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 신앙의 실추(信仰失墜)
누가복음 7:19
盖人信仰難得而易失也. 余每見人信仰有各不同也, 或爲愈病而信, 病愈則不信, 或爲結婚而信, 婚後不信, 或爲得職而信, 得職則不信, 或爲入學而信, 退校則不信, 此等皆非眞信也, 皆爲境遇而信也. 信已久稍得眞理, 或得聖神感動, 若一言不合, 怒氣相加, 棄敎會如弊屣, 此非意志的信仰也, 乃感情的信仰也. 感情好則信, 不好則不信, 如沙上之屋, 非盤石之屋也. 其次有各種之信, 不可枚擧也. 今言요한之信, 其人格高尙, 有堅確不動之性, 不爲外物搖動. 且見聖神, 如鴿降于主之上, 卽認以메시야確信不疑, 而今在獄中困苦, 必將死刑, 乃發懷疑, 遣徒質問也, 以若요한偉大, 今發疑惑之言, 盖人心易動而難制, 雖聖人亦不免也. 主亦曰此盃可離則離之, 然惟從主意而行之也. 孔子亦曰 天喪余, 今요한在獄, 有二種難事, 一死期將至也, 二信條未成也. 直言猶王之前, 王必不宥, 必宣死刑也. 吾一死則知我者誰也, 繼我者誰也? 死不關心, 然最關心者, 自己預言當應於何地也. 요한之心, 彼若救主則必救我出獄, 其權自在, 何故棄我如弊屣也? 漸次心灰, 我所信者必虛耶? 此時요한不在靈魂, 必在肉身也. 若在靈則觀主之事業, 非靈不能. 必識主矣. 今在肉故但思肉身之苦痛, 而靈的易爲忘失也. 在肉者恒思肉事, 故保羅曰 肉思不能悅上帝云, 誠哉是言也! 肉之事事皆逆靈, 不能成靈的, 雖요한之信仰, 在肉故失墜矣. 故人恒在靈而後可以保信仰矣. 人常在肉, 故彼不愛我我怒之, 彼不助我我怨之, 隨風逐浪, 但世欲之人而已, 靈的毫不明見矣. 요한前見聖鴿者靈也, 直言猶王之前者亦靈也, 爲直言而入獄不悔者亦靈也. 今何綿弱生怖, 反不如前日之勇敢也? 但居肉而不思靈故耳. 由此觀之, 肉者何等綿弱之物不言可知也.
신앙은 얻기는 어렵고 잃기는 쉽습니다. 사람들의 신앙이 각각 다른 것을 나는 늘 봅니다. 어떤 이는 병을 낫기 위하여 믿다가 병이 나으면 믿지 않고, 혹은 결혼을 위하여 믿다가 혼인이 끝나면 믿지 않으며, 혹은 직장을 얻으려고 믿다가 직장을 얻으면 믿지 않고, 어떤 이는 입학을 위하여 믿다가 학교를 끝내면 믿지 않습니다. 이런 것들은 모두 참된 믿음이 아닙니다. 다 자신이 처한 경우를 위하여 믿은 것입니다.
신앙을 오래 가져서 진리를 조금 얻고, 혹은 성신의 감동을 받았다가도 말 한 마디라도 맞지 않으면 화를 내며 떠들다가 교회를 버리기를 다 떨어진 신발 버리듯 합니다. 이는 의지적인 신앙이 못 됩니다. 바로 감정적인 신앙입니다. 감정에 맞으면 믿다가 틀리면 믿지 않게 되니 이는 마치 모래 위에 지어놓은 집과 같고 반석 위에 지은 집이 못 됩니다. 이러한 각종 신앙을 일일이 다 예로 들 수가 없습니다.
요한의 믿음에 대해 말하겠습니다. 그는 인격이 고상하고 튼튼한 성품을 가져 바깥의 물질에 의하여 움직일 수가 없으며, 또한 비둘기 같은 성신(聖神)이 마치 비둘기가 예수님의 머리 위에 내리는 것을 보았습니다. 곧 메시아를 확실히 믿고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옥중에 있으면서 고통을 받게 되고, 사형이 내려지려고 하자 그의 마음에는 회의가 생겨났습니다. 그리하여 제자를 보내서 질문을 하였습니다.
요한 같이 위대한 사람도 의혹의 말을 하게 되니, 대체로 사람의 마음은 움직이기 쉽고 제어하기 어려운 것은 요한 같은 성인도 역시 어려웠던 것입니다. 주님도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라고 하였습니다. 공자도 사랑하는 제자 안연의 죽음을 보고 ‘하늘이 나를 버렸다’고 하였습니다.
지금 요한이 옥에 갇혀 있는데 두 가지 어려움이 있었으니 첫째는 사형이 장차 다가오는 것이고, 둘째는 신조가 이루어지지 않는 것입니다. 유대왕 앞에서 직언(直言)을 하면 왕은 용서하지 않고 반드시 사형을 선포하는 것인데, ‘내가 한번 죽고 나면 나를 알아줄 자가 누구이며, 나를 계승할 자가 누구인가’하는 것입니다. 죽음에 관심이 없다 하더라도, 가장 관심되는 것은 자기의 예언이 마땅히 어디에 이루어 질 것인가 하는 것이었습니다.
요한의 마음은 ‘예수가 만일 구주시라면 반드시 나를 구하여 출옥시킬 것이고, 그러한 권력을 갖고 있을 터인데 무엇 때문에 나를 헌 짚신짝처럼 버리는가.’라는 것이었습니다. 점차 마음이 타 들어가게 되니 ‘내가 믿은 것이 전부 헛일이 되고 마는가?’ 하였습니다. 이때 요한은 영혼에 있지 않고 육신에 있었습니다. 만일 영혼에 있었다면 주의 사업을 보았을 것입니다. 영혼이 아니면 주를 알 수 없습니다.
지금은 육신에 있기 때문에 다만 육신의 고통만 생각하고 영적인 것을 쉽게 잊어버린 것입니다. 육신에 있으면 늘 육신의 일만 생각하기 때문에 바울이 ‘육신의 생각으로는 하나님을 기쁘게 해 드릴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이 말은 참으로 진실한 말입니다. 육신의 일은 영적인 일을 거스릅니다. 영적인 것을 이루지 못하면 비록 요한 같은 신앙으로도 육신에 있기 때문에 실추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은 영적인 일이 이루어 진 후에라야 가히 신앙을 보존할 수가 있습니다.
사람은 늘 육신에 있으므로 저 사람이 나를 사랑해 주지 않으면 내가 성을 내고, 저 사람이 나를 도와주지 않으면 원망하게 됩니다. 바람 부는 대로 물결 따라 흘러가는 세상의 욕심을 가진 사람일 뿐입니다. 영적인 것은 털끝만큼도 볼 수 없는 것이 분명합니다.
요한이 전에 비둘기 같은 성신을 본 것은 영이었고, 유대왕에게 직언한 것도 역시 영이었으며, 직언 때문에 감옥에 들어가서도 후회하지 않은 것도 역시 영이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와서 왜 솜처럼 약해져서 두려움이 생겼고, 반대로 지난 날 용감하던 기운은 어디로 간 것입니까? 다만 육신에 거하고 영을 생각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로써 육신이 얼마나 연약한 것인가를 말하지 않아도 알 만합니다.
마태복음 5:13-16
강성주(姜星周)
7월 22일 (주일오전)
余年幼沒覺, 而讀聖書, 甚覺自小之嘆, 又讀太十六章 二十六절, 若得天下, 而失或生命, 則何益之有也? 此言最要也. 余之最要者 何也? 非金錢, 非名譽. 余立于此地, 亦生命也. 宇宙間萬物, 皆有生命, 故生命最貴也. 然人皆不知其貴, 而棄其生命, 如草屣也. 古哲人中 에느카言曰 人生卽戰爭之場也. 此言亦有眞理. 人類刱生之後, 人類之勞力, 何等激然, 皆戰爭也. 人欲取財欲富者, 亦戰爭, 人欲得學識, 一生勞力者, 亦戰爭. 此非自今日也, 自古已然. 今朝鮮之人生活, 皆平安乎? 其答皆未安也. 食足 食不足, 故非戰爭而勝利, 則不可. 金錢獨不能滿足其生活也. 主曰 非但以飯而生也. 此但字, 深有意味也. 余下釜山, 後村有一屋幾覆, 有子五人, 不似人類也. 朝鮮之生, 皆如是也. 人有希望, 人各有異, 然欲平安之生, 人皆所願也. 自王至乞人, 皆有此望. 於現在欲向上, 余遊學東京者, 亦欲生也. 人皆有此欲, 不避風雨, 欲全此希望, 國家亦然, 英美日伊等國, 皆欲得此望, 故世界平和, 只言語而已也. 人皆有憂患, 何以則平安也? 此何以二字, 實人類之欲也. 至下關驛, 朝鮮三十人上車而哭. 問之則 我子在北海道, 而欲訪見之, 未見而還也云. 有三十歲婦人言, 我至福岡縣, 失敗而歸, 又至釜山驛. 有靑年痛哭, 我至日本勞働而發病, 欲受手術, 而今日我最終日也. 人見此等之慘狀而無不發悲也. 馬太五章 十三절 至十七절, 吾信者 何以爲信者也? 須禮拜祈禱. 데살前一章 三절. 實狀吾人之狀也. 隨其力而實行也. 此有三種訓戒, 一信而行, 二愛而勞, 三忍而望也. 今朝鮮人之國, 雖如是慘酷, 而吾等若行此三訓, 則可以得慰矣. 人生之慰, 不但在必飯, 亦在主言, 吾等服佩主訓, 力及則實行, 信仰之益在此也. 若以禮拜, 徒行祈禱爲信仰, 則誤解甚矣. 信仰在實行主訓之萬一耳. 今言文明, 或野昧者何也? 行文明者, 文明人也, 行野昧者, 野昧人也.
나는 나이 어리고 지각이 없어서 성경을 읽어도 스스로 작아지는 한탄을 많이 느낍니다. 또 마태복음 16장 26절을 읽으면서 ‘만일 천하를 얻고도 혹 생명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할 것인가’라고 하는 이 말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였습니다. 내가 가장 중요하다고 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금전도 아니고, 명예도 아닙니다. 내가 이 땅에 살아 있으니 역시 생명입니다.
우주 만물은 다 생명이 있기 때문에 생명이 가장 귀중합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모두 그 귀중함을 모르고 생명을 마치 헌 짚신처럼 버립니다. 옛날 철학자 중에 에느카는 ‘인생은 바로 전쟁터와 같다.’고 하였습니다. 이 말에는 진리가 있습니다. 인류가 최초로 태어난 후로 인류의 경쟁이 얼마나 격심하였습니까? 모두가 전쟁이었습니다. 사람이 재물을 얻어 부자 되려는 것도 전쟁이고, 학식을 얻으려고 일생동안 노력하는 것도 전쟁입니다. 이러한 것들은 오늘에 시작된 것이 아니고 옛날부터 이미 그러하였습니다.
지금 조선 사람의 생활은 다 평안합니까? 그 답은 모두 편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먹는 것이 풍족합니까? 먹는 것이 부족하므로 전쟁을 하여 승리하지 않으면 아니 됩니다. 금전만으로는 그 생활에 만족할 수가 없습니다. 주께서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다’고 하였는데, 여기서 다만의 뜻인 ‘但’(단) 자에 깊은 의미가 있습니다.
내가 부산에 내려갔었는데 후촌(後村)마을에 거의 쓰러져가는 집이 있고 그 안에서 다섯 명의 자식을 데리고 사는 사람을 보니 사람 같지 않았습니다. 조선 사람들의 생활이 다 이러합니다. 사람은 희망이 있어야 하고 그 희망은 사람에 따라 달라야 하지만 평안하게 살고 싶은 생활은 모든 사람이 같습니다. 왕으로부터 걸인에 이르기까지 다 이런 희망을 갖고 있습니다.
현재의 생활을 향상시키고 싶어서 내가 동경에 유학한 것도 살고 싶어서 그랬습니다. 사람은 모두 이러한 욕망을 가졌으므로 비바람을 마다하지 않고 노력하여 이 희망을 온전히 성취하려고 합니다. 국가도 그러합니다. 영국, 미국, 일본, 이탈리아 등이 모두 이 희망을 차지하려고 하기 때문에 세계의 평화는 다만 말뿐입니다. 사람은 모두 근심걱정을 가지고 있습니다. 어떻게 해야 평안해지겠습니까? ‘어떻게 하여야’의 뜻을 가진 ‘하이(何以)’ 이 두 자가 실로 인류의 욕망입니다.
내가 일본의 하관역(下關驛)에 이르니, 조선 사람 30 명이 차에 올라서 울고 있었습니다. 그 이유를 물으니 ‘자식이 북해도(北海道)에 있어서 찾아갔으나 보지 못하고 돌아온다.’는 것이었습니다. 30세라고 하는 부인은 ‘나는 복강현(福岡縣)에 갔다가 실패하고 돌아온다’고 하였습니다. 내가 또 부산역에 이르니, 청년이 울고 있었는데 그는 일본에서 노동을 하다가 병이 나서 수술을 받으려고 하는데 오늘이 자기의 마지막 날이라고 하였습니다. 사람들은 이러한 참상을 보고 슬퍼하지 않는 이가 없었습니다. 마태복음 5장 13-17절에 우리 신자는 어떻게 하여야 신자라고 할 수 있습니까? 모름지기 예배와 기도를 해야 합니다. 데살로니가전서 1장 3절의 실상은 우리의 모습입니다. 힘써 실행하여야 합니다.
여기에 세 가지 훈계가 있으니, 첫째 믿고 행하고, 둘째 사랑하고 수고하며, 셋째 인내하며 바라는 것입니다. 지금 조선 사람의 나라는 비록 이와 같이 참혹하지만 우리가 이 세 가지 훈계를 실행한다면 가히 위로를 얻을 것입니다. 인생의 위로는 다만 밥만 먹는데 있는 것이 아니고 역시 주의 말씀에 있습니다. 우리가 주님의 훈계를 마음으로 복종하여 힘이 닿는 데까지 실행하면 신앙의 유익함이 여기에 있습니다. 만일 예배에 있어서 그냥 기도를 행하는 것으로 신앙을 삼는다면 심히 잘못된 것입니다.
신앙은 주님의 가르침을 만분의 일이라도 실행하는 것입니다. 지금 문명이라고 하는 것과 또는 야비하고 우매하다[야매野昧]고 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문명을 실행하는 자는 문명인이고 야비하고 우매한 일을 행하는 자는 야매한 사람입니다.