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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 서문
그것은 때로는 결말로 시작한다. 평생에 걸친 단편 소설에 대한 비굴한 사랑의 시작은, 온몸이 화들짝 놀라거나 충격을 받아 정신이 없을 정도의 내용이 담긴, 소설이란 작품의 마지막 구절에서 나올 수 있다. 선생님들은 이것을 알고 있다.―마침내, 다 큰 학생들이, “어떻게 내가 독자로서 성장했는가?, 모두 선생님들의 덕택입니다.”라는 이야기들을 들고 학교로 찾아온다는 것을-그리고 그래서 우리가 어렸을 때, 우리의 두뇌가 아직 말랑말랑하고 신선했을 때, 어떤 뜻 있는 선생님에 의해 모파상이나 오 헨리의 암웨이 판촉용 단편집을 선사받았을지도 모른다.
혹은 간혹 그런 일이 일어나곤 했다. 아직도 선생님들은 이런 소설들을 가르칠까? 혹은 지금은 모든 것이 바뀐 걸까? 학교에 다니는 아이를 둔 친구들은, 필수과목이란 제도가 생겨 교과과정에서 부드러운 소설류가 빠지고, 그 대신에 사실성이 날카로운 바위처럼 정열되고, 진실이 모든 것을 지배하는, 경직되고 더욱 공공연하게 진학지도적인 성격이 있는 논픽션의 영역으로 채워졌다는 것을 안타깝게 생각한다.( 네가 소설가라고 해도, 그 경우에 논픽션 작가들만이 독점한다고 느낄 수 있으며, 그런 특정한 견해에 정면으로 반대할 것이다.)
아마도 놀라운 결말을 가진 소설들을 계속해서 할당하면서, 우리 선생님들은 우리의 뇌 속에서 새로운 신경 경로를 만드는 기여를 했고, 어떤 측면에선 실재로 우리들에게 무의식적으로 충격적 결말에 대한 공동의 욕구를 만들어 냈다. 나는 내가 아주 어린 나이에 단편 소설에 빠졌던 것은, 사건이 끝날 때 반드시 들어있는 전율적인 충격에 맛 들린 탓도 있었다는 것을 확신하다. 즉 그리고 나서, 그 후에는 , Ginn 같은 출판사에 의해 출간되는(나는 비록 이 이름을 지난 수십 년 동안 생각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내 머릿속에서 끄집어내고 있다.) 책이나, <상상력의 길, 제 3판>(그래, 내가 만들어 낸 책 이름이지만, 어쩌면 실제로 존재한다.) 같은 책을 킁킁거리는 독자로 변신해서, 나는 신중하게 소설의 마지막에서 커다란 반전을 세밀히 조사하게 되었고, 거기에 틀림없이 그것이 있을 거라고 기대하게 되었다. 나의 수업동료와 나는 그런 결말이 반드시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고 믿었으며, 그것을 찾는데 병적으로 집착하였다. 마치 우리가 클러터 가족이 그들의 캔사스 집에 확실히 금고가 있었다고 확신했던, Truman Capote의 <차가운 피>에서 나오는 비폭력적인 어린이 버전의 킬러들이나 되는 것처럼. 놀라운 결말은 나에게는 소설을 기억하게 만드는 유일한 필수요소로 여겨졌다. 나는 여기에 강한 중독이 되었고 매번 소설 속에서 그것을 원했다. 나에게 그것은 독창적이고 필수적이며, 몹시 갈망하여 찾아 헤맨 특별한 맛이며, 말 그대로 약방의 감초와 같은 거였다.
그러나 물론 모든 것이 놀랍다면, 그 후엔 아무 것도 아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모두 단편 소설의 놀라움의 힘에 관해 교육받아왔기 때문에, 우리 클래스에서 창작 수업 과정에 썼던 단편소설들은, 아마도 지금은 오래된 학교 건물에서 석면이 제거되듯이, 교과과정에서 배제된 것 같고, 때로는 우리가 이미 읽은 소설류의 값싸고 게으른 모방을 꾀하는 것으로 여겨졌다. 나는 여러 명의 아이들이 자신들이 쓴 단편소설을 일어서서 읽은 것을 기억한다. 그것은 한결같이 넘쳐나는 액션과 긴장, 그리고 보르헤스 풍의 초현실주의가 가미된 것이었고, 마침내 마지막 줄에 와서는 “그 후에 내가 깨어나 보니, 모든 것이 꿈이었다.”는 황당한 결론으로 끝난다.
오우! 꿈이라고 했니? 선생님들은 꿈에 대해 관대하지만, 우리 다른 학생들은 신랄하고, 혹독한 비평가일 수 있다. 이러한 머리 굴리는 엔딩은, 우리에게 무엇을 원하고 무엇을 기대할 것인가를 가르쳤던 것뿐만 아니라, 우리가 원하지 않는 것 또한 가르쳤는데, 즉 놀라움을 위해 노력 없이 얻은 놀라움이라는 그것이다.
반면에 <매기의 선물>은, 뜻밖의 결말로 Night Shyamalan 상의 수상작인 점을 언급하지 않더라도 놀라운 결말 소설의 대표 소설이지만, 처음으로 나를 사로잡았던 것은 다소 덜 알려진 오 헨리의 <마지막 잎새>였다. 소설은 그린위치 빌리지에 사는 두 룸메이트 소녀의 이야기로 구성된다. 겨울이었다. 소녀 중 한 명이 결핵이라는 심각한 병에 걸렸는데 날이 갈수록 좋아지지 않았고, 그녀는 창문을 통해 보이는 길 건너 담쟁이덩굴을 보는 것에 사로잡혀 있었다. 날씨가 나빠질수록 그녀는 룸메이트에게 그녀의 운명도 담장이 잎새와 함께 할 것이라고 말했다. 마지막 잎새가 떨어지면 그녀 또한 죽을 것이라고 믿었다.
어느 날 밤 엄청난 바람이 불고, 아침이 되면 마지막 잎새가 달려있을 길이 없을 것이다. 한 잎도 남아 있지 않은 담장이 덩굴을 본다면 그녀가 삶의 의지를 잃게 될 것을 걱정하는 그녀의 룸메이트에게 ‘커튼을 올려줘!’ 라고 환자인 소녀가 부탁하였다. 그러나 커튼을 젖혔을 때, 한 장 남은 잎새는 여전히 덩굴에 달려 있었고, 마침내 소녀는 희망을 느꼈다. 얼마 후 열이 내려가고 그녀는 나아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녀는, 그녀가 그런 망상에 사로잡혀 있다는 것을 알았던 길 건너 사는 늙은 화가가, 폭설이 내리치는 밤에 나가서 그 잎새를 그렸고, 그것 때문에 그 자신은 폐렴에 걸려 죽고 말았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오! 정말 나는 주술적 사고와 죽음에 초점을 맞춘 이 소설을 정말 좋아했다. 나에게는 죽음도 자신이 통제할 수 있다는 개념은 아주 큰 그림이었다.- 즉 네가 바른 삶의 태도를 가지면 너는 죽음도 마치 호텔 방 안의 온도 조절기처럼 조절할 수 있다. 이 소설은 정말 감상적인 소묘이고, 여기에는 화가가 환자 소녀의 확신을 들었을 때 말하는 약간의 대화가 있다. “그 고약한 담장이 덩굴 잎사귀 하나가 떨어지는 것 때문에 죽는 바보천치가 세상에 어디 있단 말인가?”
당신이 마지막 잎새를 따라 읽다보면, 윌리암 시드니 포터가 그 전부터 고안했거나, 혹은 최소한 동시에 그 나머지를 생각해냈던, 당신이 지금 알게 된 그 결말에 이르게 된다. 결말이 없으면, 이야기는 흔들리는 다리에 의존하게 되며, 가장 약한 바람만 불어도 전체가 동명의 잎새처럼 날아가 버릴 수 있다.
그 뒤의 나의 책 읽는 삶은, 비록 스릴 넘치는 결말에 익숙해져왔음에도 불구하고, 내가 읽을 때 그것 이상을 요구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놀라움에 대한 관념이 전적으로 포기된 것은 아니었다. 대신에 반짝이고 윤기나고, 더 성숙한 변형이 요구되었다. 단순히 결말이 아니라 이야기 전체가 그 자체로서 결말의 기능이라고 여겨졌던 것을 떠맡을 수 있는 것도 가능하다. 나는 언젠가 누군가 한 작가를 의역하는 것이라고 들은 적이 있다.(도널드 저스티스라고 그녀는 생각한 것 같은데, 정확한 주석을 찾을 수는 없다.) 그녀는 모든 좋은 이야기 속에서, who said that in all good stories, someone needs to turn a corner, or a hair. 더 이상 공전의 히트를 바라지 않을 때, 독자는 굴복하고, 바로 그때 놀라움은 더 번창할 수 있다. 이 말은 더 이상은 당신은 긴장에 헐떡거릴 필요가 없고, 의심할 여지없이 그 전에는 몰랐던 곳에서 당신 자신을 찾을 수 있다는 의미이다. 당신이 기대하지 않았던 곳에서.
우리는 변화가 계속적으로 요구되고 숭배되는 시대에 살고 있다. 뉴욕 타임즈의 베스트셀러 리스트에는 “조언, 어떻게 하는가? 그리고 온갖 잡학지식”라는 항목이 있는데 처음 두 항목은 사람들이 지금 취하는 방법과는 다른 방식을 열심히 찾을 것을 제안한다. 반면에 세 번째 항목인 ‘잡학 지식’은 무엇을 제안하는지 잘 모르겠다. 나는 언젠가 내 심리치료사 친구에게 환자들이 진짜로 변하는지 물어본 적이 있다. 나는 그녀에게 노골적으로 물었다. “제발 말해줘. 다른 사람에게는 말 안 할 테니까.” 아마도 그녀가 내게 기대서 ‘아니, 아무도 진실로 변하지 않아’라고 비밀을 누설할 것으로 생각하면서. 그 변화라는 게 너무 멀리 있는 성배였다. 아마도 수정이라는 말이 더 좋은 단어일 것이다. 아마도 ‘미묘한 변화’란 말이 더 정확하게 그것을 표현할지도 모른다. 아마도 학습 경험이란 말이 실제로 심리치료에서 일어난 일을 묘사하는 가장 가까운 방법일지 모른다. 그러나 그녀는 이러한 질문에 가볍게 방어하기는커녕 내게 말했다. “물론이지. 그들은 변한다고.”
그래 좋다. 그들은 변할지 모른다. 심리 치료 과정에서나 인생에서. 그러나 나는 단편 소설에서는 인물들이나 혹은 그들의 상황이나 배경들이 바뀌는 만큼 자주 변한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이번 미국 최우수 단편선에서는 이야기들이 살아있고, 숨을 쉬고, 여러 번 이야기 속에서 어떤 종류의 전환이 나타난다. 내가 최종 목록을 만들어서 시리즈 편집자인 Heidi Pitlor와 상의한 후, 나는 내가 선택한 특별한 이야기들이라는 것이 무슨 의미를 갖는가에 대해서 생각하였다. 나는 그것들을 선택함에 있어 내가 말하고자 했던 것을 고려하였다. 어떻게 그들(내가 고른 소설들)은 내가 읽었을 때 그들이 가진 특별한 점을 나에게 호소했는가? 나는 숫자에 대한 엄청난 재능을 지닌 자폐증 환자에 대한 책을 읽은 적이 있다. 그녀에게는 숫자로 가득찬 한 페이지에서도 반복되는 형태들이 튀어나온다. 그녀는 어떻게, 왜 그것을 보게 됐는지 설명할 수는 없지만 그것을 보았다.
나 역시 같다. 엔트리에 올라 있는 소설들이 그 수준들이 매우 높아서, 내가 읽으면서 즐거웠던 훌륭한 여러 소설들 중에서 몇 자 적어 놓은 것 외에 무엇이 이 소설들을 선정하게 했는지 정확히는 말 할 수 없지만, 내가 선정한 작품들은 어떤 방식으로든 놀라움을 느끼게 되고, 그 놀라움이 적절하다는 것이다. 나는 무엇보다도 놀라움이 있는 소설들이 문장과 단어 사용에 있어서도 자주 놀랍다는 것이 사실이라고 생각한다. 거시 놀라움과 미시 놀라움의 작업이 함께 독창적이고 흥미진진한 중요한 것을 형성하고, 평범한 것들을 추방시키는 것이다.
창녀를 고용한 남자가 “낡은 가구를 놓고 싸우는 Judge Judy 쇼의 누군가처럼 조금은 절망적인 사람으로 묘사되는” 이번 호에 선정된 Leopoldine의 <Hog for Sorrow>에서도 이 점은 사실로 드러난다. 나는 이 소설을 읽으면서 웃지 않을 수 없었고, 그 순간에 어느 정도는 소설의 여백에 얼마나 사실적인가! 라고 주석을 달 수 있는 영어 선생님이 되고 싶을 정도였다.(절제되고 명쾌한 Leopoline Core, 그녀의 문장에 영어 선생이 필요하다는 의미가 아니다.) 내가 수년 동안 읽어오며 경탄했던 T. C. Boyle은 <우리가 인간이 아니라고?>의 첫 문장에서 “개는 마라스키노 술 같은 체리 색을 지녔는데, 국화꽃 아래 앉아서 그것을 조르고 있을 때까지 처음에 난 무엇을 입에 물었는지 알 수 없었다.” 라고 시작하며, 그의 소설 세계 속으로 독자들을 충격적이고 놀라움으로 끌어들인다.
채드 앤더슨은 <Maidencane>에서 강력하고 확실한 방식으로 이인칭 시점을 사용하는데, (The voice)가 맑고 리듬감 있는 읽기를 위해 사용되었다면, 시간은 갑자기 요동친다: “이십년이 지나갔다. 과거와 현재가 쿵 소리를 내며 함께 솟아올랐다.” Sonya Larson의 일인칭 서술은 위트로 생생하다. 유머가 이러한 인종이 다른 부부생활의 융화성에 대한 조사에서 유기적으로 작용한다. “나는 내가 슬펐을 때, 그리고 나를 좋아했던 매력적인 남자들이 슬펐을 때, Gabe Dove를 만났다.” 노이 홀랜드의 단편 <Tally>은 이번 선집의 다른 무엇보다도 절제된 단어 사용과는 거리가 멈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경제적일 뿐만 아니라 대담하기까지 하다. “그 남자, 그 남자들-조용한 남자, 죽은 사람-거북이처럼 신비한 누이가 있었다.” Jai Chakrabati의 <거대한 행복을 위한 작은 희생>은 욕망과 가정이라는 긴박한 상황 속에서 미묘하게 얽힌 감정의 드라마를 그리고 있다. ”니키는 사르마가 부성애에 대한 관념에 마음을 열었다고 확신하였는데, 그러나 이러한 기분 좋은 결론은 곧, 어떤 현실적인 의문을 떠오르게 했다.“ Fiona Maazel의 <Let’s go to the Videotape>에서는 매우 다른 형태의 부성이 존재하는데, 여기서는 아마도 작가 자신의 개인적인 체험이 매우 치열하게 깊숙이 박혀있는 것 같다. 마젤은 ”누가 인생의 전환점을 경험하고 있는 그의 아이를 촬영하지 않는가? “ 라고 묻는다. 짐 세퍼드의 <Telemachus>에서는 2차 세계대전 기간 중 폭풍우가 몰아치는 와중에서 ”우리는 얼굴을 내밀고 망원경을 폭풍이 이빨을 드러내는 사이로 비추며 교대로 경계근무를 섰다. “ 라고 표현하며 영국 잠수부대의 접전 상황과 대등하게, 단편 소설의 치열한 접전 상황 속에 작중 인물들을 배치시킨다. ” Eric Puchner는 소설에서 부모의 파혼 후에 홀로 남는 사춘기 소년을 다룬다. 소년은 ”그녀가 서츠 단추를 잘못 채워서, 나는 단추 사이로 총알 자국 같이 생긴 그녀의 배꼽을 볼 수 있었다.“ 라고 아버지의 여자 친구를 관찰한다.
각각의 이야기들이 각각의 놀라움을 가졌고, 그들 전체가 뚜렷하고 빼어난 콜라주이다. 책의 뒷 편에 실린 많은 스미스 앤더슨, 사루티 스와미, 리디아 콘크린, 레베카 마카이, 웰스 타워, 케이트린 호록스, 리 코넬, 마뉴엘 무뇨즈, 코린나 바라아타노스, 미쉘 헤르만, John Fulton, Sarah-lien Bynum, 헬렌 슐맨, 제니퍼 하이, 조안 프랭크, 브렛 앤토니 존스톤, 그리고 데이비드 버겐 같은 작가들의 작품들 또한 역시 그렇다. 이런 가운데서 이번 작품 같은 20편을 선정하는 것은 항상 어려운 일이고, 그런 일을 어떻게 하는지 독자들이 알아야할 일종의 기술인 셈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올해는 어쩌면 다른 방식 때문에 어려웠는지 모른다. 바로 이 대목에서 내가 이번 소설들을 어떤 식으로 읽었는지에 대한 이해를 돕고자, 매우 다른 종류의 놀라움에 대해 말하고 싶다. 일이 진행된 대로, 나는 2016년 대통령 선거 전에 첫 묶음을 골라야 했다. 내가 아는 모든 사람들처럼, 나도 엄청난 주변의 두려움과 공포가 뒤섞인 가운데 희망과 흥분을 느꼈다. 나는 밤에 뉴스를 보다가 그것을 끄고 한동안 멍하니 있다가 미국 최고 단편선 읽는 일로 돌아가곤 했다.
그리고 가장 길고도 지루한 시간들이 흐른 후에, 그 자체로 놀라운 결과를 가지고 11월 8일이 왔는데, 약간의 정도 차이는 있으나 많은 사람들에게 잘못된 것 같았다. 내가 보기에는 충격적으로 잘못되었고, 혼란스러울 정도로 잘못되었고, 상대방 실책으로 얻은 잘못된 것이었다. 이 글을 쓸 때도, 이러한 모든 감정이 그대로 남아있을 정도이다. 여기에 인생과 예술의 차이가 있다: 즉 인생에서는 잘못됐다고 느낄 놀라움이나 반전이 있을 수도 있고, 있지 않을 수도 있지만, 예술에서는 다소간 올바르다고 느낄 무엇인가가 있어야 한다. 비록 그 올바르다는 것이 불공평이나 비극이나 설명될 수 없는 것을 드러낼지라도. 놀라움이 드러난 후에도 인생은 계속될 수 있고, 비록 잘못된 인생일지라도 우리가 말한 놀라움이 점차 수그러들며, 여전히 세상은 굴러간다는 새로운 감정도 느낄 수 있다. 사람들은 알기를 원한다: 그것이 항상 이런 식으로 갈까? 세월이 약이 되서 다시 흐를 것일까? 우리는 다시 희망을 가질 것인가?
선거가 있던 날 밤 어느 순간에, 우리 집에서 나만이 그때까지 여전히 깨어 있었는데, 정말로 잠을 잘 수가 없었다. 마치 내가 불침번이라도 서는 것처럼. 나는 공식적인 결과가 나오길 기다리고 있었다. 그것이 확실히 어떻게 된 것인지 알게 되기를 기다리면서, 그리고 그 후 그것이 더 이상 이론이 아니고 현실임을 직시하기 시작하도록. 마지막 잎새가 담장이 덩굴에서 떨어지기를 기다리면서. 아파트에서 왔다 갔다 하면서, 내게 주어진 단편 소설들의 큰 파일들 사이로 헤매기 시작했다. 새벽 두 시에 나는 그것들을 읽으려고 했지만 잘 되지 않았다. 이것을 할 때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자, 그 즉시 곧 그것들을 옆으로 제쳐두었다. 그런데 언제가 그때란 말인가? 각각은 정성들여 쓰여 왔고 명령한다; 그리고 나는 이 선거 후에도 소설을 읽는 것이 절박한 행위로 남을지 의문이다. 그리고 또한 읽기와 짝을 이루는 소설 쓰기는 어떤 일이 발생할지 의문인 것이다.
단순히 “우리는 그 전보다 더 예술을 필요로 한다.” 라고 우리를 둘러싼 의문에 답으로 말하는 것은, 일종의 불만족스러운 답이고, 약간은 고상한 척 하는, 전체적으로는 진실이 아닐지 모른다. 그렇다. 우리는 전보다 더 예술을 필요로 한다. 하지만 우리는 예전에 예술이 행했던 같은 마법을,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현재에도 행해주길 원하고 있는 것이다. 지금 예술이 우리에게 주려는 마술이 무엇인가? 덩굴에 붙어 있는 잎새는 예술이 아니고 단순한 모방에 불과할 것인가? 거짓된 위안은 실재로는 그 누구의 생명도 구할 수 없고 사실 상 아무 쓸모도 없는 단순한 선함인가?
소설들이 선거 이후 수 주간 내 주변에서 쌓여있을 때, 나는 어떤 해답들을 발견했다. 내가 그 속에 완전히 파묻혀있을 때, 소설 속에서는 심오한 변화와 아름다움, 불가사의와 독창성이라는 찬란한 순간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선거는 나에게 이러한 특정한 나쁜 놀라움을 사라지게 할 것은 이 세상에 없다고 느낄 정도로 충격적인 것이었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았다. 비록 지금도 앙금이 남아있지만, 삶은 계속되는 것이다. 나는 정신을 산만하게 만들기 위해서가 아니라, 2016년에서 빨리 벗어나고 싶어서가 아니라, 표현하기는 어렵지만 다른 여러 이유를 위해서, 소설을 읽으면서 다시 소설이라는 샘으로 돌아왔다. 소설을 읽는 경험을 통해서 무엇을 얻게 되는지 당신이 정확히 안다면, 당신은 아마도 그것을 찾지 않을지도 모른다. 당신은 소설의 열린 독자가 되기 위해서, 흔쾌히 하는 것이 필요하다. 당신이 사랑하는 것에 투표하고, 그리고 그 결과를 기다리는 것. 당신은 과거의 독서의 경험에 신념을 지니고, 지금 현재나 미래가 어떤 암울한 모습을 취할지라도 묵묵히 계속 책을 읽어나가는 것이 필요하다. 그리고 당신이 한 번 읽기 시작하면, 당신이 비로소 절망을 날려버리기 시작했다는 것을 잘 알게 될 것이다. 그렇게 날려보는 것은 대포에서처럼 반드시 꽝하고 빠르게 날릴 필요는 없다. 작가의 특별한 맛과 느낌이 담긴 작품이 특별히 당신을 진수시켰듯이, 천천히 그리고 신중하게 하라.
죠셉 콘래드는 어떻게 훌륭한 예술이 “당신이 질문하기를 잊고 있었던 진리에 대한 일견”을 제공할 수 있는지에 대해 썼다. 올해는 내가 나쁜 놀라움이라고 생각한 와중에서도 그렇게 많은 소설들을 읽은 이상한 한 해였다. 그러나 진리에 대한 일견은, 당신이 찾으려고만 한다면 전과 다름없이 진열되어 있다. 그래서 나는 장막을 걷어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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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이번 서문이 역대 제가 번역한 서문 중 가장 어려웠던 것 같습니다. 잘 해석이 안되는 부분이 많네요. 몇 번을 고치고 다듬다가 지쳐서 그냥 올립니다. 완벽한 번역도 어렵지만 요 정도 해 놓고 다른 분들의 도움을 받는 것이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군요. 아직 연초 모임까지는 시간이 많이 남았지만 연휴 지나 차분하실 때 읽어보시고 많이 고쳐주시길 바랍니다.
2017년 BASS 난이 새롭게 추가되니 감회가 새롭습니다. 내년 한 해는 또 이걸 가지고 씨름하겠지요.
모두들 새해 복 많이 받으시고 건강하시길 기원합니다.
수고 많으셨습니다.
항상 서문이 젤로 어려운 것 같아요.
줄거리가 있는 것이 아니라 생각과 의견을 늘어 놓은거라
더 어려운 것 같습니다.
어떤 뜻 있는 선생님에 의해 모파상이나 오 헨리의 암웨이 판촉용 단편집을 선사받았을지도 모른다.....
암웨이의 끈질긴 판촉처럼 선생님들에 의해 강제로 읽게 만든..... 뭐 이런 내용이 아닐까요?
.( 물론 당신이 소설가가 아니라면 이러한 경우 논픽션 견습작가들이 사실은 문제가 없다고 느낄 수 있으며, 당신은 기꺼이 이러한 특정한 견해에 정면으로 반대할 것이다.)
이 문장은 완전 구어체 문장 같은데요, unless 를 앞문장으로 연결, 물론, 만약 그게 아니라면, 네가 소설가라 치면, 그 경우 .... 암튼 모임에서 더 토론해봐야 할 문장입니다.
we may be given~이 구체적으로 책을 준 게 아니라 그런 것들이 읽혀졌다는 뜻으로 볼 수 있겠네요.
@nicos 저도 미단언니의 의견에 동감인데요. unless 이하를 구어체로 봐야한다는..
--물론, 그게 아니라면, 당신이 소설가라 치면, 논픽션 전문가들이 진실에 관해 개뿔, 뭘 아느냐고 느낄 수도 있겠고, 이런 특정 견해에 기꺼이 정면으로 맞서고자 할 것이다.
@esprit 마자요. have no corner on truth라는 idiom의 뜻을 잘 몰라서 그런 오역이 나온 것 같아요. 이게 보니까 너만 진리를 독점하는 게 아니다는, 즉 너만 옳지 않다는 뜻인 것 같아요. 그렇게 보면
unless~even if~로 봐서
-네가 소설가라고 해도, 그 경우에 논픽션 작가들만이 독점한다고 느낄 수 있으며, 그런 특정한 견해에 정면으로 반대할 것이다.
이렇게 되야 하는 게 아닌가 하는....
마치 우리가 클러터 가족이 그들의 캔사스 고향에서는 절대적으로 안전했다고 ......고향집에 금고가 있을 거라는...
그렇군요. 오역같아요.
수고 많이 하셨습니다. 증말 쉽지 않네요. ㅠ
서두 부분 중예요...
나는 언젠가 누군가 한 작가를 의역하는 것이라고 들은 적이 있다.(도널드 저스티스, 그녀가 생각한 것 같은데, 정확한 주석을 찾을 수는 없다.) 그녀는 모든 좋은 이야기 속에서, who said that in all good stories, someone needs to turn a corner, or a hair. 더 이상 공전의 히트를 바라지 않을 때, 독자는 굴복하고, 바로 그때 놀라움은 더 번창할 수 있다.
--언젠가 나는 누군가가 어느 작가의 말을 옮겨놓은 것을 들은 적이 있다.(그녀는 도날드 져스티스라 생각하는 것 같았는데, 정확한 주석은 찾을 수가 없다.) 모든 좋은 스토리들 속에는, 누군가가 고비를 넘기거나, 놀라운 일에 말려들 필요가 있다.
더이상 압도적인 변화를 찾을 수 없다하더라도, 독자들은 승복한다, 그리고 바로 그때 감탄이 퍼져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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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cko shift는 작품 속에서의 변화를 이르는 것 같아요.
맞아요. 오역인 것 같아요. 저는 도널드 저스티스=그녀, 요렇게 생각했었어요. 아고... 좀 주의 깊게 봐야 하는 건데...
쉽지 않은 서문이셨다지만, 그 어느 해보다 소설에 대한 묶은 이의 고민과 소신이 명료하게 다가오네요. 니코스님의 번역이 일케 훌륭한 역활을 해주셨습니다.^^
역시 도움을 받으니까 많이 좋아진 것 같습니다. 그러나 아직도 결정적인 오역이 숨어 있을 것 같은 불안감이....
올해는 서문부터 오역 검토 함께 하고...좀 더 충실한 번역을 하는 한 해가 될 것을 기대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