기의 “무엇이든지”란 말씀은 인간의 정욕적 욕구를 뜻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원하시고 명령하신 일들에 대하여 무엇이든지 구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도로 소원을 아뢸 때에는 먼저 정욕적인 기도나 이기적인 기도나 현실적 욕심에 얽매이는 기도를 삼가시고 하나님의 뜻을 깨닫는 일, 하나님의 뜻을 실천하는 일, 유혹에 빠지지 않는 일, 믿음에 관한 일, 신령한 일, 고난을 이기는 일, 바르게 행동하는 일 등을 구할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가난한 사람이 물질을 구하는 것이 당연하지만 성경 말씀에서는 “일용할 양식을 구하라” 하셨고, “부도 아니고 가난도 아닌 필요한 양식만을 구하라”(잠 30:8)고 하셨습니다. 따라서 기도로 구하는 소원은 이기적인 것을 피해야 하고 현실적인 것은 최소한의 것을 적당하게 구하며 그 이외의 것은 모두가 하나님의 뜻을 위한 목적으로 구해야 하는 것입니다.
4)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기 위하여 모인 곳에는 예수님도 함께 계시다는 것을 아셔야 하겠습니다. 기도하려고 하는 자에게 예수님이 함께 계시다는 것은 예수님이 은혜를 베푸시고자 좌정하신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이 승천하신 다음에는 성령님이 대신 오셔서 계신 것이지요. 하나님의 뜻을 따라 기도하려고 모인 장소이니만큼 주님은 감찰하시고 책망하려고 계신 것이 아니라 기도를 들으시고 은혜를 베푸시려고 계신 것임을 꼭 믿으셔야 하겠습니다.
5) 두 세 사람이 합심하여 땅에서 구하는 기도를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서 들으시도록 하시겠다고 하셨는데 이 말씀은 예수님이 기도의 중보자가 되셔서 응답이 되도록 도와주신다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영원토록 성도를 하나님께 연결시키는 중보자가 되어 계신 것입니다.
간단한 내용에 대한 설명이 긴 것 같습니다만 결론은 두 사람 이상이 모여 기도하는 일을 귀하게 여기셔서 더 열심있고, 간절한 기도를 할 수 있어야 하겠기로 이 말씀을 상고한 것입니다.
제13과 삼위일체 하나님 (마 3:16~17) 목록으로
이 시간에는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하여 공부하겠습니다. 지난 시간에도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가에 대하여 공부하셨는데 이 시간에도 거기에 계속되는 말씀으로 하나님에 대한 내용을 공부하는 것입니다.
1. 삼위일체란 뜻은 세상 사람들이 표현하는 말대로는 세 가지 조건이 하나로 뭉치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를 들어서 산 좋고, 물 좋고, 공기가 좋으면 경치 좋은 곳이라고 할 수 있는 것처럼 하나님도 성부, 성자, 성령님이 함께 계심으로 (완전한) 하나님이 되신다는 뜻입니다.
2. 그러나 이 삼위일체란 용어의 해설이 하나님을 설명하는데는 크게 충분하지 못한 것입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은 어떤 물질이나 사건의 조건을 세 가지로 갖추어서 온전하게 되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그 이유는 성부, 성자, 성령님이 다 한 분의 인격이시면서 또 독립적 인격으로도 존재하시기 때문입니다.
3. 그러면 왜 이렇게 하나님을 어렵게 믿어야만 하는가 할 때에 성경이 증거하는 하나님이 그렇게 나타나시고 있기 때문입니다. 막 1:29과 요 5:44에서 “하나님은 유일하신 분”이라 하셨고, 약 2:19에서도 “하나님은 한 분이신 줄로 귀신들도 믿고 떤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니까 저희들은 성경대로 유일하신 하나님을 믿는 것입니다.
4. 그런데 지금 읽으신 본문을 보세요.
1) 예수님이 세례요한에게 세례 받으시고 물에서 올라오십니다.
2) 성령님이 비둘기처럼 예수님 위에 임하셨습니다.
3) 17절에서 하늘로부터 소리가 있어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셨으니 여기에서 말씀하신 분은 성부 하나님이시며 세례를 받으신 이는 아들 예수님이시오, 또 성령님이 강림하심으로 성부, 성자, 성령, 삼위께서 함께 나타나신 것입니다.
5. 그러면 이 삼위께서 다 하나님이신가 할 때,
1) 성부 하나님은 더 설명드릴 필요가 없고,
2) 성자 예수님도 하나님이라고 하셨습니다. 우선 요 1:1~3에서 예수님은 태초부터 계신 말씀이요, 창조자라 하셨고, 요 14:9에서 예수님을 본 자는 곧 하나님을 본 자라 하셨고, 또 10절에서는 하나님 아버지가 예수님 안에 계시다고 하셨습니다.
3) 성령님을 하나님의 영(롬 8:9), 진리의 영(요 14:17), 예수의 영(행 16:7)이라고 하심으로 삼위께서 다 하나님이심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성경이 이렇게 한 분 하나님과 삼위의 하나님을 나타내셨기 때문에 그대로 믿어야 하는 것입니다.
6. 어떤 사람은 논리가 맞지 않으면 잘 안 믿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세계는 심오하고 광대무한 하기 때문에 인간의 지혜로 다 이해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님을 아셔야 합니다. 바울 사도도 롬 11:33에서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부요함을 측량할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과연 그 말씀이 옳습니다. 우리 인간은 하나님이 자기를 나타내 주신 일부분만 알고 이해할 뿐 하나님의 신비와 오묘함을 다 알지 못하는 것이니까 그대로 의심없이 믿으셔야 하는 것입니다.
7. 여기에서 성부, 성자, 성령님은 한 하나님이시면서 삼위 하나님으로도 계시고, 일치한 뜻 안에서 각각의 인격으로도 역사하시며 구원 사업을 하실 때 성부는 선택하신 자에게 이를 계획하시고, 성자는 구원하시는 방도를 십자가로 성취하시며 성령님은 그 구원의 은혜를 전달 적용하시는 역할을 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이 삼위의 하나님은 한 인격, 같은 지혜, 같은 능력, 같은 영광을 가지시고 동일한 뜻을 성취하시되 독립적으로도 역사하셨다는 것을 믿으셔야 하는 것입니다. 또 이 사역을 시기적으로 분담하심에 있어서 구약시대에는 하나님이 앞서시고 복음시대는 예수님이 앞서시고 교회시대는 성령님이 앞장 서셔서 일하시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제14과 예수님은 어떤 분이신가? (마 16:13~17) 목록으로
이 시간에는 “예수님은 어떤 분이신가”에 대하여 공부하겠습니다. 지난 시간에는 “하나님”과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하여 공부하셨지요. 그래서 이 시간에는 예수님에 관한 것을 배우시고 다음 시간에는 성령님에 대한 것을 배우시겠습니다.
1. 본문 말씀에서 예수님은 가이사랴 빌립보 지방에서 전도하실 때에 제자들에게 물으시기를 세상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 하며 또 너희들은 나를 누구로 아느냐고 물으셨습니다. 이 때에 세상 사람들은 예수님을 “세례요한, 엘리야, 또는 예레미야 선지자 중 하나”로 여긴다 하였고, 베드로는 예수님을 “주님이시요 그리스도시요 또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였습니다.
1) 여기에서 가이사랴 빌립보란 지역은 헬몬산 남쪽에 있는 유원지로서 헤롯왕이 로마 황제의 이름을 기념한 곳입니다.
2) 그 곳에서 예수님이 자기의 신분을 어떻게 아느냐고 물으신 것은 그 당시의 사람들이 예수님의 신분을 바로 알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에 대하여 말하기를
① 얼마 전에 순교당한 세례요한의 혼을 힘입은 사람이다.
② 또는 구약시대에 있었던 유명한 선지자 엘리야나 예레미야 중 한 사람으로 그의 혼을 받은 사람이다.
③ 또는 하나님의 말씀을 예언하는 선지자 중의 한 사람으로 알고 있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다 예수님을 잘못 안 내용들입니다. 예수님을 잘못 알면 믿음이 삐뚤어지기 때문에 구원을 받지 못합니다. 요 17:3에서 “영생은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를 아는 것”이라고 하셨기 때문에 예수님을 바로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3) 그러면 베드로는 예수님을 어떤 분으로 알았습니까? 본문 16절에서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였으니 이 말씀은
① 예수님을 주(왕)로 알았다는 것이고,
② 그리스도, 즉 구원자로 알았다는 것이며
③ 하나님의 아들로 고백을 한 것입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예수님은 만왕의 왕이시요, 구원자시요, 하나님의 아들이란 뜻입니다. 이것은 베드로가 예수님을 바로 안 대답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를 칭찬해 주셨고 복이 있다 하셨으며 또 이런 지식을 가진 것은 인간적 혈육의 지혜로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주시는 선물(믿음)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4) 이 말씀에서 두 가지 더 설명드릴 것이 있습니다.
① 베드로를 바요나 시몬이라고 하셨는데 여기의 “바요나”는 “요나의 아들”이란 아람어이고, “시몬”은 베드로의 본래의 이름인데 본문에서 예수님이 베드로로 바꾸어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본래 베드로를 아람말로 “게바”라 하셨는데(요 1:42) 그 말을 헬라말로 번역한 것이 베드로입니다. 또 성경에는 요한의 아들(요 1:42, 21:15)이라고 한 데도 있지만 요나와 요한은 같은 이름을 다르게 호칭한 것뿐입니다.
②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란 뜻은 하나님이 신령한 세계에 계시며 예수님의 아버지가 되신다는 뜻으로 성도는 하나님의 양자가 되는 것입니다(롬 8:15, 23).
2. 본 제목으로 돌아가서 우리가 예수님을 어떤 분으로 아셔야 하겠습니까? (기독교신앙상식을 참고하세요.)
1)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는 것과
2) 하나님의 아들로서 하나님과 본질이 같으신 하나님이심과
3) 본래 말씀으로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요 1:1),
4) 하나님과 창조사역을 같이 행하셨으며(요 1:3)
5) 죄가 없으신 분이고
6) 하나님 신분과 사람의 신분을 겸하여 이 세상에 오셨으며
7) 그의 고난과 죽으심이 우리의 죄를 대속하신 것이요,
8) 부활, 승천하여 하나님 우편에 계시면서
9) 하나님과 성도 사이에서 영원토록 중보하시는 분이고,
10) 또 성령을 보내주신 분이며
11) 장차 세상을 심판하실 분임을 꼭 아십시오.
제15과 예수님의 고난을 예언하심 (사 53:1~9) 목록으로
이번 주간은 고난주간이기 때문에 “예수님의 고난을 예언하심”이란 제목으로 교훈을 받겠습니다. 33년을 사신 예수님의 생애 중에 마지막 한 주간을 고난주간이라고 합니다.
1. 예수님은 수요일 저녁에 제자들과 성만찬을 가지셨고, 그 밤에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셨으며 목요일 새벽에 끌려 다니시면서 재판을 받으셨고, 금요일 오전에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고 주일날 새벽에 부활하셨기 때문에 2박 3일 동안 그 몸이 무덤에 계셨다가 살아나신 것입니다.
2. 지금 읽으신 말씀은 구약시대의 이사야 선지자가 “예수님이 고난 받으실 것”에 대하여 미리 예언하신 말씀입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주전 700년경의 사람입니다. 그러니까 주전 700년경에 장차 오실 예수님이 어떻게 고난을 받으실 것인가에 대하여 예언을 하신 것입니다. 본문을 주목하시면서 그 뜻을 이해하시기 바랍니다.
1) 1절의 “우리의 전한 것을 누가 믿었느뇨”하신 것은 선지자들이 예언한 메시야 구원사역에 대하여 많은 사람들이 외면할 것을 예언하심이고, “여호와의 팔이 뉘게 나타났느뇨”하신 것은 범죄한 백성에 대한 하나님의 징계가 범죄한 당사자가 아닌 예수님에게로 나타났다는 뜻입니다(5절). 즉 하나님의 때리시는 팔이 희생의 어린 양이신 예수님에게로 나타날 것을 예언하신 것입니다.
2) 2절에서 “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줄기 같다” 하셨으니 이 말씀은 예수님이 비천하게 오셔서 인간의 연약을 맛보셔야 할 만큼 유약한 존재로 사실 것을 예언하신 것입니다. 따라서 고운 모양과 풍채도 없기 때문에 인간적인 흠모의 대상이 아님을 예언하신 것입니다. 저희들은 이 말씀에서 예수님의 초라한 모습을 연상할 수 있습니다.
3) 3절에서는 예수님이 배척받으실 것을 예언하셨으니 “그가 멸시를 받고 싫어버린 바가 되며 이로 인하여 간고와 질고를 겪게 되시고 외면당하는 자가 되시고(얼굴을 가리우고 보지 않음을 받음) 또 한 동족들도(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않으므로 괴로움 당하실 것”을 예언한 것이며
4) 4절에서는 예수님의 질고와 슬픔이 우리의 죄짐을 담당하시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이것을 모르는 사람들은 “그 자신의 죄로 벌을 받는다”고 할 것을 예언하셨고,
5) 5절에서는 “그가 찔리고 상함은 우리의 허물과 죄악을 인함이요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며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1절; 하나님의 팔로) 우리의 죄악의 상처가 나음을 받게 되는 것”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6) 다음 6절에서도 우리는 다 양처럼 우둔하여 각기 제 길로 가고 죄를 범하였지만 하나님은 우리 무리(택한 백성)의 죄악을 예수님께 담당시키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게 된 것입니다.
7) 그 다음 7~9절은 예수님이 끌려가시고 돌아가신 후 무덤에 장사될 것까지 예언을 하셨습니다. 7절에서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도 입을 열지 않으셨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구속을 위한 제사입니다. 제사는 자원함과 책임으로 드려야 하는 것입니다. 억지의 제사나 헌신은 하나님이 받지 않으십니다. 그런 뜻에서 예수님은 십자가를 감수하셔야 하셨기 때문에 도수장으로 가는 소처럼 또 털 깎이는 양처럼 조용하게 고난을 받으신 것입니다.
8) 8절에서는 그 예수님이 곤욕과 심문을 당하고 끌려갈 것인즉 그가 산 자의 땅에서 끊어짐이 벌 받을 백성들의 죄를 대신함인 줄로 알 자가 얼마나 되겠느냐? 하셨고,
9) 9절에서는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실 때 강포를 행치 않으실 것이요, 안 좋은 말(궤사)도 안 하실 것이나 악인의 죽음처럼 죽어 무덤에 갈 것이며 그 무덤은 부자의 무덤이 될 것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이 예언대로 예수님은 부자 요셉의 무덤에 장사되게 된 것입니다(마 27:59, 60).
우리는 예수님의 고난을 깊이 음미하시고 우리의 죄를 짊어지신 은혜를 깊이 감사하셔야 하겠습니다.
제16과 부활을 믿게 된 도마 (요 20:19~31) 목록으로
지난 주일에 부활절을 지켰습니다. 따라서 부활과 관계되는 말씀을 잠시 상고하겠습니다.
1. 구약 성경에서 선지자들이 예수님의 부활을 예언한 말씀과(시 16:10, 사 26:19) 예수님 자신이 부활하실 것을 예언한 사실대로(마 20:19, 막 9:9, 요 2:19~22) 예수님은 돌아가셨고 장사된지 사흘만에 부활하셨습니다.
2. 그런데 예수님 당시에 갈릴리 동리에 도마(디두모)란 사람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열두 제자를 부르실 때에 그도 불러주셨기 때문에 그가 다른 제자들처럼 3년 동안 예수님을 보필하였습니다. 그 때에 도마는 다른 제자들과 함께 예수님이 부활하실 것이라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그러나 모든 제자들은 그 말씀을 귀담아 듣지 않은 중에 예수님이 돌아가셨고 또 말씀대로 살아나셨습니다. 그리고 부활하신 날 저녁에 제자들이 예수님의 부활을 확인하였으나 마침 그때에 도마는 없었습니다. 그 후에 제자들이 도마에게 그 사실을 말하였으나 역시 직접 확인을 하지 않고는 믿지 못하겠다고 하였습니다. 그러자 8일이 지난 후에 같은 장소에서 도마가 있을 때에 예수님이 또 나타나셔서 못자국과 창자국을 확인시키시니 도마는 그제야 믿으면서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라고 고백을 한 것입니다. 이때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너는 본고로 믿느냐 보지 않고 믿는 자들은 복되다”고 하셨습니다.
3. 저희들이 깨달을 수 있는 교훈이 무엇입니까?
1) 예수님의 제자인 도마가 3년 동안 부활을 믿지 못하면서 따라다녔다는 사실이요,
2) 예수님이 직접 부르신 제자 중에도 완전한 믿음을 갖추지 못한 자가 있었다(가룟 유다)는 사실이며
3) 보고 확인한 후에 믿는 것보다 말씀대로 무조건 믿는 신앙이 크게 귀하다는 사실과
4) 도마가 종시 부활을 못 믿었더라면 구원을 받지 못하였을 것인데 그는 하나님의 선민이었으므로 깨달을 기회를 주셔서 깨닫게 되었고 믿어 구원받게 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5) 예수님의 부활을 믿지 못하면 왜 구원받지 못할까요? 그 이유는 하나님을 거짓말 하시는 분으로 인정하여 배척을 하기 때문입니다. 성도가 하나님을 다 알지 못하고 또 성경을 다 알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무지는 자신의 어리석음에 기인할 뿐 그것이 하나님을 배척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부활을 믿지 않는 것은 하나님을 거짓말쟁이로 인정하는 것이므로 패역한 것입니다. 이는 하나님이 부활하신다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셨는데 인간이 믿을 수 없다거나 그럴리 없다는 것은 바로 하나님의 말씀과 성경을 부인하는 처사이기 때문입니다. 참으로 위험한 일이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4. 저희들은 구원을 받는 믿음을 확인하고 믿는 것이 아니고 성경대로 믿는 믿음을가져야 합니다.
1) 믿음은 바른 지식입니다. 바른 지식은 또 믿을 만한 지식입니다. 그러나 믿음의 내용이 다 지식으로 증명되지는 않습니다. 특히 구원받는 진리는 더욱 그렇습니다.
2) 우리는 하나님의 존재를 믿을 수 있습니다. 그 하나님이 우리 눈에 보이지 아니한다 하여도 만물이 창조되고 움직이는 것을 보아서 믿을 수 있고, 또 예수님의 부활도 우리는 성경으로 믿지만 그 당시의 제자들은 직접 보고 믿은 것이 사실입니다.
3) 이렇게 확인하고 믿는 것도 있으나 그렇지 않은 경우가 더 많습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인 사실, 십자가의 죽으심이 우리의 죄를 대속한 사실, 천국이 있고 심판이 있다는 사실은 체험으로 확인할 수 있는 것이 아니므로 끝까지 성경대로 믿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라”고 하셨습니다(히 11:1).
본문에서 “성경이 기록된 것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요, 그리스도임을 믿게 하기 위함이라” 하셨으니 체험은 안 해도 성경대로 믿는 믿음이 구원을 받는 믿음이 되는 것입니다.
제17과 성령님은 어떤 분이신가? (요 14:16~17, 26) 목록으로
전 시간에 삼위일체 하나님과 성부 하나님과 성자 예수님을 공부하였으므로 이 시간에는 성령님에 대하여 공부함이 그 순서입니다.
1. 지금 읽으신 본문 말씀은 예수님께서 성령님에 대하여 말씀하여 주신 내용입니다.
1) 예수님은 성부 하나님께 구하여 다른 보혜사, 즉 성령님을 보내주신다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돌아가신 다음 부활 승천하사 하나님께 구하여 성령님을 보내주신다는 말씀이므로 성령님은 하나님과 예수님으로부터 오셨다는 뜻입니다.
2) 그 성령님을 또 다른 보혜사라 하신 것은
① 육신으로 오신 예수님에 비할 때 영으로 오신 하나님이시므로 다르고,
② 또 하나님과 예수님 배후에서 역사하시던 성령님이 성도의 세계에 거주하시면서 일하시는 면이 다르므로 그렇게 표현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성령님을 보혜사라 하신 것은 성령님의 여러 명칭 중 하나로서 돕는 자, 중재자란 의미가 있습니다.
③ 그 성령님을 보내사 영원토록 성도와 함께 계시게 하신다고 하셨습니다. 17절 후반에 보시면 “저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 하심으로 성령님은 성도와 함께 계시고 또 마음 속에 계셔서 성도를 보호, 지배, 인도하시되 영원토록 하신다고 하셨습니다. 따라서 성령님은 지금도 우리와 우리 마음 속에 계신 것입니다.
3) 17절에서 성령님을 진리의 영이라 하셨습니다. 진리의 영이란 참된 영, 말씀의 영, 말씀으로 역사하시는 영이란 의미입니다.
4) 본문 후반부에서 성령님은 성도들만 깨달을 수 있는 하나님이요, 믿지 않는 세상 사람들은 전혀 알지 못한다고 하셨습니다.
5) 또 26절에서 보혜사 성령님은 “하나님이 예수님의 이름으로 세상에 보내시고 모든 것을 가르치시며 예수님이 말씀하신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신다” 하심으로 성령님의 하시는 일은 성경 가르치시는 일이 으뜸인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6) 따라서 본문 말씀에서의 교훈의 요지는
① 성령님을 보혜사, 진리의 영이라고 하신 점,
② 성령님이 하나님과 예수님께로서 파송되어 오신 점,
③ 성도들의 생활과 마음에 영원히 거주하시는 점,
④ 진리를 가르쳐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는 점(요 16:13),
⑤ 불신자에게는 알려지지 않는 점을 나타내셨습니다.
2. 본 제목에 따라서 성령님은 어떤 분이신가를 말씀드리겠습니다(성경개론 222, 224쪽을 반드시 참고하시기를 바랍니다).
이 시간에 요약해서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1) 성령님은 하나님의 영이시요,
2) 삼위일체 하나님으로서는 제 3위에 속하시며
3) 하나님과 본질이 같으시고(본질이란 독자적 성질, 본바탕),
4) 권능과 영광이 같고,
5) 삼위일체 간에 동일하게 역사하시고,
6) 사역을 분담하시되 뜻이 일치되게 분담사역을 행하시며
7) 구속 사역에 있어 구속의 은총과 신령한 복을 전달하시며
8) 진리의 말씀을 가르치시고 감동하셔서 실천하게 하시고,
9) 성도의 신분을 거룩하게 단장하시며
10) 항상 함께 하시고 교통하시는 일을 하시는 것입니다.
성령님은 그 외에도 명칭이 많고 하시는 일도 많습니다. 성도로 거듭나게 하신 일과 예수님을 동정녀에게서 탄생하게 하신 일과 성경을 기록하도록 영감을 주신 일 등 각종 기적에 이르기까지 많은 일을 행하셨습니다. 지금도 그 성령님은 성도의 믿음 분량, 충성 분량에 따라서 성도를 도우시고 역사하시는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저희들은 이 성령님에 관한 신분과 사역을 잘 깨달으시고 저희들이 성령의 충만한 은혜를 힘입어 영광을 더욱 많이 돌릴 수 있도록 노력하셔야 하겠습니다(다음 이 시간에는 성령이 충만하여지는 방법을 배우시도록 하겠습니다).
제18과 오직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 (엡 5:18) 목록으로
지난 시간까지 성령님에 관한 말씀을 배웠기 때문에 이 시간에는 성령 충만에 대한 말씀을 배우려고 합니다. 성령 충만이란 현실 교회 성도들에게 필요 불가결한 문제이고 또 큰 관심사이기도 합니다.
1. 지금 읽으신 말씀은 바울 사도께서 에베소 교회 성도들에게 주신 말씀입니다. 주후 62년경에 바울 사도가 로마 감옥에 계시면서 이 서신을 영감으로 기록하여 소아시아 서쪽 항구 도시에 있는 에베소 교회에 두기고란 사람을 통하여 보내셨습니다(행 20:4, 딤후 4:12).
2. 지금 읽으신 말씀에는 두 가지가 교훈되었는데 하나는 술 취하지 말라는 것이고, 또 하나는 오직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에서
1) 술 취하지 말라는 말씀은 술을 엄히 경계하라는 의미도 있으나 성령 충만한 자의 형편을 술 취한 자가 술에 이끌려 움직이는 것처럼 성령의 감화에 이끌려 살아야 할 것을 교훈하신 것입니다. 술을 적게 마신 사람은 취하지도 않거니와 술에 끌리지도 않습니다. 이와 같이 성령에 충만하지 않으면 역시 자신과 세상에 끌릴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술 취한 사람이 자기 정신을 떠나서 술에 끌리는 것처럼 성도는 성령에 취하여 살아야 할 것입니다.
3. 본문에서 오직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의 오직이란 말씀은 반드시란 뜻이 있습니다. 성도는 누구나 반드시 성령의 충만을 받아야 할 것입니다.
4. 성령 충만이란 무엇입니까?
성령 충만은 하나님의 인격이 충만한 것을 의미합니다. 왜냐하면 성령님은 곧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충만을 어디에서 본받을 수 있는가 하면 이는 예수님의 모습과 하나님의 말씀에서만 찾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 생존시의 사람들은 예수님을 보고 하나님을 알았으나(요 14:9) 오늘의 성도들은 오직 성경만으로 하나님을 알 수 있기 때문에 결국은 성경 말씀에 최대한 접근하는 성도가 성령에 충만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5. 성경에 최대한 접근하는 사람은 우선 성경을 바르게 많이 깨닫는 사람이요, 또 그 말씀대로 최대한 실행하는 사람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생각하기를 설교로 감동을 끼치고 어떤 능력을 행하면 성령님이 충만한 줄로 오인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것은 한 부분일 뿐 종합적인 표준은 아닌 것입니다. 오직 성령의 충만은 그 성도의 전체의 생활에서 볼 때에 성경에 가장 부합되는 일이 많음을 뜻한다는 사실을 아셔야 할 것입니다.
6. 그러면 어떻게 하여야 성령의 충만을 받을 수 있을까요?
1) 우선 성령 충만에 방해되는 것들을 제거하여야 하는데 그것이 바로
① 거리끼는 것을 제거해야 함이요,
② 성경의 무식을 없애야 함이요,
③ 육체의 소욕을 멀리 하셔야(갈 5:17) 하는 것입니다.
2) 성령 충만을 위한 적극적인 방법으로는
① 기도를 힘쓰면서
② 성경을 열심히 배우시고
③ 회개를 힘쓰시고(행 2:38)
④ 하나님의 일에 충성을 많이 하는 것입니다.
7. 이 네 가지 방법을 힘써 실행하시면 성령 충만의 은혜를 체험하게 되는데 그 절차는
1) 우선 자신이 말씀과 기도에 끌리는 것을 감지하게 되고,
2) 죄를 두렵게 여겨 회개하게 되며 무엇이나 죄 되지 않게 살려고 하는 열심이 생기고 세상의 욕심이 멀어지며
3) 하나님을 즐거워하게 되고 신령한 은혜의 가치관을 가지게 되면서 변화의 사람이 되고 예수님의 인격을 닮게 되는 것입니다.
행 1:8 말씀에서 “성령이 임하시면 권능을 받는다”고 하셨는데 이것은 사명 수행을 잘 할 수 있는 은사를 뜻하는 것이며 이 은사도 성령 충만 안에 예속되는 것임을 아셔야 할 것입니다.
제19과 하나님이 계신 증거 ( 히 11:6) 목록으로
이 시간에는 “하나님이 계신 증거”란 제목으로 교훈을 받겠습니다. 하나님이 계심을 어떻게 증명하느냐 하는 것은 저희들 자신들이 하나님을 경외하는데도 필요하거니와 전도함에 있어서 불가피하게 말하지 않을 수 없는 내용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성도들이 하나님을 경외하면서도 그 존재 증명에 대하여 막연한 경우가 있습니다.
1. 우선 하나님이 계신 증거는 만물이 존재하는데서 찾을 수 있습니다. 우리 인간은 만물 세계 안에서 살고 있습니다. 어느 인간도 자신이 스스로 태어나지 않았으며 우주의 만물을 만들지 않았고, 또 만들 수도 없습니다. 그렇다면 이 사실은 분명히 어떤 원인자에 의하여 창출된 것이 사실이 아닙니까? 내가 있으면 나의 조상이 있듯이 조상이 있으면 또 그 원인자가 계실 것입니다. 이 세상의 모든 것들이 원인자가 없는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다 헐어져가는 시골의 집도 지은 자가 있고 길에 떨어진 돈지갑도 버린 자가 있지 않습니까? 이렇게 세상의 모든 것들이 다 원인자가 있다고 한다면 인간을 포함하는 우주 만물도 반드시 원인자가 계시니 그 분이 바로 창조자요 하나님이심을 깨달아야 하는 것입니다.
2. 만물의 신비함과 질서 있는 통치가 있음을 볼 때 이는 우연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프랑스 왕궁에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그림이 있습니다. 이 그림은 저절로 걸려진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16세기의 사람 미켈란젤로가 그린 그림입니다. 그러나 살아있는 그림은 아니지요. 우리가 바라보는 아름다운 세상의 풍경은 하나님이 창조의 솜씨로 그리신 것인데 이 그림은 살아있고 움직이는 그림이 아닙니까? 아름다운 세계, 아름다운 꽃, 신비한 물고기들, 또 사람이 키우지 않아도 저절로 번식되고 보존되는 생물들을 볼 때에 하나님의 신비한 통치를 깨닫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하나님은 씨와 먹을 것을 주시며(고후 9:10) 또 자라게 하신다(고전 3:6) 하셨습니다. 사람의 지식이 아무리 발전한다 하여도 씨나 생명체를 만들지 못하며 또 자연 통치에 맡기지 않고는 자라게 할 수 없고, 또 운전수 없는 자동차가 자기의 길을 갈 수 없음을 볼 때 이것도 하나님이 만물을 운전하신다는 증거가 아닙니까? 또 사람의 생명도 창조되고 수명도 하나님의 작정에 따라 정해지는 것을 알게 될 때에(행 17:26) 이와 같은 신비와 통치는 자연히 하나님의 존재를 알 수 있게 하고,
3. 인간들 자신에게 절대자를 숭상하는 종교심이 있음을 보아서 알 수 있는 것입니다. 행 17:22에서 인간에게는 종교성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특히 지식을 숭상하는 헬라의 수도 아덴의 시민들이 그러하였습니다. 이 종교적인 본능은 인간의 연약에서 발생된 것이 사실이지만 본래 본능에는 그 대상이 있기 마련입니다. 우리 사람에게도 배고플 때 먹어야 하는 본능이 있고 남녀간 사춘기가 되면 이성을 필요로 하는 본능이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 본능에는 그것을 충족시킬 수 있는 대상이 반드시 있는 것입니다. 또 하늘을 날아보았으면 하는 인간의 본능이 충족되어 지금은 하늘을 날아다니고 있지 않습니까? 이와 같이 사람이 절대자 전능하신 하나님을 숭상하는 본능의 이면에는 꼭 그 대상이 계시니 그 분이 바로 하나님이심을 의심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4. 마지막으로 하나님이 계신 증거는 이 세상에서 선한 자가 꼭 복을 받고 승리를 하여야 한다는 사실에서 절대자의 공의로운 심판을 필요로 하는 것입니다. 모든 인간들이 양심을 표본으로 하고 선하게 살아야 하는 것이 원칙이라면 선한 자가 승리할 수 있는 보장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지금 읽은 본문에서 하나님은 상 주시는 분이라고 하셨으니 이 말씀이 바로 인간이 선을 추구하는 것이 필연적이라면 공의로운 심판자이신 하나님의 존재를 믿어야 하는 것이 또한 필연적인 것입니다.
제20과 성경을 주신 절차 (벧후 1:19~21) 목록으로
성경은 기독교인에게 절대 유일의 경전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글로 전달되었고 그 글을 각 나라의 말로 번역하여 책으로 주어진 것이 바로 우리가 가지고 있는 성경입니다. 성경을 신앙과 본분의 절대 유일의 법칙으로 믿는 성도는 성경 말씀의 출처와 경위 정도는 알고 계셔야 하는 것입니다.
1. 저희들은 지금 베드로 사도를 통하여 주신 말씀을 읽었습니다.
1) 19절 앞에 보시면 “우리에게 더 확실한 예언이 있다” 하셨으니 이 예언이란 그 당시에 있었던 구약 성경과 초대 교회 당시에 주신 구전으로 전달된 성경 말씀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마 17:2에서 변화산의 계시를 잠시 본 일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자신이 잠깐 본 환상적 계시보다 더 확실하다고 하신 것입니다. 성경 이상 더 확실한 계시는 없는 줄로 아셔서 절대로 성경이 아닌 다른 환상이나 음성이나 꿈을 믿으셔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2) 이 성경 말씀이 “어두운데서 비취는 등불 같다”는 것은 어둡고 소망 없는 세계에 구원의 복음으로 소망을 주신다는 말씀이며
3) “날이 새어 샛별이 마음에 떠오른다”는 것은 점차로 말씀을 깨닫게 됨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 말씀을 바로 깨닫기 위하여 주의하며 살펴야 한다고 하심이며
4) 이 말씀은 성령님의 감동으로 기록된 것이므로 사사롭게 성령의 감동을 떠나서는 바로 해석되지 않는 것임을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에서 “예언(즉 성령 말씀)은 사람의 뜻으로 낸 것이 아니고 성령의 감동을 힘입은 사람들이 하나님께로부터 받아서 기록한 것”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이렇게 성경은 하나님께로부터 영감을 받아 기록하셨다고 하셨습니다.
5) 영감이란 뜻은 성령님이 감동을 주셔서 계시의 말씀을 깨닫게 하신 것을 의미합니다.
2. 성경을 주신 절차에 관하여 쉽게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1) 구약의 앞 부분에 있는 모세오경은 주전 1500년경에 모세가 영감으로 받아 기록한 것으로 시작하여 구약의 마지막 책인 말라기는 주전 450년경에 기록된 것이고, 또 신약 성경은 주후 60년경부터 100년경 사이에 기록된 것인데 주전 1500년경부터 주후 100년경까지 약 1600년 동안 이 기록이 어떻게 보존되어 내려왔겠는가를 설명할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2) 더 자세한 내용은 성경개론을 탐독하시면 더 잘 아실 수 있지만 이 시간에는 간단하게 몇 가지만 말씀드리겠습니다.
① 하나님은 그 제자들(선지자, 사도, 제자들)에게 영감적 계시로 말씀을 주셨습니다.
② 말씀을 받은 자는 그 말씀을 가감없이 전달하였고, 또 기록도 하였습니다(요 1:45, 출 17:14).
③ 구전으로 전하여졌든지 혹은 기록되었든지 간에 하나님이 말씀하신 것은 모두 진리가 되는 것입니다.
④ 원시적 시대에는 기록의 재료로 돌판, 토판을 사용하다가 나중에 파피루스와 양피지를 사용하였습니다. 파피루스는 나일강의 갈대 껍질로 만든 종이이고, 양피지는 양의 가죽에 쓴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후 시대에 와서 종이와 책으로 발전하였습니다.
⑤ 구약 성경은 역사적 과정에서 보존 문제가 퍽 어려웠습니다. 그러나 신약 시대에 오신 예수님은 말씀의 주인이신 하나님이신데 그 예수님께서 구약 성경을 인정하시고 받으셨으므로 더 이상 의심할 바가 없게 되었고,
⑥ 신약 성경은 1세기 안에 된 것이므로 그 보존이 더욱 용이하였습니다.
다만 성경 66권이 진리가 되는 이유는 제자들이 영감으로 받은 말씀을 그대로 기록한 점과 이것이 전해지는 과정에서 누구도 오류를 발견할 수 없음이 그 중요한 이유가 되는 것입니다.
제21과 복음의 요절 (요 3:16) 목록으로
이 시간에는 “복음의 요절”이란 제목으로 교훈을 받겠습니다. 이 말씀은 목사님의 설교를 통하여 이미 증언되었지만 확실하게 모르시는 분들이 계실까 하여 다시 배우는 것입니다.
1. 복음의 요절이란 의미는 구원의 핵심, 구원의 중요한 의미가 담긴 말씀이란 뜻입니다. 성경 여러 곳에도 구원에 관한 말씀이 있지만 요 3:16에 만큼 간단 명료하게 나타낸 말씀은 없습니다. 그래서 이 말씀을 복음의 요절로 일컫게 된 것입니다.
2. 이 말씀을 분류하면
1) 하나님이
2)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3) 독생자를 주셨으니
4)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5) 멸망치 않고
6)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고 하신 것입니다.
3. 이 말씀이 왜 복음의 요절이 되는가를 살펴보시겠습니다.
1) 구원의 주체자가 하나님이심을 나타내셨습니다. 인간이 타락하므로 구원을 받아야 함이 사실인데 누가 구원하시는가 하면 성부 하나님께서 구원의 주체자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 구원 계획을 만세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세우셨다(엡 1:4)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이 주체자가 되시고 예수님이 동의 협력자가 되셨다는 뜻입니다.
2) 구원의 동기가 하나님의 사랑이라고 말씀해 주신 것입니다. 구원의 동기란 구원의 근거란 뜻이고 또 구원하시는 이유가 무엇임을 말씀해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셨다 하심은 멸망 받아야 할 인생들을 불쌍히 여기셨다는 것입니다. 사랑이란 광범위하게 은혜를 베푸는 것이고, 긍휼은 불행한 자를 불쌍히 여기는 심정을 뜻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불행해진 인생을 불쌍히 여겨 사랑하지 않았다면 구원하시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사랑하셨고, 또 이 사랑의 성격은 무조건적이고 무한 불변적이란 사실을 아셔서 감사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3) 구원의 방도를 말씀하셨으니 이 방도가 바로 독생자를 주셔서 죄를 대속하게 하시고 또 중보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① 하나님은 공의로운 분이기 때문에 죄를 값없이 용서하시지 못합니다. 그래서 대속자를 찾으신 것입니다. 대속자란 죄책을 대신 짊어질 사람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인간 중에서는 대속자가 될 사람이 없어서 하나님이 그 독생자를 사람의 몸으로 세상에 보내어 대신 벌을 받게 하심으로 구원받을 자들의 죄책을 대신 담당케 하신 것입니다.
② 예수님은 인간을 대표하신 의로운 분이시고 또 영원한 생명을 가지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므로 많은 생명의 죄를 대속할 자격을 가지신 것이며
③ 또 그 예수님의 완전하신 순종과 자원하신 구속으로 하나님의 공의를 만족하게 해드린 것입니다.
④ 그리고 예수님의 대속의 절정은 십자가의 고난과 죽으심이었습니다.
⑤ 그리고 또 예수님은 다시 부활하여 하나님 우편에서 영원한 중보자 역할을 수행하시는 것입니다. 저희들이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는 것이 바로 그 예수님의 중보를 힘입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하나님의 구원의 방도는 예수님을 통한 대속이란 것을 반드시 믿으십시오.
4) 인간 편에서 구원 받게 하시는 방도를 주셨으니 이것이 바로 믿음인 것입니다. ‘저를 믿는 자마다 구원 하신다’ 하셨으니 이 믿음도 하나님이 거듭나게 하신 은혜로 받게 된 것입니다(믿음은 참되신 하나님과 그의 말씀인 성경을 믿는 것입니다).
5) 구원에 대한 설명이니 이것이 바로 “멸망(지옥 가는 심판)하지 않고 영생(죄사함 받아 천국에 가는 것)하는 것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이 복음의 요절(구원의 도리)를 꼭 이해하시고 믿으시기 바랍니다.
제22과 이상적인 가정생활 (엡 6:1~9) 목록으로
5월은 가정의 달이라 하여 가정의 행복을 추구하기 때문에 거기에 맞추어 “이상적인 가정생활”이란 제목으로 교훈을 받겠습니다.
1. 가정은 하나님이 주신 지상 최고의 행복의 보금자리입니다. 인류 생활이 가정으로부터 시작되었고, 또 모든 인류가 가정을 중심으로 살고 있으며 가족을 위하여 산다고 하여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그렇다고 하여 성도가 가정을 하나님보다 더 앞세워서는 안 되지요. 다만 가정은 하나님이 이 세상에서 가장 큰 행복의 보금자리로 주셨다는 사실을 감사하면서 가정생활을 행복하게 누리면서 영광의 방편으로 삼아야 할 것입니다.
2. 본문 말씀에는 자녀들의 부모에 대한 효도 문제(1~3절), 부모들(아비들)의 자녀에 대한 양육 문제(4절), 종들의 상전에 대한 문제(5~8절), 상전들의 종에 대한 문제(9절)를 말씀하셨습니다.
1) 자녀들은 주 안에서 부모에게 순종하여야 합니다. 주 안에서 라고 하심은 하나님을 공경하는 일을 우선한 다음에 순종하라는 뜻입니다. 아무리 효도를 잘 하여도 하나님을 공경하지 않으면 불행한 인간이기 때문입니다. 자녀가 효도를 가장 합리적으로 잘 해도 하나님을 공경하지 않으면 불행한 인간이기 때문입니다. 자녀가 효도를 가장 합리적으로 잘 하는 방법은 순종하고 공경하는 것입니다. 성도는 이 효도의 의무를 잘 하셔야만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습니다. 또 효도를 잘 한 성도에게는 하나님이 “땅에서 잘 되고 장수하는 복”을 주시겠다고 약속을 해 주셨습니다. 출 20:12에서 효도의 계명을 10계명 중 5계명으로 주실 때에 “잘 되고 장수하게 하시겠다”고 약속을 주셨다는 뜻입니다.
2) 또 4절에서 “아비들은” 하셨는데 이는 부모를 대표한 말씀입니다. 부모는 자녀들을 양육할 때 그들을 노엽게 하지 말고 주님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하라“고 하셨습니다. 주님의 교양과 훈계란 성경적 교훈에 입각한 교육(창 18:19)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신앙생활의 방법을 따라 교육하라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노엽게 하지 말라“ 하신 것은 부모가 자녀에 대한 의무를 다 하면서 지혜롭게 가르쳐서 자녀들을 실족하게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성도는 위로 부모에 대한 책임 아래로 자녀에 대한 책임이 있음을 말씀해 주셨습니다.
3) 종들이 상전을 섬기는 태도에 대하여 여러 가지로 교훈하셨습니다. 우선 하나님께서는 개인의 인권의 차이를 말씀하신 일이 없으나 생활이나 사업의 직무상 높고 낮은 자가 있음을 인정하셨습니다. 다시 말하면 상전과 종이 있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당연히 지혜 있는 자와 미련한 자 사이에, 또 하나님이 존귀를 주신 자와 그렇지 못한 자 사이에 계급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 때에 낮은 자는 상전을 섬길 때에 ① 주인을 두렵게 생각하고 ② 성실하게 순종하기를 주께 하듯 하고, ③ 눈가림 식으로 복종하는 척 하지 말고, ④ 자신이 그 사람 밑에서 일하는 것도 하나님의 뜻을 시행함인 줄 알며 ⑤ 주께 하듯 하고 사람에게 하듯 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육체의 상전을 하나님처럼 섬기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8절 말씀에서 종된 자나 자유한 자(주인)나 자기가 선한 일을 행한 대로 하나님께로부터 복을 받는다고 하신 것입니다.
4) 9절 말씀에서는 윗사람도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인만큼 수하 사람에게 공갈을 칠 수 없으며 사람을 외모로 보시지 않는 높으신 하나님이 계신 것을 두려워하면서 아랫사람을 사랑으로 지도해야 한다고 하신 것입니다. 이런 질서와 의무가 가정에도 꼭 있어야 할 것입니다.
3. 이상적인 가정생활에서 몇 가지 빠진 점을 말씀드리면
1) 본문 1절의 주 안에서란 말씀에 근거하여 우선 신앙의 합심 가정이 되도록 노력하셔야 하고,
2) 부부의 사랑의 결속이 든든하여야 합니다. 가정의 행복은 그 집 살림을 주도해 나가는 호주가 모든 책임을 바르게 이행하여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신앙 가정, 부부 행복, 효도, 자녀에 대한 의무, 윗사람 아랫사람에 대한 바른 처세를 잘 해나갈 때 가정의 행복을 이룩할 수 있는 것입니다.
제23과 구원받는 믿음 (롬 10:9~10) 목록으로
자물쇠에 맞지 않는 열쇠는 그 자물쇠를 열 수 없는 것처럼 구원받는 믿음도 하나님이 구원하시는 뜻과 맞아야 되는 것입니다. 행 14:9에 보시면 “구원받을 만한 믿음이 그에게 있었다” 하셨고, 막 16:16에서는 “믿고 세례를 받는 자는 구원을 받는다” 하셨습니다. 여기에서 세례를 받을 때는 신앙 고백을 하게 되어 있기 때문에 구원받는 믿음이 어떤 것인가를 아셔야 합니다.
1. 본문 말씀에서 구원받을 자는
1) 예수님을 주로 시인하는 자
2) 예수님의 부활을 믿는 자라고 하셨습니다. 또 11절에서는 “마음으로 믿는 것을 입으로 시인하여야 한다” 하셨으니 여기의 시인이란 말로 고백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나는 어떻게 믿는다” 하고 말로 고백할 수 있어야 그 지식이 확실한 것입니다. 고백을 못하는 마음의 지식은 빈약한 것임을 아셔서 확실하게 고백할 수 있도록 노력하시기 바랍니다.
2. 성경에는 구원받는 믿음에 대하여 전체를 한 마디로 표현하시지 않고 여러 곳에서 부분적으로 말씀하셨기 때문에 이것을 종합해서 깨닫는 것이 중요합니다. 예를 들면 “주의 이름을 부름으로 구원을 받는다”는 말씀(롬 10:13, 눅 23:43), “예수님을 앎으로 구원 받는다”는 말씀(눅 7L36~50), 또 “하나님의 사자를 영접함”으로 구원받는 사실(히 11:31), 또 어린아이는 지각이 없어도 구원을 주시는 사례(히 2:10, 행 16:31) 등입니다. 이런 말씀들은 구원받을 신앙을 부분적으로 나타내신 것입니다.
3. 따라서 구원받을 만한 믿음(행 14:9) 즉 온전한 믿음(히 10:22)이 무엇인가 할 때
1) 하나님의 존재를 믿는 신앙입니다. 히 11:6에서 “하나님께 나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을 믿어야 한다”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영원히 존재하는 것을 믿는 믿음이요,
2) 삼위일체의 하나님을 믿는 것입니다. 삼위일체 하나님은 성경이 말씀하셨을 뿐만 아니라(막 3:16~17) 구원의 역사를 삼위의 하나님께서 분담하여 시행하시기 때문입니다.
3)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중보자(구세주)이심을 믿어야 합니다. 이 사실은 마 16:16에서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친히 고백을 받으시고 칭찬하신데서 알 수 있습니다.
4) 예수님이 동정녀에게서 탄생하신 것을 믿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믿지 않으면 예수님의 순결을 부인하게 되고 순결치 못한 예수님은 구세주가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마 1:23).
5) 예수님의 신인양성을 믿어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완전하신 인간으로 대속자가 되셨고, 하나님의 신분으로 부활하여 신인양성을 가지신 상태에서 중보역할을 하시기 때문입니다.
6) 예수님의 십자가에 돌아가심이 택한 백성들의 죄책을 담당하신 사실을 믿으셔야 하며 우리가 그 대속의 은혜로 심판 받을 상태에서 면죄받은 사실을 믿으셔야 합니다.
7) 예수님이 부활하여 승천하시고 하나님 보좌 우편에서 영원토록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중보해 주시는 것을 믿으셔야 하며
8) 우리가 죄사함 받고 하나님의 자녀되어 영원한 천국에 들어가게 됨을 믿어야 하며
9) 하나님은 선악 간에 심판하시는 분이심을 믿어야 하며(히 11:6, 계 22:12, 20:12~15)
10) 성경 66권은 “정확무오한 절대 유일의 하나님의 말씀”임을 믿으셔야 하는 것입니다. 특히 성경 66권을 절대 유일의 말씀으로 믿는 믿음에서 흔들리면 안 됩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시지 않는 말을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믿는다면 이는 하나님을 거짓말 하는 분으로 믿는 것과 같으니 그런 믿음은 구원을 받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계 22:18~19).
구원을 받을 만한 온전한 믿음 10가지를 반드시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제24과 구원받은 내용 (롬 8:29~30) 목록으로
이 시간에는 “구원받는 내용이 무엇인가”에 대하여 교훈 받겠습니다.
저희들인 구원을 받기 위하여 믿음 생활을 하고 또 구원받은 것을 감사하여 충성도 하며 구원을 받기 위하여 바른 신앙을 가지려고 노력을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구원받은 것이 무엇인지를 잘 모르는 경우가 있어서 이것을 확실히 알지 않으면 안 되겠기로 이 말씀을 드리는 것입니다. 이 구원에 대한 말씀은 목사님께서 여러 차례 말씀하신 것입니다. 한 사람이라도 이 사실을 모르시면 안 되겠기로 이 공부를 하는 것입니다.
1. 먼저 본문 말씀의 뜻을 설명 드리겠습니다.
1) 29절에서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을 정하셨다” 하심은 하나님이 창세전에 구원할 자를 미리 아시고 선택하셨다는 의미요(엡 1:4),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시기 위함이라 하심은 거룩하신 예수님처럼 순결하게 만들어주시기 위함이란 뜻입니다(요 17:17). 또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신다는 것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맏아들이 되시게 하기 위하여 구원받을 성도를 하나님의 양자로 삼아주신다는 의미이며 또 30절에서 “부르시고 의롭다 하시고 영화롭게 하셨음”은 택한 백성을 하나님 앞으로 불러서(믿음을 가지도록 이끌어 주심) 속죄하여 의롭다 하시고 부활시켜 영하롭게 하신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이 말씀은 구원하시는 과정을 대략 말씀하신 것으로 선택(미리 정하심), 부르심(소명), 속죄와 칭의, 양자(예수님을 맏아들이 되게 하심), 성화(아들의 형상을 본받음), 영화(부활) 여섯 가지를 말씀하신 것입니다.
2. 그러면 저희들이 구원의 내용을 어떻게 알고 있어야 합니까?
1) 하나님이 우리를 선택하여 주신 것입니다. 많은 인류 중에서 특별히 저희들을 만세 전부터 미리 아시고 선택하여 구원하시기로 작정을 하셨습니다. 이 선택은 우리의 공로나 의를 보시고 선택하신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주권으로 무조건 선택하여 주셨습니다(엡 1:4).
2) 거듭나게 해 주셨습니다. 타락한 백성은 영적으로 죽었기 때문에 하나님과 신령한 은혜를 접할 수 없게 된 것을 하나님이 신령한 새 생명을 주셔서 거듭나게 하신 것입니다(요 3:3, 엡 2:1). 이것을 “중생”이라고도 하고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라고도 합니다(딛 3:5, 요일 3:19).
3) 믿음을 가지게 해 주셨습니다. 이 믿음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며 또한 성경을 믿는 것을 의미합니다. 타락한 인간은 스스로 믿음을 가질 수 없는데 하나님의 거듭나게 하시는 은혜로 영적 생명을 받으므로 진리의 말씀에 대한 믿음이 발생하게 된 것입니다. 이 믿음이 죄사함 받고 구원을 받는 중요한 방법이 되었습니다.
4)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입니다. 성도가 십자가의 공로를 믿음으로 죄사함 받으니 당연히 의롭다 하심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본래 심판을 받고 영원한 사망에 들어가야 할 죄가 있었으나(롬 6:23) 예수님의 대속으로 사함 받고 보니 다시 문책이나 심판을 받을 필요가 없게 된 것입니다. 이와 같이 법적 심판에서 면죄되는 것을 죄사함이라고 하고, 이를 근거로 하나님께서 부여하시는 의로움을 “칭의”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의 십자가 공로와 우리의 믿음을 보시고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모든 죄책을 면제하신 것입니다.
5) 양자와 성도의 명분을 주셨습니다. 이것은 타락하여 버려지고 비천해진 상태에서 존귀를 주실 뿐만 아니라 하늘의 기업까지 누리게 하시기 위하여 주신 특권입니다(요 1:12, 롬 1:7). 여기까지는 믿음 생활 하는 성도가 이미 받은 것입니다. 이 받은 구원을 꼭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6) 현재 성화되어 가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형상을 본받는 거룩(성결)의 은혜입니다. 예수님은 이 일을 위하여 기도하셨고, 말씀과 기도(회개)로 거룩하여지다가(요 17:17, 딤전 4:15) 육체의 죽음으로 완성이 됩니다(욥 19:26, 눅 23:43).
7) 영화이니 이는 이 세상 끝 날에 육신이 부활하여 영원한 천국에 들어감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과거 현재 미래로 구분된 7가지 구원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제25과 자신을 확증하라 (고후 13:5) 목록으로
이 시간에는 자신의 신앙을 확증함에 대하여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본문 말씀을 보시면 “너희가 믿음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확증하라”고 하셨습니다. 이는 신앙 생활의 진실성 여부를 점검하라는 말씀입니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신앙 세계 안에는 가짜 신자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어떤 대학교에 부정 입학생이 51명이 있었다는 보도가 나왔습니다. 이 사실을 점검하지 않았다면 가짜 대학생을 많이 양성할 뻔 했습니다. 이와 같이 교회 안에도 신앙의 외식을 나타내는 식구들도 있을 수 있다는 사실을 아셔서 우선 자신을 점검하는 노력부터 하셔야 할 것입니다. 그것을 점검하는 방법은 “그리스도께서 나를 지배해 주시고 내가 그리스도의 지배를 받는가 아니면 내가 그리스도를 외면하고 스스로 주인 역할을 하는가로 판단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진실한 성도는 예수님의 종이 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1. 성도의 세계에도 외식자가 많이 있습니다.
1) 아브라함과 이삭의 집에 에서와 야곱이 함께 살고 있었지만 에서는 비택자요, 야곱은 선택 받은 자로서 구원받은 백성이 되었다는 사실과(창 25:27~34, 롬 9:13)
2) 출애굽한 선민들이 광야에서 함께 생활을 했을지라도 상당수가 하나님을 원망하고 광야에서 죽었으니(민 14:21~33) 그들은 영적 구원을 받지 못한 자들이라고 생각할 수 있으며(고전 10:5~11)
3) 마 13:29에서 한 농장에 “곡식과 함께 자라는 가라지를 추수 때까지 두어둔다” 하심으로 현실 교회 안에 가라지 같은 외식자가 있을 수 있음을 말씀하셨고, 가룟 유다가 그 실례가 되며
4) 마 22:14에서 “청함을 받은 자는 많으나 택함을 받은 자는 적다” 하시고 혼인 잔칫집에 들어오기는 했으나 예복(죄사함, 칭의)을 입지 못하여 주인의 영접을 받지 못한 것을 비유로 말씀해주셨습니다.
또 이와 같은 이유로 마 25:10에서 “열 처녀가 신랑을 맞이 하려했으나 다섯 처녀는 맞이하지 못한 것”도 역시 외식자의 결과가 구원에 이르지 못함을 말씀하여 주신 것입니다.
2. 저희들은 자신의 신앙을 다시 한 번 확인하셔야 합니다.
1) 자신의 신앙생활의 진실을 확인하셔야 합니다. 신앙생활은 다른 사람이 해 줄 수도 없고 확인해 줄 수도 없습니다. 나 자신이 살아계신 하나님과 성경 진리를 확실하게 믿는가에 대하여 스스로 확인하는 것입니다. 진심으로 하나님을 경외하는가를 확인하시라는 것입니다.
2) 내 속에 그리스도가 살아계셔서 나를 지배하시고 내가 주님께 복종하는가 하는 것을 확인하는 것입니다. 성도가 시험에 들고 연약하여질 때에는 하나님보다 자신을 내세울 때도 있을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일시적이요, 그 마음에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양심이 살아 있어서 결국은 가책을 느끼고 회개하게 되는 것입니다. 바울 사도는 자신을 날마다 죽인다(고전 15:31) 하셨고, 자기 속에 사시는 이는 예수님이라(빌 1:21) 하였습니다. 이렇게 주인과 종의 관계를 확실하게 다짐하고 사는 생활이 있을 때 자신의 신앙의 확실함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3) 어떤 이는 믿음의 확신을 이적의 체험으로 느끼려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적의 체험은 믿음 있는 확증도 아니려니와 악하고 음란한 세대에서 있는 일이라(마 12:38~39) 하셨고, 이적을 체험한 출애굽한 백성들도 바른 믿음을 가지지 못한 것을 기억하셔야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믿음의 확신은 성경 지식으로 얻게 됩니다(딤후 3:14).
결론적으로 저희들이 깨달으셔야 할 것은
1) 우선 자신의 진실한 신앙을 점검하시고,
2) 외식자들이 함께 있을 수 있다는 사실을 이해하시며
3) 자신의 신앙의 확증은 예수님과 자신 또는 성경과 자신 사이에서 일치하게 관련된다는 것을 꼭 믿으시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제26과 신앙의 3단계 (막 4:28~29) 목록으로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가 단계적으로 성취되듯이 신앙도 하루아침에 완성되는 것이 아니고 단계적으로 자라나게 되어 있습니다. 어린 아이가 성령의 충만한 은혜를 받았다 하여 신앙이 다 성숙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 어린 아이는 지식과 경험으로 연단을 받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신앙은 시간을 두고 자라는 것이므로 이 시간에는 신앙 성장의 3단계에 대하여 증언을 하겠습니다.
1. 성경에는 신앙의 성장 단계를 비유적으로 말씀하신 곳이 많습니다. 예를 들면
1) 마 13:18 이하의 씨 뿌리는 비유에서 길가에 떨어진 씨, 돌밭에 떨어진 씨, 가시밭에 떨어진 씨, 옥토에 떨어진 씨로 비유한 말씀입니다. 길가에 떨어진 씨는 성도가 하나님의 말씀 공급을 잘 받지 못하는 형편이고, 돌밭에 떨어진 씨는 믿음의 뿌리를 깊이 주지 못하는 형편이며 가시밭에 뿌려진 씨는 환난으로 약해지는 신앙이고, 옥토에 뿌려진 씨는 신앙의 목적을 다하는 원만한 신앙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2) 고전 13:11에서 어린 아이와 장성한 자로 비유하셨으니 어린 아이는 깨달음이 둔한 자요, 장성한 자는 잘 깨닫는 자라고 하였습니다. 어린 아이는 가르치면 되고 장성한 자는 성숙하였으니까 문제가 없으나 청소년 시기는 참으로 교육하기가 어려운 것을 저희들이 느끼는 것처럼 신앙인도 중간 단계의 사람들을 지도하기가 가장 어려운 것입니다.
3) 고전 3:1에서는 육신에 속한 자와 신령한 자로 구별하여 말씀하신 것도 이미 아실 것입니다.
4) 본문에서는 “처음에는 싹이요, 다음에는 이삭이요, 또 그 다음에는 충실한 열매라” 하심으로 성도의 신앙을 나무가 자라는 것으로 비유하신 것입니다.
2. 그래서 이 시간 이 말씀을 근거로 하여 신앙 성장의 3단계를 ① 싹 나는 단계 ② 뿌리는 내리는 단계 ③ 뿌리를 깊이 준 단계로 나누어 보았습니다.
1) 신앙의 싹이 나는 단계가 있습니다. 거듭난 성도에게 전도를 하면 믿을 마음이 생기는 것을 의미하는데 이 단계에서는 절대로 자립을 하지는 못합니다. 그는 초신자로서 이제 막 시작하는 단계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갓난아기가 자립하지 못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그래서 그런 성도에게는 인도자가 필요하고 당연히 인도와 권면에 의하여 따라 다녀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 중에 이런 성도를 잘 보살펴야 하겠습니다.
2) 뿌리를 내리는 단계가 있습니다. 모판에 있는 모가 싹을 내는 단계라면 금방 모를 낸 벼 포기는 뿌리를 내리는 단계라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이앙된 벼 포기가 뿌리를 내리려면 적어도 10일은 있어야 할 것입니다. 처음에는 영양실조를 당한 것처럼 누런 색깔을 내지만 조금 있으면 빳빳하게 힘이 솟기를 시작하고 나중에는 뿌리를 든든히 주어 힘 있게 자라지 않습니까? 이와 같이 성도의 신앙도 뿌리를 내리는 기간이 있습니다. 이 때에 영양 실조된 형편을 보이기도 하는 것처럼 이 기간을 인내와 교육으로 잘 연단하여야 하며 사랑의 분위기를 결코 해쳐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3) 뿌리를 든든히 준 단계입니다. 나무가 옥토에 뿌리를 든든히 주었습니다. 이 옥토는 하나님의 말씀을 의미합니다. 말씀에 뿌리를 든든히 준 신앙, 그것은 어떤 바람이나 가뭄에도 흔들릴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 얼마나 믿음직한 신앙입니까?(엡 3:17)
저희들의 형편을 점검하여야 하겠습니다. 말씀에 이끌리고 말씀에 복종하며 말씀을 따라 사는 신앙이 바로 뿌리를 깊이 준 신앙입니다. 이런 신앙만 가지면 할렐루야, 만사형통이 되는 것입니다. 모든 부조리와 핍박도 넉넉히 이길 수 있을 것이요,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빌 4:13)는 고백을 할 수 있습니다. 저희들이 이 뿌리 깊은 신앙으로 자라가야 하겠습니다.
제27과 신령한 자가 되자 (고전 3:1~3) 목록으로
이 시간에는 “신령한 자가 되자”라는 교훈을 받겠습니다.
1. 지금 읽으신 말씀에 보시면 “신령한 자”란 말씀과 “육신에 속한 자”란 말씀이 있습니다.
1) 신령한 자는 어른다운 성숙한 신앙인을 의미하고,
2) 육신에 속한 자는 어린 아이처럼 미숙한 신앙인을 의미합니다. 이 말씀을 기록하신 바울 사도께서는 그 당시의 고린도 교회 성도들의 신앙이 육신에 속한 자, 즉 어린 아이 같은 미숙한 신앙에서 자라나지 못하는 것을 안타깝게 여기셨습니다. 저희들도 어린 아이 같은 미숙한 신앙에서 속히 자라나야 할 것입니다.
2. 육신에 속한 자 즉 어린 아이 같은 미숙한 신앙의 형편은 어떤 것입니까?
1) 밥을 못 먹고 젖을 먹는 형편이니 이는 하나님의 말씀을 쉽게 말하여야만 알아듣는 형편입니다. 어려운 말이나 책망하는 말 또는 짐을 지우는 말 같은 것은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2) 어린 아이의 형편은 시기와 분쟁을 버리지 못하는 것입니다. 시기란 것은 남이 잘 되는 것을 칭찬하며 축하하지 못하는 것이요, 분쟁은 서로의 의견 대립이나 비방 하기를 주저하지 않는 것입니다. 성도에게 시기와 분쟁의 소지가 없어지지 않으면 그 믿음은 자랄 수 없습니다. 또 하나님의 교회 안에 이런 사람들이 많으면 화평하고 사랑있는 교회를 만들지 못할 것입니다.
3) 육신에 속한 자는 하나님의 뜻을 따르지 않고 사람을 따라 행하는 자라고 하셨습니다. 사람을 따라 행한다는 것은 인정에 치우치고 편벽되게 행하고 나가서는 파당을 조성하여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는 것입니다. 바울 사도는 갈 1:10에서 “내가 사람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에게 좋게 하랴 사람에게 기쁨을 구하랴 내가 지금까지 사람의 기쁨을 구한 것이었더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라”고 하셨습니다. 이와 같이 육신에 속한 자는 어린 아이처럼 미숙한 신앙인을 의미하는데
① 교훈을 가리어(마음에 드는 교훈만 골라서) 받고,
② 시기와 분쟁의 소지를 못 버리며
③ 사람 중심으로 행하는 자라고 하셨으니 저희들은 이런 형편에서 속히 벗어나야 할 것입니다.
3. 신령한 자란 어떤 형편의 성도를 말씀하시는 것입니까? 이것은 육신에 속한 자와 같지 않은 자를 의미하므로 어른다운 신앙의 성숙인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1) 성경 지식을 많이 보유한 성도를 말합니다. 성경 지식이 많으면 긴 설교를 할 필요가 없고, 성경 “몇 장 몇 절의 말씀대로 행하자”고 하거나 간단히 그 취지만 말하여도 잘 이해하는 성도요,
2) 잘못을 책망하든지 혹은 무거운 봉사의 짐을 맡긴다 하여도 이것들을 자신의 사명으로 알고 불평없이 어렵지 않게 감당해 나가는 성도이며
3) 다른 사람들을 잘 격려하면서 용기 있게 일 할 수 있도록 협력하는 성도요,
4) 분쟁의 소지가 없는 사람이니 어떤 사람도 미워하거나 의심하거나 불화하지 않고 비난하지 않으며 말로 대립하지 않고 또 싸우지 않으며 화평을 도모해 나가는 성도요
5) 인간 중심으로 편벽되게 행하지 않고 하나님의 섭리와 공의로운 뜻을 따라가는 성도입니다.
4. 성경에 나타난대로 고린도 교회는 대단히 복잡한 교회였습니다. 그 곳은 헬라의 항구 도시로 물질과 향락과 사치가 많았고, 우상 숭배와 음행도 많았으며 방언, 예언 등 신비한 은사를 무질서하게 나타내는 일도 있었고 거기에 또 바울파, 게바파(베드로파), 아볼로파, 예수파가 있어서 복잡한 교회였습니다. 우리의 현실도 이와 흡사한 일이 많습니다. 여기에서 저희들의 신앙 위치가 신령한 자의 위치에 오르지 못하면 현실을 타개해 나가기가 어렵기 때문에 신령한 자로 성장하도록 노력하셔야 하겠기로 이 말씀을 드린 것입니다.
제28과 씨 뿌리는 비유 (마 13:18~23) 목록으로
이 시간에는 “씨 뿌리는 비유 교훈”이란 제목으로 교훈을 받겠습니다.
1. 예수님은 비유로 많이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비유 교훈이 마태복음에 23회, 마가복음에 10회, 누가복음에 29회, 요한복음에 2회 말씀되었습니다. 그 중 11가지 내용이 공관복음에 함께 기록되었기 때문에 비유 교훈 총 합계는 45회가 됩니다. 예수님이 이렇게 비유 교훈을 많이 말씀하신 이유는
1) 그 당시에 잘 깨닫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깨닫게 하시려는 목적과
2) 구원이 허락되지 않은 자들에게 감추시는 목적이 있다고 하셨습니다(눅 8:9~10). 또 비유란 말은 “파라볼레”란 말로 “곁으로 던진다”, “살짝 옆으로 던져서 신호를 한다”는 의미가 있다고 합니다. 저희들은 이 비유 교훈을 잘 깨달아야 하겠습니다.
2. 그러면 씨 뿌리는 비유의 내용은 무엇입니까?
1) 씨 뿌리는 자가 씨를 뿌렸는데 길가에, 또는 흙이 얇은 돌밭에 떨어진 것은 싹을 낼 때까지는 일시적으로 잘 자라는 것 같으나 잠시만 날이 가물고 뜨거운 햇살이 쬐이면 뿌리를 깊이 내리지 못했기 때문에 더 이상 지탱을 못하고 시들어 버리게 될 것이요,
2) 가시덤불에 떨어진 것은 싹도 나고 자라기는 하지만 엉겅퀴 속에서 자란 나무인지라 힘도 없고 열매도 맺지 못할 것이며
3) 옥토에 떨어진 씨만 뿌려진 씨의 분량에 따라서 30배, 60배, 100배의 결실을 하게 될 것입니다(이상은 저희들 나름대로 생각해 본 것입니다).
3. 그러면 예수님은 이 비유를 어떻게 설명하셨습니까?
1) 길가에 뿌리운 것은 “천국 말씀을 받았으나 악한 자가 와서 그 말씀을 빼앗은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따라서 씨는 천국 복음, 즉 하나님의 말씀을 의미하고, 뿌리는 자는 복음사역자를 의미하며 밭은 성도의 마음을 뜻하는데(약 1:21) 길가에 뿌리워진다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받는 둥 마는 둥 하는 것입니다. 어른이 떠들고 아이가 설치고 또 자신이 듣는데 집중하지 않으므로 무엇을 들었는지 하나도 깨달은 것이 없는 상태를 말하는 것입니다. 혹이라도 이런 입장의 생활을 계속하는 성도가 계시다면 속히 깨달으셔야 할 것입니다.
2) 돌밭에 뿌리운 것은 이 돌밭이란 뜻이 “흙이 얇은 땅”을 의미하기 때문에 싹을 내는 기간까지는 깨닫기도 하고 재미를 붙이기도 하여 믿음 생활을 잘 하는 것입니다. 어떤 주석에서는 돌밭이란 얇은 흙 속에 반석이 깔린 밭이라고도 하였습니다. 그러면 이 깔린 반석이란 무엇일까요? 이것이 바로 자신을 죽이지 못하는 교만을 뜻하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성경적으로 배우다가 나중에는 신앙 생활을 자기의 정욕 중심으로 이용하려는 교만입니다. 이렇게 되면 그 신앙은 더 이상 크지 못한채 시들어 버리게 될 것입니다. 마음이 굳어서 예수님을 마음 속까지 깊이 모시지 못한 상태가 되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3) 가시덤불에 뿌려진 것이니 이는 세상의 염려와 재리의 유혹으로 결실치 못하는 형편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성도가 현실 생활에 이끌려서 신앙 생활을 부업처럼 해나가는 형편이니 좋은 열매를 기대할 수 없겠지요.
4) 옥토에 뿌려진 것은 착하고 겸손한 양심으로 말씀을 깨닫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어린 아이처럼 순결한 마음으로 성경을 배우고 잘 깨달아 생활하는 믿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런 상태라야만 영광의 열매를 수확할 수 있는 것입니다.
아무쪼록 저희들의 신앙 상태를 많이 반성하시고 좋은 신앙에 굳게 서도록 노력하셔야 하겠습니다.
제29과 환난을 이기는 법 (약 5:13~18) 목록으로
이 시간에는 “환난을 이기는 법”에 대하여 공부하겠습니다. 성도가 신앙 생활을 하면서 어려움에 봉착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런 일들에 대하여 신앙적으로 처리하는 방법을 배우는 것입니다.
1. 환난에는 여러 가지 종류가 있는데 가장 많은 것이 질병이요, 다음이 경제적 문제들이며 그 다음이 명예에 관계되는 문제들일 것입니다.
2. 환난을 당하는 이유를 살펴보면
1) 자신의 실수 또는 죄책으로 인하여 징계로 오는 것과
2) 하나님이 주시는 연단을 위하여 받는 경우와
3) 의로운 생활에 따른 핍박으로 받는 경우 등입니다. 여기에서 우리 성도가 가장 심각하게 여겨야 할 환난은 하나님과 자신과의 신앙적 관계가 멀어지는 문제입니다. 많은 성도들이 이 문제를 환난으로 여기지 않는 경우가 있으니 잘 깨달으셔야 할 것입니다. 마 10:28에 보시면 “몸만 죽이는 것은 두려워하지 말고 몸과 영혼을 아울러 죽이는 자를 두려워하라” 하셨고, 또 마 9:15에서는 “잔칫집 손님들이 신랑(예수님을 비 함)과 함께 있을 때는 슬퍼할 필요가 없고, 신랑을 빼앗길 때는 금식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들은 모두 성도가 환난으로 여겨야 할 것은 바로 “하나님을 멀리 하는 영적 상태”란 뜻입니다. 하나님과 함께 하는 환난은 진정한 환난일 수 없음을 아셔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믿음이 연약한 성도의 입장에서는 육체적 고난도 환난으로 여길 수 밖에 없습니다.
3. 환난을 이기는 방법을 어떻게 시도할 것입니까?
1) 우선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해결하셔야 합니다. 시 50:15에서 “환난날에 나(하나님을) 부르라” 하셨고, 마 11:28에서는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예수님)게로 오라” 하셨으며 요 14:27에서는 “예수님이 평안을 주신다”고 하셨습니다. 그런고로 일단 하나님을 의지하셔야 합니다.
2) 기도하라고 하셨습니다. 마 7:7에서 “구하라” 하셨고, 눅 18:7에서도 “밤낮 부르짖는 택하신 자들의 원한을 풀어주시지 않겠느냐”고 하셨습니다. 지금 읽으신 본문에서도 “고난을 당하는 자는 기도하라” 하셨고, 또 “병든 자가 있을 때는 교회의 장로(목사)들을 청하여 기도를 받으라”고 하셨습니다. 이렇게 기도는 환난을 극복하는 좋은 방법입니다.
3) 회개해야 합니다. 물론 죄와 관련이 없는 고난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고난이 죄로 인한 징계로 받는 경우가 많음을 아셔서 회개하는 일을 부끄럽게 생각지 마셔야 합니다. 본문 16절에서도 “너희의 죄를 서로 고하며 병 낫기를 위하여 죄를 서로 고하라”고 하셨습니다. 죄사함 받은 의인의 기도가 역사하는 힘이 많기 때문입니다. 회개한 자의 기도가 응답성이 크다는 실례로 구약 시대에 계셨던 엘리야 선지자는 “기도로 3년 6개월 동안 비를 멎게도 하고 또 오게도 하였다”고 하였습니다. 따라서 성도들은 고난이 있을 때 우선 자신을 살펴 회개할 것을 회개하고 은혜를 구하여야 합니다.
4) 인내로 견디고 기다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환난을 면하여 주시기도 하지만(시 21:7) 상당 기간 견디게도 하십니다(고전 13:7, 고후 1:6). 마 10:22에서는 “나중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는다”고도 하셨습니다. 따라서 모면하는 것만 기도의 응답이 아니고 인내로 잘 견디는 것도 교훈과 연단의 유익이 있기 때문에(시 119:71) 늘 기도하면서 참고 견디는 습관을 가지셔야 합니다.
5) 주님의 고난의 생애와 십자가를 바라보시면서 위안을 받으셔야 합니다. 죄 없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도 고난을 받으셨는데 우리가 고난당하는 것이 마땅하지 않겠습니까? 욥은 그런 생각을 하면서 위안을 받았습니다(욥 2:10).
아무쪼록 환난의 원인과 성격을 깨달으시고 ① 하나님께 의지하는 일, ② 기도하는 일, ③ 회개하는 일, ④ 인내로 견디는 일, ⑤ 예수님의 십자가를 바라보심으로 위안을 받으면서 극복하셔야 합니다.
제30과 병 고침에 관한 신앙 (약 5:13~18) 목록으로
요즈음 기적을 추구하는 성도들과 특히 병 고치는 기적을 체험하려는 성도들이 많은 줄 압니다. 이 시간에는 하나님의 기적과 병 고침에 대한 은혜를 어떻게 받을 것인가에 대하여 공부하겠습니다.
1. 하나님은 전능하신 분입니다. 만물 창조, 생명 창조, 자연 통치, 천체의 신비, 미생물의 세계, 꽃 한 송이에 이르기까지 하나님의 기적이 무한한 것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창조와 자연계 통치의 기적은 의당 있는 것이지만 하나님의 기적의 역사가 사람들 앞에 나타난 것은 에녹의 승천을 비롯하여 노아 홍수, 소돔의 멸망, 아브라함이 100세에 이삭을 낳음과 출애굽 당시의 여러 가지 이적 등이 구약 성경에 67회가 나타나 있고, 신약에서는 오병이어와 물 위로 걸어가신 이적 이외에 병 고친 이적이 46회 나타나 있는 중 예수님이 36회, 베드로가 4회, 바울 사도가 6회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병을 고친 종류에 대하여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죽은 자를 살리신 일까지 있으므로 병명을 다 살필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2. 예수님이 공생애에 들어오셔서 기적을 행하신 목적은
1)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증명(요 14:11),
2) 전능하신 구원자라는 증명(히 2:4),
3) 기독교가 절대 구원의 종교라는 사실을 입증하는 표적,
4) 고난당하는 자에게 자비를 베푸심이었습니다(요 5:5~8).
3. 그 다음에 예수님은 그의 제자들에게 능력을 주어 전도하게 하신 일이 있었고(마 10:1), 그들이 들어와서 능력으로 귀신 쫓는 사실을 보고했을 때 예수님은 “귀신이 너희에게 항복하는 것으로 기뻐하지 말고 너희의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으로 기뻐하라”고 하셨습니다(눅 10:27, 20). 이 말씀은 귀신 쫓는 이적보다 구원이 더 중요하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제자들도 자신들의 확신이 부족했을 때는 귀신을 쫓지 못한 사례도 있었음을 성경은 말씀하셨습니다(마 17:14~18).
4. 바리새인들은 예수를 믿지 않는 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불신앙의 상황에서 예수님의 기적을 추구했을 때 예수님은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한다” 하시고, “요나의 표적 외에는 보일 것이 없다” 하셨으니 이 말씀의 뜻은 기적 추구의 신앙이 좋지 않으며 십자가(요나의 표적) 신앙을 가져야 할 것을 교훈하신 것입니다. 왜 기적 추구의 신앙이 좋지 않을까요? 이것은 마치 일반 직장을 떠나서 투기 사업이나 복권을 사는 사람과 같기 때문입니다. 기적이란 비상 섭리는 흔히 나타내시는 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5. 그 후에 예수님은 막 16:17에서 열 한 제자에게 권능을 주신 일이 있었는데 이 능력의 역사는 아무나 하는 일이 아니고 사도들에게 주셨으며 그들의 초기 전도사역 때 다 성취된 것을 사도행전을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행 3:6, 행 20:12). 그런데 사도 말기에는 그 역사가 중지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것은 베드로와 바울이 순교하였고, 바울 자신이 병으로 고생하셨으며(고후 12:8, 딤후 4:13, 17) 최초의 목사 디모데가 자주 병에 걸렸고(딤전 5:23), 바울이 에바브로의 질병과(빌 2:27) 드로비모의 질병 때문에 염려한 사실이 있기 때문입니다(딤후 4:20). 이 사실은 사도 후시대부터 특별 기적이 중지되었다는 증거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6. 고전 12:9의 병 고치는 은사는 오늘 본문 말씀과 같은 맥락의 은사임을 아셔야 합니다. 그 이유는 고린도 교회에서, 특별 기적을 나타낸 사실이 없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본문이 말씀하는 병 고침의 방법은 약을 쓰면서(기름 바름) 자신과 교회의 종들이 기도할 것을 교훈하셨고, 특별히 질병을 위한 믿음의 기도에는 죄를 서로 고하는 회개가 있어야 할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결론적으로 귀신병은 “기도 외에 다른 방법이 없고(막 9:28), 다른 질병에 대하여는 우선 회개하며 의학적 처방을 하면서 개인과 성도들이 기도하고 특히 믿음의 지도자들의 기도를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 이상 다른 방법이 성경에는 없습니다. 병을 낫게 하시는 것은 하나님의 응답에 의하여 무슨 방도로든지 속히 또는 서서히 회복되게 하시는 것입니다.
제31과 다수를 기뻐하지 아니하심 (고전 10:1~5) 목록으로
이 시간에는 “다수를 기뻐하지 아니하심”이란 제목으로 교훈받겠습니다.
1. 지금 읽은 말씀은 바울 사도께서 고린도 교회에 주신 말씀입니다. 고린도 교회에는 많은 성도들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신앙이 순결하거나 돈독한 것이 아니었고, 여러 가지로 문제가 많았습니다. 예를 들면 악을 즐기는 자, 우상을 숭배하는 자, 간음하는 자, 하나님을 시험하는 자, 원망하는 자, 교만한 자 등이었습니다. 지금 읽으신 본문 말씀에 다 나와 있지 않습니까?
2. 이러한 상황에서 하나님은 양적 다수를 기뻐하지 아니하시고 질적 소수를 기뻐하신다고 하신 것입니다. 양적 다수란 믿음 생활을 외식적으로 행하는 많은 잘못된 성도를 의미하는 것이고, 질적 소수란 하나님 앞에서 바르게 믿는 많지 않은 성도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3. 주전 1500년경에 있었던 출애굽 사건은 신앙 생활의 과정을 영적으로 비유하여 주신 것입니다. 출애굽 사건은 실제적 사건이지만 그 역사 속에 신령한 교훈이 담겨져 있다는 말씀입니다. 예를 들면 이스라엘 민족의 애굽 생활은 불신앙적인 과거를 뜻하며 그들의 가나안 입국은 (어떤 면으로는) 천국을 상징한다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 때에 이스라엘 선민이 모세의 지도를 받으며 애굽에서 나올 때 그들이 다 구름 아래 있었다는 뜻은 구름 기둥의 인도와 보호를 받았다는 뜻이요(출 13:21), 바다 가운데로 지났다는 것은 홍해를 건넌 사실로 영적 의미로는 세례 받음을 뜻하는 것이요, 신령한 음식을 먹음은 기적의 만나를 먹은 것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상징함이고, 또 반석의 물도 마셨으니 이는 역시 반석되시는 예수님으로부터 성령의 은혜를 받음에 대한 상징이 되는 것입니다(요 1:14).
4. 이러한 은혜와 체험을 한 식구들이 하나님의 뜻을 순종하지 못하고 패역한 입장을 취하였을 때 하나님은 그들을 광야에서 전부 죽게 하신 것입니다. 15절 말씀에서 저희의 다수를 하나님이 기뻐하지 않으신고로 저희가 광야에서 멸망을 받았다고 하신 말씀이 바로 그 뜻입니다. 여기의 멸망을 받았다는 뜻은 영생도 얻지 못한 채 벌을 받아 죽었다는 뜻입니다. 출애굽 한 백성들의 목적지가 가나안 땅이었으나 광야 40년 생활 중에 수명대로 죽은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예를 들어 모세의 형 아론과 같은 사람들입니다(민 27:3, 13).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출애굽 한 은혜를 저버리고 원망, 불순종, 간음, 또 하나님을 시험하다가 멸망을 받은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들을 멸망시킨 것은 형식적으로 신앙 생활하는 다수의 사람들을 원하시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5. 여기에서 하나님은 신앙 생활을 돈독하게 행하는 바르고 우수한 성도를 기뻐하시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 시간에 말씀드리는 취지는 적은 수의 성도라도 바르게 생활함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자는 것입니다. 구약 시대에 에녹이나 노아, 아브라함, 요셉, 다윗, 사무엘 같은 사람을 하나님이 기뻐하셨고, 소돔 고모라성이 멸망할 때에도 그 곳의 의인 열 사람이 없어서 멸망을 받지 않았습니까? 이렇게 소수라도 바르게 믿는 성도가 힘이 있고 그들이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드리는 것입니다.
6. 그래서 저희들은 다수가 가는 인본주의적 넓은 길로 가는 자가 되지 마시고 소수가 가는 좁은 길로 가셔야 하며(마 7:13~14) 하나님은 이러한 무리에게 하나님의 나라를 주시기를 기뻐하신다고 하셨습니다(눅 12:32).
사람이 많다고 다 진리가 있는 것이 아니요, 소수라고 하여 하나님의 뜻을 이행하지 못하는 것이 아님을 아셔서 나 혼자라도 하나님 앞에 바르게 사는 성도가 되겠다는 의지를 가지셔야 할 것입니다.
제32과 주인이 쓰시는 그릇 (딤후 2:20~21) 목록으로
지금 저희들은 바울 사도께서 그의 후계자인 디모데에게 주신 말씀을 읽었습니다. 이 말씀은 바울 사도께서 교회의 모든 일꾼, 즉 봉사자들에게 주신 교훈입니다. 예수님을 주인으로 비유하셨고, 교회를 큰 집으로 또 봉사자들을 그릇으로 비유하신 것입니다. 저희들도 예수님이 기쁘게 쓰시고 만족하게 쓰시는 그릇이 되기 위하여 노력하셔야 하겠습니다. 주인이 쓰시기에 합당한 그릇이란?
1. 그릇으로서의 면모를 갖춘 성품이어야 합니다. 옹기점이나 그릇 공장에 가보면 파손되어 버려진 그릇이 많습니다. 이 그릇들은 만드는 과정에서 정품이 못되기 때문에 깨어 버린 것입니다. 하나님도 온전한 신앙으로 자격을 갖춘 성도를 쓰시기를 좋아하십니다. 그 이유는 신앙적 자격이 모자라면 오히려 손해를 주는 경우가 있기 때문입니다. 좋은 기술자는 좋은 집을 짓지만 기술이 부족할 때에는 위험한 공사를 하여 손실을 입히기 때문입니다. 신앙의 정품이란 믿음의 지식과 기독교적 생활과 사명감이 바로된 성도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2. 깨끗한 그릇이어야 합니다. 더러운 그릇은 우선 만지기도 싫을 것입니다. 나라의 지도자들도 부정이 있으면 쓰지를 못하거든 하물며 하나님이 쓰시는 사역자나 일꾼은 어떻겠습니까? 본문 21절에서도 “누구든지 이런 것에서 자신을 깨끗하게 하면 귀히 쓰시는 그릇이 된다”고 하셨습니다. 깨끗하다는 뜻은 사람들 앞에 덕이 될 만큼 무흠함을 뜻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을 하는 성도가 결백할수록 좋지만 사람들 앞에서 지적을 받거나 비난을 받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3. 무엇이 담겨진 그릇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그릇은 빈 그릇이어야만 주인이 자기의 목적에 쓸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릇에 무엇이 담겨 있으면 그것을 버리기 전에는 쓸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자기의 제자가 되려는 자들에게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의 십자가를 지는 자라야 하며 또 자기의 가족을 주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합당치 않다고 하셨습니다(마 10:37~38, 16:24). 이렇게 헌신 봉사하려는 성도는 자신의 입장을 먼저 내세워서는 안 될 것입니다. 주인이 자기의 원하는 용도에 임의로 쓰실 수 있도록 자기를 비워야 할 것입니다.
4. 가까이 대기하는 그릇이어야 합니다. 본문의 큰 집은 하나님의 교회를 비유하므로 하나님의 교회가 가까운 곳에 살고 또 교회 출석을 잘 함으로 언제나 하나님의 일이 있게 될 때 그 곁에서 속히 나타날 수 있어야 합니다. 어떤 성도는 먼 곳에 살고 있어서 일주간에 한 번 정도 볼 수 있는데 또 무슨 일로 모이고자 할 때에는 출석하지 않아서 함께 일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런 경우가 바로 멀리 있는 그릇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지혜로운 종에 대하여 칭찬하시기를 출타한 주인을 기다리기 위하여 등불을 들고 밤새도록 대문을 지키는 자가 복이 있다(눅 12:35~37)고 하셨습니다.
5. 가벼운 그릇이어야 합니다. 이것은 순종이 신속함을 뜻합니다. 교회가 무슨 직임을 부탁할 때 어렵게 순종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예를 들면 헌금하는 일이나 어려운 책임을 맡는 경우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과분하고 어려운 것을 맡기시지 않습니다. 또 없는 것을 원하시지도 않습니다. 다만 있는 것으로만 충성하면 됩니다. 그것이 바로 달란트대로 충성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각 사람이 행한대로 상주신다고 하셨습니다(계 22:13). 따라서 힘닿는 한 신속하게 순종하고 봉사하여 부탁하는 사역자에게 부담감을 주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6. 깨지지 않는 그릇이어야 합니다. 이것은 어려운 일도 인내로 잘 감당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을 달면 먹고 쓰면 뱉는 식으로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7. 소리 안 내는 그릇이어야 합니다. 이것은 자신의 봉사를 많이 알아주어야 한다거나 자랑하지 않음을 뜻하는 것입니다.
이 일곱 가지 합당한 방법을 꼭 시행하시는 성도님들이 되셔야 하겠습니다.
제33과 복음사역자의 소원 (살후 3:1~5) 목록으로
이 시간에는 “복음사역자의 소원”이란 제목으로 교훈 받겠습니다. 본문 말씀은 바울 사도께서 데살로니가 성도들에게 두 번째로 보낸 서신의 말씀입니다. 이 말씀 1절에서 “종말로 형제들아” 하신 말씀은 결론적으로 중요한 교훈을 주신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지금 읽으신 본문을 절절이 살피면 모두가 복음사역자인 바울 사도께서 소원하는 내용이 담겨 있으므로 제목을 “복음사역자의 소원”이라고 한 것입니다.
복음사역자의 소원은
1. 자신을 위하여 기도해 주기를 소원하는 것입니다. 기도는 최고의 선물입니다. 성도가 복음사역자를 위하여 기도한다면
1) 이는 하나님의 일에 동참하는 것이 되고,
2) 복음사역자를 사랑함이 되며
3) 복음사역자가 잘 됨으로 그 은혜가 자신에게로 돌아오는 복도 될 수 있는 것입니다. 복음사역자도 인간이므로 성도의 기도가 아니면 은혜를 유지할 수 없음을 아셔야 할 것입니다.
2. 자신과 성도가 말씀의 달음질하기를 소원하셨습니다. 1절 말씀에서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기를 주의 말씀이 너희 가운데서와 같이 달음질하여 영광스럽게 되고” 하셨습니다.
1) 이 말씀에서 말씀의 달음질이란 성경을 풍성하게 배우고 가르치며 실천하게 되는 것을 의미하고,
2) 이 말씀의 달음질은 복음사역자와 모든 성도가 동시에 가져야 할 일이며
3) 또 말씀의 달음질이 있을 때 비로소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고 하였습니다. 저희들은 무엇보다도 성경 연구에 익숙하지 못한 것을 안타깝게 여겨야 할 것입니다.
3. 자신들과 성도들이 다 평안하기를 소원하셨습니다. 2절 말씀의 “우리를 무리하고 악한 사람들(이는 복음의 핍박자들을 의미함)에게서 건지옵소서”한 것은 복음사역자 자신들이 악한 자들의 핍박과 위험에서 보호 받기를 소원한 것이고, 또 3절 말씀의 “주는 미쁘사 너희를 굳게 하시고 악한 자에게서 지키시리라” 하신 것은 성도를 지켜주시기를 소원한 말씀입니다. 복음사역자들도 핍박과 여러 가지의 환난에서 보호를 받아야 하고, 또 성도들도 평안하여야만 되므로 이런 은혜가 있기를 소원한 것입니다.
4. 믿음의 성도가 자기의 책임을 다할 것을 소원하셨습니다. 그 말씀이 바로 3절의 “믿음은 모든 사람의 것이 아님이라”는 말씀입니다. 믿음이 모든 사람의 것이 아니란 뜻은
1) 하나님이 택한 백성만 구원하신다는 뜻이며
2) 자신이 선택자가 되어 특별히 구원받게 된 것을 감사하라는 뜻이요,
3) 하나님께 영광 돌릴 책임이 믿는 자에게만 있으므로 그 책임을 다하라는 뜻입니다. 성도는 꼭 이 은혜를 깨닫고 영광 돌리는 책임을 다하셔야 할 것입니다.
5. 성도들이 복음사역자의 명령을 준행할 것을 소원한 것입니다. 복음사역자의 명령이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명령이면 하나님의 명령처럼 알고 순종하여야 복을 받습니다. 4절 말씀을 보시면 “우리의 명한 것을 너희가 행하고, 또 행할 줄을 우리가 주 안에서 확신한다”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이 바로 복음사역자의 명령을 이행하여 주기를 소원한 말씀입니다. 모든 교인이 복음사역자를 신뢰하고 과히 위반되는 일이 아닐찐대 무조건 순종하는 노력을 한다면 큰 복을 받고 또 많은 덕을 세울 수 있을 것입니다. 5절을 보시면 “주께서 너희 마음을 인도하여 하나님의 사랑과 그리스도의 인내에 들어가게 하시기를 원한다”고 하셨습니다. 성도가 이상의 책임을 다 할 때 하나님의 사랑과 예수님의 인내를 실천하는 성도로 크게 변화될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요 3:16, 빌 2:8).
결론적으로 이 말씀에 나타난 바울 사도의 소원은 바로 성령님의 소원입니다. 저희들은 이 여섯 가지의 소원을 이루어 드리는 성도가 되셔야 할 것입니다.
제34과 어려운 성경에 대하여 (벧후 3:16) 목록으로
이 시간에는 성경 말씀 가운데 알기 어려운 말씀들을 어떻게 살필 것인가에 대하여 생각하는 시간을 갖겠습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요, 또 필요하고 유익한 말씀이기 때문에 주신 것이며 또 마 4:4에서는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하셨고, 또 배우고 연구하여 깨닫도록 주셨습니다(딤후 3:14, 벧후 1:10). 그래서 저희들은 성경을 열심히 연구하고 배우는 중에 있지만 그래도 알기 어려운 말씀이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1. 성경에는 이해할 수 없는 말씀이 있을 수 밖에 없음을 아셔야 합니다. 왜냐하면
1) 하나님은 지혜가 무한하시고 인간은 한정된 두뇌를 지니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롬 11:33에 보시면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부요함이며 그의 판단은 측량치 못할 것이요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2) 성경의 기초 지식이 부족하여 스스로의 무식을 자초하기 때문입니다. 성경의 기초 지식을 모르면 그만큼 다른 성경도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그러므로 꼭 기초 지식을 많이 가짐이 필요합니다.
3) 성경을 깨닫는 은사에 차이가 있기 때문입니다. 아무나 선지자, 사도, 교사를 하는 것이 아닌 것처럼 하나님께서도 지혜와 지식을 아무에게나 다 주시지 않고 어떤 자에게만 주신다고 하셨습니다(고전 12:8). 따라서 선생이 되지 않으면 알기 어려운 것도 있는 것입니다.
4) 시대에 따라 밝혀지는 것이 있습니다. “일이 이루기 전에 너희에게 말한 것은 일이 이룰 때에 너희로 믿게 하려 함이니라”(요 14:29) 하셨고, 또 벧후 1:19에서도 “샛별이 너희 마음에 떠오르기까지 너희가 이것을 주의하는 것이 가하다” 하셨는데 여기의 “샛별이 마음에 떠오른다”는 것은 성령님의 은혜로 마음에 깨달음이 온다는 뜻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말씀은 어려운 것일지라도 지혜의 깨우침과 예언의 성취 등(요 2:19~22, 14:29)으로 세월이 흐른 후에 알게 되는 것도 있는 것입니다.
5) 또 한 가지 이해하기 어려운 이유는 지역적인 생활 풍속과 역사와 언어 문화의 차이로 빚어지는 경우도 있습니다. 예를 들면 요 2:4에서 예수님이 그의 어머니 마리아에게 “여자여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하신 말씀입니다. 이런 말씀은 언어 문화의 차이와 번역의 어색함 때문에 그렇게 나타난 것입니다.
3. 이런 경우들로 알기 어려운 말씀이 있을 때 어떻게 해야 할까요?
1) 성도는 그러한 것들 때문에 낙심하거나 불만스럽게 생각하면 안 됩니다.
2) 우선 여러 번 읽어서 이해되지 않는 내용의 소제를 기억하셔야 합니다. 기회가 있으면 알게 될 때가 있으니까요.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이해하지 못하였어도 읽어서 복을 받는다고 하셨으므로(계 1:3) 그렇게 믿고 읽고 또 읽으시기 바랍니다.
3) 기초 지식을 통하여 터득하도록 노력하셔야 합니다. 기초 지식이 빈약할 때 이해되지 않는 말씀이 많기 때문이요,
4) 가르치는 사람에게 반드시 물어서 알도록 노력하셔야 합니다. 많은 성도들이 말씀을 깨닫는데 큰 관심을 기울이지 않습니다. 또 모르는 것을 알고 지나가려는 성도가 아주 희귀합니다. 꼭 배워서 알려고 노력하셔야 합니다.
5) 그리고 몰랐던 말씀을 깨닫게 되었을 때 이를 큰 기쁨과 만족으로 삼고 생활의 취미를 삼으셔야 합니다. 몰랐던 예수님을 알게 된 것 같은 기쁨을 맛보셔야 할 것입니다.
6) 그리고 끝내 알 수 없는 것은 깨달을 때가 있기까지 기다리셔야 합니다. 절대로 함부로 해석하거나 확실치 않은 것을 주장하면 그로 인하여 스스로 멸망에 이른다고 하셨으니까 아주 주의하셔야 합니다. 성경을 함부로 해석하는 사람들이 바로 무식하고 믿음에 굳세지 못한 자라고 하셨습니다.
진리에 무식하고 믿음에 굳세지 못하면 바른 신앙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제35과 신령한 복을 사모하자 (엡 1:3~6) 목록으로
지금 저희들은 신약 성경 에베소서의 한 부분을 읽었습니다. 에베소서란 주후 62년경에 바울 사도께서 로마 옥중에서 계시면서 에베소 교회 성도들에게 보내신 편지를 의미합니다. 엡 1장을 보시면 “하나님이 구원하신 자를 선택하여 성도를 삼으신 이유가 신령한 복을 많이 주셔서 하나님을 찬미하고 영화롭게 하시기 위함이라” 하셨고, 또 본문 3절을 보시면 “모든 신령한 복으로 복 주시되”란 말씀과 함께 신령한 복에 대한 내용이 많이 소개되었습니다. 그래서 이 시간에는 “신령한 복을 사모하자”는 제목으로 교훈을 받겠습니다.
1. 본문 말씀을 상고하면
1) 하나님의 구원 사업의 목적은 “성도로부터 찬미의 영광을 받으시기 위함”이라고 하셨습니다. 3절에서 “찬송하리로다”로 시작하여 6절 끝에서도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는 것이라” 하시므로 구원의 목적을 찬미와 영광에 두셨습니다. 따라서 성도는 하나님을 즐거워하며 감사하고 찬미로 영광 돌리는 일을 잊지 마셔야 할 것입니다.
2) 구원의 내용을 설명하셨으니 이 구원의 내용은 한 마디로 표현하여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늘에 속한 신령한 복을 주시려는데 있다”는 것입니다. 신령한 복은 그리스도를 통하여 주시는 것이고, 또 하늘에 속한 것을 의미합니다. 이 세상에서만 누리는 것을 “세속의 복, 또는 현세의 복, 육신의 복”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신령한 복은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천국에까지 가서 영원히 누리는 복임을 꼭 기억하셔야 할 것입니다.
3) 신령한 복을 주시는 과정을 말씀하셨습니다.
① 창세전에(세상 만물을 창조하시기 전에)
② 그리스도 안에서(예수님의 속죄 사업을 전제하시고)
③ 선택하셨고(다 구원하지 않는다는 뜻),
④ 거룩하고 흠 없게 하시며(속죄하시고 깨끗하게 하심)
⑤ 자기의 아들이 되게 하셨다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에서 나타내신 구원의 과정은 선택과 속죄와 성화됨과 양자됨의 4가지를 말씀하셨습니다.
4) 이 축복을 주시게 된 동기는 “하나님의 기쁘신 뜻대로(5절) 거저 주시기 위함”(6절)이라 하셨고, 하나님은 이 일을 만세 전부터 예정하여 시행하셨다고 하셨습니다. 이상의 말씀에서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받는 신령한 복은 헤아릴 수 없이 많은 것입니다. 선택, 거룩, 하나님의 아들, 구속(7절), 지혜와 총명(8절), 진리의 말씀(13절), 약속의 성령(13절), 기업의 보증(14절), 지혜와 계시의 정신(17절), 부르심의 소망(18절) 등이 모두 신령한 복임을 알 수 있습니다.
2. 저희들은 신령한 복을 사모하여야 하겠습니다. 신령한 복을 사모하여야 할 이유는
1) 이 복이 크고 영원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고후 4:17~18에 보시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이렇게 신령한 복은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큰 복이 되는 것입니다.
2) 신령한 복을 먼저 사모하셔야 다음 복을 뒤따라 주신다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영혼이 잘 됨 같이 범사에 잘 되고”(요삼 2) 하신 말씀이나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 6:33)하신 말씀이 바로 그 뜻이 아닙니까?(시 1:1~3)
3) 신령한 복이 아닌 일반 은총은 예수를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도 부족함이 없이 주시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믿음 생활이나 교회의 생활은 그 목적을 신령한 은혜에 두셔야 하는 것입니다. 그 동안 저희들이 깨닫지 못하여 너무 현실주의에 치우쳤다면 깊이 반성하시고 뉘우쳐야 할 것입니다. 바울 사도는 이 사실을 깨달았을 때 “그리스도를 얻기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처럼 여기셨다”고 하셨습니다(빌 3:8).
제36과 요한에 대한 예수님의 칭찬 (눅 7:24~28) 목록으로
이 시간에는 “요한에 대한 예수님의 칭찬”이란 제목으로 교훈을 받겠습니다.
1. 신약 성경에 “요한”이란 이름이 다섯 사람 나옵니다.
1) 제사장의 아들 (세례) 요한입니다. 이 요한에게 세례란 명칭이 붙은 것은(마 3:1, 11:11~12) 그가 예수님께 세례를 베풀었기 때문입니다(마 3:16).
2) 예수님의 12 제자 중 한 사람이고,
3) 바울 사도와 선교에 동행한 마가 요한이요(행 12:12),
4) 베드로와 사도들을 심문한 제사장족 중 한 사람이 있고(행 4:6),
5) 베드로의 부친의 이름도 요한이었습니다(요 21:15). 우선 이 다섯 사람의 요한을 기억하시고, 그 중의 제일 먼저 나타난 사람 세례 요한에 대한 칭찬의 말씀을 살펴보는 것입니다(성경개론 194쪽에도 “가장 칭찬하신 사람”이란 제목의 글이 있음을 알려드립니다).
2. 요한에 대한 예수님의 칭찬.
1) 지조가 있는 사람이라고 하셨습니다. 24절에 보시면 “요한에 대하여 말씀하시되” 하시고,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냐?”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요한이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와 같은 사람이 아니란 뜻입니다. 갈대는 바람에 흔들리고 있습니다. 흔들리다가 강한 바람이 불면 꺾일 것입니다. 이것은 믿음에 확고하지 못한 약한 신앙 즉 흔들리는 신앙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요한은 믿음과 사명과 고난과 희생에 흔들림이 없었습니다. 저희들도 믿음과 사명과 사랑과 교회 생활에 흔들림이 없어야 할 것입니다.
2) 요한은 근검절약하는 사람이었습니다. 25절에서 “부드러운 옷 입은 사람이냐?”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요한은 부드러운 옷을 입은 사람이 아니란 뜻입니다. 그 당시에 부드러운 옷을 입은 사람은 왕궁에 있었습니다. 이 부드러운 옷이란 사치하는 좋은 의복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의복에 사치하지 않음은 모든 생활에 근검절약 한다는 뜻입니다. 요한의 의복은 약대털 옷에 가죽띠를 띠었다고 하셨고, 음식은 “메뚜기와 석청(꿀)을 먹었다”(마 3:4)고 하였습니다. 세례 요한의 이런 생활은 그 시대에 근검절약을 보여준 것입니다. 요즘 사람들은 좋은 옷과 좋은 음식, 그리고 좋은 집에서 살아보려고 얼마나 애를 씁니까? 또 요한은 유다 광야로 나가야 만날 수 있었습니다. 도시 생활이 사치를 더 많이 하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요한은 그 반대의 생활을 하였기 때문에 광야에서 산 것입니다. 지금 우리 기독교인들은 세계의 가난한 사람들을 생각하면서 지나친 사치를 억제하려고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특히 교회의 살림을 할 때에도 가능한 한 절약하여 쓰고 그 절약된 재정을 어려운 사람들을 위해서 쓸 수 있도록 하여야 할 것입니다. 이런 일은 나라가 요구하는 고통 분담이 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
3) 세례 요한은 “선지자 보다 나은 자”라고 하셨습니다. 선지자는 하나님의 계시의 말씀을 전달하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계시의 말씀의 핵심은 예수님을 증거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요한은 그 예수님을 직접 보여준 것입니다. “저 분이 바로 하나님의 아들 구세주이시다”(요 1:29)라고 증언하였고, 예수님이 공생애 사역에 들어오시도록 세례를 베풀었기 때문입니다(마 3:13~17). 예수님을 소개하는 것은 바로 저희들이 본을 보이면서 전도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세례 요한은 모든 생활에 지조가 있었고, 근검절약하였으며 예수님 증언하는 전도를 잘 하였습니다. 저희들도 그런 생활을 하셔야 칭찬받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 칭찬은 바로 “여인이 낳은 자 중에 요한보다 더 큰 이가 일어남이 없다”는 말씀이었으니 최고의 칭찬이 아닐 수 없습니다. 저희들은 생각하는 것부터 일하는 것에 이르기까지 꼭 예수님의 칭찬을 받도록 노력하셔야 하겠습니다. 이 시대에 세례 요한 같은 사람이 몇 사람이라도 나타나기를 하나님은 원하실 것입니다. 또 그런 사람이 나라와 민족을 구원하는 요인이 되는 것입니다.
제37과 뜨거운 믿음 (눅 24:31~35) 목록으로
이 시간에는 “뜨거운 믿음”이란 제목으로 교훈을 받겠습니다. 이 본문 말씀은 예수님이 부활하신 후에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에게 나타나신 사건의 내용입니다. 본문 32절을 보시면 “우리에게 성경을 풀어 주실 때에 우리 속에서 마음이 뜨겁지 않더냐?”고 하였습니다. 뜨거운 마음을 간접적으로 표현한 성경도 여러 곳에 있습니다. 예를 들면 렘 20:9에서 (예레미야 선지자가 전도를 쉬려 하면) “그의 중심이 불붙는 것 같아서 골수에 사무치니 견딜 수 없다”고 하신 말씀과 또 마 23:37에 보시면 (예수님이 복음을 배척하는 예루살렘 거민들을 향하여)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암탉이 그 새끼를 날개 아래 모음같이 내가 네 자녀를 모으려 한 일이 몇 번이냐?”고 하시면서 안타까워하신 심정이요, 또 빌 2:17에 보시면 (바울 사도께서 희생적인 마음을 표현하시면서) “너희 믿음의 제물과 봉사 위에 내가 나를 관제로 드릴지라도…기뻐하리라”하신 말씀들은 모두 성도의 뜨거운 심정의 표현이 아닐 수 없습니다(롬 8:35~38, 고후 5:14). 뜨거운 마음이 어떤 것일까요?
1. 성경을 깨닫는 마음입니다. 본문 31~32절에 보시면 “저희의 눈이 밝아져서 예수님을 알아보았다” 하였고, 또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성경을 풀어 주실 때에 우리 속에서 마음이 뜨겁지 않더냐”고 하셨습니다. 성도는 성경을 깨닫는 것을 큰 은혜로 또는 취미로 알아야 합니다. 얼마나 귀한 은혜입니까? 진리를 깨닫는 것이 곧 뜨거운 마음을 갖는 것입니다.
2. 회개하는 마음입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세 번이나 모른다고 부인한 것을 아실 것입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그 잘못을 자책하면서 심히 통곡했다고 하였습니다(마 26:75). 또 구약 시대의 다윗왕도 충신 우리아의 아내를 탐하여 음행을 하고, 나단 선지자의 경고를 받았을 때에 회개하였는데(삼하 12:13) 이를 인하여 “밤마다 요를 적시며 침상을 띄운다”(시 6:6)고 하였습니다. 회개의 눈물과 돌이키는 생활은 곧 뜨거운 마음의 결과입니다. 본문에서 엠마오로 가던 두 사람도 마음이 뜨거워졌을 때 자신들의 가던 길을 멈추고 다시 예루살렘으로 돌아온 것은 뜨거운 마음으로 회개한 결과라고 할 수 있습니다.
3. 이웃을 사랑하는 마음입니다. 예수님은 선지자들을 죽이고 또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은 무리들을 사랑하여 탄식하신 것을 생각해보십시오. 형제 사랑, 이웃 사랑, 원수 사랑…이 사랑의 심정이 곧 뜨거운 마음입니다. 이런 마음이 동할 때 이웃과 화목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어떤 권사님이 이 뜨거운 마음을 갖고 전도를 하였는데 전도를 성원해 주는 사람을 볼 때는 감사의 눈물이 나오고, 거절하는 사람을 볼 때는 불쌍히 여겨지는 눈물이 나오더라는 말을 들은 일이 있습니다. 이렇게 성도들의 마음은 항상 사랑으로 불타 있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도 중심이 뜨거울 때 사랑을 베푸셨습니다(욜 2:18).
4. 전도하는 마음입니다. 본문에서 뜨거운 마음을 갖고 두 사람은 예루살렘으로 돌아가서 예수님의 부활을 증언하였다고 했습니다. 35절에서 “두 사람도 길에서 된 일과 예수께서 떡을 떼심으로 자기들에게 알려진 것을 말하였다”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을 알리는 것이 곧 전도입니다. 마음이 뜨거워진 사람들은 이렇게 예수님의 부활을 증언하였습니다.
5. 열심히 봉사하는 사람입니다. 봉사할 뿐만 아니라 모든 신앙에 관한 일에 모두 열심히 하는 것입니다. 롬 12:11에 보시면 “부지런히 게으르지 말고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라”고 하셨습니다. 뜨거운 마음에서 열심이 나오지 않겠습니까? 그런고로 기도나 찬송이나 예배나 성수 주일이나 모든 봉사를 열심히 하셔야 할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지금 저희들의 마음이 뜨거워져 있습니까? 우리의 열심은 반드시 실천으로 나타나야 합니다. 소리만 크게 내고 실천이 뒤따르지 못하면 일시적 외식이란 비판을 받기에 알맞을 것입니다. 꼭 뜨거운 마음 갖기를 노력하셔야 하겠습니다.
제38과 예수님의 탄식 (마 23:37~39) 목록으로
예수님이 십자가에 돌아가시기 전에 예루살렘 백성들을 생각하시면서 탄식하신 말씀을 읽었습니다. 눅 19:41에서는 “우셨다”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이 왜 이렇게 탄식하시며 우셨을까요? 이는 그 백성들이 완악하여 복음을 배척하였을 뿐만 아니라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기까지 한 죄로 장차 받을 심판이 참혹한 것을 생각하셨기 때문입니다.
이 말씀에서 저희들이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은
1. 예루살렘 백성들의 완악입니다. 예루살렘 백성들은 다 아브라함의 자손들로 선민의 후손이었고 성전 가까운 곳에서 종교적 의식을 취하며 살았고, 또 부유층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을 배척하였습니다. 예수님이 처음 예루살렘에 입성하셨을 때에 많은 사람들(제자)이 예수님을 영접하였으나 그들은 대부분 예수님의 제자들과 어린이들이었고(마 21:16), 그 곳의 대부분의 백성들은 예수님을 배척할 뿐 아니라 나중에는 십자가에 죽이기까지 하였습니다(막 11:8, 눅 19:37). 오늘도 복음을 배척하고 진리를 대적하는 사람들이 많은 것을 기억하셔야 합니다.
2. 예수님은 완악한 백성들에게 여러 차례 복음의 손길을 펼치셨습니다. 마 21장과 22장과 23장이 그들에게 교훈하신 말씀이며 또 24장과 25장도 계속되는 예수님의 교훈이었습니다. 본문 37절을 보시면 “암탉이 그 새끼를 날개 아래 모음같이 내가 너희 자녀를 모으려 한 것이 몇 번이냐”하신 것을 보면 여러 차례 교훈하신 것을 알 수 있습니다(요 20:30, 21:25). 이것은 완악한 자에 대한 끈질긴 사랑이요, 인내로 권면하신 것입니다. 저희들도 완악한 자에 대한 끈질긴 사랑과 인내를 베풀면서 전도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3. 예수님의 모성애적인 사랑을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그 완악한 백성들을 마치 “암탉이 자기의 새끼를 날개 아래 품는 것처럼 보호해 주시려고 하였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의 모성애적인 사랑이 아니고 무엇입니까? 성경에서는 하나님의 사랑을 “아가페”란 말로 표현하였습니다. 이 “아가페”의 사랑은 혈연적인 사랑을 능가하는 신적 사랑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 사랑으로 독생자를 희생시켜가면서 우리를 구원하셨습니다. 본문에서 모성애적인 사랑도 희생적인 의미로 볼 때는 아가페의 사랑과 비슷하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여기에서 저희들은 완악한 자에 대한 예수님의 희생적 사랑을 배워야 할 것입니다.
4. 심판하시는 주님을 보여 주셨습니다. 예수님을 못 박은 무리들의 자녀들이 큰 심판을 받을 것이라고 예고하셨으니 그 말씀이 바로 38절의 “너희 집이 버린바 되어 황폐하게 되리라”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을 눅 19:41~44에서는 아주 참혹하게 표현하셨습니다. 이것은 주후 70년에 로마의 군대가 예루살렘을 점령 학살할 것을 예고하신 내용입니다. 주후 70년에 그들이 비참하게 학살당한 것은 역사가 증명합니다. 장차 오실 예수님은 모든 인류에 대하여 마지막 심판을 하시게 될 것입니다(마 21:44).
5. 그런데 본문 37절에서 왜 예수님은 “네 자녀를 모으려” 하셨을까요? 예수님이 그들의 자녀에게만 전도하시고 어른들은 외면하셨을까요? 그렇지 않을 것입니다. 이 말씀은 주후 70년에 예루살렘이 멸망될 때 어른들은 남은 기간 40년 사이에 다 죽을 것이고 그 때에 비참하게 학살당할 자들이 바로 그들의 자녀들이기 때문입니다. 그 자녀들 중에는 예수님을 영접한 어린이들도 있었지만 그들도 그 부모들의 죄를 담당하지 않을 수 없었음을 나타내 주신 것입니다. 저희들은 예수님의 사랑과 탄식을 기억하시면서 믿음 생활을 더욱 잘 하셔야 할 것입니다. 또 우리와 우리의 이웃들의 죄악을 인하여 탄식하며 회개하는 기도를 하여야 할 것입니다.
제39과 우리가 받을 능력 (고전 4:19~20) 목록으로
바울 사도께서 고린도 교회 성도들에게 주신 말씀을 읽으셨습니다. 고린도 교회의 교인 중에 어떤 사람은 말만 잘 하면서 교만을 떨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께서는 “주께서 허락하여 기회를 주시면 속히 고린도 교회에 가서 교만한 자의 말만 확인할 것이 아니라 그의 능력도 알아볼 것이라”고 하시면서 “하나님의 나라는 말에 있지 않고 오직 능력에 있다”고 하셨습니다. 저희들은 이 말씀에서 우선 말을 앞세우거나 말을 많이 하는 사람이 되지 말고 또 교만한 사람도 되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또 하나님의 나라가 능력에 있다는 말씀은 신앙생활이(하나님의 나라) 말만 하는 것이 아닌 실천에 있음을 뜻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희들도 말은 적게 하고 실천은 많이 하며 표현은 적게 하고 열매는 많이 거두는 생활을 하여야 할 것입니다. 무화과나무가 잎만 무성하고 열매가 없었을 때에 예수님은 그 나무를 저주하셨으니 이것은 바로 말만 하거나 표현만 나타내면서 실천과 열매를 맺지 못하는 외식적인 생활을 벌하신 내용이 되는 것입니다(마 21:19).
저희들은 하나님이 주시는 능력을 받아야 하겠습니다. 어떤 능력을 받아야 할까요?
1. 오순절 직전에 예수님께서는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권능을 받고…내 증인이 되리라”고 하셨습니다. 그 때에 제자들은 다 성령의 충만으로 권능을 받고 충성된 전도를 하였습니다. 그러나 저희들은 이 권능이란 뜻을 어떤 기적의 능력으로 생각지 말아야 합니다. 기적을 행하는 초자연적 권능은 하나님께 속한 것입니다(시 62:11). 성경을 기록해 주시던 시대에 특별사역자(사도, 선지자, 또는 사도적 사역자)들에게 그 권능을 주신 일이 있었으나 계시가 완성된 후에는 그 능력을 사역자들에게 맡기시지 않았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받아야 할 권능이란 어떤 기적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란 사실을 우선 아셔야 하는 것입니다.
2. 그러면 우리가 받아야 할 능력이란 어떤 것일까요?
1) 말씀을 가르치는 능력을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말씀을 가르치는 것이 성령님의 기본 사역입니다(요 14:26). 왜 말씀을 가르치는 능력을 받아야 하느냐 하면 구원의 복음이 말씀으로 증언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귀신이 나간다고 구원을 받거나 병을 고쳤다고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고 믿어야 하기 때문입니다(눅 10:20).
2)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는 능력을 받아야 합니다. 본문 19절에서 “교만한 자의 말이 아니라 능력을 알아보아야 한다” 하신 것은 바로 “성경대로 행하는가”를 본다는 말씀입니다. 믿음은 행함으로 온전해진다는 것을 다 아실 것입니다(약 2:22). 따라서 실천하는 믿음이 “산 믿음”입니다(약 2:17). 이 산 믿음을 갖기 위해서 말씀 지키는 능력을 받아야 합니다. 또 계 1:3에서는 “말씀을 지키는 자들이 복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3) 사랑의 능력을 받아야 합니다. 요즈음 사랑의 능력을 구하는 성도가 많지 않습니다. 더욱 큰 은사는 사랑이라고 하셨습니다. 신앙이 성숙하고 연단이 세련되어야만 이 사랑을 실천할 수 있습니다. 사랑의 실천으로 하나님의 자녀의 명칭을 얻고(마 5:9) 사랑의 빛된 생활로 전도하셔야 하며 또 사랑 실천으로 하늘의 상급을 받게 되기 때문에(마 25:35~40) 사랑이 중요한 것입니다.
4) 마귀의 역사(불법)를 대적하셔야 합니다(엡 6:12~13).
5) 기도의 능력,
6) 전도의 능력,
7) 봉사의 능력도 받아야 할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이 능력들은 모두 “경건의 능력”(딤후 3:5)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능력은 저절로 성취되는 것이 아니고 늘 기도로 구하면서 자신을 죽이고 말씀 속에 과감한 실천을 나타낼 때 성취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경건의 능력을 보유한 성도가 되셔야 하겠습니다.
제40과 시므온의 신앙 (눅 2:25~35) 목록으로
이 시간에는 “시므온의 신앙”이란 제목으로 교훈을 받겠습니다. 성경에는 시므온이란 이름이 네 사람 나옵니다.
1) 구약 시대에는 야곱의 둘째 아들(레아의 소생; 창 29:33)이고,
2) 예수님의 족보에 나오는 사람이며(눅 3:30)
3) 예수님 탄생 당시에 살았던 본문에 나타난 사람이고,
4) 사도행전 시대에 안디옥 교회의 선지자요, 교사인 “니게르”라고도 하는 사람(행 13:1)입니다. 이 시간에 생각하려고 하는 말씀은 예수님 탄생 당시에 나이 많은 노인으로 생존하였던 “시므온의 신앙”을 생각해 보는 것입니다. 이 분의 족보와 직책을 소개하지 않았으나 신령한 은혜가 충만한 사람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1. 의롭고 경건한 사람이었습니다(25절). “의롭다”는 뜻은 계명을 지키는 일에 성실하다는 뜻이요, 경건함이란 모든 일을 하나님 중심으로 하나님 앞에서 품위있게 취하는 태도를 의미합니다. 믿음의 성도에게는 항상 이와 같은 의와 경건이 따라야 합니다.
2.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는 사람이었습니다(25절). “이스라엘의 위로”란 하나님이 그 백성들에게 은혜 베풀어 주시기를 기다린 것입니다. 그 당시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나라를 잃고 약 400년 동안 종교적, 정치적으로 유리하는 생활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구약 시대부터 메시야(구원자)를 보내주실 것을 약속하셨기 때문에(사 9:1~7, 미 5:2) 시므온은 그 약속에 따라 자기 민족을 위로하고 구원할 메시야를 간절히 기다렸던 것입니다. 이것은 바로 성도가 자기 백성들에게 신적 위로의 은총을 주시기를 소원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3. 그는 성령이 충만한 사람이었습니다. 본문 25절에 보시면 “성령이 그 위에 계시더라” 하였고, 또 성령의 지시와 감동을 받은 사실도 있다고 하셨습니다(26~27절).
시므온은 성령의 지시로 “자신이 그리스도를 만나기 전에는 죽지 않을 것”이란 계시를 받았고, 또 성령의 감동으로 성전에 들어가서 아기 예수님을 보고 찬송과 축복과 예언도 하였습니다. 오늘날 저희들이 성령에 충만하면 저희들은 예수님의 인격을 충만하게 닮아서 성경대로 사는 생활을 잘 하시게 될 것입니다.
4. 찬송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찬송은 성도의 마땅히 행할 바이지만(시 33:1) 이 날 “시므온”은 성령의 감동으로 성전에 갔다가 난지 8일 만에 할례 하러 오신 아기 예수님을 만나게 되자 이는 그가 “죽기 전에 그리스도를 뵙게 될 것”이란 말씀이 성취된 것을 깨달은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더욱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나님께 찬송을 하였습니다. 그의 찬송가의 가사 내용을 보면(29~32) 감사의 내용과 그리스도에 대한 예언이 담겨 있습니다. 감사의 내용은 “자신이 기다리던 메시야를 만남으로 소원하던 속박에서 해방되었다는 것이고 또 이방의 빛이요, 이스라엘의 영광이라”고 한 것입니다. 이 말을 들은 예수님의 부모들은 “기이히 여겼다”고 하였습니다.
5. 시므온은 축복하고 증거한 사람이었습니다. 34절에서 “저희들에게 축복했다” 하셨으니 이는 예수님과 그 부모를 위하여 축복한 것입니다. 세례 요한도 예수님께 세례를 베풀면서 축복하였습니다. 시므온이 예수님에 대하여 증언한 내용은 34~35절의 말씀인데 “예수님이 바로 인류의 흥하고 쇄함을 가름하는 인물이요 또 핍박의 표적이라” 하였고, 그의 죽음으로 그 부모의 마음이 칼에 찔림 같을 것이요, 또 “그의 진리가 여러 사람에 대한 마음의 생각을 판별해 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이 마음의 생각이란 바르고 악함을 의미합니다.
저희들도 “시므온”처럼 경건한 사람, 하나님의 위로를 구하는 사람, 성령 충만의 사람, 찬송하는 사람, 증언하는 사람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제41과 세 가지 민법 (신 22:5~8) 목록으로
1. 저희들은 지금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셨던 세 가지 법에 대한 말씀을 읽었습니다.
1) 남복, 여복을 서로 바꾸어 입지 말아라 그것은 하나님 앞에 가증하다는 것이요,
2) 새의 보금자리에서 어미와 새끼를 함께 취하지 말고 새끼나 알만 취하라는 것이요,
3) 집을 건축할 때 지붕의 난간을 만들어서 지붕에 올라갔던 사람으로 떨어지지 않게 하라는 것입니다.
2. 이런 법을 가리켜 민법이라고 합니다. 더 아셔야 할 것은
1) 민법이 그 시행만을 목적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정신적 사상 교육이나 영적면에서도 교훈을 주시는 면이 있다는 것과
2) 이 말씀이 이스라엘 신정국에서 시행하던 법이기 때문에 같은 국가의 법률이 성경에 기초했다는 사실과
3) 기독교인들은 개인적으로 이 법을 지키므로 하나님의 뜻을 따를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3. 그리고 구약의 율법 중에는 두 가지 유의할 점이 있습니다.
1) 장차 있을 실상을 모형하는 제사법과 거기에 준하는 법들입니다. 이런 것은 실상이 성취된 다음에는 지킬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이것은 마치 태양이 비취면 등불을 끄게 되는 것처럼 온전한 것으로 성취되었을 때는 그렇지 못한 것이 폐하여지는 원리인 것입니다(고전 13:10, 히 8:13).
2) 도덕에 관한 법입니다. 이 법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변할 수가 없기 때문에 잘 지키므로 영광을 돌려야 하는 것입니다.
4. 이 민법이 주시는 교훈이 무엇인가를 생각해 보겠습니다.
1) 남녀가 그 의복을 서로 바꾸어 입지 말라 하심에 대하여
① 하나님은 종류 별로 남자와 여자를 지으셨습니다. 이들은 서로 피부가 다르고, 성격도 차이가 있으며 나름대로 인생을 사는 방법과 생활의 취미가 각각 다르게 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주신 사명의 영역이므로 이 영역을 잘 지켜야 하는 것입니다. 여자처럼 살아야 할 사람이 남자처럼 살거나 남자로 태어난 사람이 여자처럼 사는 것은 창조의 목적에도 어긋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남녀의 생활을 혼돈 시킴에 대하여 이를 가증하게 여기신 것입니다.
② 저희들은 하나님이 내게 주신 개성도 잘 살려서 하나님이 창조해 주신대로 독특하게 살도록 노력하고 하나님이 하신 일과 원하시는 일을 인간의 취향 따라 변하려 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2) “어미와 새끼를 한꺼번에 취하지 말라”는 것은
① 우선 자연의 생태계를 보호하고, 하나님이 창조하신 새 한 마리라도 멸종시켜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노아 홍수 때에 그것들을 다 보호하셨습니다. 만일 인간이 새의 어미와 새끼를 다 취한다면 그 새는 멸종할 것입니다.
② 그리고 또 인간은 잔인한 사람이 될 것입니다. 동물을 이용하는 것은 할 수 있는 일이지만(창 9:3) 멸종되도록 하여서는 안 됩니다. 멸종은 다스리는 차원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지으시고 보시기에 좋았더라” 하신 만물과 모든 동물들은 인간이 “보호 육성하면서 이용하라”고 하신 것이요, 또 어미와 새끼를 함께 해하는 잔임함을 피하게 하신 것입니다. 이렇게 긍휼과 여유로 사는 자에게는 하나님이 복을 누리고 장수하게 하신다고 하셨습니다.
3) “지붕의 난간을 만들어 집을 건축하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일종의 건축법이고, 또 안전법입니다. 요즈음은 교통 사고가 큰 위험이지만 옛날에는 지붕에서 떨어지는 위험이 가장 많았습니다. 어떤 사람이 지붕을 수리하다가 떨어져서 부상을 입었다면 그 책임이 누구에게 있는가 할 때 만일 주인이 지붕 난간을 만들지 않으므로 안전 수칙을 지키지 않았으면 주인에게 있고, 난간이 있는대도 떨어졌다면 일꾼에게 있는 것입니다. 이런 시비를 가리면서 안전하게 살도록 하기 위하여 이런 법을 주신 것입니다. 저희들이 여기에서 교훈을 받아야 할 것은 창조의 목적대로 살아야 할 것과 자연 보호와 안전에 힘쓰며 긍휼의 심정으로 살 것을 교훈하신 것입니다.
제42과 다른 것을 섞지 말라 (신 22:9~12) 목록으로
이 시간에는 “다른 것을 섞지 말라”는 제목으로 교훈을 받겠습니다. 본문에서 “포도원에 두 종자를 섞어 뿌리지 말라” 하셨고, “소와 나귀를 겨리하여 갈지 말라” 하셨으며 또 “양털과 베로 섞어 짠 옷을 입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12절에서는 “입는 겉옷 네귀에 술을 달라”고 하셨는데 이 뜻이 무엇인지에 대하여서도 공부를 하도록 하겠습니다. 이 말씀의 가장 중요한 교훈은 깨끗하고 바른 생활 속에 건전하지 못한 것들을 개입시키지 말고, 순결하게 생활해야 할 것을 교훈하신 것입니다.
1. 포도원에 두 종자를 섞어 뿌리지 못하게 하심에 대하여.
포도원은 포도원으로 만족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일종의 영농법(현재 농촌지도소에서 지도하는 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농사를 더 잘 짓도록 지도하는 법입니다. 그러나 이 법 속에는 신령한 교훈도 있습니다.
1) 우선 포도원에는 포도만 심어야 잘 됩니다. 포도는 그늘을 만드는 나무이기 때문에 다른 종자는 살아남을 수도 없습니다. 그래서 두 종자를 섞어 뿌리면 모든 소산을 다 빼앗긴다고 하셨습니다.
2) 신령한 의미로의 포도원은 교회와 신앙을 비유합니다. 사 5:1~2, 마 20:1을 보시면 포도원이 신령한 단체 교회인 것을 말씀하셨고, 또 요 15장에서는 포도나무로 예수님과 성도와의 관계를 말씀하셨습니다. 따라서 “포도원에 두 종자를 섞어 뿌리지 말라”는 것은 신앙의 순결을 위하여 두 사상, 두 생활, 두 방법 등 옳은 것과 옳지 않은 것을 혼돈 시키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이런 사실은 신학 사조가 혼란하고 불건전한 신앙 운동들이 팽배할 때에 바른 신앙을 지켜야 할 성도들에게 많은 유혹을 주는 것입니다. 신앙은 성경에 근거하고, 또 덕을 세움에 방해되지 않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3) 현재 한국 교회들의 신앙 풍조는 상당하게 오염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 이유는 신령한 복보다 현실의 복을, 말씀 공부보다 사람의 기분을, 사도의 전통보다 세상의 유행을, 하나님의 뜻보다 인간의 욕구를 성취시키기 위하여 이를 더 앞세워 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또 하나님의 일반 은총으로 주시는 축복을 외면하면서 기적의 은사만 추구하는 것도 바른 방법은 아닙니다. 이런 일들에 대하여 바른 신앙 갖기를 원하는 성도는 들포도 같은 신앙을 맺지 마시고, 참포도 같은 신앙을 맺어 성경 표준에 부합되는 생활을 하셔야 할 것입니다. 토마토를 재배할 때 순을 자르지 않으면 나무가 가지를 많이 치면서 충실한 열매를 맺지 못합니다. 그러나 나오는 순을 다 잘라주면 한 줄기 나무로 자라면서 마디마디마다 큰 열매를 맺게 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우리의 신앙 생활도 불건전한 사상과 생활을 잘라 없애고 용납하지 않을 때 칭찬받을 만한 좋은 신앙, 즉 온전한 신앙(히 6:2, 10:22)으로 성숙 될 수 있는 것입니다.
2. 소와 나귀를 겨리하여 갈면 밭을 바르게 갈지 못합니다. 그 이유는 소와 나귀의 끄는 힘과 속도가 같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곧게 갈 수 없는 상태를 말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성도의 신앙 노선도 곧게 가야 하는데 성분이 다른 사역자들끼리 합동하거나 성도가 그런 사역자들을 무분별하게 따라가면 역시 바른 노선(칼빈주의)을 견지할 수 없는 것입니다.
3. 양털과 베실로 된 의복도 역시 섬유질이 다르므로 합동 섬유보다 각질 섬유가 더 효과적입니다(양털은 덥게, 베실은 시원하게 하는 섬유임). 이 말씀도 역시 이질적인 성분을 서로 배합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4. 마지막으로 “옷에 술을 다는 이유”는 그것을 볼 때 하나님의 말씀을 기억하게 하기 위함이라고 하셨습니다(민 15:30).
아무쪼록 좋은 신앙, 좋은 보화를 간직하시기 위하여 불순한 신학 사상과 건전하지 못한 생활을 멀리하는 성도님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제43과 욥의 곤경을 돌이키심 (욥 42:1~10) 목록으로
이 시간에는 “욥의 곤경을 돌이키심”이란 제목으로 공부하겠습니다.
1. 구약 시대에 욥이란 사람이 있었습니다. 이 사람이 어느 시대의 사람인가에 대하여 확실하게 나타난 기록은 없으나 욥이 140세를 살았다는 것은(욥 42:16) 아브라함 시대의 인류 수명과 비슷하므로 그 시대의 사람으로 추측합니다(아브라함 175세, 이삭 180세, 야곱 147세).
2. 욥은 당대에 의로운 사람이고 축복 받은 사람입니다(욥 1:1~3). 욥 1:3을 보시면 “그는 의롭고 정직하며 동방에서 큰 자라”고 하였습니다.
3.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이 욥에게 아주 큰 재난을 주셨고, 그는 오랫동안 불행한 입장에서 질병을 앓게 되었습니다. 욥은 10남매의 자녀가 장성했을 때부터 고난당하기를 시작하여(욥 1:4, 12) 늙었을 때에 그 재난에서 벗어났으니(욥 42:12) 인생 중년기 수십년이 그의 고난의 기간이라고 하여도 틀림이 없을 것입니다.
1) 이 때에 욥이 고난을 당한 이유는 하나님 자신에게 있는 것이고(욥 1:9~12), 욥에게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은 독자적 주권을 갖고 계셨기 때문에 모든 것을 임의로 하실 수 있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살리기도 하시고 죽이기도 하시는 것입니다(삼상 2:6).
2) 그런데 욥의 세 친구는 욥을 위로하기 위하여 찾아와서 권면할 때 “욥이 받는 고난은 하나님의 징계를 인함이나 하나님을 더욱 의지하고 회개하라”(욥 5:17)고 하였습니다. 여기에서 욥의 세 친구 엘리바스와 빌닷과 소발은 신앙의 사람이면서도 하나님의 깊으신 뜻을 이해하지 못하고 하나님의 보편적 섭리만을 이해하여 사람이 고난받는 문제를 그의 범죄와 결부시켜서 원인을 규명하였지만 이것이 욥에게는 해당되지 않았던 것입니다. 따라서 그 친구들의 위로와 권면은 욥에게 아무런 효력을 주지 못했습니다.
4. 여기에서 하나님과 욥과 욥의 세 친구 사이에서 빚어진 문제들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1) 하나님은 그의 주권 섭리에 따라 욥에게 고난을 주셨고, 욥은 그 고난의 이유를 알지 못했습니다. 욥이 하나님의 주권 섭리를 이해하지 못한 것은 그의 연약이었습니다(욥 42:1~6).
2) 욥의 세 친구들이 하나님의 뜻을 곡해한 것은 그들의 우매요, 진노의 대상이 되었고(욥 42:7~8), 따라서 욥을 오해하고 괴롭힌 것도 형제간의 불화의 요인을 준 것이었습니다.
3) 따라서 하나님은 항상 완전하시며 욥은 하나님의 섭리를 깨닫지 못한 무리가 있었고(욥 42:3), 욥의 세 친구들은 하나님의 뜻을 곡해하였으며 또 욥을 오해함으로 바른 관계를 취하지 못하였으므로 하나님의 노여움을 사고 있었습니다.
5. 이것을 어떻게 해결하였습니까?
1) 욥은 자기의 무지를 한탄하고, 티끌과 재위에 앉아서 회개하였습니다.
2) 욥의 세 친구는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욥이 보는 앞에서 하나님께 회개하는 표시로 제사를 드렸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과 사람과의 화목을 성취한 것을 의미합니다.
3) 욥은 벗들을 위하여 기도하였습니다. 이 기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그 벗들에 대한 노여움을 푸시고 그들을 기쁘게 받으셨고(8절), 욥에게도 새로운 복을 주셨습니다.
결론적으로 이 말씀에서 깨달아야 할 교훈은 ① 하나님의 주권적 섭리를 믿는 신앙이요, ② 성도는 자신의 무지를 회개하면서 형제를 판단하지 말아야 할 것이요, ③ 형제와의 화해, 하나님과의 화해, 그리고 정의로운 자(욥)의 축복 기도가 타인과 자신에게 복이 되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해 주시는 것입니다.
제44과 전도에 관한 말씀 (행 1:8) 목록으로
과거에도 전도 방법에 대하여 말씀을 드린 일이 있습니다만 이 시간에 또 한 번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1. 전도를 명령하신 가장 적절한 말씀이 지금 읽으신 본문 행 1:8입니다.
1) 많은 사람들이 전도를 “하나님이 주신 지상 명령”이라고 하는데 그 이유는 예수님이 승천하시면서 마지막으로 주신 말씀이므로 이를 유언처럼 받아드리기 때문입니다. 마 28:19~20과 본문 말씀이 다 승천하시기 전에 마지막으로 부탁하신 말씀입니다.
2)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권능을 받고…전파하라” 하셨기 때문에 성령이 임하시는 문제와 권능을 받는 문제에 대하여 아실 필요가 있습니다.
① “성령이 임하신다”는 말씀은 예수님이 살아계실 때에 약속하셨던 것입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신 다음에 성령님을 보내 주실 것에 대하여 여러 차례 약속하셨습니다(요 7:38~39, 14:16, 15:26). 그런고로 그 약속하신 성령님이 오실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약속하신 성령님은 몇 날이 못 되어(행 1:5) 오순절 때에 강림하셨습니다. 오순절은 예수님이 부활하신 후 50일째 되는 날이며 예수님은 부활 후 40일을 계시다가 승천하셨기 때문에(행 1:3) 결국은 예수님이 이 말씀을 하신 후 10일 만에 성령님이 오신 것입니다.
② 이 때에 강림하신 성령님은 지상에 상주하실 성령님을 의미합니다. 성령님은 성도의 마음속에 항상 내주하시고, 또 수시로 역사하셨지만 그 보좌를 지상에 두시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오순절에 오실 성령님은 성도의 세계에 상주하심과 동시에능력으로 크게 역사해 주실 것을 나타내신 것입니다.
③ 이 명령을 받은 제자들은 오순절 때에 그 성령을 받고, 나가서 능력 있는 전도를 하였습니다.
2. 오늘날 우리가 받아야 할 권능이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1) 우리는 오순절 이후에 사는 성도들이기 때문에 오순절 때처럼 처음 강림하신 성령님을 다시 강림하시게 하는 줄로 아시면 안 됩니다.
2) 그 대신 강림하여 계신 성령님이 우리들에게 충만하게 역사하시기를 소원하는 것입니다. 엡 5:18을 보시면 “오직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고 하셨습니다. 이 성령 충만을 받는 것이 바로 권능을 받는 것입니다.
3) 어떤 이는 이 권능이란 의미를 무슨 기적을 행하는 능력처럼 착각하는 경우가 있으나 기적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므로 사람이 욕심낼 일이 못 되는 것입니다. 초대 교회 당시에는 기독교의 기초 수립을 위하여 제자들(또는 사도들)에게 특권을 주신 일이 있었지만(마 10:1, 막 16:17) 성경이 완성된 이후에는 그런 특권을 받아 나타낸 일이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오늘날도 기도를 통한 하나님의 특별 섭리로 병 고침을 받는 일은 있으나 사람이 병 고치는 능력을 받아서 시행하는 사역자는 한 사람도 없음을 아셔야 할 것입니다(병 고침의 은사란 특별 섭리를 의존하는 기도와 의료 기술을 의미함. 고전 12:9).
4) 따라서 성령 충만으로 우리가 받아야 할 권능은 바로 성경 진리의 지식이며 또 진리를 실천하는 생활이며 사랑과 덕을 세우는 능력이고, 봉사, 충성, 희생하는 능력이며 또 그리스도의 인격적 향기를 드러내는 능력입니다(딤후 3:5, 경건의 능력).
3. 전도의 대상은 “예루살렘과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가서 하라” 하셨으니 이 말씀은 적극성을 띠우되 가까운 곳, 가까운 사람으로부터 시작하여 먼 곳, 먼 사람의 순으로 전도하라는 말씀입니다. 따라서 저희들은 믿음 없는 가족, 믿음 약한 사람들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가지시고 기도하며 봉사하며 노력하셔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먼 곳의 전도는 선교사들이 나가서 할 수 있도록 기도와 물질로 돕는 일도 아울러 시행하셔야 하겠습니다.
제45과 성도의 7 가지 덕 (살전 5:12~15) 목록으로
이 시간에는 “성도의 7 가지 덕”이란 제목으로 교훈을 받겠습니다. 지금 읽으신 말씀은 바울 사도께서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에게 주신 말씀입니다.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은 본래부터 “믿음 생활의 덕”이 있었다고 칭찬하셨습니다. 저희들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해서 이 말씀에 나타난 7 가지 덕을 꼭 실행하여야 하겠습니다.
1. 교회의 지도자들을 알아주고 존경하는 것입니다. 본문 13절을 보시면 “형제들아 우리가 너희에게 구하노니 저희 가운데서 수고하고, 주 안에서 너희를 다스리며 권하는 자들을 너희가 알고, 저의 역사로 말미암아 사랑 안에서 가장 귀히 여기라”고 하셨습니다. 교회 안에서 수고하고 다스리고 권하는 자들은 교역자들과 장로님들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교회의 성도님들은 자기 교회의 교역자들과 장로님들을 존경하고 그 수고를 알아주셔야 하는 것입니다. 여기의 “수고를 알아준다”는 뜻은 무엇보다도 존경하고 그 지도에 복종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어떤 때는 당회의 지도가 공평치 못하거나 지혜롭지 못하게 여겨질 때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것은 개인이나 몇 사람의 생각이 그런 것 뿐이요, 당회는 여러 가지 사항을 종합적으로 참작하여 결정하는 것이기 때문에 개인의 생각보다 오히려 합리적이란 것을 아셔서 항상 복종하셔야 하는 것입니다. 또 수고하는 모든 사람들의 수고를 알아주고 존경하는 성도가 되셔야 합니다.
2. 너희끼리 화목하라고 하셨습니다.
성도간의 화목은 필연적인 일입니다. 성도는 다 하나님의 자녀들이요, 또 천국의 시민이며 한 권속이기 때문입니다. 혹 성도 간에 서로 피해를 준 관계로 화목을 이루기 어려운 문제가 있다면 서로 책임을 다하려는 노력과 함께 공의로우신 하나님께서 판단해 주실 것을 믿음으로 하나님께 맡기고 서로 화목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만일 사람이 원수를 갚는 것처럼 보복을 한다면 하나님은 그 일에 대하여서도 또 판단하실 것입니다. 따라서 성도는 오직 사랑만 실천하고 모든 성도들과 화목 하는 생활을 하셔야 하는 것입니다.
3. 규모 없는 자들을 권계하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의 “규모가 없다”는 뜻은 단체 생활의 규범을 지키지 않는 개인 행동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교회 단체 안에서는 단체의 법, 즉 교회의 헌법을 순종해야 합니다. 이것은 교회의 질서를 유지하는데 필요한 것입니다. 질서와 규모가 없는 교회는 하나님의 기업으로서 칭찬받을 가치가 없습니다. 따라서 좋은 교회 좋은 신앙인이 되시려면 꼭 교회의 법을 지켜서 규모를 유지하여야 합니다.
5. 힘이 없는 자들을 붙들어 주라고 하셨습니다. 힘이 없는 자를 붙들어 주려면 먼저 자신이 힘 있는 자가 되셔야 할 것입니다. 지식의 힘, 실천의 힘, 기도의 힘, 봉사의 힘 등 모든 힘을 갖고 도와주셔야 하며
6. 모든 사람을 대하여 오래 참되 이웃의 부족함이나 손해를 보임에 대하여서도 오래 참을 수 있음이 바로 사랑을 실천함이 되기 때문이요(고전 13:4, 7),
7. 악을 악으로 갚지 말고 항상 선을 쫓으라고 하신 것입니다. 이것은 형제 화목과 관련해서 말씀드렸습니다만 어떤 사람에게도 악을 악으로 보복해서는 안 되며 개인을 대하든 단체를 대하든 “항상 선을 좇으라”고 하셨습니다.
성도가 그 이웃에 대하여 바른 덕을 세우지 못하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없습니다. 따라서 이상의 일곱 가지 덕을 세우도록 노력하셔야 할 것입니다.
제46과 성도의 7 가지 필수적 생활 (살전 5:16~22) 목록으로
이 말씀에서는 “성도의 7 가지 필수적인 생활”을 말씀해 주셨습니다.
1. “항상 기뻐하라”는 것입니다. 성도에게 기쁨이 없으면 아무에게도 신앙 생활의 가치를 말할 수 없게 될 것입니다. 또 기쁨을 가지려면 그만한 기쁨의 근거가 있어야 합니다. 성도가 갖는 기쁨의 근거는 믿음에서 나오며 믿음이란 곧 하나님을 발견한 보람입니다. “천국은 마치 밭에 감추인 보화와 같으니 이를 발견한 후…기뻐하여 돌아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밭을 샀느니라”(마 13:44)고 하셨습니다. 이렇게 진리를 발견해야만 기쁨이 솟을 수 있습니다.
2. “쉬지 말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기도를 쉬지 않는다”는 것은 기도가 생활화 되어 있어야 하고, 습관이 되어 있어야 하며 작정한 기도를 연속할 수 있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성경에 경건한 성도들이 매일 시간을 정하고 기도한 사례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새벽에(막 1:35, 11:19), 다니엘은 하루에 세 번씩(단 6:10), 고넬료는 제 9시 기도 시간에(행 10:2~3), 우리는 매일 새벽에 기도회를 갖습니다. 이런 기도를 꾸준히 하는 것이 쉬지 않고 하는 것입니다. 마귀의 유혹은 쉬는 시간이 없습니다.
3. “범사에 감사하는 일”입니다. 여기의 범사란 죄를 제하고는 다 감사한다는 뜻입니다. 고난에 대하여도 감사할 수만 있다면 이를 성취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성도에게 고난을 주시는 것은 모두 유익하게 하시기 위함임을 아셔서 꼭 감사하시기를 바랍니다. 시 119:71에서 고난으로 깨달음을, 또 11:67에서 고난으로 바른 실천을, 또 롬 5:3에서는 환난으로 연단을, 시 50:14에서는 감사로 기도의 응답을 주신다고 하셨습니다. 이 얼마나 귀한 일입니까? 그리고 성도에게는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어 주시는 궁극적 유익”이 있고 희망이 있기 때문입니다(롬 8:28).
4. “성령을 소멸치 않는 것”입니다. 성령님은 항상 우리와 함께 계셨고, 또 역사해 주십니다(마 28:20, 창 18:15). 그런데 만일 성도가 믿음으로 경성하지 않으며 예배(찬송, 기도, 성경) 활동을 하지 않으며 열심히 하나님의 일에 힘쓰지 않으며 또는 하나님의 일을 거역한다면 성령님은 그 역사를 중지하시는 것입니다. 만일 성령님이 하나님의 길로 가시는데 성도가 자기의 길로 간다면 성령님이 따라오시면서 도와 주시겠습니까? 그렇지 못한 것입니다. 따라서 성도가 하나님의 뜻을 따를 때 성령님이 역사하시므로 소멸을 면할 수 있는 것입니다.
5. “예언을 멸시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이 예언이란 하나님의 말씀을 증언함을 의미합니다. 옛날에 하나님의 말씀을 처음 받아 전할 때 그 계시의 발표를 예언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기록된 성경을 풀어 가르치는 것이 곧 예언입니다. 따라서 “이 예언을 멸시한다”는 것은 설교를 성의없이 듣는 것이고, 진리를 위엄있게 받지 않는 태도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진리의 말씀을 가볍게 받는 것은 곧 하나님을 경홀히 여기는 태도이므로 이런 경우에 은혜를 받을 수 없을 것입니다.
6. “범사에 헤아려 좋은 것을 취하라”고 하셨습니다. 우리 주위에는 선악이 혼돈되어 있으므로 신앙에 관한 것이나 윤리에 관한 것이나 바른 것을 택하여 취할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판단하고 선택하려면 지각을 사용하여 선악을 분별하는 장성한 신앙인(히 5:14)이 되셔야 하고, 또한 영광되고 생산적이며 유익한 것만 취하는 성도가 되셔야 하고,
7. 마지막으로는 “악은 모양이라도 버려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모양이라도 버린다는 말씀은 악을 굉장히 증오한다는 뜻입니다. 성도가 이런 악을 멀리 하려면 현실적 가치관에서 신령적 가치관으로 마음을 돌려야 할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내 소유는 물질이나 명예나 현실적 욕구가 아니고 오직 하나님의 뜻을 따르고 하나님의 법도를 지킨 생활이란 것을 다짐하여야 하는 것입니다(시 119:56).
이 일곱 가지 필수적 생활을 꼭 성취하도록 노력하는 저희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제47과 범사에 감사하라 (살전 5:16~18) 목록으로
추수감사 주일을 앞두고 있기 때문에 “범사에 감사하라”는 제목으로 교훈을 받겠습니다. 본문 말씀은 바울 사도께서 데살로니가 교회의 성도들에게 보내신 편지의 말씀입니다. “데살로니가”는 헬라의 북쪽에 있는 “아덴” 다음가는 큰 도시입니다. 바울 사도께서 2차 전도 여행시에 그 곳에 가셔서 복음을 전하셨습니다. 데살로니가 교회의 성도들은 신앙 생활을 시작하면서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소망의 인내를 나타내어 칭찬을 받은 일도 있었습니다(살전 1:3). 본문 말씀에서는 항상 기뻐할 것과 쉬지 말고 기도할 것과 범사에 감사할 것을 명령하셨습니다. 이 세 가지는 성도의 생활의 기본 자세임을 아셔야 합니다.
1. 저희들은 항상 기뻐해야 하겠습니다.
1) 우선 저희들이 하나님을 경외하게 된 것을 기뻐하여야 합니다. 하나님은 아무나 경외할 수 없습니다. 지식이 있다 하여 지식으로 믿어지는 것도 아니고 명예가 있다 하여 명예로 믿어지는 것도 아니며 인간의 힘으로는 믿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만일 저희들이 하나님을 믿지 않고 사는 상태라면 지금 어떤 입장에 있을 것 같습니까? 물론 안 믿는 자 입장에 있겠지요. 그러나 성경은 “존귀한데 처하나 깨닫지 못하는 자는 멸망하는 짐승같다”(시 49:20)고 하셨습니다. 참으로 하나님을 알게 된 것은 기쁜 일이요, 또 감사하지 않을 수 없는 일입니다.
2) 저희들이 하나님을 알고 믿게 된 것은 하나님이 저희들을 선택하여 불러주셨기 때문입니다(롬 8:30). 그 외에도 죄사함 받고 하나님의 자녀된 후 거룩함을 이루어 영생 얻게 되니 이 얼마나 기쁜 일입니까? 저희들은 이런 일을 생각하면서 밤에도 일어나서 찬송을 부를 수 있어야 합니다.
2. 쉬지 말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쉬지 않고 기도를 하시려면
1) 기도의 맛을 알아야 하고,
2) 기도의 습관이 들어야 하며
3) 어느 곳에서나 마음 속으로 기도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기도는 하나님과의 대화입니다. 참으로 보람있는 일이요, 또 기도의 습관이 들려면 새벽 기도를 낮 삼아 다닐 수 있어야 할 것이요, 어느 곳에서나 기도를 하려면 늘 경건한 마음을 가져야 할 것입니다. 꼭 기도를 통해서 큰 은혜를 받으시기 바랍니다.
3. 범사에 감사하는 일입니다. 성도가 범사에 감사할 수 없다면 복을 받았어도 부족하여 감사를 못합니다. 그러나 믿음이 조금 자라면 복 받은 은혜를 깨닫고 감사할 수 있습니다. 감사는 은혜를 더 많이 받게 되는 방법입니다(고후 9:12). 하나님은 감사하는 자에게 은혜를 더 주시기 때문입니다. 눅 17:19을 보시면 열 사람의 문둥병자가 예수님 앞에 찾아와서 병 고침 받기를 구했을 때 예수님이 그들의 병을 다 고쳐주셨습니다. 고침을 받은 자들은 감사하는 일을 생각하지 못하고 돌아가다가 그 중 한 사람만 돌아와서 감사를 드렸습니다. 그랬더니 예수님께서 “열 사람이 다 깨끗함을 받았는데 그 아홉 명은 어디 갔느냐” 하시고 그 한 사람에게 이르시되 “네 믿음이 너를 구원 하였느니라” 하심으로 깨끗함을 받은 것 외에 “구원의 은혜를 하나 더 주신 것입니다. 이것은 감사하는 자에게 복을 더 주신다는 증거를 보여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많은 성도들이 복된 일과 좋은 일이 있을 때마다 감사 헌금을 드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지막으로 중요한 것은 좋은 일에 감사하기는 쉬우나 어려운 일이 있을 때와 고난이 있을 때에는 감사하기가 어려운 것입니다. 그러나 고난이 성도에게 다 해로운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은 고난으로 성도를 깨우쳐 주시고 연단시키시는 섭리가 있음을 확실히 믿으시고(롬 5:3, 시 119:67, 71) 고난을 믿음으로 극복하면서 감사를 할 수 있다면 이것은 믿음의 큰 발전도 되려니와 ”범사에 감사하라“하신 말씀을 지키는 일이 되어 더 큰 영광을 돌리게 되는 것입니다.
아무쪼록 모든 일에 감사하면서 이번 추수감사절에도 성실하게 감사의 예물을드리는 저희들이 되셔야 하겠습니다.
제48과 하나님과 화목하여 복을 받음 (욥 22:21~30) 목록으로
이 시간에는 “하나님과 화목하여 복을 받음”이란 제목으로 교훈을 받겠습니다. 이 말씀은 욥이 한 말이 아니고, 욥을 권면하러 온 엘리바스가 욥에게 권면한 말씀입니다. 21절을 보시면 “너는 하나님과 화목하고 평안하라 그리하면 복이 네게 임하리라”고 하셨습니다.
1. 하나님과 화목하는 방법이 무엇일까요?
1) 하나님의 말씀을 받는 것입니다. 어른의 말씀을 잘 듣는 자가 그 어른을 공경하는 자인 것처럼 성도가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하고 듣고 연구며 또 마음에 간직할 때 이것이 바로 하나님과 화목하는 것임을 아셔야 하는 것입니다. 22절 말씀이 바로 그 뜻입니다.
2) 모든 불의를 멀리하는 것입니다. 죄를 짓고는 하나님과 화목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순결하시고 또 공평한 길 가운데로 다니시기 때문에 만일 성도가 죄에 거한다면 하나님을 가까이 할 수도 없을 것입니다. 성도가 “하나님께로 돌아간다”는 뜻은 바로 그의 장막에서(평상시의 생활에서) 불의를 멀리하는 것입니다. 거리낌 없이 사는 것이 하나님과 화목하는 생활입니다.
3) 하나님보다 더 중요하게 생각하였던 것들을 다 버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자기보다 더 사랑하는 것이 있을 때에 질투하신다고 하셨습니다. 또 그런 것들을 의지할 때에 역시 그것을 없애신다고 하셨습니다(출 20:5, 사 3:1~3). 그런데 인간이 가장 의지하는 것은 물질이고, 그 당시에 가장 값진 보석이 “오빌”에서 수입해 온 금이었습니다. 성도가 보석을 좋아하거나 물질을 의지한다면 그것은 바른 신앙이 못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보배를 진토나 강가의 돌에 버리라”는 것입니다. 진토나 강가의 돌에 버림은 다시 회수할 수도 없고, 잊어버리게 하기 위함입니다. 따라서 하나님과 화목하는 자는 하나님보다 더 귀한 것이 있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이렇게 말씀을 받고 불의를 멀리 하고 하나님만 의지하여 인간이 숭상하고 의지하는 재물을 버리면 이것이 곧 하나님과 화목하는 것인데
2. 이런 성도에게 어떤 복을 주시는가 하면
1) 우선 평안의 복을 주십니다. 이 평안은 하나님이 주시는 것입니다. 재물과 명예를 갖고도 평안치 못할 수도 있고, 가난과 질병을 갖고도 평안 할 수가 있으니 이 평안의 복을 받고 사는 사람이 행복한 것입니다. 이런 평안을 예수님이 주신다고 요 14:27에서 말씀하셨습니다.
2) 다시 흥하게 하신다 하였습니다. 그 당시에 욥은 망한 지경에 있었습니다. 성도는 흥한다는 뜻을 물질이나 현실에 국한하지 마시고, 믿음의 부흥에 두셔야 합니다. 하나님과 화목하면 하나님이 화를 복으로 바꾸어 회생되고 부흥되게 해 주실 수 있는 것입니다.
3) 하나님 자신이 물질의 보장이 되어 주신다고 하셨습니다. 성도가 재물을 의지하지 않고 하나님만 의지하면 만물의 주인 되시는 하나님이 그에게 물질(은, 금)이 되셔서 필요한대로 주실 수 있는 것입니다(25절).
4) 기도의 응답을 잘 해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로 얼굴을 들 수 있다”는 말씀이나 “너는 그에게 기도하겠고 그는 들으실 것이라”는 말씀이 바로 기도를 응답하신다는 말씀입니다. 또 기도 응답의 결과로서 네 가지를 열거해 주셨는데
① 서원한 것을 갚을 수 있도록 해 주시고,
② 무엇을 경영할 때 잘 되게 해 주시며
③ 자신을 낮추어도 오히려 존귀해지도록 하신다 하셨고,
④ 혹 죄가 있어도 용서해 주시고 구원해 주신다고 하신 것입니다.
따라서 저희들은 내가 어떻게 되는 것을 염려하지 마시고, 하나님과 화목하는 문제만 중요한 일로 생각하셔서 성경을 배우는 일에 몰두하시고, 죄를 멀리 하는데 힘 쓰시며 현실적인 모든 것들 중에서(물질이나 사람이나) 하나님처럼 의지하는 것이 없도록 노력하는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제49과 성도의 세 가지 죄 (욥 42:1~6) 목록으로
이 시간에는 “성도의 세 가지 죄”란 제목으로 교훈을 받겠습니다.
1. 먼저 지금 읽으신 말씀은 욥이 자신의 무지한 말을 회개하는 내용입니다. 그가 무지하지 않았다면 무지한 말을 함부로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따라서 무지함은 곧 죄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욥이 의롭게 산 것은 사실이요, 또 욥에게 고난을 주신 것이 그의 죄 값으로 주신 것이 아님도 사실입니다. 그러나 욥이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았지만 자신의 고난 당함이 하나님 앞에 마땅치 않은 줄로 착각한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무슨 경영이든지 못 이루실 것이 없는 분임을 나중에야 깨닫고 회개를 한 것입니다. 그래서 욥은 본문 3절에서 “무지한 말로 이치를 가리운 죄”, “스스로 깨달을 수 없는 일을 말한 죄”를 회개하였습니다. 저희들은 흔히 모르는 것은 죄가 아닌 줄로 여기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나 자신의 무지가 곧 죄란 것을 아셔야 합니다. 하나님은 “진리를 날마다 묵상하고 배우라” 하셨고(시 1:1, 딤후 3:14), 또 호세아 선지자도 “내 백성이 지식이 없으므로 망한다”(호 4:6) 하셨으며 예수님도 십자가에 돌아가실 때 “저들의 죄를 용서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일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라고 하셨습니다. 욥도 처음에는 자신의 의로운 것만 생각하고 하나님의 오묘한 경륜과 이치에 대하여는 무지하였다가 나중에 그 사실을 깨닫고 자신의 무지를 회개한 것입니다. 욥이 무지의 죄를 깨달았을 때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삽더니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의 “눈으로 주를 뵈옴”은 하나님의 형상을 보았다는 뜻이 아니고,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체험적으로 깨달은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저희들은 우선 이 무지의 죄를 줄이기 위하여 노력하셔야 하겠습니다.
2.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는 죄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는 것을 죄가 아니라 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얼마나 큰 죄인가에 대하여 모르는 사람이 많을 것입니다. 삼상 15:23에서 “거역하는 것은 사술의 죄와 같고 완고한 것은 사신 우상에게 절하는 죄와 같다”고 하셨습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말씀을 불순종하면 안 믿는 것이나 다름이 없고 우상 숭배에 머물러 있는 것과 다름이 없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말씀을 순종하는 사람이 곧 예수 믿는 사람임을 알 수 있습니다. 저희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할 때 무조건 순종하는 습관을 길러야 합니다. 이것은 마치 베드로가 “물 위로 걸어오라” 하신 말씀을 듣고 물에 빠질 것을 염려하지 않은 채 뛰어든 것처럼 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순종은 “가나” 혼인집에서도 나타났습니다. 혼인집 하인들은 그렇게 순종해야 할 것을 미리 교육받았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명령이 내렸을 때에 무조건 돌항아리를 가져왔고, 또 물을 길어 부었고, 또 그것을 연회장에게 갖다 주었습니다. 이 때에 하나님의 기적으로 물이 포도주로 변하지 않았습니까? 그런고로 저희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전폭적으로 순종하지 못하는 죄를 회개하여야 할 것입니다.
3. 하나님께 충성을 잘 하지 못하는 것을 죄로 아셔야 하겠습니다. 충성은 믿음의 본질이기도 하며 성도의 의무요, 가장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방법입니다. 믿음이란 원문(피스티스)에 충성이란 의미도 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께 충성하는 것이 믿음과 같은 뜻입니다. 또 성경에는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계 2:10)고 명하셨습니다. 성도의 사명이 지상에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드리는 것”일찐대(주기도문에 그 말씀이 있음) 그 뜻을 성취해 드리기 위하여 크게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만일 이 사명에 나태한다면 죄를 피할 수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충성에 나태한 자에게 “악하고 게으른 종”이라고 하시면서 크게 문책하신 일도 있습니다(마 25장).
결론적으로 저희들은 항상 무지와 불충함을 회개하면서 배우고 복종하고 충성하는 일을 더욱 잘 하도록 노력하셔야 하겠습니다.
제50과 우리의 사랑 진단 (마 5:43~48) 목록으로
이 시간에는 “우리의 사랑 진단”이란 제목으로 교훈을 받겠습니다. 우리가 사랑을 어느 정도 실천할 수 있는가를 생각하면서 사랑의 힘을 키우고자 하는데 이 말씀 증언의 목적이 있는 것입니다.
1. 먼저 본문 말씀을 살피겠습니다.
1) 47절에서 예수님은 그 당시의 율법 교사들이 율법을 잘못 가르친 것을 교정해 주셨습니다. 그 잘못 가르친 것은 “원수를 사랑하라 하지 않고 반대로 미워하라”고 가르친 것입니다. 그 이유는 율법에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씀이 있으나(레 19:18) 그들은 “눈은 눈으로 갚고 이는 이로 갚으라”(신 19:21)는 말씀, “평생에 그들의 평안과 형통을 구하지 말라”(신 23:6)는 말씀을 잘못 이해하여 가르쳤기 때문입니다. 여기의 “이는 이로 갚으라”는 뜻은 “재판관이 범죄량대로 벌하라”는 뜻이고, 또 “평안을 구하지 말라”하신 것은 하나님이 저주하신 자에 대하여 그렇다는 뜻입니다. 이렇게 말씀을 잘 가르치고 잘 배워야 함이 중요합니다.
2) 원수를 사랑하라고 하셨습니다. 이는 곧 44절의 핍박자를 위하여 기도하라는 말씀입니다. 저희들이 핍박을 받지 않고 사니까 신앙의 원수가 마귀 외에는 있을 수 없지만 혹 자신을 해롭게 하거나 대적하는 자가 생겼을 경우에 그를 원수로 여겨서도 안되며 오히려 사랑하고 기도해 주어야 할 것입니다.
3) 원수를 사랑함에 있어서 하나님의 넓은 사랑을 생각하라고 하셨습니다. 그 말씀이 곧 하나님은 악인이나 의인에게도 햇빛과 비(즉 자연의 은혜)를 차별없이 주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이러한 넓은 사랑을 생각하시면서 원수를 사랑할 수 있어야 합니다.
4) 세리나 이방인의 사랑 실천보다 더 나아야 하지 않겠느냐고 하신 것입니다. 세리는 토색하는 자요, 이방인은 하나님도 모르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들도 그들의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고 있고, 또 그들의 형제에게 문안을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성도가 사랑의 정도를 그들보다 훨씬 초과하지 못하면 그들과 다를 바가 없으므로 상을 받지 못하는 것입니다.
5) 이런 사랑의 실천이 가능해질 때 하나님의 온전하심처럼 온전해 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온전하다는 것은 바로 사랑의 실천력에서 인정받게 됨을 알 수 있습니다.
2. 그러면 우리가 사랑을 어떻게 해야 잘 실천할 수 있을까요?
1) 우선 사랑의 중요성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① 사랑은 최고의 은사입니다(고전 12:31).
② 사랑은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입니다(마 22:39~40).
③ 사랑은 상급의 척도라고 하셨습니다(마 25:32~46). 사랑은 이렇게 귀합니다.
2) 그런데 이 사랑을 실천함에 있어서 사랑하기 어려운 대상(미운 자, 죄인, 해롭게 하는 자 등)을 사랑하기란 참으로 어려운 것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사랑 실천은 선생하기 보다도 돈을 벌기보다도 정치하기 보다도 설교하기 보다도 출세하기 보다도 더 어려운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3) 그래서 이 사랑의 실천을 단계적으로 노력해야 하겠습니다.
① 우선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고, 사람을 미워하는 마음이 없어져야 합니다.
② 자신을 하나님의 사랑 실천의 사자라고 생각해야 하며
③ 사랑의 단계를 실행 할 때 먼저 상대를 이해해 주고 다음에 용서해 주고 다음에 긍휼히 여겨주고, 다음에 봉사해 주며 다음에 그를 위하여 자신을 희생할 수 있는 단계로 올라가야 할 것입니다.
④ 사랑의 대상을 정할 때 보이는 사람에서부터 보이지 않는 하나님으로 나가야 하며
⑤ 또 가장 사랑하기 쉬운 대상에서부터 시작하여 사랑하기 어려운 대상으로 전진하여야 할 것입니다. 가족, 친척, 이웃에서 시작하여 대립자, 경쟁자, 원수, 핍박자로 나가는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우리의 사랑 실천 능력이 어느 정도인가를 반성하면서 사랑의 실천력을 달라고 하나님께 은혜를 구해야 하겠습니다.
제51과 낙망하지 않는 신앙 (시 42:1~5) 목록으로
지금 읽으신 말씀 5절을 보시면 “네가 어찌하여 낙망하며 어찌하여…불안하여 하느냐”는 말씀이 있습니다. 이 말씀에 근거하여 “낙망하지 않는 신앙”이란 제목으로 교훈을 받겠습니다.
1. 우선 본문 말씀을 살펴보셔야 하겠지요.
이 말씀은 “고라 자손의 노래”라고 되어 있습니다(작은 글씨의 “마스길”은 교훈이란 뜻이고, “영장”이란 곡조 이름입니다). “고라”란 이름은 출애굽 때 광야 길에서 모세와 아론을 반역한 고라당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민 16:1~33에 보시면 그들이 땅이 갈라져 죽은 일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후손들이 약 500년 후에 다윗을 섬긴 일이 있고(대상 12:1, 6:18~23), 또 본문에서 이 시를 읊었습니다. 그러나 어떤 학자들은 이 시가 다윗의 시인데 고라 자손들이 그것을 애용하고 보관했다는 사람도 있습니다.
1) 1절에서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 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나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성도는 하나님의 말씀과 은혜를 이 세상의 좋은 것들 보다 더 사모해야 하겠습니다. 그럴 수가 있는가 하시겠지만 은혜 받으면 꼭 그렇게 체험할 수 있습니다.
2) 2절에서는 “내 영혼이 하나님만 갈망하는데 어느 때에 하나님 앞(성전)에 나가서 뵙겠느냐”고 하신 것입니다. 그 당시에 어떤 재난으로 성전에 나갈 수 없었던 모양입니다(다윗이 사울에게 쫓기거나 블레셋에 가 있을 때 또는 그 민족이 바벨론에 포로로 되었을 때 등에는 성전에 갈 수가 없었겠지요). 그래서 몹시 안타까워 한 것입니다. 옛날 구약 시대에는 예루살렘에 성전이 하나만 있었고, 거기에 가서만 제사드리고 신앙 생활의 중심을 그 곳에 두었습니다.
3) 3절에서는 이웃의 사람들이 자신(저자)을 불행한 자로 여기면서 “너의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고 비난하므로 마음이 아파서 주야로 눈물이 난다는 것입니다. 믿음의 성도는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우는 것만큼 안타까운 것은 없습니다. 자신이 고생해도 하나님의 이름만 영화로워진다면 좋을 것입니다.
4) 4절에서는 이 저자가 과거에 무리를 인도하여 하나님의 성전에 나가 찬송하며 영광돌린 사실을 기억하면서 마음이 상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 “마음이 상한다”는 것은 자신이 “연약해지는 증상”을 나타낸 표현입니다.
5) 그러나 5절에서 다시 자기를 가다듬으며 그 연약 상태를 회복하는 고백을 나타냈습니다. 그 고백이 바로 “내 영혼아 왜 낙망하며 불안하여 하느냐 하나님을 바라고 또 그의 도우심을 받아 오히려 찬송을 하여야 할 것이라”고 한 것입니다.
2. 인간이 고독하고 고통이 있을 때에 낙망이 없을 수 없겠지만 성도는 이럴 때 일수록 하나님을 의지하고 낙망을 하지 않는 생활을 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믿는 사람과 안 믿는 사람의 다른 점이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낙망을 모르는 생활이 자유하는 믿음입니다. 그러면 이 낙망하지 않는 신앙을 어떻게 가져야 할까요?
① 하나님만 바라는 것입니다(5절). 많은 성도들이 하나님을 소망의 대상, 의지의 대상으로 바라지 않고 다른 것 즉 세상 사람들이 좋아하는 것들을 바라다가 낙망을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진실하시고, 영원히 변함이 없으시며 공의로우신 분입니다. 그래서 그 하나님께만 소망을 둘 때에 낙심하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② 생활의 목적과 방법을 하나님 뜻에 두어야 합니다. 하나님 뜻대로 살아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데 삶의 전체를 모으란 뜻입니다. 그렇게 하지 않는 것을 “자율주의”라고 하는데 이 자율주의는 신앙이 아닙니다.
③ 경건 생활을 꾸준히 하셔야만 시험에 들지 않습니다. 성수주일, 예배드리는 일, 기도하는 일, 성경 배우는 일 등을 꾸준히 하는 습관을 길러야 합니다. 여기에 틈을 두면 마귀가 역사를 하기 때문입니다(엡 4:27).
아무쪼록 하나님께만 소망을 두고 목적과 방법도 하나님 뜻에 두고, 경건 생활을 꾸준히 하여 낙망의 유혹을 막아야 할 것입니다.
제52과 성탄의 의미 (요 1:14) 목록으로
성탄 주간이기 때문에 “성탄의 의미”란 제목으로 교훈을 받겠습니다. 성탄이란 예수님이 세상에 탄생하신 것을 의미하고, 성탄의 의미란 성탄에 대하여 바른 지식을 갖고 바른 신앙적 태도를 나타냄으로 성탄의 목적에 바른 자세를 갖는 것입니다.
1. 성탄의 의미를 이해함에 있어서
1) 성탄은 예수님이 이 세상에 탄생하신 것이지만 그 예수님이 보통 사람으로, 또 보통 방법으로 오신 것이 아님을 아셔야 할 것입니다.
① 예수님이 이 세상에 탄생하신 것은 인류 타락 이후 계속 예언되었던 일이요,
② 예수님은 그 신분이 하나님의 아들이신 점과 완전한 인간의 속성을 겸하여 오신 것과
③ 보통 사람처럼 태어나신 것이 아닌 성령님의 잉태케 하신 역사로 부정모혈에 힘입음 없이 태어나신 것이며
④ 이렇게 동정녀에게 탄생하신 것은 인간의 죄와 상관없이 오셔야 하기 때문입니다.
⑤ 또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신 목적은 택한 백성들의 죄를 인간적, 신적 고난으로 대신 짊어지시기 위함입니다. 이상의 말씀에서 저희들은 예수님의 신분과 탄생 경위와 탄생 목적을 말씀드렸습니다. 이것을 알지 못하면 성탄절을 지키는 아무런 유익이 없기 때문입니다. 지금도 많은 불신자들은 예수님의 신분과 오신 경위와 목적을 모르는 상태에서 성탄을 즐겁게 노는 절기로 아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2. 예수님이 신인 양성으로 오셔야 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1) 예수님이 신성으로 오셔야 하는 이유는
① 영원 전부터 말씀으로 존재하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이요,
② 또 그 신성을 가지고 오셔서 능력을 나타내셔야만 믿을 수 있고, 부활하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3. 예수님이 동정녀에게 탄생하셔야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이것은 인간의 부패한 피를 받아서는 안 되기 때문입니다. 타락한 인간은 죄의 부패성이 피로 더러워졌고, 또 피로 전가되었기 때문에 만일 순결하신 예수님이 인간의 피를 받아 태어나신다면 그 순결을 더럽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죄 없는 순결한 인간”, 또 “영원한 생명”, “하나님의 독생자의 신분”이 아니면 택한 모든 백성들의 죄를 대속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4. 본문 말씀에서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셨다”는 뜻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로서 영원 전부터 말씀으로 존재하셨는데 그 분이 사람의 육신을 입으시고 사람이 되셔서 인생들과 함께 세상에 거하신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영으로 존재 하시기 때문에 본래 형상이 없으셨습니다. 따라서 “말씀으로 존재하셨다”는 뜻은 인격과 지혜와 능력으로 존재하신 상태를 말씀하신 것입니다. 또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라 하심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독생자이심을 나타내셨음을 뜻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다”는 것은 예수님이 바로 은혜와 진리의 주인공으로서 은혜는 베푸시는 복이 많음을 뜻하고, 진리는 참됨과 말씀(성경)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은 은혜를 베푸시는 분이고, 참 되신 분이며 하나님의 독생자인 것입니다. 그런 분을 우리에게 보내셨으니 얼마나 기쁜 일입니까?
5. 마지막으로 성탄절을 맞이하는 저희들은
1) 예수님을 보내주신 하나님께 감사하고,
2) 예수님의 신분과 세상에 오신 목적을 확실히 아신 후
3) 믿음으로 구원을 받고,
4) 예수님을 본받으며
5) 예수님의 구속 사업에 깊이 감사하고,
6) 이 은총의 소식을 널리 전하는 사명을 이루며 살아야 할 것입니다. 아울러 이번 성탄절을 맞이하여 은혜와 진리가 충만한 성도님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제53과 반성과 결심 (롬 12:10~21) 목록으로
연말이 되고 신년을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빠르게 지나간 한 해 동안의 생활을 반성하고 새 출발할 것을 결심하는 뜻으로 “반성과 결심”이란 제목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1. 본문 말씀에서
1) “부지런하며 게으르지 말라”(11절)고 하셨습니다. 피곤하게 사신 분들도 많겠지요? 그러나 그 피곤한 생활 속에도 꼭 할 일을 하여 피곤한 것과 텔레비전을 보는 등 소비 생활로 피곤한 경우도 있을 것입니다. 되도록이면 소비 생활로 피곤과 낭비를 초래하지 마시고, 보람 있는 일에만 근면하셔야 하겠습니다.
2)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라”고 하셨습니다. 일 중에 가장 보람 있는 일은 주님을 섬기는 일입니다. 주님을 섬기는 일은
① 예수님을 잘 믿는 것입니다. 요 6:29에서는 “보내신 자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라”고 하셨습니다.
② 교회 일에 충성하는 것이요,
③ 복음 사역자를 돕는 일입니다. 이런 일들을 지난 날에 얼마나 열심히 하셨는지를 반성하셔야 하겠습니다.
3) “소망 중에 즐거워하는 것”입니다(12절). 짜증내면서 살아온 일은 없습니까? 저희들은 하나님을 모시고 사는 성도들이요, 하나님의 자녀들이기 때문에 무슨 일에도 소망이 아닌 것은 없습니다. 쉽게 말해서 환난과 죽음도 소망입니다. 내 뜻대로 안 된 것은 주님 뜻대로 된 것이기 때문에 더욱 소망스러운 것입니다. 이런 믿음을 가지고 살지 못한 것이 있으면 또 반성하셔야 하겠습니다.
4) “환난 중에 참는 것”입니다. 성도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할 것이라고 바울 사도께서 말씀하셨습니다(행 14:22). 이 환난은 세상에 마귀의 역사가 많기 때문에 불가피한 것입니다. 그리고 성도는 환난을 당할 때 예수님을 생각하면서 참고 사도들을 생각하면서 참고, 또 순교자들을 생각하면서 참고 인내가 성령의 열매인 것을 생각하면서 참고, 또 내세의 상급을 생각하면서 참는 습관을 길러야 할 것입니다. 환난이나 괴로운 일에 얼마나 참으면서 살았는지를 반성해 보아야 하겠습니다.
5) “기도에 항상 힘쓰며”라고 하셨습니다. 기도에 항상 힘쓰셨습니까? 기도는 자신이 시험에 들지 않는 방법에서부터 전도하고 하나님의 일을 하는 모든 방법에 이르기까지 크게 유익한 것이고, 또 성도의 사명이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물론 기도를 힘쓰신 성도님들이 계신 것을 압니다만 혹이라도 기도를 많이 못하신 분들은 깊이 반성하시고 새해부터 수요일 기도회나 새벽 기도회나 또는 집에서 시간을 정하시고 꼭 기도에 힘쓸 것을 결심하시기 바랍니다. 기도의 보람을 아셔야 합니다.
6) “성도들의 쓸 것을 공급하는 구제”입니다(13절). 이것은 저희들이 넉넉하지 않아 구제를 많이 못하지만 항상 우리보다 못한 사람들을 의식하면서 근검절약하고, 또 어려운 사람들에게 다소나마 유익하도록 도와주면서 사는 생활을 하자는 것입니다. 조금씩 구제비를 모아서 어려운 사람들이 전도의 대상으로 나타날 때 도와주는 것도 좋을 것입니다.
7) “손님 접대하기를 힘쓰라”고 하셨습니다. 이 손님은 친척이나 친구이기도 하겠지만 그 보다도 복음사역자들을 의미합니다. 또 교회에서 수고하는 사람들을 대접하는 것은 역시 하나님의 일을 돕는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옛날에는 복음사역자들이 퍽 가난한 생활을 하였습니다만 지금은 많이 좋아졌습니다. 문제는 남을 대접하고 주면서 살라는 말씀인 줄 아시고 노력하시기를 바랍니다.
8) 그리고 마지막 부분의 말씀은 “항상 겸손한 자세를 취하고 모든 사람과 핍박자가 있을 때 절대로 그 사람을 미워하거나 싫어하지 말고 오히려 그를 위하여 축복하며 원수 갚는 보복심이나 그런 행위를 나타내지 말고 악한 상황에서도 꼭 선을 도모하여 선으로 악을 이기는 생활을 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렇게 할 대에 ”숯불을 그 머리에 샇는다“는 것은 악인이 선대를 받을 때 그의 양심이 뜨거워져서 변화되는 마음을 갖게 될 것을 교훈하신 것입니다.
아무쪼록 이런 일들에 대하여 많이 반성하시고 새 결심 아래 새 출발을 하시면 더 큰 은혜를 받으시게 될 것입니다.
제1과 여호와의 산에 오를 자 (시 24:1~6) 목록으로
이 시간에는 신년 첫 출발의 말씀으로 “여호와의 산에 오를 자”란 제목으로 교훈을 받겠습니다. 본문 1절과 2절에서는 위대하신 하나님에 대하여 말씀하셨고, 3절과 4절에서는 “여호와의 성산에 오를 자가 어떤 사람인가”에 대하여 말씀하셨으며 5절과 6절에서는 “여호와의 성산에 오른 자가 받을 복”을 말씀하셨습니다.
1. 하나님의 위대하심에 대하여 말씀하시기를
1)하나님은 만물의 소유자이시기 때문에 위대하시다는 것입니다. “땅과 거기 충만한 것과 세계와 그 중에 거하는 자가 다 여호와의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창조자이시니까 당연히 모든 것의 소유자도 되시는 것입니다.
2) 하나님은 “그 터를 바다와 강들 위에 세우셨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창조자와 소유자 되신 것도 위대하시지만 인간이 살고 있는 땅을 바다와 강 같은 물 위에 세우신 것이 또한 위대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생각하기를 바다와 강물이 땅 위에 고여 있는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땅이 바다 속에서 솟아났고 물 위에 떠 있다”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창조 당시의 말씀에서도 나타난 사실입니다(창 1:9). 땅을 바다와 강들 위에 있게 하신 것은 생명체의 삶을 위한 것입니다.
2. 여호와의 성산에 오를 자에 대한 말씀입니다.
1) “여호와의 성산”이란 성전이 있는 예루살렘을 뜻합니다.
2) 또 그 성산에 오른다는 뜻은 곧 거룩한 곳에 서는 것과 같은 뜻으로 이는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 기도와 제사를 드리기 위함이므로 “하나님을 가까이 하는 자격자”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또 우리의 믿음 생활은 산을 오르는 것처럼 노력하여야 합니다. 성도가 은혜를 받는 과정도 산을 오르는 것과 같은 노력이 필요합니다.
3) 하나님께 가까이 나갈 수 있는 자는 어떤 자입니까?
① “손이 깨끗한 자”라고 하셨습니다. 손이 깨끗하다는 뜻은 모든 행실이 바름을 뜻합니다. 사람은 손으로 일을 하고 행동합니다. 따라서 손의 움직임을 행동의 표시로 삼아 말씀하신 것입니다. 행실이 바른 자 곧 말씀을 지키는 자가 하나님을 가까이 할 수 있습니다.
② “마음이 청결한 자”라고 하셨습니다. 마음이 청결함은 신앙적으로 도덕적으로 바른 마음을 가진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욕심이 있거나 교만한 마음이 아니고 거짓된 마음이나 음탕한 마음도 아닌 착하고 양심적이며 신앙적인 마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즉 어린아이 같은 마음입니다. 이렇게 마음이 청결할 때 하나님을 볼 수 있다고 예수님도 말씀하셨습니다(마 5:8).
③ “뜻을 허탄한데 두지 않는 자”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하고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것 이외의 것은 모두 허탄한 것입니다. 신령하지 않은 것, 영원하지 않은 것은 모두 허탄한 것이요, 자기중심적이고 육체적이고, 현실적이며 명예를 좋아하고, 사람의 칭찬을 기대하는 것도 역시 허탄한 것입니다. 이렇게 허탄한 것을 좋아하지 않는 자를 하나님은 가까이 하신다고 하셨습니다.
④ “거짓 맹세치 않는 자”입니다. 이것은 진실한 자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진실한 자는 말과 행실이 같고, 또 약속을 최대한 지킵니다. 약속을 지키므로 인간적 손해가 있어도 진실을 나타내기 위하여 지키기를 힘쓰는 것입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작은 손해를 채우기 위하여 약속을 위반하거나 변동하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런 일을 자주 하다 보면 진실을 어기게 되고 따라서 진실치 못한 자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신년도를 맞이해서 하나님의 성산에 오르는 4가지 요건을 꼭 갖추시고, 은혜를 많이 받는 성도님들이 되셔야 하겠습니다.
3. 마지막으로 이런 사람들에게는 구원의 하나님이 의의 복을 주시고, 하나님을 찾는 족속으로 또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자로 인정하여 은혜를 주신다고 하셨습니다. 믿음으로 받는 구원의 복은 하나님의 성산에 오르는 자만이 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산에 오르는 것처럼 신앙생활을 더욱 힘쓰시기를 바라서 이 말씀을 드렸습니다. 꼭 정상에 오르는 목적으로 등산을 한다는 것도 잊지 마셔야 할 것입니다.
제2과 받은 은혜대로 노력하자 (마 25:14~30) 목록으로
이 시간에는 “받은 은혜대로 노력하자”는 제목으로 교훈을 받겠습니다. 달란트 비유 말씀은 많이 알려진 말씀이고, 또 본문을 길게 읽으셨기 때문에 요약해서 설명을 드리겠습니다.
1. 종들의 재능대로 금달란트를 맡기고 타국에 간 주인이 있었습니다. 이 주인은 하나님을 비유하고, 금달란트란 성도 각자가 받은 은혜를 의미하며 종들이란 바로 성도를 뜻하고, 장차 주인이 돌아오면 종들이 그 재산을 잘 관리하였음에 대하여 회계(會計)한다고 하였으니 이는 예수님 재림시에 성도가 일한대로 받을 심판을 의미하는 것입니다(계 22:12).
2. 주인은 재능대로 차별 있게 재산을 나누어 주었습니다. 이것은 종들의 실력의 차이를 따라 주셨다는 것입니다. 이는 모든 사람의 받은 은혜와 은사가 같지 않음과 같은 것입니다. 십자가 공로로 죄사함 받고 구원받는 은혜는 차별이 없지만 그 이외의 물질계나 정신계나 육체 생활에서 받는 은혜는 사람마다 차이가 있고, 특징이 있습니다. 그래서 모든 성도는 자신이 받은 특징 있는 은혜와 은사를 꼭 점검하셔야 합니다. 어떤 이는 건강을, 어떤 이에게는 기도의 은사를, 어떤 이에게는 전도의 은사를 각각 특징 있게 주시는 경우인데 이 때에 자신이 받은 은혜와 은사를 꼭 알고 있어야 합니다.
3. 주인이 재산을 맡긴 것은 유익하게 관리하는 뜻입니다. 그 재산이 늘어나야 주인에게 충성한 것이 되는 것처럼 성도들도 자신이 받은 달란트(복; 은혜와 은사)를 힘써 활용하여 하나님께 영광의 열매를 많이 맺어드려야 하는 것입니다. 많이 받은 자는 많은 대로 적게 받은 자는 적은대로 충성하면 되는 것입니다.
4. 이 때에 5달란트 받은 자는 그것으로 바로 가서 장사하여 또 5달란트를 남겼다하였고, 두 달란트 받은 자도 역시 그렇게 하여 두 달란트를 남겼기 때문에 주인이 와서 회계할 때에 “착하고 충성된 종아 잘 하였도다 내가 작은 일에 충성하였으니 많은 것으로 맡기리라 그리고 내 즐거움에 참여하라”는 칭찬과 상급을 받았습니다. 여기에서 저희들이 생각해야 할 것은 칭찬받은 종이 바로 가서 장사한 것은 근면함이고, 작은 일에 충성한 것은 성실함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근면 성실이 좋은 결과를 가져온 것입니다.
5. 그러나 한 달란트 받은 종은 땅에 묻어서 보관했던 돈을 그대로 가지고 와서 하는 말이 “주인은 노력 없이 거두는 분이기 때문에 두려운 마음으로 그대로 갖고 왔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이 때에 그 종은 주인을 많이 오해하였습니다. 첫째는 일을 안 하고 사는 주인으로, 둘째는 굳고 엄한 사람으로 오해를 하였고, 자신은 게을렀으며 노력하기를 꺼려하였고, 결국은 그 돈을 은행에도 넣지 않음으로써 은행의 기본 이자 수입까지도 손해를 보였음은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 받았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고후 6:1). 주인은 그 게으른 종을 몹시 책망하였습니다. “악하고 게으른 종이라 주인의 뜻을 알지 못한 자라 변리까지 손해를 보인 자라” 하시고 그에게 있는 것까지 빼앗아 충성된 종에게 주었습니다. 그리고 그 무익한 종은 주인이 있는 자리에서 쫓겨나 슬피 울며 이를 갈 것이라 하셨으니 이것은 상급뿐만 아니라 구원의 복까지 제외된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여기의 무익하고 게으른 종은 외식적인 신앙의 상태에서 충성하지 않은 것을 의미합니다. 신앙의 사람은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성실하게 충성하는 사람입니다.
결론적으로 강조 드리는 것은 모든 성도가 많든 적든 받은 대로 있는 대로 정성을 다하고 충성을 다하심으로써 받은 은혜를 헛되이 돌리지 않을 때 하나님의 칭찬과 축복과 상급을 받게 된다는 사실과 “무릇 있는 자는 받아 풍족하게 되고 없는 자는 그 있는 것도 빼앗기리라”는 말씀을 꼭 기억하셔야 할 것입니다. 자신이 받은 은혜를 헤아려 받은 대로 성실하게 충성하시라는 뜻으로 이 말씀을 드린 것입니다.
제3과 세 가지 시험을 이기자 (마 4:1~11) 목록으로
이 시간에는 예수님이 3 가지 시험을 이기심에 대하여 교훈을 받겠습니다. 지금 읽으신 말씀은 깊이 연구할 때 어려운 내용들이 많습니다(그 내용들을 자세하게 공부하시려면 목사님이 써내신 강해를 참고하실 수 있습니다). 이 시간에는 이 말씀에서 예수님이 받으시고 이기신 세 가지 시험이 무엇이었는가를 살피려는 것입니다.
1. 예수님은 완전한 사람으로 오셔서 사람이 받을 수 있는 시험을 그대로 받으셨습니다. 히 4:15을 보시면 “예수님은 우리의 연약함을 체휼하신 분이며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같이 시험을 받으신 자로되 죄는 없으시다”고 하심으로 모든 시험을 이기신 분임을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우리의 구세주가 되시려면 “하나님의 아들이시란 신분과 십자가를 지셨다는 것” 외에도 인간으로 사시면서 죄없이 사시고, 하나님의 뜻에 절대 복종하셔야 하는 문제를 이룩하셔야만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인간의 입장에서 특별한 기적이 없이 고난의 유혹을 이기셔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런 유혹을 이기시고 하나님의 뜻을 전폭적으로 순종하시기 위하여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리셨다”(히 5:7)고 하셨습니다.
2. 예수님이 받으신 세 가지 시험은 모든 성도가 받을 수 있는 대표적 시험입니다.
1) 40일 금식하여 몹시 시장하신 입장에 계실 때 마귀가 “돌로 떡을 만들어 먹으라”는 유혹을 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시므로 돌로 떡을 만드는 기적을 행하실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만일 예수님이 시장함을 면하기 위하여 마귀의 말을 듣는다면 결국은 시장함을 면하기 위하여 마귀에게 굴복한 일이 될 것입니다. 인간이 사는 중에 먹을 양식과 의식주 문제는 꼭 필요한 것입니다. 그런데 어떤 때에는 몹시 궁핍하여 배고픔을 느껴야 할 때도 있을 것입니다. 3일 굶고 도적질 안 할 사람이 없다는 속담이 있지요. 그러나 예수님 믿는 성도는 물질의 욕심을 갖지 말고, 부정한 물질을 멀리 하면서 그런 유혹에 넘어가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은 집도 없이 가난하게 사셨고, 시장함을 맛보셨으며(마 21:18) 40일 금식하여 허기진 상황에서도 부정한 떡을 잡수시려 하지 않은 것은 바로 물질 시험을 이기셨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2) 성경을 의심하고 시험해 보라는 유혹을 이기신 것입니다. 시 91:11~12에서 다윗이 대적을 피하여 도망할 때 하나님이 그를 보호해 주시기 위하여 “그의 발이 돌에 부딪치지 않도록 붙들어 주신다”는 말씀이 있습니다. 그런데 사탄이 핍박자들을 동원하여 예수님을 성전꼭대기에 세우고 예수님을 뛰어내리게 하여 그 말씀의 진실을 입증하라고 한 것입니다. 사탄은 그런 방법으로 예수님을 죽이려고 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의심하여 입증하라”는 유혹을 한 것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요, 진리입니다. 따라서 성도는 믿을 따름이고 의심하거나 입증하려고 하면 안 되는 것입니다. 요즈음에도 어떤 사람은 성경을 그대로 믿으려 하지 않고 체험해서 믿으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것은 큰 잘못임을 아셔야 합니다. 예수님은 “주 하나님을 시험치 말라” 하심으로 그 유혹을 물리치셨습니다.
3) 천하만국의 영광을 마귀에게 경배하고 받으라는 유혹이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오늘날 빚어지는 부정축재, 부정출세인 것입니다. 못 본 척 해 주고, 몇 억씩 먹기도 하고, 도장 한번 찍어주고 몇 억씩 먹는 부정으로 세상의 영화와 출세를 노리는 일들이 바로 그런 유혹에 속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 세 가지 유혹을 다 이기심으로 인생을 죄없이 사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 시험들을 이기셨을 때 마귀는 떠나고 천사가 수종들었습니다. 저희들도 모든 시험을 이김으로 승리하고 천사의 보호를 받아야 할 것입니다. 물질, 명예, 향락, 말씀 의심에 대한 시험을 꼭 이기는 성도님들이 되셔야 할 것입니다.
제4과 더 신사적인 신앙생활 (행 17:11~12) 목록으로
이 시간에는 “더 신사적인 신앙생활”이란 제목으로 교훈을 받겠습니다.
1. 먼저 본문 말씀의 출처를 살피면 이 말씀은 사도행전에 나타난 바울 사도의 선교 역사 중 한 부분입니다. 사도행전은 예수님이 부활하신 다음 제자들이 핍박을 무릅쓰고 이방 지역에 가서 복음을 전파하여 교회를 세운 역사를 기록한 것입니다. 사도행전을 공부하실 때에는 성경의 지도를 염두에 두지 않으면 이해하기가 어렵습니다. 또 예수님 당시에는 행정구역이 어떠하였으며 지금은 어떠하다는 것도 아셔야 합니다. 여기에 대하여 다음 시간에 배우기로 하시고, 우선 이 시간에 배우실 말씀은 바울 사도가 1, 2차 전도로 교회를 세운 데살로니가와 베뢰아란 두 지명이 나옵니다. 이 지명은 모두 동리 성읍의 이름입니다. 지금의 헬라 나라가 그 당시에 두 행정 구역으로 나뉘어 북쪽은 “마게도냐”라 하였고, 남쪽은 “아가야”라고 하였습니다. 북쪽 마게도냐 중앙 지역에 데살로니가라는 도성이 있었고, 또 그 남쪽 조금 떨어진 곳에 “베뢰아”라는 촌락이 있어서 바울 사도가 그 곳에 선교를 하여 교회가 세워지게 된 것입니다.
2. 여기에서 바울 사도는 베뢰아 교회 성도들이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보다 더 신사적이라고 칭찬을 하신 것입니다.
1) 그러면 이 “신사적”이란 무슨 뜻입니까? 옛날에 우리나라에서 교양이 바르지 못한 사람들을 보고 신사답지 않다고 한 일이 있었습니다. 따라서 신사답다는 말은 교양이 있고 예절이 바르다는 뜻입니다. 이 말의 번역을(유게네스테로이) 영어 성경에서는 “더 고상한”이란 말로 표현했습니다. 제가 왜 이 말씀을 강조하는가 하면 지금도 많은 성도들이 신앙생활을 신사답게 고상하게 하지 않고 방종하고 어색하게 또는 비정상적인 사람처럼 하는 경우가 있어서 이런 것을 극히 경계하시게 하기 위함인 것입니다.
2) 무엇을 신사적이라고 칭찬하셨습니까? 이것은 본문에서 말씀하신 바와 같이
① 성경에 대하여 간절한 마음을 가짐이요,
② 날마다 성경을 상고하는 생활이요,
③ 그 말씀대로 믿고 그대로 생활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은 성경대로 사는 것 외에 다른 것이 없습니다. 성경이 유일한 믿음의 근거요, 생활의 지표이기 때문에 성경만 잘 배우시고 그대로 실천하면 그것이 바로 신앙생활의 전부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베뢰아 교회 성도들은 날마다 성경을 상고하였는데 그 열심이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보다 더 뛰어났다고 하신 것입니다. 모든 교인들이 스스로 성경 공부를 하려고 하는 자세에 들어가야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어린 아이가 자라면서 스스로 밥을 먹을 줄 아는 것과 같이 필요하고 중요한 것입니다.
3. 성경 공부를 잘 한 결과 어떤 일이 있었습니까? 전도가 잘 되었다고 하셨습니다. 12절에 보시면 “그 중에 믿는 사람이 많고 헬라의 귀부인과 남자도 적지 않았다”고 하심으로 실제적인 믿음생활의 결과로 전도의 은혜가 나타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지금부터라도 저희들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성경을 열심히 상고하여야 되겠습니다.
1) 물론 읽어야 하고,
2) 모르는 내용을 알고 넘어가도록 노력하셔야 하며
3) 모르는 것을 적어서 교역자님들께 드려 대답을 받고,
4) 모르던 말씀을 깨닫는 것을 큰 기쁨으로 여기는 입장에 꼭 들어가셔야 하는 것입니다. “먼 땅에서 오는 좋은 기별(성경을 비유함)은 목마른 자에게 냉수 같다”(잠 25:25)고 하신 것처럼 하나님의 말씀이 그렇게 사모될 때 비로소 은혜를 받게 된다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시 119:97에 보시면 “내가 주의 법을 어찌 그리 사모하는지요 내가 그것을 종일 묵상하나이다”라고 고백한 것처럼 저희들도 말씀을 사모하고 성경 제일주의로 생활하심으로써 신사다운 성도가 되셔야 하겠습니다.
제5과 강권하여 채우라 (눅 14:15~24) 목록으로
이 시간에는 “강권하여 내 집을 채우라”는 제목으로 교훈을 받겠습니다.
1. 본문의 내용을 살피시면 어떤 사람이 큰 잔치를 배설하고 청할 사람들에게 알렸으나 그들이 밭을 사고 소를 사고 장가를 간 이유들을 들어서 일치하게 오지 않았다고 하였습니다. 잔치에 손님이 없는 주인은 크게 노하여 사거리 골목에 가서 사람들을 초청해 오라 하여 자리를 많이 채웠으나 그래도 빈 자리가 남아있게 되자 길과 산울가로 가서 “사람을 강권하여 데려다가 내 집을 채우라” 하였고, 전에 초청을 받았으나 안 온 자들은 내 잔치를 맛보지 못한다고 하였습니다.
2. 이 말씀에서
1) 잔치를 배설한 어떤 사람은 구원의 은총을 베푸시는 하나님을 비유함이고,
2) 처음 초청을 받았으나 오지 않은 사람들은 유대인들이며
3) 그들이 밭을 사고 소를 사서 시험하러 가며 장가를 들었기 때문에 안 온 것은 그때나 오늘의 사람들이 현실적 생활을 구실로 하여 믿음생활을 중요시 하지 않음을 뜻하고,
4) 그들이 다시 그 자리에 오지 못한다는 것은 유대인들이 완악하므로 예수님을 영접하지 않으니 다시는 그들에게 초청의 기회가 주어지지 않음을 뜻하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전도를 통하거나 하나님의 부르심에도 기회가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또
5) 잔치 자리를 채우기 위하여 사거리에서 불우한 사람들을 초청하는 것은 불우한 사람들이 세상 일에 바쁜 일이 없으므로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하게 되기 때문이며 하나님께서도 유대인들이 완악하여진 후 이방인 중에서 불우한 사람들을 우선적을 초청하셨음을 뜻하는 것입니다(마 4:14~16).
6) 그러나 자리가 또 비게 되자 길과 산울가로 가서 사람들을 강권하여 데려다가 내 집을 채우라고 하셨으니 이 말씀은 하나님이 계획하신 천국 건설에 빈 자리가 없도록 구원의 대상을 확보하시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3. 결론적으로 “강권하여 내 집을 채우라”는 말씀의 의미를 더 설명드리겠습니다.
1) 여기의 “내 집”이란 뜻은 하나님의 집, 천국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집에서 사는 가족들은 천국이나 이 세상에 흩어진 구원받은 백성들을 의미합니다. 음식을 준비하고 잔치를 하는 주인이 음식 준비 만큼의 손님이 오기를 기다리는 것처럼 하나님도 천국을 건설하심에 있어서 예정된 숫자의 택한 백성이 있습니다. 그들의 수가 확보되기까지 전도하고 초청하라는 뜻입니다.
2) 성도가 전도의 사명을 가지고 예배당의 자리를 채우기 위해서 노력해야 함은 당연합니다. 그러나 “사람들을 강권하여 내 집을 채우라”는 말슴이 지상에 있는 모든 예배당의 자리를 채우라는 뜻인 줄로 오해하여서는 안 됩니다. 그 이유는
① 예배당을 지을 때 택한 백성의 수를 알고 거기에 비례하여 짓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요,
② 또 하나님의 택한 백성이 내가 있는 예배당에만 가득히 나온다는 보장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 뜻에서 “내 집을 채우라”는 말씀은 전도를 강권하듯이 열심히 하고 하나님의 택한 백성의 수가 차기까지 노력하라는 말씀입니다.
3) “내 집을 채우라”는 뜻은 알찬 성도(믿음 충실한 성숙한 성도)로 가득 채우라는 말씀입니다. 만일 가득 채워진 손님 중에 외식자가 있다든지 믿음이 바르지 못한 성도가 많아서 영광의 목적에 미달한다면 그것을 “가득 채운 것”이라고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비슷한 비유 교훈으로 자리는 채웠으나 예복을 입지 않은 자들이 잔칫집에서 내어 쫓긴 사실을(마 22:12) 기억하실 것입니다. 이렇게 진실하고 충실한 성도를 확보하는 것이 자리를 채우는 것이며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것임을 아셔야 할 것입니다. 전도 사명에 열심히 동참하고 비중 있는 신앙인을 만드는 것이 하나님의 집을 채우는 일임을 아셔야 하겠습니다.
제6과 고난 중의 욥의 신앙고백 (욥 23:10~17) 목록으로
이 시간에는 “고난 중의 욥의 신앙고백”이란 제목으로 교훈을 받겠습니다. 욥이란 사람은 동방나라 아라비아 북쪽 지역인 우스 땅에서 산 사람입니다. 그는 동방 사람 중에서 가장 큰 자라 할 만큼 유명한 사람이었고, 그가 고난을 당하기 전에 많은 자녀들을 거느리고 있었으며(욥 1:1~5) 또 그가 고난에서 헤어난 후에도 “140세를 살았다”고 하였으므로 그 나이가 200세쯤 산 것으로 추정할 때 아브라함의 아버지 데라의 나이 205세와 비슷하므로 욥의 시대를 아브라함 때와 비슷하게 예측하는 것입니다. 욥은 그 당시에 의인이었으나 하나님의 섭리에 의하여 큰 재앙과 고난을 당하였고, 또 까닭없이 고난을 당하면서도 이를 신앙적으로 잘 이김으로써 고난의 승리자로서의 사표가 된 것입니다. 만일에 욥 같은 인물이 없었거나 욥기의 말씀이 없었다면 오늘날 고난당하는 성도들에게 주실만한 합당한 교훈이 없었을 것입니다. 욥이 어떤 신앙으로 고난을 견디고 그 말년에 많은 축복을 받았는지를 살펴보겠습니다.
1. 욥은 모든 것과 자기에 대하여 섭리하시는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10절의 “나의 가는 길을 오직 그가 아시나니” 하신 말씀과 14절의 “내게 작정하신 것을 이루실 것이라”는 말씀이 바로 하나님의 섭리(통치)를 고백한 것입니다. 13절의 “그는 뜻이 일정하시니 누가 능히 돌이키랴 그 마음에 하고자 하시는 것이면 그것을 행하시는 분이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욥이 고난에서 헤어나기를 기도했지만 응답되지 않을 때에 자신이 고난을 받는 것은 하나님의 섭리대로 되는 것“이라고 믿은 것입니다. 이렇게 욥은 고난 중에서 하나님의 섭리를 믿음으로 인내할 수 있었습니다.
2. 연단 주시는 하나님을 믿고 고백하였습니다. 10절 말씀에서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정금같이 나오리라”고 함으로써 성도를 고난으로 연단시키시는 하나님을 믿었고, 또 자신도 고난을 받음으로 더 좋은 신앙인이 될 것을 기대하였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은 고난으로 성도를 연단하시는 분입니다. 바울 사도도 이런 경우로 연단을 받았습니다(고후 12:7).
3. 욥은 고난 중에서도 하나님의 말씀을 지켰다고 하였습니다. 11절에서 “내 말이 그의 걸음을 바로 따랐으며 그의 길을 지켜 치우치지 아니하였다”고 한 것입니다. 성도는 고난 중에서도 꼭 하나님의 말씀을 지켜야 하는 것입니다. 욥은 고난 중에서도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지 아니하였고 일정한 음식보다도 그 입의 말씀을 더 귀히 여겼다”고 하였습니다. 아브라함이 시험을 받을 때에 아들 이삭을 드린 것처럼 저희들도 시험이나 고난이 있을 때에 더욱 하나님의 말씀을 지켜야 하는 것입니다.
4. 욥은 주권으로 섭리하시는 하나님을 크게 두려워하면서 하나님의 뜻에 복종하려고 하였습니다. 이 사실은 욥이 고난 중에도 말씀을 지킨 것과 일정하신 뜻(13절)과 작정하신 뜻(14절)을 그대로 이루실 것을 믿으면서 하나님의 섭리에 자신을 맡기려고 한 것을 보아 알 수 있습니다. 성도는 이렇게 하나님의 뜻을 존중하고 맡기는 신앙을 가져야 합니다.
5. 욥은 하나님의 뜻이 계셔서 자기에게 고난을 주시지만 결코 자기를 아주 망하게 하시지는 않을 것이라고 믿은 것입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의 사랑이 무궁하시기 때문이고, 또 하나님은 고난으로 유익한 일들을 하시기 때문입니다. 16~17절의 말씀이 그 뜻입니다. 하나님이 일시적으로 고난을 주셔서 낙심케 하시고 두렵게 하시지만 나를 어두움으로 끊으시거나 흑암으로 얼굴을 가리어 아주 소망 없게 하실 분은 아니란 것입니다. 고난 중에서 이만한 신앙을 고백할 수 있는 정도이면 참으로 귀한 신앙이 아닐 수 없습니다.
결론적으로 고난 중에 있으면서 ① 섭리를 믿고, ② 연단을 믿고, ③ 말씀을 지키며 ④ 주권으로 섭리하시는 하나님을 두려워하여 자기를 맡기며 끝까지 소망을 갖는 믿음을 본받으셔야 하겠습니다.
제7과 모세의 믿음 (히 11:24~29) 목록으로
이 시간에는 “모세의 믿음”이란 제목으로 공부하겠습니다. 모세는 출애굽 당시에 애굽에서 야곱의 셋째 아들 레위 지파에서 태어난 사람이었습니다. 모세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이스라엘 민족을 애굽에서 해방시켜 광야에서 40년 동안 백성들을 인도한 지도자란 사실을 잘 아실 것입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본문에서 그의 믿음을 칭찬하였습니다. 이 칭찬은 곧 하나님의 칭찬입니다. 그러면 모세의 믿음은 어떤 것입니까?
1. 자기는 하나님의 백성이란 믿음을 가진 것입니다. 오늘날로 말하면 “나는 하나님의 택함을 받은 자다”라고 굳게 믿는 것입니다. 이러한 믿음을 가진 자는 절대로 흔들리지 않는다고 벧후 1:10에서도 말씀하셨습니다. 모세 당시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애굽인의 노예로서 죽지 못하여 사는 신세였습니다. 그런데 또 모세는 애굽의 바로왕의 딸의 양자가 되어 있었고, 왕의 계승자가 되는 후보까지 되어 있었습니다. 그 때에 믿음이 없는 백성이면 애굽의 시민권을 돈을 주고라도 사려고 했을 것입니다. 그런 상황에서 모세는 하나님의 선민(백성)이란 긍지를 굳게 지킨 것입니다.
2. 모세는 공주의 아들이란 명분과 애굽의 영화를 저버리고, 하나님의 백성과 고난받는 것을 더 좋아하였다고 하였습니다. 다시 말하면 불신앙과 죄악의 향락보다 신앙과 고난을 선택한 것입니다. 이것은 적은 영광을 버리고 적은 고난을 택한 것이 아니라 큰 영광을 버리고 큰 고난을 택한 것인데 이것이 신앙에 의하여 이루어진 것입니다. 모든 성도의 믿음 있는 증거가 바로 이런 점에서 나타나야 할 것입니다. 믿음을 위하여 큰 영광을 버리고 큰 고난을 택하는 신앙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3. 모세가 이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은 상 주심을 믿었기 때문입니다(26절). 이 상이란 내세의 상을 의미합니다. 모세는 내세의 상을 애굽의 영화보다도 더 크게 여겼고, 애굽의 보화나 재물보다도 더 크게 여겼다고 하였습니다. 신령한 은혜를 많이 받은 성도일수록 세상의 영화를 적게 보고 내세의 상을 크게 보는 것입니다.
4. 순종하는 믿음 입니다 이런 믿음은 아브라함에게도 있었다고 하였습니다. 모세는 하나님의 명령을 순종할 때 많은 인내와 용기가 필요했습니다. 모세가 받은 명령은 백성들을 이끌고 애굽을 탈출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이 때에 바로왕은 이것을 잘 듣지 않았습니다. 이 때에 모세는 27절에서 임금의 노함을 무서워 아니하고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보는 것 같이 하여 참았고 또 명령에 따라 유월절 의식도 지켰다 하였으니 이렇게 모세가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는 데는 바로를 두려워하지 않는 신앙,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보는 것 같이 믿는 신앙, 참는 신앙을 아울러 나타내게 된 것입니다. 이렇게 순종하는 용기가 있을 때에 하나님은 더욱 가까이 해 주시는 것입니다.
5. 하나님의 구속 사업을 믿는 신앙입니다. 이 신앙은 유월절 피 뿌리는 예식에서 나타납니다. 하나님의 심판으로 모든 장자를 멸하는 일이 나타날 때 유월절 양의 피를 바른 집에는 그 재앙이 미치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바로 예수님의 십자가의 대속을 믿는 자에게 하나님의 심판이 건너뛰는 구원의 은혜를 믿는 신앙입니다. 모세는 그런 순종을 광야에서도 한 일이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구리뱀을 만들어 장대에 세움으로 불뱀에 물린 자들을 구원한 일이었습니다(민 21:8~9). 이것은 바로 하나님의 구속을 믿는 신앙을 나타낸 것입니다.
6. 하나님을 의지하는 신앙이었습니다. 이것은 본문 29절에서 “홍해를 육지같이 갈랐다”는 말씀입니다. 홍해가 막히고 애굽군의 추격이 있을 때 모세는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의 구원하시는 것을 보기 위하여 기다린 것입니다. 이 때에 하나님이 홍해를 갈라 주셨습니다(출 14:13).
이렇게 택자임을 확신하고, 믿음을 위하여 고난을 택하며 상 주심을 믿고 순종하며 구속의 은혜를 믿고 하나님을 의지하는 신앙을 저희들도 본받아야 할 것입니다.
제8과 아브라함의 믿음 (히 11:8~11, 17~19) 목록으로
이 시간에는 “아브라함의 믿음”에 대하여 공부하겠습니다.
1. 아브라함은 어떤 사람입니까? 아담의 20대손, 노아의 10대손, 아담 이후 2000년의 사람, 또 주전 2000년경의 사람입니다. 그는 메소포타미아 지경 갈대아 우르에서 데라의 아들로 태어났고, 하나님의 지시를 따라 가나안 땅으로 가기 위하여 하란 땅을 거쳤으며(창 11:31, 12:1~5) 그 나이 75세에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살게 되었습니다. 아브라함은 늙기까지 자녀를 갖지 못하였다가 그 나이 100세에 하나님의 약속에 따라 아들을 낳았고, 그 아들 이삭에게서 야곱이 나고 야곱에게서 열 두 아들이 나고, 그 열 두 아들의 자손이 애굽에서 약 400년을 지내다가 큰 민족을 이루어 애굽에서 나와 가나안 땅을 기업으로 받고 정착하게 된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기사는 창 12장부터 25:8까지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불러 그를 선민의 조상으로 세우시고, 그 후손에게 복을 주시겠다고 하실 때에는(창 12:1~4) 그만한 믿음이 그에게 있었다고 보셔야 할 것입니다.
2. 그러면 아브라함의 믿음이 어떤 믿음입니까?
1) 순종하는 믿음입니다. 본문 8절에서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순종하여”라고 하였습니다. 그가 하나님의 말씀을 얼마만큼 순종하였을까요? 고향을 떠나 가나안 땅으로 가는 순종을 하였고, 첩과 첩의 소생을 내쫓는 순종을 하였으며(창 21:10) 독자 이삭을 제물로 드리는 순종까지 행하였습니다(창 22:10, 16). 아브라함의 이 순종은 물질을 초월하고 또 인정과 생명을 초월하는 순종이었습니다. 그러면 이런 순종의 힘이 어디에서 왔을까요? 이는 하나님의 말씀(약속)을 의심없이 믿는데서 비롯된 것입니다. 롬 1:5에 보시면 “믿어 순종케 하신다”는 말씀이 있습니다.
2) 따라서 아브라함의 믿음은 하나님의 존재와 그 말씀을 믿는 믿음인 것입니다. 창 12:4에서도 “그의 말씀을 좇아갔다”고 하였고, 또 하나님이 독자 “이삭을 제물로 드리라”고 하였을 때도 이삭의 죽음이 하나님의 약속 시행에 위반되는 것이지만 하나님은 자기의 순종력을 시험하시고(17절) 죽인 아들을 다시 살려주실 줄로 믿었다고 한 것입니다(18~19). 이 믿음은 참으로 놀라운 믿음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 뿐 아니라 그가 하나님으로부터 약속받은 두 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자기의 후손이 가나안 땅을 받는다는 것이요(창 13~17), 또 한 가지는 그의 후손에게서 메시야가 출현하여 구원의 역사를 이룰 것이라(창 22:16~18)는 것입니다. 여기의 가나안 땅의 약속은 500년 후에 성취될 것이었고, 메시야 구원 약속은 2000년 후에 성취될 것이지만 아브라함은 그 약속을 믿었고 하나님은 그 믿음을 그의 의로 여기셨다고 하셨습니다(창 15:6). 얼마나 놀라운 믿음입니까?
3)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보호와 인도를 믿었습니다. 본문 8절에서 “장래 기업으로 받을 땅에 나갈 새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갔다” 하셨으니 이것은 바로 하나님의 보호와 인도를 믿고 행한 것입니다. 저희들도 아브라함처럼 내일 일을 염려하지 말고 순종만 하는 신앙을 가져야 하겠습니다.
4) 아브라함은 내세를 믿고 현실을 나그네로 여긴 것입니다. 본문 9~10절이 그 말씀입니다. 그는 하나님이 경영하실 터가 있는 성을 바라보았기 때문에 자기의 사는 생활을 외방(즉 나그네)에 있는 것처럼 생각하여 장막 생활을 하였다고 하였습니다. 이 장막 생활이란 현실을 적당하게 사는 생활을 의미합니다. 성도가 이 세상을 사랑하면 하나님의 사랑이 그에게 있지 않는다(요일 2:15)고 하셨습니다. 이렇게 현실을 적당히 보고 천국을 사모하는 믿음이 귀한 것입니다.
5) 또 아브라함은 시험을 받을 때에 믿음을 지켰으며(17절) 내세와 함께 부활을 믿은 것도 알 수 있습니다(19절). 그래서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하나님이라고 칭함 받으시기를 부끄러워 아니하셨다”고 하셨습니다(16절).
우리의 믿음은 어떻습니까? 저희들도 아브라함의 믿음을 본받아서 큰 영광을 돌려야 하겠습니다.
제9과 권능으로 임하는 하나님 나라 (막 9:1~8) 목록으로
지금 읽으신 말씀은 하나님의 나라가 권능으로 임하는 것을 보여주신 말씀입니다. 그리고 이 제목의 기록은 마 17:1~13, 눅 9:28~36에도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은 먼저 제자들에게 “여기 섰는 사람 중에 죽기 전에 하나님의 나라가 권능으로 임하는 것을 볼 자들도 있다”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의 나라가 권능으로 임하는 것을 보여 주시겠다”는 약속이었습니다. 그 후 6일 만에 베드로, 야고보, 요한 세 제자들을 데리시고 높은 산에 올라가셔서 그 광경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런데 눅 9:28에서는 “8일쯤 후에 보여주셨다”고 하심으로 6일과 8일 사이에 차이가 있지만 이것은 만으로 계산하는 것과 8일쯤이라고 한 말씀과 관련하면 착오가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1. 그 당시의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는 문제를 “이스라엘의 독립”으로 안 사람이 많았고, 또 그렇게 기다렸습니다. 마 20:21에 보시면 세베데의 아내가 주님의 나라가 임할 때 자기의 두 아들을 그의 좌우편에 앉게 해달라는 청원을 한 일이 있었고, 행 1:6에서도 이스라엘 나라의 회복의 때를 물은 일이 있었으며 또 눅 17:20에서도 바리새인들의 질문에 답하시기를 “하나님의 나라는 볼 수 있게(즉 현실적으로) 임하는 것이 아니라”고 하셨습니다. 이런 상태에서 예수님은 신령한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는 광경을 보여 주실 필요를 느끼셨던 것입니다. 또 이 사실은 죽음의 건너편을 보는 것과 다름이 없는 것입니다.
2. 그 광경이 어떠하였습니까? 예수님과 세 제자가 높은 산에 올라갔을 때에 육체를 가지신 예수님의 모습이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변하셨으니 그 모습은 흰 옷과 함께 광채가 났다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산 자의 변화된 형체 또는 예수님의 부활체를 미리 보여주신 것이요, 또 다음에는 그 곳에 “엘리야와 모세가 나타났다” 하였으니 여기의 모세는 죽음을 당하였지만 부활한 형체로 나타난 것이고, 엘리야는 죽음을 맛보지 않은 상태에서 변화된 모습으로 나타난 것이므로 이 상태가 바로 천국인의 실체를 보여주시고, 또 천국인의 실체가 그렇게 순식간에 변화될 것도 아울러 보여주신 것입니다. 장차 예수님이 재림하시고 이 세상이 없어짐과 동시에 천국 실현될 때는 꼭 그와 같은 형편으로 이루어질 것을 나타내주신 것입니다.
3. 이 때에 베드로는 그 광경이 너무 좋아서 그 곳에 3개의 초막을 지어 나누어 드리고 계속 그 곳에 머물기를 바랐지만 이는 잠시 주시는 계시일 뿐이기 때문에 그렇게 하실 수 없었습니다. 또 그런 광경을 처음 체험하는 제자들은 무서움을 느꼈습니다(6절). 이 때에 하나님의 음성이 들리기를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니 너희는 저의 말을 들으라” 하심으로 예수님이 하나님의 보내신 분이요,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또 계시의 주인공이심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4. 결론적으로 저희들이 이 말씀에서 배울 것은
1) 하나님 나라가 어떻게 임하느냐 하는 것을 배웠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창조적인 권능, 또 예수님의 부활하신 권능으로 순식간에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저희들은 그 세계를 사모해야 합니다.
2) 베드로와 야고보, 요한이 이런 특별한 계시까지 보았다는 점입니다. 그들은 누구보다도 예수님을 가까이 따랐습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자기를 가까이 따르는 제자들에게 더 깊은 계시를 보여주셨습니다. 우리도 말씀을 사모하는 만큼 더 깨달을 수 있을 것입니다.
3) 천국은 지상 생활에 비할 때 아주 좋은 곳입니다. 베드로는 그 곳에 있기를 원하였으니까요.
4) “너희는 저의 말을 들으라” 하심으로 예수님이 유일한 구세주요, 계시의 주인이심을 말씀하셨습니다. 저희들은 내세의 천국을 사모하면서 예수님 중심의 생활을 열심히 하셔야 할 것입니다.
어떤 이는 죽은 후에 구경하고 온 이야기를 합니다만 그런 신화 같은 말을 믿지 마시고 성경에서 보여주신 천국만 믿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제10과 파숫군의 사명 (겔 3:17~21) 목록으로
저희들은 지금 에스겔서를 읽었습니다. 에스겔은 선지자의 이름입니다. 이사야, 예레미야, 에스겔, 다니엘은 구약 시대의 4대 선지자로 꼽힙니다. 이사야는 바벨론 포로 약 100년 전의 사람이었고, 예레미야는 바벨론 포로 당시에 예언하였으며 다니엘과 에스겔은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갔던 사람입니다. 에스겔은 바벨론의 “그발” 강가에서 계시를 받았다고 하였습니다(겔 1:1~3). 지금 읽으신 말씀은 하나님께서 에스겔에게 파숫군의 사명을 주심에 대하여 말씀하신 것입니다. 17절 말씀은 파숫군의 사명에 관한 말씀이고, 18~19절은 악인을 깨우칠 사명을 주신 것이며 20~21절은 의인이 범죄함에 대하여 깨우칠 사명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1. 하나님은 에스겔을 이스라엘 족속의 파숫군으로 세우셨습니다. 설령 그 시기가 바벨론 포로 시기이지만 이스라엘 민족은 하나님의 징계를 받으면서라도 회개하고 기도하여 긍휼을 구하고 죄를 짓지 않도록 노력하여야 할 입장이었습니다. 이런 일을 깨우치게 하기 위하여 하나님은 파숫군을 세우신 것입니다.
1) 파숫군은 대적의 침략에 대하여 자기 편을 보호하는 사람입니다. 언제 적이 올지 알지 못하므로 항상 깨어 있어야 하고, 적이 오는 것을 발견하면 즉시 나팔을 불어 경고하여야 하는 것이 그의 책임입니다. 그리고 이 말씀은 보초병에게 주신 말씀이 아니라 바로 우리 성도들에게 주신 말씀입니다. 혹시 교역자만 파숫군인 줄 아시면 안 됩니다. 모든 성도가 다 마귀와 싸우는 파숫군임을 아셔야 합니다. 엡 6:11에서 대적과 싸우기 위하여 “전신갑주를 입으라” 하셨는데 이 말씀이 교역자에게만 주신 것이 아니고 모든 성도에게 주신 말씀이요, 또 히 3:13에서도 “피차 권면할 사명이 있다”하신 것도 역시 성도에게 주신 말씀입니다.
2) 파숫군은 “이스라엘의 파숫군”이라 하신 것처럼 성도를 보호하는 파숫군이요, 대적은 죄악의 역사를 자행하는 마귀와 악인들이요, 파숫군의 사명은 악인을 깨우치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따라서 악인을 깨우쳐야 할 파숫군은
① 자신이 먼저 경성하며 죄를 멀리 하여야 하고,
② 하나님의 말씀으로 경고하기 위하여 말씀을 알아야 하며
③ 항상 신앙 생활에 어떤 이상이 있을 때는 지체하지 말고 깨우쳐야 하는 것입니다. 어떤 경우에는 교역자가 말하는 것보다 이웃의 친한 성도가 깨우치는 것이 훨씬 유익할 때가 있습니다. 어떤 시골 교회의 이웃에 논 가운데 우물이 있었습니다. 그 우물에서 어떤 집사가 주일 날 빨래를 하고 있으니까 다른 집사가 그것을 보고 가서 하는 말이 “저쪽에서 전도사님이 보시고 계신데 미안하지도 않소 내가 보아도 민망하여 못 견디겠으니 속히 중단하고 들어가라”고 하였습니다. 이 때에 그 집사는 “내일 아이가 학교에 입고 갈 옷이어서 부득이 주일 날 빨았다”고 하면서 그 빨래 그릇을 가지고 들어간 일이 있었습니다. 얼마나 덕이 있고 귀한 일인지 알 수 없습니다. 성도 간에 서로 이렇게 권면하는 것이 파숫군의 일을 하는 것입니다.
2. 그리고 파숫군은 경성하고 기도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도 성도가 악에 빠지지 않기를 기도하시지 않았습니까?(요 17:15) 신앙 생활과 교회를 위하여 여러 가지로 힘쓰는 성도가 많습니다. 그 중에 가장 크게 힘쓰는 것이 새벽 기도를 꾸준히 나오는 것임을 아셔야 합니다. 새벽 기도를 힘쓰지 못하는 것은 경성하는 면에서 소극적이고 사명을 이행하는 면에도 소극적인 것을 꼭 아셔야 합니다. 그래서 파숫군처럼 새벽 기도로 경성하시기를 바랍니다.
3. 마지막으로 파숫군이 악인을 깨우치지 않으므로 악인이 악을 계속 하거나 의인이 탈선하면 그 악인은 자기의 악으로 죽지만(심판 받음) “그 피 값을 파숫군에게서 찾는다” 하심으로 “파숫군에게 책임을 묻는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파숫군이 깨우쳤는데도 듣지 않을 때는 그 파숫군을 문책하시지 않는다고 하셨습니다.
우리 모든 성도님들이 서로 파숫군이 된다면 신앙과 축복에 큰 발전이 있을 것입니다.
제11과 예수님의 중보기도 (요 17:15~21) 목록으로
지금 읽은 이 말씀은 예수님이 구원받아야 할 백성들을 위하여 중보기도 해 주신 기도문입니다. 중보기도란 성도를 위하여 기도해 주시고, 또 성도의 기도가 하나님께 상달되고 응답되도록 인도하는 역할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본래 우리 인간은 타락하여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기 때문에 스스로 하나님께 나갈 수 없게 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십자가의 공로로 죄사함 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 후 예수님의 인도로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또 예수님의 중보로 기도 응답을 받기 때문에 저희들이 기도할 때에도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세상에 계실 때에도 구원해 주실 백성들을 위하여 기도하셨고, 지금도 하나님의 우편에서 영원토록 중보하여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무 일에도 하나님과의 관계를 가질 수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만 유일한 길이시기 때문입니다(요 14:6). 그러면 예수님이 세상에 계실 때 어떤 내용으로 중보기도를 하셨습니까?
1. 악에 빠지지 않기를 보존되게 하시는 기도를 하신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성도가 시험에 들지 않고 죄를 짓지 않게 되기를 위하여 기도해 주셨다는 뜻입니다. 이 말씀은 성도가 죄짓지 않기를 예수님이 크게 원하신다는 뜻도 되며 또 우리가 이 만큼 악에 빠지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것이 예수님의 기도의 은혜인 줄 아셔야 할 것입니다. 시 1:1에서도 “성도가 죄 안 짓고 사는 생활”을 첫 번째 복으로 말씀하셨습니다.
2. 성도를 진리로 거룩하게 해달라고 하셨습니다.
1) 거룩이란 깨끗함, 성결함, 그리스도를 닮음을 뜻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거룩하여지는 것은 진리로 되는 것처럼 성도가 순결해지려면 성경대로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십자가의 보혈로 깨끗해진다”는 뜻은 무엇일까요? 이것은 십자가의 공로로 죄책을 없애주신다는 뜻입니다. 죄책이란 죄로 인한 문책 받을 일을 의미하는 뜻입니다. 성도가 거듭나고 믿기를 시작할 때에 모든 죄책에서 해방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다음부터는 성도이니까 성도답게 거룩하고 깨끗하게 살아야 할 것이 아닙니까? 이렇게 깨끗하게 사는 생활이 바로 성경대로 사는 생활이고, 진리로 거룩하여지는 것입니다.
2) 모든 성도가 죄사함 받는 은혜는 다 함께 받지만 이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 누가 더 거룩하게 살았느냐 하는데는 각각 차이가 있어서 이것이 복 받는 기준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모든 성도가 육체의 장막을 벗음과 함께 세상을 떠날 때는 누구든지 죄의 유혹에서 떠나고 이미 지은 죄는 속죄를 받은 상태이므로 거룩이 완성되는 것입니다(욥 19:26). “진리로 거룩해진다”는 뜻을 잘 이해하시기 위하여 이 말씀을 드렸습니다.
3) 왜 악에 빠지지 않고 거룩해져야 하는가 할 때 그 이유는 16절에서 “성도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도 자신이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님을 알 때 장막 생활을 하면서 하나님의 말씀만 따라 살지 않았습니까?(히 11:9, 창 12:4) 성도는 천국의 시민이요, 하나님의 자녀란 사실을 항상 기억하셔야 합니다.
3. 주 안에서 하나 되게 하시기를 기도하셨습니다(21절). 이 하나 된다는 뜻은
1) 불신자가 예수님을 믿음으로 예수님과 하나 되는 것(연합)이 있고,
2) 믿는 자가 예수님 안에서 주님 뜻대로 삶으로 하나 되는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21절 하반의 “세상으로 믿게 하옵소서” 하신 것은 불신에서 신앙으로 변하여 하나됨이고, 또 “아버지가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음 같이 하나 되어” 하신 것은 성도와 예수님과의 밀착된 연합을 뜻하는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저희들은 예수님의 중보기도의 내용을 따라 ① 악에 빠지지 않고, ② 거룩하여지며 ③ 주님과 하나 되는 생활을 잘 하셔야 하겠습니다.
제12과 기도 응답의 조건들 (시 5:1~7) 목록으로
이 시간에는 “기도 응답의 조건들”이란 제목으로 교훈을 받겠습니다. 본문 말씀을 상고하면서 성경의 내용을 어떻게 살펴야 하는가에 대한 것도 아울러 배우는 시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1. 우선 이 본문에는 하나님에 대한 호칭이 세 가지로 나타나 있습니다. 그것이 곧 여호와, 하나님, 나의 왕(나의 주인)인 것입니다. 기도자는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으로 하나님을 부르는 호칭에도 의미가 있는 것을 아시고 하나님께 기도해야 합니다.
1) 하나님은 창조 당시부터 나타난 명칭으로 창조자, 절대자, 능력자를 표현할 때 사용이 되었고,
2) 여호와는 출애굽기에서부터 나오는 명칭으로 아브라함에게 언약하신 바를 실천하시는 과정에서 여호와란 호칭을 사용하였습니다. 그래서 “여호와”는 언약을 실천하시는 진실하신 하나님을 나타내시는 이름입니다.
3) “왕 또는 주”란 호칭을 사용하셨는데 왕이란 통치자를 의미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통치에 절대 복종하는 자세와 충성하는 자세가 바로 기도자에게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전능하신 하나님, 진실하신 하나님, 충성과 복종의 대상이신 하나님을 향하여 기도하는 것이 필요한 것입니다.
2. “나의 말, 나의 심사(1절), 부르짖는 소리(2절)”란 말씀에서 기도의 표현 방법을 세 가지로 나타냈습니다.
1) 하나님께 기도드리는 기도의 표현 방법은 조용하고 차분하게 말로 전달하는 것과
2) 말의 표현이 임의롭지 못할 때 마음(심사) 자체를 통촉하시게 하는 것과
3)아주 급하고 답답할 때 부르짖는 방법이 있습니다. 기도자는 자기의 형편에 따라서 이런 세 가지 방법을 이용하여 기도할 수 있고, 기도로 뜻을 발표하는 것이 응답에도 필요한 것입니다.
3. 3절에서 기도자가 “아침에 기도를 드린다”고 하였습니다. 기도 응답의 조건으로 아침 기도가 유력한 것은 구약 시대에 아침에 성전에 나가 제사 드리는 일을 겸할 수 있었고, 또 하루의 생활을 시작하는 시간이 아침이기 때문입니다. 기도를 생활 시작의 첫째로 꼽는 것이 정성의 표현이며 아울러 응답의 더 좋은 조건이 되는 것입니다.
4. 죄를 멀리 하는 것입니다. 본문 4~6절 말씀에서 그것을 교훈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죄를 기뻐하는 신이 아니시다, 하나님은 악과 유하시지 못한다, 오만한 자는 주의 목전에 서지 못한다, 주는 행악자를 미워하시고 거짓말 하는 자를 미워하시며 폭력을 즐기며 속이는 자를 싫어하신다”고 하셨습니다. 오만한 자란 하나님을 멸시하고 하나님보다 자기를 앞세우는 자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기도의 조건으로 순결이 중요한 것을 말씀하셨으므로 늘 회개하는 자세로 기도하셔야 하는 것입니다.
5. 하나님의 풍성한 인자하심을 믿고 의지하여야 합니다. 7절 말씀에서 “오직 나는 주의 풍성한 인자를 힘입었다”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풍성한 사랑을 믿고 의지한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공로를 내세워 기도 응답을 바라려 하지 마셔야 합니다. 공로를 내세울 만한 것도 없겠지만 또 내세울 입장도 못 되니까 오직 하나님의 사랑과 긍휼만을 의지하는 것이 좋은 것입니다.
6. 주의 집에 들어가 성전을 향하여 기도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구약 시대에 제물을 가지고 성전에 가서 자기를 위한 제물을 제사장에게 드리고, 성전 마당에서 기도하는 것을 표현한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의 우리의 기도는 예수님의 중보로 제물을 대신하고 교회 중심으로 성전을 대신하기 때문에 교회 중심의 기도와 예배당에서의 기도를 가장 귀하게 여기시는 줄로 믿으셔야 합니다.
7. “주의 집에 들어가 주를 경외함으로”(7절) 하였으니 이 말씀은 하나님께 대한 충성을 의미하며 교회에 충성된 생활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아무쪼록 ① 기도의 대상, ② 기도의 표현, ③ 아침 기도, ④ 순결, ⑤ 하나님의 인자하심, ⑥ 성전 기도, ⑦ 충성됨의 일곱 가지 조건을 갖춤으로 기도 응답에 더 좋은 결과가 있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제13과 부흥을 위한 기도 (합 3:1~2) 목록으로
이 시간에는 “부흥을 위한 기도”란 제목으로 교훈을 받겠습니다.
1. 지금 읽으신 본문 말씀은 하박국 선지자가 예언한 말씀입니다. 하박국 선지자가 어느 때 사람인가에 대하여 명시되지 않았으나 본문의 내용을 살피면 “바벨론이 일어나 유다를 칠 것과(1:6) 또 바벨론이 멸망할 것을 예고하신 말씀(2:16)을 보면 북방 이스라엘이 망하고 남방 유다가 바벨론에 멸망되기 전에 예언한 말씀으로 짐작되며 그 연대는 주전 650년경이 됩니다.
1) 본문 1절에서 “시기오놋에 맞춘바 선지자 하박국의 기도라” 하였습니다. 여기의 “시기오놋”이란 노래의 곡조 이름이며 하박국 선지자가 자기의 기도 내용을 그 곡목에 맞추어 노래를 부른 것입니다.
2) 2절에서는 “내가 주께 대한 소문을 듣고 놀랐다” 하였으니 이 소문이란 “하나님이 유다 민족을 권고하여 바벨론을 심판하시고 구원 사역을 이루어 주실 것”이란 것인데 이 말씀이 합 2:9~20에 나타난 내용입니다. 하박국이 이런 소식을 소문으로 알았다 한 것은 다른 예언자가 그런 계시를 받아 전달하였기 때문입니다.
3) 그래서 하박국 선지자는 “주여 주는 이 일(유다를 구원하는 일)을 수년 내에 부흥케 해 달라”고 기도하였으니 이 “수년 내”란 뜻은 원문적 의미로 볼 때 “사람의 중년기”를 의미한다고 합니다. 따라서 이는 하박국 선지자가 자기 죽기 전에 좋은 결과를 보고자 하는 심정으로 이런 용어를 사용한 것 같습니다. 문제는 “주의 일을 수년 내에 부흥케 해 달라”고 간구한 것처럼 저희들도 하나님의 구원하시는 일을 부흥케 해 달라고 기도하셔야 하겠습니다. 많은 설교자들이 이 부문에 나타난 “이스라엘의 회복과 부흥”을 신약 시대의 교회의 부흥에 관련을 시켜서 기도의 제목을 삼습니다.
2. 저희 교회가 부흥되려면 무엇을 구하여야 좋겠습니까?
1)요즘 큰 교회 되는 가장 좋은 비결은 교회의 위치를 잘 정하는 것입니다. 큰 도로 옆, 주차장 있는 공간, 아파트 밀집 지역에 세워지면 큰 힘을 안 들여도 사람이 많이 모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현상은 문제를 안고 있습니다. 그 문제가 바로 편의주의 신앙 생활입니다. 가기 좋고 오기 좋은 교회를 원한다면 이것은 분명히 편의주의가 아닐 수 없습니다. 신앙이 좋은 성도는 그것을 따지기 전에 진정한 교회의 요소를 찾아서 교회를 택하여야 할 것이요, 그 진정한 요소를 지닌 교회가 있다면 어디든지 그 교회를 나가야 할 것입니다.
2) 부흥되는 교회는 널리 소문난 교회이어야 합니다. 어떤 교회는 구제로 소문난 교회도 있고, 또 어떤 교회는 선심공세로 소문난 교회도 있으며 또 어떤 교회는 사회적으로 저명한 인사들과 교제를 갖는 교회도 있을 수 있습니다. 만일 사람들이 이런 것을 좋게 여겨 은혜를 사모한다면 바람직스럽지 못한 것입니다.
3) 따라서 가장 보람있는 교회로서의 좋은 소문은
① 진리가 충만한 교회라는 소문입니다. 성경을 바르게 증언하는 교회, 성경을 많이 가르치는 교회, 많은 성도가 성경 배우는데 열중하고 다른 것은 크게 중요시 하지 않으며 성경에만 몰두하는 성도를 많이 확보하는 교회인 것입니다. 하나님을 가장 기쁘시게 하는 방법은 성경을 연구함으로 하나님을 가까이 하는 것입니다.
② 사랑이 충만한 교회입니다. 사랑은 계명 실천의 강령으로 이 사랑이 풍성할 때 교회로서의 향기를 발하게 됩니다. 사랑을 받으려 하는 것은 크게 부끄러운 일로 알고, 사랑을 주려고 하는 것만 성도의 의무인 줄 알 때에 그 교회는 사랑이 풍성해질 것이고, 사랑이 없다는 불평은 아무에게서도 나오지 않을 것입니다.
③ 인격을 변화시키는 능력이 있는 교회이어야 합니다. 교회는 육체의 병을 고치는 병원이 아니고, 인격을 변화시켜 예수님을 닮게 하는 기관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아무개가 그 교회를 나가더니 새 사람이 되었다”는 소문이 날 때에 빛과 영적 사명을 다할 수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진리 충만, 사랑 충만, 변화 충만”한 교회가 되어 부흥되기를 기도하셔야 하겠습니다.
제14과 죄악을 친히 담당하심 (사 53:10~12) 목록으로
고난 주간이므로 주님의 고난을 생각하시면서 “죄악을 친히 담당하심”이란 제목으로 교훈을 받겠습니다(앞 부분의 말씀은 작년 이 때에 상고를 하였습니다).
1. 10절 앞 부분에서 예수님이 고난을 당하신 것은 하나님이 그렇게 작정하시고 이루신 일이라고 하셨습니다(빌 2:8). “상함을 받게 하시고 질고를 알게 하심”은 예수님의 십자가 고난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이 사실을 약 700년 전에 예언을 하였습니다.
2. 그 고난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뜻이 성취되는데 그 뜻이란 “그 씨를 보게 되며 그 날은 길 것”이란 것입니다.
1) “씨를 본다”는 것은 십자가의 속죄 사업으로 말미암아 구원받는 자들이 생길 것을 의미하고,
2) “그 날이 길다”는 것은 구원의 축복이 영원할 것을 의미한 것입니다. 다시 말씀 드리면 “씨를 본다”, “씨가 떨어진다”는 것은 생산을 뜻하므로 십자가의 구속 사업으로 구원받을 생명이 나타날 것을 예고하심이요, 또 구원이란 영생을 뜻하기 때문에 그 날이 긴 것입니다.
3. 11절에서는 “선민의 죄악을 담당하신 예수님의 십자가의 순종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함으로 하나님의 용서에 의하여 많은 사람을 의롭게 한다”고 하신 것입니다. 여기에서 예수님의 십자가는 육체의 고통만 당하시는 것이 아니고, 그 보다 더 큰 마음의 고통을 당하심에 대하여도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10절 말씀에서 “영혼을 속건 제물로 드린다”는 말씀(속건 제물이란 제물을 들어올리는 것을 의미하므로 예수님의 마음 고난을 뜻함)과 11절의 “자기 영혼의 수고”란 말씀이 그것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십자가는 몸과 영혼의 수고가 되는 것입니다.
2) “하나님은 의로운 종 예수님이 자기의 지식으로 많은 사람을 의롭게 한다” 하셨으니 이 말씀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뜻과 구원하라고 주신 대상을 아는 지식”으로 그들의 죄를 담당하신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님이 십자가에 돌아가실 때 우리 개개인의 죄도 전부 개별적으로 기억하시고 속죄의 고난을 당하셨다는 뜻입니다. 여기에서 저희들은 예수님의 십자가가 바로 “내 죄를 위함”이란 사실을 확인하게 되는 것입니다. 한 사람의 죄도 도매금에 사죄되는 법은 없습니다. 따라서 저희들은 예수님의 십자가를 각자를 위한 십자가로 생각하여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셔야 하는 것입니다.
4. 12절에서는 “예수님의 속죄 사역으로 인한 승리”에 대하여 말씀하셨습니다.
1) 예수님의 속죄 사역은 자기의 영혼을 버려 사망에 이름으로 자신을 범죄자로 취급되게 하심이고,
2) 그 범죄자로 취급됨이 많은 사람들의 죄를 사함 받게 하는 방법이며
3) 이로 인하여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을 성취함에 있어서 승리자가 되셨다고 하신 것입니다. “존귀한 자와 함께 분깃을 얻고 강한 자와 함께 탈취한 것을 나눈다” 하심이 예수님의 승리를 표현한 말씀입니다. 이 승리는 복음으로의 승리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5. 마지막 부분에서 “범죄자를 위하여 기도하셨느니라”하신 말씀은 예수님이 영원한 중보자가 되셔서 범죄한 선민의 구원은 물론 하나님과의 사이에서 중보 역할을 하시는 제사장임을 예언하신 것입니다. 저희들은 이번 고난 주간을 맞이하여 ① 예수님이 우리 자신들을 개인적으로 기억하시고 십자가로 속죄하신 사실, ② 이 일이 하나님의 계획에서 이루어지되 예수님이 기꺼이 순종하신 사실, ③ 예수님이 승리자 되시고 영원한 중보자 되신 것을 아시고, 항상 주님의 십자가를 기억하시면서 생활을 가다듬어 십자가 중심의 신앙 생활을 잘 하도록 노력하셔야 할 것입니다. 십자가 중심의 생활은 바로 나 자신을 주님의 뜻을 위하여 십자가에 못 박는 생활입니다.
제15과 부활을 믿느냐? (요 11:25~27) 목록으로
예수님의 부활 주일을 맞이하여 본문에 나타난대로 “부활을 믿느냐?”는 제목으로 교훈을 받겠습니다.
1. 예수님이 “베다니”(예루살렘 동쪽 2㎞ 지점의 동리)에 사는 친구 “나사로”의 집에 가셨을 때 나사로는 죽은 지 4일째로 무덤에 장사된 상태였습니다.
1) 이 때에 예수님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이 부활과 생명을 주시는 분이란 뜻입니다. 이 세상에는 많은 생명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 생명을 주시는 분이 예수님입니다. 어떤 동물이나 식물이건 생명이 떨어지면 그 몸체는 흙에 속할 뿐입니다. 거기에 생명을 주시면 사는 것이니까 결국은 흙에서 생명체로 변하는 것입니다. 나사로가 부활한 것도 결국 흙에서 산 것인즉 이것이 바로 육체 생명의 부활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은 생명과 부활을 같이 소유하신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2)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을 “부활의 주”, “생명의 주”로 믿을 때에 그 자신도 죽은 후에 생명의 부활을 받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 생명의 부활이란 천국에서 영생하는 부활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성경에는 악인(불신자)도 부활한다고 하셨습니다(행 24:15, 계 20:13). 그러나 악인의 부활은 지옥에 가는 부활이기 때문에 이것을 생명의 부활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라는 말씀은 예수님을 생명의 주(부활의 주)로 믿는 자에게 장차(주 재림시에) 영원의 부활을 받게 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3)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라” 하셨으니 이 말씀은 육체적 죽음을 맛보지 않는다는 뜻이 아니고, 영혼이 죽지 않는 만큼 육체의 죽음은 마치 의복을 멋는 것에 불과할 뿐 영생을 살고 있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구원받는 생명이 죽을 때 “네가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니라”(눅 23:43)고 하셨습니다.
4) 예수님께서는 나사로의 누이 마르다에게 “네가 이것을 믿느냐?” 하셨습니다. 이 때에 마르다는 대답하기를 “주여 그러하외다 주는 그리스도시오 세상에 오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하였으니 성도들도 꼭 이대로 믿어야 하는 것입니다.
① 부활을 믿되 예수님이 부활이요, 생명이신 것과
② 그를 믿음으로 자신도 장차 생명의 부활을 받을 것과
③ 그 다음에는 예수님이 그리스도(구세주)라는 사실과 또 하나님의 아들이란 사실입니다. 예수님을 부활 생명의 주인으로 또 그 분이 하나님의 아들이란 사실, 예수님이 그 자격과 그 능력을 가지시고 우리를 구원하신 구세주 이심을 꼭 믿으셔야 합니다.
2. 예수님은 죽은 자를 살리시는 생명과 부활의 주인이심을 사실로 입증해 주셨으니 그것이 곧 나사로를 죽은 지 나흘 만에 살리신 것입니다. 죽은 나사로를 살리신 것은 육신적 생명을 다시 살리신 것입니다. 여기에서 세 가지 생명, 세 가지 죽음, 세 가지 부활에 대하여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1) 세 가지 생명이란 영적 생명, 육신적 생명, 그리고 영원한 부활의 생명이요,
2) 세 가지 죽음이란 영적 죽음, 육적 죽음, 법적 죽음이며
3) 세 가지 부활이란 영적 부활(거듭남), 육신적 부활(나사로 부활), 영화로운 부활(예수님처럼)입니다. 인생은 누구나 영혼과 육체의 생명을 받아 태어났습니다. 그런데 육체의 생명이 죽어도 영혼은 죽지 않습니다. 구원받는 영혼은 천국으로, 그렇지 못한 영혼은 지옥에 가야 하니까요. 그러나 부활체가 되면 이 영혼과 부활체가 합한 것이 되는 것입니다. 또 영적 죽음은 타락이고 육신의 죽음은 세상을 떠남이요, 법적 죽음은 심판을 받고 지옥에 가는 것입니다. 또 영적 부활은 중생(거듭남)이고, 육신적 부활은 나사로의 부활 같은 것이며(이는 다시 죽음) 영화로운 부활은 예수님처럼 다시 죽을 수 없는 영원한 몸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부활 소망을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감사하시면서 영생을 사는 자처럼 살아가셔야 할 것입니다.
제16과 예수를 믿는 이유 (벧전 3:13~16) 목록으로
이 시간에는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물을 때 어떻게 대답할까 하는 내용을 배우도록 하겠습니다.
1. 지금 읽으신 말씀 13~16절에는 여러 가지 교훈의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1) “열심으로 선을 행할 것과 선을 행하는 자를 누가 해 하겠느냐”고 하신 것입니다. 인자무적이란 말이 있는 것처럼 죄 안 짓고 선을 행하면 아무도 해하려 할 사람이 없을 것입니다.
2) “의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면 복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마 5:11~12에서 예수님도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을 위하여 핍박을 받는 자는 복이 있고 하늘의 상이 크다고 하셨습니다.
3) “핍박을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주로 핍박자들은 재물이나 명예나 육신을 해하는 것으로 두렵게 하는 방법을 쓰지만 성도는 그런 것을 두려워하지 말아야 하는 것입니다. 오직 두려운 대상은 “몸과 영혼을 아울러 지옥에 보내는 하나님”만을 두려워하여야 하는 것입니다(마 10:26). 따라서 핍박자들의 핍박에 의연한 자세를 취하고 요동하지 말아야 합니다.
4) 마음 속에 주 예수님을 모시고 거룩함을 이루라고 하신 것입니다. 거룩이란 예수님의 인격을 닮아가는 것을 뜻합니다. 따라서 예수님을 닮는 것을 신앙 생활의 제일 과제로 여기셔야 합니다.
5) 소망에 관한 이유를 대답할 때에도 “온유함과 두려움”으로 하고, 또 “선한 양심을 가지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전도자나 설교자가 진실하고 겸손한 품위를 지녀야 할 것을 교훈하신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온유한 태도이고 하나님을 두려워 하는 마음이며 항상 진실하고 선한 양심을 갖는 것입니다. 그래야 핍박자들에게 감동을 줄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16절).
2. 소망에 관한 이유, 즉 예수 믿는 이유에 대하여 살펴보시겠습니다. 본문 15절대로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가 있습니다. 즉 “왜 예수님을 믿느냐?”고 물어오는 것입니다. 이 때에 대답하는 방법을 항상 예비하고 있다가
1) 하나님이 믿게 해 주셔서 믿는다고 대답할 수 있습니다. 상대방이 믿음을 갖지 못하는 것도 그에게 믿을 힘이 없어서 못 믿는 것처럼 자신이 예수를 믿는 것은 하나님이 믿도록 마음을 주셨기 때문에 믿게 되는 것입니다(엡 2:1, 고전 12:3, 살후 1:10, 요 3:3). 그리고 믿음을 가진 자 자신은 자기의 신앙이 천래적인 것임을 확신하고 감사한다고 하셔야 할 것입니다.
2) 예수님이 곧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요 1:2).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이 살아계신 줄만 알면 믿겠다”고 합니다. 문제는 예수님이 하나님이신 줄을 모르기 때문이지요. 그러나 만물이 실재하는 것과 다른 원인에 의하여 인간이 출현한 것과 우주의 모든 통치가 사람으로 말미암지 않은 것을 알고, 또 성경에서 예수님이 하나님 되심을 증명한 사실을 알 때에 충분히 믿을 수 있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예수님 외에 다른 하나님은 없기 때문입니다.
3) 죄사함 받고 하나님의 심판을 면하여 구원 영생을 받기 위함입니다. 인간은 자신이 스스로 생각하여도 의인이라 할 수 없습니다. 의인이 아니면 죄인이란 뜻이지요. 그렇다면 죄인이 벌을 받아야 한다고 해야 당연하지 않겠습니까? 이것이 인간의 진실한 양심의 소리입니다. 따라서 인간은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음이 사실이고, 여기에서 구원을 받아야 할 필요가 생기는 것입니다. 요 3:16에서 하나님은 예수님을 구세주로 세워 구원의 뜻을 펼쳐주셨습니다. 그런고로 이 구원의 은총을 힘입기 위하여 예수를 믿는 것이 마땅한 일입니다(행 4:12).
4) 피조물이 창조자를 경외하는 것은 마땅하며 또한 이것이 인생의 본분이기 때문이요(전 12:13),
5) 하나님이 우리의 생사화복을 주관하시기 때문입니다. 신 30:15에서 하나님은 “생명과 복과 사망과 화를 우리 앞에 두신 분이라”고 하셨습니다. 이러한 근거로서 우리는 예수님을 믿는다고 대답하셔야 할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이 대답은 우리의 신앙 고백이고 또 신앙 생활의 목적임을 아셔야 할 것입니다.
제17과 사무엘에게 말씀 주심 (삼상 3:1~9) 목록으로
이 시간에는 “사무엘에게 말씀을 주심”이란 제목으로 교훈을 받겠습니다.
1. 사무엘이 어떤 사람입니까? 이 사람은 사사 시대 마지막 때요, 이스라엘 나라에 처음 왕정 시대가 설 무렵에 하나님의 마지막 사사요(삼상 7:6, 행 13:20), 선지자로 일을 한 사람입니다.
1) 사무엘이 태어난 시기는 이스라엘의 사사 시대 말기이므로 주전 1100년경이고, 에브라임 지파 “엘가나”와 “한나” 사이에서 태어났습니다. 한나가 아들이 없자 하나님께 기도하여 얻은 아들이 사무엘이었습니다. 한나가 아들을 구하면서 기도할 때에 그 아들을 주시면 평생을 하나님께 드려 하나님을 섬기는 자를 삼겠다고 서원을 했기 때문에 젖을 뗀 때부터 당시의 제사장인 엘리에게 맡겨 성소(성전)에서 자라게 하였습니다. 솔로몬왕이 하나님의 집을 잘 지은 다음부터 “성전”이란 용어를 쓰게 되었고, 그 이전에는 하나님의 법궤를 장막 속에 안치하였기 때문에 이것을 “여호와의 장막”, 또는 “성소”라고 일컬었습니다. 본문 3절에서는 “하나님의 궤가 있는 전”이라고 하였습니다. 그 전 안에는 법궤가 안치된 지성소가 있고, 그 앞에는 향단과 진설병을 드리는 상과 등잔을 켜서 밝히는 성소가 있습니다. 사무엘은 이 성소에서 잠을 잤고, 엘리 제사장은 그 성소 옆에 있는 자기 처소 즉 숙직실에서 잠을 잤는데 하나님의 말씀이 엘리 제사장에게는 임하지 않고 어린 사무엘에게 임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사무엘에게 임하였다는 것은 바로 성경과 같은 계시를 주시는 것을 의미하며 또 하나님이 그를 가까이 교제해 주심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2. 하나님의 말씀이 사무엘에게 임하여 주심에 대하여 좀 더 살펴보면
1) 1절 말씀에서 그 당시에는 하나님의 말씀이 희귀하였다고 하였습니다. 지금 우리가 가진 성경은 그 당시와 그 이전과 그 이후 시대에 즉 모세로부터 사도 시대에 이르기까지 약 1600년 동안 주신 말씀들을 한데 모아서 완전하게 편집된 말씀을 갖고 있지만 그 당시에는 말씀이 선지자들에게 가끔 임하였으나 기록으로 쉽게 전달되지는 못했습니다. 따라서 저희들은 이 시대에 문화적 혜택으로 기록된 말씀을 받아가지고 사는 것을 큰 복으로 여기셔야 하는 것입니다.
2) 그리고 어린 사무엘에게 말씀을 주시기 이전에 늙은 엘리 제사장에게도 말씀을 주신 일이 있었습니다(삼상 2:27~36). 그러나 늙은 엘리 제사장은 하나님의 경고의 말씀을 실천할 능력이 없었습니다(삼상 3:13). 그렇게 되자 그에게는 말씀을 다시 주시지 않고 어린 사무엘에게 주신 것입니다.
3) 따라서 어린 사무엘이 하나님의 말씀을 받게 된 이유를 살피면
① 그는 성전을 떠나지 않고 기도를 힘썼기 때문입니다. 3절 말씀에서 “그가 여호와의 전에 누웠다”는 것은 잠만 자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다시 말하면 기도하기 위하여 그 곳에서 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기도를 힘쓰는 자에게 말씀을 주셨습니다.
② 사무엘은 대단히 순결한 아이였습니다. 하나님은 순결한 성도에게 말씀을 주십니다. 사무엘은 어려서 젖떼기 까지만 부모 아래서 자라다가 젖 뗀 후에 제사장에게 데려갔고 그 때부터 성소에서 매일 생활을 하였으니 거의 세상의 때가 묻지 않은 아이였습니다(삼상 1:21~28). 마 5:8에서도 “마음이 청결한 자가 하나님을 볼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도 역시 순결한 자에게 하나님이 가까이 해 주신다는 말씀입니다.
③ 헌신하는 자에게 말씀을 주십니다. 사무엘은 어릴 때부터 헌신을 하였습니다(삼상 1:28, 2:18). 이렇게 기도와 순결과 헌신을 잘 하는 자에게 하나님은 말씀을 주신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성경을 깨달음으로 받습니다. 따라서 성경을 많이 깨닫고 기도와 순결과 헌신을 힘쓰심으로 하나님을 가까이 하시는 성도님들이 되셔야 할 것입니다.
제18과 영원한 것을 사모하자 (고후 4:16~18) 목록으로
이 시간에는 “영원한 것을 사모하자”는 제목으로 교훈을 받겠습니다. 지금 읽으신 말씀에는 세 가지 강조된 말씀이 있습니다.
①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하신 말씀이고,
② “환난의 경한 것이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이루게 한다”는 말씀이며
③ “우리의 돌아보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에서 영원한 것을 사모해야 된다는 교훈을 받습니다.
1.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하신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전도자 바울 사도의 일행이 어떠한 환난과 핍박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않는다는 말씀입니다. 성경 말씀을 살펴보실 때 성도는 낙심을 하여서는 안 되게 되어 있습니다. 그 이유는
1) 하나님이 소망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이고(롬 15:13),
2) 소망은 항상 있어야 하며(고전 13:13)
3) 환난 중에서도 연단의 유익을 내다보면서 즐거워하여야 하기 때문이요(롬 5:4~5),
4) 인간이 고난을 당하는 경우가 두 가지 있는데
① 죄가 있어서 매를 맞는 경우입니다(벧전 2:20). 이 때는 속히 회개하고 바르게 사는 연단을 받으면 더 유익하기 때문이고(시 119:67, 71),
② 애매하게 또는 선한 일에 핍박을 받는 경우입니다. 그러나 이 때도 주님의 칭찬과 상급을 기대하면 되기 때문입니다(벧전 2:19, 마 5:11~12). 꼭 그렇게 믿고 낙심을 멀리 하고 사는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2. “환난의 경한 것이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이루게 하신다”는 말씀입니다(17절).
1) 여기의 “환난의 경함”이라는 뜻은 환난이 심해도 육신적인 환난이고(영적인 것이 아닌), 또 이 세상에서만 잠깐 당하는 것이기 때문에(천국에는 환난이 없으니까) 그 환난이 영원히 지속되는 것(지옥의 고통같은 것)에 비할 때 아주 가벼운 것이란 뜻입니다. 그래서 성도는 어떤 경우로 환난을 당하든지 그것을 중하게 여기시지 말고 가볍게 여겨야 하는 것입니다.
2) 그리고 이 환난을 신앙적으로 대처해 나갈 때에는 언제든지 유익이 있게 됩니다. 예를 들면 높은 산의 나무가 바람을 탈 때는 그 나무의 뿌리가 더 깊어지는 유익과 같은 것입니다. 이와 같이 성도가 환난에 대하여 회개하거나 또는 연단을 잘 받으면 깨닫는 유익은 물론 연단도 받아서 더 강해질 수도 있고, 또 그 환난이 무고한 핍박이라고 할 때는 천국에서의 상급이 큰 만큼 더 유익이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환난은 믿음과 인내와 소망을 더 갖게 해 줄 수 있기 때문에 더 중한 것(유익하고 복된 것)을 이루는 것이요,
3. “영원한 것을 사모하라”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이 바로 18절의 “우리의 돌아보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라”는 말씀입니다. 물건도 오래 쓸 수 있는 것이 좋은 것입니다. 이와 같이 잠깐 있는 인생보다 영원한 인생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잠깐 있는 인생이란 이 세상을 불신앙적으로 살다가 지옥에 가는 것을 뜻하고, 영원한 인생은 천국의 영생을 누리는 자를 의미합니다.
1) 그런데 우리의 육신이나 현실에서 행하는 일은 모두가 짧고 영원하지 못합니다. 그리고 이것은 다 눈에 보이는 것들이요, 물질적인 것들입니다. 따라서 이런 것은 깊히 사모할 것이 못됩니다.
2) 그러나 영혼이나 천국, 신령한 복, 즉 보이지 않는 것들은 다 영원한 것입니다. 그래서 성도들이 참으로 실속있게 사는 방법은 날로 후패하여 가는 육체적인 생활에 집착하거나 그것으로 인하여 염려하거나 거기에 사활을 건 자처럼 생활할 것이 아니라 신령한 복과 영원히 누릴 것을 위해서 즉 보이지 않는 것과 내세의 소망을 위해서 진력하셔야 할 것입니다.
겉사람은 후패하는 것이고, 이 세상은 잠시 살다가 끝나는 것이며 하나님과 천국만 영원한 줄로 알고 사모하라는 것이 본문의 취지입니다.
제19과 은혜로 구원을 얻음 (엡 2:1~10) 목록으로
본문 5절을 보시면 “너희가 은혜로 구원을 얻은 것이라”는 말씀이 있고, 또 본문 말씀에는 “은혜로 구원받은 사실을 강조” 하셨기 때문에 “은혜로 구원 받음”이란 제목으로 교훈을 받겠습니다. “은혜로 구원을 받았다”는 뜻은 인간의 공로가 없이 하나님이 거저 주신 선물로 구원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1. 먼저 제가 본문을 설명드릴 때 꼭 성경의 글자를 확인하시면서 설명을 들으시기 바랍니다.
1) 1절의 “너희의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다”는 뜻은 에베소 교회 성도들이 그들의 죄와 허물로 인하여 죽었었는데 하나님이 다시 살리셨다는 것입니다. 여기의 죽었다는 의미는 영적 생명이 죽으므로 신앙적, 도덕적 선의 기능을 상실했다는 뜻이고, 이것을 하나님이 다시 살리셨다는 것은 하나님이 거듭나게 하심으로 영적 생명을 다시 살려 회복시켜 주셨다는 뜻입니다. 이 말씀에서 영적으로 죽은 자를 살게 하신 것은 하나님의 창조와 부활의 권능으로 거저 주신 은혜인 것입니다.
2) 2절에서는 “그 때에 너희가 그 가운데 행하여 이 세상 풍속을 좇고” 하셨는데 이것은 에베소 교회 성도들이 믿지 않았을 때에 인간 중심으로 살아온 죄를 지적하신 말씀이고, 또 그 다음 말씀에서 그들이 죄를 범한 것은 “공증의 권세, 즉 이 세상에서 활동하는 권세를 갖고 진리를 거스리는 자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마귀를 따름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3) 3절 말씀에서는 이 말씀을 기록하여 보낸 바울 사도를 중심한 복음사역자들도 믿기 전에는 그들과 다를 바가 없었다고 고백을 한 것입니다. 그들도 역시 마귀의 유혹에 빠져서 육체의 욕심대로 행하고,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대로 죄를 져서 확실하게(본질상) 하나님의 진노의 심판을 받을 대상이었다는 것입니다(이 말씀까지 인간의 타락에 관한 말씀입니다).
4) 4절 말씀에서는 구원의 근거가 하나님의 긍휼과 사랑임을 말씀하셨습니다. 긍휼이란 죄인을 불쌍히 여기시는 마음이고, 사랑은 은혜를 베푸시고자 하시는 호의적 마음을 뜻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죄인에 대한 이런 긍휼과 사랑이 구원을 하시게 된 근거가 된 것입니다.
5) 그래서 5절을 보시면 “허물과 죄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신 것”입니다. 여기에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다”는 뜻은 예수님의 부활 능력에 근거하여 거듭나게 하셨다는 것이고,
6) 또 6절에서 “함께 일으키셨다”는 것도 역시 예수님의 부활 능력에 근거하여 부활시키신다는 것이며 “함께 하늘에 앉히신다”는 것도 역시 예수님의 부활, 승천과 연계되어 승천할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활 승천이 우리와 같은 시간에 이루어지지는 않지만 역시 같은 일행으로 취급하시는 것입니다.
7) 7절 말씀에서는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이처럼 베푸신 풍성한 은혜를 미래의 여러 세대에 걸쳐 나타내신다는 것이요,
8) 또 8절에서는 은혜로, 믿음으로, 하나님의 선물로, 구원받는 것을 말씀하셨고,
9) 9절에서는 은혜로 받았기 때문에 인간이 자랑할 수 없으며
10) 10절에서는 피조물로 구원받은 성도는 예수님 안에서 선한 일만 하게 하시기 위하여 사명을 주신 것인데 이 “선한 일” 자체도 하나님이 만세 전에 예비하시고 계획해 놓으신 것이기 때문에 인간은 자기의 선한 일로도 자랑할 수 없는 것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이상으로 본문 설명을 자세히 말씀 드렸습니다.
결론은 인간이 구원을 받음에 있어서
① 선택도 하나님이 하셨고(롬 11:5),
② 복음에 접하도록 부르심도 하나님이 하신 것이며(갈 1:15),
③ 믿음도 하나님이 주셨고(행 18:27), 독생자도 거저 주셨으며(롬 8:32), 죄사함과(7절) 칭의도 주셨고(롬 3:24, 딛 3:7), 부활과 승천과 영생도 다 하나님이 거저 주시는 것이기 때문에 은혜가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저희들은 이 은혜로 구원받은 사실을 아시고, 설명하실 수 있어야 하겠기로 이 말씀을 상고한 것입니다.
제20과 가족과 이웃을 살핌 (딤전 5:1~8) 목록으로
5월 가정의 달을 맞이하여 가족과 이웃을 살피는 문제를 교훈받겠습니다. 지금 읽으신 말씀은 바울 사도께서 젊은 사역자 디모데에게 목회상의 책임을 말씀해 주신 내용입니다. 목회자가 목회를 할 때에 설교, 기도, 심방, 치리 등 여러 가지가 있겠습니다만 그 중에 노인들과 과부들을 돌보아야 할 것과 또 자기 가족에 대한 책임도 이행하셔야 할 것을 교훈하신 것입니다. 저희들은 이 말씀을 통해서 가족과 이웃에 대한 교훈을 받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1. 예수님은 마 12:48~49에서 “누가 내 모친이며 내 동생들이냐…누구든지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자가 내 형제요 모친이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성도들이 모든 믿음의 권속들에 대하여 자기 가족처럼 대하여야 할 것을 교훈하신 것입니다.
2. 본문 말씀에서는 주위에 계신 모든 사람들, 특히 도와드려야 할 가족들에게 협력하도록 노력해야 할 것을 교훈하셨습니다. 그 분들이 바로 노인들과 과부들입니다.
1) 1절에 보시면 “노인들에게 꾸짖지 말로 아비에게 권하듯 하라”고 하였습니다. 노인들이 지혜로운 면도 있지만 정신과 몸이 쇠약한 관계로 실수를 하는 경우도 있는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노인은 기억력이 약해져서 실수를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런 때에 젊은 사람들은 그 분들을 자기의 부모처럼 생각하며 친절하게 권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2) “젊은이들을 형제에게 하듯 하고 늙은 부인들에게는 어머니에게 하듯 하라”고 하셨습니다. 사람이 늙고 몸이 불편해지면 그 모든 생활이 깨끗지 못할 수 있습니다. 이런 때에 불쾌한 마음을 가지려 하지 말고, 자신의 부모처럼 생각하여 뜨거운 마음으로 살펴드리는 정성을 나타낼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3) 2절에서는 “젊은 여자를 일체 깨끗함으로 자매에게 하듯 하라”고 하셨습니다. 교회 안에서 남녀 교제 문제가 덕스럽게 나타나지 않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우는 경우가 있습니다. 특히 청년 남녀들의 교제가 그렇고, 또 때로는 장년층 남녀의 교제도 경건의 권위를 상실하여 나타날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이런 문제를 일체 깨끗함과 자매에게 하듯 하라고 교훈하신 것입니다.
4) 3절에서 “참과부인과 과부를 공경하여 접대하라”고 하셨습니다. 참과부란 60세를 넘도록 재혼하지 않고 자녀들을 양육한 여성을 말하는 것입니다(9절). 혼자 된 몸으로 자녀를 양육할 때 고생을 많이 한 분들은 참과부로 존경을 받아야 하지만 같은 과부라도 젊은 나이에 있으면서 성실하게 살려하지 않고 일락을 좋아하는 여자는 “살았으나 그 정신과 생활이 죽은 것이라” 하심으로 그런 생활을 경계하도록 하셨습니다. 그러나 존경을 받아야 할 참과부는 외로운 입장에 있으면서도 하나님께 소망을 두고 간구와 기도를 힘쓰는 자라고 하셨습니다(5절).
5) 과부 어머니를 모신 자녀들에게 “효도할 것을 교훈하라”고 하셨습니다. 과부의 자녀들은 그 어머니의 뜨거운 노력으로 자신들이 양육받은 것을 감사하게 생각하고 그 어머니의 노고를 더욱 격려해 드려야 할 것입니다(편모 슬하의 자녀들이 혹시 버릇없게 하는 일들이 있어서 이런 교훈을 하신 줄 압니다). 또 7절 말씀에서 “그들로 책망 받을 것이 없게 하라” 하신 것은 일락을 좋아하는 과부나 불효하는 자녀들이 책망 받을 일이 없도록 잘 교훈하라는 말씀이요,
6) 마지막으로 자기의 친족이나 가족을 돌아보지 않는 성도는 “믿음을 배반한 자”라고 하심으로 친족과 가족에 대한 의무를 강조하셨습니다. 친족이나 가족은 사랑의 제 일 대상입니다. 따라서 이 의무를 버렸다면 이는 믿음을 버린 것이나 다름이 없을 것입니다.
아무쪼록 가정의 달을 맞이하여 가정과 이웃에 더 큰 행복이 있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이 말씀을 드렸습니다.
제21과 교회 중심의 화평 (시 133:1, 행 2:46~47) 목록으로
지금 읽으신 두 요절은 교회 중심의 화평에 대하여 찬사와 방도와 결과를 말씀해 주신 것입니다. 먼저 시 133:1의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함이 어찌 그리 선하고 아름다운고” 하신 것은 교회 안에서 성도가 사랑으로 화목하는 것을 찬탄하여 기뻐하신 말씀이고, 행 2:46~47에서는 성도 간의 화평하는 방법으로서 ① 마음을 같이 하고, ②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며 ③ 순전한 마음으로 친교하고, ④ 하나님께 찬송하며 ⑤ 백성들로부터 칭찬을 받는 것이요, 마지막으로 이 화평의 결과는 “주께서 구원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는 복을 받는 것입니다.
1. 먼저 본문에서 주신 교훈을 다시 한 번 음미해 보겠습니다.
1) “날마다 마음을 같이 하라”는 것입니다. 내 마음이 예수님을 따르든지, 또는 여러 사람들 앞에서 자신의 의견만 말하고, 여러 사람의 의견을 존중하여 따르면 되는 것입니다.
2)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는 것”입니다. 화평은 사람끼리 성도끼리 이루는 것이기 때문에 항상 모이기를 힘쓰되, 성전에 모여야 할 것은 하나님 중심, 신앙 중심으로 화평하여야 하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 중심으로 살기 위한 목적으로 화평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3) 순수한 친교를 갖는 것입니다. “집에서 떡을 떼며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는다”는 것은 그 친교의 목적에 인간 정욕이 개입되지 않고, 오직 십자가 정신으로만 교제함을 뜻하는 것입니다. “떡을 뗀다”는 말씀은 성찬 예식을 의미하고, “음식을 먹는다”는 말씀이 식사를 같이 한다는 뜻입니다. 사회인들의 식사는 장사하는 목적이 많습니다만 성도의 친교는 오직 십자가 중심으로 합력하자는 목적 외에는 없어야 할 것입니다. 이것이 순수한 친교입니다.
4) “하나님께 찬미”를 하였으니 이는 기쁨과 감사가 넘치는 표현이며 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 성도는 모일 때 즐거워하며 감사의 찬송을 드릴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5) 백성들로부터 칭찬을 받는 것입니다. 이 칭찬받는 것이 있을 때 비로소 전도가 되는 것입니다. 백성들로부터 칭찬받는 것이 곧 전도요, 하나님은 이 전도를 통해서 “구원받는 백성을 날마다 더하신다”고 하셨습니다.
6) 여기에 “구원받는 백성을 더 하신다”는 뜻은 선택한 백성을 늘리신다는 의미가 아니고 사랑과 친교를 원만하게 나누는 단체(즉 교회)에 성도를 많이 보내 주신다는 말씀입니다.
2. 교회는 사랑이 무르익은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옛날에 나무를 아궁이에 땔 때, 날장작은 불이 잘 붙지 않습니다. 그러나 아궁이가 뜨겁게 달아 있을 때는 날장작도 여지없이 잘 타는 것을 보았습니다. 우리 교회가 이 달궈진 아궁이처럼 사랑이 뜨겁고 불붙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말씀과 기도와 사랑으로 뜨겁게 달구어진 아궁이처럼만 되면 쉽게 부흥이 될 것입니다.
3. 교회 중심의 화평을 이룩하는 방법이 무엇입니까?
1) 모든 성도와 모든 이웃과 다정하게 지내는 것입니다. 절대로 덕 안 되거나 남을 비난하는 말은 삼가야 합니다.
2) 잘못하는 사람들이나 잘못된 일들에 대하여 최대한 인내하여야 합니다. 이것은 부조리를 용납하라는 뜻이 아닙니다. 침착하게 대처하는 지혜를 써야 함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단체 생활 안에서는 내 생각 같지 않은 일들이 너무 많습니다. 때로는 충성하고 오해받는 일도 있습니다. 이런 때에 널리 이해하고 포용하는 아량과 인내를 꼭 실천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3) 교역자와 지도층인 당회와도 화목하여야 합니다. 히 13:10에서 “신앙의 지도자들로 하여금 기쁨으로 일하게 하고 그들의 지도에 순종하라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유익이 없다”고 하셨습니다. 교회라는 단체 생활에서 모든 이와 화목하면서 충성하는 정도이면 크게 연단받고 성숙한 성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제22과 성부, 성자, 성령님에 대한 공부 (마 3:11, 16~17) 목록으로
1. 부활 주일을 지난 7번째 주일을 성령강림주일이라고 합니다. 이것은 예수님이 부활하신 다음 첫 번 돌아오는 오순절 절기에 성령님이 강림하셨기 때문입니다. 오순절이란 행 2:1에 나타나는 말씀이고, 그 절기는 레 23:15에 근거하여 농사를 지어 첫 이삭을 드린 후 50일째 되는 날에 새 소제를 드리라는 규례가 있습니다. 이 50일째 되는 날을 사도행전 기자는 오순절이라고 호칭을 하였습니다. 구약의 유월절은 예수님의 고난을 예표하는 절기였는데 마침 예수님은 그 예표적 예언에 따라 유월절 때 돌아가셨습니다. 그리고 3일 만에 부활하셨는데 부활하신 후 40일 동안 땅에 계시다가 “몇 날이 못 되어 약속하신 성령을 보내실 것이라”(행 1:3~5)하시고 승천하셨는데 과연 그 말씀대로 10일 후인 오순절 때에 성령님이 강림하시게 된 것입니다. 그런 뜻에서 부활 주일 후 7주가 지난 뒤에 성령강림 주일을 지키는 것입니다.
2. 지금 읽으신 본문에서는 성부, 성자, 성령님이 한 장소에 나타나셨습니다. 예수님은 요단강에 들어 서셨고, 성령님은 비둘기 같이 내려 예수님 위에 머무셨으며 성부하나님은 하늘에서 말씀 소리로 나타내 주셨습니다. 이 말씀의 본문 해석은 목사님의 마태복음 강해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문제는 성부, 성자, 성령님이 한 장소에 출현하신 것을 보시고 “성삼위의 하나님이 존재하시는 것”을 믿으시라는 것입니다.
3. 하나님은 스스로 존재하시는 절대자이십니다. 그래서 우리 인간은 하나님의 존재에 대하여 무조건 믿을 따름이요, 하나님의 모습이 우리 마음에 들어야 믿는 것은 아닙니다. 어떤 이는 “왜 하나님은 한 분이신데 3위의 하나님이 계시다고 하느냐?” 하는 이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의심은 마치 손자가 할아버지의 수염을 만지면서 왜 할아버지는 수염이 있느냐고 묻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막 12:32에서 하나님은 한 분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요 1:1에서는 예수님도 하나님이시라고 하셨습니다. 또 행 5:3~4에서 “성령을 속인 것은 곧 하나님을 속인 것이라” 하심으로 “성령님도 하나님이시라”고 하셨습니다. 이런 성경은 더 많이 있지만 우선 기억하시기 좋게 하기 위하여 한 절씩만 말씀드린 것입니다. 한 분이란 뜻은 최고 절대의 신으로 본질 이 같은 한 분이란 뜻입니다. 그런데 그 하나님은 성부, 성자, 성령님으로 나뉘어 계시고, 나뉘어 역사하시되 같은 뜻 안에서 하시고, 영광과 권능은 동등하시나 활동 사역에서는 서로 나누어 역사하시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광대하시고 신령하시며 또 인간의 생각으로 다 수용할 수 없는 신비한 분이시니까 그 존재와 본질과 역사에 대하여 성경에 나타난대로 믿으셔야 하는 것입니다. 삼위일체 하나님을 믿는 것은 하나님의 창조 사역을 믿는 것처럼 그대로 믿으시는 것입니다.
4. 하나님은 삼위 중에 제 일위에 계십니다. 그 이유는 “예수님이 하나님을 아버지라” 하셨고, “성령님을 하나님의 신이라”(창 1:2) 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성부, 성자, 성령님의 인격적 위의 순서 중 성부 하나님께서 제 일위가 되십니다. 이 순서상 일위 되심은 신적 본질의 차이를 말하는 것이 아니고, 만유를 섭리하심에 있어서 성자와 성령님이 성부 하나님의 뜻을 복종하신 것을 두고 표현한 것입니다. 따라서 성부와 성자와 성령님은 본질과 권능과 영광이 동등하시지만 어떤 사역을 이루실 때는(즉 섭리를 나타내실 때) 성자 성령님이 성부님의 뜻을 복종하신 것입니다(빌 2:6~8, 고전 2:10).
5. 하나님의 구속 사업을 이루심에 있어서 성부 하나님은 구원 사업을 계획하셨고, 성자 예수님은 그 방도를 맡으셨으며 성령님은 이를 인간에게 전달하시는 사역으로 분담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오순절 때 강림하신 성령님은 예수님이 33년 세상에 계셨듯이 성도와 함께 계시기 위하여 오셨음을 믿으시고 늘 성령님의 감동과 충만을 맛보시는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성령님의 감동과 충만을 맛보는 것은 바로 하나님의 뜻을 따르고 하나님에 대한 만족을 느끼는 생활이라 할 것입니다.
제23과 화목하는 직책을 주심 (고후 5:17~19) 목록으로
이 시간에는 본문 18절의 “화목하는 직책”이란 말씀에 의지하여 교훈을 받겠습니다.
고린도후서는 바울사도께서 고린도교회 성도들에게 두 번째로 보내신 편지란 뜻입니다. “고린도”란 지역은 헬라 나라 남방에 있는 항구 도시의 이름입니다. 바울사도께서 2차 전도 마지막 시기에 그 곳에 가셔서 복음을 전하여 교회를 세우셨습니다. 그런데 고린도교회는 분쟁이 있는 교회였습니다. 그 분쟁이란 바울과 아볼로파, 게파(베드로)파, 그리스도파라 하여 서로 갈등하는 일이 있었던 것입니다(고전 3:4). 그래서 바울사도께서 화목에 대한 교훈을 특별하게 하신 것입니다.
1. 먼저 본문을 살펴보겠습니다.
1) 17절에서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고 하셨습니다. 불신앙에서 신앙으로 자기 중심에서 하나님 중심으로 돌아왔으니 변화가 된 것이 사실입니다. 이전 것, 즉 지난 날의 생활은 잘못된 것이라도 하나님이 용서하셨으니까 뒤로 돌리고 새 것이 된 상태에서 새 생활을 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2) 18절에서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서 났다”는 것은 세상의 만물과 함께 변화된 자신과 신앙도 하나님이 주셨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이런 은혜를 주신 것은 하나님과 성도가 화목하고 또 성도에게 화목하는 직책을 주시기 위함이라고 하셨습니다. 인간이 하나님과 화목하는 것은 구원을 뜻하고, 화목하는 직책은 사랑을 뜻하는 것입니다.
3) 19절에서 하나님은 그리스도 안에 계셔서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하여 인간의 죄를 담당하게 하셨고, 그들을(선민을) 구원하여 자기와 화목하신 후 또 화목하는 직책을 주셨다”고 하신 만큼 성도는 하나님과의 화목과 이웃과의 화목한 생활을 큰 사명으로 여기셔야 할 것입니다.
2. 이 화목하는 직책을 수행할 때 먼저 대상을 아셔야 합니다.
1) 화목의 대상은 첫째로 이웃 성도입니다. “보이는 형제를 사랑하지 않으면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고(요일 4:20)”, 또 형제와 화해함이 없으면 하나님께 제물(예배)을 드릴 수 없기 때문입니다(마 5:23~24). 따라서 성도는 어느 누구와도 불화하거나 미워하거나 원망하여서는 안 되며 항상 누구에게나 사랑과 온유로 대할 수 있는 자세를 가져야 하는 것입니다.
2) 하나님과 화목하는 것입니다. 여기에 대하여 욥기 22:21을 중심으로 말씀드린 바가 있었습니다. 거기에 보시면 “너는 하나님과 화목하고 평안하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성도가 하나님과 화목하는 것이 바로 믿음의 관계입니다. 믿고 의지하고 순종하면 화목이 잘 될 것이요, 완고하거나 회개하지 않고 충성하지 않으면 화목이 깨질 것입니다.
3) 하나님의 말씀과 화합해야 합니다. 히 4:2에 보시면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자가 하나님의 말씀과 화합하지 않을 때 들은 말씀이라도 유익이 없다”고 하셨습니다. 여기에서 말씀과 화합한다는 것은 말씀을 진리로 받고, 깨닫고, 사랑하며 지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말씀과 화합하지 않으면 성경과의 거리가 먼 것을 뜻하며 이 경우에 말씀의 기쁨을 느끼지 못하는 것입니다.
4) 복음 사역자와 화목해야 합니다. 복음 사역자는 하나님이 세우셨고(갈 1:1), 하나님이 보내셨으며(출 3:10~12) 또 하나님이 별과 같이 붙드시고(계 2:1) 예수님을 대신하여(겔 3:17) 일하게 하시는 자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혹 부족한 것이 있어도 사랑을 저해하여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5) 마지막으로 모든 성도와 모든 이웃과도 화목하게 지내셔야 하며 또 “화평을 만드는 역할을 하라”고 하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화평케 하는 자가 복이 있다”는 말씀입니다(마 5:9).
성도와 하나님과 복음 사역자와 모든 이웃과 화목하는 성도가 되셔야 하겠습니다.
제24과 성전에 올라가는 노래 (시 126:1~6) 목록으로
1. 시 120편부터 134편까지는 앞 부분에 잔 글씨로 “성전에 올라가는 노래”라는 제목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원문에는 “성전”이란 말이 없고, “올라가는 노래”라고만 되어 있다고 합니다.
1) 이 잔 글씨가 영감된 하나님의 말씀인가에 대하여 이는 후시대에 성경학자들이 이해의 도움을 주기 위하여 첨부한 내용입니다.
2) 그러면 “성전에 올라가는”의 의미가 무엇인가 할 때에 이는 바벨론에서 70년간 포로 생활을 하다가 해방되어 일부 선민들이 고향 예루살렘의 성전을 향하여 귀환하면서 부른 노래입니다. 예루살렘이 다른 지역보다 높기 때문에 “올라간다”는 말씀을 쓴 것입니다. 그들은 벅찬 감격으로 이 가사를 지어 찬송을 부르며 예루살렘을 향하였을 것입니다.
2. 그러니까 이 말씀은 주전 500년경에 바벨론에서 해방되어 나온 이스라엘 백성들이 부르고 기록한 것입니다. 내용은 “해방된 감격과 귀향하는 감격과 성전에 올라가는 감격”을 읊은 것입니다.
3. 1절을 보시면 “여호와께서 시온의 포로를 돌리실 때에 우리가(그들) 꿈꾸는 것 같았다”고 하였습니다. “시온의 포로”란 바벨론에 속박되었던 이스라엘 민족을 의미합니다. 예루살렘 서남방에 시온산이 있어서 옛날부터 예루살렘이나 이스라엘을 시온이라고 하였습니다(삼하 5:7, 왕상 8:1). 또 바벨론에 포로된 자들을 해방시켜 시온으로 가게 하신 분이 하나님이시라고 찬송을 하면서 그 일이 전격적으로 이루어진 것이기 때문에 “꿈꾸는 것 같았다”고 회고한 것입니다. 다음 2절에서는 그 일로 인하여 기쁨과 찬송이 있었고, 믿지 않는 열방 사람들도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가 대사를 행하여 그런 은혜를 주셨다고 찬사를 보냈다”는 것입니다. 3절에서 과연 “여호와 하나님이 그런 은혜를 주셨다”고 하였고, 4절에서는 “우리의 포로를 남방 시내들 같이 돌리소서” 하였으니 “남방 시내들”이란 우기에 남쪽 강변이 범람하는 것을 의미하므로 이는 바벨론에 남아 있는 모든 백성들이 다 해방되어 나오기를 소원하는 기도와 같은 것입니다. 그리고 5~6절에서는 “농부가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렸을 때 기쁨으로 수확을 거두는 것처럼” 자신들이 바벨론에 있으면서 눈물의 기도를 드린 기도가 응답되어 이같은 해방의 좋은 결실을 얻었다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이 정도의 설명으로 본문의 뜻을 이해하셨을 것입니다.
4. 그러면 이 말씀을 영적 의미로 살피면서 교훈을 받도록 하겠습니다.
1) 선민이 바벨론 포로에 잡혀 있었던 사실입니다. 이것은 바로 인간의 타락 상태를 의미합니다. 바벨론(계 16:10)과 애굽(출 12:12, 사 19:1)은 적 그리스도의 모형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바벨론의 포로는 불신앙적 우상주의 또는 성도의 일시적 타락을 의미합니다.
2) “바벨론에서 해방되어 예루살렘으로 올라옴”이니 이는 불신앙에서 신앙으로, 또 타락에서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오는 신앙과 회개를 뜻하며
3) “이 일”은 하나님이 시행하신 대사인즉 인간의 공로로 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은혜로 받는 축복임을 뜻하며
4) 또 2절에서 “웃음과 찬송”이 있으니 이는 구원받은 자의 심령의 기쁨을 뜻하고,
5) 바벨론에 남은 포로의 해방을 기원하였은즉(4절) 이는 불신앙에 처한 백성들에게 구원의 복음이 임하기를 갈망함이며
6)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린다”함은 전도의 사명을 일깨워 주시는 말씀입니다.
결론적으로 이 말씀에서 깨달을 수 있는 것은 ① 바벨론 포로에서 해방된 백성들의 감격함과 ② 그 해방이 하나님의 은혜로 되었음과 ③ 이에 대한 기쁨과 감사와 찬송을 올리는 것과 ④ 남은 백성들의 귀환을 기도하면서 눈물의 씨를 뿌릴 것을 결심하는 내용으로 이는 인간이 타락 상태에서 회개하므로 자유와 기쁨과 감사와 찬송과 전도의 사명을 갖고 기도하며 전도할 것을 교훈해 주신 것입니다.
제25과 매일 피차 권면하라 (히 3:12~14) 목록으로
이 시간에는 오늘이라 일컫는 동안 “매일 피차 권면하라”는 말씀으로 교훈을 받겠습니다. 이 본문 말씀에 보시면 몇 가지 문제를 제시하였고, 그 문제를 잘 해결하기 위하여 매일 피차 권면하라고 하셨습니다. 문제되는 내용이란 교인 중에 믿지 않는 악심(즉 불신앙적인 생각)을 품는 자가 있거나 신앙적으로 하나님과 점점 멀어져 가는 성도가 있을 수 있음과 죄의 유혹으로 강퍅해지는 일, 또 시작했을 때에 확실한 것을 끝까지 붙잡지 못하는 성도가 생길 수 있는 것을 말씀하셨고, 이에 대한 대책으로 “오늘이라 일컫는 동안 매일 피차 권면하여” 신앙적으로 잘못 되어가는 일들을 방지해야 한다고 하신 것입니다. 권면을 강조하였다 해서 기도를 안 해도 된다는 뜻은 아닌 것입니다. 기도하면서 권면하고 노력하라는 뜻입니다.
1. 성도 중에는 외식적으로 믿는 사람도 있을 수 있고, 또 여러 가지 시험을 받아 믿음이 흔들리고 하나님을 멀리 하면서 죄가 중첩되어 점점 강퍅해지면서 시작할 때에 믿었던 일들을 포기하게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것은 마치 어려운 여건에서 자라는 나무가 가뭄과 병충해를 당하면서 시들어갈 때에 관리자가 잘 관리하면 소생할 수 있으나 그렇지 않을 때는 말라 죽게 되는 것처럼 신앙 생활의 유혹과 어려움도 그런 경우로 생각할 수 있는 것입니다.
2. 이 때에 믿음과 사명이 넉넉한 성도는 그런 약한 성도를 살피지 않을 수 없고, 또 이 사명을 “오늘이라 일컫는 동안 매일 피차 권면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1) “오늘이라 일컫는 동안”이란 “오늘을 넘기지 말라”는 뜻입니다. 영적 생활을 관찰함에 있어서 오늘 할 일을 내일로 미룰 때에 당하는 손해가 큰 것을 체험할 때가 많습니다. 예를 들면 바삐 권면하지 않을 때에 권면할 기회가 없어지거나 아니면 더 강퍅해지는 것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기회를 앞당겨 선용할 때는 항상 유익함을 체험하게 됩니다. 그래서 영적 사명자는 오늘 할 일을 내일로 미루지 않는 근면 성실함이 있어야 합니다.
2) 매일 피차 권면하는 것입니다. 매일이란 권면을 중단하지 말고 시행하되 일방적 권면은 상대방에게 피곤함을 줄 수 있지만 서로 상부상조하는 권면은 그렇지 않은 것입니다. 그래서 피차 권면, 매일 권면을 힘쓰라고 하신 것입니다.
3. 무엇을 권면할 것인가?
1) 불신앙의 악심을 품지 않게 하라는 것입니다. “믿음이 약한 사람은 자주 하나님이 계신가? 계시다면 왜 나를 이렇게 고생하게 하시는가? 가본 사람이 없는 천국을 어떻게 믿는가?”하는 등으로 불신앙적인 생각을 가질 때가 있는 것입니다. 이런 생각을 추호도 갖지 않도록 권면할 것이요,
2) “하나님에게서 떨어질까” 즉 멀어지지 않도록 권면하라는 것입니다. 성도가 하나님과 멀어진다는 것은 예배와 순종을 게을리 하는 것입니다. 예배는 찬송, 기도, 성경, 헌금, 성수 주일 등을 뜻하고, 순종은 모든 계명을 지키는 것인데 이것이 나태하여지는 것이 바로 하나님을 멀리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바로 마귀에게 믿음을 빼앗기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그런고로 이런 유혹의 틈을 주지 않기 위하여 늘 권면하여야 합니다.
3) 죄의 유혹을 받고 회개를 더디함으로 강퍅해지는 것을 면하게 하라고 하셨습니다. 범죄했을 때는 즉시 회개해야 함이 마치 병을 속히 고쳐야 하는 것과 같기 때문입니다.
4) 시작할 때에 확실한 것을 끝까지 잡도록 권면하라 하셨으니 이는 처음 믿을 때의 신앙과 열심을 꾸준히 지키게 함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살아계신 것, 예수님이 구세주이신 것, 예수님을 잘 믿어야 복을 받는 것, 하나님의 심판이 공의로우신 것“쯤은 확실하게 믿어야 하는 것입니다(성경이 진리임과 함께).
결론적으로 이런 네 가지 문제를 두고 항상 서로 권면하는 성도가 되셔야 하겠습니다. 또 권면받는 것을 부끄럽게 여기지 마시고 감사함으로 받아 시정하는 노력을 하셔야 할 것입니다.
제26과 은사에 대하여 (고전 12:4~11, 28~31) 목록으로
이 시간에는 은사에 대하여 교훈을 받겠습니다. 흔히 “은사”라 하면 병 고치는 기도를 떠올리게 되고, 특별히 기도를 많이 하고 은혜를 사모하는 성도가 이에 대한 관심을 더 갖습니다. 은사의 뜻이 무엇인지 이 은사를 어떻게 주시는지 은사의 종류는 어떤 것이 있는지 또 은사는 어떻게 받는 것인지 궁금한 것이 많을 것입니다. 성도가 이에 대한 지식을 바로 갖지 않으면 믿음이 삐뚤어진 취급을 받기 쉬우므로 잘 배우셔야 합니다.
1. 은사란 하나님의 영광과 신앙 생활을 위하여 특별하게 주시는 복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 뜻을 은혜란 말과 구별하여 이해를 한다면 은혜는 하나님이 모든 대상에게 골고루 또는 보편적으로 주시는 선물을 뜻하고, 은사란 특정한 성도에게 특별한 목적을 위하여(특히 하나님의 영광 목적) 하나님이 자기의 뜻대로 주시는 좋은 선물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하여 이 은사의 종류가 꼭 신령한 것만 뜻하는 것은 아닙니다. 출 35:35에 보시면 성전의 기명을 만드는 장인의 기술도 성령의 감동으로 주신 지혜라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2. 은사의 종류는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본문에 보시면
1) 직임상으로 사도, 선지자, 교사가 있고(28절),
2) 직임 수행을 위한 재능으로서 지혜의 말씀, 지식의 말씀(목사직 은사), 믿음, 능력, 병고침의 방법, 예언, 영분별, 방언 통역(8~11, 28), 서로 돕는 것(집사의 은사), 다스리는 것(장로직 은사) 등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성경에 기록이 있다고 오늘날도 다 있느냐 하는 것을 바로 알고 지나가셔야 합니다. 사도 선지자는 그들의 사역(기독교의 기초를 세우는 일)이 끝났기 때문에 없고, 또 예언도 성경 계시가 완성되었기 때문에 없으며(혹 이 예언이란 말을 설교, 가르침의 뜻으로도 사용함. 고전 14:29~33) “방언도 그친다”고 하셨습니다(고전 13:8). 따라서 하나님께서 교회 시대에 주실 만한 은사가 따로 있음을 믿으셔야 합니다.
3. 이 은사를 누가 주시는가 할 때에 하나님이 성령의 역사로 또 자기 뜻대로 주신다고 하셨습니다. 약 1:17에서도 “은사는 빛들의 하나님께로서 온다” 하셨고, 본문에서도 “하나님이 교회 중에 몇을 세우셨다”(28절), “같은 성령이 행하여 주신다”(11절), 또 “그 뜻대로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신다”(28절)고 하셨습니다. 따라서 은사는 하나님이 자기 뜻대로 각 사람에게(주실만한 대상에게) 나누어(분산하여) 주시는 줄로 믿으셔야 합니다. 이 말씀의 의미는 “받고자 하는 자의 소원대로 주시는 것이 아니란 뜻”입니다.
4. 따라서 이 은사는 모든 이가 다 마음대로 받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이 그 뜻대로 주시기 때문에 그렇고, 또 모든 이에게 다 주시지 않는다고 하셨으며(29~30) 또 고전 7:7에서는 “자기의 은사가 각각 있으니 하나는 이러하고 하나는 저러하다”고 하셨습니다. 또 고전 1:7에서는 “부족함이 없이 은사를 주시는 분이라” 하셨고, 벧전 4:10에서는 “각각 은사를 받은대로 일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또 고후 9:15에서 하나님의 은사는 말할 수 없는 큰 복인데 이 은사는 비택자도 체험할 수 있어서 은사를 맛본 자가 타락할 수도 있다는 말씀을 히 6:4에서 말씀하셨습니다.
5. 이상의 말씀에서 저희들이 결론적으로 깨달을 수 있는 것은
1) 은사는 하나님이 주시는 귀한 선물인데
2) 하나님이 자기 뜻대로 주시는 것이며
3) 이 사람은 이렇게 저 사람은 저렇게 주시고,
4) 각각 은사를 주시되 넉넉하게 주시며(벧전 4:10, 고전 1:7)
5) 또 비택자도 체험할 수 있게 하시는 경우가 있고(히 6:4~5),
6) 이것을 주시는 목적은 오직 하나님의 섭리 또는 영광에 유익하기 위하여 주신다(7절)고 하신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중요한 것은 은사를 구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내게 주신 은사가 무엇인지를 깨달아 그 은사를 감사하며 영광되게 활용하셔야 하고, 또 더욱 큰 은사인 사랑을 사모해야 할 것도 잊지 마시기를 바랍니다(31절).
제27과 신앙 성장의 방법 (엡 4:13~16) 목록으로
이 시간에는 “신앙 성장의 방법”이란 제목으로 교훈을 받겠습니다. 본문 말씀에 보시면 13절에서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된다”, “온전한 사람을 이룬다”, “그리스도의 자성한 분량이 충만한데 이른다”, 또 14절에서는 “어린 아이가 되지 않는다”, “간사한 유혹에 빠져…요동치 않는다”, 또 15절에서는 “사랑 안에서 그에게까지 자란다”는 말씀이 있습니다. 성도가 이대로 실천하려면 장성한 믿음을 가져야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시간에는 본문 설명을 드린 다음에 신앙을 성장시키는 법을 배우려고 합니다.
1. 본문 말씀에서
1)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이란 예수님과의 연합을 뜻하는 것입니다. 믿는 것은 신용함을 의미하고, 아는 것은 친교를 뜻합니다. 신용은 신뢰와 같은 뜻이고, 친교란 서로 잘 알면서 뜻을 같이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님과 정신적으로 생활적으로 하나 되도록 노력하여야 합니다.
2) “온전한 사람”이란 곧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함”으로 예수님의 인격을 많이 닮은 것을 뜻합니다. 즉 성화의 과정이 빠른 상태입니다. 이것은 오직 신앙의 성숙으로만 이루어집니다.
3) 성도가 어린 아이와 같은 초보적 신앙에서 어른다운 신앙으로 장성하면 사람의 궤술과 간사한 유혹 등 잘못된 교훈의 풍조에 유혹되거나 요동하지 않습니다. 신앙이 바르게 성장한 사람은 결코 유혹에 넘어가지 않습니다.
4) 신앙이 성숙한 성도는 매사를 사랑 안에서 참되게 행하고, 예수님을 닮는 것에도 자라게 된다고 하였습니다(15절).
5) 그리고 16절에서는 예수님과 성도(또는 교회)와의 관계를 머리와 몸으로 비유하여 교훈을 주셨습니다. 머리는 온 몸을 통솔하고, 모든 지체는 머리의 통솔을 받아 작용하는 것처럼 성도나 교회가 예수님의 뜻을 복종하면서 서로 연락상합하여 유기적 관계를 맺어나가야 할 것을 교훈하셨습니다. 이상의 말씀에서 저희들은 예수님과 얼마나 가까워져야 하며 또 예수님의 뜻을 따라야 하는가를 배울 수 있고, 또 이렇게 실천하려면 믿음이 크게 성장하여야 함을 알 수 있습니다.
2. 어떻게 하여야 우리의 신앙이 성장할까요? 같은 수박이라도 설익은 것과 잘 익은 것이 있듯이 성도의 믿음도 역시 그런 차이가 있습니다. 각자가 자신의 믿음을 키워나가야 하는데, 그 방법은
1) 성경을 배워야 합니다. 또 성경을 배우는 방식을 알아야 합니다. 떠 넣어 주는 밥을 먹는 사람은 불구자이거나 어린 아이요, 정상인은 자신이 직접 먹지 않습니까? 이와 같이 성경을 스스로 공부할 수 있도록 노력하여야 합니다.
2) 설교를 들을 줄 아는데 이르러야 합니다. 이는 성경의 기본 지식이 어느 정도 있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성경의 기본 지식을 가지려면 성경 66권의 역사적 내용을 어느 정도 파악하셔야 합니다.
3) 성경을 깨달으면서 자신의 생활이 성경과 맞지 않는 것이 있을 때는 꼭 회개하시고 실천을 하시도록 노력하셔야 합니다. 행함이 없는 성경 지식은 믿음과 관계가 없기 때문입니다.
4) 연단을 받는데서 신앙이 자라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하나님은 신앙의 연단을 주실 때 고난으로도 주시고, 새로운 경험으로도 주시며 때로는 정당한 일과 정당치 않은 일을 만나게 하심으로 그때그때마다 어떻게 신앙적 처신을 하는가에 대하여 훈련을 시키시는 것입니다(신 32:10~11). 성도가 이 네 가지 방법에 힘쓰지 않으면 신앙 성장을 기대할 수 없을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믿음 성장을 위하여는 반드시 ① 성경 공부를 하시고, ② 설교가 이해 되도록 들으시며 ③ 자기의 생활을 성경과 맞추어 나가셔야 하고, ④ 또 연단을 회피하지 말아야 합니다. 어려운 일을 당면했을 때 슬기롭게 극복하는 것이 연단인 줄 아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이런 일들이 잘 성취될 수 있기를 기도로 힘쓰셔야 하겠습니다.
제28과 바리새인 (마 16:5~12) 목록으로
이 시간에는 바리새인에 대하여 공부하겠습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이 “마가단”(마 15:39, 마가단은 막달라임) 건너 편(갈릴리 서쪽 상대편)에 계실 때에 예수님은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의 누룩을 주의하라”고 하셨습니다. 제자들은 이 말씀을 오해하였으나 사실은 “그들의 잘못된 교훈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12절에서 말씀하셨습니다. 그 때는 5병 2어와 7병 2어의 기적을 베푸신 후였기 때문에(마 14:17, 15:34) 먹을 것으로 인하여 염려하는 것은 믿음이 적은 것(8절)이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볼 때에 예수님은 양식의 기적을 자주 시행하셨고, 또 떡을 얻어먹는 맛에 따라 다닌 사람들도 상당하게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요 6:26). 그리고 예수님 당시에 복음을 배척한 세 당파가 있었는데 그들이 곧 바리새당, 사두개당, 헤롯당이었습니다.
1. 바리새당파는 그 말의 뜻이 “분리된 자”란 뜻으로 주전 2세기경부터 결성된 유대인의 종파요, 사두개파란 바리새당파와 대립되는 당파로서 역시 같은 시기에 있었는데 구약의 제사장인 사독(왕상 2:35)의 이름과 정신을 본받는다는 뜻으로 그렇게 이름하였다는 설도 있습니다. 또 헤롯당파는 유다를 통치하는 헤롯왕가를 옹위하는 정치적 단체이지만 거기에도 유대교를 신봉하는 부인들이 있었다고 합니다(마 22:16, 막 3:6).
2. 이 세 당파의 특징을 말씀드리면
1) 바리새파에는 제사장들이 거의 포함되었고, 공회원(국회의원)도 있었으며 스스로 분리할 정도로 독선적이고, 독립심이 강한 단체라고 할 수 있고,
2) 사두개당은 행 23:8에서 부활과 천사를 믿지 않고 또 신령한 존재를 믿지 않으므로 바리새파와 대립된 현실적인 종파로 취급 받았으며
3) 헤롯당은 정치적인 여당에 속하는 당파로 거기에도 유대 종교를 가진 귀족의 부인들이 있었다고 합니다. 이 세 당파는 서로 사상과 목적이 맞지 않는 것이 있지만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는 일을 위하여는 서로 제휴하여 모의 협력하였습니다(마 3:6, 22:34).
3. 이 시간에는 바리새인을 중심으로 공부하는 시간이기 때문에 여기에 대하여 좀더 말씀드리겠습니다.
1) 그들도 부활을 믿고(행 23:8) 율법에 열심하며(행 15:5) 금식에 힘쓰고(눅 5:33), 십일조를 잘 내고(마 23:23), 율법적 의식에 더 힘을 썼습니다(행 26:5). 이런 문제는 다소 긍정할 여지가 있습니다.
2) 그러나 그들에게는 너무도 잘못하는 것이 많았습니다. 잘못할 정도가 아닌 이단 종파임도 명심하셔야 합니다. 그들이 이단 종파인 것은 예수님을 구세주로 믿지 않기 때문이요, 오히려 예수님을 시기하고 원수처럼 여겨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는 일에 앞장섰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화있을 진저” 하시고, 여러 차례 책망하셨습니다(마 23:1~36). 바리새인들이 가장 크게 책망 받아야 할 잘못은 외식이었고(마 23:13), 또 자기만 옳은 줄로 아는 독선이었으며(눅 16:15) 또 남을 핍박, 압제하였고(마 23:4, 행 9:1), 옷단 넓힌 옷을 입고(마 23:5), 문안 받기를 좋아하였으며(마 23:7) 또 연회석에서 상좌에 앉기를 좋아하는 등(마 23:6)…여러 가지로 지적 사항이 많아서 이루 다 헤아릴 수가 없습니다.
마 23장에 보시면 바리새인들의 잘못된 일에 대하여 예수님이 책망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무거운 짐을 지우고 자기들은 지지 않는 자”, “회칠한 무덤처럼 겉은 깨끗해 보이나 속은 더러운 자”, “하루살이는 걸러내고 약대는 삼키는 자”, 또 “독사의 새끼들아”라고 책망하셨으니 그들의 잘못이 얼마나 중한가를 알 수 있습니다.
결론적으로 저희들은 잘못된 당파(교파)나 잘못된 생활을 엄히 경계하셔야 하겠습니다. 누룩이란 소리없이 부풀리는 것으로 잘못된 사람들과 접근하면 자기도 모르게 그 편으로 닮아 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단이나 불건전한 종파의 사람들과 그 생활을 경계하셔야 되겠기로 이 말씀을 드렸습니다.
제29과 하나님과 동행하는 생활 (창 5:21~32, 6:9) 목록으로
이 시간에는 “하나님과 동행하는 생활”이란 제목으로 교훈을 받겠습니다. 본문에 보시면
1. 에녹과 노아가 하나님과 동행하였다고 하셨습니다. 에녹은 아담의 7대손이요, 노아는 10대손입니다. 따라서 노아는 에녹의 증손자입니다. 에녹은 65세에 므두셀라를 낳고, 그때부터 300년 동안을 하나님과 동행하였는데 그는 365세에 산 채로 변화되어 승천하였고, 그의 아들 므두셀라는 인류의 최고령자인 969세의 장수를 하였으며 에녹의 증손자 노아 역시 하나님과 동행하더니 인류가 홍수로 심판을 받을 때 그 가족과 함께 살아남는 복을 받았습니다.
2. 하나님과 동행한다는 뜻이 무엇입니까?
1) 이것은 하나님과 성도가 가까이 접근하여 같은 방향으로 같이 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보이지 않는 하나님과 어디로 어떻게 가는 것일까요? 여기에서 보이지 않는 하나님은 말씀으로 임재하여 계시므로(요 1:1) 성도가 하나님의 말씀을 가까이 함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2) 하나님의 말씀을 가까이 한다는 말씀은 무엇입니까? 이것은
① 성경을 진리(곧 하나님의 말씀)로 믿고,
② 성경을 상고하며
③ 성경대로 하나님의 뜻을 좇고
④ 예수님과 사도들의 모범을 본받아 생활함을 의미합니다.
3) 성령님을 모시고 사는 것도 하나님과의 동행인데 성령님은 보이지 않는 영으로 말씀을 따라 역사하시므로(요 14:17, 26) 성경과 일치하는 생활 이외로는 동행의 의미를 확인하기 어렵습니다.
4) 따라서 성도가 하나님과 동행하는 생활은
① 목적을 하나님 나라에 두고,
② 하나님 뜻대로 생활하며
③ 말씀과 기도 생활 등으로 하나님을 가까이 모시고 사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3. 만일 하나님을 믿지 않거나 하나님의 뜻에 목적을 두지 않는 사람은 누구도 동행할 수 없습니다. 또 하나님을 믿는다 하여도 그 하나님을 멀리서 따른다면 그도 역시 하나님과 동행할 수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을 멀리서 따른다는 것은 마치 이웃 사람을 알고 인사는 하는 정도이지만 자주 친교하지 않는 사람과의 관계를 생각하면 잘 이해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 요즈음 그런 성도가 참 많습니다. 목표를 하나님 뜻에 두지 않거나 하나님께로 가까이 접근하지 않거나 생활 방식을 예수님이나 사도들처럼 본받으려 하지 않거나 또 말씀을 깨달으려 하지 않거나 기도를 하지 않는다면 이도 역시 하나님과 동행할 수 없을 것입니다.
4. 동행에는 세 가지 요소가 필요합니다.
1) 목적이 하나님과 같아야 합니다. 내 목적에 하나님을 따라 오시게 할 수 없고, 하나님의 목적에 내가 따라가야 하는 것이며
2) 접근이 필요하지요. 암 3:3에서는 “의합해야 접근이 가능하다”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신앙의 일치와 생활의 일치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장애물 경주를 할 때 두 사람의 발목을 매고 뛰는 것을 보셨지요? 이 때에 보행의 보조를 맞추지 않으면 동행할 수 없습니다. 이 보행의 보조란 바로 생활의 일치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성경보다 더 잘 하려고도 하지 마시고, 성경에 없는 것을 만들어 하지도 마시며 오직 성경에 일치되게 하는 것만 노력하셔야 하는 것입니다.
3) 대화 없는 동행이란 역시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이 대화는 하나님의 말씀을 상고하는 것과 기도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뜻을 의합하고 말씀과 기도와 성경적 생활로 하나님과 동행을 하는 것입니다. 성도들에게 이 생활이 꼭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동행만 잘 하면 큰 일을 안 하여도 하나님이 기뻐하실 것입니다. 좋은 골동품은 주인이 사용하는 맛에 갖는 것이 아니고, 두고 보는 맛으로 갖는 것처럼 하나님과 동행을 잘 하는 성도도 역시 그렇게 기뻐하실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모가 예수님과 동행 중에 있는 줄로 착각한 사실이 있었습니다(눅 2:15). 또 예수님의 제자들은 동행 중에 계신 주님을 몰랐습니다(눅 24:15). 우리는 이런 모순을 나타내지 말고 열심히 주님을 가까이 따르셔야 할 것입니다.
제30과 무엇이 복인가? (시 73:23~28) 목록으로
이 시간에는 “무엇이 복인가?”에 대하여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1. 먼저 본문 말씀을 살피겠습니다.
1) 본문 23절을 보시면 성도가 하나님을 가까이 할 때에
① 하나님이 그의 오른손을 붙들어주시고,
② 교훈으로 인도해 주시며
③ 후에는 천국에서 영광으로 영접해 주신다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하늘에서나 땅에서나 하나님 이상 더 사모할 대상이 없다고 하였습니다(25절).
2) 이 시를 읊은 성도가 이렇게 하나님을 사모하는 이유는
① 그 하나님이 반석(의지의 대상)이 되시고,
② 영원한 분깃(영생을 주시는 분)이시기 때문에 자신의 육체와 마음이 늙어질지라도(쇠잔해짐) 하나님을 영원한 피란처로 의지하게 된다고 하셨습니다.
3) 따라서 이런 하나님을 멀리하는 자는 망할 수 밖에 없고, 자신은 “하나님을 가까이 함을 복으로 여기며 이를 전파할 것이라”고 한 것입니다. 이 말씀에서 나타난 복은 “하나님을 사모하는 복, 하나님을 가까이 하는 복, 든든한 의지의 대상을 모신 복, 그리고 영원한 피란처인 천국의 복”을 말씀하셨습니다.
3. 그러면 무엇을 복으로 여기고 감사해야 하겠습니까?
1) 하나님을 알게 된 것을 큰 복으로 여기셔야 합니다.
① 하나님은 알고 보니 참으로 위대하신 분입니다. 창조자이시고 통치자이시며 구원자이시고, 심판자이시며 사랑과 긍휼이 아주 많으신 분입니다. 따라서 이런 하나님을 알게 됐다는 것은 큰 복이 아닐 수 없습니다.
② 또 이 하나님을 알게 된 것이 자신의 힘으로 되었거나 모든 사람이 다 알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의 택한 백성에 한하여 하나님이 알게 해 주신 것을 생각할 때 받은 복이 더 큰 것을 알 수 있습니다.
2) 하나님을 모시고 사는 복입니다. 요 14:20에서 예수님은 “성도 안에 계시다” 하였고, 또 “항상 떠나지 않으며 함께 하신다”고(마 28:20) 하셨습니다. 또 계 3:20에서도 “영접하는 세계에 오셔서 함께 사신다”고(마 28:20) 하셨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을 모시고 사는 것은 큰 복입니다. 혼자 사는 것보다 부부가 사는 것이 복이 있고, 부부만 사는 것보다 자녀가 있는 것이 더 복이 있으며 부부와 자녀만 사는 것보다 부모님을 모시고 사는 것이 더욱 복이 있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을 모시고 사는 생활은 아주 복이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만유의 주이시고 만물과 은혜를 친히 주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롬 8:32, 행 17:24~25).
3) 하나님을 가까이 하는 생활이 복인 것입니다. 하루의 생활을 보람있게 보낸다면 내가 얼마나 하나님과 동행하였느냐 하는데서 그 보람을 찾아야 할 것입니다. 돈 벌고, 지식 얻고, 잘 먹고, 구경 잘한 것보다 기도하고, 성경을 연구하며 전도하고, 묵상한 생활이 더 복이 있음을 믿는 성도가 되셔야 하겠습니다(시 1:3).
4) 구원받은 복이 귀한 것입니다. 하나님께로부터 독생자 예수님을 받고 예수님의 십자가의 공로로 죄사함을 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천국의 시민이 되어 심판을 면하고 영생을 하게 되었으니 이것이 얼마나 큰 복입니까? 이런 복을 깨달아 감사하지 못한다면 믿음 생활의 목표가 잘못된 것입니다. 그래서 이 영생 구원의 복을 아주 크게 여기셔야 할 것이요,
5) 마지막으로 중요한 복은 “내 뜻대로 살지 않고 주님 뜻대로 살아 드리는 복”입니다. 하나님이 만물을 지으신 목적이 하나님 자신의 뜻을 위하여 지으셨기 때문에 하나님의 뜻이 더 중요한 것을 아셔야 합니다. 따라서 저희들은 꼭 ① 하나님을 알게 된 복, ② 하나님을 모신 복, ③ 하나님을 가까이 하는 복, ④ 구원의 복, ⑤ 주님 뜻대로 사는 복을 성취하면서 감사하여야 하겠습니다.
제31과 다니엘의 기도 자세 (단 9:1~10) 목록으로
이 시간에는 다니엘의 기도 자세에 대하여 공부하겠습니다. 기도하는 몸의 자세가 아니고, 생활의 자세를 의미합니다. 다니엘은 바벨론에 잡혀 가서 포로 생활을 하면서 왕궁의 대신으로 있었습니다. 그는 자기 민족의 해방과 회복을 위하여 간절한 기도를 드렸는데
1. 그가 기도한 시기는 메데족속 아하수에로의 아들 다리오가 갈대아 나라 왕으로 세움을 입던 해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에서 연대 공부를 하는 사람들이 착각하기 쉬운 것은 다리오 1세란 인물이 고레스 원년보다 약 30년 후에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다리오는 그 인물이 아니고 고레스가 바벨론을 정복하기 직전에 갈대아왕으로 있었다가(1~2절) 고레스와 합동하여 바벨론을 점령하고 잠시 통치를 맡았던 왕입니다(단 6:30~31). 그 왕의 원년에 계시를 받았다는 것은 바로 바벨론이 망하기 직전(몇일 전)임을 예상할 수 있습니다.
2. 기도자로서의 다니엘의 자세가 어떠하였습니까?
1) 그는 서책(성경)을 통하여 먼저 하나님의 말씀을 연구하고 깨달았습니다. 여기의 서책은 다니엘보다 약 50년 앞선 예레미야 선지자의 글이었습니다. 다니엘은 예레미야의 서책을 바벨론까지 가지고 가서 연구하였으니 즉 렘 25:12을 통하여 “예루살렘의 황무함이 70년 만에 마치리라”는 말씀을 깨달은 것입니다. 그 때에 70년 기간이 임박하였으므로 퍽 설레는 마음으로 기도하였을 것입니다. 문제는
① 하나님의 계시가 문자로 나타났고, 성도는 그것을 읽음으로(엡 3:4) 깨닫고 은혜를 받아야 하며
② 또 기도자는 기도하기 전에 이런 방법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는 것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기도 전에 하나님의 뜻을 파악하는 것이 얼마나 귀합니까?
2) 그는 기도자로서의 최대한 겸손한 자세를 취하였으니 그것이 바로 그가 금식하고 베옷을 입고 재를 무릅쓴 것입니다(3절).
① 은혜를 구하고 회개하는 성도에게 금식이 필요할 때가 있습니다. 금식은 자신의 정욕을 억제하면서 간절성을 표현하는 정성이 될 수 있고,
② 또 베옷을 입고 재를 무릅쓰는 것은 슬픔을 당한 자가 자신을 낮추고 찢으므로 교만이나 사치가 있어서는 안 될 것을 깨우쳐 주신 것입니다.
3) 결심이 있었다고 하였습니다. 그가 무슨 결심을 하였을까요? 하나님께 꾸준히 기도할 결심을 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좋은 결심자를 귀히 여기십니다. 이 때에 다니엘은 자신이 “기도할 즈음에 벌써 응답이 임하였다”고 하였습니다(단 9:23). 기도자는 항상 좋은 결심과 함께 기도를 하셔야 됩니다. 기도 계속을 위한 결심, 실천 결심, 충성, 봉사 결심…이것이 기도자의 마땅한 자세입니다.
4) 자복하는 자세를 취하였습니다. 다니엘은 자기 민족이 처절해진 것이 그 자신들과 그 조상의 죄값으로 받는 징계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본문 말씀 5~10절까지의 말씀이 바로 그 죄악을 열거한 내용입니다. 특히 5, 9~10절에서 “하나님께 패역하고 행악하며 반역하고 말씀을 듣지 않은 것과 행하지 않은 것”을 자복하였습니다. 이렇게 기도자는 감사하는 태도와 함께 회개하기를 으뜸으로 노력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5) 4절에서 “크시고 두려워할 주 하나님”이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대단히 두려워하는 태도를 취한 것입니다. 경건한 성도일수록 하나님을 두려워해야 할 것입니다.
6) 주님을 사랑하고 그의 계명을 지키는 자세를 취한 것입니다. 요 14:23에서 계명을 지킴이 곧 하나님을 사랑함이라고 하셨습니다.
7) 하나님이 언약을 지키심과 인자를 베푸심과(4절) 긍휼하심(9절)에 근거하여 은혜를 간구한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기도자는 다니엘처럼 꼭 이상의 7가지 요소를 갖춘 상태에서 기도를 할 수 있도록 노력하셔야 하겠기로 이 말씀을 드린 것입니다.
제32과 에스라의 회개 운동 (라 10:1~12) 목록으로
이 시간에는 “에스라의 회개 운동”이란 제목으로 교훈을 받겠습니다. 저희들이 이 성경 말씀을 이해하려면 ① 에스라는 어떤 사람이며 ② 그의 환경이 어떠 하였는가를 먼저 아셔야 합니다.
1. 에스라는 바벨론 포로 당시의 제사장으로 있었던 스라야의 아들인데 바벨론 포로 생활 중에 출생하여 그 아버지로부터 율법과 신앙 교육을 잘 받았기 때문에 율법에 익숙한 학사요(스 7:6), 또 제사장이었습니다. 물론 바벨론 포로 시절에는 제사장 노릇을 못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주전 478년에 바벨론이 멸망을 당하자 1차 해방령이 내려져 “스룹바벨” 총독과 “예수아” 제사장을 중심으로 많은 백성들이 귀환한 일이 있었고, 그 때로부터 약 79년 후에 또 2차 귀환이 있었습니다. 이 때에 느헤미야 총독과 에스라 제사장의 인솔로 약 1400여명의 백성들이(스 8:1~20) 귀환을 하였습니다.
2. 와서 보니 79년 전에 귀환한 조상들이 온갖 훼방을 무릅쓰고 20년 동안 성전을 재건하였으나 그 후 59년이 지나는 동안 또 믿음이 해이해져서 거룩한 백성으로서의 품위를 지키지 못하고 죄를 범하는 상활에 있었습니다. 에스라는 와서 그런 사실을 목격하게 된 것입니다. 스 9:1~3을 보시면 귀환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방인들의 가증한 일(우상 숭배)을 행하고, 이방인들을 취하여 혼인하여 혼잡을 이루는데 여기에 방백들과 두목들이 으뜸이 되게 행하였다”는 것입니다. 에스라는 이 사실을 보았을 때 기가 막혀 옷을 찢으며 탄식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이상의 말씀에서 에스라의 신분과 그 시대의 정황을 말씀드렸습니다.
3. 본문 말씀에는 무슨 내용이 있습니까?
1) 1절에서 에스라는 백성들과 함께 성전에 엎드려 울고 자복하며 기도하였고, 많은 백성들도 함께 통곡하였는데 그 때에 남녀 어린 아이까지 큰 무리가 모였다고 하였습니다. 범죄의 한도가 차면 하나님의 진노가 내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의 회개 운동은 시급하였습니다.
2) 백성 중에 “여히엘”의 아들 “스가냐”가 에스라에게 말하기를 “우리가 이방인을 취하고 죄를 범했지만 오히려 소망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명령에 떨면서 하나님의 법도를 좇으려는 사람들이 먼저 이방 여인들을 내쫓고 회개하여 하나님의 언약을 세워드리고 율법대로 행하는 것이라”고 주장함으로써 백성 중의 한 사람이 회개 운동을 자청하고 나선 것입니다.
3) 그리고 이런 회개 운동은 에스라 제사장이 앞장서서 주장할 일이니 “시작만 하시면 우리가 돕겠다”고 한 것입니다. 여기에서 정화 운동은 지도자와 성도(백성)가 협력해야 함을 알 수 있습니다.
4) 그래서 에스라는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과 온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그대로 행하기를 맹세하게 하였던 것입니다(5절). 이 맹세는 결심과 단결의 표현을 나타낸 것입니다.
5) 그리고 “성전에 있는 제사장 여호하난(느 3:1)의 방에 들어가서 금식 기도를 하면서(6절) 장로들과 방백들로 하여금 명령을 발하게 하여 백성들을 3일 내에 예루살렘에 모이게 하고 만일 누구라도 이방 여인을 쫓아내지 않으면 재산을 몰수함은 물론 성민의 총회에서 쫓아내리라고 하니까 백성들이 크게 떨었는데 그 날이 9월 20일이었고, 또 그 당시에 큰 비가 와서 더욱 두려워하며 하나님의 말씀대로 자복하고 회개할 것을 더욱 강행하였다”고 하였습니다. 이는 8~12절의 내용입니다. 여기에서 연대가 없는 9월 20일은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 같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그 9월은 큰 비가 온 것과 관련이 있는 것입니다. 우기도 아닌데 큰 비가 와서 이것을 하나님의 진노로 간주해야 할 입장임을 나타낸 것입니다(10, 14절 참조).
결론적으로 저희들은 이 말씀에서 ① 우리의 부족과 잘못들을 반성하시고, ② 지도자와 성도가 일체되어 모이기를 힘쓰시고, ③ 기도하며 회개하기를 힘쓰며 ④ 하나님을 크게 두려워하는 생활이 있어야 할 것을 교훈하신 것입니다. 더 겸손하고 더 열심내며 더 회개하고 더 봉사하는 저희들이 되셔야 하겠습니다.
제33과 요셉의 신앙 (창 39:1~10) 목록으로
이 시간에는 “요셉의 신앙”이란 제목으로 교훈을 받겠습니다.
1. 요셉은 야곱의 11째 아들입니다.
1) 야곱은 아브라함의 손자요, 아브라함이 아담의 20대손이므로 요셉은 아담의 23대손입니다. 그리고 야곱은 첫째 둘째 부인과 또 첫째 둘째 첩을 거느리고 살았습니다. 야곱이 여러 여인을 거느린 것은 잘한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그 시대는 인종이 희귀하였고, 또 일부 일처에 대한 계시적 교훈이 잘 계몽되지 않아서 그렇게 된 것입니다.
2) 여기에 요셉은 야곱의 사랑하는 아내인 둘째 부인 라헬에게서 첫째로 출생한 아들이고, 또 다른 여인들에게서 낳은 아들들의 순위로 따지면 11번째 아들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요셉의 어머니 라헬은 그 다음 동생인 베냐민을 낳고 죽었습니다. 그래서 요셉은 편부 슬하에서 자랐고, 그 아버지가 요셉을 더욱 사랑하자 그 형들은 요셉을 미워하고 시기하여 죽일 음모까지 하다가 결국은 애굽으로 가는 상인들에게 요셉을 팔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요셉과 항상 함께 하시고 또 요셉을 인도해주셨습니다(창 39:2). 상인들에게 팔려서 애굽으로 간 요셉은 애굽에서 또 보디발이라고 하는 애굽왕의 시위대장(경호실장)의 집으로 팔려 가서 노예가 된 것입니다. 그는 17살에 팔려 가서 28세까지 성실하게 종노릇을 잘 하였으나 그 때에 주인의 부인이 요셉을 유혹하여 동침하려는 것을 요셉이 결사적으로 물리쳤는데 그 여주인은 감정을 품고 오히려 요셉이 자기를 겁탈하려 하였다고 모함하였습니다. 요셉은 그 모함을 받고 감옥에 들어가서 2년 동안 감옥 생활을 하였는데 마침 왕의 번민하는 꿈이 있었고, 그 꿈을 해석하는 하나님의 계시가 요셉에게 임하여 요셉이 왕의 꿈을 해석하므로 왕의 신임을 받고 그 나이 30세에 애굽의 총리로 오르게 된 것입니다. 지금 읽으신 말씀은 요셉이 가정 총무로 종노릇을 잘 하면서 여주인의 유혹을 강하게 물리쳤다는 말씀의 대목을 읽으신 것입니다. 여기에서 요셉의 신앙을 유의해 볼 수 있습니다.
1) 요셉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사람이었습니다. 9절 끝에 보시면 “내가 어찌 이 큰 악을 행하여 하나님께 득죄하리이까?”한 것은 바로 그 하나님을 두려워했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자는
①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이고,
② 그의 말씀 앞에 떠는 자이며(사 66:2)
③ 죄를 엄히 경계하는 자입니다. 하나님은 “요셉과 함께 계셨고, 또 그에게 은혜를 베푸셨으며 형통하게 하셨다”고 하셨습니다(창 39:2, 5). 이것은 요셉이 하나님을 잘 경외한 증거이며(잠 8:17) 또 죄를 범하지 않으려고 결사적인 노력을 한 것도 역시 죄를 증오하시는 하나님을 두려워하였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저희들도 요셉의 신앙처럼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을 가져야 할 것입니다.
2) 요셉은 자기의 입장을 잘 알고 분수에 맞게 행하는 신앙을 나타냈습니다. 요셉이 자기의 입장을 안다는 것은
① 자신이 노예라는 사실,
② 주인이 모든 소유를 주관하게 한 사실,
③ 특별히 금한 것은 주인의 아내뿐이었다는 사실을 알고 처신한 것입니다. 지금도 우리는 다 연약한 자이고, 부패성이 남아 있어서 하나님이 붙들어 주시는 범위 안에서 살고 있음을 아셔야 합니다. 따라서 가진 것과 갖지 않은 것, 할 수 있는 것과 할 수 없는 것 등을 잘 구별하여 분수를 지키는 것이 현명한 신앙 행위가 되는 것입니다.
3) 요셉은 관용의 사람이었습니다. 넓게 말하면 사랑이 많고 좁게 말하면 용서를 하는 사람입니다. 요셉은 총리가 된 후 보디발의 아내에 대하여 아무런 언급을 하지 않았고, 또 그 형들이 양식을 사러왔을 때에도 책망이나 보복은커녕 오히려 은혜를 베푼 것입니다. 우리는 요셉의 이 세 가지 신앙을 잘 본받아서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신앙, 자신의 입장을 따라 분수를 지키는 생활, 사랑과 관용을 나타내는 신앙인이 되어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드리고 하나님의 쓰임을 받는 성도들이 되셔야 하겠습니다.
4) 섭리를 믿는 신앙(창 45:5, 7, 8)에도 귀한 면이 있습니다.
제34과 하나님의 일을 하는 자 (요 6:28~29) 목록으로
이 시간에는 “하나님의 일을 하는 자”란 제목으로 교훈을 받겠습니다. 성도가 보통으로 생각하기를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은 교회에서 직분을 맡거나 또는 교회의 일들을 하는 것과 예수님의 이름으로 선한 일 또는 전도하는 일 등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물론 이것도 바른 생각입니다. 하나님의 일은 광범위한 면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한 가지 중대한 일이 숨겨져 있기 때문에 이 사실을 말씀드리려고 하는 것입니다.
1. 보통 알고 있는 하나님의 일이 무엇입니까?
1) 교회의 직분을 이행하는 것으로 아는 것입니다. 이것도 맞는 말입니다. 성도가 직분을 명예로 탐하는 것은 좋지 않으나 충성을 잘 하기 위하여 직분을 맡으려고 하는 것은 좋은 일입니다. 그리고 맡겨진 일에 대하여 크게 충성하라고 하셨습니다(고전 4:2).
2) 예수님의 이름으로 행하는 모든 선한 일들입니다. 생명을 구원하는 전도, 가난한 사람들을 돕거나 고난 당하는 사람들을 위하여 봉사하는 모든 일들입니다.
3) 하나님의 교회에서 물질적 봉사를 많이 하는 사람을 하나님의 일 많이 하는 성도로 여겨주는 경우가 있습니다. 교회의 재정이 약할 때 물질 봉사를 많이 하면 참으로 요긴한 봉사가 되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물질적 봉사보다 더 귀한 봉사도 있다는 사실을 아셔야 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자신의 몸과 시간을 드려서 복음 전파에 직접 헌신하는 일입니다. 저희들은 흔히 이런 일들에 충성하는 것을 하나님의 일로 여겨왔습니다. 그런데 이 시간에 주신 본문 말씀에서 깜짝 놀랄 만한 깨달음을 주신 것이 있으니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일은 “하나님의 보내신 자 예수를 믿는 것”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믿음의 질을 키우는 것입니다.
2. 예수를 잘 믿는 것이 곧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1) 예수를 잘 믿는다는 것은 넓은 의미로 볼 때 신앙과 생활과 충성이 일치되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어떻게 믿는가? 얼마나 행하는가? 또 얼마나 충성하는가?에 따라서 잘 믿는 것이 나타나는데
2) 예수님이 본문에서 믿는 것을 강조하신 것은 충성의 공력 그 자체보다 믿음의 본질이 귀한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왜 그러냐 하면 하나님이 하시는 모든 일이 성도의 믿음을 통해서만 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예를 들면 창조나 섭리는 사람의 믿음과 관계없이 하나님이 하시는 것입니다. 또 병 고침의 은혜도 성도의 믿음과 관계없이 고쳐주신 일도 있었습니다(요 6:5). 이것은 사람이 무엇을 많이 해야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대로 믿는 마음가짐이 더 중요한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을 잘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라”하신 믿음 그 자체는 비중 있는 신앙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다같은 사람이라도 훌륭한 사람이 있고, 그렇지 못한 사람이 있는 것처럼 믿음도 역시 그런 것입니다. 이스라엘 중 아무에게서도 이만한 믿음을 만나보지 못하였노라 하시고 칭찬하신 것을(마 8:10) 기억하셔야 할 것입니다. 따라서 일을 많이 하고 충성을 많이 하는 것보다 본질적인 신앙이 예수님의 사상과 꼭 같아지기 위하여 힘쓰는 것을 하나님은 일로 여기신 것입니다. 주인이 아주 좋은 그릇(골동품)을 가졌다면 그 그릇을 사용하겠습니까? 오히려 진열품으로 두고 볼 것입니다. 우리도 하나님의 진열품으로 기쁘게 보시는 믿음 가진 성도가 되셔야 하겠습니다.
3) 그 방법이 바로 성경에서 예수님의 사상을 깨닫고 예수님의 마음을 본받으며 예수님을 닮는 상태를 최대한 유지하는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하나님의 일은 예수를 잘 믿는 것인데 이 믿음이 사역이나 충성보다 중요한 것을 강조하신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사상을 그대로 본받기를 노력하는 것이 곧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따라서 예수님을 잘 믿기 위하여 성경을 연구하였다면 이것 또한 하나님의 일인 줄로 아셔야 하는 것입니다.
제35과 예수의 좋은 군사 (딤후 2:1~4) 목록으로
이 시간에는 “예수의 좋은 군사”란 제목으로 교훈을 받겠습니다. 지금 읽으신 말씀은 바울 사도께서 복음 사역의 후계자인 디모데에게 부탁하신 말씀입니다. 저희들은 이 말씀에서 목회자의 입장을 생각하시고 또 목회자와 같은 성질의 사명이 평신도들에게도 있음을 알아 실천하여야 하겠습니다.
1. 바울 사도의 첫째 부탁은 “예수님의 은혜로 강해지라”는 것입니다. 바울 사도는 복음의 후계자 디모데를 자기의 아들(믿음과 사명의 아들)이라고 하셨습니다. 무엇이 무엇으로 강해져야 합니까? 믿음과 사명이 예수님의 은혜로 강해져야 합니다. 저희들도 믿음이 강해지고 사명의 정신과 능력이 더해지기를 기도하셔야 하겠습니다.
2. 복음 전도자들을 세울 때 “충성된 사람들에게 부탁하라”고 하셨습니다. 2절 말씀의 “내게 들은 바”란 바울이 증거한 복음을 의미하고, “충성된 사람들에게 부탁하라”는 말씀은 믿음과 사명이 바로 된 성도들에게 사명을 맡기라는 말씀입니다. 신앙의 지도자나 전도자는 자격있는 사람이어야 하겠지요.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다가 둘 다 구덩이에 빠지는 불상사가 있어서는 안 되기 때문입니다.
3. “그리스도 예수의 좋은 군사가 되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에서는 복음 사역자를 군사로 비유하셨지만 엡 6:10~17에서는 성도를 “마귀와 싸우는 군사”라고 하셨습니다. 군사는 어떤 사람이어야 합니까?
1) 군인은 생명을 나라에 바치고 고난을 각오하고 나와야 합니다. 본문 3절에서도 “예수의 좋은 군사는 나와 함께 고난을 받을 자”라고 하셨습니다. 저희들도 예수님의 좋은 군사이면 고난과 생명을 각오하고 주님을 따라야 합니다.
2) 군사는 자기의 생활에 얽매이지 않아야 합니다. 이것은 온전한 헌신을 뜻합니다. 성도나 사명자가 자신이나 가족에 대한 일에 너무 집착하면 하나님의 일을 능률있게 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가족보다 자신을 더 사랑하여야 하고(마 10:37), 또 부친의 장례를 치르는 일보다 복음 전도가 더 시급하다는 말씀(마 8:22)도 하셨음을 기억하셔야 합니다.
3) 군사는 훈련이 잘 되어 있어야만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신앙의 연단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성도가 신앙의 연단을 받으려면 어떤 훈련을 받아야 할까요?
① 우선 성경 지식의 연단을 받아 풍성한 성경 지식인이 되어야 하겠지요.
② 실천의 연단을 받아 얼마나 하나님의 말씀을 잘 실행하느냐를 훈련해야 될 것입니다.
③ 고난을 믿음으로 잘 극복하는 훈련을 하여야 할 것이요,
④ 사명을 이행하는 방법에 대하여 훈련을 쌓아야 할 것입니다.
4) 군사는 좋은 무기를 가져야 합니다. 신앙의 군사가 가져야 할 좋은 무기가 무엇일까요? 엡 6:10 이하에 보시면 일반적 군사에게는 건강과 전신갑주와 투구와 방패와 흉배와 신과 칼 등이 필요하다고 하였습니다. 이것들은 옛날 전쟁할 때에 사용했던 무기들입니다. 이 전쟁 무기는 과학이 발달함에 따라서 신무기로 바뀔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마귀를 대적하는 십자가 군병의 무기는 옛날이나 지금이나 변하지 않습니다. 그 무기가 무엇일까요?
① 말씀의 무기, ② 기도의 무기, ③ 복종의 무기입니다. 이 세 가지 무기만 사용하면 마귀를 이길 수 있습니다.
5) 마지막으로 중요한 것은 “군사로 모집한 자를 기쁘게 한다”는 말씀처럼 하나님의 뜻을 따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바르게 행하는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저희들은 예수님의 좋은 군사라는 자긍심을 가지고 군사로서 갖추어야 할 다섯 가지 요소를 확보하시고 마귀의 역사를 힘있게 대적하여 승리하는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제36과 죄악을 인한 의인의 호소 (시 58:1~11) 목록으로
이 시간에는 “죄악을 인한 의인의 호소”란 제목으로 교훈을 받겠습니다. 지금 읽으신 말씀은 다윗이 기록한 시로 1~5절까지는 “인생들의 죄의 실상을 탄식하는 내용”이고, 6~11절까지는 “하나님의 심판을 구하여 의인을 위로하시고 인생들로 깨닫게 되기를 바라는 내용”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앞에 잔글씨로 “다윗의 믹담시”라 하였는데 이 믹담이란 “황금 또는 금언”이란 뜻이요, “아다스헷”은 “멸망하지 마소서”란 악장(영장)의 이름입니다. 따라서 다윗은 이 시를 아다스헷이란 악장에 맞추어 노래로 읊었음을 뜻합니다.
1. 악인들의 죄의 실상을 호소함(1~5절).
1) 1절에 보시면 그 당시의 악인들이 당연히 공의를 말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잠잠할 뿐 아니라 정직한 판단을 하지 않음을 지적하였습니다. 이는 재판관들이나 지도자들이 바른 말(공의)과 바른 판단을 하지 않는 것을 호소한 것이요,
2) 오히려 그들은 중심에 악을 품고 행하며 악인들의 범죄를 묵인 방조하여 용납한다고 한 것입니다. 2절의 “손의 강포를 달아준다”는 말씀이 바로 범죄를 적당히 묵인하고 조장함을 뜻합니다. 악인의 이런 죄악은 출생 때부터 시작하여 숙달한 것이며 의를 멀리하는 것과 거짓을 말하는 것도 역시 그렇다고 하셨습니다(3절).
3) 4~5절 말씀에서 “이들의 죄악은 뱀의 독과 같고, 깨닫고 돌이키지 않음이 마치 귀를 막은 술사의 독사와 같다고 비유하셨습니다. 뱀의 독이 사람의 피부에 닿으면 크게 해로운 것처럼 죄는 인생을 불행하게 하지만 악인은 이런 것을 깨달으려 하지 않음이 마치 술사가 부리는 독사가 귀를 막고 술사의 방술대로 따르지 않음과 같다”고 하신 것입니다. 이는 완악한 자가 아무리 권면하여도 듣지 않는 것을 비유한 말씀이요, 반대로 의인은 죄악을 볼 때에 이 시의 내용처럼 안타까운 심정을 토하게 된 것입니다.
2.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 즉 보복을 구함으로 의인과 악인들이 깨닫기를 바라는 말씀입니다. 사람은 개인적으로 악을 응징하거나 보복할 능력이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보복하시는 분이시고(나 1:2), 심판하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의 심판이 최후에 있는 것은 확실하지만 “현세에서도 징벌을 하시는 하나님이시라(11절)”는 사실을 알게 하는 것이 중요하기 때문에 기도한 것입니다. 그리고 이 보복을 위한 기도는 개인의 보복심을 발동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공의로운 보복에 호소하는 내용임을 아셔야 합니다.
1) 6절을 보시면 “이를 꺾으소서 또 젊은 사자의 어금니를 꺾으소서”라고 하였으니 악인이 의인을 해하는 정황을 사자가 약한 동물을 먹는 것으로 비유하여 악인이 의인에게 악한 행동을 못하도록 억제시켜 달라는 호소입니다.
2) 또 7절 말씀에서도 악인을 활 쏘는 자로 비유하여 “의인을 겨누는 살을 꺾어지게 해달라” 함으로 역시 악인의 악이 성사되지 못하도록 기도한 것이며
3) 7절 말씀에서도 악인은 “달팽이가 움직일 때 자기 몸의 발바닥을 스스로 닳게 하는 것처럼 악인의 도모에 손해를 보게 해주시며 마치 만삭되지 못하여 난 어린 아이가 죽어서 빛을 보지 못하는 것처럼 악인을 망하도록” 해주시며
4) 9절에서도 같은 뜻으로 말씀하신 것인데 악인이 “광야에서 음식을 먹기 위하여 가시나무를 불태워 가마를 끓이려 하다가 강한 회오리바람이 불어 모든 것을 뒤엎음” 같이 악인의 도모가 망하고, 하나님의 응징이 나타나기를 기도한 것입니다.
3. 이렇게 될 때에 “의인이 통쾌감을 느끼고, 승리감(악인의 피에 발을 씻음은 승리한 전사의 확인을 뜻함)을 느끼게 하여 위안이 있게 되고, 따라서 모든 사람들이 과연 의인에게 갚음이 있고 하나님의 공의가 지상에서도 실현되므로 하나님을 두려워하게 해 달라”고 한 말씀입니다.
결론적으로 저희들은 이 말씀에서 ① 의인의 입장이 되어 ② 악을 탄식하고, ③ 악을 고발하며 ④ 하나님의 공의를 더욱 든든히 믿는 성도가 되셔야 할 것을 교훈하신 것입니다.
제37과 예레미야의 뜨거운 심정 (렘 20:7~13) 목록으로
이 시간에는 9절 말씀을 근거로 예레미야의 뜨거운 심정을 저희들도 갖기를 바라서 이 말씀을 읽은 것입니다.
1. 예레미야 선지자는 바벨론 포로 당시의 선지자였습니다. 이스라엘 나라가 그들의 죄 값으로 바벨론 나라에게 멸망당하기 전에 예레미야 선지자는 그 사실을 하나님의 명에 따라 예언을 한 것입니다. 선지자가 하나님의 손에 붙잡히면 하나님의 말씀대로 예언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가 예언한 것은 이스라엘 조국의 멸망입니다. 그 예고 내용을 살피시려면 앞 장인 19:7~9을 읽어보십시오(다함께 읽어야 함). 또 20:4~6을 읽어보십시오(다함께 읽게 함). 그런 내용을 말했으니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자들이 좋아할 이치가 없겠지요.
2. 본문 말씀을 살펴보겠습니다.
1) 예레미야는 7절 말씀에서 하나님의 권유가 강하였기 때문에 하나님께 붙잡혀 선지자가 되었고, 축복 아닌 저주를 외쳤기 때문에 예레미야에게 하나님의 소명이 왔을 때 그는 사양한 일이 있었으나(렘 1:6) 그러나 하나님의 권유가 강하였기 때문에(렘 1:7~9) 붙잡힐 수밖에 없었습니다.
2) 그는 외칠 때마다 강포와 멸망을 부르짖었기 때문에 종일토록 치욕을 당하였다 하였고(8절),
3) 그 고난을 피하기 위해서 말씀 선포를 중지하려고 생각하면 중심이 불붙는 것 같아서 견디지 못하여 중단을 못하고 또 전파하게 된다고 한 것입니다(9절). 하나님이 이것을 외치게 하심은 그들로 깨닫고 회개하게 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렘 36:2~3).
4) 10절에서 예레미야는 이웃의 무리들이 자기를 고소하기 위하여 허물을 찾고, 심지어는 벗들까지 자기가 타락하기를 기다리며 예레미야가 유혹을 받아 범죄하면 그 기회에 원수를 갚자고 한다는 것입니다. 여기의 원수를 갚는다는 것은 미워하는 자에게 보복하려는 것을 의미합니다.
5) 그러나 11절에서 예레미야는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 지식은 바로 하나님이 두려운 용사 같으시기 때문에 핍박자들이 이기지 못하게 하실 것이고, 또 악인은 지혜롭게 행하지 못하기 때문에 영원한 수치를 당하게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6) 또 12절에서 하나님은 의인을 시험하시고, 그 피부와 심장을 보시는 분이신즉 나의 사정을 아시고, 악인을 응징해 달라고 기도하였고,
7) 마지막 절인 13절에서는 하나님이 가난한 자의 생명을 행악자의 손에서 구원해 주실 것을 믿으면서 그 하나님께 찬송을 하여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3. 이 말씀에서 무슨 교훈을 받아야 합니까?
1) 우선은 이 성경 말씀의 의미를 어떻게 해석하고 이해해야 하는가를 이해하셔야 하며
2) 이 말씀에서 하나님께 붙잡혀 쓰임 받는 예레미야가 하나님의 주신 말씀을 따라 민족의 멸망을 외친 내용, 백성들이 그의 외침을 듣기 싫어하여 예레미야를 핍박한 사실, 예레미야가 그 핍박을 면하기 위하여 말씀 선포를 하지 않으려고 하면 중심이 불붙는 것 같아서 견디지 못하여 또 전파하게 되는 사실, 이웃과 벗이 예레미야를 고소하려고 허물을 찾으나 하나님이 용사 같으시기 때문에 그대로 두시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 하나님은 의인의 사정을 잘 아시기 때문에 악한 자의 손에서 구원해 주실 것을 확신하면서 하나님께 찬송하는 신앙을 배울 수 있습니다.
3) 그리고 마지막으로 강조하려고 하는 것이 바로 예레미야처럼 뜨거운 심정을 갖는 것입니다. 예레미야는 증언하는 사명에 불타고 있었습니다. 핍박을 피하기 위하여 증언을 중단하려고 하면 더욱 불붙는 것 같았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과 백성을 사랑하는 마음의 불이기도 합니다. 그는 이런 사랑의 뜨거운 때문에 밤새도록 울면서 애가를 지었다고 하였습니다(애 1:2). “주여 우리들에게도 예레미야의 심정을 주시옵소서”하는 것이 이 시간 교훈의 요지입니다.
제38과 현대인의 착각 (시 49:16~20) 목록으로
지금 읽으신 말씀에서는 “부자와 부자의 영광을 두려워하지 말라” 하셨고(16절), “부자의 영광이나 생시의 자기를 축하하는 것도 죽으면 끝난다” 하셨으며(17~19절) “물질이나 명예 등으로 존귀한 입장에 있을지라도 진리를 깨닫지 못할 때는 멸망하는 짐승같다”고 하셨습니다.
1. 이 말씀은 많은 사람들의 착각을 지적하신 것입니다. 현대인들이 무슨 착각을 하고 있을까요?
1) 물질이면 다라고 생각하여 치부를 최종 목적으로 삼는 것입니다. 과거에는 부자가 재물로 명예를 사려고 하는 것을 본 일이 있습니다. 예를 들면 돈으로 당선되려는 선거 풍토에서 느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요즘에는 아주 높은 명예를 가진 사람들이 그 명예로 재물을 구하여 취득하는 것을 볼 때 재물을 명예보다 앞세우고 있는 것입니다. 재산을 공개하기 싫어서 관직을 내놓는 것도 그 실례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확실한 착각이지요. 본 장 6절을 보시면 “재물을 의지하고 풍부함으로 자긍하는 자는 아무도 결코 그 형제를 구속하지 못한다” 하셨으니 재물은 죄사함을 위한 일푼의 가치도 없는 것입니다. 재물의 가치는 십자가의 은혜나 생명이나 믿음의 지혜나 건강만도 못한 것임을 아셔야 합니다.
2) 현실적인 영광을 아주 대단한 것으로 여기는 착각입니다. 16절에서 성도는 “악인이 그의 재물로 영광이 더할 때에 두려워하지 말라” 하셨고, 또 18절에서 “현실적 영광을 좋아하는 자들은 생시에 자기를 축하하여 스스로 좋게 하며 사람들의 칭찬을 받으려 한다”고 하였습니다. 이는 돈으로 육신을 좋게 하는 일과 명예를 높이는 일을 얼마든지 할 수 있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왜 착각일까요? 그 이유는 죽으면 끝나고 죽으면 더 이상 갖고 가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죽으면 못하는 생시의 영광인지라 더 하려고 하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 현실의 영광을 추구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못한 것임을 아셔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님이나 의인들의 생애가 입증하는 것입니다.
3) 진리 없는 존귀나 깨달음이 없는 존귀에 대하여 그것을 큰 것으로 착각을 하는 것입니다.
① 진리 없는 존귀는 곧 믿지 않는 사람의 영광을 말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이 아무리 영광의 보좌에 올랐다 하더라도 그의 영광이 자기의 죄를 속할 수 없고 그의 권세가 지옥의 판결을 면할 수 없으므로 소망이 없기 때문이요,
② 깨닫지 못하는 존귀 역시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어두운 형편을 뜻하는 것이므로 보람이 없습니다. 부모를 거역하거나 부모를 도외시한 자가 출세를 하였다 할지라도 칭찬의 대상이 못되는 것처럼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무리의 세상적 존귀란 하나님 앞에서 인정되지 않는 것입니다.
③ 그런 자의 말로가 “멸망하는 짐승 같다”고 하셨습니다. 이 세상에서 자식에게 기대를 거는 사람은 있어도 짐승에게 기대를 거는 사람은 없습니다. 짐승은 양육되는 목적이 가죽이나 고기로 이용되기 위함입니다. “멸망하는 짐승”은 잔치날이나 제사 드리는 날이면 속절없이 죽어야 하는 것처럼 진리 없는 자들의 생활이 아무리 호화롭고 명예롭다 하여도 그 종말은 죽음과 영원한 심판으로 끝나기 때문입니다.
2. 그래서 저희들은 현실적인 착각에서 깨어나야 하겠습니다. 현실적인 착각에서 깨어나는 방법은
1) 무엇이 가장 가치 있는 것인가를 아는 것입니다. 물질인가? 명예인가? 세상의 향락인가? 아니면 진리인가? 진리 되신 예수님이 가장 존귀한 존재임을 아셔야 할 것이요,
2) 어떻게 사는 것이 가장 가치 있는 삶인가를 아셔야 하는 것입니다. 내 뜻대로, 사람의 뜻대로, 현실의 유행대로, 진리대로…여기에서 진리를 따라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것이 가장 보람된 일임을 아셔서 꼭 그렇게 살도록 노력하셔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주신 은사를 따라 하나님 중심으로 사는 것이 착각을 면하고 바로 사는 방식임을 알려드리기 위하여 이 말씀을 드린 것입니다.
제39과 하나님을 갈망함 (시 63:1~7) 목록으로
본문 앞에 보시면 잔글씨로 “다윗이 광야에 있을 때에”란 말씀이 있습니다. 그리고 11절에서 이 말씀의 저자는 왕이라고 하였기 때문에 다윗 왕이 광야에 있은 것은 그 아들 압살롬의 모반으로 인하여 유다 광야에 있었고, 그 곳에 피신했을 때(삼하 15:23, 28, 17:16)에 이 말씀을 기록한 것입니다. 왕이 역적으로 인하여 피신을 한 것은 큰 위험이요, 불행이 아닐 수 없는데 다윗은 그 때에 더욱 하나님을 갈망하고 의지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1. 여기에서 다윗이 생각한 하나님은 어떤 분인가? 할 때
1) 권능과 영광을 가지신 하나님으로 알았습니다. 2절에서 “내가 주의 권능과 영광을 보려 하였다”고 하였고,
2) 3절에서는 “주의 인자”란 말을 사용하므로 자신이 섬기는 하나님을 인자하신 하나님으로 깨닫고 있었으며
3) “날개 그늘로 보호하사 도움을 주시는 분”이라고 7절에서 말씀하셨습니다. 영광과 권능의 하나님, 인자가 풍성하신 하나님, 또 보호하시고 도움을 주시는 하나님으로 믿고 신뢰한 것을 기억하셔야 하겠습니다.
2. 다윗이 어떤 방법으로 그 하나님을 갈망하였는가? 할 때에
1) 나의 하나님으로 갈망하였습니다. 1절에서 “주는 나의 하나님이시라” 하므로 하나님은 모든 이와 만유를 통치하시지만 “나 혼자의 하나님”처럼 나를 도와주실 수 있고, 또 그렇게 사모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오늘날 성도들이 하나님을 멀리 계신 하나님으로 생각하는 것과는 퍽 대조적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나와 멀리 계시지도 않거니와 또 누구를 통해서 간접적으로 연결해야만 하는 하나님이 아닌 것입니다. 따라서 저희들도 꼭 나의 하나님(혼자 기도할 때)으로 믿고 의지하셔야 하겠습니다.
2) 다윗은 그 하나님을 광야에서, 성소에서는 “바라보았다” 하였고(2절), 침상에서도 “묵상하였다”고 하였습니다. 이렇게 광야에서는 갈망하고 성소에서는 바라보며 침상에서는 묵상을 하였지만 하나님을 사모하는 방법이 장소 따라 다른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은 어디에서 사모하든지 말씀과 기도와 찬송과 순종과 헌신으로 가까이 한다는 것을 잊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① 광야에서 하나님을 갈망한 것은 성도가 퍽 어렵고 위험한 일이 있을 때 하나님을 찾은 것이고,
② 성소에서 주를 바라보았을 때란 환난에서 평화의 세계로 돌아왔을 때이며
③ 또 침상에서 주를 묵상할 때는 퍽 행복할 때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성도는 괴로울 때나 즐거울 때나 광야에서나 초막에서나 어디서든지 하나님을 가까이 할 수 있고, 의지하여 도움을 구할 수 있음을 아셔야 합니다.
2. 이 말씀에서 다윗은 하나님을 의지함으로 말미암아 큰 도움 받은 사실을 고백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3절 말씀에서 그는 평생에 하나님을 송축을 하였고, 또 주의 이름(여호와=언약의 하나님)을 인하여 기도를 하였으며(손을 듦) 그 결과로 골수와 기름진 것을 먹음 같이 영혼도 살찌게 되었고(6절), 주님의 도움으로 하나님을 즐거이 부르게 되었다고 하였습니다(7절).
결론적으로 이 말씀에서 교훈 받아야 할 것은
① 권능의 하나님, 영광의 하나님, 인자하신 하나님을 깨닫는 것이요, ② 괴로우나 즐거우나 그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이며 ③ 광야에서나 성전에서나 침상에서나 하나님을 갈망하고 사모하며 찬송하는 것입니다. ④ 또 하나님을 간접적으로 접근해야 하는 하나님을 믿지 마시고, 직접 나의 하나님으로 모시는 것입니다. ⑤ 하나님을 사모하는 방법은 말씀과 기도와 찬송과 순종과 헌신이란 사실을 확인하는 것입니다. ⑥ 그리고 그 하나님의 도움을 힘입어 영혼의 만족을 누려야 합니다. 다윗이 환난 중에 하나님을 앙망하여 보호받고 승리한 것처럼 저희들도 그런 생활을 해야 하겠기로 이 말씀을 드린 것입니다.
제40과 기름 같은 은혜를 받자 (왕하 4:1~7) 목록으로
이 시간에는 “기름 같은 은혜를 받자”는 제목으로 교훈을 받으려고 합니다.
1. 본문의 내용을 살펴 보면
1) 문제의 가정이 있었습니다. 선지자의 생도로 하나님을 경외하던 남편이 죽고, 두 아들과 함께 가난에 쪼들린 과부가 있었습니다. 빚을 지고 갚지 못하자 채주가 와서 채무 변제 대신 두 아들을 종으로 데려가겠다는 것입니다.
2) 그때 그 여인이 엘리사 선지자를 찾아가서 그 사정을 말했더니 “내가 네게 어떻게 하랴 네게 무엇이 있느냐 한 병 기름이 있다면 빈 그릇을 많이 빌려오고 두 아들과 함께 방에 들어가서 문을 닫고 한 병 기름을 빈 그릇에 따르되 차는대로 옮기라”고 하여 그대로 순종하였더니 빈 그릇이 다할 때까지 많은 기름이 생겨서 그것을 팔아 빚을 갚고 생활하게 되었다고 한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선지자가 시킨대로 하여 기름을 얻어서 문제를 해결한 것입니다. 따라서 문제를 해결한 기름이란 것은 하나님이 주시는 다양한 은혜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돈이면 다라 하고 성도들은 성령을 받으면 만사가 해결된다고 합니다. 따라서 이 기름은 바로 성도가 받아야 할 성령 충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2. 이 은혜를 어떻게 받을 수 있느냐에 대하여 본문 말씀은 그 사실을 명확하게 나타내 주셨습니다.
1) 선지자의 지도를 받았습니다. 은혜를 바르게 받으시려면 여러분들도 교역자의 지도를 잘 받으셔야 하는 것입니다. 그 문제의 가정은 선지자가 꼭 시키는대로 하였습니다.
2) 한 병의 기름을 이용하라고 하였습니다. 그 집에 은혜가 아주 없지 않았습니다. 가난하다 해도 한 병의 기름은 있었습니다. 여러분들이 은혜가 없는 것 같아도 이 자리에 나올 힘이 있어서 나오신 것입니다. 제가 이 설교를 준비할 때 이상구 박사의 건강 강의가 있었습니다. 건강은 먹는 것보다 운동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운동할 수 있는 힘이 있을 때 운동하여야 합니다. 또 정신적 건강과 사랑이 건강의 관건이란 설명을 과학적으로 증명하였습니다. 그런고로 있는 힘과 있는 것과 있는 은혜를 활용해야 합니다.
3) 빈 그릇을 많이 빌려 왔습니다. 빈 그릇은 기름을 담기 위한 그릇이니까 곧 비어 있는 자기 자신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자기가 비어 있지 않으면 하나님이 은혜를 안 주십니다. 자기를 비우고 심지어는 자기를 십자가에 못 박을 때 하나님은 빈 그릇에 은혜를 부어주신다는 것을 믿으셔야 합니다.
4) 골방에 들어가서 문을 닫고 기름의 은혜를 받은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이 골방에서 은혜를 주셨다는 뜻입니다. 은혜치고는 골방에서 받는 은혜가 진짜인 줄로 아시기 바랍니다. 왜 진짜인가? 하나님이 자기와 단 둘 사이에서 주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많고 넓은 장소에 가서 은혜를 받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나 골방에서 하나님과 나와의 기도, 말씀 연구, 회개 등의 그 세계에서 받는 은혜가 자기를 만족시킬 수 있는 은혜란 것을 아셔야 합니다.
5) 그 골방에 “두 아들과 함께 들어가서 작업을 하라” 하셨으니 이것은 같은 방법을 합심해서 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합심 협력했기 때문에 기름을 더 많이 받을 수가 있었습니다. 합심 협력은 더 큰 은혜를 받음에 중요한 것입니다.
6) 그릇에 기름이 차는대로 옮기라고 하셨습니다. 가득찬 그릇은 옮기고 또 다른 빈 그릇을 대어야 하는 것, 이것은 바로 받은 은혜를 아낌없이 활용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 기름을 받은 가정이 그것을 팔아서 빚을 갚고 생활한 것처럼 받은 은혜는 꼭 활용하여야 합니다. 그릇이 다 되니까 기름도 그쳤습니다(저는 이런 원리로서 두 가지 실천하는 것이 있는에 하나는 설교를 아껴 두지 않는 것이고 또 하나는 음식을 오래 보관하지 않는 것입니다. 없으면 또 주시니까요).
결론적으로 이 말씀에서 꼭 깨달으시고 은혜를 많이 받는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모든 문제를 해결하시고 영적 자유를 누리시는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영적 은혜와 함께 물질적 문제도 꼭 해결하셔야 합니다(마 6:33).
제41과 기름의 은혜는 어떤 것인가? (시 23:5~6) 목록으로
이 시간에는 기름의 은혜란 어떤 것인가를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1. 먼저 본문 말씀에서
1) 하나님은 성도의 대적자를 패하게 하시고 그 원수 앞에서 상(연회)을 베푸신다고 하셨습니다. 이 상이란 승리의 즐거움을 축하하는 연회를 의미합니다.
2) 성도의 머리에 기름을 발라 잔이 넘치게 하시는 분이십니다. 기름을 바른다는 것은 은혜를 상징함이고, 잔이 넘침은 풍족함을 의미합니다. 기름을 은혜로 해석해야 할 근거는 많습니다. 예수님을 기름 받은 자(그리스도)라 하셨고(시 2:2), 눅 4:18에서도 “주의 성령이 메시야 사역을 위하여 기름을 부으신다” 하셨으니 이 기름은 성령의 은혜를 상징하는 것입니다.
3) 본문 끝에서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정녕 나를 따르므로 하나님의 집에 영원히 거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씀에서 유의하실 것은 성령의 은혜를 기름으로 비유하신 것입니다.
2. 기름의 은혜는 어떤 것입니까? 또 성령의 은혜를 받으면 어떤 결과가 나타날까요?
1) 기름은 맛을 냅니다. 기름진 음식을 잡수어 보셨지요? 맛이 있습니다. 이와 같이 예수를 믿다가 은혜를 받으면(이 은혜란 성령 충만임) 신앙 생활이 퍽 재미있어지는 것입니다. 기쁨으로 믿으셔야 합니다.
2) 기름은 부드럽게 하는 역할을 합니다. 시 104:15에서 “윤택케 하는 기름”이란 말씀이 있습니다. 성도가 성령의 은혜를 받으면 무슨 일이나 쉽게 또 사랑스럽게 처리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3) 기름은 불을 붙여 어둠을 밝힐 수 있는 것입니다. 어둠을 죄악이라고 할 때 성령 충만을 받은 성도는 빛에 거할 것이니 이것이 바로 정의를 실천하는 성도의 생활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4) 기름은 양식으로서 건강은 물론 생활의 힘을 주고 물질적 은혜로 채워주시는 것입니다. 왕하 4:1~7 말씀에서 기름을 팔아 빚을 갚은 사례가 바로 물질 축복을 의미하는 것이요,
5) 기름은 미용이나 약용으로 쓰여져서 아름다움을 나타내주기도 하고, 또 병을 치료하는 약용이 되므로 성령의 충만한 은혜를 받으면 모든 부조리를 잘 고치고 개혁할 수 있습니다. 문제를 해결하고 고치고 바로 잡는 은혜가 곧 성령의 기름 같은 은혜입니다.
6) 기름은 기계 작동의 원동력이기 때문에 힘의 상징이 됩니다. 그래서 성령의 은혜를 받으면 우선 힘이 생기는데 성경을 깨닫는 힘, 성경을 실천하는 힘, 마귀를 대적하는 힘, 충성하는 힘, 성령의 열매를 맺는 힘 등 모든 선한 활동의 힘이 생기는 것입니다.
7) 기름은 하나님께 드릴 수 있는 제물도 되고 구약 시대에 종교적 의식에서 임직에도 사용하였습니다. 이것은 성령 충만한 성도를 하나님이 기쁘게 여기시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는데 쓰임을 받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레 2:1, 3:3, 출 30:30).
8) 성도가 기름의 은혜를 받아 성령이 충만하면 성령의 열매를 맺게 될 것이고(갈 5:22~23), 성령님의 뜻(성경 말씀대로)을 따르게 될 것이며(갈 5:18) 또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않게 될 것입니다(갈 5:16). 성령의 열매를 맺고,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않을 때 그 인격은 점점 더 거룩해져서 결국은 예수님을 닮아가게 됩니다.
9) 사 61:3에 “희락의 기쁨”이란 말씀이 있고, 또 히 1:9에서도 “즐거움의 기름”이란 말씀이 있으므로 기름의 의미를 기쁨의 복으로도 해석할 수 있습니다. 성도는 성령 충만과 함께 기쁨의 생활을 하여야 할 것입니다.
10) 마지막으로 저희들은
① 기름을 부어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고,
② 이 기름 부으심의 의미가 육체, 물질, 영혼, 직임에 미치는 풍성한 복으로 은혜롭게 하심을 깨달아서
③ 저희들도 성령의 충만을 받은대로 모든 일을 은혜롭게 진행시키는 결과를 가져와야 할 것입니다. 기름의 용도를 따라 성령 충만의 생활을 시도하시는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바라서 이 말씀을 드린 것입니다.
제42과 주일을 거룩히 지키자 (사 58:13~14) 목록으로
이 시간에는 “주일을 거룩히 지키자”라는 제목으로 교훈을 받겠습니다.
1. 본문 13절을 보시면 “안식일”이란 용어가 나옵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안식일에 관한 계명을 주신 것은 출애굽 때에 율법과 함께 주셨습니다(출 20:8~11). 그러면 그 이전에는 안식일의 의미가 없었는가 할 때 창 2:3에 보시면 “하나님이 일곱째 날을 복 주사 거룩하게 하셨으니 이는 하나님…만드시던 모든 일을 마치시고 이 날에 안식하심이라”하심으로 하나님이 안식하시고, 거룩하게 하시며 복을 주신다 하신 의미가 그 당시의 인간들로 하여금 그 날을 성일로 여겨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복을 받게 하셨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게 하시다가 모세 때에 와서 안식일의 계명을 확실하게 주신 것입니다.
2. 이스라엘 선민들은 안식일을 엄격하게 지켰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부활하신 다음부터는(이단파 안식교인들을 제외한) 모든 성도들이 안식일을 지키지 않고, 주일을 지키는 사실을 알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안식일 규례는 왜 폐지되었으며 왜 주일을 지켜야 하는가를 아셔야 할 것입니다.
1) 안식일이 폐지된 이유는
① 그 계명이 의문에 속한 율법이기 때문입니다. 골 2:14에 “의문에 쓴 증서를 도말하시고 제하여 버리사 십자가에 못 박으셨다”고 하셨습니다. 따라서 구약의 제사법이나 의문의 법들은 다 예수님과 그의 구속 사업을 계시하시기 위함이었는데 그 실상하신 예수님이 직접 오셔서 십자가와 부활을 보여 주심으로 구약의 모형적 계시는 빛을 잃게 된 것입니다(마 11:13, 5:17, 롬 10:4, 골 2:16).
② 또 예수님은 안식일의 주인이시며(마 12:8) 하나님이 친히 말씀하시기를 “너희는 저의 말을 들으라(마 17:5)”고 하셨기 때문에 구약의 율법이나 의식 중심에서 예수님 중심으로 돌아와야만 하는 것입니다.
2) 신약의 성도가 주일을 지켜야 하는 이유는
① 예수님이 주일 새벽에 부활하셨고(마 28:1),
② 성령 강림도 주일에(행 2:1), 계시도 주의 날에 주셨으며(계 1:10)
③ 여기에 따라서 성도들이 그 날 모임을 가졌고(고전 16:2),
④ 신약의 성도들은 사도들의 모범을 본받아서 신앙 생활을 하여야 하기 때문입니다(엡 2:20).
3. 그러면 저희들이 주일 지키는 일을 어떻게 이해하여야 할 것입니까?
1) 구약의 율법에 의한 것이 아닌 신약 시대의 사도들의 모범과 예수님 중심에 입각한 생활임을 아셔야 하는 것입니다. 주일이 예수님 중심이란 것은 예수님이 그 날에 부활하셨고, 그 날을 “주님의 날”(계 1:10)이라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2) 이 날을 “주님의 날”이라 하셨으니 우리의 날이 아닌 줄로 아셔야 하고, 또 주님의 날인 만큼 거룩한 날로 아셔서 거룩하게 지킨다는 의미에서는 구약의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키는 것과 상통한다고 볼 수 있는 것입니다.
4. 주일을 어떻게 지켜야 잘 지킬 수 있을까요?
1) 주일에 세상의 일로 얽매이는 일이 없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 믿는 성도는 주일날 얽매이는 직업을 갖지 마시고, 자유로운 직업을 가지셔야 하며
2) 인간적인 모든 일을 다른 날로 미루어야 하고,
3) 육체적인 오락이나 물질적인 거래를 하지 말아야 하며
4) 오직 경건한 마음을 갖고 신령한 예배에 주력하고,
5) 하나님을 즐거워하여 찬양하며
6) 하나님이 원하시는 하나님의 일을 하는 날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행할 때에 본문 14절에서 “내가 너를 땅의 높은 곳에 올리고 네 조상 야곱의 업으로 기르신다”고 하신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주일을 잘 지키려고 애를 쓰시는 성도님들이 되실 때에 믿음의 발전과 축복의 전망이 있다는 것을 아셔서 적극 노력하시는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제43과 범사에 모본을 보임 (행 20:33~35) 목록으로
이 시간에는 “범사에 모본을 보임”이란 제목으로 교훈을 받겠습니다. 바울 사도는 특별한 은혜를 받은 분으로 범사에 모본을 보이셨습니다. 본문에서도 모본을 보였다고 하셨지만 고전 11:1에서도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 된 것 같이 너희도 나를 본받는 자가 되라”고 하셨습니다. 본문 말씀은 바울 사도께서 2차 전도를 마치시고 예루살렘 쪽으로 오시면서 “밀레도”에 머물러 에베소 교회의 장로들을 그 곳으로 오게 한 다음 여러 가지 부탁하신 말씀의 마지막 부분을 읽으신 것입니다.
1. 이 말씀에서 바울 사도는 “아무의 은이나 금이나 의복을 탐하지 않았다”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성도가 물질적 욕심없이 살아야 할 것을 교훈하신 것입니다. 저희들에게 은이나 금이나 의복 등 물질의 욕심이 떠나지 않으면 믿음 생활을 잘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물질보다 더 좋은 하나님을 깨달아야 합니다. 욥 22:24~26에 보시면 “보배를 진토에 버리고 오빌의 금을 강가의 돌에 버리라 그리하면 전능자가 네 보배가 되시고 네게 은이 되시리니…네가 전능자를 기뻐하여 하나님께 얼굴을 들 것이라”고 하셨습니다(마 6:24, 바울은 두 주인을 섬기지 않았음).
2. “자신의 수고로 동행자들의 쓸 것과 약한 사람들을 도왔다”고 하였습니다. 바울 사도는 자기가 번 물질이라도 자기 혼자 쓸 것으로 생각지 않고, 전도하는 동행자들과 다른 약한 사람들을 도우면서 사역을 하셨습니다(자기 가족이 없으니까 이웃을 가족처럼 생각했다고 할 수 있음). 이것은 오순절 당시의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필요에 따라 나누어 주었다(행 2:44~45)는 말씀처럼 그렇게 생활한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또 그 당시에는 선교비도 받는 것만 갖고는 다 쓸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선교비도 친히 벌어서 사용하셨습니다.
3.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처럼(마 10:8, 눅 6:38)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는 사실을 확실히 믿고 시행하신 것입니다.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는 사실을 믿고 행하는 사람이 많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저희들은 되도록이면 받기를 바라지 말고 주기를 힘쓰며 또 내가 노력하여 생활한다는 결심을 갖고 그대로 살아 가셔야 하겠습니다.
4. 마지막으로 가장 중요한 것이 범사에 모본을 보이시는 것입니다. 무엇에 본을 보여야 할까요?
1) 좋은 성품의 본을 보여야 합니다. 성품이 좋다는 인정을 받을 때 덕을 세울 수 있습니다. 온유한 성품, 겸손한 성품, 인내하는 성품이 있어야 성도로서 본이 될 수 있습니다. 급한 성격이나 교만한 성격, 포악한 성격 등이 죽지 않으면 예수님의 향기를 날릴 수 없음을 아셔야 할 것입니다.
2) 말의 본을 보여야 합니다. 말은 성격에 따라 나타나지만 늘 조심하여 덕 되는 말만 하여야 할 것입니다. 남을 해하는 말, 자기 자랑을 내세우는 말, 불평 원망하는 말은 본이 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감사하는 말, 격려와 희망을 갖게 하는 말, 건설적인 말로 본을 보여야 할 것이며
3) 신앙 생활의 본을 보여야 합니다. 신앙 생활의 본은 개인적 생활과 교회(단체)적 생활로 나눌 수 있습니다. 개인적 생활은 자신과 가정에서의 생활이요, 교회적 생활은 성도의 단체 앞에서 하는 생활입니다. 다른 사람들로부터 칭찬을 받을 수 있도록 하려면 그 만큼 앞서가는 노력을 하여야 합니다. 단체 생활은 겸손한 협조, 인내, 화합을 잘 할 수 있을 때 성공할 수 있습니다.
4) 충성에 본이 되어야 합니다. 먼저 봉사하고 더 많이 기도하며 자기의 공력을 나타내려 하지 말고, 숨은 봉사를 잘 하여 본을 보여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감찰하시는 분입니다. 모든 성도가 신앙적 본을 보일 때 하나님께 영광이 되고 자신에게 복이 되며 따라서 발전의 열매가 맺힐 줄로 믿어서 이 말씀을 드렸습니다.
제44과 보호해 주시는 하나님 (사 46:3~4) 목록으로
지금 읽으신 말씀은 이사야 선지자가 이스라엘 백성들의 장래를 보호하시고 인도해 주시겠다는 약속의 예언입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주전 700년경에 이스라엘 백성들의 수난(바벨론 포로)을 예언하시면서(사 10:1~4) 다시 하나님의 은총이 임할 것을 또 예언하신 것입니다.
1. 하나님은 범죄한 백성들에게 징계를 하시지만 그 징계가 끝날 때는 다시 권고하십니다. 이 말씀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징계로 바벨론에게 멸망을 당하고 70년간 고난을 겪지만 그 후에는 다시 권고해 주셔서 해방도 주시고, 또 영적 축복도 주실 것을 예언하신 말씀입니다.
2. 하나님이 그 민족을 권고하시는 이유는
1) 그들이 야곱 집 즉 이스라엘의 남은 자로 약속을 받은 아브라함의 후손이기 때문이며
2) 또 배에서(태에서) 남으로부터 하나님의 보호와 인도를 받은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3절 말씀의 “안겼다 품겼다”하신 말씀이 바로 출생 때부터(시작 때부터) 보호하시고 인도하셨다는 뜻입니다.
3) 그런데 그 보다도 더 큰 이유는 하나님이 창조(4절에 지었은즉) 하셨기 때문입니다. 여기의 “창조하셨다”는 의미는 보통 만드신 것만이 아니고 “거듭나게 하셨다”는 의미가 있는 것을 기억하셔야 합니다. 따라서 하나님은 창조하셨고, 거듭나게 하셨으며 조상 때부터 약속을 하셨고, 또 출생 때부터 친히 보호 인도하셨기 때문에 일시적으로 징계를 하셨지만 다시 보호하시고 인도해 주시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선민을 그렇게 권고해 주시는 것은 바로 택한 백성인 성도가 하나님의 영적 피조물이며 또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입니다.
3. 하나님이 우리를 이렇게 지으셨은즉 하나님과 우리와의 관계가 중요한 것입니다.
1) 우리는 하나님의 것이 되고,
2) 하나님의 통치를 받는 백성이며
3) 또 하나님의 목적을 위해서 살아야할 대상이 된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것, 하나님의 통치대로 하나님의 목적대로 사셔야 함”을 또 한 번 다짐하시기를 바랍니다.
4. “안을 것이요 품을 것”이란 말씀이 4절에 있는가 하면 3절에서는 “안겼고 품기운 너희”란 말씀이 있어서 하나님은 자기에게 안기고 품기우는 자를 안아주시고 품어주신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성도들 중에는 하나님을 사모하며 구하고, 의지하는 사람이 있고, 또 어떤 이는 그렇게 하지 않고 자기나 세상의 것들을 더 의지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때에 하나님은 자기를 구하고 찾고 의지하는 성도를 더욱 보살펴 주십니다. 자녀를 키워보면 아이들이 어릴 때는 부모의 품에 와서 잘 안깁니다. 그러나 그들이 자라서 중학생 쯤 되면 부모에게 가까이 오지 않습니다. 그러나 부모는 가까이 와 주는 자를 더 인정있게 여기고 사랑하게 되는 것입니다. 저희들도 항상 하나님을 갈망하고 가까이 의지하는 자가 되셔야 할 것입니다.
5. “구하여 주신다”는 말씀입니다. 무엇을 어떻게 구하여 주신다는 것일까요? 십자가의 은혜를 통하여 영혼을 구원하여 주시고 또 환난에서도 구원하여 주시며 특별한 섭리를 통해서 육신 생활과 사회 생활과 나라의 운명까지도 구하여 주시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결론을 맺겠습니다.
① 하나님은 선민과 택한 백성을 특별 섭리로 다스리시며
② 성도나 선민이 잘못 할 때는 일시적으로 징계하시지만 하나님이 선택하여 창조하셨고, 약속하셨으며 처음부터 키우셨기 때문에 결국은 보호하시고 붙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③ 거듭난 백성은 자신이 하나님의 것인줄 알고, 하나님의 통치를 받으며 하나님의 목적을 위하여 사는 자가 되어야 하고,
④ 하나님은 안기우는 자를 안아 주시고 품기우는 자를 품어 주신다는 것과
⑤ 또 우리를 구원하시되 십자가의 은혜로 영혼을 구원하시고 특별한 통치로 육신적인 어려움이나 국가적 환난에서도 구원하여 주시는 분이심을 깨닫게 하신 것입니다.
제45과 믿음이 자라는 과정 (벧후 3:16~18) 목록으로
이 시간에는 “믿음이 자라는 과정”이란 제목으로 교훈을 받겠습니다. 본문 말씀에서는 16절에서 “성경을 바로 해석해야 할 것”을 교훈하셨고, 17절에서는 “무법한 자들의 유혹에 끌리지 말아야 할 것”을 교훈하셨으며 18절에서는 “그리스도의 은혜와 지식으로 믿음이 자라서 하나님께 영광 돌려야 할 것”을 교훈하셨습니다.
1. 믿음이 정상적으로 자라려면
1) 우선 성경을 바로 해석하셔야 하고, 바르게 가르치는 교훈을 받아야 합니다. “알기 어려운 성경을 무식하고 굳세지 못한 자들이 억지로 잘못 풀어 가르치는 일이 많다”고 하셨습니다. 말세론을 잘못 가르쳐서 떠들썩했던 일을 체험하셨지요. 요즘도 성경관, 기적관, 내세관, 교회관 등 잘못 가르치는 것들이 얼마든지 있다는 것을 아셔서 주의하시기 바랍니다.
2) 무법한 자들의 유혹에 이끌려 굳센데서 떨어질까 삼가라고 하셨습니다. 아무리 잘 믿으려고 하다가도 잘못된 사람에게 유혹당하여 끌려가 버리면 해명과 구제를 받을 기회도 없이 잘못된 길이 바른 길인 줄로 알고 깊히 빠져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3) 하나님께로부터 예수님을 통하여 주시는 은혜(거저 받는 복)와 저를 아는 지식(예수님에 관한 지식 즉 성경 지식)에서 믿음이 성장할 것을 촉구하신 것입니다. 그렇게 될 때에 영광이 이제와 영원한 날까지 하나님께 돌려지게 됩니다. 믿음 성장은 하나님의 은혜와 지식으로 말미암습니다.
2. 믿음이 어떤 과정으로 자라납니까? 이것은 꼭 체험적으로 맞보셔야 할 일입니다.
1) 예배에 빠지지 않고 출석하는 것입니다. 예배는 하나님께 드리는 경배요, 또 찬송이나 기도나 성경을 배우는 과목과 같습니다. 모든 성도들이 예배에 참석함으로 신앙 생활의 표시를 나타내고 또 그 생활을 통해서 믿음이 자라고 숙달하는 것임을 아실 것입니다.
2) 성경을 배움에 있어서 열심과 즐거움을 갖는 것입니다. 아직도 많은 성도들이 성경을 배움에 열심을 갖지 않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렇지요? 성경 배우는 일에 열심을 내어야 믿음은 자랄 수 있고, 또 그것이 성장 과정이 되는 것입니다. 아침 식사를 하시고 커피 한 잔을 마시는 것을 취미로 알 듯이 또는 사랑하는 사람과의 대화를 나누듯이 그렇게 성경 공부에 맛을 들여야만 하는 것입니다.
3) 기도에 맛을 붙이고 기도에 점차 이끌리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기도하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새벽 기도회에 참석해 보시고 한 마디 두 마디 해 보시고 감사와 회개와 부탁하는 말씀도 해 보시고 또 내 기도가 하나님께 응답되는 줄로 믿으시면 나중에는 그 기도를 안 하면 서운하게 여겨져 또 기도하게 되고, 결국은 기도에 끌리는 마음을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이 때에 계속하기 어려운 상황을 결사적으로 타개하는 노력이 있어야 함을 아시기 바랍니다.
4) 주일을 완전히 주님의 날로 바칠 수 있도록 하는 것입니다. 현실적인 일은 다른 날에 할 수 있도록 조정을 할 수 있을 때 신앙의 발전을 기할 수 있습니다.
5) 헌금과 봉사를 기쁜 마음으로 시작해 보는 것입니다. 이것도 시작해 보면 재미가 생길 것입니다. 그래서 남보다 먼저 봉사하고 더 많이 헌금하려는 마음에까지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
6) 바르게 믿는 생활에 취미를 붙이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정통의 뜻을 이해하는 것이지요. 이 때는 좋은 것과 못한 것을 판단하는 때입니다. 좋은 것을 취하고 불건전한 것을 피하며 “바른 생활에 선다”는 보람은 대단한 기쁨이요, 복입니다.
7) 자기의 변화를 체험하고 점검하는 것입니다. 지식이 많아지는 것, 인내와 사랑이 많아지는 것, 봉사와 충성과 적응력이 커지는 것을 체험하여야 할 것이요,
8) 세상의 즐거움과 소망이 신령한 복에 비할 때 별 것이 아니란 것을 느끼셔야 하고,
9) 다른 이에게 성경을 가르치고 싶은 충동이 일어나야 하며
10) 모든 일에 자유로운 마음 갖는 체험을 함으로 신앙 성장의 상당한 완성을 기하는 것입니다. 이 열 가지 단계를 꼭 기억하여 체험하시는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제46과 예레미야의 두 가지 소원 (렘 9:1~6) 목록으로
이 시간에는 “예레미야의 두 가지 소원”이란 제목으로 교훈을 받겠습니다. 예레미야 선지자는 전에도 말씀드린 바와 같이 바벨론 포로 당시의 선지자로 자기 민족의 죄악을 지적하였으나 죄를 돌이키지 않음으로 말미암아 당할 참상을 내다보면서 슬퍼하며 기도한 선지자입니다. 본문 말씀에 보시면 1절에서는 “어찌하면 내 백성을 위하여 슬피 울겠느냐” 하심으로 범죄한 백성과 불행에 처할 백성들을 위하여 애곡할 것을 소원하였고, 2절에서는 “어찌하면 내가 광야에서 유할 곳을 얻겠느냐” 하심으로 진실이 없고 패역한 사회를 떠나서 조용한 곳에 가서 혼자 있기를 사모한 것입니다. 그리고 3~6절 말씀은 그 백성들의 죄악상을 나타낸 말씀입니다.
1. 예레미야 선지자의 첫 번째 소원은 눈물을 흠뻑 쏟으며 몹시 울고 싶었던 것입니다.
1) 예레미야가 울고 싶었던 이유는 백성들의 죄악과 불행 당할 일로 인한 탄식의 울음이었고, 여기에 따라서 하나님께 간절히 호소하는 기도의 눈물이었습니다. 오늘 저희들은 눈물이 많이 메마른 상태에 있습니다. 저희들은 어찌하면 눈물의 기도를 드릴 수 있을까 하고 눈물 흘리는 마음과 기도를 사모하여야 되겠습니다.
2) 성도가 눈물을 흘려야 할 이유는 무엇일까요?
① 회개의 눈물입니다. 시 6:6에서 다윗의 회개의 눈물이 있고, 왕하 20:5에서는 히스기야 왕의 회개의 눈물이 있으며 마 26:75에는 베드로의 회개의 통곡이 있습니다.
② 위로의 눈물이 있습니다. 욥의 친구들이 욥을 위하여 울어준 일(욥 30:25), 예수님이 나사로의 집에서 우신 일(요 11:35), 또 예루살렘을 위하여 우신 일(눅 13:345, 19:41) 등이요,
③ 기도의 간절함을 나타내는 눈물입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겟세마네의 기도를 들 수 있고(마 26:37, 히 5:7), 시 126:5의 울며 씨를 뿌리는 자의 기도, 그리고 본문에 나타난 예레미야의 눈물도 역시 기도를 위한 눈물이었습니다. 이렇게 눈물을 흘리는 마음은 신앙 생활과 인격 변화(전 7:3)에도 유익을 주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애통하는 자가 복이 있다”(마 5:4) 하셨고, 바울 사도도 “우는 자와 함께 울라”(롬 12:15) 하셨으며 야고보서에서도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약 4:9, 5:1).
2. 범죄하는 백성들을 떠나서 나그네처럼 광야에 유하기를 소원하였습니다. 이것은 범죄하는 사회에 환멸을 느꼈기 때문입니다. 죄를 무서워하지 않는 사람은 그런 마음을 가질 수 없습니다. 요즘 사람들은 죄의 참상을 살피거나 많이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더 생각하는 것은 사람 모인 곳을 통해서 돈을 벌려는 생각입니다. 우리는 이런 생각을 바꾸어 어찌하면 깨끗한 세계에서 죄를 멀리하며 살 것인가를 사모하여야 할 것입니다. 그런 세계는 천국에서나 완성되겠지만 성도는 현실에서도 순결한 세계를 동경하여야 할 것입니다. 예레미야가 백성들을 떠나서 광야에 나가 혼자 있기를 소원한 것은 염세주의(세상을 등지는 것)나 부패한 세계에서의 소금 역할을 안 하려는 뜻이 아니었습니다. 다만 죄악 세계에서의 핍박과 괴로움이 너무 심하니까 신앙적 수양을 갖기 위함이었습니다. 여기에서 저희들은 예레미야가 순결한 세계를 동경한 사실에 대하여 공감하셔야 할 것입니다.
3. 그 백성들의 죄악을 하나님이 지적하신 사실을 열거하였습니다. 3~6절의 말씀을 종합하면 음행과 패역(듣지 않고 돌이키지 않는 것)이 있고, 악에서 악으로 진행하며 악을 위하여 수고하고 궤휼 가운데 거하면서 하나님 알기를 싫어하고 또 가장 성행하는 것이 거짓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형제도 이웃도 못 믿을 형편이고 심지어는 거짓을 가르친다고 하였습니다. 이런 죄악의 참상이 예레미야로 하여금 눈물의 사람이 되게 하고, 순결한 세계를 동경하게 한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교훈 받으셔야 할 것은 ① 죄악을 깊이 살피는 생활과 ② 눈물의 심정을 갖고 기도하는 생활과 ③ 순결한 세계를 동경하는 자세를 가져야 하겠기로 이 말씀을 드렸습니다.
제47과 구원의 복과 전도 (눅 14:15~24) 목록으로
이 시간에는 본문 말씀에 근거하여 “구원의 복과 전도”란 제목으로 교훈을 받겠습니다.
1. 본문 15절과 24절에서 구원의 복을 하나님 나라에서 떡 먹는 일, 또는 하나님의 잔치를 맛보는 일로 비유하셨습니다.
2. 예수님이 청하신 천국 잔치에서 떡을 먹는 절차가 어떠한가를 살펴보셔야 하겠습니다.
1) 어떤 사람이 잔치를 배설하고 많은 사람을 청하였습니다(16절). 이것은 하나님이 구원의 계획을 세우시고 아브라함의 후손인 선민들에게 우선적으로 구원의 초청을 하신 것과 같은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먼저 계시의 말씀을 주셨고, 예수님도 이스라엘의 읽어버린 양에게 먼저 복음을 전하신 것이 그 실예입니다(마 15:24).
2) 그러나 그들이 다 일치하게 사양하고 거절하였습니다. 밭을 샀기 때문에 가 보아야 하고, 소를 샀기 때문에 시험하러 가야 한다 하였고, 또 한 사람은 장가를 갔기 때문이라고 하였습니다. 이 3가지 핑계는 다 세상에 속한 일과 물질적인 일을 의미합니다. 또 그들은 주인의 초청을 거절하는 것이 퍽 잘못인 줄 알았는고로 용서를 구하기도 하였습니다. 이것은 바로 구원의 초청을 먼저 받았으나 세상의 재리에 얽매여 신령한 은혜를 포기하는 사람들 즉 완악하여진 유대인들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3) 잔치 주인은 이 소식을 들었을 때 “노하였다” 하였으니 이는 청함 받은 자들이 주인의 정성과 호의를 외면하였기 때문입니다. 사람의 초청을 외면해도 주인이 노할 일이거늘 하물며 하나님의 초청이겠습니까? 이 때 주인은 “빨리 시내의 거리와 골목으로 나가서 가난한 자들, 병신들, 저는 자들을 데려 오라” 하였고, 그래도 자리가 남음으로 “산울가로 나가서 사람을 강권하여 데려다가 내 집을 채우라”고 하셨습니다.
① 여기에서 불행한 사람들을 청한 이유는 그들이 불행한 사람들이기 때문에 위로 받아야 할 입장이기 때문이요,
② 강권한다는 것은 성도가 빛을 강하게 발하고 전도를 열심히 해야 할 것을 비유로 말씀하신 것입니다.
③ 문제는 잔치의 빈 자리를 꼭 채워야만 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여기에 대하여 하나님은 만세 전에 계획하시고 선택하신 숫자와 대상을 계획대로 구원하시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에(요 17:11~12) 먼저 초청받은 자들이 거절하면 다른 사람으로 그 숫자를 채우시는 것이고(롬 11:7, 25), 이렇게 되는 일도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또 하나님의 구원 사업이 초청하는 일, 즉 전도하는 일을 통해서 이루신다는 것을 교훈하신 것입니다(롬 10:14~15).
3. 마지막으로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내 집을 채우라”는 의미가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1) 이 말씀이 예배당을 채우라는 뜻일까요? 신약의 예배 장소는 일정한 공간이 있는 것이 아니고 초막이나 궁궐이나 어느 곳이나 다 예배의 처소가 될 수 있으며 예배당 넓이에 따라 구원받을 자가 늘어나는 것이 아님을 아신다면 여기의 내 집이란 예배당이 아니란 뜻을 이해하실 것입니다. 내 집이란 하나님의 천국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택한 백성을 다 구원의 길로 인도하셔야 합니다(요 17:9~12).
2) 따라서 내 집을 채우라는 뜻은 하나님이 선택하신 천국 백성들을 다 모으기 위하여 전도를 열심히 하라는 말씀으로 세계의 모든 성도들에게 주신 전도의 명령인 것입니다. 그런고로 열심히 전도만 하시면 되는 것입니다.
3) 하나님은 택한 백성만 거듭나게 하시고 구원하십니다. 또 성도가 전도하는 것도 택한 백성에게만 적용이 되는 것이요, 전도의 열심으로 택한 백성의 수를 더 늘리지는 못하는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아셔야 할 것은 우리의 전도가 부족하여 하나님의 구원 계획이 좌절되는 줄로 아시지 마시고(마 3:9), 오직 성도의 사명을 다 하는 줄만 아시기를 바라서 이 말씀을 드린 것입니다(요 4:37~38, 벧전 3:20).
제48과 성도의 매일의 생활 (약 4:13~17) 목록으로
이 시간에는 성도의 매일의 생활이 어떠해야 하는가에 대하여 교훈을 받겠습니다. 지금 읽으신 말씀에서 어떤 사람들이 아무 도시에 가서 1년을 유하며 장사하여 돈을 벌려는 계획을 하였으나 ① 인생은 누구나 내일 일을 알지 못할 뿐 아니라 ② 그 생명도 잠깐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 같은 존재이므로 ③ 허탄한 자랑이나 계획이 다 악한 것이므로 ④ 오직 주 안에서 살고 주님의 뜻을 따르며 ⑤ 하루하루 단위로 충실하게 선을 행하면서 살아야 할 것을 교훈하신 것입니다. 따라서 이 말씀의 내용을 좀 더 자세하게 설명 드리겠습니다.
1. 인생이 1년을 계획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란 것입니다. 이 말씀은 성도나 모든 사람들이 1년 생활을 하지 말라는 뜻이 아니고, 인생은 내일 일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1년을 내다볼 수 없음을 깨달아서 참작하라는 말씀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알지 못하는 미래에 집착하여 계획을 하기 전에 알고 있는 현재의 생활을 충실하게 하는 것이 더 중요한 것입니다.
2. 성경은 하루하루 단위로 그 날의 생활을 충실하게 할 것을 교훈하셨습니다. 사람이 미래의 일을 모르도록 만드신 것은 항상 하나님을 의지하며 믿고 주 뜻대로 하루하루를 살라는 뜻입니다. 사람이 1분 뒤의 일도 모르는 것이 사실이지만 그래도 하루 안에 주어진 과제에 대하여는 충실하게 노력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본문 14절의 “내일 일을 알지 못한다” 하심은 “오늘의 일은 우선 살고 있으니까 안다”는 뜻이요, 또 히 3:13에서도 “오늘이라 일컫는 동안 매일 피차 권면하라” 하셨고, 마 6:34에서도 “내일 일을 염려하지 말고 한날의 괴로움은 그 날에 족하게 여기라”하신 말씀이 다 오늘 하루 중심으로 살아가라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오늘이 있는 순간을 크게 중요하게 생각하시고 헛된 시간을 보내지 않도록 하셔야 하며 매일 저녁이 되면 그 날의 생활을 반성하고 회개하며 정리하여 혹 내일이 없다 하더라도 후회가 없도록 하여야 할 것입니다.
3. 인생을 안개처럼 생각하라는 점에 대하여 교훈을 받아야 합니다. 안개는 앞을 내다보지 못하게 하므로 한치의 미래를 모르고 사는 인생을 비유함에 적합하고, 또 해가 뜨면 사라진즉 인생이란 하나님이 생명을 부르시면 끝나는 존재임을 비유한 것입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인간의 존재를 안개처럼 알지 않고 있습니다. 또 안개는 잠깐 있다가 없어지는 것으로 짧은 인생을 비유하기도 합니다. 따라서 안개 같은 인생을 허무하지 않게 살려면 어떻게 하여야 하는가를 교훈 받아야 합니다.
4. 이 말씀에서는 안개 같은 인생이 허무하지 않게 사는 방법을 몇 가지로 말씀해주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성도가 매일 매일 지켜야 할 생활인데
1) 16절에서 허탄한 자랑을 안해야 합니다. “허탄하다”는 것은 인간의 육체와 현실적 자랑 거리들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인생은 본래 유한하며 하나님이 주셔서 받은 것이고, 또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살아야 하기 때문에 자랑할 수 없으며 따라서
2) 하루 단위로 살고 매일의 생활을 충실히 하여야 하며
3) 15절 말씀대로 주님의 뜻에 부합하도록 살아야 하고,
4) 빠른 세월이므로 부지런히 선을 행하여야 한다(17절)고 하신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안개 같은 인생을 보람있게 살기 위하여 구원을 받아야 함은 물론 매일 매일의 생활을 오직 주님의 뜻에 따라서만 행하고 자기 뜻에 따라 허탄한데로 끌려가지 않도록 노력하시는 성도님들이 되시라고 이 말씀을 드렸습니다.
제49과 좋은 교회를 만드는 법 (엡 5:22~28) 목록으로
지금 읽으신 말씀은 남편과 아내로 구성된 가정이 서로 사랑할 때(아내는 남편에게 복종하고 남편은 아내를 사랑함으로) 행복이 있음 같이 하나님의 교회도 그런 성격을 띠고 있음을 말씀해 주신 것입니다. 32절에 보시면 “이 비밀이 크도다 내가 그리스도와 교회에 대하여 말하노라”하신 것이 바로 부부로 구성된 가정과 예수님과 교인으로 구성된 교회에 뜻있는 공통점이 있다는 것입니다.
1. 우선 이 말씀에서 가정의 행복은 아내가 남편을 존경하여 순종하고 남편이 아내를 사랑함으로 행복한 가정이 이루어진다는 것을 교훈 받으셔야 합니다.
2. 그리스도께서는 교회를 사랑하여 자신을 주셨고, 교회도 그 사랑에 보답하는 뜻으로 주님의 뜻에 전폭적으로 복종하는 교회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24~25절). 이 말씀은 예수님을 신랑 또는 남편으로, 성도를 신부 또는 아내로 비유하여 말씀하실 때 남편의 아내에 대한 사랑은 예수님이 이미 성도를 위하여 자신을 주신 것으로 성취하셨으므로 이제 남은 것은 성도가 신랑되시는 주님의 뜻에 복종할 것을 강조하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성도(교회)가 성경대로 살아야 할 의무를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렇게 될 때에 주님의 교회는 영광스러운 교회로 세워진다고 하셨습니다.
1) 하나님의 교회가 영광스러운 교회가 되려면
① 먼저 교인이 거룩한 성도의 단체가 되어야 하고, 이 거룩을 성취하기 위하여 물로 씻고 말씀으로 깨끗하게 하여야 합니다.
② “물로 씻는다”는 것은 육체의 정결을 뜻하고, “말씀으로 씻음”은 영혼 및 생활의 정결을 뜻합니다. 이 정결이란 부패의 요소를 없애는 것입니다(고후 7:1). 그럴 때에 주름잡힌 것이 흠이 없게 되고 거룩하게 되어 주님이 기뻐하시는 영화로운 교회가 되는 것입니다.
3. 이 시간에는 주님이 기뻐하시는 좋은 교회 만드는 법을 몇 가지로 말씀드리겠습니다.
1) 좋은 교회는 성경 말씀 중심에 서야 합니다. 바른 교리를 신봉하는 것이지요.
2) 예수님의 인격과 생활을 많이 닮아야 합니다. 주님을 닮은 성도가 얼마나 있습니까? 또 우리 자신이 예수님을 많이 닮았다고 생각하십니까? 따라서 저희들 자신부터 예수님을 닮는 일에 반성하며 많이 노력하여야 할 것입니다.
3) 자신의 정욕을 죽이고(갈 5:24), 주님의 뜻에 복종하는 것입니다. 내 뜻과 내 계획과 내 취미와 욕망을 십자가에 못 박고, 주님의 뜻을 위하여 복종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성도가 많을 때 그 교회는 좋은 교회가 됩니다.
4. 잘 알지 못하는 사람들은 교회를 외모로 보고 좋고 나쁜 것을 판단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예를 들면 건물이 크다든지 또는 사람이 많다든지 문화 생활이 앞선다든지, 인간적 자랑이 많은 것 등입니다. 그러나 이런 것은 좋은 교회 되는 기준이 아닙니다. 강조하는 뜻으로 거듭 말씀드리면
1) 우선 좋은 교회는 진리가 바르게 선포되어야 합니다. 진리를 이기주의에 이용하려 하지 않고, 진리 그대로를 나타내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축복만 나타내지 말고 저주도 나타내야 하는 것입니다. 신 27:11~26에 보시면 축복과 저주를 똑같이 하였습니다. 이렇게 좋은 교회는 진리대로 선포하는 교회요,
2) 하나님의 공의가 시행되는 교회입니다. 어떤 교회는 한 사람의 말이 법으로 여겨지는 교회도 있습니다. 이 때에 그 한 사람의 말이 진리에 부합되지 않아도 그대로 따라가고 노회나 총회도 이것을 말리지 못하는 경우에 그 교회는 공의를 상실한 교회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는 하나님의 공의로운 감시와 징책 아래 있는 교회이어야만 합니다.
3) 좋은 교회는 예수님 닮은 교인이 많아서 예수님의 향기를 많이 발하는 교회이어야만 합니다. 이것은 믿음과 사랑이 일치한 교회를 의미합니다. 믿음은 건전치 않으면서도 사랑을 보이는 교회가 있을 수 있습니다. 또 정통적으로 믿는다고 하면서 사랑이 부족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고로 이런 것들이 잘 조합된 교회가 좋은 교회인즉 좋은 교회로 육성시키는 성도님들이 되도록 크게 노력하시기 바랍니다. 우리 교회가 꼭 좋은 교회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제50과 감사하는 생활 (시 119:62~64) 목록으로
추수감사주일을 앞둔 주간이어서 “감사하는 생활”이란 제목으로 교훈을 받겠습니다. 저희들이 자칫하면 추수감사절을 헌금만 하는 절기로 아는 경우가 있습니다. 헌금 준비에만 마음을 쓰거나 부담을 느끼고 실제적인 감사의 마음과 생활은 멀어져 있는 경우가 있을 수 있는데 그런 식으로 감사절을 보내서는 안 될 것입니다.
1. 저희들은 우선 감사하는 마음을 풍성하게 가져야 하겠습니다. 이 감사하는 마음은 신앙적으로 깨달음이 없으면 가질 수 없습니다. 예를 들어 욕심이나 투기심을 버리지 못하고 현실 생활에 불만을 갖는다면 절대로 감사하는 마음을 가질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전능하신 하나님을 모시고 하나님의 무한한 긍휼을 깨달으며 소망을 가지며 고난으로도 유익을 주시고 범사를 복되게 인도하시는 하나님을 의지할 때에 감사한 마음을 가질 수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이번 감사 절기를 맞이하여 “내가 감사하는 마음을 갖는 사람인가 또는 범사에 긍정적이고 소망을 갖고 사는 사람인가”를 꼭 반성하여 어떤 환경, 어떤 일에서도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도록 노력하셔야 하겠습니다. 안된 일에도 희망을 걸고 감사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롬 8:28).
2. 감사한 일들을 발견하고 깨달을 줄 아는 성도가 되셔야 합니다.
1) 어떤 사람은 꼭 자기가 원하는 것이 성취되어야만 감사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내가 소원하기 전에 먼저 성취되어 있는 것을 깨달아 감사하는 지혜를 가지셔야 할 것입니다. 내가 재물을 취하기 전에 하나님이 만물을 주신 은혜를, 내가 지식을 취하기 전에 하나님이 건강 주신 은혜를, 내가 명예를 성취하기 전에 평화로운 생활을 하게 된 은혜를 감사할 수 있어야 하고, 또 신령한 은혜를 깨달아 감사를 드린다면 감사의 요소가 끊이지 않을 것입니다.
2) 그리고 성도는 작은 일에서도 감사를 발견할 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창문에서 시원한 바람이 들어올 때, 버스 안에서 빈 자리를 발견하였을 때, 우리 주위에 산이 있어서 등산을 즐길 수 있을 때, 휴식 시간에 차 한 잔을 마실 수 있을 때 감사를 느낄 줄 알아야 할 것입니다.
3) 한 마디 또 더 드린다면 환난이나 어려움 속에서도 감사한 일을 발견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유태인 학살 당시에 독일 감옥에서 죽을 고생을 하고도 건강하게 나온 유태인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에게 감옥 생활을 어떻게 하였느냐고 물었더니 자기는 감사하는 마음으로 지냈다는 것입니다. 감옥의 문틈으로 햇빛이 들어올 때, 감옥 땅 바닥에서 조약돌을 주웠을 때, 또 뚱뚱한 간수가 들어올 때에는(그는 마음이 좋았다 함) 감사를 느꼈다는 것입니다. 어떤 집사님의 남편이 자동차 사고를 당하여 부상을 당하고 차는 다 부서졌습니다. 그러나 죽지 않았으니 감사하고, 우선 과실이 없었으니 감사하고, 부서진 차량의 폐차 기한이 거의 다 되어서 감사하고, 그 일로 깨닫게 해주셔서 감사한 일도 있습니다. 이러한 생활이 바로 감사를 발견하는 생활임을 아셔야 할 것입니다.
3. 본문 말씀에서 시편 기자는 세 가지를 감사하였습니다.
1) “내가 주의 의로운 규례를 인하여 밤중에 일어나 감사하리이다” 하였으니 이 말씀은 “하나님의 의로운 규례” 즉 성경 말씀 주신 것을 감사한다는 것입니다. 인간 세계의 의로운 규례 즉 하나님의 말씀이 없다면 얼마나 답답하겠습니까? 그런데 하나님이 참으로 귀한 진리의 말씀을 주셨은즉 밤중에 잠을 자다가라도 그것을 묵상하면서 감사를 한 것이요,
2) 64절에서 “주를 경외하는 모든 자와 주의 법도를 지키는 자에게 동무가 되어 주시는 것”을 감사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성도와 주의 법도를 지키는 자를 가까이 하십니다.
3) 주님의 인자하심이 땅에 충만한 것을 감사한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의 율례 배우기를 사모한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감사하는 마음과 생활을 지키면서 감사절 예물을 드리는 저희들이 되셔야 하겠습니다.
제51과 성탄을 맞이하는 자세 (요 1:14, 3:16) 목록으로
이 시간에는 이번 성탄절을 어떻게 맞이할 것인가에 대하여 공부하겠습니다.
1. 요 3:16에서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다” 하셨으니까 우선 하나님의 사랑을 생각하셔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의 성격을 아가페란 말로 표현하지요. 이 사랑은 감히 인간이 모방할 수 없는 아주 절대적인 사랑입니다.
1) 죄인들을 버리시지 않고 불쌍히 여기신 사랑이요,
2) 죄인들의 죄를 용서하신 사랑이요,
3) 그 죄를 용서하시기 위하여 자기의 독생자를 희생의 제물로 보내주신 아주 큰 사랑임을 기억하셔야 합니다. 하나님의 이런 사랑을 저희들이 받지 않았다면 우리는 구원받을 수 없습니다.
2. “독생자를 주셨다” 하셨으니 이 독생자가 어떤 분인가를 알아야 되지 않겠습니까? 이 독생자는 말씀으로 존재하신 하나님의 아들로서 하나님과 꼭같은 권위를 가지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런데 그 하나님을 인간의 몸을 힘입혀서 이 세상에 보내신 것입니다. 말씀으로 존재하시던 하나님의 아들을 인간의 몸으로 이 세상에 오시게 하시니 그 분이 바로 예수님이고, 인성과 신성을 겸하여 오시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이 독생자를 이렇게 세상에 보내신 것은 예수님만 구원자가 되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하면 인간 중에 어떤 위대한 성인이 있었다 해도 예수님이 아니고는 인간의 죄를 대속할 구원자가 없기 때문입니다. 성탄절을 보내는 가장 중요한 요건은 예수님을 바르게 잘 아는 신앙을 가지셔야 하는 것입니다.
3. 사도 요한은 예수님을 보았을 때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하셨습니다. 사도 요한이 예수님을 직접 목격했을 때 그러하였던 것처럼 저희들은 이 성경을 통해서 믿음으로 예수님을 그렇게 볼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1) “말씀이 육신이 되셨다” 하심은 하나님의 독생자가 말씀, 즉 인격적 신성으로 하나님과 함께 계셨다가 사람의 모양을 힘입어 세상에 오신 것이요,
2) “우리 가운데 거하신다” 하신 것은 꼭 같은 사람으로 즉 유대인으로 탄생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누구나 다 그를 유대인 요셉의 아들로 알았습니다. 그러나 그 분을 하나님의 아들로 아는 사람은 많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임을 알리시기 위하여 많은 증거를 보여주셨습니다. 그 증거가 바로 여러 가지 이적을 행하신 것이고, 나중에 돌아가셨다가 다시 부활까지 하신 것입니다. 이런 증거가 아니면 누구도 믿을 수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믿을 만한 증거를 주시고 “믿으라”하시는 분입니다(동정녀 탄생은 감추인 증거임).
3) 사도 요한은 그 예수님의 모습에서 “하나님의 독생자의 영광이요”라고 하였습니다. 그 영광의 모습이 어떻게 나타났는지 모르나(성령이 비둘기 같이 그 머리에 임한 일도 있었지요) 범상하지 않은 사실을 믿음으로 느끼게 된 것입니다. 저희들도 그 때에 탄생하시고 33년을 사신 후 돌아가시고 부활 승천하여 하나님 우편에 앉으신 예수님을 영광스럽게 믿는 마음을 가지셔야 하겠습니다.
4) 그리고 그 예수님은 “은혜와 진리도 충만한 분”이심을 믿으셔야 합니다. 저희들이 받는 모든 은혜는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받는 것임을 아셔야 할 것입니다.
4. 마지막으로 성탄절에는 “저를 믿는 자마다 구원을 얻는다”는 말씀에 따라서 예수님이 오신 것이 “믿는 자의 구원을 위함”임을 아셔서 이 구원 운동(전도)에 적극 참여하는 사명을 가지고 성탄절을 지키셔야 합니다.
하나님의 사랑, 예수님을 아는 지식, 그의 은혜와 영광, 그리고 구원 사업을 위하여 충성할 결심을 갖고 성탄절을 지키시는 성도님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제52과 송구영신하는 신앙 (빌 3:13~14) 목록으로
오늘은 금년 마지막 구역 예배입니다. 금년이 다 가고 새해를 맞이 하려는 이 시기에 무엇을 하여야 되겠는가 하는 생각에서 “송구영신하는 신앙”이란 제목을 선택해 보았습니다.
1. 먼저 본문 말씀을 상고 하겠습니다 이 말씀은 바울 사도께서 로마 감옥에 계시면서 헬라 영지 북쪽에 있는 빌립보 교회 성도들에게 보내신 편지입니다. 이 말씀에서 바울 사도는
1)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않는다”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바울 사도가 로마 감옥에 들어가시기까지 하나님의 일로 충성한 것이 사실이지만 그것으로 만족하게 여기거나 일을 다 한 것으로 여기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 당시에는 감옥에 계셨지만 면회 온 사람들에게 전도할 수 있었고, 또 심문을 받으러 법관 앞에 나가서도 전도할 수 있었으며 갇힌 상태에서 기도로도 하나님의 일을 할 수도 있은즉 생명이 다 하기까지 할 일이 남았다고 하셨습니다. 저희들도 현재 할 일이 많지만 아직도 우리 앞에 할 일이 얼마든지 있음을 아셔야 합니다.
2)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린다”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과거의 역사를 잊으라는 말씀이 아니고, 자신이 일을 많이 하여 만족하게 생각하는 것이나 또 공력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들에 대하여 그것을 내세우지 않을 만큼 잊어버리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성도가 좋은 일을 많이 했어도 자신이 한 것이 아니요, 주님이 하신 것이기 때문입니다(고전 15:10).
3) “앞에 있는 것을 위하여 푯대를 향하고 좇아 간다”고 하신 것입니다. 앞에 있는 것이란 내세 천국에서 주시고자 예비하신 부름의 상을 의미하는 것입니다(부름의 상=부름 받고 천국 가서 받는 상). 바울 사도가 목표한 것은 내세에서 받을 상을 기대하여 준비한 것입니다. 이것은 세상의 특권을 멀리 하고 신령한 사명을 잘 감당하므로 예비되는 상급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연말을 당한 저희들도 이 말씀처럼 미래의 과제를 생각하면서 신령한 목표와 하늘의 상급을 위하여 새로운 결심을 하셔야 하겠습니다.
2. 송구영신을 위하여 무엇을 할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1) 지난 1년 동안 받은 모든 은혜를 감사하셔야 하겠습니다. 보호해 주시고 공급해 주시고 인도해 주신 은혜, 또 참아주시고 용서해 주신 은혜도 잊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자신과 가족들과 교회와 나라에 주신 은혜도 기억하시고 감사하셔야 할 것입니다.
2) 믿음 생활이 얼마나 발전하였나를 점검하셔야 합니다. 믿음 생활의 발전을 스스로 느낄 수 있어야 합니다. 1년 동안 성경을 더 배우셨다든지 주일 성수를 잘 하신다든지 헌금에 연약함이 많이 발전하였다든지 사랑하는 마음과 이해심이 넓어지셨다든지 하는 느낌을 가지셔야 이것이 바로 믿음의 발전을 이룩함이 되는 것입니다. 자신도 모르게 예수님 앞으로 더 접근하신 것을 느끼셔야 하는 것입니다.
3) 회개할 것이 없는가를 살피셔야 합니다. 절대로 죄는 명년으로 가지고 넘어가시면 안됩니다. 그것은 불행의 불씨를 갖고 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무엇을 반성할 것이 있는지요? 또 대인 과계에 있어서 화해하고 넘어가야 할 것은 없는지요? 이런 것들을 잘 반성하셔서 꼭 거리끼는 것을 청산하시고 넘어가도록 하시기 바랍니다.
4) 마지막에는 신년도부터 새롭게 기도할 제목들을 연구하시되
① 믿음 발전을 위하여 신령한 은혜를 사모하는 일,
② 생활의 발전을 위하여 계명을 더 잘 지키고 사랑을 더욱 실천하는 일,
③ 하나님의 일에 봉사를 더 잘 하기 위하여 계획하는 일을 꼭 시도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이것을 결심하는 시간부터 은혜를 주실 것입니다. 다니엘 선지자는 “기도의 결심을 한 때부터 은혜를 받았다”고 하였습니다(단 9: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