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 영의 개척자(靈의 開拓者)
사도행전 13:1-3
開拓云者, 在物的尤有明証, 自家之田地及所有, 欲爲賣食者, 必不免乞人, 欲取他而添益者, 必致富也. 富豪之子弟每化爲放蕩而落伍者何也? 無開拓之心而願見所有, 生病貧之心故耳. 貧困之子弟, 每有積益之心, 故己之分錢重於他人之巨金. 有所增益者, 有開拓之心也. 彼앵글색손人族, 卒業于大學時, 總長演說曰 爾不歸家, 但扛卒業證而出脚社會, 一年之來必得萬弗然後可爲英國人也. 甚哉英人之開拓之心, 李白工夫于山寺限定十年, 經幾年之後思念歸家, 至匡廬山下, 有老嫗磨鐵杵臼而曰 我欲作針, 李白聞而還入山中畢工云. 此戒其開拓心之不足也. 無此心者, 賣室賣土後至賣身而亡, 有此心者, 建室買土, 且欲建國而興也. 重言則無開拓心者, 破壞者也. 有開拓心者, 建設者也. 開拓者誰可證? 在歷史不必更言, 僉位倘知宗敎有此心乎? 無此心者無信心也. 飮酒賭博者無此心也. 絶欲就眞有此心也. 拜偶者無此心也, 退偶者有此心者何也? 信之事不如擊空也. 에셔與雅各一成一敗, 에셔以一器之鬻換長子之名分, 是無開拓者也, 雅各一器之鬻得長子之名分, 是有開拓心者也. 其開拓者必有武器, 一堅信不疑, 此信必兼知識, 先知田中之寶故欲放産而買田也. 先知市上眞珠, 亦欲放産而買珠矣. 然不可生濫欲矣, 濫敗, 발남欲取摩押之金而敗, 猶大欲取寡婦之金而敗, 故聖書戒生欲貪財矣. 故開拓必先言信者無此心之謂也. 信是宗敎偉力, 但取猶自天來之福. 世人不信, 敎人信之, 信之者成, 不信者敗, 今人但見目前, 目前不成功則失敗云, 此甚不然, 目前雖有失敗, 後有三十倍六十倍百倍之結果矣. 此所謂信也. 故堅信不疑而奮鬪者成功, 今人徒以不可信之事, 勞力但如樹風, 到老無成, 悲苦悲苦, 譬如種果, 種荊棘而望葡萄, 種蒺藜而望無花果, 終身徒勞, 終歲無成, 此理甚明, 故主以植物之眞理比之信仰, 故開拓者堅信必要. 二勇力不怠絶惡, 無勇者敗, 又如種穀, 害穀之物, 不可須臾存在也. 何故? 容赦則穀不能長故矣. 目中有芒則常容赦不援乎? 非但去惡有害也, 且於培養有力, 主曰父至今役事, 我亦役事, 此何等奮發也, 何等偉大也? 彼檐端之蛛, 日日結網, 朝朝結網, 余悶其飛虫之誤罹, 輒捲去不留, 明朝視之則如前結網, 且捲且結, 日日如是, 余終任之不捲, 乃知蛛蛛之勤而不怠, 人而可以不如蛛蛛乎? 彼溪流而海而流, 遇磯石則淙淙有聲終越, 不截而去, 若怒若忿, 若嘯若歌, 洩其不平而行, 悲苦悲苦. 三忍耐不變, 成功有遲速, 遲則改心, 人多病此, 主曰終忍得救, 又曰我道忍之道也云. 越王句踐以忍成功, 信者亦以忍成功矣. 伊太利人之格言曰 雖失盤指勿爲落心也. 我指尙存也, 此何等堅忍也? 余信仰耶蘇以後, 經驗非常, 遭遇亦非平坦, 非忍不可也. 故日日忍之, 年年忍之, 至于今日, 余之一生皆以忍以成之也. 信之後人不以人格視我, 亦不以學識視我, 當此 境遇, 欲與之談判, 而忍之非爲我也, 爲主也. 開拓者忍耐必要, 無忍而不能信, 又不能開拓也. 吾等欲爲開拓者乎? 必具以上三者而後可矣.
개척은 물질에 있어서는 분명한 증거가 있어야 합니다. 자기 소유의 토지나 물건을 팔아서 먹고 살려고 하면 반드시 거지 신세를 면하지 못할 것이고, 다른 사람들이 가진 것을 취하여 보태려고 하는 사람은 반드시 부자가 될 것입니다. 부호 집안의 자제들이 방탕하고 낙오가 되는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개척하려는 마음은 없고 가지고 싶은 것만을 원하게 되니 가난해 지려는 마음에 병들었기 때문입니다. 빈곤한 집 자제는 늘 쌓아두고 보태고 하려는 마음이 있어서, 자기가 가지고 있는 한 푼의 돈도 다른 사람이 가지고 있는 큰 돈보다 귀중하게 여기게 됩니다. 이런 사람은 더 보태려고 하는 자이므로 개척심이 있습니다.
저 앵글로 색손 민족은 대학을 졸업할 때 총장은 ‘그대들은 집으로 돌아가지 말고, 졸업장을 들고 사회에 나가서 앞으로 일 년 안에 만 달러를 번 연후라야 가히 영국 사람이라 할 수 있다’라고 연설하였습니다. 참으로 훌륭한 영국 사람들의 개척심입니다. 중국의 시인 이백(李白)이 십 년을 한정하고 산사(山寺)에 들어가서 공부를 하다가 몇 년 지난 뒤에 집으로 돌아가고 싶어서 돌아오다가 광려산(匡廬山) 아래 이르니 어떤 늙은 할머니가 쇠로 된 방아공이를 갈면서 이르기를 ‘이것으로 바늘을 만들려고 한다’고 하였다고 합니다. 이백은 그 말을 듣고 도로 산으로 들어가서 공부를 끝내었다고 합니다.
이는 개척심이 부족한 것을 경계한 것입니다. 이와 같은 개척심이 없는 사람은 집을 팔고 땅을 판 뒤에 자신의 몸까지 팔아 망하고 맙니다. 반대로 이 개척심이 있는 사람은 집을 짓고 땅을 사고 또한 나라도 세워 일으키려고 합니다. 되풀이해서 말하자면 개척심이 없는 자는 파괴자이고, 개척심이 있는 자는 건설자입니다. 개척자를 누가 증명할 수가 있습니까? 역사에 있는 것은 다시 더 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여러분들은 혹 종교에도 이런 개척심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까? 이런 마음이 없는 자는 신앙심도 없습니다. 음주하고 도박하는 자는 이 개척심이 없습니다. 욕심을 끊고 진실을 향하여 나가는 자에게는 개척심이 있습니다. 우상을 숭배하는 자는 이 마음이 없으며, 우상을 물리치는 사람은 이 마음이 있습니다. 왜 그렇겠습니까? 신앙의 일은 허공을 치는 것과 다릅니다. 에서와 야곱 중에 하나는 성공하고 하나는 실패하였습니다. 에서는 한 그릇의 죽으로 장자의 명분과 바꾸었으니 이는 개척심이 없는 자이고, 야곱은 한 그릇의 죽으로 장자의 명분을 샀으니 이는 개척심이 있는 것입니다.
그 개척자에게는 반드시 무기가 있습니다. 하나는 굳은 신앙으로 의심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 믿음은 반드시 지식을 겸합니다. 먼저 밭 가운데 있는 보물을 알고서 재산을 팔아 그 밭을 사려고 하는 것입니다. 먼저 시장에서 파는 물건 중에 진주가 있는 것을 알고 역시 재산을 팔아 그 진주를 사려고 합니다.
그러나 본분에 넘치는 욕심을 가지면 아니 됩니다. 넘치면 실패합니다. 발람이 모압의 돈을 가지려다가 실패하였고, 유다가 과부의 돈을 가지려다가 실패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성경>에 욕심이 생기는 일과 재물을 탐내는 것을 경계하였습니다. 그래서 개척을 말하는데 신자가 이 개척심이 없음을 반드시 먼저 말하는 것입니다. 믿음은 종교의 위력으로써 단지 하늘에서부터 내려오는 복을 취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세상 사람들은 믿지 않고 교인은 믿습니다. 믿는 자는 성공하고 믿지 않는 자는 실패합니다.
오늘 날 사람들은 다만 눈앞에 있는 것만 보는데 눈앞에서 성공하지 않으면 실패하였다고 이릅니다. 이는 매우 잘못입니다. 눈앞에서 비록 실패하였더라도 뒤에 삼십 배, 육십 배, 백배의 결과가 있습니다. 이를 믿음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단단히 믿어 의심치 않고 분투한 자는 성공합니다. 오늘날 사람들이 오로지 믿을 수 없는 일을 가지고 노력하기를 나무에 부는 바람을 잡는 것 같이 하므로 늙을 때까지 성공하지 못합니다. 슬프고 괴로운 일입니다. 마치 과일을 심는데 가시넝쿨을 심어놓고 포도가 열리기를 바라는 것 같고, 찔레를 심어놓고 무화과가 열리기를 바라는 것과 같아 한 평생 헛된 노력이 되고 한 해가 끝나도 이루어지는 것이 없게 됩니다. 이 이치는 매우 분명합니다. 그래서 주님은 식물의 진리를 믿음에 비유하였습니다. 그러므로 개척자는 굳은 신앙이 필요합니다.
두 번째로, 용감한 힘으로 악을 끊어버리는데 게으르지 말아야 합니다.
용기 없는 자는 실패합니다. 이는 또한 곡식을 심는 것 같아서 곡식에 해로운 물건은 잠시도 그냥 두어서는 아니 됩니다. 왜 그렇겠습니까? 그것을 용서해주고 그냥 두면 곡식이 자랄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눈 안에 가시를 그냥 두고 뽑아내지 않겠습니까? 악을 제거하는데도 해로울 뿐 아니라 농사를 배양하는데도 힘을 써야 합니다.
주께서 ‘아버지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고 하였는데, 이 얼마나 분발하는 말이며 얼마나 위대한 말입니까? 저 처마 끝에 거미는 날마다 거미줄을 치고, 아침마다 거미줄을 치는데, 나는 날벌레가 걸리는 것이 안타까워 날마다 다 거두어 버렸습니다. 그러나 다음날 아침에 보면 여전히 줄을 쳐 놓았습니다. 걷고 치기를 날마다 반복하다가 나는 마침내 내버려 두고 거두지 않으면서 거미가 부지런하고 게으르지 않음을 알았습니다. 사람이 되어 저 거미만도 못하여야 되겠습니까?
저 시냇물은 흘러서 바다로 갑니다. 돌을 만나면 졸졸 부딪히는 소리를 내다가 마침내 그 돌을 넘어서 끊임없이 갑니다. 그 소리는 성내는 것도 같고, 분한 것도 같고, 휘파람 소리도 같고, 노래 소리도 같기도 하며 평탄하지 못한 곳을 새어 나와 흘러갑니다. 슬프고 괴로운 길입니다.
세 번째는 인내를 가지고 변하지 말아야 합니다.
성공에는 늦고 빠름이 있어서 늦으면 마음을 바꿉니다. 사람들은 이 병통을 가진 자가 많습니다. 주님은 ‘끝내 참으면 구원을 얻는다’고 하셨고, 또 이르기를 ‘나의 도는 참는 도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옛날 중국 춘추시대 말기에 월나라 왕 구천(句踐)은 와신상담의 인내로써 성공하였습니다. 신자도 역시 인내로써 성공합니다. 이탈리아의속담에 ‘비록 반지를 잃었더라도 나에겐 손가락이 있어 낙심하지 않는다’라고 하였는데, 이 얼마나 단단한 인내입니까?
내가 예수를 믿은 이후 경험한 일이 평범하지 않았고, 내 앞에 닥친 경우도 평탄하지 않아서 인내가 없으면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날마다 인내하고, 해마다 인내하여 오늘까지 이르렀습니다. 나의 일생은 다 인내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신앙을 가진 뒤에는 사람들이 나를 인격적으로 보지 않았고, 역시 학식 있는 사람으로도 나를 보지 않았습니다. 이런 경우를 당하여 그들과 함께 담판하는데 인내를 가지는 것은 나를 위해서가 아니고 주님을 위해서입니다. 개척자는 인내가 필요합니다. 인내가 없으면 믿을 수가 없습니다. 또한 개척할 수도 없습니다.
우리들은 개척자가 되려고 합니까? 그러면 반드시 위의 세 가지를 갖춘 뒤에 할 수가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