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살 아이가 되어
월몽 김영철
내 나이 6살 아이가 되어 엄마 손에 이끌려 구미에 있는 외가에 왔던 기억을 아직도 간직하고 있다. 아침 일찍 고향 상주의 경북선 기차역을 출발한 나는 엄마의 손에 꼭 잡혀 김천역에 내렸다. 역대합실에는 손님들로 북적거렸고 한참 기다린 끝에 겨우 부산행 완행열차로 바꿔 탔다. 그런데 일반 객실이 아닌 화물칸이었다. 왜 엄마와 내가 그것을 탔는지 아직도 알 수 없지만, 우리 외에도 많은 손님이 함께 있었다. 아마도 일반객실에 손님이 꽉 차 발 디딜 틈조차 없어 할 수 없이 화물칸으로 유도하였는지도 모르겠다. 어찌 되었든 객실이면 어떻고 화물칸이면 어떠리. 가로 가든 모로 가든 서울만 도착하면 그만이었던 시절이었으니.
구미역에 도착했다. 서산으로 해는 늬웃늬웃 넘어가고 어둠이 어렴풋이 내려왔다. 역에서 원평동 외가까진 멀지 않았다. 외할머니는 중간 외삼촌이 모시고 있었다. 시장통에 있는 외삼촌 댁은 장사하셨기 때문에 상점과 살림집이 함께 붙어 있는 초가집이었다. 문은 여러 개의 불투명한 판자로 연결되어 있어서 집 안으로 들어가려면 문을 두드려 안에 신호가 전달되어야만 하였다. 안에서 누군가 나오는 인기척이 났다. 나의 외사촌들이었다. 뒤이어 외삼촌과 외숙모가 나타나 엄마와 나를 반겼다. 갑작스러운 우리의 방문에 모두 놀라는 표정이었다. 전화가 없어 미리 연락하지 못했으니, 당시로선 자연스러운 현상이었다.
외할머니 방으로 들어갔다. 엄마가 할머니를 뵙고 “엄마, 내가 왔어요.” 눈도 귀도 약했던 70대의 외할머니는 처음 그 소리를 듣고, 생시인지 꿈인지 분간 못 하는 모습이었다. 더욱이 희미한 등잔불로 어두컴컴했으니 더욱 알아볼 수가 없었으리라. “뭐라? 정순 애미가?” 할머니는 엄마를 부를 때 꼭 ‘정순 애미’라 칭하였다. ‘정순’은 나의 큰 누나이자 엄마의 맏딸 이름이었다. 외할머니의 목소리가 서서히 떨리기 시작하더니 이내 훌쩍거렸다. “아이고! 이게 얼마 만이냐? 정순 애미가 왔어?” 반가우면서도 믿기지 않은 듯한 목소리로 눈물을 흘리시는 모습을 보고 6살 나는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눈물은 너무 반가워도 흘린다는 사실을. “아! 할머니도 우시는구나…”
저녁 식사를 마치고 나니 캄캄한 밤이었다. 나와 엄마는 외할머니 옆에 자리를 깔고 누웠다. 고요한 밤이지만 시계가 없어 몇 시인지 몰랐다. 곧 잠이 들었고 눈을 떠보니 이튿날 아침이었다. 외숙모가 차려준 아침 밥상을 받았다. 할머니와 겸상이었다. 보리밥에 나물 반찬 몇 가지와 시래깃국이었다. 시장이 반찬이라 하듯 맛있게 먹었다.
중간 외삼촌 댁 맞은편에 큰 이모님이 살았다. 엄마만 제외하고 모두 같은 동네 원평동에서 살았다. 나의 엄마는 맏딸이고 위로 오빠가 1명 있었고 아래로 남동생 2명과 여동생 2명이 있었다. 그들은 한 동네에서 골목만 다를 뿐 옹기종기 모여 살았다. 그래서 맏이인 엄마가 외가에 떴다. 하면 외삼촌, 외숙모, 이모들은 자동으로 외할머니댁으로 모였다. 주목적은 물론 만나 인사를 나누기 위함이었지만, 언제 어느 집에 초대받아 식사하느냐를 정하는 것이기도 하였다. 다섯 집에 모두 가야 해서 외가에 오면 최소 5일은 머물러야 했다. 순서에 따라 밥을 먹으면서 이런저런 세상 살아가는 얘기를 나누었다. 반찬이라야 평소 먹는 것에다 계란찜이나 부침개 정도가 특식으로 추가되었다. 어른들끼리 담소를 나누는 동안 나는 사촌들과 땅따먹기나 제기차기, 딱지 따먹기 등으로 노느라 정신없었다.
2024년 10월 12일 아침, 나는 구미역에서 내려 6살 때의 추억을 소환하며 그 옛날 외가가 있었던 동네와 골목을 배회했다. 조부모와 외삼촌, 이모들이 살았던 집들은 흔적 없이 사라진 지 오래되었고 시대별로 유행했던 건물들이 빼곡히 들어서서 숨 쉴 공간조차 없었다. 간간이 오래된 기와와 슬레이트 지붕의 일부가 쓰러질 듯한 모습으로 서 있는가 하면, 단독주택과 연립주택의 유리창은 깨진 채로 빨간 스프레이로 ‘철거 대상‘이라 쓰인 채 서 있어 이곳이 재개발 정비구역임을 곧 알아차릴 수 있었다. 그나마 번듯하게 생긴 중고층 빌딩은 아직도 목숨이 붙어 있는지 사람들이 들락거리는 모습이 보였다. 길옆에 서 있는 전봇대를 이은 곳에는 ’원평2동 재개발 정비구역‘이라는 플래카드가 걸려있어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아직도 이곳을 떠나지 않은 사람에게 조속히 이사할 것을 권유하는 것으로 보였다. 주로 가정집과 상점이 혼재해 있지만 그중에서 간판이 많은 집은 점을 보는 집이었다. ‘보살‘ ’귀신 점집‘ ’00장군 모신 사당‘ ’이화선당‘ ’일정정사‘ ’토함사‘등등의 간판을 번듯하게 내건 점집들은 모두 싱싱하게 살아 있었고 그들이 모시는 신에 의해 가호를 받는 듯하였다. 주인이 떠나버린 어느 골목의 다 쓰러져 가는 기와집 안 마당에는 언제 심어졌는지 알 수 없는 감나무와 석류나무의 축 처진 가지에 열매가 주렁주렁 매달려 있는 모습이 지치고 처량해 보였다.
70여 성상 전만 해도 여기가 외가였고, 여기가 이모님 댁이었고, 여기가 외삼촌 댁이었는데 상상하며 둘러보았지만 여기가 거기 같고 거기가 여기 같았다. 70년의 세월은 옛 모습을 다 지워버렸다. 근대화와 산업화의 물결 속으로 모든 게 파묻혀 버렸다. 그러나 나의 6살 때의 기억은 지워지지 않는다. 어렸지만 나에겐 그때가 맨 처음 나의 의식 속에 박힌 외가였기에 이직까지 초롱초롱하였다. 종이와 연필을 꺼내 당시의 구미역을 중심으로 내가 활동했던 발자취를 그려 보았다. 구미역에서 내려 몇 발짝 앞으로 직진, 직진 후 좌로 그리고 우로 몇 발짝을 걸어갔겠지!
약 2시간 정도 동네 이 골목 저 골목을 걸으며 살폈다. 동네 한 가운데를 가로지르는 중앙시장 상인들이 가게 문을 열기 시작하였다. 9시를 조금 넘은 시각이었다. 나는 구미역으로 향했다. 대구로 가는 무궁화호 열차를 타기 위하여. 나의 짧은 추억 여행이었지만 70여 년 전의 6살이었다. 세월의 변천으로 그때 그 모습은 사라졌지만 내 머릿속의 추억은 생생하다. 나만이 간직하고 있는 아름다운 추억. 30분 걸려 대구역에 도착했다. 대구역 역시 나지막했던 역사(驛舍)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 나의 추억 여행은 계속될 것이다.
(2024. 10. 14)
첫댓글 일흔이 넘어ᆢ외갓집으로 초대해준 월몽ᆢ감사합니다.ᆢ세월이 잠깐 기억으로부터 떼어놀수 있어도 잊게할수는 없지요.ᆢ좋은 추억으로 불러주어서ᆢ감사드립니다.
옛 추억을 더듬어 보는것은 감개무량
하던군요.
나도 올 봄 시골 초등학교길과 인근 마을들을 걸어보았더니 너무 감동
이 커서 기행문으로 삼일회 밴드
에 게재했지요.
아름다운 추억은 각박한 삶에 넉넉한
여유로움을 주지요. 좋은글 감사드립
니다♡
월몽, 추억여행을 하셨네요. 추억은 그것이 힘들었던것이든 아름다운것이든 모두 아름다운 법이고, 그리운 것이지요. 나도 가끔 추억여행을 할때가 있지요. 힘들게 다녔던 고등학교 유학시절, 자취하던곳, 신문 돌리던 코스를 몇해전에 다시 가보았는데, 너무도 변하여알수가 없었던 기억이 생각나네요. 추억을 소환해주어 감사합니다.
외갓집에 대한 기억과 추억은 각별하지요. 월몽은 6살 때 기억을 소환하다니 대단합니다. 나는 초등학교 6학년 때 혼자 먼 곳 산촌시골로 외갓댁을 찾았던 기억이 새롭네요. 외갓댁이 워낙 외딴 곳이어서 거기 살던 서너집 사람들이 모두 도회지로 나가 지금은 아무도 살지 않는 산숲이 되었습니다~
멋진사랑24.10.14 21:59 새글
첫댓글 옛 추억을 더듬어 보는것은 감개무량
하던군요.
나도 올 봄 시골 초등학교길과 인근 마을들을 걸어보았더니 너무 감동
이 커서 기행문으로 삼일회 밴드
에 게재했지요.
아름다운 추억은 각박한 삶에 넉넉한
여유로움을 주지요. 좋은글 감사드립
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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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우11:16 새글
외갓집에 대한 기억과 추억은 각별하지요. 월몽은 6살 때 기억을 소환하다니 대단합니다. 나는 초등학교 6학년 때 혼자 먼 곳 산촌시골로 외갓댁을 찾았던 기억이 새롭네요. 외갓댁이 워낙 외딴 곳이어서 거기 살던 서너집 사람들이 모두 도회지로 나가 지금은 아무도 살지 않는 산숲이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